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금산 번개특강 (전도서와 십자가) 230822 이 근호 목사
금산특강 제목은 <전도서와 십자가>입니다. 이게 참 연결이 안 되겠죠? 구약의 전도서 하고 십자가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가? 전도서는 구약에 있고 십자가는 신약에 있는데...이걸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전도서는 하나님께서 글자로 줬고, 십자가는 하나님이 직접 왔고...이메일 주고 받다가 당사자가 직접 온 거에요.
아, 이거 놀랍죠? 전화만 하다가 가끔 영상통화도 안했어, 영상통화는 특별한 사람에게, 모세라든지...하다가 직접 와버렸어요. 기절할 지경이죠. 왜 직접 왔는가? 이것이 첫 번째로 중요한데, 왜 직접 왔는가? 써볼게요. <추궁> 추궁이란, 잘못된 걸 나무라기 위해서 오는 거죠. 어떤 추궁이냐...‘선악과 따먹은 것에 대한 추궁’
세상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내 선악과 따먹지 말라 그랬는데 왜 따먹었느냐?”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그것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인간은 반대로 출발하기 때문에 이렇게 돼요. ‘나는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젊은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겠죠. “나는 내 가족하고 얼마나 행복하게 살 것인가?” 이게 누구로부터 추궁을 안 받는 마음 상태에요. “하..쟤들은 너무 행복해. 너무 잘살아. 그럼 나는? 나는, 우리 가정은 쟤들보다 더 잘 먹고 잘 살고 싶어!” 젊은 사람들 다 그거 바라잖아요.
그런데 그 마음가짐에 뭐가 빠졌느냐하면, 내가 누구한테 추궁 받고 있다는 생각은 상상도 못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 가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지막에 죽고 난 뒤에 심판이 있다고 하시니까 “왜 나한테 심판하는데? 응? 나 열심히 살았어. 나 그런 하나님 안 믿어!” 이러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젊은 새댁한테 “며느리, 교회 가지?” “음, 안가요. 바빠서 안가요. 뭐 교회 가니까 죽고 난 뒤에 지옥 있고, 천국 있고, 심판하고...나 그런 거 싫어요. 내가 얼마나 착한데” 지금까지 착한 여자란 얘기만 들었지, 추궁을 안 받는 거예요.
추궁 받는다는 건 상상도 못합니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기 때문에. 그래서 여기서 “나는 어떻게 행복할 것인가”에 대해서 세상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착한 만큼 복 받는다.’ <착한 만큼 복 받는다> 딱 아는 것은 아무리 이만큼 지금까지 살면서 모든 이야기를 들어도 항상 기본은 뭐냐 하면, ‘착하면 복 받게 돼있어, 심지어 죽어서도 천국 가게 돼있어.’ 이겁니다. ‘착하면 복 받는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자신감이 있는 거예요. “내가 알아서 바르게 살면 되지, 교회 그런 대 왜 가는데? 내가 얼마나 바르게 사는데? 아토피 걸리지 말라고 얼마나...” 마음가짐 자체가 누구한테 추궁을 받을 생각도 없고, 받을 이유도 없고, 받을 필요도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왜? 내가 날마다 나를 평가하고, 검사하고 이러거든요. 아토피라는 것은 뭐냐 하면, 깨끗한 정도를 유지했다는 뜻이거든요.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남한테 욕 얻어먹지 않을 생활을 매일같이 반성하면서, 조심하고 또 조심하면서 살아가는데 내가 왜 추궁을 받아요? ‘조심’하니까 또 생각난다. <긴머리소녀> 그 노래에 보면 “조~심, 조~~~심, 징검다리 건너던” 에브리바디~~ “개울~ 건너 작은 집에 긴 머리 소녀야아아아~” (ㅋㅋㅋ) 특강, 특강이니깐~ “눈 감고 두 손 모아 널 위해 기도하리라” 왜 지가 그 아가씨 알아요? 모르면서 왜 제가 눈 감고 기도를 하냔 말이죠,
그것도 두 손 모아서...그 소녀는 몰라요. 제 혼자 환상 속에 있는 거예요. 그 소녀 참 좋았다고...그럼 두 손 모아 기도 왜 하느냐? 착해지니까. 착해지면 뭐 받는다? 복 받는다. 이미 종교인이에요. 이미 신앙가입니다, 모든 인간은. 이게 마귀가 이렇게 만든 거예요. 마귀는 한 가지를 빼면 돼요.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요거만 빼면 마귀예요. “네가 하나님 믿을 필요 없이, 네가 하나님 되면 되잖아!”
<네가 너에게 하나님 되면 되잖아!> 자, 여기서 하나님이란 개념은 ‘착한 존재“입니다. ’네가 착하게 살면 되잖아. 착한 존재 되면 되잖아.‘ 이게 이 세상에서 모든 인간, 애든 어른이든 누구든 마찬가지에요. 항상 제가 하고 싶어서 해놓고는 ”엄마, 나 배고파서 먹었어“ ”먹지 말란 과자 왜 먹었어?“하면, 핑계대면서 ”배고파서 먹었어“ 계속 착해요. 착할 이유들이 많아요. 그러니까 애들도 다 종교인이에요, 전부다. ’종교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에요.
’착하면 복 받고, 죽어서도 복 받고 천국 간다.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한다.‘ 이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추궁을 합니다. 추궁 방법은 뭐냐? 추궁 방법이 구약의 율법, 율법으로.. 시내산, 주일날 설교했지요? 종은 시내산 출신이라고요. 시내산이 뭐냐 하면 율법이에요. 율법은 이런 뜻이에요. ”착해지고 싶어?“ ”예!“ ”자, 이거까지 네가 한 번 점수 매겨봐라.“ 하면서 율법을 더 주는 거예요. 그래서 미친 듯이 율법을 따라하는 게 유대교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요.
본인은 착하고 싶은데, 하나님이 숙제 줬잖아요. ”까짓것 완벽에 완벽을 기하면 남보다 복 더 받겠지, 상급 받겠지. 열심히 교회 다니면 상급 받겠지“ 왜? 완벽하니깐! 율법은 ’완벽요구‘입니다. 완벽 요구 뒤에는 뭐냐, 추궁이 들어있어요. 따지는 것, 추궁이란 말이 어려우면 그냥 ’지적하기” 하나하나 지적하기. 사람 환장합니다, 이거.
제가 주일 낮 설교 때에 ‘김밥은 통으로 먹는 게 맛있다’고 했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의 율법을 어기면 모든 걸 다 어긴 게 돼요. 사람들은 완벽을 요구받기 때문에, 다 못 지키고, 자신감 있는 것만 가위로 자른다 했잖아요. 주께서는 “그러지마라, 김밥은 통으로 먹어야지 잘라서 먹는 거 아니야. 다 먹지 아니하면 끝까지, 죽어서도 지옥까지 가서 추궁할거야.”하, 인간은 이걸 몰라요. 하나님이 얼마나 완전을 요구하는지를 몰라요. 적어볼게요.
<하나님은 완전 요구, 인간들은 최선> 완전히 다르죠. 하나님은 완전을 요구하는데, 인간은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 되지 않습니까?”하고...최선이라는 말을 좀 쉽게 하면, ‘변명’이에요. 끊임없이 누구 변명 하냐하면, 자기변명해요. 입만 떼면 자기변명이예요. 어제 그 <노트북> 영화에서 둘이 사랑을 나눌 때 제가 언급했잖아요. 사랑을 나눌 때 말하면 안돼요. 자꾸 말한다는 것은 방어기제, 말한다는 것은 방어기제에요.
말은 ‘사랑해, 사랑해’ 해놓고 사실은 ‘아직은 아니야’란 뜻이거든요. 말은 변명이에요. <말은 변명이다> 부부사이에서는 눈빛만 딱 봐도 알지요? 부부사이에 말 많이 해버리면 이건 거래처인지, 부부사이인지 헷갈리는 거예요. 왜냐 하면 말 속에 뭐가 들어있어요? 아, 이거 진짜 중요한 건데, 말 속에 변명 들어있어요. “난 아내로서 최선을 다하잖아. 너무 요구하지마.“ ”남편으로서 할 도리 다 하잖아. 그러니까 너무 밀어 붙이지마.“ 이런 거요. (말을 해야 안다고들 하던데...)
딱 보면 그냥 싱긋이 웃으면 돼요. 부부사이에는 싱긋이 웃으면 돼요. 한 쪽이 막 바가지 긁더라도 거기다 대고 같이 긁지 말고, 변명하지 말고, 싱긋이 웃으면 돼요. 그 주역할은 남자가 해야 돼요. 여자가 원래 힘이 없어서, 힘은 없고 그러니 말로 보충을 해요. 힘이 안 되니까... ”내가 얼마나 괴로운 줄 알아?“ 그렇게 말로 한다고요. 그 때는 ”나는 뭐 안 괴로운 줄 알아?“ 그렇게 말로 하지 말고, 그러면 둘 다 여자 되니까. ”그래그래,..“ 이렇게... 중요한 겁니다. 특강이 재밌네요..
구약은 율법입니다. 하늘에서 편지를 보낸 거예요. 편지를 보낼 때, 율법은 편지입니다. <율법은 편지> 편지를 보낼 때, 이 편지가 뒤끝이 있어요. 뭐냐 하면, ”너 선악과 따먹었잖아.“ 일종의 율법의 편지 내용에 추궁이 들어있어요. 추궁. 자세한 것은 로마서 7장에 보면 나와요. 율법을 준 것은 너를 추궁하기 위해서 주었다. 추궁을 하게 되면 여기서 인간에게 반발이 나오게 됩니다. 이제 찾았어, 마귀를. 마귀가 우리 옆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는 거예요.
로마서 7장에서는 마귀라 하지 않고 악이라 해요. 악, 죄. <악은 우리 안에 있다.> 하나님이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것은 아담 보고 이야기하지만, 배후에 뱀 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뱀이 인간을 꼬시는데, 그 뱀을 낙원에 집어넣는 것을 주께서 허락하시고, 인간보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지만, 뱀 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뱀아, 너는 선악과에 대해서 심판할 권한 없어.“ 하니깐 뱀이 약이 올랐죠, 바짝.
그러니깐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 그때는 인간이 무지했어요, 아담과 하와가. 그 인간을 꼬셔가지고 ” 따 먹어라“ 왜 악마가 자꾸 인간 보고 따먹으라 했는가?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마가 쿠데타를 일으킨 걸 알고 있었어요. ”네만 신이가? 나도 신이다.“ 이것은 처음의 인간이 가진 생각이 아니고, 마귀가 그런 생각이 있었던 거예요. 지금은 모든 인간이 자기가 신이예요. 마귀가”네가 신처럼 되리라.“해서 모든 인간이 신이지만 그때는 아담, 하와는 처음에는 신이 될 생각이 없었어요.
주는 대로 먹는 게 편하지, 신 돼서 뭐할 건데요? 그런데 악마가 이미 자기가 신이 되고자 하는 반란을, 내부 내란을 일으킨 거예요. 높은 지위의 천사인데 하나님에 대해서 ”나도 신이다“하면서 반란을 일으킨 것에 대해서 ‘선악과 따 먹지 말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뱀의 유혹으로 따 먹었습니다. 따 먹었으니까 여기서 ‘반발’이 일어나요. 반발은 인간이 반발하는 게 아니에요. 인간 속의 악이 반발하는 거예요.
이것을 로마서에서는 ‘죄가 반발 한다’고 돼있는데,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속의 악마가 반발하는 거예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하는데, 부모님이 교회 가라마라 하지마세요. 저 다 컸습니다. 내가 애도 아니고 그 정도 결정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아주 점잖게 나오지요. 그 이야기 또, ”저 친구 만나지마라“ ”엄마, 아빠 내가 결정하는 거야. 아빠 친구 아니잖아.“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서 ”엄마, 아빠 하나님 믿는 거 내가 알아서 믿어. 간섭하지 마. 그거까지 정신적으로 간섭하는 것은 선 넘은 거야.“ 할 때, 하나님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그냥 친한 친구> 창조자가 아니에요. 맞먹을 수 있는 대상이에요. 이걸 어려운 용어로 한다면 ‘타자’에요. 이왕 어렵게 된 거 어렵게 해봅시다. 어려운 것도 있어야지요.
‘타자’, 한 자로 하면 ‘남’이에요. 남은 어떻게 형성 되냐 하면, 내가 구축돼 있을 때 타자가 있어요. 나가 있을 때, 타자가 있어요. 이게 6개월에서 16개월 사이에 생깁니다. 6개월에서 16개월 사이에. 애가 좀 크면 ”엄마 시장에 간다.“ ”엄마 장에 갈 때 내가 좋아하는 과자 사줘.“ 이미 장에 가든 말든 나는 과자가 필요하니까. 그 말은 뭐냐 하면, 나는 엄마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엄마가 사다주는 맛있는 게 필요하다는 것을 더 어릴 때는 몰랐는데 커서 보니까, 엄마가 필요한 게 아니고 내가 나에게 필요한 것. 내게 필요한 존재는 나예요.
<내게 나가 필요하다> 벌써 종교가 자기라는 신의 유일한 신자가 본인이에요. 내가 신이고, 나는 그 신도이고... 인간은 이렇게 살아갑니다. 나는 내가 신이고, 나는 나한테 신도에요. 이게 바로 악마가 ‘너는 신처럼 되리라” 했던... 자, 하나님의 조치는 뭐냐? 구약 전체를 율법으로 보면, 전도서죠. 전도서에서의 하나님의 조치, 처음에 추궁하고, 추궁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응징을 해요. 이 응징을 가지고 지옥, 지옥불이라 합니다.
“내가 말로 끝나는 줄 알았지?” 말로 안 끝나요. 추궁에서 응징으로 가는데 중간 단계가 뭐냐 하면, 몸이 아파 죽는 거, 늙어 죽는 거. 그러니까 아무리 똑똑하고, 철학이고 과학이고 간에 인간은 죽음을 아직까지 해결 못했습니다. 왜 죽는지를 몰라요. 이것은 “정녕 죽으리라” 라는 죽음 시작이 하나님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인간은 본인이 원한 게 아니었어요. 나는 나한테 신자인데, 나한테 신자가 되면 여기에는 내 죽음이 포함이 안 되어 있습니다.
나에 대한 지적, 나에 대한 추궁도 이 종교에서는 포함이 안 되어 있어요. 그러니 완전히 허접스러운 종교지요. 무조건 내 위로해주고 행복하게 해주는 종교지, 나를 죽이고 나를 심판하는 내용이 내 종교에는, 악마의 종교에는 없어요. 그러니까 교회가 마귀 종교 비슷하지요. 무조건 축복이래, 축복. 심판도 없고, 지적도 없고, 맨날 지적해봐야 ’그렇게 살면 너 손해다‘ 맨날 ’제 손해다‘만 이야기해요. ’하나님을 기쁘게 못 합니다‘ 그런 건 없고 자기 손해라고만 해요.
그래서 늙어 죽는 것을 통해서, 늙어 죽고 끝날 것 같으면 교회 다니란 소리를 안 하지요. 늙어 죽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고 지옥 불에 응징을 하는 거예요. 추궁을 하고 응징을 하는데 늙어 죽지요. 늙어 죽기 전에, 추궁하기 전에 중간에 전도서가 끼어드는 겁니다. 이게 뭐냐? 허무한 거예요. 허무. 이야, 이 허무. ’늙어 죽음‘ 앞부분에 허무가 들어가요. 이제부터는 어렵네요. 허무는 욕망의 극단입니다.
<허무는 욕망의 끝> 양수경이 불렀나요? ’이별의 끝은 어디인가요?‘ 이거 불러야 되는데... “어떻게 돌아왔는지~”이별의 끝은 어디인가요? 욕망의 끝은 어디인가요? 한 200억 벌었다. 끝은 뭡니까? ’허무‘지요. 자, 허무하게 되니까 허무를 메꾸기 위해서 그 돈을 여자 만나고 바람피우고, 술 먹는 데 허비하죠. 뭐 돌을 깨든, 돌을 깨서 뭐를 만들든 사업은, 사업을 왜 하느냐하면, 허무를 피하기 위해서 사업을 해요.
적어야 돼. <사업 이외 모든 일, 열중. 그것도 그냥 설렁설렁 하는 게 아니라 열중, 몰입하는 모든 노동은 허무를 기피하기 위해서, 허무기피용>입니다. 집구석에 있으면 뭐합니까? 시간만 때우지요. 제가 주일에 그런 설교 했지요? 퇴직했을 때의 느낌이 분명히 내가 알아서 퇴직했어요. 그런데 추방되었다는 느낌이 든다니까요. 이상하게. 아니, 기분 더럽잖아요. “선배님, 이제 그만 일하셔도 됩니다.” 이게 위로야? 뭐야, 약 올리는 거야?
이게 개인 회사 같으면 모르지만, 그게 아니고 일반 대기업이라 할지라도 참 열심히 일 하지요. 혼자 하는 사업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빠져버리면 일이 안돌아가요. 항상 이렇게 조직화되어 있는 곳에서는 내가 아프다고 해서 조퇴하고 그럼 안돼요. 그럼 대번에 찍힙니다. “너는 전체를 모르고 왜 너만 아느냐?” “우리 엄마 돌아가시고, 우리 엄마 제산데..” 그런 거 안돼요. 회사에요, 회사. 조직을 움직여야 돼요.
개인적으로 움직이려면 취직하지 말아야 되죠. 내가 만약에 신입사원 뽑는다면 묻겠어요. 실제로 투입되어야 되지, 인간성이 좋다? 인간성 좋아서 뭐하는데? 회사에 인간성 좋은 사람 필요 없어요. “필요한 시간에 네 시간 반납할 수 있느냐?” 물어야 돼요. 이 회사가 필요한 시간에... “엄마가 아프고, 뭐 수술하고..“ 봐줄 수는 있지만, 봐주는 거지요. ”그래, 너 효자구나“ 이건 아니지요. 효자는 즈그 집에서 놀면서 효자해라.
회사에 왔어요, 회사. 하, 젊은 애들이 그게 안 된다니까요. 열심히 하는 것은, 집에 시간은 남아도는데 뭐 할 겁니까? 시간이 남아돈다는 것은 내 존재감이 떨어지는 거예요. 존재감은 누가 주느냐하면, ‘타자의 인정’ 이에요. 남이 인정해줘요. 남들이.., 타자의 인정에서 존재감이 생기는데 이 존재감은 남이 있는 곳이 어딥니까? 회사죠. 회사, 직장에서 남이 있잖아요. 윗사람이 ”야, 네가 일 하는 거 보니까 네 일처럼 일한다. 우리 회사에는 너 같은 인재가 필요 했었어. 너 참 잘 왔어. 우리 회사에서 너 놓치면 아까워할 거야.“
이건 월급의 문제가 아닙니다. 월급 안올려 주고 말로만 때울 수도 있지만, 월급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감이 확 올라가는 겁니다.”열 사람보다 너 하나가 훨씬 나아.“ 상사가 좀 갑질 하더라도 이런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직원들 사기가 확 올라옵니다. 약간 구라도 포함되어 있겠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회사가 중요한데 구라가 뭐 예... ‘다른 사람도 그런 얘기 하더라’ 뭐 그런 건 들을 필요 없고, 무조건 직접 얘기하는 거죠.
그래서 이 존재감이 생기게 되면, 여기서 플러스 알파가 생기죠. 여기에 초월적인 능력이 생겨요, 초월적 능력. 월급 값의 두 배, 세 배를 합니다. 초월적인 능력이 생겨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죠. 이게 바로 회사의 ‘인간경영’입니다. 인간을 어떻게 경영하는가? 오직 하나밖에 없어요. 칭찬입니다. 칭찬이고, 문제 있는 직원 불러낼 때도 다른 타자가 보고 있으니까 칭찬을 해줘버려요. 그러면 걔가 지가 잘하는 줄 착각을 하니까, 지적을 할 때는 불러내요. ”다 좋은데, 이게 문제네.“ 혼자 있을 때.
험담은 혼자 있을 때, 칭찬은 여러 사람 있을 때, 그럴 때 타자에 의해서 상사가 존경받는 방법이 그 방법입니다. 남들이 자발적으로 존경하도록 만드는 방법은 그 사람 본인이 ‘나 훌륭하다’ 하는 게 아니고 누구를 대할 때, 다른 사람들이 다 봐요. 대할 때 다 본다고요. 그 때, 공개적으로 칭찬함으로써 ”야, 나도 잘 하면 칭찬받을 수 있겠네.“ 라는 간접 효과를 줄 수 있습니다.
이런 칭찬은 뭐냐? 허무를 메꾸는 것. 그러니까 이게 이 세상은 그냥 사기에요. <칭찬은 허망과 허무를 메꾼다.> 메꾼단 말이죠. 하나님의 작전 한 번 보세요. 하나님의 작전은 이미 인간을 추궁하기로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에게 계속 허무를 주게 되면, 인간은 허무를 칭찬과 노력으로 메꿔요. 메꾸면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허무가 될 수밖에 없는 과제를 더 붙여버려요. <허무의 연속>
‘올해 회사 목표 드디어 125% 달성! 야~~오늘 회식, 축하한다.’ 하고 2023년도 끝났다고 칩시다. 관리자는 2024년을 생각해야 돼요. 왜냐하면, 시간이 지난 만큼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고, 새로운 과제, 빈 칸이 또 생겼거든요. 누가 그렇게 하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셔요. ”네가 지금 좋다 이 말이지? 그러면 이건 어때?“ 하고 새로운 세계 경제 불황이 와버려요. 누가 그렇게 합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귀가 까불고, 인간이 까불어도 하나님의 노리개입니다. ”하나님 저 어때요? 이 정도로 착했어요. 이 정도로 성실해요. 남들이 다 칭찬해요.“ 그러면 ”이 사태는 어떻게 해결할 건데?“ 갑자기 애가 아프다든지 하면 정신을 못 차리죠. 이거 누가 그렇게 했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왜? 추궁 거리를 만들기 위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가치에 종결되도록 멈추는 것을 주께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전도서 1장 1절에 보면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그 다음에 뭡니까? ”왕“이죠.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1:1) 옛날에는 최고 재벌이 왕이었어요. 나라가 자기 거니까, 요새 말로 번역하면, ‘에루살렘 재벌, 그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 지혜를 전합니다. 2절에 ”전도자가 가로되“ 왕이죠. 왕이라 하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왕이고, 전도자라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전도자입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자, 여기서 헛됨이 몇 번 나옵니까? 다섯 번 나오지요. 그런데 마지막 헛됨은 앞에 뭐가 있어요? ”모든 것“ 에브리씽. 지난 번에 아카데미상 받은 영화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모든 것, 모든 것이 헛되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헛되다고 하는데 너는 왜 행복하지? 너, 뭐 문제, 간격 생겼지?“ 이런 뜻이에요. ”나는 분명히 헛되게 했는데, 네가 안헛되다고 하는 건 네가 너한테 사기치는 거다.“
<허무의 기능은 인간의 내부를 향한 주님의 고발> 고발하는 방법은 이생 또는 이승이 다가 아니다. 이생이 다가 아니에요. 전도서 제일 끝에 한번 보겠습니다. 전도서 12장 14절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여기 보면 ‘선악간’이죠. 인간들이 이미 선악과 따 먹어서 이미 알고 있잖아. 이게 구약이에요. 구약은 추궁입니다. 선악간에 심판입니다.
구약에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율법을 다 이룰 때나 구원돼요. 그러니 구원이 있을 수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구약엔 없습니다. 그걸 누가 아느냐? 인간의 양심이 알고 있죠. 인간이 제가 완전하지 않다는 걸 양심이 알고 있어요. 그게 완전하지 않다는 걸 자신의 결핍이 뭐로 나오느냐 하면 ‘말’로 나와요. 세 번 째 얘기하는데, 이 말이 ‘핑계와 변명’ 핑계와 변명으로 나와요. 애들 잘 합니다. 핑계와 변명으로 나오죠.
그래서 여기서 하나의 팁으로 얘기한다면, 인간은 왜 외로울까요? 지금까지 공부한 거에 의하면 외로운 이유는 ‘내 핑계와 내 변명을 들어 줄 사람이 옆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아내나 남편이 죽으면 그렇게 우는 거예요. 내 말귀를 평생 동안 다루어가지고 딱 하면 알아듣는데, 그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 옆에 배우자의 죽음이 아니고 나의 죽음과 동시에 동반 죽음이에요.
그러면 그 죽음을 메꾸기 위해서 뭐하느냐? 개 키우고 고양이 키우죠. 말 잘~ 듣거든요. 그래서 뭐뭐뭐 나라 잘못하고 대통령 잘못하면 개보고 이야기해요, 욕하고요. 세상에 누군가 자기에게 잘못하면 그 자리에서 말 못하고 집에 와서 개 보고 이야기하고 고양이 보고 화내고. 개와 고양이의 특징이 말이 없다는 거예요. 심지어 당나귀까지 말이 없었어요. 그런데 민수기 22장에 보면 발람 선지자가 나귀한테 대꾸 들었죠. 왜 때리냐고. 깜짝 놀랐지요.
당나귀가 이야기한 게 아니고 여호와께서 당나귀 입을 통해서 이야기 했죠. 이 말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뜻이에요. 그냥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추궁하고 있다는 거예요. ”한 번 보자. 나중에 죽고 난 뒤에 한 번 보자. 내 선악과 왜 따 먹었어?“ ”마귀가 유혹했는데요?“ ”마귀한테 왜 유혹받았어? 난 너 같은 인간 만든 적이 없어. 악마한테 넘어가는 인간을 내가 받아줄 상 싶어? 웃기지마, 안받아줘.“
그래서 인간을 결국은 헛되게 만들겠다는 야무진 결심이 바로 ‘전도서’입니다. 자, 전도서 내용 다 나왔죠. 전도서 내용은 <주님의 추궁을 실생활로 경험하라.> 이게 전도서 내용이에요. 전도서 내용은 ‘주님의 추궁을 실생활로’ 장 보고, 놀러 가고, 책 보고, 운동하고, 산책하고 하면서 ‘추궁’을 경험하게 하는 거예요. 그럼 추궁이 우리 실생활과 결합이 되면, 주님의 추궁, 추궁이니까, 전도서, 율법 아닙니까? 율법 플러스 우리의 일생, 또는 실생활 하게 되면 이퀄(=) 나오는 결과는 허무.
중간 중간 허무한 게 아니고 허무로 빠져요. 전도서 1장 봅시다. 거기 나옵니다. 1장 3절에 보면,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이 말은 율법이에요, 율법이거든요? 율법은 다 수사반장이에요, 형사입니다. 다 알고, ”범인, 네가 한 짓 다 알아.“추궁하거든요.
추궁 또는 취조하면서 ”너 유익한 거 했잖아?“ 이 말은 ”무엇이 유익한고“ 이 말은 네가 매사에 너에게 유익한 쪽으로 했지? 하지만 여기에 보면 5절에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6절에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자 바람 나왔죠. 7절에 뭐 나옵니까? 강물 나오죠. 강물은 바다로 흐르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전1:7)
이게 뭐냐 하면, ”인간아, 너는 인간 아니고 흐름이야.“ 이런 뜻이에요. flow, 인생은 또는 인간은 flow, 흐름이다. 실체가 없다. 제가 좋아하는 코미디 프로에 나왔었어요. 뭐냐 하면, ”나중에 사장 되면 뭐하겠노?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애 둘 낳으면 뭐 하겠노? 나중에 결혼하면 전부 다 지 잘났다고 하겠지.“ 전부 다 인생 자체가 입자가 아니에요. 이게 물리학 개념인데, 딱 스톱이 안돼요, 스톱이.
맛있었는데 30분 지나니까 다시 ”그거보다 더 맛있는 거 없나?“이렇게 된다니까요, 인간이. 인간의 본질은 없어요. 하, 이거 참 무서운 말인데, 인간 자체가, 이 단어가 거짓말이에요. 인간 자체가 없어요. 그냥 flow에요, 흐름이에요. 양자물리학에서는 이것을 원자라고 합니다. 원자의 에너지 파동이라고 합니다, 양자물리학에서는. 인간은 그냥 흐름이에요. 그런데 혼자 흐름이 아니고, 우주의 흐름과 섞여있는 흐름이에요.
요구르트가 있잖아요. 요구르트가 액체 아닙니까? 뱅뱅 돌리면 돌잖아요. 요구르트 속에 숟가락으로 저어버리면 요구르트가 뱅뱅 돌면서 결국에 한 점에 모이듯이 뱅뱅 도는 소용돌이 점의 하나가 우리 자신이에요. 우리는 요구르트 속의 일개 요소가 돼버려요. 그런데 이 요구르트 전체를 뭐라 하냐 하면, 세상이라고 합니다. <요구르트가 이 세상이라면 우리(개인)는 우유의 한 점액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율법의 지혜, 이게 지혜거든요? 지혜는 우리를 얼마나 이 세상을 높은 데서 보게 하는 거예요, 전체를 보게 하는 거예요. 에브리씽. 전체를 보게 되면,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것 나왔습니다. 크게 쓰겠습니다. <전체를 보게 되면, 지금 죽어도 상관없다> 이게 지혜입니다. 지혜를 알면, 죽음에 연연 안해요.
<지혜는 죽음에 연연 안한다> 연연 안하게 되면, 이게 전도서의 복인데요, <전도서가 주는 축복은 뭐냐? 윤리, 도덕, 착함에서 벗어나게 해주신다.> 지금 죽는데 착함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착함은 선악과에서 나왔어요. 착함, 윤리, 도덕 이게 뭐냐 하면, 선악구조거든요. 선악구조에서 빠져나오면 착하다, 안착하다 의미 없이 그냥 우리는 죽도록 되어 있는 거예요.
이것을 위에서 지혜를 다 알아버리면, 굳이 더 착하다, 덜 착하다, 악하다, 더 악하다가 이게 다 시덥지 않아 ”아아~ 니 맘대로 하세요.“ 이렇게 되어 버린다고요. 그러니까 스트레스를 안 받는 거예요. 어제 그 ‘노트북’ 영화에 보면 아들딸 부모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든요.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허름한 목재소 아들이랑 사귀냐?“ 이런단 말이죠. 그렇게 이야기하는 엄마 자체가 평소에 스트레스에요. ”우리 이 정도 잘 사는데, 이 정도 되는 격이 맞는 남자 만나야 된다.“
왜 그래야 되는데? ”그게 유익이니까“ 왜 유익해야 되는데? ”그래야 내가 착하니까“ 왜 착해야 되는데? ”착해야 나는 복을 받고, 복을 받으면 죽어도 천국 간다.“ 지금 이게 기존에 종교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악마에 의해서 선악구조에 따른 교리가 뭐라고 했습니까? ‘착하면 복받고 나는 행복하다’ 이게 교리의 전부에요. 그게 얼마나 본인한테 스트레스가 되는 거에요?
<스트레스> 스트레스란, 원래 창조된 인간과 달리 이물질이 들어간 것, 다른 말로 합시다. 불순물, 불순물이 뭐냐 하면 윤리, 도덕이에요. 선악체계. ‘사람은 착해야 복 받는다’ 악마가 인간을 망치기 위해서 집어넣은 불순물, 불순물이 들어간 거예요. 세상에 이런 아토피가 없어요. 이건 병원에서도 못 고칩니다. 전도서 1장에 보면, 벌써 바람 나오죠. 6절에 나오는 ‘바람’ 나오는 유명한 노래 있죠.
김범용의 ”그대 이름은 빠담 빠담 빠담~“ 발음이 안돼 가지고. 보세요 성경대로 아닙니까? ”왔다가 사라지는~“ 뭐라고요? ”바람!“ 전주도 기억나요. ”빰빰 빰빰 빰빰빰~“ 그대 이름만이 아니고 모든 게 다 바람이에요. 실체가 없어요, 인간은. 그냥 하나님의 전략에 의해서 이런 경험도 하고, 저런 경험도 하고 이런 거죠. ”당신은 왜 여자입니까?“ 참 어려운 질문이죠. 주께서 여자 되게 했으니 여자지, ”당신은 왜 남자입니까?“ 주께서 남자 되게 한 거예요.
이거 내가 선택한 게 아니에요. 사적인 의지는 없어요. 그런데 선악과 체제에서는 인생이 태어난 것은 주님의 의지라 해놓고, 살기는 제 의지로 살아가니깐 이게 바로 이물질, 불순물이에요, 불순물. 그냥 맡기면 되는데...”뜻이 있겠지, 뜻이 있겠지“ 그럼 넌 어떻게 사니? ”나? 허무하게 살 거야. 나 허무 너무 재밌어. 허무 너무 재밌어.“ 그게 지난 낮 설교의 핵심, 주제였습니다. 망해버리면 되는데, 실패를 즐거워하면 되는데요. 실패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면 되는 거에요.
‘아, 이런 실패도 있구나.’ 경험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실패 안하려고 하니까 스트레스를 받는 거예요.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그게 더 실패에요. 암 걸리고. ‘반듯해야 돼. 사람은 인간답게 살아야지. 짐승이 아니잖아.’ 이게 얼마나 인간에게 스트레스가 되는지요? 제가 인간답게 살 수 없어요. 그냥 주어진 상황이, 그 상황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니까 지는 지가 잘나서 사는 건 줄 알고 있어요.
모든 에너지는 주님이 줬는데 지가 걱정, 근심을 하고 있으니까 이 얼마나 비논리적이에요? 그렇게 논리 따지고, 이성 따지고, 합리적인 거 따지면서 사는 꼬라지 보면 비논리적이죠. 우리는 걱정할 권한도 없습니다. 1장 8절에 보면,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하~참 이거 진짜, 솔로몬이 똑똑해서가 아닙니다. 주의 말씀이에요. 주께서 ‘아, 사람들이 힘들구나.’가 아니라, 주님이 힘들게 했어요, 주님이.
수억을 가지고, 수백억을 굴려도 인간의 피곤함은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하, 눈코입 이걸 제거를 하든지...지혜라는 것은 최종적이기 때문에 9절에 한번 보세요.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따라서 나도 그냥 돌아가는 요구르트의 하나의 점액에 지나지 않는다.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이 세상이 마귀한테 속아 넘어간 이유가 있어요. 발전한다 하잖아요. 발전은 없어요. 조선시대의 개나 지금의 개나 똑같아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 개 그림이 있어요. 단원(김홍도)의 개 그림을 보면, 박물관에,, 요즘 개하고 똑같아요. 이 말은 인간도 똑같아요. 상황 따라서 옷이 좀 다르다 뿐이지, 인간은 똑같아요. 그러면 사람의 정신은? 그 시대가 만든 허무함을 버텨내기 위해서 인간이 조작해 낸 것이 인간의 문명이라는 겁니다. 그게 지식이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허무하게 만들었는데, 버텨낸다고, 마귀가 시킨 대로 버텨낸다고 노력하다 보니까 인간은 마치 그게 제게 괜찮은 주특기가 되어버린 거예요. 그러니 결핍이 더 생기고, 위선자가 되어 버리고, 변명과 핑계만 더 늘어나니까 마귀는 좋다고 하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도 ”내가 분명히 이야기했잖아. 조선시대는 조선시대대로 망하고, 너는 너대로 망한다고“ 망하면 어떻게 하느냐? 망함을 즐겨야죠. 그냥 받아 들여야죠.
하나만 더하고 10분 쉽시다. 11절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자식이 나를 살아있을 때만큼 생각 안한다. 지는 지 살기 바쁘단 뜻이에요. 그들 기억에 우리는 점점 사라지는 거예요. 우리 할아버지, 우리 아버지 같이 살아있을 때만큼 기억합니까? 내 살기 바쁜데 뭐, 점점 기억이 떨어지겠죠. 나중에 치매 걸리면 더 떨어지겠죠.
나중에 내 자신이 치매 걸리면, 치매라는 것은 내 자신이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치매에요. 그게 죽음이에요. 자아 죽음. 어차피 인간은 죽을 때 치매에요. 자기 자신을 잃어버려요. 그러면 그 동안 수고한 거 어디서 건집니까? 못 건지죠. 건질 게 없어요. 잃어버리기 위해서 애쓴 거예요, 결국. 가져가지 못하는 것들을 위해서 평생을 애쓴 겁니다. 그럼 나한테 좋은 건? 좋은 것도 잃어버려요. 그냥 사세요, 그냥. 첫 번째 강의는 이걸로 끝납니다. ‘그냥 사세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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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시작합시다. 두 번째는 강의 제목이 ‘전도서와 십자가’니까, 두 번째 강의에는 십자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아까 첫 째 시간에 한 것처럼 이메일로 보내다가 모세를 통해서... 직접 당사자가, 당사자가 이 땅에 온 거에요. 율법의 출제자가 온 거에요. 율법의 출제자. 율법의 정답은 누가 알겠습니까? 출제자만 알죠. 그리고 그 출제자가 정답을 말로 하는 게 아니고, 몸으로 보여준 거예요.
이 점이 중요한 거예요. <율법의 정답을 뭐로 보여준다? 몸으로 보여주는 것을 두자로 ’인간‘>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 그러니까 우리는 인간입니까, 인간 아닙니까? 인간이 아니지요. 죽어 마땅하죠. 예수님께서는, 이게 어려운데요,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오면서 인간이 뭐냐 하면, 율법을 위반했을 때 이런 인간이 된다는 몸을 가지고 오신 것을 가지고 죄 있는 몸으로 오셨어요. 율법을 위반했을 때, 그러니까 율법이라 하는 것이 용서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몸으로 오셨어요.
이 몸을 ’인자‘라고 합니다. 사람의 아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로 오셨어요. 사람의 아들, 사람의 자녀, 후손, 아들로 오신 거예요. 이거 다시 적으면 <율법에 위반했을 때의 모습>이것이 아들이고, 마지막 그 모습이 무슨 모습이냐 하면, 십자가에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모습. 이게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 맞는데 좀 더 더더더 내용을 더 길게 이야기 해보세요 하면, 보통 사람은 스톱돼버려요. ’십자가에 예수님이 죽었다.‘ 좀 더 설명해보라고...”뭐 설명할 거 없는데, 예수님 죽은 게 십자가지 뭡니까?“ 이렇게 되거든요. ”예수님이 죽을 때 그 몸이 누구 몸이죠?“ ”그 몸 있었지. 사람 몸이죠.“ ”그 사람 몸이 어떤 몸이죠?“ 율법에 위반했을 때의 몸이에요. 그게 아담의 몸이고, 정녕 죽으리라는 몸이고...
그 몸이 DNA, 그 몸이 DNA 플러스 거기서 나온 단백질의 결합체, 이게 오늘날의 육신, 이걸 가지고 육신이라고, 과학적으로 DNA+단백질, 모든 세포 내에 DNA가 다 있어요. 세포 내 핵에도 있고, 세포 핵 외에 미토콘드리아에도 DNA가 있거든요. 여기서 단백질이 만들어져요. 그럼 DNA는 누가 만드는가? 단백질이 만들죠. 그럼 단백질은 누가 만드는가? DNA가 만들죠. 자기들끼리 해가지고 만들어서 육신을 만들어요. 근육을 만들어요, 육신. 이게 인간입니다.
근데 이걸 가지고 성경에서는 DNA라 하지 않고, 간단하게 뭐라 하냐면, ’흙‘, 흙에서 나왔다. DNA에서 나왔는데, DNA에서 더 들어가면, 썩으면 뭐 되죠? 썩으면 뭐 돼요? 흙 되죠. 그러니까 맞잖아, 성경말씀 맞잖아. 흙 되잖아. 그런데 흙인데, 예수님께서 인간의 원형이거든요? 예수님께서 죄 된 몸의, 죄 된 인간의 원형이잖아요. 원형이니깐 흙이 아니라 더 여분의 것, 플러스 알파가 있다는 게, 그게 뭐냐 하면, 영적 존재가 되는 거예요.
이걸 인간이 놓쳐버린 거예요. 이생에 살았다는 게 다가 아니고요, 부활의 영이 있어요. 부활의, 하늘 나라의 형상이 또 있는 거예요. 그걸 누가 아느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알 수 있죠. 그게 신약성경이에요.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율법에 의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추궁 받는데, 그 추궁의 끝은 어디인가? 추궁의 끝은 십자가죠.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했거든요. 율법, 이 전도서 다 이룬 거예요. ”내가 허무하다 했지?“ 다 이룬 거예요.
전도서 1장 한 번 봅시다. 1장 14절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15절에 보면,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 이것은 다른 분이 관여하기 때문에 인간이 어떻게 펴거나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내 인생을 내가 구부리거나 할 수 없다 이 말이죠. 내가 결정, 판단한다고 내 인생이 바르게 되는 건 아니다 이 말이죠.
우리는 밀리면 밀리는 대로 살 수 밖에 없거든요. 17절에,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19절,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여기서 ’지혜‘는 지식을 말합니다. ”지식을 더하는 자는“ 뭐도 많다? ”근심을 더하느니라.“ 근심이란 결핍을 의미합니다. 알면 알수록 자기의 숨은 욕망과 목표는 더 높아지게 돼 있어요.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아요.
차라리 그 정도로 만족했으면 좋겠는데, 알면 알수록 그 지점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이 지점으로 만족했는데, 딱 그 지점에 도달하니까 새로운 욕구가 확 올라오죠. 이게 만약에 줄자라면, 1센티, 2센티 3센티 있잖아요. 선 그어져있는 줄자. 여기가 만약에 ’5‘라면, 5 지점에 갔을 때 나는 이정도로 족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5지점에 가니까 6이 보이고, 8지점에 오니까 9가 보이고, 도대체 인생의 끝은 어디인가요? 인간의, 내 욕심의 끝은 어디인가요? 10에 오니까 12가 보이죠. 12하고 10하고 간격이 벌어져 있죠.
그 간격은 우리에게 무엇으로 나타나느냐 하면, 분노에요. 간격은 분노로 나타납니다, 간격은. 미국 맨하탄에 고급 아파트가 많아요. 최고 비싼 게 3300억원, 한 달 관리비가 따로 3500만원이고요. 매달 따박따박 들어가요. 만약에 어떤 부부가 결혼을 했다 칩시다. 사우디 아라비아 왕자 부부라고 치고, 그 집을 샀다 칩시다. 그 남자가 자기 부인 보고 ”너 뭘 원하는데?“ 그러면, ”맨하탄 센트럴 파크 옆에 고급 아파트에 살고 싶어요. 그러면 더는 소원 없어요.“ 이러잖아요.
그러면 사우디 부자가 사준다고요. 사줬는데, 사줘서 산단 말이죠. 그러면 아까 그 6센티에서 7센티 됐잖아요. 그러면 그쳐야 되는데, ”당신 요새 말투가 왜 그래?“ 갑자기 아파트는 날아가 버리고, ”왜 너 나한테 말투가 옛날처럼 다정다감 안해? 헤어져!“ 단, 헤어질 때 그냥 헤어지지 않고, 위자료 확 끄집어내면서 ’우리 헤어져‘ 그러죠. 이게 뭐에요? 6으로 올 때는 아파트만 있으면 만족했었어요. 11 위에 오니까 그 아파트를 사니까 비로소 보이는 것, 그것은 자신의 결핍이에요.
도대체 자기 자신이 감당이 안돼. 왜냐 하면, 내가 신인데, 나는 ’보잘 것 없는‘ 인간 존재인데, 나는 내가 또 나한테 신이예요. 그 인간이 신의 욕구를 충족하려니까 평생을 바쳐도 이 결핍이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여기서 결여, ’결여‘ 란 말은 ’모자람‘ 이란 뜻이에요. 간격이 벌어짐, 행복하고 싶었는데, 이 결함 때문에 스트레스가 있다. 스트레스.
스트레스를 메꾸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돈을 투자하고, 뭐 조깅하고 뭐 노래 부르고, 노래 교실에 가서 백날 해도 스트레스 그 때는 풀리는 거 같죠? 집구석 오고나면 화가 또 도져요. 집구석 꼬라지 하고는, 자식 꼬라지 하고는, 남편 꼬라지 하고는, 심지어 강아지 꼬라지 하고는...왜 세상이 내 맘대로 안 되냐고 고래고래 고함지르죠. <말이란 나에게 내가 공격하는 것> 내가 나를 망치는 것. 이걸 불쌍하다 하면 안돼요. 선악과 따먹은 걸 추궁하기 위해서기 때문에 불쌍한 게 아닙니다. 불쌍한 게 아니에요.
전도서 1장 봅시다. 십자가 전에 먼저 봐야 돼요. 1장 1절에 제일 먼저 나오는 게 뭡니까? 다윗이죠, 다윗. ”다윗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어요. 다윗 그 다음의 언약은 없습니다. 구약의 최종 언약은 다윗언약이에요. 모세언약 그 다음에 다윗언약이고, 다윗언약으로 그 다음에 아까 우리가 가려다가 못간 곳, 무슨 다리? 출렁다리. 다윗과 예수님 사이에 출렁다리가 있어요. 거긴 교각이 없어요. 공중에서 공중으로 날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과 예수님 사이에는 이것이 파멸이에요, 파멸. 파멸, 모든 것이 헛됨으로 끝나야 돼요. 다윗이 있을 때 이스라엘에서는 최고의 극치, 모든 복의 극치를 솔로몬이 다윗의 아들이니깐, 솔로몬, 다윗 때에 최고의 복은 다 누렸어요. 그 다음부터는 꼬라박는 일만 있었어요. 꼬라박는... 파멸이고 파괴에요. 그 파괴의 끝은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자, <십자가란, 파멸> 시속 300킬로로 달리던 차가 절벽에 부딪힐 때, 파탄 나죠. 파멸, 다른 말로 파탄 나는 거예요. 저주의 완성, 이게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다는 말은 우리가 지금 그 짝으로 지금 시속 120으로 달리고 있다는 뜻이에요. 십자가에 주님께서 절벽에 부딪쳐서 박살났잖아요. 모든 인간이 그 모양으로 박살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심판, 단단한 벽, 뚫을 수 없는 천국을 향하여 그냥 질주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히덕거리고, 웃고, 좋다고...뭐 오염수? 일본의 오염수? 하지마라. 그거 오염수 때문에 소금 값 올라가지고 소금 산다고...이 세상 돌아가는 것이 전부 다 백날 무슨 번잡스러운 일, 모든 번잡스러운 일이, 시덥지 않은 일, 전부 다 시덥지 않은 일, 아무 고민거리도 안 되는 일, 전부 다 손잡고 다 같이 파멸의 길을 가고 있는데, 질주하고 있는데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에요.
그래서 <십자가란, 전도서 말씀완성>, 이것은 <율법의 정답자가 율법의 완성자로 나타난 사건>, 그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율법의 정답자,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의 출제자, 출제자만이 정답을 알아요. 문제 출제하지 않으면 정답을 몰라요. 다른 사람은 정답을 모른다고요. 그러니까 율법을 지킨 사람이 없어요, 이 세상에. 왜? 본인이 출제를 안했으니까.
율법의 정답자가 완성자로 나타나는데 그 완성이 뭐냐? ’헛되어라‘ <헛되어라> 쉽게 얘기하면, 가훈이 뭐에요? 하면 ’망하자‘ 좀 더 길게 하면, ’실패하자‘ 좀 더 길게 하면 ’실패를 즐기는 화목한 가정‘ ’실패를 감사하는 화목한 가정‘ 아, 가훈 멋지다. 한번 적어보자. <실패를 감사하는 화목한 가정> 이걸 더 밀어붙이면 어떻게 되냐 하면, <실패를 위하여 살자> 이걸 줄여 버리면, ’실패가 복이다‘ 아주 극단적이죠. ’실패가 복이다.‘ 이거 누가 알겠어요? ’실패가 복이다‘
어떤 사람이 일년에 한 20억 벌었습니다. 지난해에 돈 20억 벌었는데, 누가 ”지난해에 뭐했어요?“ 물으면, ”20억 번 실패했잖아.“ 이렇게 이야기하면 되잖아요. 왜 그리 이해를 못해요? ”실패해서 20억 벌었어요. 아, 나 올해는 더 실패할거야. 35억 번다.“ 왜 그걸 편하게 못하냔 말이죠. ”우리 애 이번에 실패해서 전교 1등 했어.“ 왜 그 말을 못하냔 말이죠, 그 말을. 네? 적자. <우리 애 실패해서 결국엔 전교 1등> 미치겠어. 도대체 이 실패의 끝은 어디냐? ’서울 의대 수석 합격’ 이게 다 실패가 되는 거예요. 그냥 실패를 즐기면 되는데..
전도서는 즐기라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신약에서는 십자가 안에서 감사하라는 뜻이에요. 같은 말이에요. 십자가 안에서, 얼마나 실패했으면 내가 죽어야 되요? 내 죽음 안에서 감사하라. 요걸 네 자로 줄이면 ”막 살아라“ 막 살아라 복음이 이런 논리의 구조에 의해서 이제 나와요. ‘막 살아라’ 실패를 즐거워하는데 세상에 그것보다 막 사는 게 어디 있어요?
전도서는 이제 그만 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전도서 2장부터 14장 까지 내용은 아까 했어요. ‘일상 속에서의 허무를 경험하라‘는 내용이에요. 책을 읽어도, 과수원에서 농사짓고, 뭘 하고, 뭘 하고 하잖아요. 방금 이 십자가를 통해서 보게 되면, 과수 농사짓고 뭘 해도 그건 뭐냐 하면, ’즐거운 실패의 일‘, 뭐 여기 와서 집 짓고 하는 것도 즐거운 실패의 일, 자궁 안에 뭐가 나타난 것도 즐~거운 실패의 일, 고마운, 감사한 실패의 일,
그렇다면 여기서 이제 두 번째 시간에는 십자가에 대해서 한 번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한 번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잠시 보고 4장으로 넘어오겠습니다. 자, 지금까지 강의의 결론은 ’막 살아라‘가 결론으로 나왔습니다. 막 살아라. 그것도 앞에 붙이면, ’신나게‘, ’신나게 막 살아라‘ 어차피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실패하기 때문에 막 살아야 된단 말이죠. 막 사는데, 조건이 있었어요. ’십자가 안에서‘에요. ’십자가 안에서‘
십자가 안이니까 그림 그리면 쉽죠. 동그라미. 안이에요. 십자가 안에서 우리가 하나의 아까 얘기한 요구르트, 저을 때 하얀 요구르트, 우유 엉긴 것, 요구르트 안에 우리는 하나의 점액이라 했죠. 뺑뺑이 도는 거죠.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우리는 선악과 따 먹었기 때문에 ’정녕 죽으리라‘에 해당됩니다. 해당되는데, 이게 뭐냐 하면, 세상 안이에요. 음성만 듣는 사람들한테는 안타까운데, 동그라미 하나 그렸잖아요. 그 밑에 동그라미를 또 그리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 안에는 허무해요. 요것은 뭐냐 하면, 바로 ’예수 안‘입니다. 이게 신약이에요. 예수 안. 세상 안에 있을 때는요 예수 안, 이게 천국인데, 이 천국이 여기 세상 안에서 상상하는 것은 이것은 전부다 악마의 사기이기 때문에 믿을 필요 없고요, 지옥도 다 사기에요. 진짜 천국은 인간에게 막혀 있었습니다, 그 동안. 진짜 천국은 막혀있었어요. 막혀있으니까 인간은 스트레스 받아가지고 자꾸 천국, 지옥을 얘기해서 종교를 만든 거예요.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허무를 메꾸기 위해서 인간이 조작한 거예요. 악마가 조작한 거죠. 진짜 천국은 없어요. 없는데, 언제 있다는 걸 아냐 하면, 예수님께서 천국, 예수 안, 이 동그라미 안에 있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가지고 여기 빠져나가요. 이 구멍으로. 그러면 이 세상 안에 뭐가 발생됐습니까? 구멍이 있어요. 원래 구멍이 없는데,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쫓기다보니깐 예수님이 죽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죽었다.‘하고 끝났으면 이 구멍이 안 생기는데, 빠져 나가니까 구멍이 생긴 거예요. 그게 빈 무덤인데, ’구멍은 빈 무덤‘ 빠져 나와서 어디로 가냐 하면 예수의 나라, 천국에, 아들의 나라에 도달한 겁니다. 그러면 이 두 동그라미 가운데 앞 동그라미 하고 뒤 동그라미 하고 인간 입장에서는 연결이 됩니까, 안됩니까? 연결이 안돼요. 끊어져있어요. 이걸 ’불연속성‘ 이라고 합니다. 이건 좀 어려운데, 어려운 것도 감당할 수 있거든요.
이 불연속성이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옵니다. 4장 10절에서 12절까지 읽어 볼까요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됐습니다. 이걸 성경을 그냥 오늘도 한 장 읽을까, 두 장 읽을까? 하면서 그냥 읽어버리면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몰라요.
그런데 이 그림 있잖아요. 이 동그라미하고 이 동그라미 하고 끊어진 상태 같으면, 이거는 4장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 보배가 성령입니다. 성령이 오시거든요.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지금 이 안에 갇혀 있잖아요. 천국 못갑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는데 예수님이 뚫어놓은 이 길, 이쪽 세계하고 이쪽 세계하고 일종의 출렁다리라고 할까요, 이 길을 통해서, 이 루트를 통해서만 성령이 와요.
성령이 제 맘대로 오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뚫어 놓은 길을 와서 이걸 반복해서 왔다갔다 해요. 반복해서. 성령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을 다 활용해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우리가 육신이 있으니까, 성령께서는 육신 있는 이것을 우리가 죽었다고 이야기해요. 이 몸을 죽었다고 하고, 우리가 예수 안에서는 뭐냐 하면, 우리가 살았다고 이야기해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이에요? 몸은 하나인데, 세계가, 소속이 다르기 때문에 한 쪽 소속에서는 산 사람이 되고, 한 쪽 소속에서는 죽은 사람이 되는 거예요.
한 쪽에서는 죄인 되고, 한 쪽에서는 의인 되는 거예요. 예수 안에서는 의인되고, 세상에서는 죄인이고. 그런데 왜 세계가 한 개가 아니고 두 개냐? 성령께서 두 개의 세계가 다 필요하기 때문에 성령의 활동, 예수님의 활동을 위해서 우리가 양 쪽에 다 있어줘야 돼요. 우리 구원받기 위해서 있는 게 아니고, ’뭐 하나로 깔끔하게 하지?” 깔끔은 네 생각이고, 주님은 너와 더불어 할 일이 있으신 거예요, 할 일이.
요구르트를 젓는 분이 있고, 우리는 요구르트의 하나의 점액이고, 그러니까 주께서 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거예요. 우리가 살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니고, “아직 죽지마. 내가 너한테 할 일이 있어.” “ 무슨 할 일요?” “고린도후서를 설명해야 될 거 아니야.” 누굴 통해서? 너를 통해서 고린도후서 4장, 5장을 설명하겠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4장, 5장을 설명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씀은 지키는 게 아니에요. 말씀이 우리를 가지고 말씀이 스스로 자기를 지켜 나가죠.
그래서 여기 보면, 제가 여기 써놨죠. <불연속성> 연결되지 않은 것을 불연속성이 있는 사람, 이게 성도입니다. <마음 속에 불연속성을 지니고 있는 자가 성도>입니다. 불연속성을 두 자로 하면, ‘성령이 계신다.’ 성령은 우리 소원대로 해주지 않고 예수님의 소원대로 왔다갔다 하고 활동해요. 활동의 이유는 말씀이 말씀되게 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율법을 이루었잖아요. 전도서 다 이루었죠? 그걸 그대로 우리한테 이루게 합니다.
이루게 하면, 우리의 아까 그 세상 안의 육신은 백년, 이백년, 삼백년 살아도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우리를 허무하게 만들어요. 그런데 허무하게 만드는 걸 보고 성도는 굉장히 즐깁니다. 왜? 허무하라는 말씀이 내 몸을 통해서 이루어지니까 허무한 게 기뻐요. 막 사는 게 기뻐요. 매사가 실패 아닌 게 없는 게 기뻐요. 매사가.
그러면, 기도제목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 기도 제목 예를 들어서 어느 날, TV가 안 나온다. 기도제목 갖고 기도합니다. “주여, TV가 나오는 실패를 하게 하옵소서.” 얼마나 간단합니까? 주님께서 응답하죠. “왜 TV 나오면 너한테 이익이 뭐냐?” “TV 나와야 천국 안 가려고 하는 이 못 되어먹은 사고방식이 더욱 더 드러날 게 아닙니까?” “너 그럼 천국 안가고 왜 이 땅에 살려고 하는데?” “재미난 거 하거든요.” 근데 TV 고장 났어. 남들이 들으면 이상한 기도를 해요.
비슷한 예를 들어서, “하나님, 손자가 몸이 아프대요. 병이 낫는 실패를 하게 하옵소서.” 그럼 하나님이 “왜 손자가 병 나아야 하는데?” “ 손자가 병이 나아야 제가 천국보다 이 세상을 더 좋아하는 이 못 되어먹은 이 육신이 갖고 있는 죄성 있잖아요, 눈에 안 보이는 천국보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나는 더 좋아, 죽기 싫어~하는 이 못된 품성이 손자를 통해서 더욱 더 개발되게 하옵소서.” 왜? 내가 허무해야 되니까. 내가 천국보다도 이 세상을 더 좋아하는 그 죄성 있잖아요.
죄를 해줘야 어느 말씀이 완성 되냐 하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씀이 살아 생전에 우리에게 구현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럼 전에는 어떻게 기도했는가? 전에 기도는 ‘쭈여’, 쌍지읏이 들어가요. “쭈여, 복을 주셔서 주님이 살아계심을 기적적으로 보여서 나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했죠. 이거 뭐, 주님 빙자해서 자기 성공, 자기 잘남을 자랑질 하고 있는 거예요.
똑같은 내용의 기도인데, 중간에 뭘 집어넣었는가? “주여 이 기도가 바로 실패인 것을, 이것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이것 때문에’, 중요하네요, <내가 실패하기 전에 주님이 먼저 시범조로 이 땅에서 실패하셨음을 보이게 하옵소서> ‘내가 실패하기 전에’, 참 이거 중요한데요, ‘내가 실패하기 전에’ 나는 어차피 실패해요. 늙어서도 그렇고, 백날 해도 나 치매 걸리면 우리 엄마 바보됐다 그러면서 난리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어차피 늙으면 모든 게, 그렇게 존경하던 할아버지 할머니도 뒤뚱뒤뚱 걷고 그러면 질색입니다. 애들은 얼마나 모든 인간들은 다 자기 품위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이 아무리 해도 몸 아프면 천대받게 돼있어요. (맞아요, 근데 당연하잖아요.) 당연한 정도가 아니고 즐겨야 돼요. 내 본색, 숨은 본색을 이제 알았어? 돈 좀 가지고 맛있는 거 사줄 때, 과자 사줄 때 좋아했지? 그건 가짜였어. 내가 아직 실패를 덜 해서 그랬어.
<실패를 덜 하면 존경 받는다> 존경 받습니다. 자, 이것을 고린도후서 5장을 보겠습니다. 이것도 엄청난 이야기인데, 이 엄청난 이야기를 고린도후서 5장에서는요, 14절에 보면 더 압축을 해놨네요. 5장 14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그 다음 말이 뭡니까?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다. 한번 써보겠습니다.
이야, 십자가의 의미가 여기까지 계산해서 확대가 돼요. ‘모든 것이 죽었다’ 할 때, 모든 것 안에 자기 아내, 남편, 손자, 자식 다 집어넣어 보세요. 그러면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 다 집어넣고 칼국수 하는 아줌마도 집어넣고, 죽은 자가 애써서 칼국수 끓여주는 거예요. 능이버섯칼국수. 죽은 자가. 왜 우리는 그걸 죽은 자가 만들었다는 생각을 왜 그 동안 못했느냔 말이죠. 이것은 우리가 세상 안에서 사는 게 이력이 나서 그래요.
예수 안에서 살면, 주님 안에서 보면 살아있는 채, 죽음이 살아있는 거예요. 하, 오늘 진짜 결정적이다. ‘죽음이 살아있어요’ 죽음을 품고 살아있어요. <죽음이 살아있다. 또는 죽음을 품고 살아있다> 그러니까 이제 손자가 와서 “할머니~” 그러면 “너는 내가 할머니로 보이냐? 귀신이 네 앞에 살아있다는 게 안보이냐? 너 실패자로, 실패하는 할머니로 안보여? 아직도 신앙이 멀었어, 너. 말씀에 입각해서 봐야지. 너 아직도 내가 산 자로 보이나?”
뭐가 잘못 됐나? 내가 잘못 됐나? 너무 산 티를 많이 내서 그런가? 죽음이 살아있어요, 죽음이. 그래서 우리가 늙어 죽는 것은 그 때 죽는 게 아니고, 이미 태어나면서 죽음이 ‘나’라는 육신을 이용해서 죽음이 등장한 거예요. 그래서 선악과 따 먹을 때, ‘정녕 죽으리라’ 했지요. 중요하니까 크게 쓸게요. <정녕 죽으리라가 살아있어요> ‘정녕 죽으리라’ 라는 말씀이 살아있어요.
이게 이사야에 보면 나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사40:8)” 이 전도서는 살아 있으리라, 성경책은 살아 있으리라, 성경책을 다 이루는 예수님은 살아 있으리라. 그래서 이걸 신약적으로 보면 뭐냐 하면, 예수님만 살아 있어요. 예수님만. 예수님만 살아 있고, 다른 말로, ‘살아 있다’ 곧 같은 말로 “예수 안에만 살아있다” <예수 안에만 살아 있고, 예수 밖에는 다 죽었다> 예수 밖에는 다 죽었어요. 예수 안을 함축하면 천국이고, 예수 밖은 두 자로 하면 뭡니까? 지옥이죠.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 있잖아요. 거지 나사로가 가난한 거지는 낙원에 가고 천국에 가고, 부자는 지옥에 갔다고 이야기 하는데 그 내용이 취지가 뭐냐 하면요. 거지나사로 비유, 누가복음 16장, 나사로 비유의 핵심은 이거예요. 이 세상과 지옥이 동일하다는 거예요. ‘살다가 죽음의 세계로’가 아니고 ‘죽음의 세계가 이 세상에 밀려왔다’ 밀려온 거예요. 세상은 지옥과 통하고, 천국과는 불연속성이고.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불연속적 존재로 오심으로 밝혀진 사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인간과 인간끼리는 서로 친해요. 잘 통합니다. 아무 문제없어요. 그런데 유일하게 말이 안 통하는 분이 오셨는데,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에요. 부처, 공자는 인간하고 잘 통해요. ‘네가 신이다. 네가 누구 믿지 말고 네가 알아서 애쓰면 이 땅에서 고통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 납득이 돼요. 그러니까 절에 가는 사람들 특징이 뭐냐 하면, 무식해도 상관없다는 거예요.
왜? 인간은 무식하지 않아요. 마귀의 지혜가 들어 있으니까 무식하지 않아요, 마귀가 원하는 것을 부처가 이야기해주니까 서로서로 같은 편인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 말씀은 육으로는 안 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성령이 와야 아는 이유가 이게 인간 세상하고 ‘층’이 다르다. 아, 오늘 제목은 ‘층’입니다. 두 동그라미의 층이 달라요. 이게 사다리가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이거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아가요,
세상에 나가면. 교회든, 절이든 관계없이 그러려니 하고 살아가요. 이 세상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날씨가 좀 더울 뿐이지, 아무 문제없고, 기름값 좀 오르지만 인간이니까 또 해결하겠죠? 인간의 지혜로 앞으로 잘 해결해 나가겠죠. 코로나? 좀 있지만, 문제없죠. 온난화? 아무 문제가 없는 거예요. 너도 나도 서로가 문제가 없으니까 예수 안 믿어도 문제가 없어요. 왜? 사는데 지장이 없는데... <사는데 별 지장은 없다> 그러니 <이 세상은 그만큼 위험한 지옥 그 자체>입니다.
지옥이 뭐냐 물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벌써 지옥에 살고 있습니다. 아, 이걸 알게 된 것은요, 주의 천국의 영이 왔기 때문에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세상에 이 땅에서 어떤 실패를 해도 감사해야 돼요. 나를 알고 세상을 알고 주님을 알았으니까 더 뭐가 필요합니까? 아무 필요 없어요. 내 자신을 아니까.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서 “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절에, 사람들이 고린도후서 15절에서 여기서 사람들이 이제 거부감이 극도에 이릅니다. 뭐냐 하면,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이 대목, 결정적인 대목이에요. 적어야 되겠어요.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그 다음은 뭐냐 하면, “어어어어..잘못 들었다. 나 안 들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가 인간이 이 선을 못 넘습니다. 넘을 수가 없어요. 이건 인간의 힘으로는 못 넘어요.
왜냐하면, 이 말은 뭐냐 하면, 평소에 누구를 위해 살아왔다? 나를 위해서만 살아왔어요. 나에게 의미 있고, 나만 가치 있고, 이게 마지노선, 어려운 말로 티핑포인트(Tipping point)라고 하는데, 이게 뭐냐 하면, 한 번 가면 되돌아오지 못하는 마지막 그 선을 티핑포인트라고 해요. 다시는 못 넘어와요. 그래서 ‘신앙생활 40년 했습니다. 목사입니다. 장로입니다. 신학 했습니다.’ 티핑포인트 못 넘어요.
내가 신학박사 된 것은 다 따지고 보면 남들한테는 ‘주를 위해서’라고 하잖아요. 사실은 자기를 위해서예요. 티핑포인트예요. 이 선을 넘어 버려야 돼요. 그래서 주일 설교할 때, 자기한테 망하는 선을 넘어야 된다고, 그걸 넘어 버려야 돼요. 그거 넘으면 40년, 50년 교회 다녀도 소용없어요. 그건 그냥 헛수고 한 거예요. 티핑포인트를 넘을 수가 없기 때문에. 넘어가게 되면 뭐가 기다리는가? ‘나를 위해서’가 안돼요. 그게 뒤에 나와요. 15절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이걸 딱 보게 되면, 물어볼 거예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이렇게 됩니까?” 그 점은 요한복음 8장 44절 보면서, 주일날 했던 건데요. 44절“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어떻게 해서 나를 위해 살지 않습니까? 라고 물으면 답변은 그거에요. ‘네 안에 생명이 있으면 돼요’ 생명이 있으면 되는 거예요.
내 안에 생명이. 생명 있으면 된다. 생명이 뭐냐? 바로 수풀에 있던, 주일날 설교한, 수풀에 있던 ‘어린 양’입니다. 어린 양이 내 안에 꽈~악 쥐고 있는 거예요. 어린 양이 쥐고 있으면, 아까 그 층을 이룬, 아,,오늘 ‘층’이라는 말이 굉장히 너무 좋네요. 동그라미 두 개, 팬케이크 두 개, 여기 구멍이 뚫려 있잖아요. 여기 구멍이 뚫려서 십자가에서 부활, 예수님이 천국으로 통한다 했잖아요.
이 코스가, 이걸 관계라고 하는데, 이 관계가 어린 양이 대신 희생함으로서 성립된 코스에요. 둘레길 정도가 아니라 유일한 코스에요. 어린 양의 코스에요. 어린양의 코스에 성령이 여기서부터 왔다갔다 하면서 일하세요. 성령이 일하는 이유는 자, 다시 합니다. <성령께서 일하시는 목적은 말씀 완성> 말씀이 다 이루었다. 말씀이 다 이루었다. 말씀을 위해서 하는 거고, 누가 이뤘느냐?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을 확성기로 “아,아, 여기는 이장,이장, 아아” 왔다갔다 하면서 계속해서 속에서 마이크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다 이루었습니다. 아, 아, 예수님이 다 이루었습니다.” 우리 내부에서...“나 몸이 아파서 고민이에요.” “아, 아, 예수님이 다 이루었습니다.” 몸이 아픈 것은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몸이 아파야 되는 거예요. 왜? 그래야 허무하니까.
허무해지니까, 그래야 나를 위해서, 허무한 나를 위해서 살 이유가 끊어지니까. 나 잘되는, 내 가치와 의미가 끊어지기 위해서 주께서는 수시로 성령께서 “주께서 다 이루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우리가 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막 사는 것도 주께서 그렇게 조장했습니다.” 이런 거. 왔다갔다 하면서 이걸 통보해주는 거예요, 성령께서.
자, 그 다음의 문제. 그럼, 기도는 어떻게 하느냐? 전도는 어떻게 하느냐? 헌금은 어떻게 하느냐? 예배 참석은 어떻게 하느냐? 줄줄이 주욱 나오죠. 그게 율법으로 되면 안 되겠죠. 그러면 <기도는 어떻게 하느냐?>의 정답은 ‘주님이 기도하신다.’ 이게 정답이죠. 주께서 쉬지 않고 일 하시니까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지금 함께 계시니까. 그럼 모이게 하신 거예요. 성경 보게 하신 거예요. 마침 지금 공부하는데 전화가 여러 번 안와서 천만다행이죠. 마침 지진이 안 일어났잖아요.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주께서 하게 하시는 거예요. 예배, 전도, 선교, 모든 것이 주께서 하게 하신 거예요. 그러면 나는 뭐냐? 나는 고급 용어를 쓰겠습니다. <시다바리> 시다바리의 좋은 점이... 이야, 이거 크게 써야 되는데, <무책임> 해요. 무엇에 대해서? 내 인생에 대해서. 내 인생에 대해서 무책임해야 되는 게 주님의 시다바리이기 때문에 그래요. 요거 꼭 반대되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 내 인생에 태클을 걸지 마> ‘내 인생에 태클을 걸지 마아~’ 이게 꼭 복음하고 반대되는 거예요.
걸면 걸리는 거지 뭐, 내가 주님의 시다바린데, 시다바리에게 무슨 내 인생이 있습니까? 문방구에 점원이 있습니다. 시키는 대로 팔면 돼요. “아이, 왜 이렇게 가게에 손님이 안 올까?” 그건 주인 아들이 할 일이고, 너는 종이죠. 종은 걱정하는 게 아니죠. 내 인생은 이미 좀비에요. 죽은 인생이에요.
죽었는데 매일 말씀의 종으로 매일같이 하루하루 살게 만드시는 겁니다. 그만한 재주와 능력은 우리 주님한테 있습니다. 쓰잘데기 없는 걱정을 마귀가 와서 계속 하게 만드는 거예요. 쓰잘데기 없는 걱정을...<무책임> 이거 액자로 하나 만드세요. 나의 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 내가 책임지지 않는다.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내가 책임지지 않는다.>
이제 나머지 시간은 실질적인 시간입니다. 뭐냐 하면, 우리 육신이 이 버림받은 육신이, 죽은 육신이 어디 살고 있습니까? 이 죽은 자들의 세계, 이 세계에 살고 있죠. 이 세상에 살고 있죠. 이 세상을 동그라미 칠게요. 동그라미. 그러면 내가 책임지지 않으면 여기서 주어지는 건 뭐냐? 예수님이 가신 경로와 코스를 그대로 밟아요. 그게 뭐냐, ‘핍박’입니다.
<핍박>, 또라이. ‘너 미쳤다’ 미친 거예요. 이 미쳤다는 말은 뭐냐, 이걸 두 자로 ‘고난’이라고 하는데, 고생은 내가 잘 되기 위해서 하는 게 고생이고요, 고난은 다 이루었음을 드러내기 위한 주님의 인생에 참여, 이게 고난이예요. 사람은 고생만 하지, 성령이 아니면 고난을 못해요. 고난은 즐거워해야 돼요. “고난 가운데 즐거워하라” 로마서 5장에 나옵니다. 고난 가운데 즐거워하라는 말은 ‘내가 뭔데 감히 주의 고난에 참여가 돼요?’ 그게 뭐냐 하면, 핍박이예요.
핍박에는 가난하다, 가난하게 된다 이런 게 핍박이 아니고, 그건 고생이고요. 고난은 뭐냐 하면요, 애매하게 욕 얻어먹는 거예요. 애매하게. 내 인생에 책임 안 진다 하니까, 어떤 가장이 ‘내 인생에 책임 안 진다’ 하니까 가족들이 자식들이 아버지 존경하겠어요? “아버지는 제 종교가 최고인가?” 그러지 않겠어요? 그게 바로 핍박이에요. 이건 종교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진실에 관한 문젠데, 진실에 관한 문제거든요. 있는 팩트에요, 팩트.
우리는 지금 ‘사실 속에서 산다.’에요. ‘사실 속에서 그냥 산다’ 잖아요. 사는데, 환상을 꿈꾸는 자 누굽니까? 자기가 살았다고 여기는, 살았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뭐 하냐 하면, 공격하죠. 그러니 신약 성경에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면, 거의 반 이상이 이 이야기에요. “참아라, 핍박 가운데 기뻐하라. 네 생명의 면류관이 하늘에 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마귀에 속해가지고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영에 속한 사람들을 그렇게 핍박한단다.”
이게 사도바울의 반은 예수님 복음에 관한 이야기고, 반은 복음을 믿는 성도에게 얼마나 많은 예수님과 같은 동일한 수난이 오는지, 그 이야기예요. 그게 신약성경 전체 이야기예요. 오늘 구약, 신약 다 해버렸어요. 전도서를 통해서. 구약에서는 ‘허무하니까 그냥 허무해! 허무를 그냥 받아들여. 뭐 구부리고 펴고, 뭐 좋은 인생? 하지마! 주께서 허무케 하셨어, 주께서. 왜요? 추궁하거든. “왜 따 먹었어?” “ 저 안 따 먹었는데요.” “ 네 조상이 따 먹었잖아.” 조상이 따 먹은 그것을 사건화 시켜요.
<선악과 탈취사건> 탈취사건을 뭐로 만드느냐 하면, 주께서는 역사로 만들어버려요. 인류 역사. 인류 역사 안에는 뭐가 흐르느냐?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 있어요. 약속을 운반하는 배달이 역사예요. 이것이 탈취사건이 결국 마지막에는 뭐냐 하면, 십자가 사건의 비극으로 하나님께서는 받아낼 빚을 다 받아낸 거죠. “내가 죽는다 했지?”
이 죽음은 그냥 목숨 끊어진 게 아니고, 영원한 저주예요. <영원한 저주> 그러면 이 역사는 뭐냐? 역사는 지옥이죠. 지옥이 지옥다워야 될 흐름, 그 역사. 따먹지 말라는 탈취 사건, 여기서 주께서는 추궁을 하는 겁니다. 사건, 탈취 사건을 실제화하기 위해서, 역사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십자가 사건으로 역사의 기준이 마감돼요. 역사의 기준. <남은 문명의 유일한 기준이 뭐냐?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뭘 자랑하겠어요? 자기 인생 역사 자랑하겠습니까, 십자가만 자랑하겠습니까? 십자가만 자랑하죠. 이들은 개인이 아니에요. 안에 들어 있어요. 예수 안에 들어있는 사람입니다. 근데 이 역사 속에 있는 사람은 예수 바깥에 있어요. 그러니까 지옥 생활 하고 끝나는 게 아니고 지옥 가서 본격적인 지옥 생활의 예비적 생활이 이 세상 삶이에요. 예비적 삶이. <세상 일은 예비적 지옥생활이다> 세상은 예비적 지옥 삶이에요. 지금 이것이 신구약에서 밝혀주는 팩트, 사실입니다.
끝으로 한마디 더 보탠다면, 이번 에베소서 수련회는 역사 이야기를 짧게 할 거예요. 그런데 이 역사라 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 세계 안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의식세계 말고 무의식 세계가 있거든요. 의식세계를 누가 공격하는가? 무의식 세계가 공격해요. 그럼, 무의식 세계는 누가 공격하는가? 복음이 공격해요.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무의식 세계의 종교적인 것, 종교는 아닌데, 종교적 철학이겠죠? 무의식 철학이 눈에 보이는 한계를 이야기해요. 정답은 없어요. 정답은 몰라요. 한계만 이야기해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과학자들은 인간의 눈물의 성분이 소금기 있고, 유기물질이 들어있다고 분석해내잖아요. 이게 눈물이라는 거예요. 인간은 세포, 원자로 되어 있고. 분자로 되어 있다, 이게 인간이잖아요. 그러면 무의식 쪽에서 물어요. ’그런데 왜 울지? 그건 아는데, 왜 울지?‘ 그러니까 네가 아는 것은 의식 세계에서만, 눈에 보이는 것만 분석하고, 측정하고, 과학적으로 했지, 그런 너에 대해서, 그렇게 하면서 너에 대해서는 하나도 아는 게 없어요. 그 아는 게 없다는 걸 공격하는 게 무의식 세계에요.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를 합한 것을 공격하는 게 뭐냐 하면, ’네가 예수를 알아? 십자가를 알아?‘ 이게 복음의 세계입니다. 끝.
질의응답
Q 수련회 때도 타자를 말씀하셨고, 그러면 이제 자아라는 게 나라는 게 있으면서 타자의 형태가 되잖아요, 그러면 나라는 건 생성이 언제 되는 건가요? 인간이 태어나면서...
A 타인이 나보다 기성 인간이 먼저 있을 때, 나가 생깁니다.
Q 그 나는 몸으로 지니면서 계속 가잖아요.
A 그건 육신이죠. 육신밖에 없는데 부모가 있잖아요. 부모가 내 이름을 불러주잖아요. 내 이름을. 내 이름을 불러주면서, 내 이름은 내가 짓지 않았죠. 이름만 불러주는 게 아니고, ‘너’라고 할 때, 그 ‘너’를 우리가 받아서 ‘나’가 되는 거예요.
Q 육신이 되어서 살다가 죽어버리잖아요.
A 예. 육이 흙이니까
Q 그럼 이 자아라는 것도 같이 죽어서 없어지나요? 아니면..
A 좋은 질문인데요. 그게 뭐냐, 이 세상이 아담 안에서는 그렇게 돼요. 아담 안에서 타자아닙니까? 아담이 타자거든요, 우리에게. 그러면 우리가 예수 안에 들어가면 아담의 자리에 두 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 예수님이 타자가 되어서 내 이름을 불러줘 버려요. 그러면 거기서 자아가 있죠. 예수님이 너라고 불러주는 자아로 교체가 되죠. 자아가 내가 만든 게 아니듯이, 예수 안의 자아도 내가 만든 게 아니라 ‘너는 내 백성’이라는 말씀에 입각한 새로운 자아, '이는 이스라엘이라', ‘참 내 제자다’라고, ‘너는 내 양이다’ 불러주는 주님에 의해서 우리는 새로운 자아의 내용이 채워집니다.
Q 그 자아는 지금 사는 자아가 아니죠?
A 지금 나가 아니죠. 그러니까 아까 그랬죠. 두 개의 나, 소속된 속에 두 개가 있죠.
Q 그럼 세상에서 지금 얘기하는 지옥, 천당의 형태에서 우리가 가는, 예를 들어 지옥이라고 한다면, 현재의 사는 자아가 지옥으로...
A 그건 지옥으로 그대로 가는 거죠. 그러니까 부자가 그렇게 잔소리가 많은 거예요.
Q 이 자아의 형태가 몸이 돼서...
A 그 몸이 그대로 가는 거죠. 그대로 가는 거예요. 육신은 흙이 되었지만, 주께서는 아담 안에서 인간의 육신이라는 것은 꿈같은 이 세상에,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게 육신이거든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나는 불로써 다 타버리죠. 천국에 흡족한 자아가 육신이 있는 것처럼, 지옥에는 저주받은 육신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저주받은 육신이...그러니 얼마나 무서운 거예요? 심지어 구더기도 죽지 않고 탄다는...
Q 그럼 이 육신이 지옥 가서 그 자아의 형태가
A 저주받은 형태가 되죠.
창조의 주도권이 주님에게만 있습니다. 말씀이 청사진이고, 말씀의 설계도에 따라서 그대로 다 만들어내요. 그대로.., 천국, 지옥을 모델로 해서 가모델로 이 세상 인간들이 있는 거예요. 인간들이 필요한 거예요.
Q ‘나는 죽고’의 죽음의 형태에서 예수 안으로 들어가면...
A 그러면 하늘에 속한 형상을 새로 입죠.
Q 그 자아는 현재의 육신에, 현재 갖고 있는 그 자아가 아닌...
A 예, 아니고 주님에 의해서 너라고 불러주는 새로운 자아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는 골로새서 1장 말씀이 맞아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전부가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그 단촐한, 단순한 문장 하나에 전세계의 해답이 다 들어있는 겁니다. 그냥 다 잊어버리고, 그냥 막 사세요.
댓글
이근호
불분명한 음성의 연속임에도 불구하고 단단히 수고하셨습니다. 녹취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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