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근

강릉 심방 설교

아빠와 함께 2024. 8. 18. 10:53

우인숙

막바지더위가 맹위를 떨치는 입술에 붙은 밥풀떼기도 덥다는 때에 황송하게도 목사커플 트리오가 이 천한 늙은 과부집사의 처소를 심방해 주셔서 너무 고마웠습니다~~

매니저(사모님)도 모르게 혼자서 설교를 생각하셨는지 성경책포함 많은 묵은짐들들을 다버리고 와서 성경책도 여유가 없는데 하여간 급하게 심방설교를 영민하게 제대로 내조하시는 사모님께 감탄했고 고마움을 느꼈습니다~~뿌듯한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꾸벅

 

강릉 심방 설교 사무엘상 25장 3절 20240815-이근호 목사

우집사님 심방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 성경 말씀 사무엘상 25장 2-3절 보겠습니다.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이요 염소가 일천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 양털을 깎고 있었으니,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 그는 갈멜 족속이었더라.”

2절, 3절만 보겠습니다. 보면서 이 사무엘상 25장 전체가 어떤 내용인가를 모아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둘이 부부죠. 나발이라는 사람은 남자고, 아비가일이라는 사람은 그 남자의 아내입니다. 그 남자의 아내인데, 이 부부가 이렇게 살 때, 둘이 그냥 마음 맞춰서 잘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이 되죠. 그런데 이 가정에 문제가 일어났는데, 끝에 보면 나발이 죽습니다.

죽는데, 이게 무슨 사고로 인해서 죽는 게 아니고, 38절에 보면,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고 되어 있어요. 남편과 아내, 합쳐서 가정이라고 하죠. 가정에 하나님이 개입했더니만, 남편이 열흘 후에 하나님이 남편을 쳐서 죽였습니다. 가정에 하나님이 개입하면 행복해야 하는 것이 보통 우리가 원하는 바인데,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개입해서 나발이라는 남편이 죽어버렸다.

그러면 가정은 깨어졌죠.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이 왜 나발을 죽이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나발이 하나님에 의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25장 10절에 나와 있어요.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이 나발이라는 남자가 10일 후에 죽기 전에, 자기가 10일 후에 죽는다는 사실도 모르면서 무엇에 대해서 평가했느냐 하면은, “다윗? 그 사람이 누군대? 다윗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있는대? 내가 다윗이라는 사람에게 왜 잘 해줘야 되지? 그가 뭔대?” 라고 다윗에 대해서 무시하는 발언을 했고, 다윗과 본인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여기 25장 2절 다시 보면,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부자라서) 양이 삼천이요 염소가 일천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 양털을 깎고 있었으니” 부자인데 양털 깎고 있었어요. 강의 시간이라면 제가 묻고 싶어요. 나발의 문제점은 뭐냐? 나발의 문제점은 사람들이 보기에 없습니다. 왜? 부자죠. 양이 삼천이고, 염소가 일천이잖아요.

사는 데 지장 없습니다. 그러면 됐지요. 그러면 됐잖아요. 돈 있겠다, 용모가 아름다운 이쁜 아내 있겠다, 부부가 살면서 돈 버는데, 집사님 여기에 뭐 문제 있습니까? 아무 문제 없죠! 그런데 10일 뒤에 하나님이 아무 문제 없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유가 나오는데, 이유가 뭐냐 하면, 다윗에 대해서 네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10일 후에 그의 목숨을 끊어야 될 근거가 되고 말았어요.

다윗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렇다면 여기서 다윗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자리에다가 오늘날엔 바꾸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똑같은 문제거든요. 왜 다윗을 예수님으로 바꾸고, 예수님 오시기 전에 다윗으로 바꾸어서 하나님이 다윗 몰랐다고 나발이라는 사람을 칠 수 있는 근거가 뭐냐? 다윗과 예수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을 맺은 사람이에요. 하나님과 약속을 맺은 사람이에요. 하나님과 약속을 맺은 사람인데, 약속 맺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냐 할 때, 그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서 죽임을 당해도 싸다, 죽임을 당해도 마땅하다는 이야기를 이 사무엘상 25장에서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돈 있고, 가정 있고 그러면 됐지 뭐, 욕심내지 않고 그리 살면 되잖아.”그럴 때 하나님이 뭐라 하시냐 하면, “네가 언약에 대해서 알아?” 그러면 나발은 뭐라 하겠어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와서 “나발 아저씨~” “왜?” “부자죠?” “ 그래, 부자” “아내가 이쁘다면서요?” “이쁘지~” “그런데, 언약에 대해서 아십니까?” 나발은 여기서 화를 낼 수밖에 없어요. “내가 왜 그걸 알아야 되냐, 그걸? 왜 알아야 되지?”

우리 집사님, 여기 귀한 아들 있죠. 방까지 얻어준, 그것도 엄마한테 말도 안 하고 알아서 방 얻어준 아들 있죠. 아들 있고, 돈 벌죠. 혼자 이렇게 살 수 있도록 다 마련했죠. 그리고 혼자 사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그리고 이 강릉 바람이 얼마나 시원해요? 멀리 있다가 아들이랑 가까이 있으니까 병 들 때 아플 때 아쉬울 때 전화하면 올 거고, 즈그는 즈그끼리 살면서 여기서 보호 받고, 내가 여기서 뭘 더 알아야돼? 뭘 알아야돼? 뭘 아셔야 돼요?

예수님께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언약을 빠뜨리면 그건 살아도 산 게 아닙니다. 살아도 산 게 아니에요. 그러면 여기에서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그래, 아무리 잘 살고 여유 있고 인생 말기가 여유롭고 평화로워도 내가 언약을 빠뜨리면 이건 안 되지.”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겠죠. “아무리 세상이 좋다 해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 그걸 빠뜨리면 그건 사는 게 아니야. 그건 나중에 지옥 가는 거야.” 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그게 신앙입니까?

“내가 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가지고 말년을 편하게 보내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예수님의 말씀과 언약을 믿음을 갖고 살아야지. 나중에 죽어서도 천국 간다.“ 이거 갖추면 신앙입니까? 제가 묻는 겁니다. 이게 신앙입니까? 그건 신앙이 아니에요. 신앙이 아니면 뭐냐? 엄살입니다.

엄살과 신앙의 차이점이 뭐냐? 엄살은 내 것 다 가지고, 여기서 빠뜨리면 안 되는 게 뭐냐? 예수님의 십자가, 내 죄를 용서한 것, 이것을 추가해서 내 것은 내 것대로 손상을 입지 않고, 거기서 같이 매치시켜서 엮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게 바로 엄살 부리는 것, 또는 요령 부리는 것, 신앙도 아니면서 내가 생각하기에 신앙인 것처럼 구색 맞추는 거예요, 구색 맞추는 것.

자식 잘 키웠겠다, 편안하게 보내겠다, 돈도 좀 있겠다, 얼마 있는 지 모르지만, 돈도 좀 있겠다, 거기다가 예수님 십자가까지 알겠다, 뭐 다 갖췄네? 이건 바로 자기를 위한, 자기를 위한 위선이죠, 일종의 흉내 내는 것.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그걸 모방한다는 거죠. 본인이 그걸 계산하는 거죠. 요것도 있어야 되고, 요것도 있어야 되고 계산하는 겁니다.

그게 왜 엄살이냐? 결국은 내 것, 나다움을 견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사전에 내 것 다칠까봐, 사전에 어떤 위험 요소를 미신적으로 제거하고, 그리고 방비하는 책략에 지나지 않습니다, 책략에. 그러면 뭐가 신앙이냐? 내가 예수님의 복음에 방해되는 사고방식을 유지하려는 생각이 없을까?

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 지실 때 주께서 요구하는 것은 엄살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뭐냐 하면, 네 목숨을 버릴 생각을 갖고 있느냐를 요구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아비가일이라는 여자, 아내가 있잖아요. 아내는 다윗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리고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서 일한다는 것을 아비가일이 알았어요.

알았을 때 아비가일의 신앙은 뭐냐? 다윗에게 봉사할 수 있다면 내가 이딴 것, 내 가정, 이딴 것, 부자인 남편, 이딴 것을 버릴 수도 얼마든지 언제라도 버릴 마음 자세가 되어 있는 것이 아비가일이었습니다. 내 것 가지고 다윗에게 도움 얻어서 내가 구원받고, 이렇게 반은 내 거고 반은 하나님 것으로 짝을 맞추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왔을 때, ‘까짓 거 내 것, 남편, 가정, 부자된 것, 까짓 거 버리지.’ 라는 그런 자세를 사무엘상 25장에서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 이거는 안일함이 아니에요. 요령 부리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 남들 앞에 그럴싸하게 내세울 것 있고, 요건 다치기 싫은 거예요. 다치기 싫고, 거기다가 그걸 버리는 게 아니고, 거기다가 복음까지 얹어서 온전함을 이루는 거죠. 완벽함을 이루는 거예요. 그러면 이거는 하나님이 와도 안 다치고, 왜? 사전에 조치를 해놨기 때문에. 내 영혼 구원의 조치를 해놨기 때문에. 내 재산, 내 아름다운 행복한 미래도 안 다치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그러한 것, 저는 이걸 엄살이라고 바라보고 싶어요, 엄살 부리는 것.

쉽게 말해서 뭐냐? 편하게 살려는 것, 마지막을 그냥 편하게 살려는 것, 그래서 대외적으로 ‘나 이렇게 평화롭게 아무 걱정 없이 산다.’ 이거 거짓말입니다. 인간은 다 그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 이 땅에서 살면서 걱정 없는 인간을 그런 인간을 만든 적이 없어요. 아무 걱정이 없고, 염려가 없는 인간을 만든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결론은 뭐냐? 떠나야돼요, 떠나야돼. 강릉 떠나서 무안으로 가는 게 아니고, 무안 떠나서 강릉 오는 게 아니고, 이 땅을 떠나야돼요. 사도바울처럼. 이 땅을 언제 빨리 떠날 수 있느냐? 이걸 학수고대하셔야 됩니다. ”자식아 미안하지만, 이 땅 지옥 같은 곳에서 고생 좀 해라. 나는 먼저 태어난 이유로 빨리 떠나야 되겠다.“ 어디로? 주님 계신 곳으로 떠나야 되겠다. 이게 바로 아비가일이 보여줬던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비가일이 평소에 남편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25절에 ”원하옵나니 내 주여“ 그 당시 다윗을 예수님으로 보면 돼요. 다윗 앞에 엎드려 하는 말이 ”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불량한 자 또는 미련한 자입니다. 자, 여기서 이 말씀만 하고 심방 설교 마치겠습니다.

남편이 돈 많아요, 부자예요. 뭘 보고 그게 불량자입니까? 돈 많고, 아내를 그렇게 학대하지 않을 사람이고, 그래서 남들이 다 나발을 부러워해요. 돈이 많으니까. 돈이 많으니까 좀 시건방진 거는 있어요. ”다윗? 그게 뭔대? 지나 개나 하나님 믿는다고 하는데, 나도 하나님 믿는다.“ 이런 식으로 비아냥거렸을 거예요. 왜? 지난 주일 오후인가? 뒷배가 있잖아, 뒷배가.

하나님 믿으면서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에요. 자기 뒷배가 있다고요. 내가 진짜 의지하는 것은 행복한 나의 삶을 믿어요. 주님을 믿는 게 아니고. 그게 아까 얘기한 엄살이었거든요. 그런데 아비가일은 말하기를 그러한 자기 남편을 불량한 자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무시하는 인간은 그건 인간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아비가일은 뭐냐? 나는 지금 인간 같지도 않은 남편의 아내로 사는데 나는 이 족쇄, 이 관계를 나는 청산하고 싶다. 나는 벗어나고 싶다. 어떤 안목에서? 만약에 다윗이 우리 집에 온다면, 내가 보는 남편이 저건 인간도 아니라는 것처럼 그 다윗도 분명히 그렇게 볼 것이다. 왜? 다윗은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러면 주님이 이 가정에 왔을 때 나를 어떻게 보겠느냐 하는 것을 본인이 알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집사님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집사님은 집사님하고 떠나면 돼요. 간단해요. 굉장히 말은 쉬워요. 내가 늘 구상하고 있는 나다움이 있잖아요. 내 것, 나다움, 내 아름다운 여생, 그리고 남아있는 평온한 여생, 그걸 떠나야됩니다. 떠난다 해서 뭐 엉망으로 산다는 게 아니고, 돈 얼마 되지도 않는 거 남 주고 그러는 게 아니라, 어쨌든 떠나야돼요, 나를. 떠나는 것이 신앙이에요.

떠나서 어떻게 하든 주와 함께 영원한, 새로운 혼인 생활을 시작하는 거예요. 신부로서, 예수님의 신부로서. 그게 어디 나오냐 하면, 사무엘상 25장 42절에 나옵니다. 다 같이 읽어 볼까요? ”급히 일어나서 나귀를 타고 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다윗의 사자들을 따라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 예수님의 신부가 되니라.

이 좋은 데 사는 것, 천국하고는 족히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이 땅에서 고생 없고, 염려 없거, 행복한 것 제가 잘 알지요. 집사님 얼굴에 나타나니까요. 그러나 천국과는 족히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내가 혹시 신앙 생활하는 게 엄살이거나, 하나의 내 것 지키기 하는 미신이 아닌가를 늘 한 번 생각해 봐야 돼요.

주께서 혹시라도 그런 일은 없는데, 혹시라도 약간의 걱정거리, 예를 들어서 물건을 하나 만들었는데 약간의 흠이 있어서 ‘에이, 내가 왜 이렇게 만들었어?’ 이런 걱정거리, 이거 얼마나 큰 걱정거리입니까? 예? 그런 사소한 거라도 내가 이 세상에서 떠나야 될 사람이라는 것을 순간순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다 좋아요, 좋은데 아니에요. 다 행복한 건 좋은데, 여기가 우리의 고향이 아니잖아요. 우리의 고향은 우리 하나님께서 영원한 처소를 마련해 주셨사오니, 다시 무안으로 가라는 게 아니고, 어떻게 살든지 인생은 죽는 게 끝이 아니니까, 주와 함께 영원히 신부로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건 저한테도 해당되고 다 마찬가지에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갈수록 교묘해지고 갈수록 요령꾼 되는 저희들, 간악한 교만한 마음, 그러나 아비가일은 결국 다윗의 아내가 된 것처럼, 저희들 주께서 친히 주님의 신부가 되기 위해서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훈련시키고 교육시키고 친히 성령으로 이끄시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항상 주께서 천국에 보금자리가 있음을, 처소가 있음을 알려주는 그 기쁨이 세상의 어떤 기쁨보다 월등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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