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지옥하나님40-인간의 본질

아빠와 함께 2024. 2. 20. 22:27

[24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40 - 인간의 본질

24,02,05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믿기 불가능한 현실 !!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성경을 보고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식이 무엇인고 하니, "네가 믿는 믿음이 가짜일 것이라고, 네가 스스로 한번 생각해봐라" 라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들을 자꾸만 일으키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믿습니다" 라고 하지만, 돌아가는 현실은 무엇인고 하니까, 믿을만한 세상이 전혀 아니라는 것인데, 그래서 인간은 그 어느 것도 자기 자신 외에는 믿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 자들을 보고 하나님께서 "너를 믿지 말고 나를 믿어라"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그게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늘 깨우치게 된다는 것이죠.

이렇게 "사랑, 믿음, 소망" 이라고 했을 때,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믿음도 자기를 믿지 않는 것이고, 소망도 자기를 소망하지 않는 것이 소망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에서의 개념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부정하는, 즉 자기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을 경유해서 사랑과 믿음과 소망이 주어지게 된다는 말이죠.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다" 라고 했는데, 그러면 우리 인간은 그 말씀을 보고 자기를 미워하려고 하는 시도는 일단 해본다는 겁니다. 즉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죄인이다" 라는 식으로 나온다는 것이죠.

(요 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그런데 이 세상의 돌아가는 사태는 어떻습니까? 자기를 부정하지 못하는 식으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디서 실패를 하는고 하니, 자기를 부정해야 영생이 있는데, 자기를 미워해야 하는데, 그런데 자기를 미워할 만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럴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하느냐는 겁니다.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고 하니, 일단 교재 184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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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 받아들이기 - 왜 인간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준 '저주받은 인간상'을 자신의 진실된 인간상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과 일치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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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여기서 전도서 8장 11절과 12절을 보겠습니다.

(전 8:11)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전 8:12) 죄인이 백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내가 정녕히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앞에서 경외하는 자가 잘 될 것이요

*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경향성 !!

여기 12절에 보면 "죄인이 백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라고 하는데, 그러니 아무리 악을 행하더라도, 그런 악한 자들이 잘 된다는 말이죠. 그러한 이 세상의 경향성, 즉 이 세상이 돌아가는 분위기가 어떠하다는 겁니까?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의 정의로움이 전혀 실현되지 않는 경향성을 띠고 돌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죄인들이 악을 행했는데 잘되고, 뿐만 아니라 의인들이 바르게 살았는데 그만 인생이 망하고 만다는 것이죠. 그럴 때 어느 인간이, "아하, 바르게 살면 망하는구나. 나에게도 소원이 있는데, 나도 바르게 살아서 한번 제대로 망해보자" 라고 나오겠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인간이 있습니까? 그런 인간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고 소망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자기가 망하지 않기 위한 또 다른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서, 그래서 그것을 챙기고 시도를 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인간이라는 말이죠.

* 왜 절이 아니고 교회에 나오죠?

어떤 사람이 "나는 절에 가지 않고 교회에 가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왜 그렇습니까?" 라고 하니,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옳습니까?" 라고 하니, "하나님을 믿게 되면 나는 망하지 않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증거를 대기 위해서 교회에서 간증집회를 열고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기 이전에는 이러했는데, 믿고 난 이후에는 이러했습니다" 라고, 즉 "사업이 잘 되었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 간증들이 들려오기도 하고, 또한 기대를 하기도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만 뽑아서 듣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내가 하나님 믿기를 잘했다" 라고 하는 자기 긍정을 유지하고 싶어서 그렇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사랑이고 자기 믿음이고 자기 소망이라는 겁니다. 자기의 선택이 올바르다는 것을, 자기가 선택을 잘했다고 하는 생각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싶어한다는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의 속성에 속아넘어가지를 않는데, 그래서 철저하게 이 세상을 악인들이 잘되는 쪽으로 돌려버린다는 겁니다. 악인들은 잘되고, 의인들은 망하는 쪽으로 말이죠. 즉 "이래도 믿을래? 이래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찾을 거야? 이래도? 이제 그만 포기하시지" 라고, 그렇게 나오신다는 것이죠.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라 !!

그러니 전도서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경외해야한다" 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는 일이 잘 된다" 라고 하시면서 짝을 맞추어주시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악인들이 잘되는 세상을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어지간하면 탈락인데, 아니 모두가 다 탈락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닌데,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왔다고 해서 넣어주고 하는 나라가 결코 아니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이사야서 55장 8절과 9절을 보겠습니다.

(사 55: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사 55:9)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여기 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라고 하시는데, 그리고 9절에서는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격차가 쫙 벌어진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위치가 결코 아닌데, 아무리 해도 턱걸이조차도 전혀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생각에 합체하려고 팔짝팔짝 뛰어보고 하는데, 그게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 다르다 !!

이게 오늘강의 핵심인데, 그렇게 '다르다' 라는 인식을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내가 그 어떤 생각을 해도 하나님의 생각과는 다르다" 라는 것인데, 그런 생각을 우리가 품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부정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만약에 "이 정도면 하나님의 뜻과 비슷하겠지? 어느 정도 부합이 되겠지?" 라고 한다면, 그것은 전혀 엉뚱한 길이라는 말이죠. 하나님의 길과 인간의 길은 다르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길은 예수님을 통해서 알려주셨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하셨다는 것이죠.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의 길, 그 길은 예수님이 홀로 가셨는데, 동행할 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혼자 가신 길, 그게 예수님의 길이라는 말이죠. 제자들도 결코 동행할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아무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길을 알고자 해도, 결코 그 길은 알 수가 없었다는 말이죠.

* 복음을 전하는 자의 기쁨 !!

사도바울의 경우에도, 그가 예수님을 알고 난 뒤에 복음을 전했는데, 그러면서 그가 놀란 게 무엇인고 하니, 그 복음을 들을 자가 생겼다는 점에 대해서 놀랐다는 겁니다. 그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고 우리 인간의 생각이 다른데, 그런데 자기가 전한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이 생겨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말이죠.

물론 사도바울은 아는데, 자기가 전하게 한 것도 성령이지만, 그것을 믿게 되는 것도 성령이 임하지 않고서는 믿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양쪽으로 다 하나님께서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 그것을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알게 되었다는 것이죠.

복음을 전하는 자의 기쁨이 바로 그것인데,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이 생겨났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사도바울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하는 것을 늘 체험하면서 살았다는 말이죠.

* 하나님의 길 VS 인간의 길 !!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여기 위쪽에는 하나님의 길, 즉 하나님의 생각이 있고, 여기 아래쪽에는 인간의 길, 즉 인간의 생각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이에는 넓은 폭이 있어서, 인간이 아무리 뛰어도 도달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놀랐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일이 위에서만 이루어진다" 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 여전히 인간 세계에 개입하고 있다" 라는 점이라는 겁니다. 지금 여기 인간세계에 일을 만들고 있다는 것인데, 즉 하나님께서 일을 벌이고 있다는 말이죠.

* 술술 풀리는 악인, 쫄딱 망하는 의인 !!

그러면 여기에서 전도서 8장을 다시 보겠는데, 인간의 일은 인간의 길과 인간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이 인간의 일과 다르다" 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악인이 잘 되게 하셨는데,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고, 여기서 문제는 의인이 그만 망하고 만다는 것이죠. 망해도 쫄딱 망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벌이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이 우리 인간에게 들이닥치게 되면, 그것은 인간의 일과는 다른 식으로 들이닥친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여기서 우리 인간의 본질이 순간순간 드러나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이 들이닥치면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죠.

우리 인간의 뜻은 무엇인고 하니까, "지금 내가 교회에 다닌다. 천국은 저기에 있다. 내가 하루하루 바르게 열심히 말씀대로 살아야지" 라고 한다면, 여기에서 중심은 자기가 되고 움직이는 것도 역시 자기 자신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그렇게 자기가 생각한 것이 '나의 본심', '나의 본질', '나의 순수함' 이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는데, 그래서 어떻게 하십니까? 인간의 뜻과는 다른 환경 속에 우리 인간을 놓아둠으로서, 그러면 여기서 순간순간 인간을 통해서 튀어나오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바로 너의 본질이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내가 야무지게 예수님을 잘 믿어야지" 라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 아니, 내가 이런 생각까지 다했어?

그러니 어떤 사태가 터졌을 때,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전혀 다른, 즉 "내가 이런 생각까지 다했어?" 라고, 자기도 전혀 예상치 못한 색다른 것이 순간순간 튀어나올 때, 그러면 자기 본질에 누가 관여했다는 겁니까? "아하, 나와는 다른 생각, 하나님의 생각이 개입해서, 하나의 사건으로 튀어나오게 하는 대상으로써 나를 사용하고 있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은 차근차근 살기도 아니고 바르게 살기도 아니라는 말이죠. 어떤 사람이 20년 정도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래서 "이 정도면 하나님께서 기도하면 다 들어줄 것이다" 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그것이 다 무너지는 순간, 즉 자기가 기도하면 잘될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 무산되는 순간, 그때 그 사람의 반응을 한번 살펴보자는 겁니다.

그 반응이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내가 이럴 줄 알았습니다. 저는 이제 기도응답도 잘해주는 다른 하나님을 믿을 겁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본질이라는 말이죠. 제 아무리 신앙으로 포장을 하고 복음으로 포장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태가 일어나서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왔던 그 모든 것이 그만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 "아하, 지금까지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했구나" 라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고 하면, "이번 사건이 오기 전까지 알았던 하나님은, 이번 사건을 맞이하면서 그게 하나님에 대한 저의 오해였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이 구원받는 본질이 튀어나온 것이라는 말이죠.

물리학에서 빛을 물질에 쏘게 되면 에너지가 튀어나오는데, 반대로 말해도 되는데, 에너지를 때리게 되면 물질에서 전자자가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즉 외부에서 자극을 주었기 때문에 그 속에서 본질이 한 조각씩 튀어나오게 될 때, 그게 그 사람의 본질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전도서 8장 11절의 말씀처럼 되었는데, 그렇지요? 이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아도 여호와를 경외함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 세상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여기서 우리에게 숙제들이 주어지게 되는데, 우리가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말이죠. 우리의 큰 과제가 무엇인고 하니, "세상이란 무엇인가?" 라는 것인데,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떤 식으로 운영하는가?" 라는 겁니다. 이게 같은 의미라는 말이죠.

그 대표적인 것이 바벨탑인데, 이게 기본이라는 겁니다. 바벨탑의 특징은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이 바벨탑은 아래로 가는 게 아니고 위로 간다는 말이죠. 계속 올라간다는 것이죠.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본의 아니게 위로 가는 것에 합세하고 있다는 겁니다.

* 방향성을 가진 바벨탑 !!

예를 들어서, 어느 가정에 손자가 태어났다고 하면, 그러면 그 손자는 어떻습니까? 자기가 태어난 그 가정의 더 위대하고 더 잘난 것에 합세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게 이 세상의 생리이고 본성이라는 겁니다. 망하는 것이 아니고, 더욱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는 것이죠.

우리가 성경에서 요한일서와 같은 곳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종종 나오는데, 즉 "이 세상의 정욕대로 살지 말아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는데, "세상대로 살지 말아라" 라고 말이죠. 같은 의미이지만, 문장이 조금 다르다는 것이죠.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 세상대로 살지 말아라 !!

앞의 문장에서처럼 "세상의 정욕대로 살지 말라" 라고 한다면, "살기는 살되 바르게 살아가면 되지 않겠는가?" 라고 나올 수가 있는데, 그렇게 다른 경우를 뽑아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의 정욕대로 악하게 살아도, 우리는 성도로서 이 세상의 정욕에 물들지 않고 바르게 살아야지" 라고 말이죠.

그런데 이것을 "세상대로 살지 말아라" 라는 것으로 고쳐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어떻게 됩니까?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정욕과 결별이 안 된다는 말이죠. 이게 요한복음에도 나오는데, 이 세상에 속했다는 것 자체가, "다른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서 정욕대로 살아도 나는 바르게 살면 되지" 라는 것을 용납해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무리 정신을 차려도 안 되는데, 그 출신자체가 이 세상이라고 하면, 세상의 경향성을 따라서 가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 세상이 경향성이 바벨탑인데,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우리는 하늘을 향해서 열려있다" 라고 하는데, 즉 "무한한 세계에 우리의 목표가 있으니,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면 그 목표지점에 접근할 수 있다. 그게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이유이고 목적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 어느 개척교회 목사 이야기 !!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서 개척교회를 한다는 말이죠. 부교역자로 특별히 불러주는 곳도 없고,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당회장 밑에서 부하노릇을 하는 것도 싫고 해서, 힘들어도 자기가 직접 교회를 개척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을 방금 이야기한 것에 적용을 시켜보면, 이 목사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세상에 살고 있는데, 이 세상이 살면서 복음을 전하면서 개척교회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목사의 경향성은 무엇일까요? '큰 교회되기' 라는 것인데, 제 아무리 복음을 위한다고 해도 결국은 바벨탑이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이 세상에서 망해서 떠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말이죠.

목사가 새벽기도회를 하는데, 그런데 교인들이 아무도 없으니 자기 혼자서 열심히 소위 새벽제단을 쌓아놓고 기도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기도내용이 과연 무엇일까요? "이 더러운 세상에 복음이 증거되게 하시고, 또한 하나님의 살아계심도 드러나게 하소서" 라고 한다는 겁니다.

* 어항을 떠난 금붕어는 살 수 있을까?

그런데 이 목사의 경우에, 여러분, 어항을 떠난 금붕어가 과연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는데, 그런데 그 목사는 기도하는 순간에 어항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는 자기만의 세계가 단독으로 형성될 수 있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이 세상은 정욕대로 사는 곳이지만, 자기가 지금 기도하는 새벽 제단만은 이 세상에 물들지 않은, 즉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공간이라고 자부를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지금 복음을 위한 일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순수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다" 라고 하는 자신감에 넘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는 다른 욕심이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으로 태어나서 과연 욕심이 없을 수가 있을까요? 그러니 자기를 몰라도 너무나 모른다는 말이죠.

* 인간의 본질은, 사건이 터짐으로서 !!

강의 처음에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했지요? 자기 각오와 그 각오로 열심히 하는 것이 본질이라고 했습니까? 그것이 아니고, 무엇과 부딪쳐야 하는데, 즉 자기 뜻과 위반되는 사태가 벌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때 비로소 인간의 본질이 드러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목사는 새벽기도를 하고 나서 난로를 꺼야 하는데, 하나님의 응답을 너무 심하게 받아서, 그것이 기뻐서 그냥 사택으로 돌아갔다가, 난로가 과열이 되어서 교회당이 그만 홀라당 다 타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 목사의 반응은 과연 어떠해야 할까요?

아까 말씀을 해드렸는데, "내가 그동안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 생각했구나. 내 사랑, 내 믿음, 내 소망이 따로 있는데, 그런데 그것을 빼고 곧 바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믿음, 하나님의 소망을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인정해줄 줄 알았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 인간의 소속은, 바벨탑을 쌓는 그 현장 !!

아까 교재 184페이지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준 '저주받은 인간상'을 자신의 진실된 인간상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미 소속이 어디인고 하니, 바벨탑을 건립하는 그 일부로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말이죠.

거기에 대해서 "지금 바벨탑이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하지 말고, 그 경향성이 "우리 모두가 저 높은 곳을 향해서 달려가지" 라는 겁니다. 그것이 목회가 되던, 사업이 되던, 농사를 짓던, 회사에 다니던 간에 말이죠. 그 모든 목표가 더 높은 곳이고, 남들보다 높은 곳이라는 겁니다.

*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셨는가?

그런 의도를 우리 인간은 모두 다 지니고 있는데,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는 점을 우리 인간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교훈적으로 받으면 안 되는데, "아하, 그런 교훈이 있지" 라고 하면 곤란하다는 말이죠. 그게 아니고, 성경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셨는가?" 라는 점을 살펴봐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누가복음 21장을 보겠는데, 1절에서 4절입니다.

(눅 21: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눅 21:2)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눅 21:3)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눅 21: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어떤 가난한 과부가 있었는데, 자기의 마지막 생활비를 헌금으로 바쳤다는 말이죠. 이것을 살펴보기 이전에, 누가복음 20장 45절에서 47절을 보겠습니다.

(눅 20:45)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눅 20:4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눅 20:47)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야기 47절에 보면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라고 하는데, 여기서 '저희'는 종교 지도자들인 서기관들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누가복음 20장에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21장에서 가난한 과부 이야기를 하신다는 말이죠.

가난한 과부가 헌금을 바쳤는데, 그게 두 렙돈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렙돈은 구리로 만든 동전으로서, 1렙돈은 8분의 1앗사리온이고, 그것은 현재 미국 돈으로 따지면 15분의 1센트라는 겁니다. 1센트는 100분의 1달러인데, 그러니 그야말로 푼돈이라는 말이죠.

앗사리온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그게 성경에서 두 군데 나온다는 겁니다. 누가복음 12장 6절에 나오는데,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이라는 말이죠. 또한 마태복음 10장 29절에 나오는데,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이라는 겁니다. 참새가 시세에 따라서 다를 수도 있지만 말이죠.

(눅 12:6)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마 10: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 부자들의 헌금 VS 과부의 두 렙돈 !!

아무튼 과부가 바친 돈이 두 렙돈인데, 그러니 정말로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만, 그러나 자기가 가진 생활비의 전부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누가복음 21장 1절과 2절에 보면,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부자들이 헌금을 하는 것을 보시고, 그리고 가난한 과부가 겨우 참새 한 마리 값에 불과한 두 렙돈을 헌금하는 것을 보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과부의 그 헌금은 자기의 마지막 생활비라는 것이죠. 그것을 다 보시고 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묻는데, "누가 헌금을 많이 했는가?" 라고 말이죠.

오늘 강의의 전체주제가 '이 세상의 경향성'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이 세상은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가?" 라는 겁니다. 이 세상의 경향성은 바벨탑인데, 인간들은 그 누구나 높은 곳을 향해서 달려간다는 말이죠. 그 경향성이 인간들의 모든 삶 속에 다 스며들어 있는데, 그래서 인간은 여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 가난한 과부의 경향성 !!

그런데 이 과부는 경향성이 어떻게 됩니까? 이 세상의 경향성과는 정반대의 방향이라는 말이죠. 그렇지요? 바로 그 점을 예수님은 주목하고 있는데, 그러면 예수님은 어디서 기다리고 있습니까? 하늘나라에서 기다리고 있습니까? 물론 맞기는 맞는데, 그렇다면 하늘나라가 어디에 있느냐는 겁니다. 과연 방향을 어디로 잡아야 하늘나라에 갈 수 있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느냐는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과부처럼 가난하게 살고 모든 것을 다 바치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곤란하다는 겁니다. 하늘나라는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인간의 경향성이란 것은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께서 제시하는 것은 "이렇게 살아라" 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 온 나 예수가 없는 곳으로 너희들은 부리나케 달려가고 있다. 모든 정신에 거기에 다 쏟고 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곳으로 정신 없이 달려가고 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경향성이라는 겁니다.

* 바벨탑과 위계질서 !!

여기서 바벨탑을 조금 상세하게 이야기를 해보면, 바벨탑이란 것은 위계질서라는 말이죠. 자연에 법을 집어넣으면 무엇이 되는고 하니까, 문화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연은 인간이 보기에 통제가 되지 않는데, 무질서하다는 말이죠. 지진이나 태풍은 것은 인간이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자연 속에서 인간은 살아가기가 힘드는데, 그러면 통제를 하기 위해서 인간은 나름대로 질서를 잡아야 한다는 말이죠.

반면에 문화는 무엇인고 하니, 무질서가 아니고 질서라는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 세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법이 있어야 질서를 잡는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아무나 마구 칼을 들고 설치고 하면 곤란하다는 말이죠. 그러니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 법의 제정자, 법의 집행자, 법의 적용자 !!

그래서 법을 집어넣어서 질서를 잡는데, 그러면 무질서한 가운데서 질서를 잡아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법을 집어넣으면 위계질서를 갖추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먼저 '법의 제정자'가 있게 되고, 두 번째로 '법의 집행자'가 있게 되고, 그리고 세 번째로 그 법에 적용이 되는 '법의 적용자'가 있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제가 물어보겠는데, "법의 제정자, 법의 집행자, 법의 적용자 중에서 어느 숫자가 제일 많겠는가?" 라는 겁니다. 법의 적용자가 제일 많고, 그 다음이 법의 집행자고, 법의 제정자가 그 숫자가 제일 적다는 말이죠. 여기서 법의 제정자는 왕, 법의 집행자는 공무원, 그리고 법의 적용자는 국민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유대나라는 종교국가이기 때문에, 법의 제정자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이고, 법의 집행자는 그 아래에 있는 군인들이고, 그리고 법의 적용자는 일반 백성들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유대나라라고 하는 문화, 즉 사회질서를 갖추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국가질서를 세웠다는 것이죠.

* 이 위계질서는 잘못된 것인가?

그렇다면 제가 묻겠는데, "이 위계질서가 잘못된 것인가?" 라는 겁니다. 이렇게 법의 질서를 세우면 안 되느냐는 말이죠. 오늘 우리가 공부한 것이 이 질문 하나에 다 들어있다는 겁니다. 잘못된 것은 아닌데, 그런데 어떻다는 겁니까? "잘못된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인식인데 말이죠.

종교국가에서 헌금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성전운영이 안 되는데, 그러면 하나님을 섬기는데 지장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헌금이 필요하고, 그러면 헌금이 두 렙돈이 필요합니까? 더 많은 액수가 필요합니까? 당연히 더 많은 액수의 헌금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러니 부자들이 헌금을 많이 하게 되면, 이 위계질서를 유지함에 있어서 누가 더 공로자가 됩니까? 물론 띠끌모아 태산이라는 말도 있지만, 아무래도 헌금을 많이 한 자들이 더 공로자라는 겁니다. 참새 몇 마리를 던져놓고 헌금을 했다고 하면 곤란하다는 말이죠.

그러니 모든 인식은 무엇인고 하니, 이 위계질서에 대해서 하나님이 보셔도 별로 하자가 없는 것이고, 그렇게 순응하고 동의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제가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절대로 '이 세상은 악하다' 라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 라고 했는데, 그러니 아무리 따지고 따져봐도 이 위계질서는 정당한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예수님은 "(1)법의 제정자, (2)법의 집행자, (3)법의 적용자", 이들 가운데서 누구에 의해서 돌아가셨습니까? 1번에게 살해를 당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를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중인격자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2번이나 3번이 아니고 1번에게 죽었다는 겁니다.

* 교회를 통해서 구원을 받습니까?

어제 주일 낮 설교시간에 그런 질문을 했는데, "교회를 통해서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말이죠. 지금 여러분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하겠는데, 누가 답변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교회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교회조직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교회조직을 부정하지 못한다면, 목사, 장로, 집사라는 제도부터, 헌금, 기도, 교회라는 부동산 등등, 그 모든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부정하지 못하면, 그것을 두고 "거룩하다, 혹은 성스럽다" 라고, 그렇게 평을 한다는 겁니다. 즉 "이 세상에는 정욕대로 사는 더러운 것들도 있지만, 교회당은 구원을 받는데 꼭 필요하기 때문에 더럽다고 하면 안 된다. 세상에 투자하는 것은 더러운 것이지만, 교회에 하는 헌금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깨끗한 것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교회당이 있어야 목사가 밥을 먹고 살면서 설교를 할 수 있고, 그래야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물론 자기는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육관도 필요하다고 한다는 말이죠.

* 그러면,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까?

그런 논리를 염두에 두고, 여러분에 다시 질문을 하겠는데, 여러분, 교회를 통해서 구원을 받습니까? 지금 묵언수행을 하고 계십니까? (ㅋㅋ)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다는 말이죠. 그리고 나서 그 다음 질문을 했는데, 그게 바로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까?" 라는 것인데,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를 버리고,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말이죠.

* 사도바울의 경우에 !!

그 이유가 고린도전서에 나오는데, 복음서에선 예수님이 과부에 대해 말씀하셨고, 그러면 사도바울은 어떻게 나오느냐는 겁니다. 물론 그의 개인의견이 아닌 주님의 계시인데, 그가 이것을 어떻게 복음의 계시로 가지고 오느냐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함축해서 말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는 말이죠. 고린도전서 1장 18절을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이 세상을 둘로 나누어서, "이 세상에는 멸망하는 자들이 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누가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은 누구를 칭찬하셨지요? 자기의 마지막 생활비를 모두 바친 과부에 대해서, 그녀가 그 누구보다도 헌금을 많이 했다고 하셨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사도바울의 경우라고 하면, 이 세상을 어떻게 나눈다는 겁니까? 자기 생활비 전부를 바친 가난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이 과부는 그 경향성이 무엇인고 하니, 바벨탑이 아니고 그 반대인데, 즉 전도서 8장 11절에 나오는, 그녀의 본질이 된다는 겁니다.

* 그녀의 본질 !!

부자들은 백만원, 이백만원씩 다들 내는데, 그런데 그 과부는 비록 참새 몇 마리 값이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는 말이죠. 다른 사람들은 부끄러워서 그렇게는 헌금을 하지 못해도, 그녀는 전혀 그게 아니었다는 겁니다. 이게 자기 본질인데, 남들이 뭐라고 하든 어떻게 하든 간에, 거기에 개의치 않는다는 말이죠. 이 세상에 어디로 흘러가든지 간에, 거기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러분도 다들 그런 본질을 가지고 있지요? (ㅋㅋ) 이 세상에 전혀 개의치 않는데, 왜냐하면 이 세상은 바벨탑이라는 말이죠. "저 인간들은 저렇게 멸망의 길로 작정을 하고 달려가는구나. 하지만 나는 반대로 간다. 욕을 하려면 얼마든지 해라. 나는 동전 두 개밖에 없어. 이게 나의 전 재산이야" 라고 하면서 과감히 헌금함에 넣을 수 있는, 그게 주님이 찾아오신 자의 특징이고 자유함이라는 겁니다.

* 십자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실 때는, 그 과부가 혼자 헌금을 하는 순간이 아니고, 부자들도 같이 있었는데, 그들이 헌금을 많이 한 것과 대비를 시킨다는 말이죠. 그런데 사도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헌금을 할 때는 생활비를 다 내세요"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 )에 대해서 미련한 것으로 본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누가복음의 예수님의 과부 이야기가 사도바울이 전한 고린도전서에 오게 되면, "( )를 미련하게 본다" 라고 하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십자가' 라는 말이죠. 사도바울은 헌금, 기도, 전도,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고, "십자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게 여기 20절에 나온다는 겁니다.

(고전 1: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라고 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과부처럼 생활비를 모두 바쳐도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세상은 더러워. 세상은 바벨탑이야. 나는 반대로 가야지" 라고 해도, 그렇게 해도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 이 세상 전부를 미련케 하셨다 !!

예수님께서는 과부가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것을 칭찬하셨지만,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의 절정, 즉 하나님의 뜻의 모든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전부를 미련케 하셨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죠.

*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 !!

이렇게 해놓고 요한복음 1장으로 넘어가겠는데, 여기서 성경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게 되지 싶은데, 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생명이 왔으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라고 하는데, 11절에서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라고 하고, 12절에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한다는 말이죠.

(요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그 권세가 곧 능력인데, 앞에서는 우리가 바벨탑을 이야기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과부를 이야기했는데, 이 요한복음에서는 십자가를 하나의 능력으로 본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우리에게서 나올 수 없는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우리가 헌금을 얼마나 했던 어떻게 했던, 거기에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 인간의 생각이 완전히 끊어져 있다는 것인데, 그런 단절을 전제로 한 말씀이라는 겁니다.

* 이 세상은 성도를 부수는 장치다 !!

여러분이 지금까지 잘 들었다고 하면, 다음의 문장을 이해할 수가 있어야 하는데 말이죠.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은 성도를 부수는 장치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 있어야 합니까? 없어야 합니까?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지요? 있어야 박살이 난다는 말이죠.

집안에 우환이 생기고, 불이 나고 하는 것은 부수어지는 것도 아닌데, 여기 고린도전서 1장의 말씀에 의하면,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고 싶은 자존심, 그것을 그만 부수어 버린다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의 팔자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자기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빗나가는 모습으로 보이지 않으려고 하는, 그래도 비슷하게 나마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그렇게 남들의 눈에 띄지 않고 같이 묻혀서 살아가려고 하는, 그런 안일함, 그것을 주님께서는 와장창 박살내어 버린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세상' 이라는 장치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사업에 실패해서 돈을 얼마나 날리고, 또한 몸이 아프고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몸은 아파도 자존심은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죠. 몸은 부수어져도 자존심은 부수어지지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은 그런 차원이 아니고, '미련하다' 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그동안 주님이 보시기에 미련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을 따랐구나. 그런 이 세상을 추종했구나. 그것이 전부인 줄로 알았구나" 라는 것인데, 그런 세상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자기 가족들과 주위 사람들을 얼마나 닦달을 했었느냐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는 이 세상에 맞추려고 얼마나 노력을 다 했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고린도전서 1장을 보겠는데, 22절에서 24절입니다.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 !!

성경말씀이 참 어려운데, 여기 24절에 보면,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 이라고, 이게 수동형인데, 이런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은 "너는 어떠한가?" 라고, 즉 "너의 직업이 뭐야? 너는 어디 출신이야?"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하나님의 능력이야? 너는 하나님의 지혜야?" 라고 묻는다는 말이죠. 즉 "네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있어? 네 안에 하나님의 지혜가 들어있어?" 라고, 사도바울이 그렇게 묻고 있다는 겁니다.

* 네가 지금 기뻐하고 있어?

그러면 우리는 자존심은 있어 가지고 "그래, 들어있어" 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하면 자기의 자존심이 박살나는 현장에서, "그래, 내가 참아야지" 라는 게 아니고, "네가 지금 기뻐하고 있어?" 라고, 그것을 사도바울이 묻고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자기가 무엇을 배우고 공부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임을 깨닫게 되는데, 그렇게 새로운 사태가 들이닥칠 때 자기 본질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집에 무슨 일이 생길 때만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할 것이 아니라, 평소에 조용할 때도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세상은 우리를 박살내는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주님이 만드신, 우리를 부수는 장치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 세상 정욕에 빠졌다" 라고 하는 것은,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인데, 이 세상 사람들에게 주님이 찾아오셨듯이, 그런 우리에게 주님의 십자가가 능력과 지혜로서 찾아오게 되면, 비로소 우리는 이 세상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가 된다" 라고, 그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복음 21장의 과부의 경우에, 우리가 그 과부 이야기에서 십자가로 왔는데, 그렇다면 십자가로부터 다시 누가복음 21장을 해석해본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과부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라는 겁니다. 그녀는 부자들이 보란듯이 생활비 전체를 다 바쳤는데, 예수님이 그것을 알아차리셨다는 말이죠.

* 다시 정리하면 !!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보면, 구원받을 사람은 없는데,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 즉 하나님께 찜을 당한 자들을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 하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이 했기 때문에 내가 바르게 살아야지" 라고 하는 자들은 성도가 아니고, 성도 그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임을 순간순간 재발견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뭐라고 합니까? "나는 오직 십자가만 자랑한다" 라고 했는데, 또한 자기와 같은 자들이 있을 것을 생각해서, "십자가가 눈 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것이 사도바울이 증거한 십자가라는 것이죠.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사도바울이 전도를 하면서 놀란 것이 무엇인고 하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장의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드릴 수 있느냐는 것인데, 이 세상 전체가 미련하게 보는데, 그 미련한 것을 어떻게 받아드릴 수가 있느냐는 말이죠.

그래서 남들과 차이가 난다는 것,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노력해서 새로운 것을 얻은 것이 아니고, 또 다시 주님의 부르심이 작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십자가만 증거하는 자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 성도가 이렇게 있고, 성도가 속한 세상이 이렇게 있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성도도 다스리고 이 세상도 다스려서, 그 틈새에서 오직 십자가의 능력만 나오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하심' 이라는 말이죠.

* 교회는 세상이다 !!

진도를 나가기 이전에, 한 가지 빠트린 것이 있는데, 앞에서 교회를 통해서 구원받지 않고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했는데, 그러면 "교회는 무엇인가?" 라는 겁니다. 그것은 "교회는 세상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이것은 교회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필연적으로 교회는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제도를 모두 다 없애고 예배당을 모두 다 없애고 만든 교회가 있다고 하면, 그렇다면 그 교회는 세상입니까? 세상이 아닙니까? 역시 세상이라는 말이죠. 모든 것을 다 없애고 오직 말씀만 전한다고 해도 역시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교회에 속한 우리는 세상입니까? 세상이 아닙니까? 역시 세상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인데, 그것을 우리를 통해서 드러내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기꺼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기를 미워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나는 나 자신이 너무 미워요" 라고 하는데, 속으로는 좋아서 웃고 있다는 겁니다.

이제 교재 178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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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개의 교회상 - 십자가 안에서 세상을 보았을 때, 교회는 다음과 같이 두 종류의 교회상 중에서 어느 것 하나가 된다. 하나는 율법적 교회요, 다른 하나는 생명의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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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법적(닫힌) 교회' VS '생명의(열린) 교회' !!

먼저 율법적 교회를 살펴보면, 이것은 닫힌 구조의 교회인데, 여기에서 '율법적' 이라는 것은, 자연에 법을 집어넣어서 교회라는 체제를 만든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왜 그런 체제를 만드는고 하니, 교회가 없이는 구원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교회는 무엇인고 하니, 이것은 열린 구조라는 말이죠. 생명의 교회는 "생명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생명의 교회 자체가 곧 생명이라는 겁니다. 아까 십자가를 말하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 그 자체라고 했는데, 그렇게 생명의 교회는 그 자체가 곧 생명이라는 말이죠.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그러면 생명의 교회가 대구에 몇 군데 있습니까?" 라고 질문을 하는 사람이 나오는데, "서울에 가면 생명이 있는 교회,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교회는 율법적 교회라는 말이죠.

* 율법적 교회 안에 있는 생명의 교회 !!

생명의 교회는 없는데, 그러면 어디에 있는고 하니까, 율법적 교회 안에 있다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닫힌 구조 안에 열린 구조가 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그 닫힌 것에 대해서 열림이 어떻게 합니까? 그 닫힘을 그냥 두지 않고, 거기에서 투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즉 "저것은 아닌데, 저것은 아니야" 라고 하면서 말이죠.

더 쉽게 이야기를 하면, 율법적 교회는 교회를 위한 교회라는 겁니다. 반면에 생명의 교회는 생명을 드러내는 생명이라는 말이죠. 생명의 현장성, 즉 "생명이 세상 속에서 이러 이러한 식으로 드러난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적인 상황인데, 그것이 바로 생명의 교회라는 겁니다.

그러니 생명의 교회는 소유대상이 아니고, 반면에 닫힌 교회는 소유대상이라는 말이죠. 율법적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생명의 교회는 없는데, 그 말이 틀린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없는데, 그런데 일어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생명의 교회는 존재가 아니고 사건이기 때문에 말이죠.

예를 들어서, 어떤 집이 그만 연탄가스로 인해서 모두 죽고 말았다고 하면, 그런데 그 가족의 목표가 연탄가스로 죽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는 게 목표인데, 그런데 그만 어떤 사건이 터지니, 그 목표가 날아가고 말았다는 것이죠. 아침에 보니, 연탄가스로 세 식구가 그만 다 죽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목표가 아닌 결과라는 말이죠.

그러니 '열린' 이라는 말의 의미는, 율법적 교회의 마지막을 생명의 교회가 이미 알고 있다는 겁니다. 즉 "백날을 해봐야 교회가 아니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알고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생명의 교회는 그 끝을 알고 있고, 반면에 율법적 교회는 "갈 데까지 가보자" 라는 식이라는 겁니다.

* 해봐야 소용이 없으니, 해보자 !!

지금 여러분의 표정을 보니 조금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은데, 율법적 교회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그냥 교회라고 보시면 된다는 말이죠. 교인들이 있어서 가게를 빌려서 모이는 장소를 만들고, 그렇게 한번 해보자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생명의 교회는 무엇인고 하니, "해봐야 소용이 없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율법적 교회는 "해봐야 소용이 없는데, 왜 하는가?" 라고 하는데, 반면에 생명의 교회는 "해봐야 소용이 없으니, 해보자"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이게 결승점에 도착한 자의 여유인데, 최종지점을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나 율법적 교회는 "갈 데까지 가보자" 라는 식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잘 되기를 소망하고 추구를 하는데, 그러니 이게 바벨탑이라는 겁니다.

* 율법적 가정 VS 생명의 가정 !!

이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가정으로 바꿀 수도 있는데, 즉 "(1)율법적 가정, (2)생명의 가정" 이라는 말이죠. 그 생명의 가정이 에베소서 5장에 나오는데, 22절에서 25절입니다.

(엡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엡 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엡 5: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엡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그런데 여기에 보면, 아내를 보고 "남편에게 복종하라" 라고 하는데, 그런데 남편의 경우에는 "아내를 사랑하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을 합쳐보면,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남편이 있다고 하면, 아내는 복종하지 말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과연 이러한 남편과 아내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러니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남편이라고 하면, 그것은 남편도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서 '복종' 이라는 것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라는 표시인데, 즉 "당신이 나를 목숨까지 바쳐서 사랑했군요" 라고 하는 표시가 곧 복종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사랑도 받지 않았으면서 복종부터 먼저 한다고 하면, 그것은 뭔가 감추어놓은 노림수가 있다는 겁니다. 즉 "복종해주면 사랑해줄까?" 라는 것인데, 그러면 상대방은 뭐라고 합니까? "아니, 이게 미쳤나?"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ㅋㅋ). 그러니 그런 경우는 없다는 것이죠.

그러면 무엇입니까? 생명의 가정은 이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에서 이것을 '교회' 라고 한다는 말이죠. 사도바울은 "네 눈에는 이게 가정으로 보이냐? 이게 바로 교회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가정이나 교회나 주님의 조직체는 사랑과 복종의 관계로 형성이 되어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 학폭과 민주주의 !!

여기서 율법적 가정을 살펴보면, 학폭이라는 것이 있는데, 즉 학교폭력이라는 겁니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소수의 의견에 대한 다수의 의견이 더 진리답다" 라는 것인데, 어떤 매스컴에서도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물론 때리는 것도 폭력이지만, "소수의 의견은 다수 앞에서 입을 다물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무엇입니까? 바로 민주주의 제도라는 것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까, 어떤 아이가 행동을 하면, 그 행동에 대해서 여러 사람이 평가를 한다는 겁니다. 거기서 다수의 의견이 "그 행동이 옳지 않다" 라고 해버리면, 그 아이의 입장에서는 그게 학폭으로 느껴진다는 말이죠.

그래서 "왜 그 아이를 괴롭혔어?" 라고 하면, "그 아이가 하는 짓이 나빠서 우리가 하지 말라고 말렸는데, 그것 때문에 우리가 학폭으로 고소를 당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깡패와 같은 놈이 있어서 돈을 뺏고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주 노골적인 것이고, 대다수의 경우에는 어떠한고 하니, 다수가 진리이고 소수는 거기에 복종해야 한다는 말이죠.

이것이 율법가정인데, 즉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고 자녀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자녀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부모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그 대신에 자녀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부모가 지켜준다는 말이죠. 그렇게 "너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우리가 지켜줄게" 라고 하는 것은 폐쇄구조인데, 개방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너는 부모가 있는 것을 감사하게 여겨라. 우리 같은 부모가 아니라면 너를 누가 키워주겠어?" 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폐쇄구조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이것은 "내 가정만 행복하면 된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이것이 율법적 가정이라는 겁니다.

* 우리 교회만 잘 되면 된다 !!

이것을 그대로 교회에 적용시켜보면, 율법적 교회는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만 잘 되면 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말을 하고 보니 좀 이상한데(ㅋㅋ), 아무튼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면 율법적 가게는 무엇입니까? 자기 가게만 잘 되면 된다는 겁니다. 율법적 약국, 율법적 학교 등등,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여기서 율법적 학교는 어떤 학교라는 겁니까? 서울대학교에만 많이 넣어주면 되는 학교라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인간은 바벨탑인데, 즉 자기 중심뿐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교회는 다 율법적 교회라는 겁니다. 율법적 교회가 아닌 경우가 없다는 말이죠.

여기서 사도행전 20장 28절을 보겠는데, 누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

이 말씀은 도저히 잊을 수가 없는데, 여기서 감독자의 피입니까? 하나님의 피입니까? 그게 하나님의 피라는 겁니다. 그러면 감독자는 무엇만 감독하면 됩니까? 사람의 피가 아닌 하나님의 피, 즉 사람의 희생과 노력이 아니고 주님의 희생과 노력이라는 말이죠. 그 피가 사람의 희생과 노력에 가려지는지 아닌지, 그것만 감독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감독자는 성령이 임해야 하는데,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가 소속이 되어있는 교회는 자기 교회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즉 "내가 잘해서 하나님의 양 떼를 잘 지켰다" 라고, 그렇게 감독자 자신이 하나님의 피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죠.

* 장로들의 수렴청정 !!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율법적 교회, 즉 기성교회의 실태를 한번 살펴보자는 겁니다. 대구에 역사가 오래된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의 설립자가 죽으면 후임자가 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제가 묻겠는데, "그 교회의 주인은 누구인가?" 라는 겁니다. 설립자는 이미 죽고 없는데, 그러면 교회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교인들이 누구에게 묻느냐는 말이죠.

여러분은 몰라요? 고려거란전쟁을 보지 않아서 그렇지 싶은데(ㅋㅋ), 구약의 유대교에 의하면 모든 조직의 우두머리는 장로인데, 즉 연장자라는 겁니다. 그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이 암묵적으로 주인이 된다는 말이죠. 이제 막 새로 온 신참 목회자는 전혀 주인이 아니고, 장로들이 수렴청정을 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 이것을 연장자라고 해도 되는데, 옛날에 한 때 부흥사에게 그만 넘어가서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이 여기에 해당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사람이 장로가 되고 난 뒤에 죽게 되면,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나중에 그 아들이 "이 교회는 내 것이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제가 차마 그 교회의 이름은 여기서 어떻게 밝힐 수가 없지만,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지금 여기에 있는 숟가락과 밥그릇까지도,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아버지의 돈으로 마련한 것들이다. 그러니 모두 다 나가. 나가라" 라고, 그렇게 나왔다는 겁니다.

인간의 일은 항상 역사와 전통이 있기 마련인데, 그렇게 역사와 전통을 이야기할 때, 최종 책임자는 누구인고 하니, 그것은 그 교회에 가장 오래 다닌 사람인데, 그것을 '터주대감'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 사람이 그 교회에 있어서 주인노릇을 한다는 겁니다.

* 너희들은 흉악한 이리들이다 !!

그러면 신참 목사가 거기에 와서 설교를 한다고 하면, 그때의 본문이 하필이면 사도행전 20장 28절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피 공로를 가리는 것은 모두 다 흉악한 이리들입니다. 그들이 양 떼를 공격했습니다" 라고 한다면, 29절에 보면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라고 하는 말씀이 나온다는 겁니다.

(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 20: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 한 때 그런 일이 있었지 !!

물론 이렇게 설교하는 목사도 없지만, 만약에 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터주대감 장로가 뭐라고 하겠느냐는 말이죠. 강의 마지막에 중요한 것이 나오는데, 과연 장로가 어떻게 나올까요? 다음과 같이 나오는데,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은 옛날 이야기이고, 지금은 이렇게 예배당이 있는데, 그런데 왜 자꾸만 옛날 이야기를 끄집어내?"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사도행전의 그 이야기가 옛날 한 때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지금의 이야기, 지금 이 순간의 이야기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이 오늘강의에서 제일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게 성령의 이야기인데, 그런데 교회의 가장 연장자인 장로는 뭐라고 합니까?

"옛날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셨다는 것을 우리도 다 믿어.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엄연한 예배당이 있는데, 이 부동산이 값이 얼마인데, 그런데 젊은것이 와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지금의 이 부동산이 있게 한 공로를 무시해? 내가 이것을 지켜내기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을 했는지 모르는데, 그런데 그것을 왜 모독해?"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자기 부정이 됩니까? 안 되는데, 그러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고 바벨탑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는 교회가 없는데, 왜냐하면 교회가 있으면 항상 역사가 누적이 되어버린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만 토박이들이 행세하는 교회가 되고 만다는 것이죠.

* 주님의 교회 !!

이제 마지막으로 이것만 하고 마치도록 하겠는데, 그러면 이런 율법적 교회가 생명의 교회가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는 겁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도저히 변하지 않는 터주대감 의식, 그런데 그것이 생명의 교회가 되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는 말이죠.

성경에 보면 그 방법이 나와있는데, 예수님께서 포도원 주인과 품꾼을 말씀하시고 난 뒤에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면 된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시키지도 않는데 와서 봉사를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러면 교인들이 그것을 보고는 "저렇게 좀 하다가 그만 두겠지"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1년이 가고 2년이 가고 3년이 가고, 이것이 끝이 없다는 말이죠.

(마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그야말로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복음의 기쁨으로 봉사하고 섬기고 한다면, 그러면 천하의 터주대감이라고 해도 고맙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께서 보내셨구나. 그렇지, 저런 교인이 있어야지" 라고 하게 되는데, 자기가 터주대감 행세를 하고 싶어도 그 사람 앞에서는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 새로운 사건이 터지면서 !!

터주대감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부터는 그 사람을 본 받아서, 그 터주대감도 봉사할 거리를 찾게 된다는 겁니다. "내가 너무 잘난 척을 하지는 않았나? 혹시 주님의 피를 가리지는 않았나?" 라고 하면서 말이죠. 물론 나이가 많아서 이제는 돈도 없지만, 그래도 두 렙돈이라도 바치는 마음으로 나서게 될 때, 그게 하나의 사건이 된다는 겁니다.

물론 오래 간다는 보장은 전혀 없지만, 그 사건과 또한 사건들로 인해서, 거기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나오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생명의 교회가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또 붙잡고 소유하게 되면 곤란하지만 말이죠. 그게 주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살아있음을 무시하고 그저 인간들의 지혜로 단정지으면서 살아왔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피를 모독하는 것임을 이제 깨닫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래 했는지,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지금 주님이 그저 주신 그 은혜에 감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4,2,13 오전 9시에 마침.

날마다 부수어지는 나의 바벨탑을 바라보면서 감사하게 하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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