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용익

개인사정 봐주기 없기

아빠와 함께 2022. 2. 27. 09:57

레위기 1 14(만일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이 새의 번제이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로 예물을 드릴 것이요)을 보면 어쩐지 소나 양이나 염소도 없는 가난한 자를 한껏 배려하시는 하나님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드는 말씀이 나온다. ~로라도 제물로 바치라. 그러면 그 정성을 받으시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그때그때의 탐심에 따른 개인의 욕망을, 나름대로 알아서 받으시는 내 하나님, 누구보다도 나를 위한 하나님은 곧 우상의 하나님이다(골로새서3:5). 이는 어느 개인의 하나님이 아니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언약의 상대자를 선택하여 믿음을 보이시고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만이 성경에서 나타난 믿음의 세계요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의 취지에 어긋나는 것이다. 내 안에 거하라, 그리스도 안, 예수 안.

 

이것은 공동체라는 공간이다. 누구 괜찮은 사람 하나하나의 정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움직인다는 이 개인우월주의 사고방식의 최후는 하나님의 죽음이다. 주의 이름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 예수그리스도가 경건한 자신들의 뜻을 맞춰주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을 싸잡아서 독사의 자식들, 회칠한 무덤, 썩어가는 양식을 위하여 사는, 자신들도 모르는 존재의 근원을 들추고 다니자 당시의 유대 최고의 신앙인들은 유일한 말씀의 완성자, 믿음 자체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몰라보고 십자가로, 죽음으로 몰아부쳤다. 아담 안에 태어난 모든 인류에게 이 죽음을 맛보게 하는 것, 이것이 언약원칙에 이미 들어있었다는 것!

 

따라서 언약원칙에는 어느 특별한 인간을 위한 개인사정이 용납될 수 없다. 이런 차원에서 레위기 1 14절의 말씀은 가난한 자에 대한 특별배려가 아니라 오히려 무시이다. 너는 제물 축에도 들지 못한다는 거부의 멧시지다. 또 하나의 걸림돌이다. 한마디로 경제사정과 신앙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의미다. 부자는 재물을 좇고(잠언10:15) 가난한 자는 그 부한 자를 좇는, 결국 모두가 돈이 주는 편안함을 위하여 일생을 달리게 만드는 경제체제가, 이 모든 걸 죽음으로 일괄처리하시는 십자가 안의 세계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오직 하나의 관계만 성사된다. 가난한 자도 예수 죽이는 십자가사건 앞에서 죽이라!’의 반열에 서있어야만 했던-선악과를 범한 아담안의 존재로서-하나님과의 원수 관계라는 것. 도리어 이것이 언약을 이루는 짝이 되어 예수안으로 부름받은 자들의 영원한 속죄의 근거가 되었지만. 구약부터 하나님의 일관된 언약원칙이 있었으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브리서9:22)라는 말씀의 성취이다. 주의 이름은 여호와 하나님이 정하신 제물의 피흘림 위에서만 그 효력이 발생되는데 이것으로 언약의 바닥을 정하신 것이다. 십자가상에서의 피흘리심!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이러한 언약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너도나도 개인사정을 그득 안고 시도때도 없이 교회로 모여든다. 바닥이 숭숭뚫린 사람들. 그 사이로 생존에 대한 두려움만 고개를 쳐든다. 진정 언약의 바닥을 이루는 주님의 피흘리심을 모르면, 알 수 없는 미래가 현실의 두려움으로 화하여 죽기까지 일생에 종노릇하게 만든다.(2:15) 내 사정을 기도로 알리면, 간절한 마음으로 정성껏 알리면 내 하나님은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내 기도대로 내 참한 원을 들어주신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야멸찬 변명거리를 겁도 없이 들이대면서.

 

입을 크게만 벌리라. 그러면 우리대신 모든 일 행하시는 이는 우리 하나님이다. 우리가 잘났다고 무슨 일 하려하지 마라. 그냥 입을 크게 벌리고 기도하라. 기도하면서 생각을 하면 큰 꿈이 생기고 꿈이 생기면 진정한 소원거리가 만들어진다..... 배울 만큼 배우고 유명들 하신 서울의 큰 교회 당회장 목사라는 사람들이 오늘 아침에도 저렇게 언약없는 설교를 해대는데 그 말에 또 아멘 아멘소리는 얼마나 우렁찬지. 가정과 국가와 경제활성화를 위한 교회의 기도? 일본정부를 위한 기도...? 결국 그 속에 끼어서 끝까지 살아내야 하는 자신들의 개인사정 걱정없게 도와달라는 그 얘기를, 참 거창하게도 능수능란 뱉어내니 참내, 야멸찬 사기술이다. 하두 지루한 수법이라서 잊고 지내지만.

 

하기사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의 자리를 선사받지 못하면, 보이는 것은 이 땅의 바닥뿐이란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바닥만 보시는 하나님이다. 전 우주적인 주님의 죽음, 그 피흘리심과 다시 살아나심은 더 이상의 개인사정으로 주님의 피를 헛되게 만드는 일체의 행태들을 용납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완성의 선포이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갈라디아서3:22-23)” 예수님의 죽으심은 이 땅을 향한 일괄저주와 심판의 확정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도 주님의 일괄심판의 원칙을 드러내시는 도구로 마땅히 쓰임 받는다. 부자는 숨길 능력이 많아보인다. 거짓을 가리고 더 탁월한 외모, 지식, 지혜, 건강으로 치장한다. 아예 부끄러움과 흠을 가리는데 쓰라고 받은 재물이겠다. 실컷 욕망하라. 욕망하는 자아는 아름답다. 너희 욕망을 마음껏 성취하라.

 

이렇게 생각하다보니 내가 바로 부유한 자다. 부유한 자를 욕망하는 가난한 자다. 가릴 것이 쉽게 떨어지는 무능력한 가난한 자. 그러나 주님의 일괄저주에 닿는 최선의 구멍은 차별 없이 임한다. 부한 자와 가난한 자의 구별로 피곤하게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이 마땅히 죄인으로 드러나는 곳, 언약의 세계. 가난한 자의 멱통마저 비틀어끊는 하나님!(레위기1:15) 아픈 것도 서러운데 개가 와서 핥는다. 좋은 집 다 불타 없어지고 어여쁜 자식들도 다 죽고 아무런 소유가 없는 채로 추한 신체마저 노출될 때, 욥을 짓밟으시는 그 하나님과 만날 때 깊이 숨어있던 반란의 흔적이 고동친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냐고요!!”

 

과다한 신체노출도 즐겨 사용하시는 하나님임을 안다면 누가 진정 복된 하나님이라고 다가오겠는가. 그러므로 언약이 덮친 자라면, 개인사정으로 주님 앞에 나가는 자신의 순간순간들이 죄인의 괴수라는 고백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너와 나의 개인사정으로 우리가 죽인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님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시는 용서와 긍휼의 그 하나님이, 바로 성경을 관통하는 언약의 하나님이란 것을 순간순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예수 안에서, 죽을 때까지-자아 인식이 끊어질 때까지- 십자가로 십자가로 몰아붙이시는 주님과 이미 동행하고 있음을 알기에.

 

그러므로 개인사정 즐겨 봐주시는 것 같은 일괄형통의 양태들은 이 땅에서의 부요함을 소원하게 만드는 다름아닌 악마의 노림수다. 각자의 개인사정을 바닥에 깔고 신의 능력을 구가하여 내 인생 내가 관리하겠다는 식의 이 언약적 무지가 바로 가난함이요 죄인 것이다. 결국 주님의 피흘리심 앞에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의 일생은 가난한 자로, 죄인으로 들추어지는 도구이며 일괄저주, 심판하시는 언약원칙의 적용사건이다

 

또 그 날개 자리에서 그 몸을 찢되 아주 찢지 말고 제사장이 그것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에서 불살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위기1:17)”

 

일괄저주하여 계속해서 그 번제의 연기를 향기로 받으시는 분,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우리 주님.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로마서12:1). 말씀이 통째로 들어와 장악당한 성도의 신체는 주님의 일괄심판의 결과로 날마다 스멀스멀 연기가 피어나는 주님의 제단이다. 언약원칙에 대한 순종! 헌신!이 번제의 취지인 셈이다. 약속도 주님이 했고 방법과 원칙도 주님이 세웠고 변함없이 지켜나가시는 분, 그 완성됨을 통보하시는 언약의 성실함이다.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브리서 4:13).”

 

처음부터 잘잘못은 없었다. 너희 반란의 육체는 예수님의 피흘리심에 합당한 언약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 이것이 네게 족한 은혜이다. 성도의 일생은 자기만의 개인적인 내용물을 따로 갖고 노는 것이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걸쳐놓은 누더기들을 낱낱이 끄집어내시고 들춰내는 고난을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다시한번 다시한번 창출할 뿐이다. 주님의 새창조의 과정을 드러내는 절차로서의 죄인의 죽음이다.

댓글

이미아  처음 말씀이 올라 왔을 때는 어떻게 읽었는지 모르게 그냥 아! 그렇구나 하면서 읽었는데 어제 다시 읽어보니 감당못할 단 말씀에 깊이 빠져 들었습니다. 오늘 하루종일 개인사정 봐주기 없기 라는 제목이 일하는 내내 나라고 규정지을 수도 없는 자아를 짓누릅니다. 개인사정 좀 봐주면 안되는가..그런 불만이 터져나온 후면 뭘 봐달라는 것 조차도 모르는..단지 알 수 없는 두려움 뿐입니다. 오늘 또 말씀을 대합니다.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바울 사도의 심정은 여전히 성도에게도 유효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오로지 주님의 공로입니다. 이 고백을 하고 있는 이 순간마저도 내 욕심은 발 디딜틈도 없이 꽉 채워져 있는데 도대체 생뚱맞은 말을 하게 되는 기이한 현상이 이렇게 가끔씩 생겨나니 말입니다. 고맙습니다. 말씀 생생하게 올려 주셔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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