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바른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듣고 싶은 소리만 듣고 싶어 한다. 그러니 자기 소리 외에는 누구의 소리라도 듣고 싶은 소리는 하나도 없는 셈이 된다. 소위 바른 소리라는 것은 원래 있지도 않고 다만 있는 것은 내 말이 세상에서 가장 바른 소리라는 평가를 받고 싶다는 소원이 담긴 내 말만 있을 뿐이다. 언어는 그 기표 자체에 본래적 의미가 없고 문맥, 곧 다른 기표와의 차이에 의해서 그 의미가 생성된다고 하니 언어 외에 다른 표현수단이 없는 인간으로서는 인간자아의 본래적 가치나 의미란 것도 없고 다만 나를 둘러싼 외부의 관계망에 의해서 그 때 그 때 만들어지는 일시적 의미뿐이겠다. 그리고 그 일시적 의미나마 실컷 자기 자신에게로만 되먹임 되는 메아리에 불과하다. 그 메아리에는 진원지나 그 향방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저항할 수 없는 복수심이 짙게 배어 있다. ‘날 알아주지 않는 인간은 누구라도 다 죽인다. 그게 설사 나 자신이라도’ 그러니 언어란 이 가공할 숨은 살해자의 면면을 슬쩍 감추면서도 동시에 정당화하는 갖가지 변명과 핑계로서가 아니면 애초부터 생산되지 아니한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부르고 사랑해도 이미 그 하나님은 처음부터 가증스런 우리의 다른 얼굴, 제 2, 제3의 내가 생산한 나, 그것도 타인의 욕망을 빙자해서 생산해 낸 복제된 신이다.
우리 몸은 자기이름의 우상을 찍어내는 공장일 뿐이고 신앙이니 천국이니 예수니 사랑이니 신학이니 개혁주의니 교회니 예배니 기도니 헌금이니 무슨 말을 해도, 무슨 행위를 해도 다 그 우상의 공장을 가리는 천 쪼가리, 가증스런 내 낯짝의 기표들이다. 그러니 언어의 세계 곧 인간의 세계가 다 사기다. 주님 사랑합니다, 는 실은 나는 주님을 진짜 죽이고 싶어요, 다. 타인과의 진짜 대면은 소위 말하는 좋은 관계가 아니라 관계망의 삐걱거림, 마찰이나 충돌에서 시작된다. 충돌로 인한 균열을 타고 그동안 숨어 있던 진정한 살해자의 표정을 감출 수 없도록 노출되는 그 자리가 진정 타인과 제대로 대면이 시작되는 자리다. 그 진정한 교제를 시작해보자고 오신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이유도 모른 채 본능적으로 꼬깃꼬깃 숨기고 싶어하는 그 표정을 일일이 끄집어내는 데서부터 시작하신다.
“그동안 나에 대한 분노와 복수와 살해의욕을 누르고 감추고 사느라 너무 힘들었지? 이젠 제발 속 시원히 성질 날대로 다 내서 날 욕하고 저주하고 날 죽여라. 그리고 그놈의 표정 관리, 연기, 분장하는 것 좀 집어치워라. 보기 안쓰럽고 역겹다. 너도 힘들고 그 꼴 보는 나도 힘들다. 맨 얼굴로, 맨살로, 하나님의 저주 가운데서 영원히 만나자.”고. 이게 십계명이고 이게 율법이고 이게 성경이고 이게 주님의 피로 이룬 새 언약이다. 주님이 친히 자기 죽음으로 마련하신 영원한 저주 안에서만 제대로 세상이 보인다. 이미 폐기처분했고 폐기되고 있고 폐기될 세상, 세상은 쓰레기폐기장이다. 이 영원한 저주 안, 곧 인간의 행함과 아예 무관하게 약속의 성취만으로 피어나는 용서의 세계 안에서 성도는 기존의 세계에서 통용되던 의미가 그 뿌리부터 거세당하면서 대신 약속 안, 주님의 영원한 저주 안에서만 피어나는 영원한 속죄에 푹 잠긴 채로 맞게 되는 이 세상 현실과의 마찰과 균열로 인한 그 틈새에서 피어오르는 이 낯선 의미만을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처음처럼 새롭게 되먹임하게 된다. “주님이 흘린 피 앞에서 나나 당신이나 하나님에 의해서 영원히 폐기처분돼야 될 쓰레기가 맞네요. 주님 피만 고상하고 의로운 것이 맞지요?” 실험실, 혹은 표본실의 알코올에 푹 잠긴 개구리처럼.
우리의 모든 분노란, 이 복수심과 미움이 두껍게 깔린, 우리가 애써서 감추고 싶은 표정이고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도록 삐어져 나오는 일그러진 우리의 표상이다. “나나 당신이나”에 내가 포함되는 것에 대한 거부, 오직 주의 이름만을 여기서 빼는 것에 대한 미움과 질투, 곧 나는 하나님자리에서 비켜날 맘이 털끝만큼도 없다는 가증스런 낯짝, 침을 뱉고 후려갈겨도 시원찮은 두꺼운 면상이다. 오늘도 주님은 바로 그런 나에게 모욕 받고 침 뱉음을, 뺨 맞음을 당하면서 종일토록 시달리는 하루, 악한 세대의 악한 날이다.
잠언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댓글
이미아 바람은 길에 쓰러져 있는 낙엽을 뒹굴게 합니다. 바람맞으며 걷는 거리에서 오늘이라는 동안 바람처럼 사라지고 싶은 쓸쓸함을 뒤로 한 채 어찌되었든지 살아있는 몸둥아리에 연신 뿜어넣습니다. 숨을...의미있게 살아 보겠다고...말입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주님이라는 소리조차 역겨운데 난감한 일상은 주님을 또 다시 부르게 합니다. 제목만 생각나고 내용은 생각나지 않지만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심정으로..주님은 온갖 것을 적당하게 쓰이게 하시기 위해서 맘껏 주님을 부르게 하십니다. 내용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제목만 외우면 다 아는 것 마냥 그렇게 주님을 부르게 하십니다. 그것이 얼마나 악한 날에 행해지는 악인 것을 절대로 알게 해서는 안되도록 꼭꼭 숨겨두었기에 주문처럼 주님만 찾습니다.
참 오랜만에 일상을 잠시 접고 돌아보게 합니다. 이제서야...환절기 건강하세요..
저는 또 대략난감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겠지만..
오용익 대략난감하고 그러다가 순간 참 황송하고 그렇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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