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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거짓

아빠와 함께 2024. 5. 20. 23:23

이미 인간은 따질 필요도 없이 거짓입니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롬 3:4) 즉 거짓되지 않는 자들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이 무슨 시도든 한다는 것은 내부적으로 품고 있는 거짓이 바깥으로 발휘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곧 인간들의 거짓된 내부성이 실제로 겅험으로 전환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 들어오려면 바로 우리가 남들을 속이고 그리고 거짓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을 하고 성경 속에 들어와야 돼요, 우리 자신이.

 

제사법이 완성이 되었다는 말은 제사제물이 인물로 바뀌어서 성취되는 겁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나이까”(시 22:1) 즉 예수님의 고통을 모르는 것이 곧 거짓입니다. 이 고통으로 인하여 성도는 죽음에서도 건짐받습니다.(시 30:3)

 

하나님의, 예수님의 고통을 모르는 게 거짓이에요. 자기 고통에 정신 팔려있는 거, 이게 바로 거짓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지만, 거짓된 자들을 통해서 무엇이 뒤바뀌어 있냐면, 복과 저주가 뒤바뀌어 있습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복이라는 것은 내가 되고 싶은 것이 복이라고 여기거든요. 하나님과 인간 쪽의 복과 저주가 완전히 바뀌어 있기 때문에 내가 되고 싶은 것을 해주지 않는 게 복이고 내가 되고 싶은 것이 바로 저주가 되는 겁니다.

 

 그 ‘육’이 있는 그대로 성경 속에 “들어와! 그냥 들어와!” 육으로 그냥 들어오라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느냐면

‘육’의 모습을 제대로 보려면요, 오르막길에 구슬 주머니 가지고 가다가 구슬 주머니가 한 번 터져보세요. 구슬이 밑으로 막 내려가잖아요. “어어어어!” 그때는 정신없이 주워 담잖아요. 그게 ‘육’이에요. 내가 평생 끌어 모아놓은 것 밑에 굴러가면 그거 허겁지겁 주워 모으는 것 그게 ‘육’이에요. 어른도 애도 예외가 없습니다.

본인이 구슬 주머니고요. 내가 나 됨에 의해 내가 귀히 여겼던 구슬들 담아놓고 사력을 다하여 그것을 지키는 것 그게 ‘육’입니다. 그게 거짓된 거예요.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존재 뿌리를 거짓에다가 딱 꽂아놓고 잘 될 거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악마는 참말 외에는 할 줄을 몰라요. 거짓말을 할 줄 모릅니다. 어디에서? 인간세계에서. 인간세계에서 참 말하는 것은 악마밖에 없어요.

그러면 반대는 뭐냐? 인간 세계에서 거짓말만 하는 것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어릴 때부터 어떤 타인에 대해서 호감을 느낄 때는 그 사람이 내 마음에 드는 이미지를 내가 채택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에요. 내게 기분 좋게 하는, 내가 마음에 드는 이미지를 가진 자에게만 내가 손을 내밀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예수 믿는다는 것만큼 거짓말이 없어요. 그러니까 성경에 들어올 때는 예수 안 믿고 들어와야 된다니까요. 내가 믿는 예수를 버리고 성경 속에 들어와야 돼요. 그러면 성경 속에 모든 것이 “네가 거짓되다.” 할 때 “오케이, 거짓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돼요. 자꾸 신자라고 사칭하지 마시고요.

 

성경 속에 들어온다는 것은 이미 우리는 거짓된 자로 소환된 겁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 들어오지 않고 성경을 외부에서 관찰하고 관람하고 있어요. 신학적으로 분석하고 내용이 어떻다 저쨌다 이야기하고. 우리의 속 경험이 얼마나 거짓되냐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육적이라는 사실은 성경 안에 들어와 성경 안에서 새로운 체험이 있어야 됩니다.

 

악마가 딱 주님 십자가 앞에 십자가 가리는 용도로 설치해놓은 존재가 우리 존재입니다. 

 

성경말씀은 줄줄 외운다고 말씀이 아니고 그게 현실로 경험돼야 되는 겁니다.

 

누가복음 23장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분명히 했어요. “주여, 저들은 저들이 하는 짓을 모릅니다.” 했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정말 성도라면 주께서 모른다고 했으면, 이제 성도가 됐으면 “주께서 하는 일은 우리에게 뭘 알려주기 위함입니까?”라는 말로 질문을 해야 돼요.

 

‘따라서 거짓된 것이 거짓된 나의 인생의 주도권을 쥐면 안 된다는 사실을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이 바통을 넘겨드리겠습니다. 주께서 아십니다. 주께서 하고 싶은 대로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라고 지시만 내리세요.’ 거짓된 게 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주님의 지시 따르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 지시 따랐다고 해서 우리가 진실 된 것은 아니에요. 그 지시에 따름으로서 미처, 마저 몰랐던 거짓됨이 죽을 때까지, 육신이 살아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바깥으로 경험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되고, 감사해야 돼요. 왜? 우리 호적 정리가 됐기 때문에.

 

호적 정리가 됐어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이미 꽂혀버렸습니다. ‘너는 죽었고 너의 생명은 하늘에 있는지라.’ 이 호적의 뿌리가, 우리 뿌리가 하늘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걸 골로새서 3장 5절에서는 탐심이라고 하고 우상숭배라고 했어요. “쓸데없이 아직도 네가 참될 수있는 가능성을 내다 보냐? 아직도? 아직도? 그렇게 너는 너를 몰라?” 욥이 13장 1절에 또, 계속해서 친구들이 거머리같이 달라붙어서 “네가 죄지었기 때문에 벌 받았잖아.” 뭐 이렇게 달라붙는 거예요.

 

이미 인간 빼고 나머지 모든 피조물들은 진짜 하나님에 대해서 이미 소식을 자기들끼리 전하고 있었어요. 인간들만 선악과 따먹고 악마 편이 돼 타락해서 몰랐던 거예요. 그런데 이 모르는, 들리지 않는 소리가 들리는 소리를 집대성해서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제공된 것이 뭐냐? 이게 율법입니다. 흩어져 있는 소리를 하나로 집약시킨 것이 율법이에요.

 

그 율법, 십계명 안에 들어있는 내용 중에 네가 거짓 증거 하지 말라고 되어 있어요. 거짓말 하지 마라, 이거예요. 이미 속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인간들이 속고 있다는 뜻이에요. 지키라는 게 아니라 그 율법이 너희가 평소에 하는 짓거리가 속는, 거짓말하는, 십계명을 위반하고 있는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주께서는 율법을 주신 거예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거예요. 세상은 죄 밖에 없으니까, 그 죄를 예수님이 지고 가고 있는 거예요. 이게 성경 속의 내용이에요. 성경 속의 내용에 가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예수님의 성경의 핵심이고 그분이 흘린 피가 전부에요. 성경 내용의 전부입니다. 세상 죄 때문에 돌아가신, 거짓된 우리 때문에 피 흘리신 그분의 내용이 성경 내용이 전부에요. 

 

시편 30편 3절에 보면, 세상 죄를 진 어린양으로 오신 그 분이 우리에게 해주는 것이 나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예수님에게 있었던 일만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 외에 몽땅 거짓말입니다.
짜장밥을 가지고 짜장밥이다, 이게 거짓말이에요. 그러면 짜장밥을 보고 뭐라고 해야 거짓말이 안 되는가? ‘짜장밥을 먹으면서 짜장밥이라고 이야기하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여기는 나는 죽어 마땅하다.’ 이렇게 돼야 이게 진실이에요. ‘3 빼기 2는 1이라는 것이 맞는 답이라고 여기고 있는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주여.’ 이렇게 돼야 되는 거예요.

성경을 경유해야 진실이에요. 성경이 율법이잖아요. 율법을 통해서 우리의 거짓됨을 알고 그 성경 안에서 우리 때문에 애매하게 억울하게 피 흘려 죽었던, 세상 죄를 지고 가서 죽었던,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세상 죄를 지고 죽었던 그분을 만나는 거예요. 그분을 만나면서 우리의 속에 있는 거짓된 것이 예수님을 어떻게 아프게 하고 죽게 만들었는지 그 경험을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혹독하게 접해야 하는 거예요. 이것만이 진실이에요. 이게 진리입니다.

 

 행동 하나를 통해서 자기 속에 있는 과거사가 경험되는 거예요. 우물가에서.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 속의 거짓됨을 주님이 자기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그 십자가 사건 앞에 소환시켜 경험시킬 때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거예요.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그 경험요, 그 경험! “너는 아직도 주도권을 네가 쥘래? 네 인생의 주도권을?” 그걸 우리에게 묻는 겁니다.

 

십자가 앞에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무슨 의미인지, 누구 때문에 흘린 피인지 알 때, 그 관계가 속임이 아니고 그게 바로 진실입니다.

 

주님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만 자랑하고, 십자가만 보이는 생활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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