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용익

수련회 소감문-십자가 배양기

아빠와 함께 2024. 1. 11. 16:27

2024년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소감문 - 십자가 배양기

 

1.인간이 성경해독 못 한다. ‘시간 너머 시간’ 속 정보(무한)가 ‘시간 안에 가두어진 존재’(유한)들에게 허락된 적 없다. 공주가 되고 싶던 아이는 요정으로 소원을 바꿔서 주문을 외워 보지만 언어 돌려막기로는 자기 달램의 부채를 해결 못 한다.
“언어적 논리는 비-논리적인 무의식적 결정의 그물에 사로잡혀 있다. 인간의 이성은 우발적인 사건과 늘 일치되지 못하고 빗나간다.---인간은 항상 자신에 대해 오류된 뜻으로 이해한다.”(교재 2쪽) 의식의 시작인지, 의식과 함께인지, 의식 자체인지, 물음만 있고 답은 알 수 없는 ‘나’들의 움직임의 총화(역사)가 기껏 환상에 그치고, 인간이 규명했다고 하는 모든 진리가 다 사기인 이유다.
성경 속 언어를 잡아당겨 “자신의 정체성”을 정박시키고자 하는 시도 뿐으로서의 성경연구, 예수 믿기가 정신질환인 이유다. 정신의학은 인간의 근본문제에 근처도 못 갔다. 인간이 자신에게 가치 중립적 자세, 선악에 초연한 중성적 지위를 부여해서 무한에까지 확장하겠다는 야심으로 자연을 파헤쳐도(과학, 학문) 나와 나 사이의 빈 곳을 메울 언어를 찾지 못한다.
나 있음에 나는 나로 인해 안식하려는 투쟁(노동)으로 평생을 소비해도 왜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는지”(막 13장 24절)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단 하루로 응축된 계시의 세계를 해석 못 한다. 불안과 공포의 공백을 근원적으로 타고난 인간이 성경을 자기 언어로 치환하여 나의 믿는 선택을 영생으로 이어주는 언어조합(법)을 만지작거리면서 안도하고 쾌락하는 정신병, 인간은 여기서 놓여날 맘 자체가 없다.

2.인터넷으로 통일된 자기관리의 시대에서 멸망하지 않으려는 몸짓들, 개인이든 국가든 성전이 무너지고 계시가 끊어진 이스라엘의 중간기, 주변 강대국의 힘을 의지해서라도 자기들의 역사구성(다윗의 혈통과 율법)으로 메시아 오기까지 이어보려는 몸부림과 닮아있다. 주체-탈주체-재주체화를 순환하는 공백 주변의 배회. 피가 나도록 긁어대도 더 가려운 아토피. ‘나’는 갈수록 예민하다. 진즉부터 무한에 피할 수 없도록 연계된 유한의 증상이다. 망하기 싫고 죽기 싫어하는 악마의 통일체로서의 인간, “아무것도 원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낭패”고 “자신을 버리지도 못하고 버리는 방법도 모른다.”(교재 10쪽)
“자신의 정체성 자체가 진실을 방해하는 장애물”(4쪽)이라면, 그래서 나라는 것이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아무리 제거해도 남겨진 무엇”, “죽이려 해도 죽지 않는 그 무엇”, “의식으로 파악할 수 없는 죽음의 공간이 ‘나’고 ‘나’는 살아 있는 죽음”이고, 그런데 “자아와 관련된 모든 인과성이 멈추는 곳” 그래서, 그런데요? 그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 밖에서 죽는 죽음” 그래 그래서, 그래서요? “인간은 예수님의 특별한 죽음과 영광에 참여할 수 없다(요 20:17)”
성령은 말씀대로 살 수 있게 도와주는 영이 아니다. 유한에 시중드는 무한은 유한의 자기 복제물에 불과하다. 환상이다. ‘창세 전 비밀에 접근하려는 시도들’, ‘창세 전 선택 받았음’을 ‘이미’라는 시간대에 넣어두고 ‘아직’이라는 미래에 종말과 재림을 걸어둔 채 ‘예수 믿으면 구원받고, 구원받았으면 말씀대로 살자’는 그리스도교라는 겉옷을 입은 유대교(인간은 예외 없이 출생 곧 유대교인이다)가 사도가 전한 창세 전 비밀에 접속했다는 소식도 아직 없다. 사람 구원에 치심한 칼빈이라는 개혁교회 교주의 해석(선택론)은 물론이고 예수 중심의 선택론이라고 평가받는 칼 바르트의 이중선택론도 창세 ‘전’이라고 둘러친 완강한 시간의 막 주변을 그저 서성대다 만다. 왜 이 존재를 구원하려고 하는가? 왜 불교처럼 안 망하려고 하는가?
성령이 임하면 성경대로 예수 믿는 사람 된다고 한 것도, 이제 창세 전에 선택된 대로 구원받았으니 남은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말씀대로 살기, 말씀대로 행하기라고 교회에서 배운 것들이 다 악마의 가르침이었다. 인간이 과학으로 선악의 가치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속내(뜻)가 실상은 “날 죄인이라 규정하지 마라.”는 의미훼방이고 반항이듯 교회가, 종교가 신에게 귀의하여 선을 추구하는 모양새도 매일반이다. 집에서 교회로, 절로, 사당으로 장소를 이동한다고 마귀의 통일체가 변하지 않는다. 무한의 세계에 대한 타고난 저항의 힘이 곧 유한체를 살게 하는 힘이고 이유다. 내가 죽는 것은 죽기보다 싫다는 공포의 떼창이 곧 우리가 속해있고,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가 거기서 구원받고 쉬기를 원하는 역사다. 너는 노래하라. 나는 손을 내밀 테니. 고맙소~, 고맙소~.

3.예수안. 완결된 이중 구조

성령은 요술 지팡이인가? 툭툭 건드리면 공공연해서 더 비밀스러웠던 예수님 죽음사건 자체가 존재에 침투해서 파고들고, 존재는 파편으로 부서져 일체의 주도권을 상실한 채 주님의 죽음사건에 복무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으로 이 땅에 다녀가신 예수님의 경로, 그 생명 노선에 당첨, 혹은 차출되었다고 통보받는 자들이다. 주께서 홀로 매개가 되셔서 이뤄내신 주님의 성과에 덜렁 합격한 자들, 통보받고 보니 이미 예수 안이다(엡 1:1-6, 6).
성령이 툭툭 건드리면 계시문자는 딱딱한 기호의 탈을 벗어 던지고 시간 안으로 마구 쏟아지는 창세 전 정보다. 성령의 요술 지팡이가 툭툭 건드릴 때마다 유한한 역사체에 불과한 ‘나’라는 존재에 뻥 나타난 불연속의 틈새가 벌어지면서 기존의 나는 사건화로 돌출된 나, 내가 몰랐던 나와 이별을 고하는 희한한 이중구조의 사물체로 드러난다. 이중의 안목이 무시로 열리는 창이거나 문이거나, 주님의 죽음을 품은 말씀이 자기표현의 장치로 사용하는 기계가 창세 전 세계에 합류한 언약의 사람이다(엡 2:7). 사람에서 기계를 거쳐 아들로 확정 통보받은 신분들, 성도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
‘그래서 그런 것’이라는 인과의 세계가 아니라 ‘그래야만 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영원히 과거로 박제된 문자인데, 매일 오늘의 사건으로 생생하게 소환되는 낯선 현실 속의 사람들. 또 저 먼 미래의 어느 시점, 역사가 종말이라 이름 붙인 그때나 될지 말지 할 현실,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를 오늘의 일, 지금 닥치는 현실로 종말을 터트려내는 종말 발생기.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인자의 날 ‘하루’가 잔뜩 아들의 피사건을 안에 머금고 있다가 이 역사를 찢으면서 비로소 벌어진 불연속의 틈새로나 삐어져 나오는 낯선 환경이다.
이중구조의 사물체는 역사(또는 자신의 옛사람)로부터, 이중으로 욕을 먹는다. ‘네가 잘못했으니 네가 책임지고 만회하라, 그리고 다시는 실수해서 타인에게 책잡힐 일 만들지 말라’는 내부의 압력이 이미 만만치 않은데 ‘언제까지 죄 타령만 하고 있을 것이냐, 반성하고 회개해서 실수를 만회하라, 성령의 인도를 따라 십자가에만 머무르지 말고 부활로 나아가라’고 욕을 먹는다. 한편 ‘주께서 다 이루셨으니 인간이 할 일은커녕 역사 자체가 끝났다’하는 주장은 너무 허황되고 극단적이고 뻔뻔한 주장이라고 또 욕을 먹는다. 계룡산에서 내려오셨나? 십자가에 못박아라, 십자가에 못박아라, 역사의 얼굴을 한 악마를 대면하는 순간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 안과 밖의 현장화, 말로만 듣던 십자가의 반복이다.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고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못 알아먹는다. 너는 1층집 살고 나는 2층집에 산다. 너는 부산이나 서울이나 대전이나 열심히 찍어라. 나는 한층 더 있다. 땅과 하늘을 천사처럼 오르락내리락 하리라. 만나자 이별이다. 너와 나의 이별, 너처럼 그랬었던 나와의 이별. 십자가의 재현으로서의 종말현상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그리고 주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 의 확정, 완결된 이중구조(롬 7장). 여기에 역사가 들어갈 틈이 어디 있는가? 성령께서 주님의 죽음의 힘으로 직접 침투해서 존재의 자기 정당화를 근원부터 끊는 방식으로 주님께서 받으신 피사건, 저주에 합류시키지 아니하면 날 수 없는 주님의 안목이다.

 

4.비밀

예수님 죽음 안을 하나님이 선택하셨다. ‘예수님의 죽음 안’이 곧 창세 전이라는 막으로 둘러쳐져 시간의 역사를 영원히 차단한다. 피조세계의 모든 선악간의 구획을 허물고(엡 2:13)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만 무조건 영생, 무조건 영벌이 구획정리 되는 피 중심의 통일된 세계가 이미 완결, 종결되었음이 십자가 안에서만 밝혀지는 비밀이다(엡 3:9). 예수님의 죽음 안이 먼저고 죽음 안팎의 소품은 나중이다. 용서가 먼저고 용서의 짝인 죄는 나중이고, 보이지 않는 주님의 상처가 먼저고 주님 얼굴에 폭력을 행사할 마귀 들린 피조 세계가 나중이다. 그냥 자리이고 위치를 표시하는 명멸하는 점이고 비유다.
자기이름을 따로 가질 수 없게 되어 기뻐하는 사람들, 위치만 있지 자기 역사, 자기 내용을 따로 가질 수 없도록 확정된 운명, 자기전쟁은 더 이상 허락되지 않는다. 주님이 치러내신 영적 싸움만 담아내야 하는 쇼윈도 마네킹이거나 기계가 된 현실이, 자기허락도 없이 툭툭 안팎으로 불거져 당황하면서도 그 낯선 사랑의 현장감에 가슴 벅찬 사람들. ‘나는 당신 자리에서 떠날 수 없습니다,’ 하는 사랑의 궤도에서 자기선택, 자기 자리를 잃어야만 만나지는 주님이 흘리신 피 사건의 원소들, 과학의 원소주기율표는 틀렸다.
이들은 전사여도 무기가 없다. 힘도 없고 빽도 없고 이 땅에서 힘 될만한 것 하나도 없다. 있어도 없고 없어서 또 없다. 있는 내가 내 앞에 있는 말씀 지키는 것이 아니라 가정도 직장도 삶 자체가 영적 환경의 배치다. 말씀이 영적 환경에 걸맞는 배치물을 사건화한다. 부모 노릇, 자식 노릇 좀 제대로 잘해보려 하다가 얻어맞고, 목사 노릇 잘 해보려 하다가 또 얻어맞고, 죽음으로 이뤄내신 약속의 단독성취자인 의인과 천 번의 죽음을 내어준대도 가 닿지 못해 저주받아 마땅한 죄인의 차이, 그 영원히 넘을 수 없는 불연속의 틈새, 하늘나라 요소들이 담뿍 담긴다. 하늘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의와 희락과 평강이다. 그 아무것도 아님의 흔적, 주님한테 털린 자취만이 이들의 갑옷이고 방패고 창이다. 나 주님한테 엄청 맞았다! 그것도 자랑이냐? 그것만 자랑이다.

5.영적 전쟁

“실패를 수단으로 하여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 주인공의 얼굴에는 폭력의 증거가 얼룩져 있다”(교재 10쪽)
‘나 있다, 나 살아 있다’는 자아로 시작해서 타자의 요구에 부응하는 주체를 별처럼 도배해서 꾸민 나의 공간, 나의 역사, 나의 피라미드, 나의 솜이불, 나의 투쟁, 그리고 나의 복음, 나보다 더 사랑하고 싶은 나의 예수. 나의 피 흘림, 피사건, 죄용서, 감사, 찬양, 그래 말은 멋있다. 하나님의 피 흘림 사건.
“예수님에게 먼저 일어난 자아와 자아의 투쟁을, 성도 될 자들에게도 일어나게 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밖에서 형성된 기존 자아’와 ‘예수 안에서 새롭게 드러난 자아’ 사이에 전쟁을 벌이게 하신다”(엡 6:10)
나는 의심한다. 그 영적 싸움터에서나 울리는 낯선 언어를 대체 한 번이라도 들어본 적 있는지. 나는 의심한다. “tv 화면에서 tv가 올려진 책상을 볼수 있는데 이 tv속에도 다시 tv가 올려져 있는” 식으로 “자아를 계속 확대 양산” 하는 요량으로 자연을 대하고, 역사를 대하고, 성경을 대하고, 복음을 대하고, 먹고, 마시고, 결혼하고, 자식 낳고, 목사하기도 하고, 그만두기도 하고, 다시 하라는 말도 어쩌다 듣기도 하고, (더러워서) 안 한다고 하기도 하고(실은 진짜로 받은 게 없으니 할 말이 없어서), 말하는 나와 말 되는 나 사이를 오가며 나를 매개하는 말장난이나 일삼은 평생이 아니었는지.
우리에게 심한 경우란 없다. 마땅한 절차에 심하게 저항하는 마음만 있을 뿐. 그마저도 절차라니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지옥이다. “십자가가 된 자”에서 “십자가를 믿는 자”를 빼는 천국계산식(교재 10쪽), 극도로 어리석은 ‘예수 안’의 사랑이, 어디까지인지 가늠도 안 될 그 잘나빠진 우리 정신머리를 절개하여 내가 모르는 십자가를 낳아 주옵소서.

 

댓글

이근호  분주하고 정신없이 살아가는 일상에서 잠시 보이다가 순식간에 덮혀져버리는 어떤 틈새. “그가 어떻게 우리 죄를 사하는가?”(눅 7:49) 귀신 나간자 만이 예수님을 알아본다.

 

함숙경  아하, 이번 수련회 강의 내용이 이런 의미였군요. 이 목사님의 함축된 언어로 쏟아낸 어나더 레벨(^^)의 강의에 대한 ‘친절한 해석판’을 읽는 것 같습니다. 오 목사님 내부 전쟁(사정)을 공유해 주신 것도 감사하고요. “말하는 나와 말 되는 나 사이를 오가며 나를 매개하는 말장난이나 일삼은 평생이 아니었는지.” 이런 ‘틈새’의 고백이 참 편하게 들립니다. 귀신 나간 자에게서 나온 소리라서 그런가^^

 ‘틈새’, 사건으로 전환된 '순간의 존재'를 표현하는 말로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있을까요? 이 목사님 입에서 어떤 새로운 표현이 앞으로 더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저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

 

임청일   "목사 안 한다고 하기도 하고(실은 진짜로 받은 게 없으니 할 말이 없어서)"에 이견이 있다. 진짜 받은 게 없다는 말이 수상하다. 설교준비를 열심히 하고 깨달은 바 대로 설교하면 성령께서 개입하시는 거 아닌가? 노력도 안 해보고 받은 게 없다는 것은 게으름(?) 아닐까? 

오후2,3시쯤 함집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가끔씩 문안해주는 마음씨가 고맙다.이야기 도중에 오목사 글 이야기가 나와서 다시 한번 보게 되었다. 보고 나니 트집 잡는 버릇이 또 나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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