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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있는 전신갑주

아빠와 함께 2024. 5. 2. 20:56

비어있는 전신갑주   
2020년 2월 2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6:13-17

(6: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6: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6: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6: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6: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존재하지도 않는 악한 영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가짜 뉴스’입니다. 이 세상은 이미 오직 인간들이 자연에 대처해서 자체적으로 살 능력을 개발한 그 덕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악한 영이든 선한 영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인간은 신에 대해서 지고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자연이 힘들게 하면 나름대로 살 대책이 마련될 수 있습니다. ‘신 없이 살아보기’로 이미 이 세상은 결정했습니다. 따라서 ‘진리’나 ‘복음’이나 ‘의’나 ‘구원’이나 ‘화평’이나 ‘성령’이나 ‘하나님 말씀’ 같은 것은 그다지 요청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들만의 세상입니다.

사도 바울은 ‘악한 영’을 대적하라하지만 ‘악한 영’ 같은 것은 이 세상은 없다고들 인정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렇다면 이 ‘존재하지 않는 악한 영’을 어떤 식으로 ‘있는 악한 영’으로 들추어 낼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늘의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나타나실 때, 어떤 식으로 말씀을 구현하고 완성했는지를 보면 압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하나님은 지고 인간이 이겼습니다. 이로 인하여 악한 영의 존재가 규명됩니다.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상대로 씨름해서 이겼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즉시 기고만장해야 되는데 특이하게도 ‘이겼다’는 이 사실로 인해 자신이 저주의 세상에서 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즉 야곱의 진짜 본성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아니면 알 수가 없는 겁니다. ‘복 받지 못할 존재’로 드러난 겁니다. 야곱은 죽기를 다하면서 하나님 붙들고 “살려주세요”라고 부르짖습니다. 즉 ‘이겼다’는 것으로 인해 자신이 속해 있는 세상의 정체를 알게 된 겁니다. 이 세상에서 유포되는 모든 정신 세계는 ‘악마와 인간이 한통속이 되어 하나님마저 이겼음’을 나타내는 세상입니다. 바로 이 엉터리 사고방식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향하여 성도를 싸우기 위해 나타난 겁니다. 전쟁의 승패는 이미 끝났습니다. 이 땅에서는 악마가 이겼다고 악마 쪽에서 말하고 있고, 하늘 쪽에서는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말씀의 무기화’된 성도들의 존재가 나타나는 것으로 하늘 쪽에서 이겼다고 보시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가 부착하게 되는 각가지 개념들은 모두 승리되었음을 알리는 표식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전신갑주를 성도가 어떻게 이용할 수가 있습니까? 보이지 않는 ‘악한 영’의 존재를 발각시키는데 사용됩니다. 그 방법은 이러합니다. 서양 유물을 보관한 박물관에 복도에 세워둔 갑옷이 스스로 덜커덕거리면서 돌아다니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마치 투명인간이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격이 될 겁니다. 분명 갑옷은 움직이는데 그 안에 인물이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인물이 있는 자리에 뭐가 들어 있기에 갑옷이 주인없이 움직일까요? 바로 말씀이 갑옷을 움직이게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말씀에 따라 ‘죄 있는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시고 사셨던 원리와 동일합니다.

인간은 그동안 악마의 렌즈역할을 했습니다. 악마의 본 뜻이 인간들을 투과하면서 전 세계의 정신으로 확산되어 있습니다. 악마는 하나님에게 복수하고 싶어합니다. 이 사실은 인간을 통해서 반영됩니다. 자아가 있다는 것은 그냥 곱게 있는 게 아닙니다. 악마의 정신으로 총무장되어 있는 겁니다. 인간의 자아는 이처럼 늘 ‘알 수 없는 복수심’에 시달립니다. ‘나를 이렇게 만든 그 누구에 대해서도 나는 가만있지 않고 복수하겠다’는 겁니다. 천사가 야곱 앞에 나타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 앞에 나타나셔서 “너의 본심을 나를 죽임으로서 나타내라. 내가 너희들의 내면의 세력에 의해 죽어주마”라고 나서신 겁니다.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이 그러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악한 영에 대해 이미 승리했음을 알리기 위해 성도에게 오셔서 성도 내부에 자리잡고서 자아를 긁어냅니다. 미이라 안을 긁어내듯이 말입니다. 말씀으로 긁어내시고 말씀으로 그 빈자리를 가득 채우십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자아는 상실됩니다. 말씀으로 대패로 깎듯이 깍아내면 인간의 육은 마치 갯벌과 같이 반복해서 표피가 얇게 벗겨나갈 겁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의 육은 영과 닿아있는 나풀거리는 얇은 커튼막이 될 겁니다. 즉 육이 있는 바로 그곳에 영이 대기해 있는 곳입니다.

요한복음 4:16-18에 보면,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골리앗이 있는 곳에 다윗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더 이상 지킬 자아를 없게 하십니다. 그 자아는 예수님이 대신하십니다. 성도가 예수님의 렌즈 역할을 하게 하십니다. 말씀이 완성을 보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 몸 위에 부착되어 있는 듯이 보이는 ‘말씀 완성’의 형태들, 즉 ‘진리’, ‘의’, ‘복음’, ‘믿음’, ‘구원’. ‘성령’, 그리고 ‘하나님 말씀’들이 증거됩니다. 악한 영은 어떻게 되었든 인간의 자아를 놓치지를 않습니다.

자아는 악한 영의 지시에 따라 늘 다음과 같은 심정을 바탕으로 행동에 나섭니다. “꿇어 이것들아! 내 앞에서!” 혹은 “나가! 여기는 내 자리야!” 이처럼 악마는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 입지를 지키도록 부추깁니다.

 

우리는 구약 이스라엘의 운명을 여기서 도입해야 합니다. 그들은 모두 몸과 몸의 결집체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파괴되었고 멸망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집단 자아로 반응을 나타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은 ‘약속의 땅’이라는 지리적 공간성을 고집했고, 역사라는 그들의 시간성을 고집했습니다. 신약에 이르러서 오늘날 성도는 이 시간성과 공간성이 말씀에 의해서 긁어내어졌습니다.

이제는 모든 게 같은 도화지에 있는 ‘정지화면’입니다. 예수님과 통해서 예수님의 신부로서 살아갑니다.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그곳에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눈에만 보입니다. 온 세상이 촘촘하게 말씀으로 활성화되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말씀화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악한 영의 수작을 감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1강-엡 6장 13-17(비어있는 전신갑주)2002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6장 13-17입니다. 신약성경 315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6:13-17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인체의, 성도의 무기화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에게 주어지게 되는 이러한 일들은 무엇을 의식하기 위함이냐 하면, 악한 영을 대적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만약 평소에 악한 영이 생각나지 않고, 악한 영이 없다고 여긴다면 정말 이딴 것들은 아무짝도 소용이 없겠지요. 의의 흉배, 진리의 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치 않은 겁니다.

사도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본인의 평소 생활자세가 이렇다는 거예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태도가 악한 영을 의식하고, 악한 영 앞에 있는 자기자신을 의식하고, 그래서 자기노력이나 자기재주로서 악한 영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런 것들, “전신갑주에 의해서, 나는 하나님의 전사로서 지금 살아가고 있는데 여러분들도 다 그렇지요?”라는 식으로 이 본문을 편지로서 들이대고 있습니다.

악한 영과 대적이 되어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이 세상은 역사라는 것이 소용이 없고 이게 정지화면이 되어버렸어요. 보통 인생을 가지고 ‘길 위의 존재’라고 하거든요. 로드무비라 하지요. 길을 가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가지고 영화를 찍는 것처럼 ‘인생은 한편의 드라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런 요소가 없습니다.

인간은 한편의 드라마가 아니에요. 영화가 아니라 정지화면이 되는 겁니다. 그냥 버티고 있는 거지요. 구약성경의 전쟁의 모습을 보면 정식으로, 정면으로 부딪히는 전쟁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얍삽한 전쟁을 일부러 시키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졌다고 치고 적들이 굉장히 안일에 빠졌을 때 역습하는 것, 그리고 비겁하게 뒤에서 치는 것, 그런 요소들을 보게 되면서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것이 얍삽함이 빠져버리면 전쟁자체가 안되는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하는 이 전쟁은 얍삽함을 넘어서 있습니다. 얍삽함을 넘어섰다는 말은, 구약에서는 전쟁을 이겨야 되는 목표를 갖고 있지만 신약에서는 이미 전쟁에서 승리가 된 상태에요. 승리가 된 상태에서 이 얍삽함을 넘어서는 전쟁을 한다는 말은 뭐냐? 일종의 확인전쟁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작용하고 있는 악한 영, 악마지요, 악마에 대해서는 더 이상 우리가 새삼 사투를 벌이거나 이겨야 된다는 목적은 없다. 이미 지나갔다. 예수님 때문에 승리했기 때문에 이미 승리로 최종결정이 난 겁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이런 악한 영들과 전쟁하려 하느냐? 악마가 최종 승리한 소식을 감추고 있어요. 이 세상에서 덮어버렸어요. “아무 일 없어. 그냥 살아.”라는 식으로 하니까 예수님의 증인들, 성령을 받아서 예수님의 증인된 사람들은 이걸 들춰내는 거예요. ‘이것들이 아직도 세상현실을 대중들에서 속이려고, 여론조작하려고 하는구나.’ 이렇게 들춰내는 겁니다.

그러면 악한 영의 세계에서는 그걸 가짜뉴스로 보겠지요. 지금 에베소서 6장의 이 내용이 가짜뉴스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현실적이 아니니까. 전혀 현실과 거리가 머니까. 그 전쟁을 하는 거예요. 세상이 말하는 현실이 진짜 현실인지 아니면 성령께서 성경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이 현실이 진짜 현실인지 이미 승리한 입장에서, 넉넉한 입장에서 주저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움직이면 되니까.

이미 성도는 무기화되어 있으니까 그 움직임 자체가 하나님의 무기로서 움직이는 거예요. bc 900 년경에 트로이 전쟁할 때 그리스가 얍삽한 꾀를 씁니다. 트로이사람들에게 물러가는 척 하면서 “너희들이 전쟁에 이겼다. 그래, 너희들이 이긴 거야.” 그리스 사람이 트로이 사람들보고 전쟁에서 너희가 이겼다고 하면 그냥 물러가야 되는데 안 물러가요.

“너희가 이겼으니까 우리가 신에게 제물을 드려야 되지 않겠느냐? 우리가 제물을 바치는 것 까지는 너무 야박하게 거절하지 말라.” 해놓고 제물 바치는 용도로 트로이목마를 제작하는 겁니다. 트로이목마 안에 몰래 그리스병사들을 숨겼습니다. 트로이의 카산드라가 거기에 대해서 속지 말라고 했는데 듣지도 않지요. 목마를 성안에 들였는데 목마 안에 숨어 있던 그리스 병사들이 나와서 결국 전쟁을 최후로 마감하게 되는 실제 일이 있었거든요. 그게 유명한 트로이목마 이야기지요.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니 트로이목마 같지 않습니까? 일은 누가 하느냐 하면, 일은 주님께서 하시고 우리는 그 안에 들어가 있는데 결국은 우리의 승리로 모든 것이 주어지는 거예요.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이렇게 죽 나오는데 간편하게 그 테마만 잡겠습니다. 진리,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의죠, 의, 그 다음에 복음, 그 다음에 믿음, 그 다음에 구원의 투구, 구원,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

악한 영은 기어이 이 현실을 가짜로 만드는데 진짜 현실은 이거라고 폭로를 시키는 무기가 바로 이거였다는 거지요. 이게 오늘 본문 내용이거든요.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것이. 이제부터 굉장히 난처해졌지요. 왜냐하면 여기 나오는 이 진리, 의, 복음,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 복음의 예비한 신, 대체 이것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게 어디에 달려 있느냐, 이 무기를 어디서 구할 수 있느냐? 이 무기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했지만, 악한 영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도 우리 인간문제가 아니에요. 이것은 누구의 문제냐 하면 예수님이 등장하셔서 십자가에서 일을 벌이셔야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 악한 영의 존재성입니다. 악한 영, 악마는 예수님 때문에 비로소 자기정체를 노출하지 예수님이 없으면 악한 영은 인간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악마라는 것은 인간세계에서 없습니다. 악마가 없으면 주님도 옛날 사람이고, 옛날에 돌아가신 분이기 때문에 지금도 없는 분이고, 예수님이 없어버리면 뭐도 없느냐? 진리도 없고, 의도 없고, 그리고 복음도 없고, 그 다음에 믿음도 없고, 그 다음에 성령도 없고, 구원의 투구도 없고, 말씀도 의미 없습니다.

전부 없는 거예요. 이런 것들 없이도 우리는 잘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잘들 살아왔고요.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야……, 어떤 작업이 필요하냐 하면, 없는 것들을 주워 모아서 있는 것으로, “실제로 없는 것이 아니고 있습니다. 진리 있고요, 복음 있습니다.”라고 설명을 해야 될 텐데 그걸 설명하기가 난감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기도하시는 분 기도내용대로, 그거 없어도, 말씀 없어도 그냥 신종코로나만 조심하면 돼요. 아무 문제없는 인생을 살고 있거든요. 우리에게 오늘본문 말씀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러면 없는 것을 어떻게 있는 것으로 끄집어내느냐? 오늘 설교의 핵심은 바로 이겁니다. 없는 것, 성경에는 있다고 했는데 우리한테는 없어요.

그러면 없는 것은 있게 하기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런 요소들을 실재화시키는가? 그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세기 32장에 보면 야곱이 얍복강가에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 천사가 등장했습니다. 밤중에 천사하고 씨름했다는 것을 알지요. 그런데 그 씨름의 결과가 누가 이긴 것으로 되어 있느냐 하면, 천사가 이긴 것이 아니고 야곱이 이긴 것으로 되어 있어서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이 되었어요. 너는 하나님마저 이긴자라, 해서 그렇게 된 겁니다.

굉장히 이상하지 않습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이기다니요? 야곱이 하나님을 이겼어요. 이겼으면 야곱이 “까불지 말란 말이야. 어디서 감히 나에게 대들다니! 하나님, 저리가! 천사도 저리가! 나는 누구도 이겨.” 이렇게 되어야 스토리의 앞뒤가 맞는데 이겨놓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내가 이기다니. 내가 하나님을 이기다니. 이럴 수는 없나이다. 주여, 이게 나의 실상이라면 나는 이제 죽은 몸입니다.” 하고 시합에 이겨놓고는 울면서 발목잡고 가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네가 이겼잖아. 네가 싸움을 건 이유가 뭐지? 네가 이기기 위해서 싸움을 걸었잖아. 그래서 네가 이겼잖아. 그러면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고 갈길 서로 가자.” 하나님이, 날이 밝으면서 나는 가겠다고 하니까 야곱이 “나를 축복하지 아니하면 못갑니다.” 붙드는 거예요. 천사와 야곱의 만남에서 야곱이 알게 된 것은 뭐냐? 내가 평소에 남한테 ‘나는 지기 싫어한다. 남에게 지고는 못산다. 그 정도로 나는 잘났다.’ 하는 야곱의 본성은 하나님이 찾아오지 아니하면 이게 드러나지 않고 발각되지 않게 되어 있어요.

이게 복인 거예요. 이걸 저는 ‘초과성’이라 하는데 인간들의 살아가는 모든 것은 내가 조절해서 살아가요. 그런데 그것을 초과하는 것, 초과하는 미지의 것은 우리는 몰라요. 왜? 내게 필요 없는 것은 다 배제했으니까, 다 잘랐으니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겁니다. 이 땅에서는 하나님이 이기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이겨요. 그리고 인간배후에는 누가 있느냐? 악마가 있어요. 그래서 이 땅에서는 악마가 이겨요. 누굴 이기는가? 악마가 하나님을 이기는 동네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가짜뉴스입니까? 악마가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마저 없애버리고 죽여 버린 거예요. 니체가 말했듯이 신은 죽은 거예요. 신 없이 살아보자는 겁니다. 신에 주눅 들지 말고 살아보자는 거예요. 우리가 이미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거기에 하나님 이야기가 안 나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시험 치지 않아요.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고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이냐에 대한 이야기로 몸이 완전히 합치되어 있어요. 악마는 인간을 렌즈로 사용했다는 이 점이 중요해요. 배후의 보이지 않는 악마는 이 세상 인간을 볼록렌즈로 사용해서 악마의 모든 정신은 인간을 통해서 확산되고 확대되는 겁니다. 이 세상 전부를 인간의 세계로 만들어놓은 거예요. 렌즈라는 말에 여러분이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구조가 원래 그런 구조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야곱이 하나님을 이겼으면 야곱은 기가 살아서 “나는 야곱식으로 산다.” 하고 다시 기고만장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스토리에요. 그런데 분명히 초과적인 내용이 있어요. 야곱이 이겨놓고 울면서 “내가 이기다니! 내가 이기다니! 주여, 이럴 수는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마저 이기고자 하는 야곱이라는 본성, 하나님을 대적해서, 하나님을 쳐부수려는 야심과 야욕으로 가득 찬 본성이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이제 알았사오니 이제 어떻게 할 꺼요? 이걸 노출시켜놓고. 이 엉터리 어떻게 할 겁니까? 이 가짜 이거 어떻게 할 거예요?” 하고 몸부림치면서 매달리는 이 모습, 이게 초과적이에요.

내가 평소에 살아가는 삶 말고 옆에 있는 사람이 납득이 안되어서 ‘무슨 짓을 하고 있지?’ 하는 초과적인 요소가 성도에게만 드러나는 거예요. 승리한 자의 울음, 승리한 자의 통곡이라는 말이지요. 승리했다는 것이 일이 잘못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뭐냐? 그것이 원시성이에요. 지금 에베소서에 나오는 예수님은 로드무비 아니에요. 이것은 정지화면입니다.

정지화면 속에서는 원시성, 창세기 3장 15절까지 내 안에 다 포함되어 있어요. 모든 성경의 계시가 정지화면 속에 다 있다고요. 같은 한 장의 도화지속에 다 들어 있어요. 십자가 죽으신 그림이 여기 있다면 저 위에 선악과 따먹은 그림도 거기에 있어요. 같은 지평에 같이 놓여 있다는 말이지요. 마지막 지구가 멸망하는 그것도 옆에 한 구석에 그림이 있어요.

여러분이 잘 이해가 안되는 것 같은데 좀 심한 말을 할게요. 긁어내는 겁니다. 갑옷 같은 것은 박물관에 있거든요. 서양 박물관에 가보면 사람은 없고 갑옷만 있지요. 그런데 밤중에 사람도 없는데 갑옷만 있는 그 갑옷이 철커덩, 철커덩 하면서 온 박물관을 돌아다닌다면 이건 기절초풍할 이야기지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런 것은 없어. 돈만 있으면 살아.’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딱 하나에요. 본인의 자아가 지금 안죽고 살아 있기에 그런 거예요. 악마의 렌즈가 깨져야 되는데 악마의 렌즈가 멀쩡하니까 그 렌즈가 있는 이상 계속해서 악한 영의 모든 힘이 나를 통해서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정신으로, 하나님을 이긴 그 승리의 정신으로 남은 인생을 살고 있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저는 경험한적 없습니다만 여자가 원치 않는 임신을 했을 때는 산부인과에서 낙태수술을 한다는 거예요. 긁어낸다고 의사들이 이야기해요. 그러면 나 자신의 악마의 렌즈를 전부 다 긁어내야 되는 거예요. 내 안에서 긁어내버리면 우리는 어떤 꼴이냐 하면, 내가 상실된 처지고요, 내 앞에 덕지덕지 뭐만 있느냐 하면, 의와 그리고 믿음과 구원의 투구, 이것은 마치 투명 인간이 무슨 옷을 걸쳤는데 남들 보기에는 무슨 옷이 막 걸어가는 거예요. 안에는 아무것도 없이.

성도를 어떻게 보느냐 하면, 성도는 표면에 의의 흉배, 믿음, 이것만 덕지덕지 붙여서 있고 안에는 내가 없어요. 자아는 긁어냈으니까, 죽었으니까 내가 없는 거예요. 악마의 렌즈가 없는 거예요. 지금 사도바울이 희한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집 사서 이사 갈 때 이불 같은 것 그냥 들고 가면 부피가 많이 나가잖아요. 그러면 비닐에 담고 진공청소기로 공기를 빨아버리면 진공포장이 되겠지요.

주께서 진공포장 하는 거예요. 또는 이집트 미이라 처리 할 때처럼 속을 다 긁어내 버려요. 주님께서는 악마의 렌즈역할을 했던, 악한 영의 렌즈역할을 했던 거기를 긁어내고 뭘 집어 넣는냐 하면, 말씀으로 꽉꽉 채우는 겁니다. 그 미이라를 채우는 거예요. 미이라에 말씀을 채워버리면 그 말씀 하나하나가 주님의 렌즈역할을 해가지고 뭐가 생겨나느냐 하면, 의의 흉배, 그리고 진리, 그 다음에 평안의 복음,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이런 것을 바깥으로 발산시켜 나가는 겁니다.

말씀으로 채우는 거예요. 바꿔치기가 되는 거예요. 자아를 긁어내고 그 빈자리를 말씀으로 채우는 거예요. 그러면 말씀 하나하나가 렌즈역할을 해서 그 말씀완성도를 나타내는데 그 최종완성도가 뭐냐 하면, 믿음이고 의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평안, 편안케 하는 복음, 그리고 성령의 검, 이런 것들이에요.

사람이 뭔가 스티커를 붙이려면 부직포 같은 것이 필요하잖아요. 여기에 나오는 용어들, 의와 평안의 복음, 이것들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고 통합된 세트가 되려면 그걸 통합시키는 요소 위에 붙여줘야 하나로 통합이 된다는 말이지요. 통합이 되려면 이미 갑옷 안에도 통합된 어떤 새로운 분이 계셔야 돼요.

바깥에서 자석을 붙이는 거예요. 고급장갑에 보면 자석이 붙어 있어서 짝이 서로 떨어지지 않고 딱 붙게 되어 있어요. 옷에도 자석이 있어서 딱 붙여서 안벌어지게 하는 것이 있지요. 바깥쪽에 자석이 있고 안쪽에 자석이 있어서 서로 친화성을 지니게 하는 거예요.

바깥쪽은 의와 복음, 믿음,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안쪽에 계신 분이 그 말씀의 완성으로서 하나가 있다면, 우리 안에 예수님이 들어온다면 그 둘이 하나가 되어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움직이게 되면 바깥에 뭐가 등장하느냐? 의가 움직여지고, 믿음이 움직여지고, 복음이 움직여지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세상이, 인간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악한 영들이 설쳐대는 모습이 예수님의 안목으로, 예수님의 안경으로 다 보인다는 그 말이지요. 악한 영들이 저런 짓을 했구나. 싸우려면 적이 보여야 싸우지요. 적이 안보이는데 무슨 싸움이 되겠어요. 내 안목 가지고는 이런 것이 안보인다니까요. 믿음이라든지 이런 것이 왜 중요한지 보이지를 않아요. 그런 것은 하나도 안 중요하다, 그 말이지요.

그렇게 되면 성도의 육이라 하는 것은 얇은, 나풀거리는 커튼의 막과 같은 겁니다. 육이 있는 곳에 영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성도를 가지고 다 긁어내고 얇은 표피만 남겨서 빈공간이 되게 하는 이유가 ……, 처음 했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이 땅에서는 야곱이 이겼어요. 하나님이 지는 겁니다, 이 땅에서는.

아까 쉬는 시간에 장로님이 질문했어요. “목사님, 욥기에서 욥의 고집이 이겼습니까, 하나님의 고집이 이겼습니까?” 욥의 고집이 이겼지요. 이 땅이니까. 그걸 신학교에서 아무리 배워도 모르는 거예요. 자꾸 하나님 앞에 잘 보이려고, 하나님이 승리했다고 하는데 이 땅의 구조는 하나님이 승리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패배한 세계에요.

하나님이 졌고, 하나님이 패배했고, 하나님이 죽어 없다는 그것을 기본으로 해야 이 성경이 보입니다. 내 자신을 알아요. 그래야 내가 악마의 렌즈라는 사실이 파악이 되니까요. 악마의 렌즈를 구원할 이유가 없지요. 구원할 자격도 권한도 없고요. 인간은 말씀을 배척하기 바쁘지 말씀을 수용하기 바쁜 것이 아니에요.

문제는 나를 상실해야 되는데 야곱처럼 ‘이러면 안 돼. 내가 있으면 안 돼. 내가 없어져야 돼. 내가 다른 인간 돼야 돼.’ 그래서 다른 인간 되었잖아요.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다른 인간이 되어야 된다는 그 사실. 이스라엘은요, 야곱의 이름이 아닙니다. 야곱이름만 덜렁 있고 그 안에 장차 예수님이 들어올 예수님의 자리를 만든 거예요.

그걸 어려운 말로 입지, 갑옷 안에는 뭐가 있느냐? 자아는 없어요. 입지에요, 입지. 영어로 하면 position, 자리, 주님의 자리가 있어요. ‘주 안’이 성립된다고요, 주 안이! 하나의 입지가 생산되는데 그 입지가 생산되게 되면 이 세상에서는 인간이라는 것은 단독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악마의 영에 의해서 움직이는 악마의 자리가 돼요. 하나의 입지, 포지션이 된다고요.

하나의 예를 들면, 대구중심가에 있는 대리석으로 지어진 큰 교회에서 오늘 공동의회를 하게 되어 있답니다. 목사 나가라고 하려고. 목사 처음 올 때 설교 잘한다고 백날 해도 백년 가까운 전통의 교회에서는, ‘교인이 늘어났느냐, 아니면 헌금이 늘어났느냐?’ 그 둘이 안되게 되면 그 목사는 잘릴 상대가 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목사가 전임목사하고 똑같이 “나 못나간다. 나는 노회소속이다.” 그렇게 된 거예요. 노회는 뭐냐? 노회가 목사의 입지, 자리가 돼요. “노회에서 나가라고 하면 나갈게. 너희가 나가라고 한다고 해서는 안나간다.” 하고 목사는 버티는 겁니다. 그러면 교인들의 입지는 뭐냐? 교인들은 자기가 평생 동안 십일조 바쳐서 세운 그 예배당, 교회가 바로 자기 입지가 되는 거예요.

우리교회는 교회건물 없어서 천만다행이에요. 아무 입지가 없잖아요. 불나면 끝나니까. 인간의 자기입지가 있으니까 입지와 입지가 싸우는 거예요. 더 쉽게 말해서 ‘여기는 내가 있는 곳이 네가 나가라.’ 그런 뜻이에요. 여기에 내가 있다는 거예요. 내가 있다는 그것이 악마가 있다는 그것과 동일한 의미에요. 악마는 선악과 따먹게 하고 원시성으로 자꾸 네가 있다고 주장했거든요.

네가 있다는 말은, ‘선악과는 없어져도 너는 있어야 돼.’ 그게 악마의 주장입니다. ‘선악과 따먹어버려. 없어도 괜찮아. 중요한 것은 네가 중요하니까.’ 이게 인간의 마음인 동시에 악마의 마음이었습니다. 인간은 자기를 상실하기 싫어요. 내가 영원히 있고 싶어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왔을 때 졌습니다. 이미 죄있는 육신의 모습과 말씀을 결합할 때 예수님의 육신은 패배당해서 십자가에 처참하게 망가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 인간은 멀쩡하게 이 세상에서 육신을 가지고 버티고 있다는 그 말이지요. 이게 가짜에요. 이게 엉터리거든요. 하나님께서 이미 예수님이 승리한 입장에서 성도……, 성도도 엉터리지요, 성도도 하나의 인간이니까요, 예수님 빼놓고는 엉터리거든요. 성도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꾸는데 있어서 다 긁어내는 겁니다.

긁어내는데 긁어내는 그 내용에 대해서 제가 두 가지로 이야기하겠어요. 하나는 쉽게 이야기하고요, 또 하나는 어렵게 이야기합니다. 먼저 쉽게 하겠습니다. 인간이 자기입지, 자기자리를 못버리는 이유가 뭐냐? 인간내부에는 알 수 없는 상처같은 것이 있어요. 상처가 무엇과 연결되느냐 하면 인간의 복수심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본인이 원인을 찾을 수 없는 알 수 없는 복수심으로 완전히 가득차 있어요. 복수심으로 가득차 있다는 말을 더 실감나게 하면, 독사가 한 2억 5천마리 들었다고 보면 돼요. 내 안에 독사가, 복수심을 유발하는 독사가. 인간의 모든 행동, 손짓 하나하나 전부 다 복수심에서 나온 발로의 모습이에요. 사적인 복수심.

그 복수심이 왜 생겼는지를 몰라요. 왜? 악마가 넣어줬으니까 본인은 몰라요. 그러나 인간은 알 수 없는 복수심 때문에 건드리면 화를 내게 되어 있거든요. 건드리면 화내요. 자기 복수심은 자기가 면제하거나 제거할 수가 없어요. 그걸 제거하지 않고 악마의 도움으로 그걸 정당화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율법이나, 성경말씀이나, 교회 다니기, 기도하기, 이 모든 것은 감추어진 자기 복수심, 2억 5천마리의 그 뱀, 독사같은 그것이 있음을 감추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법의 정당화에 호소하게 되어 있어요.

나는 기도했으니까 응답 받아도 마땅하다는 것, 교인들이 나보고 나가라고 하는데 나는 못나가겠다고 하는 이게 정당하다는 것, 그 입지, 그 자리는 악마가 집어넣은 독사가 양성되는 자리거든요. 계속해서 우리는 분함과 알 수 없는 원한같은 것이 있어요. 분통같은 것이.

김 원일이라는 사람이 유명한 작가인데 그 사람이 지은 소설 중에 <마당 깊은 집>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 소설이 실제 대구지역을 배경으로 한 겁니다. 거기에 보면 중앙통 나오고, 송주극장 나오고, 국국통합병원 나오고, 이것이 1954년도의 이야기입니다. 대구의 장관동, 대구제일교회 맞은편, 계산동성당 뒤편, 약전골목 앞에 거기가 장관동이에요.

6.25 끝날 즈음 대구에 미군부대가 주둔했고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모였는데 장관동에 주인집 여섯 식구 합해서 총 네 가구가 바글바글 살면서 일어난 모든 에피소드들을 모아놓은 소설이 <마당 깊은 집>입니다. 지금도 그 장소의 어느 골목에 팻말 붙여서 안내 다 해놨어요. 혹 시간 늘어지고 심심하거든 가보시기 바랍니다. 김 원일이라는 작가가 하도 유명하니까 다른 지역에서 많이들 옵니다.

연변에서 온 경기댁, 퇴역장군 상이용사 식구, 평양에서 온 평양댁, 김천댁, 그리고 진영에서 올라온 주인공 길남이네. 이들이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인데 소설을 보게 되면 끝까지 전부 다 밥 먹고 사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생존하느냐의 이야기에요. 거기에 믿음, 소망, 의의 흉배, 이런 것 하나도 없어요. 전부 다 밥 먹고 사는 거예요.

그 소설의 끝자락에 이런 것이 있어요. “세월이 흘러, 지방대학을 졸업한 나는 그 해 곧 서울로 올라와 출판사에 취직했다. 결혼은 장관동 이모님이 소개를 하여 대구처녀를 아내로 맞았다. 여름 휴가 때면 남들이 한더위를 피해 바다나 산을 찾을 때 나는 오히려 전국에서도 가장 더운 지방인 대구를 찾아 처가에 식구를 부려 놓고는 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의의 흉배, 이런 것이 없어요. 복음의 예비한 신, 이런 것 없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고, 반응하고, 움직이고 대들고 싸우려고 하는 그 모든 것이 특징이 뭐냐? 가난하기 때문에 무엇을 놓쳐버렸느냐 하면, 길남이라는 주인공의 동생 길수가 있는데 그 애가 폐병인지 뭔지 죽어버렸어요. 죽어도 그게 큰 문제가 아니에요. 살아 있는 사람의 사는 문제가 전방에 드러나게 되면 몸 아픈 것은 사소한 문제가 되는 겁니다.

지금 2천 20년 되어서 전부 다 살만하니까 뭐가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느냐 하면, 몸 아픈 것이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지요. 그러나 1954년도의 대구는요, 몸 아픈 것은 ‘갈 놈은 가라’ 해서 내보내고 어떻게 하면 산 사람이 계속 사느냐, 바느질해서 살고, 기생해서 살고, 간첩해서 살고……, 온갖 이야기가 다 나오거든요. 살아남은 자가 어떻게 계속 살 것이냐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몸 아픈 것은 하나의 사치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죽음도 화젯거리도 되지도 않아요. 한이 맺혀 있고, 누구 탓이라고 하고, 장작 패는 서 씨가 어쩌고, 그 이야기가 다 아……. 그래서 김 원일의 소설에 보면 길남이의 동생이 죽었을 때 “더러운 세월과 함께 죽었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더러운 세월, 뭐가 더러운지도 모르면서 더러운 세월이라고 해요.

이 땅에서 살면서도 알 수 없이 뭔가 내가 고생한다는 것에 대한, 나를 고생시키는 어떤 적이 있을 것이고 거기에 대한 어떤 분노 같은 것이 있고 적개심이 있고 그 적개심은 어디로 이어지는가? 예수님이 말씀으로 이 땅에 옴으로서 너희들의 그 적개심, 복수심은 모두 렌즈가 되어서 하나로 모아지는데 그게 나 하나님이다. ‘나 죽이고 싶지 그지? 날 죽여 버리고 싶지 그지?’ 그것과 관련되어 있어요. 왜? 배후에서 악한 영이 시키니까.

모든 인간의 모든 모습은 ‘꿇어 이것들아, 내 앞에서.’ 하는 본성에서 벗어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요한복음 4장 16-18절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물 긷는 이야기를 하다가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여인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음을 거론하느냐? 육이 극단적으로 있는 그곳이 바로 영이 계신 곳이에요. 영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두꺼운 육을 전부 다 상실시키기 위해서 갈아요. 고기 갈 듯이, 혹은 돼지고기 삽겹살 대패로 밀듯이 밀어버려요. 그러면 얇은 막이 돼요. 나의 육의 얇은 막 바로 뒤에 영이 맞닿아 있어요.

마치 우리 몸은 갯벌 같아요. 매일같이 말씀이 와서 이걸 갈아버려요. 갈아버리면, 생존하려고 지키는 이 육보다 더 센 힘이 뭐냐? 나를 갈아버리는 말씀의 위력이 더 커요. 그 말씀의 완성으로 된 그것이 뭐냐? 그것이 믿음이고, 그게 복음이고, 그게 하나님의 의고, 그게 구원이고 그게 성령의 검이에요. 그게 진리의 띠고.

내가 이 철갑 안에, 이 갑옷 안에 내가 들어오면 일이 안돼요. 내가 상실되어야 된다니까. 복수심 많은 내가 없어져야 돼요. 이걸 자아가 없어진다고 해요. 내 몸이 없어질 수는 없고요. 몸은 있지요. 내 자아가 없어지는 거예요. 골리앗 있는 곳에 다윗이 있습니다. 다윗이 먼저 “골리앗 나와!” 이러지 않았어요. 골리앗이 먼저 나와서 우리를 기죽였잖아요.

<마당 깊은 집>의 그 사람은 6.25때 먹을 것 없어서, 일거리가 없어서 곧 죽을 판이에요. 다급한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가 다급해요. 내가 어떻게 이 몸 살리는가? 내가 나에게 골리앗이에요. 돈만 있으면 되는 거예요. 거기에 믿음도 필요 없고 구원의 투구도 필요 없어요. 다 쓸데없는 거예요. 오직 돈이 있어야 되겠다. 가장 육이 육답게, 나의 육의 극치를 보여줄 그 현장, 바로 거기에, 나풀거리는 얇은 막 뒤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네가 살기 어렵다고 하는 그것이 네 복수심으로 형성되지? 그로 인하여 내가 죽었어, 내가. 내가 죽은 거야.” 우리보고 닦달 내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악마의 앞잡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거예요. 육이 있다는 것은 원시성, 다시 말해서 창세기 3장 15절로 되돌아가는 거예요. 같은 그림에 같이 있어요.

우리가 육을 가졌다는 말은, 우리가 손도 못 대는 이상한 것을 가진 거예요. 주님은 우리를 뭐로 보느냐 하면, 하나의 인간으로 보지 않고 고기로 봐요. 이 고기를 육으로 바꾸는 겁니다. 고기에서 육으로 바꾸는 거요. 어떻게 하느냐? 죽이는데 어떻게 죽이느냐가 중요해요. 말씀으로 죽이는 거예요. 따라서 이 갑옷 안쪽을 말씀으로 죽인다면 갑옷 바깥에는 말씀으로 이미 우리를 살려낸 거예요.

지금 중요한 것이, 내가 어떻게 구원받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 구원받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의 완성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사도바울이 하고 있는 겁니다. 너보다 말씀이 더 중요하다는 거예요. 너에게 네가 중요한 것은 네가 상실되지 않기 때문에 계속 너에게 관심이 있는데, 그래서 내 인생 조진 놈에게 복수하겠다고, 보란 듯이 복수하겠다고 나서는데 그런 관심사가 바로 아직도 너에게 관심이 있다는 자체가 악마의 렌즈노릇을 하는 거예요.

성령은 스스로 렌즈가 되어서 현재 육신의 세계가 아니고 말씀의 세계인 것을, 주님이 이미 승리한 세계인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 겁니다. 인간이 사는 것 자체가요, 하나님의 심판성을 담으라고 살아가는 거예요. 우리는 매일같이 심판받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고생하면 고생할수록 오기가 더 나요. ‘하나님 만나면 내가 죽여버릴 거야. 하나님 당신이 실수한 거야. 왜 내 뜻대로 안 해주는데? 내 복수심이 지금 막 끓어올라.’

이것이 그동안 몰랐던 우리 육신의 입지입니다. 악마가 문을 여는 문고리역할을 하고 있어요. 본문 16절에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그 악한자가 우리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겁니다. 우리 육 안에 들어와 있는 거예요. 아담 안에, 아담한테 물려받은, 부모한테 물려받은 이 몸 안에 이미 악마가 들어와 있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 안을 먼저 말씀으로 긁어내야 되는 겁니다. 강구라는 곳이 대게로도 유명하지만 겨울철 과메기로도 유명하지요. 과메기 널어놓은 곳을 과메기덕장이라고 하는데 과메기덕장의 한 마리 과메기처럼 그런 신세인 것을 주님께서 알려주는 겁니다. 내가 신이 아니거든요. 내가 절대자가 아닌데 악마가 널어놓은 여러 가지 과메기 중 한 마리에 불과한데, 사실은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자체가 심판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미 죽은 겁니다.

죽은자니까 아무 쓸모없는 거예요. 마귀한테나 쓸모 있지요. 그러나 주님한테는 쓸모가 없는 거예요. 쓸모가 없는 인간, 쓰레기 재활용하듯이 우리를 가지고 와서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다 긁어내요. 자아를 긁어내는 거예요, 자아를! 말씀으로 바르게 해볼게요, 뭐 그런 것, 필요 없어요. 그걸 다 긁어내는 겁니다.

긁어내놓고 말씀으로 우리 안에 집어넣어서 날마다 우리의 악마적인 육을 긁어내면 긁어내는 그 현장에서 믿음이 나오고, 거기서 화평이 나오고, 거기서 하나님의 의가 나오고, 진리가 나오는 거예요. 왜? 예수님이 승리한 말씀가지고 우리를 긁어내니까 우리는 쓰레기 되고 말씀은 말씀대로 생산물이 되는 겁니다.

이게 제가 아까 이야기한 갑옷 안의 모습의 쉬운 설명입니다. 두 번째, 어려운 설명을 하겠습니다. 어려운 설명은 바로 구약 이스라엘입니다. 구약이스라엘을 멸망케 한 이유가 뭐냐? 구약 이스라엘은 자체적인 시간과 공간차원을 갖고 있었어요. 자아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자아는 시간가지고, 공간 가지고 구성을 하게 되어 있어요. ‘나는 과거에 이렇게 살았다. 그 과거가 모여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 나는 내일 모레, 한 뒤에 이렇게 살아야지.’ 자기의 시간성을 갖고 있어요.

그 시간성을 긁어내버립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로드무비가 되기 때문에. 정지화면이 아니거든요. 이걸 긁어내버려요. “내일 뭐한다고? 내일 뭘 어떻게? 오늘 밤 새벽 2시 45분에 네 영혼을 데려가면 그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 시간성을 긁어내 버립니다. 또 하나, 공간성을 긁어내요. 우리집안, 우리교회, 나의 입지, 나의 자리, 나의 외손자, 외손녀, 우리끼리, 나만의 공간성, 나만의 공간, 내가 여기 있으니까 너 들어오지 말라고 하는 나의 공간, 그 공간도 긁어내 버립니다.

공간이 있으면 우리가 미국에 가도 한국을 그리워하게 되어 있고, 중국에 가도 마찬가지가 되겠지요. 그리워하는 그 요소, 주님을 배신하는 악마가 통치하는 이 세상을 자꾸 그리워하게 되어 있어요. ‘고향 역’ 이라는 노래가 있듯이. 물레방아 도는데 청춘을 돌려달라고. 맨 날 우리 고향, 고향을 사모하게 되어 있어요. 내 새끼, 내 가족. 이걸 긁어내야 돼요. 시간을 긁어내고, 공간을 긁어내고.

나라는 이 주체를 형성하는 선언적인 형식, 칸트가 이야기한 겁니다. ‘시간과 공간은 인간의 체험 이전에 먼저 체험을 의미 있게 만드는 차원, 그것이 바로 시간과 공간이다.’ 칸트가 뭘 알고나 이야기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기가 연구해보니 ‘아, 나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으로 형성되는구나.’ 그것을 안 겁니다. 시간이라 하는 것은 과거는 없으니까 기억 속에나 있고, 미래는 알 수 없고 기다려야 되고, 지금의 내가 중요해.

이게 시간의 공간성이잖아요. ‘예수님 좋아하지. 하지만 지금 예수님은 없어. 왜? 과거의 인물이니까.’ 이런 식의 신앙생활. 공간. ‘이 교회는 내 교회다. 네가 나가라.’ 자기 입지. 이 공간성. 시간 공간성을 주께서는 긁어냅니다. 시간 공간이 있어버리면 이것이 내 것이 되고, 내 것이 되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 안에 감추어진 악마적인 복수심, 보복, 원망, 불평, 그리고 불안불안, 바들바들 떠는 불안감, 네 시간과 공간이 흠집 날 까 싶어 바들바들 떠는 그 모습.

거기에 대해서 복음은 평안의 복음입니다. 평안의 복음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모든 세상은 국정원 요원처럼 말씀이 닿아 있어요. 말씀과 말씀사이가 신경조직이 되어서 활성화되어 있어요. 이 전 세계가 말씀의 매트릭스에요. 220볼트 전류가 흐르기 때문에 뭘 건드리면 말씀을 건드리는 거예요. 말씀 없는 곳이 없어요. 말씀이 내 안까지 들어와야 돼요. 내 안까지 촘촘한 하나의 전선이 되어야 돼요. 말씀이 전선처럼 내 안을 통과해야 됩니다.

그래야 말씀이 활성화돼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바로 자유입니다. 자유만큼 아름다운 것이 없어요. 껍질이니까. 우리는 껍데기밖에 없으니까. 안에 말씀 들었으니까. 껍데기라는 경계선으로 해서 껍데기 이쪽에 붙어 있는 것이 바로, 복음 붙어 있지요, 의 붙어 있지요, 진리 붙어 있지요, 구원 붙어 있지요, 이 껍데기 안에는 뭐가 차면 안되지요.

안에서는 말씀으로 계속 파서 긁어내지요. 말씀과 말씀의 완성을 이 육의 세계, 악마의 세계에 보이는 모습으로 보여주는 기능, 이게 바로 성도의 기능이잖아요. 내 것이 없으니까 자유롭지요. 그리고 내 안에 가면 전부 다 말씀에 의해서 주어진 거예요.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이 손 안댄 것이 없어요. 모든 것이 다 손댄 거지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날마다 말씀은 진공포장처럼 자아를 매일같이 좍좍 뽑아냅니다. 성경 보기 싫지요. 왜냐하면 옛시간과 공간성, 나만의 시간, 나만의 공간이거든요. “나는 남편 다섯 명 있다.” 나만의 공간이에요. 주께서 그걸 부각시키지요. “우리 예쁜 애기 어디 있지?” 그런 겁니다. 그러면 나는 이정도 되었다, 하고 그게 자랑인줄 알고 내세웁니다.

‘그래?’ 주께서는 말씀을 안 봐도 현재 있는 말씀의 전류가 통해서 그 말씀이 내 안을 다 집어내지요. 다 집어내고, 긁어내고, 빼내서 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말씀에 의해서 말씀이 완성되었다는 그 사실을 증거하는 존재로 이 땅에 남은 생애를 보내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자아는 누가 대신하느냐? 예수님의 자아가 대신해요.

주님과 우리가 통하는 것이 마치 신랑과 신부가 서로 통하는 것처럼 이제는 율법의 정당성이 아니라 사랑의 정당성, 사랑하기 때문에 너에게 말씀을 집어넣었고 그 말씀은 다시 말씀의 표피를 보여주는 겁니다. 설교를 마치려고 하니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이 있네요. 고추튀김. 이걸로 예를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파프리카로 합시다.

파프리카 있지요. 속을 다 긁어내요. 다 긁어내고 거기에 말씀을 다 담습니다. 당면하고 돼지고기 다진 것을 양념과 함께 맛있게 비벼서 집어넣고 놔두면 어떤 사람은 그것이 파프리카인줄 알고 있어요. 세상 사람들은 성도를 인간인줄 알고 있어요. ‘너 나하고 똑같네. 우리 악수하지 말자. 자칫하면 코로나 걸리니 마스크도 쓰고 만나자.’ 이렇게 똑같이 보는 거예요. 바들바들 떨면서. 지금껏 살아온 내 시간과 내 공간이 다 날아가니까.

인간을 악한 영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요즘처럼 확실하게 다가오는 적이 없어요. 전부 다 무서워해요. 그리고 이렇게 되게 한 하나님께 원망하고 싶은 겁니다. 돈 벌러 가야 되는데 못가게 만들었어요. 그 원망을 결국 누구한테? 하나님한테.

내가 야곱이에요. 나는 지기 싫어해요. 하나님마저 죽이고 싶어요. 이기고 싶어요. 주님은 나타나서 “그래 네가 이겨라. 내가 죽어줄게. 내가 너한테 져줄게. 너 노리는 것 이거였잖아. 너는 악마의 렌즈야. 이거였잖아. 그래 내가 죽을게.” 우리가 십자가를 싫어하는 것처럼 말씀도 우리를 싫어해요. 아직까지 그다지 흠집 안났기 때문에.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는 없고 말씀으로서 지금의 말씀의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 이걸 지금 사도바울이 말하면서 “나같이 사는 사람이 혹시 있어요?”라고 우리에게 묻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살아계시고 십자가 졌는데 우리는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나만 밥 먹고 살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게 가짜뉴스인줄 몰랐습니다. 이제는 악마한테 그만 속아 넘어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