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취하지 말라
2019년 12월 1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5:18-19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사도는 모든 ‘어두움’에 속한 행태들의 평소 모습을 ‘술취함’으로 보고 있습니다. ‘술취함’이란 곧 자기 자신에게 심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괴로워하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든 견뎌보기 위해서 술에 의존합니다. 곧 ‘내가 나를 건지기’입니다. ‘내가 나를 살려내기’입니다. ‘내가 나를 버텨보기’입니다.
본인을 버텨서 뭐 어떻하겠다는 겁니까? 아무리 시간을 지연시켜 봐야 해답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세월을 몸을 맡겨봐야 해결책은 없습니다. 괴로운 나를 잊기 위해 술을 의지하는 것은 평소에 ‘어두움의 일’ 이외는 다른 일은 없었음을 말합니다. 사람이 술을 마신다는 것은 마치 비닐 봉지에 자기 머리를 쳐박는 일입니다.
그 비닐 봉지 안에서 오직 자신만 들어 있습니다. 그것으로 족하다고 스스로에게 위로하고 싶은 겁니다. 이런 어두움의 일이 술로 이어진다는 것은 인간이라는 피조물 자체가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의 취지에 안 맞고 있음을 반증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술취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창조한 그 취지와 ‘술취함’이 부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영혼이 갈급함과 허전함과 서글픔이 생긴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인간은 날마다 바뀌어져야 하고 달라져야 함을 말해주는 겁니다. 그러나 술을 먹고 취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바뀌어져야 함을 극구 저항하고 있다는 모습입니다.
안 바뀌고 도리어 자신의 현 처지를 술취함으로 감추고 싶은 겁니다. 술병은 인간 눈 앞에 보이는 겁니다. 필요하다면 돈 주고 술병을 사서 그 안에 들어 있는 술을 먹을 수 있습니다. 이는 눈에 보이는 자신과 술병 사이에 ‘연속성’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즉 평소의 모든 어두운 일들은 근처에 있는 연속적인 어두운 일을 끌어당겨 도모할 수가 있습니다.
어두움은 어두움으로 그때마다 모면해 보려고 하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 성령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자기 앞으로 끌어당길 수가 없습니다. 뭔가 필요한 것을 사람들이 끌어당기겠다는 말은 ‘연속적인 일’에 호소해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말이 됩니다. 어두움의 일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술 취함’이라면 이 일 이전에 인간들이 연속성을 가지고 자신의 괴로움을 잊고자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을 믿는’ 일입니다. 즉 술 말고라도 신을 술병으로 여겨서 자기에게 끌어당겨 자신의 허전함과 괴로움을 해소하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신을 믿는 것을 인간들은 당연히 ‘연속성’을 유지하는 일이라고 여깁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술병을 자기 앞에 가져다 놓는 것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인 것처럼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고 영광돌리는 일을 당연히 가능할 일로 봅니다.
이러니 술취하는 것이나 신에게 취하는 것이 모두 어두움에 속한 일이 되는 겁니다. 모두 다 ‘자기에게 심취하고 자기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이 된다는 공통성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이 세상에 신이 있음을 증거하는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이 없음’을 증거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오신 하나님을 죽여 없앴기’ 때문입니다. 즉 이 세상에는 신이 없는 겁니다. 그럼에도 신들이 유행하는 것은 모두 술 취해 자신의 괴로움을 잊고자 술 대용으로 자기 앞에 갖다 놓은 것들입니다. 바보 같고, 등신 같고 목석같은 신들입니다. 그러나 신에게 심취하면 할수록 그 현장은 신은 없고 신에게 매달리는 자기 자신이 발견될 뿐입니다.
자기에게 유일하고 좋아라고 비는 모조품으로서의 신이요 장난감으로서의 신입니다. 인간은 최종적으로 누구를 섬길 위인들도 아니요 섬길 마음도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신이기에 누가 자기를 건드리고 지적하면 용납하지 못하고 발악하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5:24에 보면,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주님께서 먼저 이 땅에 일을 만드시고 문제를 만드신 겁니다. 인간들은 조금도 자신이 달라지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냥 이대로 잘난 나를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주님이 가로막고 나서신 겁니다. 즉 “너는 쓰레기요 죽은 자”라고 말입니다. 쓰레기에 술을 퍼붓는다고 해서 새 사람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성령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찾아와서 우리가 무신론자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예수님을 죽인 작자들이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해서 경건한 신자라고 자처했다는 점을 감안해봅시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잘 믿는 산 자라고 자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몰랐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통해서만 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열왕기상 2장에서 아합왕 근처에 살던 포도원 주인인 나봇은 포도원을 탐을 낸 아합 왕에 의해서 살해 당하고 포두원을 뺐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그것으로 사건이 종결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열왕기 9:26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젯날에 나봇의 피와 그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노라 또 말씀하시기를 이 토지에서 네게 갚으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 시체를 취하여 이 밭에 던질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과 말씀은 필히 죽은 자의 죽음 사건을 반복하시면서 현실화시키십니다.
열왕기하 13:21에 보면, “엘리사가 죽으매 장사하였더니 해가 바뀌매 모압 적당이 지경을 범한지라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적당을 보고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죽은 엘리사가 죽었던 자를 살립니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아벨은, 본인이 죽지 않고서는 하나님께서 형 가인을 지적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보내신 성령께서는 이미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을 전면으로 내세우시면서 자기 백성에게 찾아오십니다. 십자가를 보라. 그 버림받는 존재가 곧 우리 자신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성령이 찾아온 성도는 진정 근원적으로 무엇에 대해 감사하고 무엇에 대해 고마워하는 지를 알게 됩니다. 자신에 몰두하고, 자기 잘 잘못에 대해서 변명하고 방어하고 핑계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이 쓰레기며 이미 죽은 자이기에 오직 주님이 하신 일만을 생각하며 감사합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달릴 때 있었던 강도가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임신한 여인의 자궁 안에 들어 있는 것처럼, 성령 안에서 모든 것이 종결되었음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2강-엡 5장 18-19(술취하지 말라)1912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5장 18-19입니다. 신약성경 314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5:18-19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갑자기 사도바울이 술취함을 들고 나왔습니다. 술 취함이라는 것은 여기서 뭐라고 사도바울이 이해하느냐 하면, 방탕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방탕한 것이라는 것은, 이 본문 앞에 에베소서 5장 7절, 8절, 9절, 계속해서 나오는 것이, 어두움과 빛을 대비시키고 또 순종과 불순종을 대비시키는 가운데서 어두움에 속한 모든 행태, 모든 어두움의 행위의 결집이 방탕, 제멋대로 사는 거지요, 방탕으로 결집이 되고 그 방탕하고 있다는 증거로 사도바울은 술 취하는데 두고 있습니다.
‘인간이 어두운 행동을 할 때 어두운 행동이 계속해서 모이게 되면 그게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나타날 때 술 취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술 취함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말은 어두움으로 사는 것이 재미있으면 되는데 어둡게 사는 그것이 족한 것이 아니고 결핍과 미흡함과 목마름, 이런 것이 계속 느껴지는 거예요.
게다가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그것을 모면하기 위해서 인간이 찾는 것이 있는데 술을 찾게 된다는 겁니다. 인간이 방탕하도록 하나님께서 만든 것이 아닌데 인간이 방탕했으니까, 원래 만든 인간의 본질과는 달리 인간들이 억지로 살아가니까 그 갭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 갭을 사람들은 술로 달래지 않으면 달랠 어떤 묘책이 없게 되는 거예요.
비로소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술 취하는 것은 인간의 보통 행동가운데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연속되어 있는 겁니다. 술을 한 달 끊었다고 해서 술을 안먹는다는 것이 아니고 술을 한 달 끊었지만 그 끊어짐이 유효하지 않아요.
언젠가는 또 화날 일이 있으면 술을 찾게 되어 있고, 술을 마시게 되어 있고, 이왕 마시는 것 그냥 취하지 않고 마시는 것은 음료수하고 똑같기 때문에 술을 마실 때는 목표가 있는데 취하고 싶어서 먹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취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그러면 취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자신이 너무 괴로우니까 자기자신을 잠시 잃어버리고 싶고, 잊고 싶은 거예요. 종이봉지나 비닐봉지에 자기머리를 처박는 겁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지 않고, 그냥 비닐봉지에 자기 머리를 처박는 행위, 이게 술에 빠지는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자기자신한테 심취하는 모습이지요. 자기자신한테 심취한다는 이 모습,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나만 여기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괴로운 나를 없애고 싶은 상태, 그 상태를 어두움에 속한 행위의 결론으로 보고 있습니다.
오늘본문에서 사도바울이 인간이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술 취하는 것을 가지고 무엇과 대비시키느냐 하면, 빛과 어두움의 행위를 했을 때 나오는 결론과 대조를 시킵니다. 어두움이 아니고 빛에 속한 사람, 그리스도의 열매에 속한 사람에서 나오는 것은 19절에 나오지요. 방탕하지 않은 거예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이것은 바로 성령의 충만함, 성령에 취하는 거예요. 술 취하는 것과 성령에 취하는 것, 그 두 개의 취함을 대비시키면서 이 세상은 빛 아니면 어두움, 어두움 아니면 빛의 세계로 구분되어 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보면서 인간이 자기자신을 굉장히 괴로워하고 힘들어 하는 이것은 현실과 본인이 지금 살아가는 모습과 어긋나고 맞지를 않는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이 만든 세상과 내가 나를 꾸려가는, 꾸역꾸역 자기를 이끌고 가는 그것과 틈이 벌어져서 합치되지를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고생은 누가 하느냐? 본인만 고생할 뿐이지요. 그걸 그 때 그때마다 술로 달래는 겁니다. 장혜진이라는 가수가 부른 노래 가사 중에 그런 것이 있어요. “맨날 술이야.” 얼마나 세상사는 것이 힘들었으면 맨날 술이에요. 죽지 못해 사는 겁니다.
그런데 이 술을 과거에만 먹은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술 먹을 이유가 발생된다는 말은 결국 인간이 자기시간을 짊어질 때 그 시간에 질질 끌려가는 인생이 되는 거예요. 대책 없습니다. 30을 사나, 40을 사나, 50을 사나 어떤 대책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맨날 술이에요. 술 먹으면서 계속해서 50, 60, 70, 계속해서 어디까지 끌려가는지를 몰라요. 시간 끌어봤자 소용없어요. 술 먹는 사람들은 해답이 없으니까.
술을 왜 먹느냐 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의 정답이 안나오고요.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사람과 대비되면서 해답이 나옵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자신한테 심취하기 때문에 술을 먹는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내린 결론이에요.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아가야 할 텐데 나아가는 방법을 몰라요. 그냥 병든 이 몸 가지고 시간 따라, 세월 따라, 인생 따라 그냥 질질 끌려갈 뿐입니다.
자기가 끌고 가는 것도 아니에요. 질질 끌려가고 있습니다. 시간에. 아침에 눈 뜨면, 오늘도 하루라는 시간에 본인이 끌려가고 있는 겁니다. 왜 사는지 사는 이유도 모르면서 이 허전함을 달랠 수 있는 것은 술밖에 없지요. 술과 성령의 차이점은 뭐냐? 술은 눈앞에 보인다는 겁니다. 컵에 따라서 먹으면 되거든요.
저는 잘 모르는데 시바스 어쩌고 그런 술이 있답니다. 양주라는데 비싸답니다. 잘사는 사람은 시바스, 못사는 사람은 소주한잔. 남편 출근하고 애들 학교 보내고 주부들이 습관처럼 캔 맥주 집에서 마실 때 알코올중독이 많이 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반복적으로 술을 마시고 새댁들이 저희끼리 모이면 낮이고 밤이고, 점심에 칼국수 먹어가면서도 소주 시켜서 먹어요. 제가 목격자입니다. 애 안고 나와서도 낮술 먹고 있는 거예요.
아가씨때 했던 그 버릇 있잖아요. 술을 왜 먹는지 모른다는 말은 인생을 왜 사는지 그 이유도 모르면서 그냥 사는 거예요. 맨날 술이에요. 맨날 술 먹는다는 말이 아니고 술이라는 해결책은 있으니까, 술 먹으면 해결되니까 생각은 맨날 술이에요. 노래 제목을 너무 잘 지었어요. 맨날 “술이야” 자기심취를 하는 이 모습, 어두움에 속한 일의 결론이 이 세상은 술 취하는 세상이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술 취한 이 모습을 고치기 위해서 신을 믿으면 되지 않겠느냐? 하나님을 믿으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나오는데 하나님을 믿는 그것이 바로 술 취한 거예요. 왜냐하면 이 땅에는 하나님이 없어요. 왜 없느냐? 인간들이 하나님을 죽여 없애버렸으니까. 하나님은 없는데 교회는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어요.
하나님은 없다니까요. 하나님은 없는데 술 먹는 기분으로 하나님을 믿는 겁니다. 술취해보는 기분으로. 내 머리에 비닐봉지를 감아서 ‘역시 나만 최고야 나만 남는 거야. 딴 것은 믿을 것 없어. 나만 믿어야 돼.’라는 식으로 외로우니까 거기에 양념처럼 하나님을 집어넣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게 바로 자기한테 자기가 심취하는 모습이에요.
있지도 않는 하나님을 왜 믿습니까? 하나님은 없는데. 없다는 그 말이지요. 자꾸 만들어내는 거예요, 하나님을, 인간이. 성령께서 이 땅에 일하시는 것은요, 하나님이 있음의 증거를 찾아주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는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서 성령께서 일하시는 겁니다.
네가 지금 스스로 너 자신을 가장한다. 마치 술취해버리면 모든 걱정근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없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그 술 취함의 대용으로서 하나님에 취해보는 겁니다. 하나님에 심취해보는 거예요. 신에게 심취하는 거예요. 교회 와서. 새벽기도 하면서.
그러나 하나님께 심취하면 할수록 거기에 뭐가 없느냐 하면, 하나님이 없어요. 거기에 하나님에 심취하는 나만 남지 그 현장에는 하나님이 없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에게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안들킬줄 알았지요? 마귀가 다 알고 있어요.
네가 믿는 하나님은 네 옆에 있는 술병이에요. 마약이고 술병이에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이 세상은 조용하지를 않습니다. 인간들이 왜 술을 먹느냐? 조용하게 있을 수가 없어요. 인간의 소원은 뭐냐? 제발 날 안건드리고 날 그냥 내버려두기를 원하지만 하루하루 조용한 날이 없어요.
무슨 대책이 있어야 하는데 술 안먹고 버틸 재간이 없다니까요. 술 먹으면 또 지옥갈 것 같으니까 술 먹는 대신 하나님 믿는 거예요. 예수 찾는 거예요. 술 먹는 것과 하나님을 부르는 것과 차이점이 뭐예요? 똑같아요.
제가 수천 번 이야기했습니다. 진짜 주님하고 우리하고 단절돼 있다고. 단절돼 있지만 교회에 나가서 사람들이 말하는 신은,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마치 술을 찾으면, 편의점에 가서 소주 한 병을 구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과 나 사이가 연속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얼마든지 주의 이름 부르고 하나님 이름 부르면 하나님이 조르르 내 앞에 달려와서 “뭘 위로해 줄까?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 이야기를 막 할 것 같아. 그게 조작된 건데요. 악마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없애놓고 그 없애진 빈자리에 등신같은, 바보같은, 나무조각같은 신을 거기에 잔뜩 집어넣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를 만들어놓고. 불교에서 기독교로 바꾸면 천당 보내주는 줄로 압니까? 그런 것 없어요. 그 종교나 그 종교나 종교는 다 똑같은 거예요. 내가 심취할 수 있는 대상자를 내가 하나 선정하는 겁니다. 그것도 연속성으로. 내가 여기 있음에 내가 선택하는 거예요. 내가 골라잡는 거예요. 내 맘 편하기 위해서.
그런데 인간은 자신이 편할 위치에 있습니까? 편할 자격이나 권리가 있습니까? 없어요. 그런 하나님 믿고 천당 간다고 여겼던 사람들에게 십자가 복음, “하나님이 인간 손에 의해 죽었다. 네가 없앴잖아, 네가! 땅에 있는 하나님을 네가 없앴잖아.”라고 이야기하면 인간들은 그 말을 굉장히 서먹하게 여기고 불편해 합니다.
어느 교회 가서 십자가 전하면 굉장히 불편해해요. 이 말은 모든 인간내부에 켕기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신을 인정해줄 테니까 나를 건져달라는 연속성을 딱 갈아놓으니까 주님께서 연속성을 찢어버리는 거예요.
“네가 나에게 오다니? 가당치도 않은 일인데 네가 지금 누구 사주를 받고 그런 욕심을 부리느냐? 너는 나에게 올 수가 없어. 너는 어떤 짓을 해도 올수가 없어. 술 끊고 예수 믿어도 못 와. 내가 지금 너에게 십자가 이야기하는게 불편하지?” 불편하다는 것은 켕기는 것이 있다는 거예요.
십자가 빼고 거기다가 ‘하나님 살아계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이걸 집어넣고 싶은 거예요. 인간들은 사랑의 하나님을 집어넣고 싶은 거예요. 교회마다 플래카드 붙여놓은 것을 보세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행복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찾으세요.” 이거 왜 붙여놓습니까? 다른 하나님으로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쉽게 구할 수 있는 술병을 구하듯이 쉽게 구할 수 있는 하나님을 자기 옆에 두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과 질긴 악연이 있어요. 인간은 이걸 피하고 싶고 성령은 이것을 들추고 싶은 겁니다. 이게 현실이에요. 이것만이 팩트입니다. 이것만이 사실이고 다른 것은 전부 다 거짓말이에요. 구라에요 전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만이 이게 팩트, 사실이고 나머지는 다 거짓말이에요.
그리고 예수님이 죽을 때 누구 손에 죽었습니까? 하나님이 안믿는 사람에게 죽었습니까? 맨날 술만 먹는 인간에게 죽었습니까? 아니에요.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사람들에게 죽었어요.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극단의 예는 뭐냐? “신이시여, 우리의 찬송을 받아주옵소서. 우리의 예배를 받아주옵소서.” 이것이 바로 악마의 사주를 받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종적인 모양새가 그거예요. 신을 믿는 거예요. 신을 찾는 겁니다.
마태복음 5장 20절에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것, 신을 예배하는 것, 신을 찬양하는 것, 신에게 영광 돌리는 것.
그런데 그 턱을 인간이 못넘어요. 왜냐하면 신에게 영광 돌리고 찬양할 때마다 잊지 못하는 것은 찬양하고 있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예배하고 있던 자기자신에 더욱더 심취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나를 잊기 위해서 술 먹는다고요. 술 먹으면 먹을수록 자기를 더욱 잊지 못해요. 내가 신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술을 먹거든요. ‘나는 누구도 나에게 흠집 내거나 누구도 나를 탓할 수 없고 누구도 나를 건드릴 수 없다. 이 순간만큼은, 소주잔을 든 이 순간만큼은 대통령이든 누가와도 나를 터치 못해. 왜? 나는 신이거든.’
그걸 매순간 확인하고 싶어서 술을 먹는 거예요.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세상이다. 따라서 세상이 아무리 나를 힘들게 할지라도 나는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나는 나의 절대성을 붙잡을 거야. 술이야! 술이 왜 이렇게 달지?’ 술에 설탕을 넣는 모양이지요. ‘술이 왜 이리 달지?’ 하면서 그거 먹는 것이나 새벽기도해서 은혜를 받았다고 “주여, 찬양합니다.” 그거하고 다를 것이 뭐가 있어요? 자기신체는 동일한데요. 자기한테 빠져있는 모습은 동일하거든요.
인간은 악마의 사주를 받기 때문에 때려죽여도 나를 바꿀 생각은 없어요. 추호도 없어요. 나를 바꿀 생각이 없기 때문에 뭘 바꾸냐 하면, 신을 바꿔버려요. 십자가로 안나타나는 신, 십자가 없이 그냥 부활의 신, 부활의 신은 십자가를 건너뛰니까 편하게 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걸로 교체하고 싶은 겁니다.
마치 현실을 보여주는 퍼즐이 있는데 퍼즐 조각을 잘못 끼워서 억지로 맞지도 않는 그림을 집어넣는 거예요. 예수님은, 하나님은, 아들의 십자가 죽으심을 가지고 세상을 설명하고 그것을 구심점으로 모든 것을 해독하는 것을 집어넣었는데 그 퍼즐조각을 빼버리고 날 사랑하는 하나님을 거기에 꽂아서 ‘하나님, 나 이정도로 괜찮지요, 그지요? 우리사이 편하게 생각합시다. 우리사이 좋은 사이인줄 인정합니다.’ 인간이 무슨 좋은 사이가 있어요?
하나님은 하나님이 집어넣고 싶은 것을 집어넣는데 인간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것을 원하고 있어요. 예배당에 와서, 교회 와서 듣고 싶은 것을. 제발 술 안마셔도, 하나님 소리만 들어도 내가 괜찮은 존재인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그런 설교 해달라는 거예요. 자기긍정이에요.
그런데 우리 자신은요, 이 세상의 중심이 우리자신이 아닌 것을 어떡하면 좋겠지요? 우리자신이 중심이 아닌데요. 인간이 술 마시는 것은 자신에 대한 유일한 최종적인 헌신이지요. 술 마실 때 가장 자기가 자기답고, 자기한테 헌신하고, 자기가 자기를 다독거리는 거예요. ‘걱정 마. 지옥가도 내가 있잖아. 내가 너 지옥가도 지켜줄게.’
술 먹는 순간 이 세상이 외로워도 술만 있으면 외롭지 않는 이유가 내가 나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걸로 족하다는 겁니다. 그 술에다가 하나님을 집어넣어보세요. 문장이 다 돼요. ‘내가 있잖아. 하나님이 있잖아. 너 지켜줄게.’
그 모든 문장들, 멘트의 뜻은 뭐냐? ‘나는 안달라지련다. 나는 안바뀌어지련다. 나는 이대로 밀어붙이고 싶어. 죽을 때까지. 세상이 나쁘지 나는 안나빠. 그래서 세상이 나를 힘들게 해도 나는 하나님이 있으니까, (같은 말로) 술이 있으니까 술이 나를 달래줄 거야. 하나님이 나를 위로해줄 거야. 나를 달래줄 거야.’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가정에 우환이 있고, 누가 병이 들고 아프고, 살맛이 없어질 때, 세상이 그렇게 날 흔들고 힘들게 해도 내가 잠시잠간 위로받고 행복해질 수 있는 순간은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술 먹는 그 순간밖에 없다.’라는 식으로 하나님을 찾으면서 “하나님, 이 모든 괴로움을 잊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거예요.
“맨날 술이야”가 아닙니다. 맨날 가짜에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냥 인간들끼리 지옥으로 가도록 두면 되는데 문제를 하나님께서 일부러 자기 아들을 보내서 지독한 악연, 끝까지 가는 악연, 지옥과 천국을 가름하는 그 악연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만들어버렸어요. 자기 아들을 줄 때 아무도 자기 아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집어넣은 거예요.
요한복음 15장 22절에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다시 말해서 이 예수가, 내가 이 세상에 오지 않았다면 너희들은 밟힐 필요가 없을 정도로 괜찮은 존재라고 스스로 착각하지만 내가 와서 말하는 순간 네가 그렇게 ‘나는 괜찮은 존재, 바뀔 필요도 없고 변화될 필요도 없고 이대로 천국가면 된다.’ 하는 그 자체가 죄의 극치가 되는 거예요. 너희 아비는 악마니까.
악마는 늘 이야기합니다. “바뀌지 말아라. 그대로 괜찮아.” 괜찮다고 위로해주지요. “힘들지? 조금만 참아. 천국이 너를 기다릴거야.” 누구 맘대로요? 도대체 목사들의 그러한 말들 속에 뭐가 빠졌느냐 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문제를 일으켰다는 그 문제가 다 뽑히고 없어요. 주께서 의도적으로 이 세상에 근원적인 문제를 유발했다는 그 사실이 다 없어지는 겁니다.
“내가 뭐 어때서?” 맨날 인간들이 이거예요. “내가 뭐 어때서? 나 조용히 좀 살자. 나 좀 내버려두면 안되겠니?” 조용히 사는 것? 어디 그런 욕심을 부립니까? 이 세상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러나 인간은 자기절대를 붙잡기 때문에 “조금 내버려둬. 조용히 살도록 내버려둬. 나에게 간섭도 하지 말고 내가 움직일 때까지 기다려줘.” 맨날 이런 식이에요.
자녀를 두고 있는 분들은 늘 느낄 겁니다. 애 세 살 때, 네 살 때 그렇게 엄마아빠 말 잘듣던 아들딸들이 한 아홉 살, 열 살이 되면, 요즘은 사춘기가 이르니까요, 그 나이쯤 되면 애들이 자기방 문을 꽉 잠가놓고 “밥먹어라” 하고 똑똑 두드리면 “엄마, 제발 날 좀 내버려둬.” 이렇게 하거든요. 밥을 먹든 안먹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엄마 아빠는 나한테 간섭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 때 부모는 이런 뜻 모를 이야기를 합니다. “도대체 저 인간은 누가 저렇게 만들었지?” 부모가 자식한테 잔소리를 할 때 근원적인 뿌리까지 안건드리고 문제를 이야기해요. 숙제했나, 밥 먹었나, 손 씻었나, 이런 표면에 있는 것들만 건드리면서 애들은 근원적인 것이 뭔지를 몰라요. 애들은 그저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하게 되면 어떤 선물이 주어진다는 것을 간파해서 겉모습만 부모가 시키는 대로만 해줘요.
네가 근원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을 어느 부모가 자식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겠어요. 네가 손을 씻든, 숙제를 하든, 그게 죄가 된다는 것, 그걸 어느 부모가 이야기하겠습니까? 이런 이야기 나오고 보니 그런 어른이 있기는 있어요. 갑자기 생각이 나네요. 자기 손자보고 죄인이라고 이야기하는 분이 있어요. 저 영천에 사는 분.
그분 빼놓고, “네가 기도를 하든지 뭘 하든, 네가 하나님을 믿어도 죄인이야. 네가 십자가 하나님을 믿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든, 네가 일단 죄인 되고 난 뒤에 일단 선택해.” 그렇게 가르쳤던 부모님이 계십니까? “교회만 나가주면 휴대폰 바꿔줄게.” 그런 협상 타협에 대해서 자식들은 흠집도 안나요.
왜 자식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못하느냐 하면, 부모 자신이 맨날 술 취해서 있기 때문에, 맨날 내 잘남, “아들아! 나 잘난 것 봐라. 너도 잘하면 나처럼 잘날 수 있어.” 부모는 자식들 앞에 자기잘난 것을 자랑하고 있고, 엄마는, 내가 이만큼 너희한테 수고했다는 자기잘난척만 하고 있는 거예요. 부모가 십자가 앞에 나선 적이 없어요.
교회가 눈에 보이니까 교회 다닌 거예요. 술병이 앞에 보이니까 술을 마신 거예요. 눈에 보이는 것만 하는 거예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만 한 거예요. 그러나 성령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성령은 다만 찾아와서 우리로 하여금 그 켕기는 것,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우리의 불편한 관계를 들춰내는 거예요. 왜 불편한지?
“하나님은 좋아하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너무 흉측하다고 외면하는 그 얼굴을 똑바로 쳐다봐라.” 네가 아는 하나님은 마귀가 만들어준 가짜거든요. “가짜 쳐다보지 말고 진짜를 봐. 저 십자가에 달려서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지옥까지 내려간 저 분이 바로 너희 현모습이야. 네 진짜 모습, 너의 증명사진이다.” 그 말이지요.
집에 냉장고도 없는데 어떤 사람이 “냉장고 신상이 나왔습니다.” 하면서 기능이 어쩌고, 설비가 어쩌고, 이렇게 사용하라고 한다면 냉장고를 전혀 구경도 못한 저 아프리카의 사람들, 냉장고를 본적도 없는 그 사람들에게 냉장고 설명해줘도 무슨 이야기인지를 못알아 듣잖아요. 지금 사도바울이 꼭 우리에게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안에 성령이 없고 하나님이 없는데 지금 하나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내가 조작한, 내가 만들어낸 하나님에다 비스무리하게 ‘이제는 교회도 나가고 술도 끊었어.’ 이런 식으로 흉내 내고 모방하는데 급급해버리는 겁니다. ‘술 끊으면 천당 보내주지요?’ 또 다시 자기에게 집착하고 있고 자기를 붙들고 있는 겁니다.
자기는 달라질 마음이 없어요. 기껏 술 끊고, 담배 끊고 그러면 충분하게 얼추 달라진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근원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데요. 그 바탕, 십자가의 그 불편한 관계는 제거되지 않았는데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좋아서 딴 것은 생각이 안나요. 뭐 그런 식으로 살아가십니까? “십자가만 생각하면 내가 밥을 안 먹어도 기뻐요.” 뭐 그렇게 살아가십니까?
그 정도 돼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게 된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 냉장고도 없는데 냉장고 설명하는 그것이 헛수고인 것처럼 하나님이 없는데, 사실은 이 세상모두가 무신론자거든요, 무신론자인데 하나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전부다 헛방이 되는 거예요.
성령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자기백성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래서 있다’고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나가십니다. “하나님은 이래서 네 속에 없는 거야.” 하나님이 없음을 이야기할 때 궁극적으로 우리의 가슴팍을 밀어내요. 밀어내가지고 “네가 교회 나와도 네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잖아. 집에 가라. 집에 가도 없지? 그러면 나가라.”
계속 밀어서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십자가 앞에다 딱 집어넣어요. 이게 바로 성령이 하는 일입니다.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최종적인 것, 확정적인 선에 딱 우리를 집어넣고 스톱시킵니다. 마치 우리로 십자가 옆에 달린 강도2, 강도3가 되게 하는 거예요.
“네가 여기서 기대할 수 있고 네가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그동안 줄곧 평생 너 자신만 찾고 너에 심취하고 너만 바라봤잖아. 이제는 눈을 돌려서 저분 한번 바라봐라. 십자가에 못박혀 피 흘리고 있는 예수님 한번 바라봐라. 저분이 오심으로서 네가 그동안 아무리 애쓰고 도 닦아 가면서 ‘나는 누구냐, 우주는 뭐냐, 진리가 뭐냐?’ 찾던 것, 바로 저게 중심이야.”
저게 모든 이유와 해석의 중심, 현실의 중심은 십자가로 다 흘러내려온 거예요. 십자가로 모아지기 위해서 주님께서 오신 거예요. 우리는 악마의 사주를 받고 얼마나 불편했습니까? “십자가 믿어줄 테니까 더 이상 찾아오지 마세요.”
마치 예수님을 외판원처럼 대하듯이 “우리 이제 우유 안 받습니다. 신문도 안 받습니다. 나가세요. 이 집은 내 집이지 당신 집이 아니에요. 바빠서 지금 어디 가야 되니까 이야기하지 마세요.”
우리는 맨날 우리자신한테 왜 그리 바쁜지요. 바빠도 너무 바빠요. “너 바뀌지 않으면 천국 못간다.” 이렇게 하면 “저 바뀔 맘 없습니다. 난 이대로가 좋아요. 이대로도 잘먹고 잘 살아왔습니다.” 하면서 ‘어디서 간섭질이야?’
주님의 방식은, 성령의 방식은 우리를 죄인으로 몰아넣는데 그 몰아넣는 방식은 구약에 나옵니다. 구약 열왕기상 21장 15절-19절에 보면, 나봇이라는 사람이 포도원을 갖고 있었는데 아합이 그것을 탐을 내서 뺏기를 작정했습니다.
말로 해서 안되니까 자기 마누라한테 물었어요. 마누라가 아주 독한 마누라 이세벨입니다. “당신은 왕이잖아. 일을 쉽게 가져가야지. 그냥 죽여버려라. 죽이고 빼앗으면 되잖아.” “아하, 그 수를 몰랐네.” 그래서 나봇을 죽이고 나봇이 갖고 있던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이야기가 그걸로 끝났습니다. 눈에 보이는 포도원은 아합왕의 소유로 달라졌습니다.
이야기가 그걸로 끝난 것으로 여겼는데 열왕기하 9장 25, 26절에 보니까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후가 그 장관 빗갈에게 이르되 그 시체를 취하여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밭에 던지라 네가 기억하려니와 이전에 너와 내가 함께 타고 그 아비 아합을 좇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이 아래 같이 저의 일을 예언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젯날에 나봇의 피와 그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노라 또 말씀하시기를 이 토지에서 네게 갚으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 시체를 취하여 이 밭에 던질찌니라.”
죽었던 사람이기에 일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죽은 나봇이 일을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예언이고, 이게 바로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에베소서를 봤잖아요. 이 말씀은 죽었던 분의 살아 있음을, 죽었던 분이 비로소 일하고 있음의 증거로서 우리는 에베소서 5장 18절, 19절을 보고 있는 겁니다.
죽지 아니하면 일을 안해요. 이 세상에서는 산자만이 일한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악마의 사주를 받고 그렇게들 알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내가 일했기 때문에 평생 내가 이만큼이나마 살았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대로 나갑니다. 모든 개념을 다 바꾸세요. 퍼즐조각을 바꾸세요. 죽은자만이 일하고 산자는 일 못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은 죽은자만이 진짜로 성령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그 원칙을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살아 있으면 주의 일에 방해돼요. 왜? 나는 살아 있는 나에 심취하기 때문에. 이걸 포기를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은 성령으로 맨날 죽입니다. 맨날 죽여요. 제발 죽은자로 입 다물고 있어요.
“아침에 밥 먹는 것부터 오줌 누는 것부터 잠들 때까지 모든 것은 주의 일이다. 너의 일 아니야. 네가 거기서 평가하지 마. 네가 너에게 자책하지 마. 네가 옳다느니 그르다니느니 말할 잽도 못돼. 이것은 내가 일으킨 일이야. 네가 그것을 따져서 뭐할 건데? 그래서 너 잘난체 하려고? 네가 의롭다는 소리 하려고?”
그것은 술 취하는 일이거든요. 그것은 자기한테 심취하는 일이에요. 우리는 나의 선행과 나의 의로움에 완전히 푹 빠져있어요. 그래서 바리새인 된 겁니다. ‘아프면 안되는데. 여기서 쓰러지면 안돼.’ 무슨 죽은 놈이 아픈 것이 있고 죽은 놈이 쓰러지는 것이 있습니까? 성령은 십자가를 통해서 다시 우리에게 오거든요.
그러면 성령 안에 뭐가 들었느냐 하면, 너는 이미 십자가에 예수님과 같이 죽었다는 거예요. 이걸 좀 더 쉽게 말씀드릴까요? 성령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은 임신한 여자의 자궁 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그게 성령 안에 있는 거예요. 성경에 보면 성령 안에서 의롭고, 성령 안에서 천국이고, 성령 안에서 구원이고, 성령 안에서 영생이고, 성령 안에서 축복이에요.
그러나 우리 코앞에는 술병이 있다고요. 교회가 있고 술병이 있다고요. 살아 있는 내가 뭘 하려고해요. 기도하려고 하고, 헌금하려고 하고, 전도를 하려고 하고 뭘 하려고 해요. 전도하는 그것 술 취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헌금하는 그것 술 취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헌금했다고 뿌듯해하는 것, 헌금한 내 뒷모습에 내가 도취되어 있는 거예요. 자기한테 매료되어 있는 겁니다.
“괜찮잖아. 나 안달라져도 괜찮아 지금. 멋있잖아.” 죽은 놈이 무슨 멋있는 것이 있고, 죽은 놈이 무슨 죄를 짓습니까? 죽은 인간이 무슨 잘난 것이 있어요? 열왕기하 13장 20, 21절 “엘리사가 죽으매 장사하였더니 해가 바뀌매 모압 적당이(강도가) 지경을 범한지라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적당을 보고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
엘리사는 죽었는데, 엘리사는 아무것도 못하는데 어떤 시체를 엘리사의 묘에 가져다 놓으니까 죽은 자가 살아났어요. 죽은자만이 일을 하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십자가지신 예수님만이 일할 수 있어요. 사도바울은 자기가 죽었다는 상처가 자기 몸에 있다는 거예요. 그 상처가 뭐냐? 사탄의 상처에요. ‘그래, 나는 사탄이었어. 내가 사탄의 종이었어.’
그 상처를 지닌 사도바울이 성령 받은 사람이고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평생을 사탄의 사주를 받아서 내 잘난맛에 살아온 이것이 바로 이 육신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내 안에서 진짜 나의 본질을 제대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 이정도로 개판이었어. 술만 안먹었다 뿐이지 술 대신 하나님을 찾았어. 이 정도로 나는 더러운, 나밖에 모르는 악마의 앞잡이였어.’라는 것을 사도바울은 고백하는 겁니다.
‘내가 선을 원하지만 내 속에 악이 있어서 악이 나를 이겼다.’ 우리는 왜 그런 고백을 못하는 겁니까? 하겠지요. 너무 입이 안싸서 말을 안하지만 성령이 그것을 가르칩니다. “너는 쓰레기야. 쓰레기를 사용하는 거야, 기능으로. 네 주제 좀 파악해. 나는 한시도 너에게 기대한 적도 없고, 기대할 것도 없고, 아무것도 원치 않아.” 나는 무신론자라는 그것만 해도 충분하다는 거예요.
사도들은 이미 죽은자들입니다. 사도행전 8장 18, 19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사도들이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게 하고 복음을 전하니까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보기에 그것이 굉장히 신기했던 모양이지요. 그래서 내가 돈줄테니 그 성령 나에게 달라고 했어요. 시므온은 본인이 살아 있다고 여기고 자기에게 돈이 있고, 돈만 있으면 살아 있는 내가 지금보다 훨씬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성령의 일을 하는 괜찮은 사람으로서 계속 연속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사도는 말하기를, 악한 것이 너에게 달라붙어 있으니까 머릿속에서 이런 것이 나온다는 거예요. 사도행전 8장 20절에 베드로가 하는 말이,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
망해버려라. 사도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사도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사도는 이미 망했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 십자가질 때 다 도망갔던 사람들이거든요. 예수님 십자가질 때 그들은 다 도망갔어요. 단절이었습니다. 단절의 증거를 다 갖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이 단절을 누가 건너왔느냐? 성령, 예수님이 성령을 주심으로서 저쪽세계에서, 예수님 십자가세계에서 성령을 주심으로서 비로소 성령의 일을 하는 사람 된 겁니다. 본인이 하고 싶어서 귀신 쫓아낸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자기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사도본인이 아니고 자기 안에서 주님이 일하시는 거예요.
멋있게 귀신 쫓아내고 앓는 사람을 낫게 해줘야 성령의 일입니까? 그냥 매일 아침 설거지 하고, 밥먹고, 잠자고, 그것도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안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의 취함이고 감사와 고마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어요.
왜, 어떻게, 주님은 희생했다는데, 우리 인간은 여기 있는데, 그 중간에 감사와 고마움이 연결이 안되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가 가짜기 때문에, 가짜 신을 계속해서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뭘 알기는 많이 알지요. 십자가 피가 어쩌고 하면, 복음 이야기하면 한 시간 동안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감사와 고마움이 없는데요. 중간에 살아있다는 내가 방해를 놓은 거예요. 멋있는 내가 되려는 그 내가 주의 일을 방해한 겁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시므온인 거예요. 그것 때문에 사도행전 8장이 기록되어 있는 겁니다. 죽은자만이 일하는데 나는 안죽으면서 일하려고 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23장 3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아벨이 죽고 난 뒤에 일을 하시는 거예요. 아벨 안에서 주의 일을 하는 겁니다. 아벨이 안죽고 가인에게 복수하는 것이 아니에요. 죽고 아벨이 죽었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가인을 하나님께서 징책하는 겁니다. 내가 죽고 내가 사는 거예요.
내가 죽을 때는 아담의 몸이 죽고 주의 십자가의 상처가 있는, ‘나는 인간도 아니고 마땅히 지옥가야 됩니다.’ 그런 사실을 이미 몸에 장착을 하고 그 죄와 주님의 의와 합세해서 언약적인, 하나님의 약속된 예언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서 터져 나오는 거예요.
같이 있더라도 초월된 사람. 같이 있더라도 초월되었다는 것은 뭐냐? 같이 있어도 결국 섞이지 않고, 혼합되지 아니하고, 주께서 철저하게 우리 자신과 주님을 분리하면서 우리를 가지고 사용하실 때 우리는 나에서 떠나버린, 더 이상 내 일이 없다는 것, 나는 죽은자기 때문에 더 이상 나에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것을 근거로 해서 오늘 본문에 보면, 시와 찬미로 노래하는 겁니다.
끝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혼자서 시와 찬미를 하는 것이 아니고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라고 했어요. ‘서로’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주께서, 너 혼자 잘나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직업이나, 성격이나, 재산이나, 직분이나, 일체 관계없이 성령 받은 사람은 서슴없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가 서슴없이 나올 때 그게 하나님께서 이미 시작된 천국, 이미 시작된 예수님과 함께 있음의 생활이 어떠함을 오늘 19절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이미 죽었으니까, 살아 있는 것은 주님이 살아 있는 것으로 족하니까 더 이상 죽은 나에게 신경 뚝, 신경 안쓰게 되니까 모든 일에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그저 고맙고 감사합니다.”라는 말 외에 더 이상 우리에게서 나올 것이 없는 겁니다.
원인도, 이유도 주님으로 인하여. 건너오신 주님. 끊어진 상태를 다시 도로 건너와서 “너는 우상숭배자야.” “맞습니다.” “너는 하나님 조작했지.” “맞습니다. 모든 지적질이 저에게 합당합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하는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가짜 만들어놓고 대충 때우려고, 천당 가려는 욕심은 있어가지고 천국 가면서 또 내 욕심대로 살아보려는 꼼수를 썼던 저희들, 이 꼼수가 성령에 의해서 무신론자로 발각되는 감사와 고마움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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