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파과와 치료

아빠와 함께 2023. 11. 4. 20:04

안양20231017a말4장2절(파괴와 치료)-이 근호 목사

말라기4장1~3절, “1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2절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3절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여기에 교만한 자와 악이라는 이 규정은 우리 인간의 소관이 아닙니다. 이 규정은요, 이 교만에 너는 악을 행하는 자, 라는 규정은 여호와 하시는 일에 소관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교만한자, 악인 규정하시는 일을 한다. 말라기4장1절에서 규정하시는 일을 해요.

그래서 규정해서 뭐할 건데, 용광로에 불에다가 다 집어넣고 그들을 살라서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한다, 되어있지요. 뿌리와 가지. 여기서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한다. 했으니까 여기에 나온 중요한 단어. 뿌리. 가지야 뭐 뿌리에서 나오니까. 뿌리를 일반적인 용어로 뭐냐 하면 자리. 내 자리. 뿌리는 내 자리를 말하는 겁니다. 내 자리.

내가 나로서 계속 시작된 그 자리. 내 자리니까 이건 뭐냐 하면 고향 같은 겁니다. 고향. 언제든지 힘들고 어려울 때는 후딱 주저함이 없이 후딱 마치 용수철 달린 것처럼 탱하고 어디로 가는가, 자기 자리로 가지요. 촌에 있다가 서울 와서 돈 번다고 고생한 젊은 사람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평소에는 전화 안하고 안 찾다가 힘들고 어렵고 빚쟁이한테 쫓기면 후딱 어디로 갑니까? 엄마가 기다리고 아빠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들어오지요. “야, 야, 니가 왠일이고?” “엄마 보고 싶어서 왔어요. 좀 쉬었다 갈게요.” 그 말은 사채업자한테 쫓기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사람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뭐 하나는 돌아갈 구석은 있다는 데서 다시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생각입니다. 심지어 교만한 자나 악인들도 마찬가지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주 발본새본한다 하지요. 뿌리째 뽑아버리는 겁니다. 너는 돌아갈 곳을 내가 너를 없애주겠다. 내가 너를 없애주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가혹한 처벌을 하느냐, 교만한자, 악인의 그 시작이 살다보니까 그렇게 된 게 아니고 그 뿌리 자체가 교만이 나왔고 악이 나왔던 그 뿌리에요. 본인은 고향 같지만. 본인은 고향 같아요.

사람이 큰소리치고 남한테 쫄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고향이 든든하다는 뜻이에요.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그 이야기입니다. 뒷배가 나는 든든해. 단단해. 나 지금 이렇게 망가져도 상관없어. 나를 받쳐주는 그 토대는 멀쩡하니까. 그런 자신감. 그래서 인간은 살맛이 나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보는 건 말라기잖아요. 말라기에서 성경이 끝납니다. 말라기에서 이 시대가 끝나요. 이스라엘 역사는 이 말라기 선지자가 이스라엘에게 준 선지자에요. 선지자가 말라기로서 끝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이스라엘에게 신약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스라엘에게는 신약이라는 게 없어요. 신약은 성령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약이 있지.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한테는 신약이라는 게 없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희망을 갖는데 그들이 갖는 희망이라 하는 것은 없는 세계가 아니고 자기가 잃어버린 고향을 자기 뿌리를 되찾는 그러한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하면서 이스라엘은 선지자를 고대했던 겁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말라기이후에 신약까지는 400년의 간격이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떤 생각으로 살았느냐, 약속의 땅은 무조건 내 땅이고 우리 땅인데, 비록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서 포로로 흩어졌다 할지라도, 흩어진 것이나 고대해요. 회당중심으로 모이는 겁니다. 그들은 본격적인 제사 같은 건 안 드려요. 왜? 성전이 없기 때문에. 흩어진 거예요. 뿔뿔이 흩어졌지만 언젠간 그 뿌리, 그 고향 예루살렘 그리고 가나안 약속의 땅. 돌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렇다면 그들이 선지자의 모든 해석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언제 돌아갑니까? 무슨 일이 벌어지면 돌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를 고향으로 되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들을 준비해두셨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거 그걸 가지고 이스라엘 또는 유대나라의 신앙입니다. 신앙.

다윗 때 그 때 참 좋았다는 거죠. 하나님과 우리와 함께 하셨는데 하신 이유가 솔로몬에게 엄청난 부귀영화 잘살았잖아요. 그 때가 그리운 겁니다. 참, 행복한 거예요. 좀 어렵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자, 그들의 문제점은 뭐냐, 방금 제가 이리 이야기했는데 약속의 땅에 돌아갈 때까지 하나님께서 지켜준다.

그들의 문제점이 뭐냐, 그들의 문제점은 그들은 ‘짝과 자신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몰랐다.’ 짝이라는 하는 것은 자기 적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적과 하나님이 없는 이스라엘 적과 하나님 믿는 자신들이 하나님을 믿는 여호와 믿는 자신들이 이게 동일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상상도 못했어요. 우리는 상상합니까? 그들은 상상도 못했어요. 그들에게는 신약이 필요 없어요.

그들에게 필요한 메시아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그들의 메시아는 자기를 고향에 들어가게 해줘서 든든하게 옛날 다윗왕국처럼 모든 만민 중에 뛰어난 민족이 되기 위한 그 메시아가 메시아에요. 다윗에게 약속을 했답니다. 후기에 다윗의 자손이, 다윗의 자손이라 하는 것은 왕의 자손이에요. 다윗의 자손이 왕으로 오면 그 왕이 옛날에 부귀영화 누렸던 그 이스라엘의 왕국을 재건해 준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처음부터 그들은 하나님 편이고, 하나님은 자기편이에요. 독보적인 존재로 인정하는 거예요. 그에 비해서 이방민족은 하나님이 없는 민족은 자기들의 적이 되겠지요. 그래서 메시아가 와가지고 자기 적을 물리치고, 왜 물리치느냐, 지금 우리가 자기들이 포로 잡혀있는 것이 적 때문에 포로 잡혀 있으니까 우리를 힘들게 한 적들을 물리치고 우리들을 어디에? 약속의 땅에다가 넣어주는 그 일을 하면 드디어 모든 성경은 그들은 구약이라는 게 없어요. 그 말씀 자체에요.

구약이라 하는 것은 신약이 있을 때 구약이잖아요. 그들은 구약, 신약 분리한 개념이 아니고 그 말씀은 오직 자기들 향한 그 말씀하나 뿐이에요. 모든 것이 완성이 된다, 라는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신약도 없고 구약 개념은 없고 그냥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우리를 건지기 위해서 살리기 위해서 오신다. 그래서 그들은 선지자들이 계속해서 있어온 것에 대해서 굉장히 고맙게 생각합니다.

왜? 선지자들 그 내용 자체가 언젠가 하나님께서 너의 진노를 돌이킨다. 은혜로서 약속의 땅에 살게 해 주신다. 끝. 상당히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자기의 민족의 미래상을 보장받는 그 내용으로 이해했던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자기를 위한 하나님, 자기를 위한 하나님이 되겠지요. 말라기를 그런 식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해하는 식으로 우리도 그렇게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돼요. 그들의 오해가 우리의 오해이기 때문에.

방금 한 거 다시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은 끝이 있다? 없다? 끝이 없고 하나님이 계신 한 이스라엘은 존속된다. 그걸 믿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믿는 하나님께서 그 민족을 끝장을 내신다면 그들은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진짜 끝장을 내면.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그 희망이 있잖아요. 그 희망인데 그 희망을 하나님이 작살낸다면 그들은 어떻게 살겠어요? 그들은 그런 생각을 안 합니다.

왜 안하느냐 하면 내가 끝장나버리면 그동안 그들이 선지자의 말씀을 성경 말씀을 이해했던 모든 것이 이게 오류가 되기 때문에 그 오류는 누구 오류입니까? 자신들의 오류지요. 한 번 적어보겠어요. 사람들은 이걸 제일..., 자신의 오류를 자기가 받아준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요. 자신의 오류를 내가 인정한다? 이런 경우는 인간치고는 이런 경우는 없습니다. 유대인도 마찬가지고. 모든 인간은 절대 이러지 않아요.

우리는 나의 오류를 감안해서 하나님께서 수정해 줄 것이라는 거예요. 내 오류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감안해서 수정해 주고 수정다음에는 오류가 없어진, 오류 아닌 진실된 나로 다시 태어난다는 그것을 희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게 방금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이스라엘의 신앙이에요. 오늘날 우리의 심보, 본성이기도 한 거예요. 희망도 없이 산다는 것은 그건 지옥이지요. 그런 지옥은 있을 리가 없다는 거예요.

제가 이야기하나를 해드릴테니까 여러분들이 누가 잘했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개미와 베짱이가 같이 한 마을에 있었는데, 쨍쨍 햇빛이 비치는 뜨거운 여름날이에요. 베짱이는 더워서 기타들고 그늘에 가서 기타 치면서 힘들어서 쉬어야겠다고 맨날 노래 불러요. 그런데 개미는 그 여름날에 쨍쨍한데도 열심히 자기 양식을 모으고, 모으고 했습니다. 드디어 찬바람불고 모든 산천에 양식이 다 떨어진 겨울이 되었습니다. 그럴 때 개미는 추운 겨울을 피해서 굴속에 들어가서 풍족한 양식으로 잘 먹고 잘살았어요.

그런데 베짱이는 손에 가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개미한테 와가지고 얻어먹으려고 하니까 개미가 하는 말이 “내가 일할 때 너는 뭐했노? 놀았잖아. 나가!” 하고 쫓아냈습니다. 자, 이 개미와 베짱이 둘 중에 누가 옳게 살았습니까?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둘 다 똑같다고. 둘 다 악인이고, 둘 다 교만하다는 거예요. 성경은.

지금 이스라엘은 뭐냐, 하나님이 함께 있기 때문에 자기는 옳고, 하나님이 없는 이방민족은 나쁘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스라엘에서 짝이라 해서 만날 필요가 없는 거예요. 내치면 돼요. 왜? 우리는 옳기 때문에. 오류가 없기 때문에. 그런데 개미가 자기가 옳다는 것은 누구를 만나서 옳다고 하는 거예요? 누굴 만났기 때문에? 베짱이를 통해서 옳다고 만나는 거죠.

이게 뭐냐 하면 방금 개미, 베짱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게 ‘시간의 유예’이야기에요. 시간을 늦춰보는 거예요. 겨울에 행복하기 위해서 지금의 행복을 포기하는 게 개미에요. 반면에 베짱이는 겨울은 겨울이고 지금 내가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지금 행복을 나는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 이게 베짱이입니다. 누가 맞습니까? 개미는 시간을 유예하지요. 미래의 행복. 그럼 그 미래가 되었다고 칩시다. 겨울이 되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겨울이 됐으니까 풍족할 게 아닙니까. 그 개미가 행복을 느낄 때 누구를 만났기 때문에 행복이 극대화됩니까? 베짱이를 만나서. 베짱이를 만나서 극대화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말은 뭐냐 하면 이런 뜻이에요. ‘인간은 자기를 규정할 때 짝을 데리고 들어가서 규정한다.’ 짝을. 내가 행복하냐 하는 것은 불행한 자를 짝으로 데려오는 거예요. 비교시키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가 여름에 힘들게 할 때 튕 튕하게 놀고 있는 베짱이를 자기의 짝으로 여기는 겁니다. 나는 너 식대로 하지 않는다는 말은 너를 만남으로서 내가 규정된다는 거예요. 이걸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나는 타인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나를 찾든 아니면 내가 찾아갔든 인간은 타인이 없으면 내가 없는 거예요. 타인이 없으면 내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잘못 생각한 거예요. 잘못된 타인으로 생각한 겁니다. 무조건 내 편에 서서 나를 잘해줄 거라고 여겼던 타인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라기 선지자가 이야기할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거 누구를 좋아라고 한 말이라고 철석같이 믿습니까. 자기 민족 잘되라고 생각해서 준 말씀이지요. 그래서 그들에게는 신약이 그 딴 게 필요 없어요. 어차피 하나님은 우리를 건져줄 거니까. 왜?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의 상대자니까. 우리에게 계약의 상대자니까.

그런데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신약의 계약의 상대자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내친 상태에서 따로 하늘에서 성자 하나님을 이 땅에 보내어서 유일한 계약상대자로 삼았습니다. 인간은 빠집니다. 인간은 거기에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이게 유대인들의 오류고 오늘날 우리의 오류입니다. 내 존재의 오류에요. 성경을 그만큼 많이 보면서도 내가 어느 대목에서 오류를 유발했는지 일으켰는지 우리가 까마득히 모르고 있잖아요.

여기 교만한자, 악한 자 나오니까 대번 누구겠어요? 이건 여호와를 모르는 자, 이렇게 나오겠지요. 이 말은 여호와를 모르는 자를 짝으로 삼았다는 말은 상대적으로 자기는 뭘 안다? 여호와를 안다고 자부할 수 있는 대상자를 지가 고른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내가 타인을 고르든지, 아니면 타인이 나를 호명해주고 불러가든지 간에 우리는 남이 없으면 내가 못산다는 거예요. 타인이 없으면 살 수가 없어요. 그러니 타인에게 종속된 거예요. 인간은 홀로 살 수가 없는 거예요.

이건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혼자였던 게 아니에요.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공동체’라고 이야기해요. 지금부터 점점 어렵게 들어갑니다. 할 수 없어요. 날은 비오고 하니까.

공동체. 공동체 이해할 때, 요 단어만 하면 이해됩니다. 공동체는 뭐냐, 거울이에요. 거울. 내 모습을 반사하는 거울이에요. 이게 공동체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침에 볼 때 거울을 보잖아요. 그 순간 거울은 나의 타자에요. 거울이 있어줘야 내 모습이 되 비쳐 나와요. 거울이 없으면 내 모습을 몰라요. 잘난 거울, 못난 거울 다 필요해요. 못난 거울 앞에서 나는 잘났고, 나보다 잘난 거울 앞에 나는 못났고, 어쨌든 간에 놀아납니다. 어디에? 거울 앞에서 나는 놀아납니다. 거울 앞에서 나는 연기자입니다. 쇼를 벌이고 있는 거예요. 코미디언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공동체가 거울이라 하는데 또 노골적으로 말해서 거울 다면체. 거울이 한 개가 아니고 온 천지가 다 거울이에요. 전부 다 번쩍 번쩍 내가 그걸 자진해서 비춰보고 싶고 또 그들이 나를 거울로 봤을 때 나를 어떻게 봤는지 듣고 싶은 거예요. 귀담아 듣고 싶은 거예요.

자, 이 나와 타인. 타인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의 거울이지요. 나를 비춰보는 거울이다 말이죠. 타인사이에. 여기에 뭐가 형성되어있을까요? 우리나라 말로 하면. 딱 한 자로 정하면 뭐로 형성되느냐 하면 말입니다. 말. 말. 말. 타인이 나에게 뭐라고 궁시렁 궁시렁거리는지 우리는 궁금해요. 우리는 굉장히 궁금해 합니다. 자식이 나보고 뭐라고 하는지, 부모가 나보고 뭐라고 하는지, 친구는 나보고 뭐라고 하는지, 궁금해 하는 거예요.

그 예를 한 번 들어볼까요. 내가 여기 있습니다. 친구는 파란색으로 할게요. 친구를 만났습니다. 친구가 나한테 말을 걸지요. 말을 걸었지요. 친구가 나한테 말을 걸었다 말이지요. 그러면 그 말을 듣고 그 말을 들은 것에 대해서 이미 말을 들은 내가 거기다가 추가적으로 다른 말을 가지고 친구한테 그 말을 토대로 해서 그 말을 주는 거예요. 과거해석이 토대로 해서 지금의 해석을 내놓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말은. 과거해석. 조금 전에 한 해석을 토대로 해서 지금의 해석을 내놓는 거예요.

그러면 말이라 하는 것은 혼자 말합니까? 어디 백설공주 계모도 아니고 거울아! 거울보고 하는데. 누구보고 말을 해야되잖아요. 심지어 뭐 딴 말을 안해도, “니 지난 번에 돈 빌려간 거 왜 안 갚아?” 이건 또 뭐예요? 말이잖아요. 말. 그럼 상대방이 “니, 우리사이에 돈 이천원 가지고 아! 니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이리 나온다 말이죠. 다른 사람 같으면 이천만원 빌려간 거 같아. “돈 이천원 갚아줄게. 대신에 버스값 대신 낼까?” 자, 둘 친구 사이에 이천원가지고 그렇게 투닥거렸다면 둘 다 공유한 느끼는 것이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무슨 사이? 친구사이인 거예요. 이천만원 같으면 원수 사이 되지요. 그게 아니고 이천원가지고. 친구사이 되는 거예요.

엄마 촌에 있다고 돈이 떨어졌지? 요번에 애기아빠가 보너스 받았는데 한오십만원 갔다. 엄마, 먹고 싶은 거 먹어. 진짜 그 말 듣고 먹고 싶어 먹는 엄마 없어요. “야, 야, 너 김서방, 전에 보니까 좀 허약하더라. 내가 흑염소해서 올려놨다. 택배 이틀이면 갈 거야.” 그 시집간 딸과 엄마 사이에 뭐를 주고받았습니까? 언어가 생겼지요. 말이 오고갔지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의 고향이에요. 이게 우리의 고향입니다.

인간은 거울에 둘러싸여서 안도감을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안도감을. 거기에 누가 끼는가. 하나님마저 들어온다고 여기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건 이스라엘이에요. 신약 없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이에요. 하나님이 함께해서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을 들었던 선지자가 우리의 미래, 아름다운 미래, 우리가 장차 고대하고 고대하던 그 왕국의 완전한 회복을 선지자를 통해서 알려줬다고 생각하고, 자부하고, 그들은 말라기 선지자를 선지자라고 인정해주는 겁니다.

그리고 이건 뭐냐 하면, 그 동공체가 거울다면체니까 그 거울로 둘러싼 공동체내에서 그들이 빠져나갈 수 있습니까. 못 빠져나옵니까. 못 빠져나오지요. 폐쇄지요. 폐쇄. 시간이 시간이 흘러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약속의 땅에 넣어줄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말라기의 1절부터 3절까지 나오는 이스라엘의 해석이에요. 어떻습니까. 이 해석 보니까 여러분이 보니까 여기서 뭐가 빠졌다는 생각이 들까요. 이 해석에서 뭐가 빠졌다고 듭니까? 방금한 해석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다윗언약을 회복시켜, 완성시켜 약속의 땅에 가게 하신다. 왜? 말라기 우리 선지자. 남의 선지자 아니고 저 이방나라 선지자 아니고, 우리 이스라엘 선지자가 이런 약속을 했다. 우리는 약속을 보니까 이렇게 되어있다.

그 다음에 2절에 내 이름을 경외하여, 내 이름이 누구지요? 여호와지요. 여호와를 경외한 자에게는 치료하는 광선을 해가지고 너희가 외양간에서 나오는 송아지같이 방금 막 새로운 창조된 태어난 사람처럼 신나게 살도록 해주신다. 그런데 그것이 뭐냐, 치료를 통해서 일 해주신다. 그리고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며, 이건 악인을 밟는다는 이야기가 그 전에 선지자가 한 두 번 이야기한 게 아니고, 많이 이야기한 거니까 정한 날에 그 이방민족을 박살낸다. 이 해석에서 여러분, 뭐가 빠졌지요? 어떤 게 빠졌습니까? 신약이 빠졌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게 뭔가 빠졌다는 생각을 그들이 가질까요? 안 가질까요? 안 갖지요. 왜? 하나님이 주신 꿈으로 이미 자족하기 때문에. 지금은 힘들지만, 요 약속이 있잖아요. 힘들지만, 언젠가 교만한 이방민들 작살낼 거고 여호와가 찾아와서 우리를 치료해 줄 거고. 그 희망이 있으니까 이게 개미에요. 겨울 되면. 그러니까 모든 것이 다 뭉개지는 겨울이 오면 이방민족은 겨울을 대비 못해서 망하더라도 우리는 미리 말씀으로 준비한 우리는 산다. 라는 그 희망이 있으니까 그 어려운 여름날에 힘들게 개미가 일하듯이 우리가 버텨낼 수가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 이 문제점 무엇이 문제인지 찾아내야 돼요. 찾아내는 아이디어는 어디에 있느냐, 여기에 있습니다. 둘째가 첫째 되고, 첫째가 둘째 된다.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첫째가 둘째되고 둘째가 첫째 된다는 것은 신약성경 마태복음21장에서도 나오겠지만, 마태복음 찾지 말고 구약에서 찾으면 어떤 대목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먼저 신약의 대목을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신약의 한 대목을 하겠습니다.

마태복음21장28절~31절,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나중에 뉘우치고 갔느니라.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그럴 때 제자들이 둘째아들이니이다. 얘기했어요. 둘째 아들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야기할 때는 구약을 다 전제로 하고 깔고 이야기하신다는 것을 여러분이 생각하셔야 돼요. 구약 성경뿐만이 아니고 구약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그 당시 유대민족까지 고려해서 이 말씀 주신 거예요. 그러면 첫째는 누가 되겠습니까? 방금 제가 지금까지 설명한 말라기 선지자가 우리를 살려주러 오시는 말씀 줬다, 하는 그게 첫째가 되겠지요.

그러면 둘째는? 유대인들한테는 둘째는 없어요. 왜? 자기가 자기로서 전부에요. 자기 빼고는 전부 하나님의 교만한 자고 적들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에게 밟힐 거예요. 자기뿐이에요. 하나님은 이 이스라엘 백성만 이 약속이라니까요. 첫째, 둘째 차이가 없어요. 그냥 우리만 아들이고 나머지는 아들 아니에요. 종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아들을 미끄러지게 했지요. 첫째 아들 같았는데 어쩌줄 죽 미끄러져 가지고 없다고 여겼던 어떤 아들? 둘째 아들 나왔지요. 둘째 아들이 거기서 왜 나와? 유대인들은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둘째 아들이 왜 나와? 우리가 전부인데.

이유가 있어요. 그 할례를 받고 할 때 맏아들 중심이잖아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은 맏아들 중심이에요. 복이 맏아들한테 간다고요. 대표적인 것이 뭡니까? 아버지 이삭이 복 줄때, 맏이한테 주잖아요. 그렇지요. 이사야45장에 너희는 내 아들이라. 그 다음에 내 장자라. 하나님이 너희만, 여수룬만 택했다. 너는 나의 택한 종이다. 이미 확정을 냈다 말이죠. 확정을 냈으니까 이방민족이라 하는 것은 나를 규정할 수 있는 하나의 적에 불과해요. 그들이 잘라지고 그들이 지옥감으로서 비로소 내가 규정이 되는 겁니다. 지금껏 설명한 것처럼. 우리는 그런 존재에요. 짝을 찾고 찾고 짝을 얻는 것은 내가 어떤 존재인 것을 규정하기 위해서 그렇게 짝을 찾는 거예요.

신약에서 예수님의 뜻은 이것 밖에 없어요. 제발 너를 규정하지 말라는 거예요. 제발 너를 규정하지 마! 너는 규정할 자격이 안 된다는 겁니다. 이거 아셔야 돼요. 이거 알아야 진짜 왜 나의 의가 있을 이유가 왜 필요 없는지를 아시는 거예요. 주님의 의만 있으면 되지 나의 의를 왜 갖고 있어야 합니까.

나의 의가 없다고 그렇게 슬퍼할 하등의 이유가 없고, 오히려 내 의가 없다는 것을 날고 기쁘고 춤춰야 될 일이에요. 주께서는 나의 의를 안 받아요. 뭐 듣는 사람은 기분 나쁘겠지만, 듣는 사람이 기분 나쁜 이유는 뭐냐, 그럼 도대체 나는 나한테 의미가 없다는 말은 그럼 나는 하루, 하루 무엇 때문에 살아가지? 왜 나에게 사는 이유를 제공하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화를 낼 수 있는데 진실은 그거에요. 진실은 니 의미, 니 가치,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나는 너를 니가 소환하지 말라.

소환하게 되면 타자가 필요해요. 타자가 필요하고 가까운 친구가 필요하고, 가족이 필요하고요,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데?” 묻지 않더라도 그게 궁금해서 만나고 싶어요. 그게 궁금해서. “나,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 거야?” 친구야 이야기 좀 해 봐라. 내 제대로 하고 있는 거야? 아이, 니 의견가지고 안되겠다. 다른 친구만나야 되겠다. 계속해서 그런 경우의 수를 늘여가면서 보다 뚜렷한 나 모습이 내가 지금 어느 자리에 있는지 내 뿌리가 뭔지를 규정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말라기에서 아까 했지요. 주께서 뭐를 확 빼버립니까. 뿌리째 뽑아버려요. 니가 왜 너를 규정해? 내가 있는데. 니가 그렇게 니가 궁금하냐 말이야. 니가. 그래서 아버지의 뜻대로 갔느냐 물으니까 둘째 아들이 있다가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이르노니 둘째아들이라 했거든요. 진실로 이르노니 세리와 창기가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먼저 들어간다. 둘째가 앞서고 첫째는 뒤쳐진다.

그 다음에 32절에 보면,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유대인들이 짝을 찾지요. 무슨 짝? 자기 잘남을 확인하기 위한 짝을 찾지요. 짝을 찾을 때 동원된 것이 세리와 창기였던 겁니다. 주님께서 그걸 이용한 거예요. 세리와 창기를 천국가는 사람으로 임시로 만들어버렸어요.

그 말은 비교대상이 누가 봐도 이건 저주받고 지옥간다는 사람을 내 천국간다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호출, 호명해서 불렀다면 니가 그 하는 짓거리에 의해서 니가 반대로 뒤집어질 것이다. 특히 32절에 요한이 나오지요. 요한은 세례요한을 말합니다.

요한복음1장 봅시다. 1장 보면서 여러분에게 질문 들어갑니다. 15절,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나보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섰다고 세례요한이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우리들이 그 당시에 세례요한은 그 당시에 주민으로서 세례요한이 만약에 같은 시대에 살았다면 세례요한한테 뭐를 듣고 싶은 거예요. 이게 제 질문입니다.

“자, 세례요한은 선지자다. 선지자.” “그래, 그 사람이 뭐라고 이야기하던데?” 할 때, 우리가 그 사람 만나기 전에 우리는 세례요한을 만났을 때 궁금한 것을 묻고 싶을 때 어떤 질문지를 가지고 세례요한을 만날거냐 말이죠. 설마 이런 사람 없을 거예요.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 누굽니까?” 이 질문을 할 사람이 있었겠어요? 없었겠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오류에요. 이게 오류라고요. 나를 내쳐달라. 나를 내쳐주시는 분을 우리가 만나기를 원하지 않고 있는 거예요. 내가 항상 내가 먼저이기를 원하고 있는 거예요.

왜? 우리는 평소에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아왔었기 때문에. 누굴 비교하던 나의 의미와 나의 가치를 보장해줄 사람을 보증하고 보장해 줄 사람을 찾는 겁니다. 그런데 무서운 일이 벌어졌어요. 뭐냐 하면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세례요한이 나보다 먼저 계신 자라 했잖아요. 그럼 오늘 말라기 4장에서 누가 오느냐 하면 말라기 4장에 보면 엘리야가 온다 했잖아요. 4장 5절에. 엘리야가 오지요.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뭐라고 규정했습니까? 엘리야라고 이야기했지요. 참, 어려운 이야기에요. 엘리야라고 규정했잖아요. 엘리야가 오신 세례요한이 한 말이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라고 하는 거예요.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라고 요한복음1장에서 이야기했지요.

그렇다면 이 말라기 선지자를 봤던 그 당시 유대인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은 진짜 엘리야, 진짜 말라기가 예언한 세례요한의 그 시간개념을 그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지요. 우리는 기다렸던 거예요. 그러나 세례요한은 거꾸로 가는 거예요. 시간을 거꾸로. 자신이 너무 빨리 왔다는 거죠. 예수님보다 너무 빠르게 왔다는 겁니다. 빠르게 왔다는 그것이 바로 오해의 소지를 유발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항상 모든 인간으로부터 제일 뒤에 오시는 거예요. 우리는 태어났지요. 앵~ 태어날 때부터 성령 받았습니까. 아니지요. 바로 태어나서 나중에 성령 받지요. 나보다 앞선 분이 내가 태어난 이후에 오시는 겁니다. 왜? 우리가 잘못된 뿌리로 전제로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뿌리에 대해서 말라기에서는 뭐냐, 뿌리째 뽑혀야 될 뿌리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뿌리째 뽑혀야 돼요. 우리는 내 육신의 고향, 육신을 뿌리고 삼고 있었습니다. 아담의 뿌리가 우리의 영원한 고향인 줄 알았습니다. 주께서는 그 뿌리 이전의 뿌리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말라기 내용이었어요. 세례요한이 외치는 그 내용. 이렇게 어려운데 그 당시 유대인들이 알 수가 없겠지요. 이스라엘이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방금 신약에는 이렇게 되어있잖아요. 구약에도 이미 나옵니다. 어디 나오느냐 하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산에 잡아 죽였다고 되어있잖아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먼저 태어나게 했습니까? 아니면 두 번째 태어나게 했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을. 아브라함 가정에서. 나중에 태어나게 했지요. 첫 번째 태어난 것은 뭐냐 하면 이스마엘이었습니다. 이스마엘 태어나고 이삭 태어나게 했어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의 시작, 또는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 시작은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죽음입니다. 그것도 니 손으로 죽여라. 지금 이 이삭에 대해서 아브라함의 태도는 무척 너무 너무 사랑해요. 이삭을. 이스마엘은 죽든 말든, 이스마엘은 죽든 말든이 아니고 아예 어떻게 했습니까. 내어쫓아라 했지요. 이스마엘을 내어쫓아버렸어요. 그 정도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사랑했습니다. 이삭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 거예요.

이것은 아까 강의한 것처럼 하나님이 나한테 어떤 존재인가를 이삭을 보면서 아브라함은 지금 정리하고 있어요. 이삭을 보면서 자기의 거울이고 이삭 또한 자기 자신을 되비치게 만드는 겁니다. 사랑의 관계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줄 뻔히 아시면서, 특히 성경에 이르기를 아브라함이 노년에, 노년에 라는 말은 자기가 곧 죽는다는 뜻이에요. 노년에 곧 죽더라도 아브라함은 후회없이 살 자신이 있었던 것은 누구 때문에? 이삭 때문에. 이삭 때문에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나이가 99세 때 노년 때 아들을 준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줌으로서 아브라함은 자기가 은퇴해도 내 자식, 하나님이 인정한 자식이 있으면 아브라함 나는 이삭이 나를 대신해서 산다, 가 되는 겁니다. 산다. 왜냐하면 이삭이 나의 대체물이니까. 이삭이 살아있으면 자기도 살아있는 거니까요. 비록 죽어도 이삭 안에 자기가 있으니까 산다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했겠어요. 그런데 황당한 일이 벌어졌지요.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이되, 그냥 이삭을 번개쳐서 죽이는 게 아니고 니 손으로 이삭을 죽이라고 한 거예요. 이삭을 죽여라. 그러면 니 손으로 이삭을 죽여 버리면 이삭을 죽인다는 말은 아브라함을 노년에 대신한 이삭이 분신이거든요.

분신이 죽는다는 말은, 이삭이 죽는다는 말은 본인도 역시 죽는다는 말이에요. 도대체 여기서 납득하기 곤란한 것은 도대체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여! 하나님의 뜻과 나는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과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그런 의문점이 발생되지 않을 수밖에 없어요. 그걸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뭐냐 하면, 니가 신앙의 세계에 들어왔느냐, 신앙밖의 세계에 그대로 머물러 있느냐를 하나의 잣대로 사용하겠다는 겁니다.

신앙 안에서 사느냐, 아니면 신앙 밖의 인물인가를 기준으로서 제시한 것이 내 손으로 나의 대체물인 이삭을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죽이고자 하는 거예요. 죽음에 죽여 버리는 거예요. 이것이 신앙의 기준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뭐냐 하면 신앙이란 나는 곧 뭐다? 나는 곧 죽음이다. 신앙이 뭐냐, 나의 죽음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거예요. 신앙이에요. 내가 곧 죽은 자라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 죽음은 둘이 되겠지요. 내가 늙어 죽는 게 있겠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늙어죽음을 신앙 안으로 들어와서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 거예요. 신앙 안에 들어와서. 지금 아브라함과 이삭은 한 몸이에요. 한 몸입니다. 이삭을 잡는 것은 곧 아브라함 자신을 잡는 거예요. 내가 자살하는 게 아니에요. 아브라함이 자살하면 안돼요. 왜냐, 자기의 분신 같은 이삭이 살아있으면 제대로 안 죽은 게 되니까. 나의 분신인 이삭, 내 몸에서 난 이삭을 내가 죽임으로서 나의 죽음을 완성시켜 나가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이게 신앙이에요. 나는 곧 죽음이다. 한 마디 더한다면 나는 살아있는 죽음이다.

아까 강의한 것과 연관시키면 나는 죽음 앞에서 짝으로 할 때 나는 규정된다. 나는 십자가 앞에서 규정되는 거예요.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 죽음 앞에서 나는 규정되는 거예요. 내가 누구다 하는 것을.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서. 내가 비로소 규정이 되는 거예요.

이리 되면 어제 수요설교 한 것처럼 강도 만나 자 앞에서, 강도 만난 자가 뭐를 호출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을 요청하고 호출하는 똑같은 방식이에요. 사건은 터졌어요. 강도 만난 사건. 그 사건이 있어줘야 선한 사마리아인이 이웃으로 성립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방식에 대해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어떻게 됩니까. 거부하지요. 거부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주님도 거부했어요. 이 방식에 대해서. 주님은 뭐냐 하면 이 잔을 안마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버지. 이 맛을 이 잔이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습니까? 이리 한 거예요. 이 잔이 뭐냐, 자기에게 죽음을 초래하는 잔이에요. 수요일에 표현한 것이 뭐냐 하면, 재귀. 스스로 자기가 쓴 잔을 마시는 거예요. 쓴 잔을.

일반인들이 못하지요. 할 수가 없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해놓고 그 다음에 너희들도 이 잔을 마시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마시게 해 줄게. 그 때는 너희 잔을 마시는 게 아니고 내 잔을 마시는 거예요. 우리가 우리 잔을 마시는 게 아니고요. 예수님의 아버지한테 그 버림받은 그 죽음의 잔을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넘겨줘서 마시도록 해주시는 겁니다.

자, 첫째시간 마치면서 둘째시간에 뭘 해야 되느냐, 이거 해야 돼요. 그걸 할 때에 마시는 나의 죽음이 뭐냐, 자살하느냐, 높은 데서 뛰어내리느냐, 아닙니다. 뭘 부수느냐, 거울 다면체를 부셔버려요. 주께서는. 그동안 내가 나라고 규정했던 공동체가 나를 되비치고 내가 비추고 싶은 거울 공동체를 주께서 박살냅니다. 그 박살내는 그 기간이 고 시기를 가지고 신약이라고 해요. 신약.

어떤 내용인지 아무래도 10분은 쉬어야겠지요. 10분 쉬고 하겠습니다.

 

 

안양20231017b말4장2절(파괴와 치료)-이 근호 목사

공동체는 나의 무한 반사체에요. 한 번 반사하는 게 아니고 주고 받고, 주고 받고, 무한하게 계속 반사하는 겁니다. 그럼 이 공동체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가정입니다. 가정, 교회, 군대, 학교, 국가, 사회, 직장, 다 공동체입니다. 특징이 뭐냐, 아무리 공동체라도 특징이 있어요. 사람은 사람만 만난다. 사람은 사람만 만난다. 사람 넘어 생각할 줄 몰라요. 사람 넘어. 사람 넘어 그런 게 있어? 사람 넘어는 생각 안 해요. 누굴 볼 때 사람만 만나요.

여기서 형성되는 게 뭐냐, 공동체에서 형성되는 게 뭐냐, 여론. 연예인들, 정치인들 이야기하면 전혀 마음에 상처가 없어요. 그런데 그 여론가운데서 “너도 그 현장에 있었잖아.” 갑자기 나를 끄집어내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맹붕이 옵니다. 밥을 못 먹어요.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나 거기 현장에 없었어. 알리바이 막 세우면서. 왜 그 말속에 나를 끌어당기는 거야. 이런 식으로.

내가 타인을 평가할 위치에 있으면 되지, 누구로부터 평가 받는 것은 이건 용납이 안 된다. 적극적으로 거기에 막 반박하고 자기 견해를 이야기하고 변명하고 그건 잘못 생각한 겁니다. 가자지구에 병원 부서진 거 하마스가 폭발했지, 이스라엘이 쏜 게 아닙니다. 이게 뭐냐 하면 공동체에요. 무한 반사체거든요.

그래서 튕겨나온 게 나한테 오고, 내게 온 그 튕겨서 내가 이야기하고, 공동체가 여기 있으면, 내가 여기 있으면, 이건 화살이 양궁 경기장 이상이라. 주고받고, 주고받고 막 쏘는 거예요. 예수님도 화제인물이 되었어요.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그 시대에 화제의 인물로 스스로 자진해서 그 쓴 잔을 마셨던 겁니다.

여러분, 이걸 깜깜한 수중이라고 봅시다. 캄캄한 깊은 바다에. 수중에. 저는 그걸 본 적은 없지만 영화에 보면 나와요. 수중에 깜깜할 때 뭐로 하면 밝게 하지요? 조명탄. 푸시 푸시식~ 해가지고. 조명탄 해버리면 깜깜한 깊은 바다 속에도 순간적으로 짧게나마 밝아지지요. 요새는 그게 있어요. LED가 있어가지고 요새는 해녀들이 LED로 살핀 답니다.

예수님께서 수중 조명탄 역할을 하는 거예요. 불꽃 조명탄으로 찌지직 타 들어가면서 불빛 나잖아요. 불꽃을 태우리라~ 불꽃을 태우리라. 누가? 우리 주님께서. 깜깜한 세계에 불꽃을 튀우는 거예요. 나는 곧 세상의 빛이요, 무슨 뜻입니까? 너희들이 평소에 살아가는 것처럼 짝을 구할 때, 나는 무엇이다 라는 것은 너희는 이렇다고 규정하고 싶지. 타인을 규정함으로서 나를 확인하고 내가 누군지를 정립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왜 힘드느냐, 사람이 왜 자꾸 사는 게 힘드느냐, 이유는 단 한 가지. 나를 구성하고 싶어서 그래요. 나를 구성하고 싶어서. 내가 누군지를 자꾸 구성하고 싶은 거예요. 안 해도 되는데. 할 필요 없는데. 이미 우리의 짝이신 주님께서 이미 우리를 말씀으로 규정을 해놨는데. 왜 우리가 따로 내가 누군가를 구성을 하려고 시도를 하려고 하느냐 말이죠.

사도행전26장에서 사울이란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들, 체포하려 했어요. 왜 체포했느냐, 이단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단이기 때문에.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예수를 잡는 것은 진짜 살아계신 여호와 앞에서 마땅한 도리고 그게 한 영광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면 그 일을 하면서 뭐가 규정되겠어요. 나는 누구 편이다. 진짜 하나님편이라고 규정하고 싶지요. 그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서셔 하시는 말씀이 “야, 니 참 힘들게 산다. 니 참 고생이다.” 규정은 예수님이 하는 거예요. 왜 예수님이 할 일을 내가 주제넘게 내가 내 규정을 내가 끼어들고 왜 내가 하는 겁니까? 그러니까 사는 게 힘든 거예요.

달리 말해서 나를 따로 생각하려는 것. 이게 문제다. 나를 따로 생각해 논 이게 문제다. ‘그럼 자기 따로 생각하면 어떤데? 뭐. 해도 되잖아.’ 이리 나올 거죠. 왜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되느냐 하면, 이것이 망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이게 얼마나 반칙이에요. 세상은 다 망하게 되어있는데 자기를 따로 규정하려 한 거예요.

아까 첫째시간 끝날 때 이야기했지요. 세상의 모든 공동체를 아주 박살내고 무너뜨리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약 성경이 있는 이유입니다. 마태복음24장 봅시다. 마태복음24장 보기 전에 말라기4장3절,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4장1절에, 지푸라기 같이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다. 그렇게 되어있지요. 그렇게 보시고, 마태복음24장을 봅시다.

마태복음24장1절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이리 시작하지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마태복음24장 전체를 죽 훑어보세요. 무슨 이야기입니까? 재난 이야기고, 재앙 이야기고, 자연이고 인간이고 전부 다 작살나는 이야기 맞지요. 그런데 이 작살나는 모든 이야기가 어디서부터 시작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부터 시작돼요.

성전은 소실점입니다. 소실점이라 하는 것은 그림에 보면 가로수 그림 그릴 때 가로수가 좍 있더라도 결국은 뭡니까? 점으로 끝나지요. 그 점의 위치가 성전의 위치에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망할 때 뭐부터 철수했습니까? 자기 이름이 있는 성전부터 먼저 철수시켰습니다. 그 다음 이스라엘 백성을 전 세계에 전부 다 흩어버렸지요. 그 성전 위치가 소실점이에요. 주께서 성전을 떠나버리면 세상은 끝나버리는 겁니다. 그 말은 성전이 있으면 세상을 심판하지 않고, 성전이 떠나버리면 하나님께서는 그 다음 부터는 작살내고.

성전이 없는 세계는 하나님과 땅의 연결점이 없기 때문에 없애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예수님 시대에 성전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성전이 없어요. 가짜 성전이에요. 하나님이 있는 성전이 아니고 헤롯이 인심을 얻기 위해서 막대한 건축 사업을 일으켜서 세운 성전입니다. 누구의 환심을 얻기 위해서? 성전을 오기를 기대하는 언약대로 다윗왕이 오기를 기대하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환심을 사서 그 핵심, 너희들의 모든 희망에 구심점 자리에 나 헤롯왕이 있다는 것으로 거기다가 자기를 포함시켜서 나라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정치적 술수가 바로 성전 짓는 거예요. 무려 46년동안이나 지었습니다. 그래도 다 못 지었어요. 지금 남아있는 것이 지금 통곡의 벽이 남아 있잖아요.

그런데 마태복음24장2절에 보세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린다. 성전의 돌 하나가 다 없어진다는 말은 성전이 없어지는 거예요. 그럼 성전이 없어지게 되면 이 세상에 있어야 될 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의미 없으니까요. 아무 의미 없으니까.

그런데 그 뒤에 보면 어떤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3절부터 해가지고 6절에는 난리도 아니지요. 7절에 민족이 대적하고 전쟁이 일어나고 기근이 있고, 8절에 이 모든 재앙은 시작에 불과하다. 그 때 사람들이 너희들을 잡아주겠고, 11절에 거짓선지자가 있겠고, 불법이 성하고, 죽 나오지요. 그 다음에 15절부터 죽 보게 되면 나중에 유대인은 산으로 도망가고 안식일에 큰 환란이 일어나게 되고, 그 때 거짓선지자들이 등장해가지고 내가 메시아라고 올 것이고, 28절에 시체 있는 곳에 독수리 모일 것이고, 그 때 29절에 하늘에 있는 해와 달과 별이 와장창 다 떨어질 것이고, 구름타고 그 때 올 것이고, 무화과 나무가 여름이 온 것처럼 그 때 인자가 가까이 온 줄 내가 이야기하고, 37절에 보면 이 때가 뭐냐, 노아의 심판과 같은데 38절에 노아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갈 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다가 갑자기죠. 갑자기. 깨닫지 못했는데 갑자기 왔지요.

40절에 두 사람이 밭을 갈고 있을 때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림을 당하고, 41절에 맷돌질할 때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림 당하고, 48절에 동료들 때리며 술친구 더불어 마실 때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때 주께서 찾아오신다. 라고 이야기 한 거. 이게 뭐냐 하면 나의 무한한 반사체가 거울 깨듯이 쨍그랑하고 모든 것이 다 깨지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들은 하나님보고 사는 게 아니고 세상 보고 살아왔다는 거예요. 세상 보고. 세상 보고 이야기 걸고, 그들의 답변을 듣고, 세상과 그 안에 사는 같은 인간들끼리 산 거예요. 인간들에 의해서 규정 받는 나. 인간들에 의해서 평가받는 나. 인간들에 의해서 인정받는 나. 그게 바로 나일 것이라고 여기면서 줄 곳 지금껏 살아오고 있습니다. 상대하는 것은 사람하고 상대하는 것 외에는 그 누구도 상대할 줄 모르면서 살아왔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 세상의 내게 필요한 것은 나의 보조를 위한 거울들이에요. 반사체. 나의 반사체. 그래서 그들이나 나나 똑같은 사람들이에요. 다를 바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에요. 적들도 세상 보고 살고, 나도 적이라고 욕하는 나도 세상 보고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저 사람은 부모를 잘 만나서 저리 됐다면 나는 좋은 부모 만나서 잘됐다고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환경들이지요. 자기를 좋게 보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해석이라는 것은 자기가 보고 있는 그 세계 안에서의 반사된 의미만 주고받고, 주고받고, 튕겨 나오고, 튕겨 나오고, 튕겨 나온 반사된 의미만 있다가 얘가 한 10살 되어서 골목 밖으로 나가면 그 커진 세계에서 주고받고, 주고받고, 그 말 듣고 나는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나이 한 40되면 40살까지 만났던 모든 사람, 만났던 모든 것과 주고받고, 주고받고 하면서 그것이 나를 보존하는 거울로서 활용하면 살아온 겁니다. 이걸 간단히 말해서 식언 없다고 하는 거예요. 철없다.

세상 너머를 몰라요. 세상 너머를. 그럼 성도가 뭐냐, 성도는 이렇게 규정할 수 있어요. 성도는 인간에게 들어있거나, 나올 수 없는 게 있는 사람. 그게 성도에요. 나올 수 없는 게 있는 사람. 성령이 있는 사람이 성도지요.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이 성도에요. 인간에게 나올 수 없는 거예요. 내가 찾으려고 해서 얻는 게 아니고 그 너머에 있는 것. 거울 반사체 너머에 있다.

거울 반사체 너머에 있다는 말은 나는 그 분에게 말을 걸지도 않고, 걸고 싶지도 않고, 걸 마음도 없고, 그런 마음이 있었는데, 그 분 저쪽에서 나한테 말을 건네 왔을 때 이 세상에 없는 것이 우리 안에 들어온 바가 된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너는 바로 죽음이다.”

너는 주안에서 이미 죽었다는 사실이에요. 이 언약 안에서 이미 죽은 자라는 사실을 통보해주지요. 아브라함에게 언약 없으면 아브라함에게 자식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죽이라, 이 말은 너 자신을 알라는 거예요. 니가 자식 없던 너 자신으로 니가 한 번 되돌아가 봐라. 그 때 저 자식은 너를 위한 자식이 아니라 니가 나를 내가 누구냐를 알리기 위한 자식이 아니라 자식을 주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리기 위해서 그 자식을 줬고, 거기에 니가 죽음으로서 참여하게 된 너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기 들어오게 되었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이 자연이 멸망하고 세상이 멸망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습니까? 우리 가정을 박살내주시는 이 친절함, 우리는 눈물 흘려도 모자랍니다. 그동안 우리는 가정을 얼마나 의지했습니까? 가정이 있어야, 이 가정이 내 고향이고, 이게 있어야 내 잘남과 내 의미를 내가 지켜왔잖아요. 사정없이 그걸 박살내주시니 이런 고마울데가.

마태복음24장을 다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성전이 떠남으로서 세상은 더 이상 유지할 아무런 근거도 이유도 없게 되었다는 것이에요. 성전이 떠남으로서. 이 말은 뭐냐, 성전이 있었을 때는 하나님과 인간이, 주의 이름과 인간이 서로 주고받고, 주고받고, 대화가 됐었어요. 대화한다는 말은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이 계속 제공되었다는 뜻이에요. 새롭게, 새롭게 제공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의 계명은 어디까지 제공됩니까? 인간이 있던 이 거울반사체, 공동체 이 세상이 멸망할 때가지 주께서는 멸망의 근거로서 자신의 율법을 계속해서 주어진 겁니다. 그 중에 주어진 것 중에 하나가 말라기. 멸망하라고 주신 거예요. 멸망하라고.

그런데 유대인들은 잘못 생각해서 우리 빼놓고 멸망한다는 거예요. 우리 빼놓고. 우리 빼놓고 멸망한다는 겁니다. 신약 성경 있습니다. 신약성경 아까 마태복음24장 보니까 여기에 작살나는 이방나라에게 작살나는 그 환란을 받는 그 자가 누굽니까? 여기. 이게 바로 유대인이잖아요.

예루살렘에 사는 거주민자. 그 당시에 하나님을 믿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그 사람들이 여기에 작살나는 거예요. 자, 그러면 이방인적인 입장에서 세상이 멸망했다는 것을 어디서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멸망을 보면 세상 끝났네. 끝났어! 이스라엘 백성 당했다 하면 다른 민족은 이건 뭐 더 이상 건질 게 없습니다. 아~ 주께서 이미 심판이 시작됐구나!

마태복음24장 32절에,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깝다. 이 말은 이스라엘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징후를 제공하는 무화과나무로 사용하셨다는 겁니다. 34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저와 여러분이 이 마태복음을 보고 있으면서 어떤 마음입니까? 어떻게? 어떤 마음입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보고 계세요? 즐겁고 신나는 마음으로 지금 보고 계십니까?

35절에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않는다. 지금 그렇게 보고 계십니까? 37절,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인함도 그러하리라. 노아의 때도 우리는 경험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알지요. 다 물에 잠겼다는 것. 물에 잠길 만큼 그들이 그만큼 나쁜 짓을 했는가, 그건 우리 소관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노아를 보내준 그 자체가 노아를 빼놓고 다 죽이겠다는 뜻으로 노아에게 언약을 줬거든요.

따라서 성도는 언약이 있고, 성도 아닌 자에게는 언약이 없다면 성도의 출몰, 성도의 등장 자체가 세상이 멸망했다는 징후가 되는 겁니다. 징후가. 여러분들이 거기에 대해서 자부심을 한껏 가져도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아까 수중 깜깜한 수중에 빛이 나는 LED조명등 또는 조명탄, 조명등은 그냥 멀쩡하지만, 조명탄은 불꽃을 태우리라~ 하잖아요. 자기가 산화되면서 주변에 불빛을 피우는 조명탄 같은 그런 존재가 성도입니다. 예수님이 그랬었었으니까요.

지금 우리가 지금 말라기를 보면서 설명 안 한 게 하나 있어요. 그게 뭐냐, 치료가 무엇이냐. 치료. 치료는 이게 치료입니다. 누가 심판하느냐, 아는 게 치료가 되어버려요. 누가 심판하느냐. 누가 심판을 알아야 왜 무엇 때문에도 같이 나타나는가, 시편2편 한 번 봅시다.

시편2편9절이요,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너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이건 말씀을 보는 거 하고, 혹시 여기에 남아도는 질그릇 없지요. 펴놓고 이건 뭐 망치로 때리면 좋고, 발로 밟아야 실감나겠지요. 아그적, 아그적 다 밟아 깨뜨리는 겁니다. 이 뜻은 뭐냐,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다 박살 내는 거죠.

사람이 그 밟히고 깨지는 밟힘의 대상이 되는 인간이 밟는 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못하지요. “왜 저를 때리십니까?” 이리 나오지요. “왜 저를 밟으십니까?” 이리 나오지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말라기를 이해 못하는 거예요. 그건 자기 빼놓고 이방민족 박살내는 것은 박수쳐요. 역시 여호와는 여호와다. 역시 하나님은 우리 편이다.

그런데 신약에 오면 그게 아니고 그게 바뀝니다.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바뀌어요. 먼저된 자가 나중 되어버려요. 짝을 잘못 골랐어요. 자기를 옹호한 짝을 고른 게 문제에요. 이 개미의 문제에요. 개미가 짝을 베짱이를 고르면 안돼요. 개미보다 더 고생하는 곤충을 짝으로 삼아야 됐어요. “그것도 고생이야?” 하면서 막 혼내주는 자기보다 더 높은 온도에서 고생 더 많이 하는 그러면서도 겨울을 대비하는 게 아니고 그러면서 돌아가신 분. 그런 분을 짝으로 삼아야 돼요. 개미가.

그래야 내가 노력한다는 것이 나의 의가 얼마나 흉측한 교만이고 죄가 되는지 우리는 뿌리째 뽑혀야 될 대상인 것을 알아야 돼요. 신약에서 주님께서 공동체를 부술 때에 그냥 부수는 게 아닙니다. 그건 천사한테 맡겨도 괜찮아요.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천사한테 맡겨서 박살내는 것은 계시록이야기고요. 요한계시록 되기 전에 무슨 일이 먼저 셀프(재귀) 스스로 자기가 자기한테 쓴잔을 마셔버립니다. 내가 먼저 깨질게. 됐냐? 이게 신앙이야. 죽음의 사람 될게. 그런데 무서운 것은 그 죽음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죽음으로 전환된다는 것. 그 안에 죽음 안에만 생명이 있었던 겁니다. 죽지 않고서는 생명이 없었고, 죽으니까 생명이 있는 거예요.

누구든지 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그게 바로 생명이다. 예수님이 그 말씀 하실 때에 따른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도 이미 나옵니다. 구약 시편에 보게 되면 2편에 어찌하여 이방민족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어찌하여 관원들이 나서며, 이방민족입니다. 그 다음에 뭡니까? 여호와와 그의 뭐를? 기름 부은 자를 대적하게 되어있어요.

여러분들이 성경을 볼 때에 편하게 보는 방법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니고 주께서 지금 잘 추진하고 있는 주의 살아있는 추진력이 여기에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비쳐나오는 거예요. 이걸 내가 지킬거야. 하지 말고 지금 이대로 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라는 겁니다.

그럼 지금 현재진행형이 되려면 이 세상은 망가져야 될 주님에 의해서 망가져야 될 무대가 되지요. 여기에 나오는 거 보면 등장인물이 여호와와 그 다음에 기름 부음 받은 자.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나오지요. 그러면 우리는 성도는 여기에 주목하면 되는 거예요. 내 하는 일은 아무 신경 쓸 필요 없고, 주께서 하는 일에 주목하면 돼요.

이 분이 하는 일은 뭐냐 하면, 4절에 나와요. 비웃는 겁니다. 비웃었어요.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라. “뭐? 너희들이 뭐를 시도해?” 기름 부은 자와 여호와의 이어져 있는 것을 우리가 가위로 끊어버리겠다. 관계를 끊어버리겠다. 라는 것을 니가 시도하지요.

자, 이들이 관계를 끊어버리게 되면 무엇이 성립이 안되느냐 하면 말라기가 성립이 안돼요. 아까 어려운 이야기 다시 한 번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도 먼저 계신 분입니다. 말라기가 먼저입니까? 예수님이 먼저입니까? 예수님이 먼저지요. 세례요한보다 예수님이 먼저 계신 거예요.

그러면 말라기 나온 내용은 이미 말라기의 말씀을 주고 실천에 옮기는 게 아니고 그냥 이미 하나님이 계획한 바가 말라기 시대에는 말라기 식으로 나타난 겁니다. 그 시대에. 그런데 말라기4장 2절에 보니까,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춘다. 치료라는 말이 나왔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치료할 수 없는 지경에 빠져있다는 것을, 빠져있도록 하나님께서 그 지경으로 우리들을 몰아세웠다. 이리 되는 거예요. 내 신앙으로 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도록 주께서 그렇게 몰아세우신 거예요.

어제 여러분이 수요설교 들어서 후딱 지나간 이야기인데, 빨리 지나갔기 때문에 여러분이 못 들은 내용이 있을 거예요. 이것이 죄 맞지, 아니지 따지는 것도 이게 죄라는 거예요. 그걸 따져서 뭐할 건데요. 그걸 왜 따집니까? 앞으로 이런 짓은 다시는 안 하겠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겁니까? 그게 바로 나를 소환하는 거예요. 내가 나를 구성하는 겁니다.

관심사가 내게 있는 어떤 일도 사전에 주님께서 계획한 바가 그대로 나를 통해서 재현되는 것뿐이에요. 내가 고민하거나 내가 염려하거나 내가 걱정할 문제가 없습니다. 고민하고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 악마가 가위로 잘라버릴 경우에요.

하나님하고 예수님하고, 기름 부은 자하고 연결되어있지요. 그 다음에 주님은 기름 부은자, 메시아는 메시아하고 자기 백성하고 연결시켰어요. 왜? 그래야 요한일서2장에 보면 성도를 기름부은 자라고 하니까.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기름 부었으니까. 그러니까 악마는 딱 노리는 것이 그거에요. “니 인생 니가 알아서 해!” 이겁니다.

그리고 악마가 제공하는 재료는 뭐냐 하면 “봐! 다른 사람 저리하잖아.” 그 다른 사람이 뭐냐 하면 우리의 반사경. 공동체라는 반사경. 태어날 때부터 우리가 속해있던 여럿 사람들. 그 사람들은 어떻게 살며 나는 그 사람들 앞에 인정받으려면 나는 어떻게 처신해야 되고, 어떻게 공부해야 되고, 어느 정도 수입이 보장되어야 되고, 그래야 그 사람들과 대화가 된다. 그들의 구설수에 안 넘어갈 수 있고, 그들의 비난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부러워 하는 대상, 어떻게 하면 될까. 그걸 한결같이 하루도 쉬지 않고 그것만 신경 쓰면서 우리는 하루 하루를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렇지요.

“니는 독불장군 되어 니는 니 밖에 모르나?” 그 소리가 우리는 그렇게 싫어요. 두루 두루 배려하고, 두루 두루 고려하고, 남들로부터 나만 생각하는 소리를 그 서러운 소리를 안 들으려고 얼마나 양보 많이 하고 참고 견뎠습니까.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힘들었어요?

남들보기에 나는 이렇다,를 구성하기 위해서 얼마나 여러분이 노력해왔었습니까. 조금이라도 내 노력에 내가 아차 싶으면 가슴을 치면서 후회하면서 내가 나를 닦달내면서 ‘다시는 그러지 마! 그런 행동은 다시는 용납 안된다.’ 하고 다시 한 번 나를 부추기고 하루 일과가 온종일 하루 일과가 그 일밖에 더 있습니까. 없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모습을 보고 어떻다 했습니까. 1번, 대견하다. 2번, 기쁘다. 3번, 웃는다. 4번, 비웃는다. “이 시시한 너야! 왜 너의 시시함을 안 시시한 걸로 자꾸 구축하려고 하느냐” 이 말입니다. 너를 자꾸 살려보려고 애를 쓰느냐? 이미 죽은 자인데 죽은 자를 왜 자꾸 니 힘으로 살려내려고 하느냐, 그걸 누가 그렇게 가르치더냐, 마귀가 그렇게 바람을 잡았지요. 바람을 잡았어요.

우리는요, 우리가 살려버리면 온종일 뭐하느냐 내가 타인을 밟을 수가 없어요. 그럼 너무 잔인한 자가 되기 때문에. 너무 잔~인~한. 너무 좐인하잖아요. 시편2편9절이 너무 잔인해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죽이는 건 안 잔인하지만, 이건 깨뜨린다. 부순다. 너무 잔인한 행동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이런 메시아를 우리는 원한 적 없습니다.

마태복음24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활동은 너무 잔인해요. 인정사정 보지도 않고 박살냅니다. 성전 없다고 해서 그렇게 박살내고 있어요. 성전이 뭐길래. 하나님은 자비롭고 사랑이 넘치고 인자하시고 긍휼하시다면 왜 그렇게 밟는가.

여기서 하나님의 초점은 7절에 나옵니다. 시편2편7절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그 다음에 뭡니까? 너는 그 다음에 뭐지요? 내 아들이라. 여러분 속에 시편2편7절이 하나의 핫도그 안의 소세지처럼 나오기를 바랍니다.

내 아들, 내 아들이 내 안에서 자신의 활동 작업장으로 삼아서 자꾸 내 아들이 나오는 거예요. 내 아들이. 나 말고 주님의 아들이 나오는 겁니다. 이런 상태를 뭐라고 하느냐, 이런 상태를 치료라고 되어있어요. 치료. 그러면 우리는 주님이 주인공된 내 안이 나는 어떻게 삽니까. 파라사이트(parasite). 우리는 뭐냐 기생충이 되지요. 주님이 주인공이고 나는 기생충이 되어 살아가요. 기생충으로. 범사에 모든 일에 감사할 추임새만 넣으면서 장단 맞추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살아가는 거예요.

옛날 우리나라에 전래동화에 그런 게 있잖아요. 함부로 지 맘대로 하는 남편이 멋대로 하는 남편이 아내가 소 팔라고 장에 보냈더니만 장에 가가지고 뭘 가지고 왔느냐 하면, 뭐로 바꿔치기 했느냐 하면 썩은 사과 한 박스와 바꿔왔어요. 그래서 동네사람이 저 양반 이제 마누라한테 죽었다. 이리 했는데. 아내가 뭐라고 합니까. “아이구, 잘했어!” 이러고 있다고요. 그게 바로 <잘했군. 잘했어>에요. 하춘화의 <잘했군. 잘했어>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범주 안에서 그들의 공동체 안에서 주고받고, 주고받고 아는 게 그게 다에요. 같은 인간들끼리 사귀면서 정리정돈하는 거 있잖아요. 숙제한 것. 노트 필기한 거 그게 다에요. 그 너머에 대해서는 항상 주님께서 우리에게 숨기고 있었습니다. 왜? 그걸 알아버리면 내가 그것조차 아는 내가 구성되기 때문에 그걸 주께서 방해하시는 거예요.

기름부음은 연결이거든요. 이게 주님과 연결되어야 되지, 독립하면 안 되거든요. 독립은 누가 하느냐 마귀가 독립했지요. 자기 의를 챙기면서. 마귀가 독립했어요. 주님께서는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를 안 합니다. 마귀한테 우리가 속아 넘어가도록 그렇게 하지를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그전에 내가 내 식대로 살아왔던 모든 그 뜻대로 주께서는 못하게 만들어요. 왜? 그게 나를 구성해 왔던 그러한 방식이기 때문에 주께서 용납을 하지 않습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출애굽기15장26절에 나옵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하나님이다.

치료할 때 정신과 의사 앉아가지고 말 몇 마디 이야기하고 치료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공명촬영 있잖아요. MRI. MRI속에 밥 굶겨가면서 들어가서 치료하는 것도 있겠지요. 새로운 환경, 새로운 공동체, 환경을 주께서는 의도적으로 유발합니다. 왜냐, 그 환경 속에서 주님은 주님대로 드러나지만, 주님의 소위 백성이라는 자는 그들은 살 수가 없어요. 왜? 애굽에서 너무 질을 잘못 들었기 때문에. 고장난 거예요. 애굽에서 어떤 점이 고장 났느냐 하면, 애굽에서는 각자 자신이 정상적이라고 여기는 고장 난 사람들. 정신병입니다.

내가 정상이라고 여기는 정신병. 이거 환경 안 바뀌면 못 고칩니다. 고치기 위해서 너무나 애굽과는 관계없는 색다른 환경 속에 집어넣어요. 그 환경이 뭐냐, 죽음의 환경입니다. 죽어도 살리라, 하기 위해서는 죽음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죽은 속에 집어넣는다는 말은 내 식으로는 더는 못 산다. 라는 식의 삶의 환경에 집어넣습니다.

그건 뭐냐, 애굽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나는 영향껏 살아왔다. 그것이 몸에 베겼어요. 요렇게 하면 이렇게, 요렇게 하면 요거. 어려울 땐 누구 찾아가면 되고. 이러할 땐 누구한테 조언 받으면 되고. 자식이 말 안 들으면 무슨 박사? 사자머리 박사한테 가면 되잖아요. 그것처럼 이 세상에는 내가 원하는 걸 다 마련되어 있었고 나는 그걸 원했고 그들은 나를 호명했고. 손님으로서 나를 호명했고. 그렇게 그렇게 사는 게 우리의 그 결과물이 뭐였다? 결실물이 지금의 나였던 거예요. 나. 영어로 하면 I.

나가 세상이 만든 작품이란 말이죠. 그래서 내가 행여 또 말씀보고 내가 또 잘못된 길로 가는가 싶어서 교회 가봤다. 똑같아요. 별다른 거 없어요. 니나 나나 똑같아. 고만 고만한 거 하고 비교하고 경쟁했어요. 차이 났고, 서열 먹였고. 격차, 순서 정했고. 아무리 애써도 인간 너머를 벗어나지를 못했던 겁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있어요. “우리 살았다. 그치” “아이고, 큰일 날 뻔 했다. 그치?” 무슨 큰일 날뻔 했어요. 이미 태어난 자체가 큰일인데. 무슨 큰일 날뻔했어요? 죄인으로, 병든 자로, 환자로 태어난 거예요.

의사라 하는 것은 환자가 없으면 의사가 주님께서 의사로 오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차라리 자기를 환자로 여기는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보다 먼저 천국 가는 거예요. 왜? 그들은 겪었으니까. 자기가 스스로 살 수 없다는 환자인 것을 자각하고 있으니까. 딱 맞췄지요. 십자가의 의미를 딱 들어맞게 된 거예요. 강도만난 사람처럼요.

그런데 강도 만난 사람 지나갔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어요. ‘강도 내가 만났나? 니가 만났지. 그게 내 일인가, 나는 강도 안 만났어. 나는 바빠.’ 그냥 지나갔겠지요. 자기를 정상적인 아무 하자 없고 내가 생각해 놓은 내 대로 되어가고 있다는 데서 나는 문제없다. 왜? 세상이 바로 멀쩡하잖아. 그래서 치료가 되겠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치료를 어떻게 하느냐, 그들로 하여금 인솔합니다. 그들은 소풍가는 줄 알았지요. 원조. 가는데 보니까 애굽에서 살던 식으로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으로 가는 겁니다. 마땅히 그들이 고장난 티를 냈어요. 그게 원망이었습니다. 그봐요. 치료하잖아요.

그러면 광야로 가면서 이들에게 치료된 상태. 아, 이러면 치료됐다. 라고 광야에서 치료된 상태가 어떤 상태를 말할까요. “아, 치료 됐어. 정상이야.” 이런 상태가 어떤 상태였습니까? 그게 바로 희생 뒤의 상태. 희생 후의 상태.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그 민족은요, 홍해를 건너와서 지난 40년 지나서 다 몰살했던 그 선배들의 희생 덕분에 그들은 약속의 땅에 간 거예요.

먼저 건너 온 사람이 맏이라면, 둘째는 먼저 건너 온 사람이 실패했기 때문에 둘째가 들어가게 된 겁니다. 에서가 먼저 태어났지만, 축복 받는 것은 야곱입니다. 므낫세가 먼저 태어났지만, 할아버지 야곱으로서 복받은 사람은 에브라임. 둘째 손자였어요. 요셉의 둘째아들이었습니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당부합니다. 둘째가 되어야 된다. 그러면 첫째는요, 내가 첫째 될게. 예수님이 첫째 되고 예수님 피 흘린 걸 봐서, 저 피가 우리에게 생명이 된다는 것. 이게 바로 그 생명은 피를 인수받는 자가 둘째입니다.

왜 예수님은 피를 흘렸는가, 예수님의 피는 이런 의미에서. “나는 죽어도 이 땅에서 못산다.” 해서 흘린 피가 이 피에요. 예수님의 하신 모든 말씀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었건만, 율법의 완성을 그토록 싫어하고 미워하고 질타하는 이 악마의 세계에서 나는 더는 안 산다. 잘 있거라. 이 세상아! 내가 다 박살 낼 테니까. 나는 아들이야! 아들! 아들이 하는 일이 뭐다? 질그릇을 부수리로다. 하나님의 비웃음을 동반해서 비웃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철딱서니 없는 아무것도 모르는 그냥 애굽에서 애굽같은 이 세상 평생을 살은 우리를 주께서 율법과 율례를 가지고 우리를 이끄십니다. 자, 율법과 율례를 한약 다릴 때에 삼베가지고 짜잖아요. 요새는 불편해서 안하지만. 옛날에 우리집 할아버지 한약했다 하면 온 동네 다 나요. 냄새가 다 퍼지니까. 탕해가지고 짜잖아요. 어릴 때 그걸 보면 그렇게 제가 마음속으로 이게 아렸어요. 아무 약재가 식물이지만, 저게 짤 때 얼마나 아플까. 우리 할머니가 또 힘이 세요. 사정없이 짜버리는 거예요. 비비꼬아서 짜버려요. 짜니까 액체가 나와요.

주님께서 우리를 짜요. 소세지 나올때까지. 예수님의 생명의 피 나올 때까지 짜버립니다. 안 나오지요. 더 짜요. 그러니까 짜주신다는 그 자체 그것이 주님의 말씀의 성취라는 것.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짜듯이 주께서는 우리를 짜서 기어이 자기 것을 회수해 나가시는 그 예수님의 고집. 하나님의 그 열심. 우리는 그 대상자가 우리 성도라는 겁니다. 이게 신약 성도에요. 말라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말라기 그 치료하는 것을 바로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병든 나를 예수님께서 오셔서 피 발라주고 치료하는 것이 아니고, 그 쓴잔을 가지고 우리를 보자기에 싸가지고 피안에서 우리를 짜내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이 땅에서 무심코 하는 모든 일이 내 뜻대로 안됩니다. 뜻대로 되지를 않아요. 안되니까 우리는 뭐냐, 우리는 발악이 나와요. 그 발악 방법이 뭐냐, 그래도 내 친구보다 낫지 않느냐, 저 집안보다 나은 집안이다. 자꾸 자기 자신에게 어떤 기대와 희망을 못 놓고 내가 나를 구성하고, 내가 스스로 나를 그런 식으로 치료해 왔던 거예요.

주님의 치료방법하고 내 치료방법하고 달랐던 겁니다. 주의 작품이 아니라 내가 주의 말씀을 참조로 해서 신앙생활해가지고 내 신앙가지고 내가 구원하고자 하는 이러한 시도, 그건 이미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다 해왔던 겁니다.

그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는 다시는 조상의 잘못한 것을 우리 시대에서 후회하지 말자. 그게 그들의 모토였어요. 참 이게 요번에 교재를 거의 다 썼는데요. 그 교재 안에 내용이 지금 들어갈지 안 들어갈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인간의 꿈은 진화로 나타나는데, 진화는 없고 인간의 꿈은 변화밖에 없고, 이 변화가 뭐냐 하면 바로 역사가 돼요. 인간의 변화가.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은 말라기에서 뭘 찾았습니까? 역사라 했지요. 끝으로 이 말씀드리겠습니다. 말라기대로 온 엘리야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그 역사를 뒤집어버리지요.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 너희로 하여금 이렇게 망하게 했다는 것을 받아들여라. 더는 다른 기회는 없다. 내가 곧 왔다는 것은 내 뒤에 바로 먼저 계신 분이 오셔가지고 말라기 말씀대로 작살날 거다. 라고 그게 세례요한의 한계입니다. 곧 즉시 이 세상은 불로 멸망할 거라고 여겼던 것이 세례요한의 한계였습니다.

자, 그 한계가 다음시간에는 어떻게 바뀌어져야 되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다른 환경을 생각했습니다. 십자가 환경은 지식으로만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장 난 우리를 실제 주님이 활동하는 환경으로 바꿔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 입에서 고백이 될 때까지 주께서 선하고 바르게 사랑으로 은혜로 인도해 주신 그것에 대해서 어떤 상황이라도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안양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외지인  (1) 2023.12.21
피의 구조  (1) 2023.11.29
타는 냄새  (1) 2023.09.28
율법 돔  (0) 2023.07.29
보편성과 특수성  (0) 2023.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