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보충(240214) 스가랴 (11:11-14) 가격 매기는 세상
어제 수요설교에서 핵심 되는 어려운 점은 스가랴의 예언과 예수님의 예언이 어떻게 연결되느냐 하는 거예요. 스가랴의 예언의 주인공은 스가랴 선지자가 주인공인데, 그 예언이 가롯유다가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가롯유다가 왜 주인공이냐? 가롯유다가 그가 있는 위치가 예수님의 제자예요.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에게 있었던 결과적으로 있는 일을 공유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과 제자들에게 일어난 일이 똑같은 혜택을 입게 되어 있어요. 그 혜택 속에 누가 들어 있다? 사탄이 들어왔다는 사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가롯유다를 회전문으로 사용합니다.
문 열고 들어왔는데, 바깥으로 돌려버리죠. 사탄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들어왔는데, 들어올 때 사탄과 나갈 때는 사탄의 마지막 모습, 마지막 결과를 가롯유다에게 덧입혀서 “네 나라로 돌아가!”하고 보내버리죠. 그게 바로 스가랴 예언에 담겨있던 내용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예언의 그 출처는 뭐냐? 바로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이에요.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에게 힌놈의 골짜기라는 게, ‘놈놈’하는 나쁜 뜻이 아니고, 지역이름입니다. 힌놈의 골짜기는 예루살렘에서 가면 기드온 골짜기 옆에 힌놈의 골짜기가 있어요. 다 가볼 수 있어요. 그 힌놈의 골짜기에는 바알을 극진하게 섬기는 그런 종교 중심터예요. 종교의 다운타운, 종교의 신촌, 모든 종교가 집결되어 있는 곳, 종교의 이태원입니다.
모든 종교 행위의 이태원입니다. 사람들이 우쌰우쌰해야 기도발도 힘이 나요. 혼자 기도하면 오래 안가요. 같이 열심히 기도해야 “아직도 안 일어나네, 저거. 너한테 질까보냐?”하면서 또 기도하고, 기도인지 뭔지 모르지만, 같이 합하니까.. 그걸 국가의 왕이 본다면 그들의 종교적 열정을 국가의 정책주관자 입장에서는 무시할 수가 없어요.
국가의 왕이 나라를 통치한다고 하잖아요. 실은 백성이 왕의 통치 방법에 이미 영향을 줘요. 왕이 제 맘대로 못합니다. 백성의 눈치를 봐야 돼요. 백성들이 지금 우상 좋다고 하는데 왕이 여호와를 옹호해? 그 왕 언제 쿠데타 당해서 제거됩니다. 세상은 서로 인정하고 인정받는 세상이기 때문에 제 맘대로 못해요.
어떤 가정에 시집와서 “나 아가씨 때부터 교회 다녔으니까 교회 갑니다.” 하면, 보살집에서 벌써 시어머니 시아버지는 ‘찌릿’ 하고 레이저 쏘듯 시선이 나오잖아요. “어디서 저런 여자를 데려왔냐?”하면서 아들 막 구박하고, “다른 형제들은 유산 있지만 너한테는 땡전 한 푼도 없는 줄 알아라. 어디 예수쟁이를 재수 없게” 하는 식으로.
이미 어떤 우상이 대세가 되어버린 데서는 모든 다른 사람이 뭔가 중심이 돼야 힘이 모아지고 하거든요. 중심에서 조금만 빗나가면 눈총을 주고 난리도 아니에요. 집안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고. 그렇게 온 나라가 그냥 바알 종교의 나라가 된 겁니다.
힌놈의 골짜기가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드는 장소인데, 토기장이와 관련된 이사야의 예언에 보게 되면, 토기가 보통 제작만 하는 게 아니에요. 부순다고 되어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토기장이가 토기를 부수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내가 박살내리라, 이방나라를 통해서’ 할 때 토기장이의 밭이 다시 부각이 되고 그 예언을 예레미야가 받고 예레미야가 스가랴한테 예언을 전한 거예요. 은 30냥은 스가랴에 나와요. 예레미야 예언에 안 나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건 오류다. 스가랴 선지자라고 해야 되는데 왜 예레미야 선지자라고 나왔느냐, 마태복음에” 그건 몰라서 그래요. 언약이 계속해서 인수인계 받아서 그렇게 된 겁니다. 가롯유다가 은 30냥에 팔 때, 가격 책정을 누가 했느냐 하면, 소개 받은 바리새인들이 결정한 거예요. 그들이 값을 쳤어요. 30냥이라고.
이것은 예수님의 값이 30냥이 아니고 소개비 조로 30냥을 준 거예요. 왜냐하면 그들은 안그래도 예수님을 벌써부터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어요. 성전 공격하기 이전부터 죽이려고 했어요. 성경 요한복음에 보면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요11:53)’ 이렇게 나와요.
요한복음 7장부터인가 쭉 나와요.(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요7:1) 그래서 죽을 사람은 값을 안쳐줘요. 소개비 조로 받은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변절해서 소개했다는 자체를 그들은 상당히 낙관적인 사태로 생각한 거예요.
이참에 예수로 인한 소요 사태가 좀 잠잠해질 수 있으면 우리가 로마제국의 눈치를 덜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로마 제국은 유대민족을 자치 나라로 만들어가지고 세금문제나 치안문제는 자체적으로 해결하도록 했어요. 유대인들은 그걸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게, 유대전통을 율법 지키고 여호와의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허락을 받았으니까 그걸로 그들은 충분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들은 예수님 집단, 새롭게 등장한 집단이 조용히 와해되기를 바랬어요. 그런데 하나의 배신자가 있으니 일이 수월하게 됐죠. 그런데 가롯유다가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변심해가지고 ”저는 이 돈을 받지 않겠습니다.“ 하고, 재밌는 것은 성전에다 집어넣었어요. 집어넣었는데 바리새인들이 ‘이건 성전에 집어넣을 게 아니고, 이건 토기장이의 밭을 사라’ 하고 거기다가 던져버렸어요.
던졌는데 그 곳이 뭐냐? 피밭이라. 가롯유다가 목매어 죽은 자리, 나중에 그 묘지, 공동묘지예요. 그것도 연고지가 없는 나그네의 공동묘지로 된 겁니다. 그 장소가 음산한 장소가 되고 말았어요. 누구나 기피하는 저주의 장소, 그 장소의 첫 번째 인물이 누구냐? 바로 가롯유다가 되는 겁니다.
가롯유다가 예수님의 제자였거든요. 제자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세계에 포함이 된 사람이에요. 물로 발 씻어주실 때 같이 씻고, 가롯유다도 권능을 행하고, 귀신 쫓을 때 같이 쫓아냈어요. 예수님 안에 들어있는 사람이에요.
예수님 따라 안에 들어있는 사람인데, 은총 막대기가 잘라지고, 은총 막대기가 잘라지고 난 뒤에 연락의 막대기도 잘라진다는 것은 분리되고, 내부 분열이 일어나는 거예요. 내부 분열을 주께서 일으키기 위해서 사탄인 가롯유다를 제자로 삼고, 나중에 분리시키는 겁니다. 11과 1의 분리는 나중 문제고요, 예수님과 열두 제자의 분리를 가롯유다를 통해서 주께서 하게 하셔요.
베드로도 못가요. 열두 제자 몽땅 예수님과 분리되는 겁니다. 은총의 막대기가 다시 이루어지는 것은 제자들이 협조할 일이 아니고 예수님 단독 일이에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함으로서 비로소 은총도 완료된 은총, 연합도 완료된 연합이 될 때,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열 한 제자를 그 때 불러요.
그러니 가롯유다 떠나고 난 뒤에 나머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을 거라는 것은 인간적인 생각이고 그들은 그 자체가 이미 실패한 겁니다. 가롯유다를 통해서 그동안 제자들마저도, 제 아무리 예수님의 제자라도 사탄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상태인 것을 알려주는 거예요. 가롯유다를 통해서.
사탄의 제국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님과의 연합은 안됩니다. 될 수가 없어요. 분리되고 난 뒤에 내가 부를 때, 그 때 연합되어야 돼요. 그래서 가롯유다가 잠시 제자 되었다가, 할 때 그 30냥은 0이 되어버려요. 0, 제로가 되어버린다고요. 그러면 뭐냐? 인간들이 사탄의 세계에 있다는 증거가 뭐냐?
사람이든 누굴 만날 때 가격을 매긴다는 심보, 이건 게임 안에, 인간은 인생 자체가 게임이니까. 넌 얼마짜리, 난 얼마짜리. 나는 얼마짜리 되었으며 좋겠고, 너는 얼마짜리 되었으면 좋겠다는 가격으로 가치를 논하는 세계, 그 세계가 결국 무슨 세계냐? 저주받은 사탄의 세계인 것을 가롯유다를 통해서 증명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가격 따져서 구원 받는, 헌금 많이 내서 구원 받는 일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요한계시록 22장에 ‘값 없이 주는 생명수’ 값 없이 주는 생명수, 그 값을 누가 치렀어요? 예수님이 치른 거죠. 값 없이 치렀던 그 값에 나머지 열한 제자가 성령을 통해서 초대받아서 그저, 거저 천국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리고 바로 요 사실을, 요 사실을 그대로 복음에 하게 되면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가족부터 세상부터 전부다 갈라지는데, 제일 갈라져야 될 것이 뭐냐? 우리 자신과 이별해야 돼요. 우리는 이미 죽었고, 우리 생명은 하늘에 있다는. 두 개의 자아를 가지고 능선을 걷듯이, 이미 죽은 내가 하늘에 있는 이미 생명에 있는 내가 된 입장에서 죽은 몸으로서 효용이 뭐냐?
효용 가치가 뭐냐? 예수님이 가신 길, 제자들이 갔던 그 길, 우리로 하여금 답습케 해가지고 이 좁은 길을 통해서 영생에 이미, 이미 들어갔다는 사실을, 남은 육신을 가지고 그것을 보여주는 기능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스가랴 예언이 누구한테 대한 예언이다? 가롯유다 예언이죠. 그 다음에 누구 예언 되겠어요? 오늘날 우리한테 적용되는 예언이죠.
우리 이 몸을 천국에 넣어주려면 가롯유다랑 똑 같아요. 천국가려고 하다가도 ‘가라’ 하고 보니까 지옥에 가는 거죠. 그런 우리를 이미 천국에 들어갔으니까 남은 육신 가지고 이 육신이 어떻게 내 힘으로 구원받겠다는 그러한 쓰잘데기 없는 죄악 된 행동을 남은 육신가지고 어떻게 보여 주는가 그건 곶감이나 먹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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