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240313)보충 스가랴 (12:10-14) 생명의 보관함
수요 설교에서 핵심을 하나 뽑으라 하면, ‘명분’입니다. 인간의 존재는 명분 없이 못살아요. 왜냐하면, 항상 남을 의식하기 때문에 그래요. 남한테 무슨 얘기 할까를 늘 생각하며 삽니다. 저쪽에서 훅 들어올 때, ‘나는 이것이 내가 존재하는 정당성이다. 나 이것 때문에 살았다.’ 라는 자기 정당성의 토대를 인간은 늘 마음속에 만들어 놓고 있어요.
어떤 경우라도 내가 이 땅에서 소멸될 이유는 없다. 남은 죽더라도 나는 살아야 된다. 이게 명분이다. 그런데 그 명분을 어디서 형성하느냐 하면, 주위의 식구로부터 어릴 때부터 부여받은 거예요. 식구로부터. 그러니까 가정 형편이 그 사람의 정신을 지배한다는 말은 맞는 말이죠.
DNA도 지배하겠지만, 그리고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한 아이는 온순하고, 하나는 과격하다. 그렇게 환경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요인도 있지만, 그러나 아무리 DNA가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결국은 인간이 살아온 환경이 그 사람에게 어떻게 작용하느냐 하면 ‘그러니까 나는 버텨야 되고, 나는 굳이 살아야 되고, 나는 절대로 아프면 안 되고 나는 못나면 안 되고 가난하면 안 되는’ 정당성을 나름대로 정립해오고 있었던 겁니다.
그것을 위해서, 나의 이러한 명분 쌓기에 도움 되는 사람과 도움 안 되는 사람을 차별화 시켜서 만나야 될 사람, 즉 친구, 안 만나야할 ‘적’ 이런 식으로 구분하면서 살아오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일을 이방인만 한 게 아니고, 이스라엘도 이미 해 왔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그렇게 해왔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지파들이 그렇게 하면서 자기들끼리 똘똘 뭉쳤는데,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심판할 때에 ‘에이 너희들 망해봐라, 당해라’, 이렇게 일방적으로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무엇 때문에 망해야 되는지를 하나님의 본 취지는 이건데, 너희는 그 동안 너희들의 명분이 이것을 가려왔다는 것, 하나님의 뜻을 너희들이 막아왔다는 사실을 들추어내면서 심판을 감행해버려요. 심판을 실시한다고요.
우리는 굉장히 나의 정당성이라는 것을 정당하다고 여기는데, 그 정당성이 주님께서 베푸시는 그 모든 은혜를 외면하게 만들었어요. 모든 것이 공짜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계속 그걸 재끼고, 그걸 ‘치워라’ 하고 나는 내 인생은 내가 힘들어서 이만큼 살았다는 것을 부각하는 쪽으로 계속해서 살아왔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힘들어한다는 것은 그만큼 결속력이 있고, 단결력이 있고, 우리 가족끼리, 우리 식구끼리는 똘똘 뭉쳤잖아요. 그걸 따로따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따로’가 열 한번 나와요. 설교 시간에는 열 두 번이라고 했는데, 열 한번으로 수정합니다. 열 한번이나 ‘따로’가 나온다고요.
‘따로’가 나온다는 건, 내가 식구로부터 ‘잘한다, 네가 훌륭하다, 너는 내 식구야.’ 와 같은 칭찬을 받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따로, 따로 있을 때, 하나님의 계시와 홀로 남은 나를 한 번 비교해보자. 거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주어진 언약과 모든 계약에 대해서 우리는 도달할 수 없는, 지켜낼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거예요.
어차피 나는 내 잘난 맛에 사는 거고, 주님께서는 값없는 은혜 중심으로 인간을 원하는 거고. 이 둘 사이는 절대로 만날 수가 없어요. 나는 내 잘난 맛에 살고 싶은데, “너는 아무 것도 아닌데, 내 덕으로 살았잖아.”라는 이 두 개의 사실이 어디서 만나요? 만날 수가 없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뭘 준비했느냐, 바로 므깃도 전쟁을 준비해서 그것이 이제 마지막 대단한 왕이 마지막 작살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끝납니다. 그러면 이 므깃도 전쟁, 이건 아까 강의 중에 했기 때문에 생략하겠습니다.(20240314 안양강의 참조) 전쟁의 원조는 왕+제사장.
이 므깃도 전쟁을 통해서 아까 이야기 했듯이 요시야 왕은 율법대로 살았기 때문에 앞으로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후원해줄 거라고 착각에 빠져버린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마지막으로 요시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대로 살아야 된다는 면은 보여줬어요. 왜 그걸 보여줬느냐?
이스라엘이 계시와 함께 있어줘야 나중에 이방나라에 포로 잡혀도 나라는 망해도, 계시는 살아 있다는 것을 흩어진 나라에 가서 유지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시야가 그것을 알려줬고, 요시야 후손들은 다른 나라에 포로 잡혀갑니다. 거기에 다니엘도 있고, 에스겔도 있고, 1차, 2차, 3차에 다 포로 잡혀가요.
아마겟돈 전쟁이 뭐냐? 아마겟돈 전쟁은 그 므깃도 전쟁을 반복하는 거예요. 뭐냐 하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일방적으로 우기는 자들의 왕들이 모여서 토너먼트를 벌이면서 서로가 서로를 왕창 다 망하게 하는 그 전쟁이 므깃도 전쟁, ‘그’ 전쟁, ‘그 므깃도’ 전쟁, 합쳐서 아마겟돈 전쟁이에요.
그래서 제가 설교에서 월드컵 경기라고 했죠. 메시 알면 축구하는 사람끼리 다 통한다고, 너그럽게 다 통해요. 인간들은 자기의 명분을 지켜주는, 가족끼리 명분을 지키지만 보다 크게 안정되게 지켜주는 것은 괜찮은 왕과 대통령이 있을 때 자기 명분, 존재의 명분을 살려주거든요.
그래서 자기 나라끼리 민족끼리 동족끼리 친밀성 가지고 똘똘 뭉치는 거예요. 똘똘 뭉친 그들이 최후의 마지막 토너먼트를 벌이고 리그전을 벌이는 전쟁이 아마겟돈 전쟁이에요. 그렇게 해서 그 잘난 요시야도 떨어져나간 것처럼, 그들로 하여금 몽땅 다 같이 망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들이 망해야 마땅한 증거가 뭐냐? 독자, 하나님이 보내준 독자, 그 독자가 창에 찔리죠. 독자가 창에 찔려요. 독자를 찌른 그 창이 누굴 찌르냐? 찌른 자기에게 찔리면 그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내가 찌른 창이 이제는 그 다음 차례가 누구다? 그 창에 내가 찔릴 것이다. 왜? 그 창에는 뭐가 묻어 있습니까? 예수님의 피가 묻어 있기 때문에.
그 피 사건 안에 나는 죄인으로 들어가고, 주님은 피해자로 들어가서 나는 죄인이며, 주님은 피해자로 만남을 통해서 제사장의 제사 직을 완성해버립니다. 그 제사 직의 완성으로 인하여 그들은 자기에게 통곡을 하는데, 통곡하는 이 자체가 복이에요. 왜나 하면, 통곡한다는 말은 이미 내 인생은 아무리 살아도 살아도 남아있는 인생은 과거지사에요.
나는 나 때문에 통곡했지, 그러나 언제 주님 십자가로 인해 통곡한 적은 없었잖아. 이제는 통곡을 경유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홀가분해지면서 그때부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기쁨과 사랑에 참여할 때, 그것이 바로 참된 이스라엘, 참된 하나님의 성도라고 할 수 있어요.
하나 더 추가한다면, 요시야 태어나기 300년 전에 이미 ‘요시야’라고 했다고요. 그러면 요시야 왕이 등장하는 것은 요시야가 하나의 예언의 일종으로 태어나는 거예요. 예언의 일종이기 때문에 요시야가 죽는 것도 요시야가 잘했으면 사는 게 아니고, 반드시 요시야는 그렇게 해서 탈락하는 기능을 보여주면서, 거기에서 자기가 맡은 예언적 기능은 그렇게 마감되어야 마땅하듯이 오늘날 우리도 말씀대로 살았다, 믿음대로 살았다, 그러나 그게 주님의 찔리심, 십자가를 대신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그렇게 바르게 했더라도 우리 속에 사탄의 가시가 온다 할지라도 군소리하지 말고, 이거 있어도 십자가로 구원 받았기 때문에 ‘내 신세 왜 이렇습니까?’라고 불평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요시야의 예언의 반복처럼 오늘날 우리가 예언된 사람이에요. 그래서 제목이 뭡니까? “생명의 보관함” 우리가 생명을 보관하고 있는, 태극기 보관하듯이, 오벧에돔의 자유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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