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근

강제소환

아빠와 함께 2024. 5. 25. 17:07

프라하설교20240519(강제소환) 요한복음 8장 10-11 이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8장 10절,11절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아멘

요한복음 8장은 간음한 여인을 바리새인들이 현장에서 체포해서 예수님까지 걸어오는 그 환경,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바리새인과의 율법을 놓고 논쟁 정도가 아니고 싸움을 벌이는 겁니다, 장소입니다. 율법이 장소화된다는 것은 몇 가지 조건이 있어요. 특히는 예수님이 계셔야 되고요, 그 다음에 그 율법을 해석하는 사람이 있어야 되고요, 세 번째는 율법이 있어야 돼요.

이 세 가지 조건만 있으면 뭐가 이루어지는가? 말씀이 실현되는 공간이 형성됩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 다시 말씀드릴게요. 예수님 있어야 되고요, 율법 있어야 되고, 그 다음 바리새인, 율법을 해석해왔던 바리새인이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공간이 되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 중에서 빠진 게 하나 있지요. 빠진 것처럼 보이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나’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요, 내가 성경을 해석할 권한도 없고, 내가 성경을 나한테 적용시킬 그러한 대상자도 아니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바리새인의 아비는 악마기 때문에. 요한복음 8장에서 ‘너희 아비는 마귀’라 했으니까요. 그래서 미리 말씀드리면, ‘우리가 교회 나와서 말씀을 지킬 수 없다’ 가 아니라, ‘말씀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의인이 아니다’가 아니라 뭘 아셔야 되냐 하면은 내가 없어요. 내가 없다는 게 중요합니다. 내가 없으면 나의 구원도 없어요. 그리고 내가 지옥 가는 것도 없고, 말씀을 지키는 주체자인 나도 없어요.

자,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을 두고 예수님과 바리새인 간의 율법 해석에 대한 전쟁터라고 말씀 드렸는데 그 전쟁터가 왜 필요하냐 하면은, 그 전쟁터가 있어줘야 거기서 말씀의 세계가, 순간적으로 말씀의 세계가 나타나요. 말씀의 세계가 나타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일방적인 하나님의 구원이 일어나는 현장입니다. 일방적인 구원이에요. 그냥 구원이 아니고요, 일방적으로 그냥 줘버리는 구원의 현장입니다.

그러면 일방적인 구원을 누가 방해하느냐?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말씀 지키고 노력하는 그것이 방해가 돼요. 쉽게 말해서 종교가 방해가 된다 이 말입니다. 기독교가 내 구원을 방해하고 있다 이 말이죠. 구원은 일방적으로 주는 건데, 내 구원을 내가 따내기 위해서 내가 뭘 하겠다는 그것이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말씀을 그렇게 해석했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주님께서 율법을 두고 바리새인과 어떤 대결을 벌이고 그들을 경유해서 주님께서 얻은 실적, 업적이 뭐냐, 그 결과가 뭐냐? 그것은 바로 말씀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대비하는 겁니다. 말씀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대비하면서 말씀의 세계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죄인이 돼요. 인간이 죄인이 되는데, 인간은 본인이 이해하는 죄인이 되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봅니다.

성경말씀에서 ‘너는 죄인’이라고 하니까, 성경말씀을 보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면서 미흡한 거 있잖아요, 말씀대로 제대로 살지 못한 데서 오는 그 미흡함을 사람들은 죄라고 여깁니다. 우선, 기존교회의 주장을 제가 언급해볼게요.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라는 게 뭐냐? ‘목표를 어긋난 게 죄다’ 이렇게 말하거든요. 그 해석에서 빠진 게 있어요. 뭐가 빠졌냐하면, 죄는 내가 짓는 게 아니에요. 죄는 환경 자체가 죄입니다.

태어난 것 자체가 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죄 속에 있는 자는 죄를 짓는 게 아닙니다. 죄에 푹 잠겨 있는 거죠. 그래서 그 해석의 큰 잘못이 그거에요. 자꾸 죄 짓지 마라, 또는 죄 지은 것을 회개하라고 하니까, 마치 내가 죄 지을 수 있는 것처럼, 또는 죄 지은 것을 내가 회개하면 해소되는 것처럼,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내가 예수를 믿으면 죄 사함을 얻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예수를 믿어서 죄 씻겠다는 건 인간의 자기 선택이고, 자기 결심이거든요. 자기 결심과 선택으로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다시 처음부터 언급할게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건데, 주실 때는 조건이 뭐냐 하면, 환경이 조성돼야 돼요. 예수님, 그 다음에 율법, 그 다음에 마귀의 대변자, 바리새인, 이렇게 해서 구원이 주어지는 겁니다. 거기서 누굴 빼야 되겠어요? 나를 빼야 되죠. 내를 빼야 돼요. 천국 가겠다는 나를 빼줘야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내 미래에 대해서 내가 뺄 의사가 전혀 없다는 거예요. 전혀 우리는 그것을 멈추지 않아요. 내가 내 미래가 잘 되는 것을 내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이 그만큼 중요한 겁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는 예수님께서 그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강제 소환시킵니다. 여기서 ‘강제 소환’이 제일 중요해요. 여인이 간음하는 게 취미가 아니에요. 여인은 간음을 해야 되고요, 간음을 하는 현장에서 발생된 일이기 때문에 반드시 여인은 간음을 해줘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도 마태복음 5장에서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이라 했잖아요. 간음을 해줘야 누가 달려드는가? 말씀을 자기가 지켜서 구원 받겠다는 사람들이 그걸 눈여겨보면서 달려드는 겁니다. 왜냐하면, 신명기에 보면, 간음한 자에 대해서는 율법에 의해서 현장에서 돌로 치게 되어 있어요. 바리새인의 잘못은 율법에서 이야기 한 것을 본인들이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그러한 자라는 것을 전제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은 율법대로 지킬 수 있는 역량이 내재적으로 나에게 있다고 여기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줬다고 생각합니다. 이거 천주교 교리입니다. 천주교 교리는 인간을 전적으로 문제 있다고 보지 않고, 죄는 있지만 다시 죄에서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인간 속에 삽입돼 있다고 보는 게 천주교 교리예요. 감리교도 그렇고요. 그게 왜 먹히는가? 그게 우리 마음속에 이미 마귀로 인해서 집어넣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 인물 하나가 가인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어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게 아니에요. 야고보서 2장에 보면 마귀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신자가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과 내가 내 행위로 연결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가인의 후손들이고, 가인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가인은 지옥 갔죠.

그러니까 이게 지옥이라는 것은 우리가 가는 게 아니고요, 이미 우리가 지옥이라는 환경 속에 놓여있다는 것을 가인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면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아무도 없지요. 그것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창세기 3장 24절에 생명나무가 없는 곳을 지옥이라고 해요.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생명나무가 있는 곳을 천국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행동이라든지 착하고 악하고 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착하다고 해서 거기에 생명나무가 생기는 게 아닙니다. 생명나무 있으면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이든 상관없이 천국에 살고 있는 중입니다. 이러한 전제를 우리가 반드시 놓치면 안돼요. 성경해석 하나도 안 됩니다, 그런 식으로는. 그래서 그 세계를 뭐라고 하냐? 그게 인간들의 세계, 곧 마귀의 세계거든요. 빠져나올 수 있느냐? 못 빠져 나옵니다.

왜 못 빠져 나오느냐? 하나님께서 그 생명나무 없는 세계에다가 집어넣었기 때문에 인간 자기 마음대로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빠져나올 수 없는데, 그러면 어떤 사람이 묻기를 “빠져나올 수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라고 묻게 되면,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왜냐 하면, 구원 앞에 ‘나’를 붙인 게 잘못이에요. 나의 구원, 나의 구원을 시도하면 이거는 성경에 아예 없는 거예요.

구원은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지, 나의 구원이라는 노림수를 가지고 그걸 획득하기 위해서 교회 다니고 애쓰는 것은 마귀가 시킨 짓이지요. 그것은 주님의 뜻 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이걸 진짜 수백 번 이야기해도, 수천 번을 이야기해도 그걸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있어요. 왜? 선입관이 그만큼 무서우니까요. 어릴 때부터 있어가지고.

그러면, 질문을 이렇게 해야 돼요. “나의 구원은 어디 있습니까?” 하지 말고, “저는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라고 질문을 바꾸면 그건 무방해요. 저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강제 소환됩니다. 강제 소환 되는 것을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주의 이름 앞에서는 내가 없어요. 내가 없다는 것은, 내 이름이 없어지는 것을 ‘내가 없다’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내 이름이.

지금까지 쉬운 이야기를 했는데, 지금부터는 조금 어려운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마귀에 속한 인간들은요, 한시도 쉬지 않고 자기 공간을 만들어요. 자기 공간. 마리아 테레지아(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일한 여성 통치자, 1717년 5월 13일 ~ 1780년 11월 29일)의 쉰브룬 궁전에 방이 1441개가 있는 것 보셨잖아요.

그 중에 딱 하나 특수한 방이 있는데, 모차르트가 여섯 살 때 마리아 테레지아 앞에서 피아노 쳤던 방, 거기가 무슨 방이냐 하면, 거울의 방이에요. 거울의 방의 특징은 자기가 내뱉은 이미지가 반사되어서 내게로 다시 돌아오게 해놨어요. 양쪽에 거울을 배치를 해가지고. 이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보고 있는 침대, 선풍기, 가방, 이 모든 것이 나의 공간의 구성요소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가 만든 공간 안에서 자기가 탈출을 못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게 내 이름의 공간을 따로 챙기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입니다. 그러면 내가 만든 공간에서 뭐를 만드느냐 하면은 교회 다녔으니까, 성경 봤으니까 천국이라는 개념, 지옥이라는 개념, 구원 개념, 하나님, 삼위일체, 십자가, 언약, 피, 그것을 다 만들어내요. 성경이라는 언어를 통해서 다 만들어 냅니다. 만들어내면 뭐합니까? 자기 폐쇄적 공간인데..

이게 마귀가 그렇게 만든 거예요. 그래서 내가 스스로 구원 받을라고, 구원 받는 정도가 아니죠. 구원 받고 점점 더 성화되고, 바른 인간으로 인격이 나아지고, 그야말로 에베소서에 나오는 말씀처럼 날마다 주님께 가까이 자라나는 그리고 베드로전서 1장의 말씀처럼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라 되라(15절)”해서 되어봤자 무슨 소용입니까? 그게 자기 공간이죠.

자기 폐쇄된 자기 공간. 나르시시즘이라고 하는 거예요. 자기 착각에 빠진 거요. 빠져 나오지 못하죠. “그러면 나는 어떻게 빠져나옵니까?” 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 안돼요. “나는 어떻게 구원 됐습니까?” 라는 질문은 성립돼요. 그러나 “나는 어떻게 거기서, 내 세계에서 빠져나옵니까?” 라는 질문은 성립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제금 다섯 번째 얘기합니다. 예수님의 강제 소환이에요.

예수님의 강제 소환인데, 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자기 공간에서 예수님이 만든 공간으로 강제 소환되면서 구원이 이루어지고, 죄 사함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여인이 간음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분석해봅시다. 여인이 간음했다는 것은요 자기 공간 속에서 여인은 자기의 욕망의 결핍을 느끼고서 자기 참을 수 없는 감정을 실시한 거예요.

여기서 인간은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게 따로 있어요.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은 뭐냐 하면 충동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우욱~’하는 성질 있죠. 여러분들은 하나도 없겠지요. 욱하는 성질은요, 그것은 공간이고 시간이고 따지지 않고 그냥 올라오게 되어 있어요. 그게 바로 우리가 갔던 빈의 프로이트가 그거 연구한 사람이에요.

인간의 충동은 왜 인간의 이성으로 통제가 안 되느냐? 왜 지식과 합리성으로 통제가 안 되느냐 그거 연구한 사람입니다. 그게 통제가 안 되니까 꿈에 나타나는 거예요. 그 연구를 한 사람인데, 그 사람이 그거 연구해봤자 뭐 해답은 없어요. 다만 그 사람이 이야기한 것 중에서 들을 만 한건 그겁니다. 인간은 늘 죽어가고 있다는 것. 하, 소위 불신자도 그 정도는 알아요. 인간은 죽어가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남과 더불어 살기 위한다는 의도로 살지만 사실은 정확히 말해서 남이 죽는 방식에 합류해서 죽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매일 매일이 살아온 모든 것이 모아져서 나를 죽게 만들어요. 그 세계가 뭐냐? 인간의 세계, 인간의 이름의 세계입니다. 주님께서는 강제 소환을 시키는 거예요. 뭐냐 하면, 니 성깔, 니 성질대로 하는 그 현장을 주께서는 놓치지 않아요. 그게 간음이에요.

간음을 하게 만들고 그게 들키지 않는 것이 아니고 들키게 만들어버려요. 들키게 만들 때, 그동안 인간을 인간 세계에 가두게 만든 악마의 앞잡이를 그 현장에 접촉하게 했습니다. 그게 누구냐? 바리새인들이에요. 바리새인들은 즈그 아비가 악마라고 요한복음 8장에 나옵니다. 44절에 나와요. 그러니까 인간이, 바리새인이 경찰이에요. 경찰이라서 뭐 죄 지었다 하면 삐뽀삐뽀 하고 와서 고발합니다.

“너 성질냈지? 너 본성대로 했지? 내가 뭐라 했어, 말씀대로 살라 했어, 안했어? 성경 말씀 폼으로 있는 줄 아나? 네가 인격이 나아지려면 말씀을 봐야지.” 이것에 평생 목숨 걸었던 자가 오늘날 정통 유대주의, 그 당시에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걸 모든 인간이 만든 거울 방에서의 유일한 구원의 탈출구가 거기에 있다고 본 거예요.

말씀을 내가 지키게 되면, 누적이 돼요. 마일리지가 쌓여요. 그게 뭐냐 하면, 착한 일로 마일리지를 쌓아서 그 착한 것이, 하나님 믿으니까 구원 받지요, 그 착한 것 쌓이면 상급 받지요, 그게 오늘날 교회의 컨셉이 된 겁니다. 교회 목사의 설교 거리가 된 거예요. 산포가 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 속에 꼼짝마라 하는 그들이 체포되는 게, 아아, 이거 중요한 거예요.

그 간음한 여인이 홀로 예수님께 강제 소환되는 것이 아니고, 누구와 함께 오느냐 하면요, 그 고소했던 바리새인들이 함께 예수님 앞에 오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오늘 본문 10절에 뭐냐 하면, 이런 말씀을 먼저 합니다. “여자야, 너 죄이었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요. 강제 소환할 때에, 여러분이 강제 소환 당했으면 이런 질문을 받아야 돼요.

뭐냐 하면, “권사님, 권사님을 고소하는 사람 어디 있어요?” 우리 큰 권사님 “우리 큰 권사님 고소하는 분 어디 있어요?” 우리 스스로 잡사라고 하는 잡사님, “잡사님을 평생 살아오는 중에서 마음 속까지, 마음 그 속에 있는 것까지 정죄하시는 분은 어디 있어요?” 예수님은 물론 반말 하겠지만, “어디 있니?” 이렇게요. 그 때, 우리의 답변은, 정답은 나왔어요. 뭡니까?

“없나이다.” 이거 눈물 나야 돼요. 눈물 나야 돼요. “없나이다.” 이거를 교회들이 가로막아요. 왜? 이렇게 얘기하면 교인들이 안 올 수도 있고, 또 헌금이 안 나올 수가 있기 때문이에요. 이런 방향을요 마귀가 제일 싫어해요. 첫째 뭐라 했어요? “고소한 자가 어디 있느냐?”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누가 고소하긴 양심이 고소하지. 그 양심이 타인의 시선이라 하는 겁니다.

평소에 아버지 엄마부터 해서 남들이 지적한 것이 쌓인 것이 양심이에요. 양심 속에 타인의 고소가 들어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전체를 이렇게 간단하게 합시다. “말씀 앞에서는 내가 없다.” 그걸 더 구체적으로 하면, “주의 말씀 앞에서는 나의 이름이 없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주의 말씀 세계 앞에서는 나의 공간, 나의 세계가 없나이다.” 없나이다.

왜냐하면, 나의 세계 안에서는 바리새인이 나를 고소하는 것도 나의 세계의 요소로서 거기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나를 고소할 사람은 없습니다. 예, 뭐 그릇 깬 것도 괜찮아요. 나를 고소할 사람은 없어요. 그 다음에 뭐라 했냐 하면, 그 다음에 중요한 게 11절에 나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게 있어요. 실컷 복음 알아 놓고 다시 지옥으로 가는 수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했을 때 거기에 너가 누구냐 하면 주님이 만든 나예요. 지금의 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만약에요 실컷 들어놓고, ‘그래, 한국 교회 이런 게 문제야. 강제 소환을 몰라.’ 이래 놓고 다시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하니까 ‘앗싸! 나 구원 받았어’ 이래놓고 나 구원받았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돌아다녀요. 이것은 구원에 실패한 거예요. 그게 아니고, 이게 젤 중요하니까 잘 들으세요.

“내가 너를 고소하지 않으니 다시는 가서 죄 짓지 마라.” 는 것이 나의 세계 속에 넘겨주는 게 아니고 그 자체도 예수님의 말씀의 세계 안에 포함된 내용이에요. 포함된 부분이 되는 겁니다. 이래가지고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죠.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와가지고 이 여자를 고소할 때 이들이 짱돌 들고 왔잖아요, 이 여자 때려죽인다고.

왔을 때에 예수님께서 땅에다가 뭘 썼어요. 쓰니까 바리새인들이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해서 젊은 사람까지 다 달아났어요. 왜 나이 많은 사람이 먼저 가느냐 하면, 나이 많은 사람들이 글 쓰는 걸 보니까 제가 세상을 오래 살다보니까 다 걸린 거예요. 다 걸렸는데 사람이 죄를 지적하면 그 죄를 지적한 사람부터 도망치기 마련이에요. 잔소리 듣기 싫어가지고.

잔소리 들으니 좋던가요? 도망치고 싶죠. 그 바리새인들이 잔소리한 예수님부터 짱돌 들고 다 도망친 겁니다. 도망친 그들이 어디로 갑니까? 각자의 자기만의 세계로 가는 거예요. 자기가 잘난 존재로 이만큼 살아온 그걸 못 놓는 거예요. 내가 나한테 공들였던 세계를 놓지를 못해요. 내가 이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평생을 노력한 세계예요? 인정받는 세계, 타인에게 인정받는 세계, 내가 그만큼 사람 대우받는 세계를 어떻게 놓습니까? 다시 도망간 거예요.

지금 이 여자는요 강제 소환 당했어요. 그 다음에 이 여자는 다시는 자기 세계로 돌아가면 안돼요. 그러면 인간이 자기 세계와 주님의 세계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예수님 말씀 듣고 그 말씀을 내가 지키는 세계가 도로 나의 세계로 돌아간 셈이 돼요. 이거는 대실패입니다. 다시는 죄 짓지 마라는 말씀을 누가 지키느냐 하면요, 죄 용서 받은 내가 지키는 게 아니에요. 이거 아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특별히 오늘 프라하 예배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

주의 말씀 하나를 주의 세계는요 주님의 성령으로 지켜요. 주의 은혜로 지키지, 내가 지키는 게 아니라고요. 그런데 “주님, 죄송합니다. 그동안 내가 지켜서 구원 받으려고 했는데 이제 알았습니다. 오케이, 오케이 알았습니다. 주의 말씀이 다시는 죄 짓지 마라 이제는 귀 담아 들어서 다시는 죄 안 짓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이것은 죄 안 짓게 되는 나의 세계가 또 다시 나한테 확보가 돼요. 그러면 나는 또 불안불안 하고 무서워서 못 살아요.

전에는 고소할 남이 있어서 무서웠는데 이제는 내가 나를 고소하기 때문에 자꾸 내가 나를 지적해요. 주님한테 용서 받았다고 해놓고 니 꼬라지봐라, 이게 뭐야? 이게 집사야? 이게 권사야? 이게 목사야? 또 본인이 정죄해요. 피 흘려주신 주께서 얼마나 화를 내겠습니까? 그걸 주님에 대한 핍박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몇 가지 다시 한 번 강조할게요. 강제 소환되면서 질문을 들어야 돼요. 주님께서 “이리와. 끝!” 이게 아니고, 뭐냐 하면, 너를 고소하는 자, 다시 말해서 그 동안 너는 네가 살아온 게 아니고 주위의 시선 때문에 살아왔다는 거예요. 남들이 망하는 그 세계 속에 같이 망하면서 남들이 어떻게 하는가 그걸 모방하면서 살아온 거예요. 그것을 주께서는 지적합니다.

“너를 고소하는 자가 어디 있느냐?” 할 때에 가만히 입 다물고 있으면 안 되고요, 주님하고. “없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없는 동시에 누가 없느냐 하면, 남한테 지적받은 나도 나의 공간도 없는 거예요. 거울을 깨는 거예요. 거울을 깨는 거예요. 그러면 말씀의 세계를 누가 이루느냐? 예수님이 이룹니다.

말씀의 세계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간음한 자를 용서하는 것도 말씀의 세계에 들어있으니까 간음한 자를 용서하는 말씀의 용서가 그리고 너를 고소하는 자가 없는 용서가 이제 그 통째로 우리 안에 들어와요. 그럼 우리 안은 무슨 세계가 되냐 하면, 나의 세계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의 세계일까요? 예수님의 세계가 들어오는데 그 예수님의 세계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우리는 때려 죽여도 죄 짓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래야 말씀이 사니까,

내가 사는 게 아니고 말씀이 살아야 내가 사니까, 말씀의 세계가 들어오면서 나는 평생 마음속으로 간음한 여인에 해당됨이 우리에게 늘 범사에 감사하고 고마움이 평생 끝날 때까지 주님께서 나를 일방적으로 소환해서 구원하는구나 라는 것이 매일 반복해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우리가 어디에서 어떻게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주님과의 일대일 대화가 혹시나 없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대화 가운데 없나이다. 말을 기쁘게 하게 해주시고 다시는 죄 짓지 말라를 우리에게 책임감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책임져주겠다는 말씀으로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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