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피의 구조

아빠와 함께 2023. 11. 29. 09:10

안양20231116a말4장2절(피의 구조)-이 근호 목사

말라기4장, 오늘 마지막으로 말라기를 끝내겠습니다. 말라기 끝나고 난 뒤에 다음 달부터는 <뒤에서 보는 한국교회>하겠습니다. <뒤에서 보는 한국교회> 책이 많이 있다면 합니다. 찾아봐야 돼요. 여기 4장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교만한 자, 악을 행하는 자. 교만과 악을 행하는 자라는 그 규정. 어떤 식으로 규정이 되는가, 율법 때문에 규정되는 겁니다.

율법에 의해서 나온 결과가 교만한 자, 악을 행하는 자가 이게 나옵니다. 율법이 들어옴으로서 숨겨진 교만이 나오고 숨겨진 악이 현실 속에 나오게 하는 거예요. 율법은 회개케 하기 위함이 아니고 율법은 죄를 들추어내기 위함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용광로 불같이 이르는데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용광로 불같이 불 싸지르는 그러한 사태가 일어나려면 필히 교만한 자와 악이 일어나야 되고, 그런 자들이 등장해야 되고, 그런 자를 등장하는데 율법이 활용됩니다.

율법을 집어넣어서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를 끄집어내서 그 다음에 뭐냐,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다. 이리 되어있어요. 이런 말씀을 주께서 일관되게 해주신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주께서 이렇게 이런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에 대해서 박수치고 동의하고 찬동하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주께서 이렇게 하는데 누가 말려요. 말릴 수가 없어요.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이리되어있어요. 그 다음에 2절에 보면. 그러면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라는 것은 교만하지 않고, 악을 행하지 않는 자들인가, 그들은 율법에 의해서도 교만하지 않다고 판정받고 율법에 의해서도 악을 행한 적이 없다고 판정을 내린 그 사람들인가, 라는 질문을 해봐야 됩니다. 그런 인간이 없지요.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치료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교만하고 악을 행하는데 하나님 입장에서 치료해 줄자와 치료 안 해줄 자가 그렇게 둘로 나누는 거예요. 치료해 준 사람은 그 치료자에 의해서 그 이름을 경외하게 되어있고, 치료를 안 해준 사람은 지 교만하지요. 특히 재미난 게 교만이거든요.

율법을 통해서 교만이 드러난다는 말은 교만한 자가 나는 교만하다고 이야기 하겠어요? 안하겠지요. “내가 뭐? 그럴 수 있지 뭐. 이게 어떻게 죄야? 이게 어떻게 교만이야?” 라고 버티고 있는 거예요. “율법을 봐라.” 하면 율법을 “저리로 가라!” 하고 쫓아내지요.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나의 죄를 지적하는 율법을 거절하는 것이 뭐다? 교만이다 이 말이지요.

나를 대단한 존재로 인식해 주는 그런 교훈과 그러한 경우를 찾아다니는 게 교만인 거예요. 주의 일을 방해하는 겁니다. 학생들이 컨닝하면 무슨 죄에 걸리지요? 컨닝을 하는 게. 컨닝죄 라는 건 없거든요. 컨닝하는 죄는 무슨 죄냐 뭐냐 하면, 입시 방해죄에 걸리는 거죠. 방해하는 거예요. 공정한 입시 행위에 방해하는 죄가 컨닝하는 거예요.

그러면 교만은 뭡니까? 주께서 공정하게 하는 일에 대해서 방해하는 죄가 교만이에요. 하나님이 그러든 말든 나는 내 식대로 살아간다. 그게 교만이잖아요. 하나님은 계획이 있는데, 나는 그 계획 모르겠고, 하나님의 계획 그런 거 이야기하지 마. 나는 모르겠고 나는 내 인생대로 내 계획대로 밀어붙일 거야. 그게 교만인 거예요.

율법은 어디서 왔느냐 하면, 시내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시내산에서. 시나이산에서 내려왔지요. 주께서 시나이산. 시나이산과 대비되는 것이 모리아산이거든요. 모리아산. 모리아라는 것은 하나님이 지켜본다는 뜻이에요. 주시한다는 뜻이에요. 갈라디아서4장에 한 번 봅시다. 24절,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낳은,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낳은 것이라. 시내산에서 종을 낳았다고 본 거예요. 시내산의 율법 아래 있는 자는 모조리 다 죄의 종이에요.

그럼 죄의 종이 아닌 자가 누구냐, 그것은 없지요. 없는 걸 가지고 또 다른 곳엔 예루살렘이라고 본 거예요. 예루살렘은 모리아산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그 산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졌거든요. 모리아산의 특징은 뭐냐 하면 종인데 이젠 종없다. 내 아들이다. 절차가 주입된 율법의 종이었었는데 그 사람은 죽고 이제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들된 사람. 그것이 어디서 태어나는가, 모리아산에서 또는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자다 이 말입니다. 그 예루살렘은 위에 있다고 되어있지요.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다. 곧 우리 어머니다. 우리 어머니다.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어머니가 있고, 두 종류의 어머니가 있음으로서 두 종류의 자식들뿐이다, 고 보는 겁니다. 하나는 시내산 율법에서 태어난 자식은 종이고, 그건 저주의 율법의 저주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저주를 이겨낼 수가 없어요.

또 하나는 율법의 저주로부터 이미 죽었고 그 인간은 죽었고 율법에서 벗어난 약속에 의해서 새롭게 잉태된 자. 그 사람들은 예루살렘 출신이다. 예루살렘이 우리 어머니다. 엄마다 다르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엄마가 다르다. 신약에서는 갈라디아에서는 새로운 아들을 등장을 이야기하는데 오늘 말라기에서는 뭐냐 하면 여기 치료를 이야기해요.

그러면 치료라는 것은 교만하고 악한 것은 이 말라기 자체가 율법이에요. 말라기 자체가 레위기 율법이니까. 율법에 의해서 교만과 악을 들추어내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인간에 교만의 극치가 바로 율법으로 온전한 제사를 드리겠다고 하는 그 자체가 이미 교만이었다는 겁니다. “니가 제대로 제사장이야? 니가 제대로 제사법을 알아? 이것도 제물이라고 준 거야? 이 흠 있는 걸 내가 받으라는 말인가, 니는 온전히 나한테 제대로 된 제사법에 의해서 제대로 제사를 드릴 수 없었어.” 라고 말라기에서 계속 지적하고 있습니다. 1장부터 계속 그것을 지적해 왔었습니다.

그런데 4장에 와서 그 치료가 된 사람은 치료자가 누구냐 하면 내 이름을 경외하는 내 이름이 등장해요. 내 이름. 율법의 자녀 말고, 그 노선 말고, 다른 노선. 주님의 이름에 의해서 직접 치료를 받은 자의 사람은 그 사람은 치료대상이면서 어떻게 치료가 되느냐 하면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외양간의 송아지니까 송아지 자체적으로 어떤 인식이라든지 그런 것은 전무하지요. 없지요. 방금 엄마소에서 튀어나왔는데 뭘 알겠어요. 아무것도 모르지요. 그러니 치료된 자의 특징은 아무것도 할 것도 없고 아무것도 아는 것도 없고 그런 거예요. 마치 어린아이 같아요. 어린아이한테 신학을 묻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겁니다.

어린아이한테 칼빈신학을 물으면, “칼빈신학이 나를 낳은 게 아닌데요.” 이리해요. 다른 말로 하면 법이 나를 낳지를 않았습니다. 나는 새로 낳았어요. 법 말고. 주의 이름으로 새로 낳습니다. 치료라는 것은 노선 변경이지요. 노선 변경.

기존에 있던 율법에 속한 것을 노선을 변경시켜서 송아지같이 아무것도 몰라도 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 노선 변경에 누가 개입하느냐, 주의 이름이 개입해서 주의 이름으로 일방적으로 거기서 노선에서 이탈해서 빼내주는 겁니다.

그런데 송아지의 특징이 뭐냐, 여기 송아지 같이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어요? 뛰리라. 뛴다. 거침없이 하이킥이지요. 그냥 뛰는 거예요. 구애받음이 없음. 마치 주님께서 이 세상의 율법에 대해서 구애받음이 없는 것처럼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모든 법에서부터 벗어나고 완성자라 하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를 통해서 지독스럽게 이 인간들의 형편을 압박을 하고 있어요. 소위 쫀다 하지요. 딴 소리 못하도록 쪼아버려요.

산상설교 한 번 봅시다. 마태복음5장22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일종의 욕설인데. 나가 죽어라. 이런 뜻이겠지요.)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저 인간 왜 사냐 하는 자는)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이게 일점일획도 하나님께서 변경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실생활에서 인간을 누구를 만난다는 것은 내 분노를 상대에게 퍼붓기 위해서 만나요. 친구 좋은 점이 바로 그거에요. 내 속에 있는 분노를 퍼붓기 위해서 말 상대자가 되는 거예요. 제 정신에 안 되니까 술 한 잔, 소주 한 잔, 막걸리 먹고 퍼붓는 거예요. 명절날 집안끼리 모이는 좋은 점이 그 점이에요. 서로가 분로를 서로를 향하여 퍼부을 수 있는 단란한 만남의 장이 되는 거예요.

말로 해서 안 될 때는 팔과 손힘으로 하는 겁니다. 일단 제사음식 물려놓고 판내라. 화투내라. 해가지고 고스톱치면서. 고스톱치면 팔이 아파요. 나는 잘 안해봤지만. 때리면 아프잖아요. 정신없이. 옛날에는 윷놀이 했는데 윷놀이는 짜증나. 귀찮아. 계산하는 것도 귀찮아. 그냥 간단하게. 점200에 간단하게. 이게 편하다고요. 그냥 패는 거예요. 그냥. 화투를 대용해서 패는 거예요. 죽으라고 패는 거예요. 이게 나오나 안 나오나. 나왔다! 스트레스가 확 풀리지요. 끝나고 돈 모아서 3차 노래방 가는데. 형님은 노래도 잘해. 이런 거.

그 다음에 끝나고 난 뒤에 제사음식 챙기고. 제각기. 경상도 말로 지즘 지즘. 제각기 해가지고 차타고 가면 집안 어른들 트렁크에 “야, 야, 우리 이거 안 먹는다. 이거.” 해가지고 사과 실어주고. 올 때 지 아들 수능친 거 점수 자랑하러 와가지고 사과, 배 얻고 가지요. 속으로 ‘어머님, 올 한 해 오늘 찾아온 걸로 끝입니다.’ 특히 며느리 아주 좋아하지요. 올해는 요걸로 끝냈구나!

타인이 있어야 될 이유는 내 분노를 쏟을 휴지통 같은 그런 게 있을 때 사람은 살맛이 나는 겁니다. 나이 별로 안 많은데 배우자가 일찍 죽게 될 때에 다른 사람은 맹숭맹숭한데 그 보호자는 그리 울어요. 울면서 뭐라고 하는지 여러분들이 다 아시지요. “이 야속한 사람아! 나를 두고 그냥 가나? 왜 먼저 가노. 이 야속한 사람아!” 뭐 더 있어야 쓰레기통 역할을 하라는 말인지. “야속한 사람아! 나를 두고 가면 나 우이 살라고.” 이렇게 아주 진정성있는 울음을 토해 내지요. 처음에는 손님보고 참다가 나중에는 하관예배할 때 마지막 공동묘지 갈 때는 막 따라가요.

이처럼 인간이 인간세계가 산상설교에 의하면 인간은 산상설교에 의해서 교만하지 않은 자 없고, 악을 행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왜 주님께서 산상설교를 했습니까? 인간이 얼마나 교만하고 악한지 기준의 율법해석을 기존의 율법해석가지고 전부 다 자기 정당성으로 다 바꿔났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그래서 니가 율법을 하자없이 지켰다 이 말이지? 그러면 이건 어때?” 하고 추가적으로. 율법에 율법을 추가적으로 주시는 거예요. 너희들은 말하기를 맹세하면 지키라고 했지. 내가 말한다. 맹세하지 마! 맹세하지 마! 마음 속 간음하는 것도 간음죄야. 거기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아실 거예요. 산상설교보면 엄청나게 많이 나옵니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시작해서 니 오른 손이 범죄하거든 눈을 빼어버리라. 이건 인간이 도무지 지킬 내용이 아닙니다. 지킬 내용이 아닌데 이게 율법으로 추가가 되어버려요. 오히려 율법의 완성이 되어버려요.

그리고 이렇게 합니다. 니가 훌륭한 말씀입니다. 잘 들었습니다. 이걸로 끝내려고 했지. 내가 분명히 한다. 내 말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나중에 다 무너진다. 내가 그냥 빈소리한 게 아니야. 이건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 그런 소리가 아니고 내 말을 듣고 다 지키지 못한 자는 마지막에 홍수가 나서 무너짐 같이 모래 위에 지은 집 같이 다 무너진다. 그렇게 산상설교를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거에요. 이미 확정된 거예요. 교만하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 그것도 하나님이 불같이 내려지는 것은 확정된 겁니다. 이건 못 바꿉니다. 그러면 이 불같이 전체를 불로 심판한다는 그 근거는 어디서 왔는가, 그것은 바로 노아홍수에서 왔어요. 이제부터 난해할 건데 여러분들이 참으시기 바랍니다.

노아홍수에 대해서 사람들이 뭔가 안일하게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노아홍수로 다시는 물로서 심판하지 않는다하니까 노아홍수로 이제는 두 번 다시 벌주는 게 없겠지. 라고 쉽게 단정하고 말았어요. 그러나 구약의 시편 같은데 보면 노아홍수가 끝난 게 아닙니다. 오히려 노아홍수를 본격화시켰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이렇습니다.

노아홍수로 인하여 모든 세계가 수족관 신세가 된 거예요. 수족관 신세가 되었다. 물이야 수족관 있으면 신나지만, 인간 같은 경우에 수족관 속에 들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이건 뭐 답답해서 미치겠지요. 노아홍수의 의미가 이 땅이 산이 있었고, 강이 있었고, 바다가 있었잖아요. 이 전체를 뭐로 덮었습니까? 물로 덮은 거예요. 물로 왜 덮었는가, 이 전체가 죄악에 덮여 있다. 죄악에 덮여있음을 물리적인 자연을 소재로 해서 그걸 실감 있게 보여준 거예요. 죄의 깊이만큼 물의 깊이가 된 겁니다. 의로운 건 하나도 없었고, 전부 다 죄밖에 없었던 거예요.

이렇게 물과 죄의 만남이에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물이 거두어졌잖아. 물이 말랐잖아.” 물이 마른 것은 죄까지 마른 게 아니에요. 물이 말랐다는 말은 그 전의 사건 물이 죄 있는 곳에 덮었다는 그 취지가 달성된 상태기 때문에 그 상황이 그 물이 없어진다고 해서 그 구조가 변화지 않는 채로 그냥 계속 간다는 겁니다.

그럼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말은 왜 했는가, 여기에서 무지개가 오면서 하나님께서 여기 죄밖에 없는 세계, 물로 지금 당장 덮여도 죽어 마땅한 죄밖에 없는 속에다가 언약을 집어넣어서 언약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있는데 이건 유보에요. 유보. 긍휼과 자비라 하는 것은 죄 없다가 아니라, 죄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는 어릴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너희 죄를 묻지 않겠다고 창세기8장에서 그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요 이야기를 실제로 시편을 찾아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러면 더 실감날 겁니다. 시편69편1절,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이상하잖아요. 인간의 신체구조에 물이 어디 70%하지만, 이 물은 그 물이 아니고 내 내부의 물이 아니고 바깥의 물이거든요. 언제 그 바깥의 물이 흘러들어왔지요. 여러분,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서 뭔가 잘못 보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오해하고 계신 게 아니에요? 아닙니다. 인간 내부와 외부의 전체를 다 이야기한 거예요.

그 다음에 시편18편4절,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뭐로 되어있지요? 창수. 불의의 홍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습니다. 불의. 악. 악이 뭐같이 덮였다? 물같이 덮였다. 마치 노아홍수의 물처럼. 헤엄쳐서 빠져나갈 수 없듯이 죄악의 창수에서 버틸수 없다. 그게 뭐냐 사망의 줄. 그 죄가 있기에 사망이 나를 이렇게 얽매고 있습니다. 이런 뜻이에요.

시편42편7절,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꼬. 하는 걱정 근심이 마치 노아홍수가 엄습해서 나를 덮었듯이 어느 한 구석, 어느 한 순간도 근심걱정의 이 바다에서 밀려온 파도를 버틸 수가 없게 만들었다는 뜻이에요. 하나 해결하면 또 파도가 와서 덮치듯이, 때리듯이, 계속해서 반복해서 돌발적으로 출몰해서 나를 근심과 걱정에 그 파도 속에 숨도 못 쉬게 만들어버린 거예요.

기존 사장이 갑질하다가 사장 바뀌면 또 갑질하고. 회사 다니는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회사를 직접 운영하는 사람 같으면 직원이 와가지고 갑질한다고. 새로운 직원이 와가지고 또 말썽일으키고. 도대체 한시도 편안할 숨을 쉬지를 못하고.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아요. 나를 짓누른다. 시편88편7절,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물, 물결이에요.)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이런 말씀을 보면 우리의 태도는 이거에요. “그럴 거 같으면 저를빨리 죽이소서.” 주님은 니는 나한테 죽여달라 할 권한이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죽음은 주님의 언약과 관련되어서 죽여야 돼요. 교만하고 악을 들추어내면서 죽여야 되는 거예요. 심판의 죽음이지. 그냥 힘들다고 죽는 죽음은 하나님이 허용한 적도 없고 그걸 용납한 적도 없습니다. 이 세상은 주님을 위한 구조지, 인간을 위한 구조가 아니거든요.

시편88편17절 봅시다. “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 물같이 종일 나를 에운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물은 액체지요. 나는 고체잖아요. 고체같으면 같이 상대해가지고 마동석이 해가지고 같이 싸우고 때리고 하는데 아니면 행정소송해가지고 민사소송하면 되는데 상대가 사람이 아니고 고체가 아니고 물이에요. 오는 비보고 고소합니까? 소나기보고 고소할 수 있어요? 액체인데. 소송 대상도 안돼요. 물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둘러쌌나이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시편124편4절,5절, “그 때에 물이 우리를 휩쓸며 시내가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며 그 때에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 할 것이로다” 언제? 언제 그렇다는 말입니까? 바로 노아홍수 때도 그렇지만 특히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 속에 들어갔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닷물이 그냥 육지가 이렇게 계곡을 이루어서 통과를 하면 우리는 마음이 편안해요. 육지는 고체잖아요. 땅은 고체기 때문에 갑자기 휩쓸릴 일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에 집어넣습니까? 고체가 아니고 액체로 되어있는 우리 인식에 물은 언제든지 흐를 수 있다는 그러한 까딱까딱한 그러한 상황 속으로 들어갔으니까. 그들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면서 건넜겠어요. 어떤 사람은 만져봤을 거예요. 만져보는 것도 겁날 거예요. 이게 물이야? 얼음이야? 어, 물이네. 그런데 물이 갑자기 벽이 됐지? 이 쪽 다 벽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언제든지 마법이 풀려버리면 다시 전부 다 함몰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납득되고 우리가 이해되는 죄 용서를 해주신다든지 은혜를 주시면 우리는 기꺼이 고마워하겠는데, 우리가 납득되지 않는 방식의 죄용서가 와버리면 죄 용서 받아도 간당간당한 거예요. 이거는. 죄용서가 뭐냐 하면 네가 마련한 방식이 아니고 내가 마련한 방식 또는 다른 말로 주님의 가신 길로 그게 내가 길이니까 그쪽으로 자기 백성을 끌고 가는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보고 이런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아무 걱정하지 마! 니 아무걱정 하지 말고 자기 십자가만 지고 와!” 그런데 십자가 진다 하는 게 이게 생각을 2분40초 지속되면 그러면 2분45초는 십자가 생각이 안 나면 그냥 무너지는 거예요. 죄 용서는 취소되는 겁니까?

어떤 경우라도 죄 용서를 통과하는 과정 속에 어떤 경우라도 내가 행할 수 있는 거, 내가 가능성을 집어넣는다면 이건 즉시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그러한 환경, 배경을 조성하고 우리를 이끄시는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은 항상 자기 행함으로 언제든지 돌아서거든요. 그래서 돌아설 때마다 죄용서가 취소되는 게 아니고 돌아설 때마다 십자가의 다 이루심과 항상 접촉으로 점화가 일어나게 만들지요. 내 것 돌아설 때마다. 성도한테만 해당돼요. 불신자는 십자가가 지식이니까 해당 없고요. 점화가 되면 불꽃이 일어나지요.

늘 불꽃이 일어나는 게 아니에요. 언제? 이만하면 구원은 됐고, 주님이여, 내 이런 소박한 소망이 있는데 오늘 우리 애가 수능치는데 뭐 그저 큰 욕심내지 않습니다. 지 아는 것만 나오게 하옵소서. 떨리지 않고 밀어쓰지 않고 칸막이 밀어쓰지 않고 실수 없이 지 아는 욕심내지 않고 지 아는 것만 나오기를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하지요. 벌써 뭐가 날아갔습니까?

주께서 자식보고 수능치게 했다는 것을 다 잊어버리고 주께서는 용서만 하고 나머지는 이 어미한테 맡겼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한테 맡겼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수능치고 난 뒤에 엄마, 베렸어. 한 문제 틀렸어. 어떡해. 나 서울의대 못갈 거 싶어. 한 문제 틀린 거 같은데. 큰일났구나. 킬러문제 있었어? 한 문제 틀렸어. 나 다 맞는 줄 알았는데. 전혀 우리하고 상관없는 예시를 한 겁니다.

주님께서 그 산상설교 가운데 결정적인 것은 뭐냐 하면 그 나라 의를 구하라는 거예요. 그 나라 의. 형제를 욕하지 마라 이 정도가 아니고 그 나라 의를 구하라. 딴 것은 하지 마라, 하지 마라 하지만, 그 나라 의를 구하라 하는 것은 적극적인 거예요. 따라서 산상설교는 주님 혼자 통과하는 구간이고요. 율법구간이고. 아무도 주님 이외에는 아무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통과한 그 성과를 가지고 있어야, 효과를 가지고 있어야 우리가 계속 치료하면서 홍해바다 걷는 것이 악마와 이 죄악된 구조와 천국 구조사이를 통과가 됩니다.


그래서 오늘 말라기 마지막은 구조이야기에요. 이미 우리는 이곳에 갇혀있다는 겁니다. 시편130편1절 봅시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이리 되어있지요. 이러한 이야기는 이스라엘 외에는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없어요. 언제 우리가 물속을 통과했습니까? 이방인들은 그렇게 할 거예요.

모든 인간은 물속에 있었고,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왔었고, 또 이스라엘은 요단강도 건너왔잖아요. 그 요단강, 홍해, 그 노아홍수, 그들의 물은 무엇이 있기에 물이 덮친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죄의 깊이만큼 물이 온 거예요. 그러면 그 물 이야기를 다 빼고 나면 인간의 마음은 현재 어디에 갇혀있다? 죄에 노아홍수를 심판할 그 심판 속에 갇힐 만한 마음가짐 죄악된 마음가짐에 우리는 어쩔 줄 모르고 갇혀있는 셈이다 이 말이지요. 그런 형국에 있어요.

자, 그렇다면 아까 노아홍수할 때 언약이라 했지요. 언약. 노아홍수의 언약은 창세기9장에 나와요. 피. 피를 중심으로 무지개가 떠있어요. 피 중심으로.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것은 유보하거든요. 죄 속에 갇혀있고 저주속에 갇혀있는 것을 언약이 있는 곳에만 하나님께서는 평화의 무지개가 펴있는 겁니다.

무지개라는 것은 심판 끝났다~ 심판 끝났다는 뜻이에요. 한 때 심판이 있었는데 그 심판이 끝났어. 무지개는 물이 있어야 습기 있는 곳에 무지개가 피니까. 무지개라 하는 것은 “한 때 물의 세계였어. 한 때 그런 세계였었어. 지금은 아니야.” 라는 뜻이 무지개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구약에서 무지개 떠있는 곳이 어디지요? 에스겔1장, 10장, 그걸 그대로 요한계시록4장에 따라 보게 되면 어디에 무지개가 떠있습니까? 에스겔이 봤던 하나님의 보좌에 무지개가 떠있어요. 하나님의 보좌에. 그 하나님의 보좌에 떠있다는 말은 속시원하게 심판할 건 심판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속을 시원하게 해주고 만족하게 해준다는 뜻이에요.

심판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이 만족하지 않습니다. 죄가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만족하는 거 없어요. 심판을 처리했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무지개의 취지는 더욱 더 사는 거예요. 잘했어. 천사 잘했어. 그래. 사방 다 작살냈습니다. 잘했어. 잘했어. 그게 무지개의 취지에요. 그 무지개가 바로 어린양의 보좌에 피어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예수님의 형상이 있는 곳에 무지개가 피어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구조적이라니까요.

내 개인이 인생을 어떻게 살고. 아니에요. 내 마음을 어떻게 잡고. 이거 아니에요. 니 마음은 그냥 교만하고, 니 마음은 그냥 악한 거예요. 다른 구조가 와서 바뀌는 겁니다. 시내산 아들에서 말고, 시내산 아들에서 처리된 모리아산의 아들로 되는 거예요. 예루살렘의 아들이 되는 거예요. 이게 구조적이에요. 주께서는 이 땅에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겁니다. 그 새로운 구조 안에 있는 걸 가지고 치료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언약의 피다 말이죠. 피니까. 여러분,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공식으로 잡아도 상관없습니다. 공식. 뭐냐 하면 물의 구조 그 다음에 피의 구조, 그 다음에 불의 구조. 아까 불 이야기 나왔지요. 피의 구조로 언약을 집어넣는 것은 자기 백성의 노선을 빼내기 위해서 특혜를 주는 거예요.

그야말로 뭐냐 하면 편애에요.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거예요. 그리고 저쪽은 편애가 아니고 편 잡고 증오하는 거예요. 일방적으로 미워하는 거예요. 한쪽은 일방적으로 미워하고, 한쪽은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겁니다. 그래야 구조가 잡혀요.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에서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거지를 사랑하고 일방적으로 부자를 하나님께서는 내쳤습니다. 부자 쪽에서 아무리 뭔가 신앙적인 티를 내도 안 받습니다. 복음적 티를 내도 “내가 사랑 안하는데 니가 나를 사랑한다고? 나는 니 사랑 안 받는다.”고 밀어내지요.

그러니까 그걸 아는 성도는 뭐만 쳐다보고 살겠어요? 그러한 권한을 행세하시는 분이 누굽니까? 주의 이름이지요. 주의 이름만 쳐다보고 홍해바다 그 한 속을 한 복판을 걸어가는 거예요. 물 만지고 하지 마세요. 이게 든든한지 “이건 얼음일 거야. 물이 쏟아지게 되어있어. 얼어있어.” 이렇게 점검하지 말고 내 이름을 걸고 하지 말고. 내 이름 말고 주의 이름을 하신 일을 보면서 그냥 걸어가는 거예요.

그 홍해바다를 만화로 그린다면 홍해바다가 이리 갈라져 있고 양쪽이 갈라져 있잖아요. 이 사이를 계속 남자만 60만 오잖아요. 올 때 하늘나라에서 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치료하는 광선을 보낸다. 그러면 밑에 있는 것은 마치 뭐 같으냐 하면, 인형 같아요.

누가 사로잡고 있는데요? 주님에 의해서 언약에 의해서 복음을 위해서 사로잡힌 자, 사로잡힌 자에요. 이게 디모데후서에 보면 나오잖아요. 디모데후서2장26절,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었다. 하나님께 사로잡힌다는 것은 바로 위에서 하나님이 무지개 있는 쪽에서 아래 쪽으로 언약을 위해서에요. 언약을 위해서. 내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언약 자체를 이 땅에서 건지기 위해서 주의 이름을 건지는 뜻에 의해서 나를 건지는 게 아니고 주의 이름을 건지는 거예요.

그 과정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포기하고 주의 이름을 따르도록 그렇게 우리가 바뀌어진 거죠. 주의 이름으로 먹고 마시고, 주의 이름으로 죽고 사는 거예요. 주의 이름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를 활용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위에서 아래. 아래에 있는 것은 주님. 위에는 아버지. 아버지와 아들의 언약을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위험한 홍해바다를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언제 무너질지도 모르는.

그러다가 진짜 물이 무너지면 어떻게 되는가, 그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이 그런 거 같으면 무너질 수 있는데 인간의 행동에 따라서 무너질 수 있는데, 주의 이름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냐, 주의 이름은 부활의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주가 되신 것은 죽었다가 부활함으로 주가 되기 때문에. 그러면 예수님을 압박하고 숨 못 쉬게 하는 게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아버지의 뜻이 그냥 가만 두지 않지요.

마태복음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는 대목이 나옵니다. 시험 받는 끝부분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11절에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이에 마귀가 예수를 떠나고 그 다음에 뭡니까? 천사들이 와서 수종드니라. 천사들이 와서 수종든다. 그럼 그동안 천사들은 뭡니까? 팔짱 끼고 쳐다본 거예요. 왜냐하면 시나리오상 배역이 카메라 속에 들어올 타이밍이 아니기 때문에. 기다리고 있다가 그 다음 순서가 뭐냐, 악마퇴장, 천사등장이에요. 딱 각본대로 움직이는 거예요. 각본대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늘 마귀에 시험들지요. 그 마귀의 시험을 하게 되면 우리는 혼자 오는 게 아니고 천사와 성령께서 우리를 수종들지요. 최수종 수종보다 더 수종 들지요. 이게 주의 일에 포함돼 있습니다. 크레파스 통 보게 되면 애들이 노랑색을 좋아한다 말이지요. 노랑색을 하는데 애가 엄마한테 막 우는 거예요. 노랑색만 있고 빨강색은 왜 없어. 통 봐라. 통에 보니까 기다랗게 노랑색 옆에 빨강색이 있잖아요. 옆에 천사가 다 지켜보고 있었던 거예요. 우리가 마귀한테 시험 받는 걸. 성령도 지켜보고 있는 거예요.

빨강색 들어오고, 초록색 들어오고 하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구조에요. 전부 다 크레파스통안에 들어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것과 예수님의 성과를 각자 성도가 부분 부분이 모자이크처럼 그 인생을 성도의 일생을 순간 순간을 통해서 예수님의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주께서 어떤 것을 다 이루었는가를 우리를 통해서 증거하게 하는 겁니다.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되려면 기본적으로 한 박스안에 구조안에 들어있어요. 나를 위한 박스가 아니고 주의 이름을 위한 박스. 내 이름을 위한 게 아니고요. 내 인생을 위한 게 아니고요.

다시 들어가 봅시다. 물의 구조에서 그 다음 무슨 구조에요? 피의 구조지요. 피의 구조가 되려면 불의 구조와 물의 구조 그 양쪽을 피의 구조가 양쪽을 다 포섭하고 있습니다. 포섭하는데 차이점이 뭐냐, 피의 구조는 한 분에게 집약되어있습니다. 집약되어있다. 노아홍수는 온 천지에 퍼져있지요. 불의 심판도 온 지구상에 다 퍼져있지만, 그 물의 심판의 진정한 의미, 불의 심판의 진정한 의미는 그 한 분의 하신 일이 최종 토대가 돼요. 기준이 됩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아요. 그러나 신약에는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습니다. 왜? 모든 율법이 한 분에게 집약되어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율법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지키느냐가 정답이지 내가 율법을 지키는데 하나님 좀 도와주세요. 이런 건 없어요. 그런 건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성심성의껏 지키겠습니다. 이건 안됩니다.

율법은 반드시 예수님의 피의 구조를 거쳐서 나와야 율법의 의미가 생겨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율법의 위반이에요. 그걸 어디서 알 수 있는가, 율법을 지킨 자가 예수님에게 폭력을 행세했거든요. 그 폭력의 희생자가 등장합니다.

여기 4장5절,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불심판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 누굴 보냅니까? 엘리야를 보내지요. 엘리야. 선지자 엘리야. 엘리야가 율법구조를 주장했던 유대교에 율법적 폭력에 희생물이 됩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로부터 폭력을 당하는 자가 엘리야에요. 이게 엘리야에요. 세례요한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면 세례요한이 당한 폭력이 그게 하나님께서 율법구조의 허점을 보여주는 그 폭력이 전부냐, 최종적인 것이냐, 아닙니다. 엘리야가 겹쳐있어요. 세례요한이 엘리야가 되면서 예수님이란 엘리야가 뒤에 숨어있다가 세례요한이 기존의 율법적 체제 구조에 의해서 폭력을 당하고 제거되고 난 뒤에 비로소 진짜 엘리야가 그 뒤에서 예수님으로서 등장해서 말라기 4장5절을 완성시켜 버립니다.

요 구조는 좀 복잡하겠지요. 그 때는 10분 쉬면 됩니다.

 

 

안양20231116b말4장2절(피의 구조)-이 근호 목사

세례요한과 예수님 사이에서 요 구조를 보면 여러분이 잘 이해하기 쉽습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 사이에 여기 까만 거로 선으로 되어있지요. 요걸 연속성.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연속성을 예언의 연속성. 그 다음에 세례요한과 예수님 사이에는 여기 불연속성. 양쪽 다 연결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오해했다 이 말이지요.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오해했어요. 그러면서도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선지자 아닌 건 아니에요.

그럼 세례요한의 위상은 뭐냐, 한 마디로 말해서 이겁니다. 세례요한은 율법외의 존재. 율법 외의 바깥의 존재에요. 아까 율법은 뭐라고 했습니까?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교만 되게 하고, 죄인 되게 했다 했지요. 이 말은 인간이 죄인인데 율법이 왔다는 말이 아니고, 율법이 인간의 죄와 교만을 만들어내요.

그러면 율법이 없다면, 인간의 죄를 지적할 수 있는 아무것도 없다면, 인간은 죄가 없는 거예요. 이 발상이 정말 특이한 발상이에요. 일반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일반사회에서는 죄인인데, 법으로 들이대니까 비로소 죄가 나왔다. 이게 일반적 사고방식이잖아요. 하늘나라는 그렇지 않아요. 왜냐 하면 율법이 언약에 속했기 때문에. 언약이. 율법이 율법대로 그 취지와 그 가치와 그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죄가 발생되어야 돼요. 율법은 선악체계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함이라. 다시 말해서 요한일서3장에 나오는 예수님이 오신 것은 예수님이 율법대로, 율법의 예언대로, 계시대로, 주님이 오신 것은 악마의 일을 멸하기 위함이에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창세기3장15절에 여자의 후손은 노리는 게 뭡니까? 뱀이에요. 뱀의 후손이에요. 인간의 지혜를 능가하는 특이한 피조물. 피조물인데 인간의 지혜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뛰어나요. 그럼 그건 누구밖에 없어요? 마귀밖에 없지요. 땅에 기는 뱀은 인간이 밟아버리니까. 천사는 악마는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인데 뛰어나다. 뭐가? 지혜가 인간의 지혜보다 더 뛰어난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그 지혜에 당해내지를 못하지요. 간교하다 이리 되어있거든요.

그 악마를 잡는 게 뭐냐, 여자의 후손의 할 일이에요. 잡자. 어떻게? 잡는 방법은 율법을 줘가지고 그 율법을 지키는지를 보는 겁니다. 그런데 율법의 특징은 지키면 지킬수록 안 지킨 게 돼요. 왜냐하면 율법을 지키겠다는 그 자체가 마귀적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그 자체가. 그 증거를 대라. 그 증거가 뭐냐, 율법을 철저히 지킨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과 장로들이 누구를 죽였습니까?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그 보다 더 확실한 증거 있습니까?

율법과 무관한 자가 죽인 게 아니에요. 율법대로 예수님을 죽인 거예요. 율법대로. 그럼 세례요한이 마태복음14장 1절에서 12절에 보면, 세례요한이 기존의 권세에게 대드는 장면이 나와요. “그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 하더라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무리가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을 두려워하더니 마침 헤롯의 생일이 되어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하거늘 그가 제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왕이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주라 명하고 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서 그 소녀에게 주니 그가 자기 어머니에게로 가져가니라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아뢰니라”

분봉왕 헤롯 때에 세례요한이 활동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 세례요한이 그 권세자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니가 왜 그 제수씨하고 혼인을 했는가(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 거기에 대해서 세례요한이 그 이혼한 여자와 결혼했다 해가지고 그러면 안 된다고 해서 지적을 했지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 지적을 왜 합니까? 세례요한이 왜 오지랖을 떨었어요. 오지랖을.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아직도 세례요한이 뭘 모른다? 세례요한이 이 유대 율법적 구조에 대해서 어떤 기대를 갖고 있었던 거예요. 기대를. 희망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율법을 줬으니까 어떻게 하자, 제대로 해보자는 거예요. 그러니까 왕이 모범을 보여야 되고 왕부터 그런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그런 식으로 지적을 한 거예요. 마태복음14장 4절에 “세례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그리고 마태복음11장2절에 보면, 요한이 옥에 갇혔거든요.

자, 여기서 상당히 난해하지요. 세례요한이 분명히 율법 외잖아요. 율법 외.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을 누가 증거했습니까? 세례요한이 증거했다고요. 요한복음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그런데 왜 세례요한이 그럴 것 같으면 뭐를 일체 포기해야 돼요? 율법적 구조 자체를 전부 다 포기를 해야 되는데, 아~ 세례요한이 왜 그 당시 권세자에게 율법에 위반된다고 왜 그 지적을 했느냐 이 말입니다.

이게 바로 세례요한이 이제부터 진짜 어렵게 합니다. 세례요한에게 폭력을 가할 때에 그 폭력이 율법을 빙자한 인간의 권력체제, 권력구조로 뼈대를 만드는데 율법이 거기에 가미가 된 거예요. 온전하게 율법으로 세례요한을 친 게 아니고 얼추 율법 티를 내면서 인간의 욕망의 구조를 거기다가 하나의 인간의 질서체제를 거기다 잡은 거예요.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느냐 하면, 이 말을 하고자 하는 거예요. 인간들이 이리 있다 말이죠. 열명이든, 백명이든, 천명이든 있다 말이지요. 그럼 이들이 스스로 원활한 조직을 하려면 여기 뭐가 필요합니까? 법이 필요한 거예요. 우리 잘해보자. 잘해보자 하고 법을 만들잖아요. 법을. 세금도 조금 내고. 어려운 사람도 도와주고 이렇게 잘해보자.

그런데 여기서 잘해보자. 하고 끝나는 거예요? 아니면 뭐가 있습니까? 벌칙이 있지요. 이 법대로 안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할 건데? 그냥 방치하면 법은 있으나 마나해요. 법은 항상 폭력적이에요. 위반했을 때는 단호한 폭력을 행사하고, 형벌을 하는데 뭐를 지키기 위함입니까? 사람을 지키기 위함입니까? 법 자체를 지키기 위함입니까? 법 자체를 지키기 위함이에요. 법 자체를.

지금 세례요한은 사형언도 받았어요. 그 사형을 누가 시킨겁니까? 그 당시 국가권력장이 사형을 시키잖아요. 권력장이. 그러면 이 권력은 어디서 온 거예요? 세례요한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그 권위. 법적 권위는 어디서 온 거예요? 민중들이 대중들이 일임 위임한 거예요. 거기다가. 전부 다 한 통속이라니까요. 전부 다. 사적인 복수심 대신. 법의 형성을 갖추어서 우리가 복수하고 싶은 것을 대신 법을 집행하는 자, 선포하는 자에 의해서 우리의 원한을 들어주소서. 한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불의한 재판관에게 과부가 열심히 호소하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따져봅시다. 그렇게 해서 법을 지키는 겁니까? 아니면 인간 질서체제의 구조 자체를 지키는 겁니까? 뭡니까? 인간구조 자체를 지키는 거죠. 법은 그냥 구색에 불과한 거예요. 권력자가 바뀌면 법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겁니다. 법이 있어서 여러 가지의 세금을 거두어서 어려운 사람 도와준다. 이걸 이쪽 인간세계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사랑이라 해요. 사랑. 자애 또는 자비를 베푸는 거예요.

사랑과 자비를 베풀면 이 사랑은 어디서 나온 사랑이지요? 법과 규칙이 제대로 실행될 때 나오는 사랑이지요. 인간들 입장에서. 헤롯왕이 세례요한을 왜 죽입니까? 그건 그 나라를 유대나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왜냐하면 만약에 세례요한을 처형하지 않고 놔둬버리면 너도 나도 불만 있는 거 왕에게 다 권위를 우습게 보지요. 법의 집행자의 권위가 우습게 되어버리면 법은 있으나 마나가 되고, 법이 있으나마나가 없는 게 되어버리면 힘센 자에게 약한 자들이 짓밟히는 것은 뻔한 일이잖아요. 그렇잖아요.

집안에도 군기가 있어야 되고, 그 군기 잡는 사람이 있어야 돼요. 옛날에는 그걸 누가 했습니까. 가장이 했지요. 가장이 누굽니까? 남편이 했잖아요. 요즘은 누가 해요? 요즘은 김장 담그는 쪽이 하지요. 주는대로 먹어. 주는대로. 김장이 짜니 싱겁니. 짜거든 물붓고 싱거우면 소금부면 되잖아.

폭력은 인간 내부가 법으로 구성되어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폭력으로 구성되어있어요. 폭력의 연결망이에요. 따라서 주님께서는 세례요한한테는 미안하지만, 그 폭력에 희생타가 된 거예요. 던져 넣어버립니다. 분명히 세례요한이 외칠 때에 이 세상이 폭력적이지만, 우리 뒤에 오시는 메시아는 너희들 폭력에 못지 않는 더 센 폭력이야. 이야기했거든요. 심지어 도끼이야기를 왜 끄집어내요? 그만큼 폭력적인 거예요.

바리새인들로 체제를 유지하는 그런 폭력같은 것으로 비교 안 될 정도로 완전히 그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불로서 세례를 준다. 불세례가 무슨 뜻입니까? 불을 퍼붓는 거예요. 물세례가 물속에 들어가듯이 불 속에 잠기는 거예요. 단호함이지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심판날이 가까이 왔다. 하늘나라라 하는 것은 요엘서에서 말하는 심판날을 말합니다. 심판날이 가까이 온 거예요. 왔기 때문에 지금 마지막 순간인데 지금 회개하지 아니하면 너희들은 불심판 받는다. 이게 세례요한의 요지였습니다.

그러면 메시아는 뭡니까? 메시아는 심판주에요. 세례요한에게 메시아는 심판주입니다. 왜? 지금 회개 안하면 다 작살나기 때문에. 그럼 세례요한 본인은 뭐예요? 심판주 오기 전에 최후의 기회를 주는 사람이 세례요한 본인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기는. 물속에 들어가서 회개하고 그동안 죄를 씻어내고 그 다음에 내가 두 벌 옷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은 주고, 공무원들 너무 월급 많이 달라고 욕심내지 말고. 이게 뭐예요? 세례요한이 구성하려는 그 세계는 어떤 세계입니까? 여전히 땅의 세계, 땅의 유대교인데 제대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사랑이 넘쳐나는 그런 유대교회 조직을 세례요한이 기대한 거예요. 구약사람이지요.

그래서 마태복음11장13절에 보면,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이 어디까지다? 요한에 까지다. 14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그 뒤에 이 세대가 무엇에 비유할꼬. 이렇게 해놓고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이리 되어있어요.

주님께서 세례요한을 앞장세우신 것은 세례요한이 일종의 정탐꾼 역할을 하는 거예요. 세례요한이 나쁜 걸 이야기했느냐, 고 묻는 거예요. 세례요한이 틀린 소리를 했는가, 그렇지 않잖아.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어떻게 돼요? 세례요한이 바른 이야기를 했는데 이 세상은 세례요한을 어떻게 죽였다? 폭력을 가해서 사형시켜버린 거예요.

그러면 그들이 말하는 사랑은 뭡니까? 세례요한을 폭력으로 죽인 그것이 그들의 입장에서는 사랑의 행위가 되는 거예요. 한 사람을 죽여서 여러사람이 무질서한 깡패들이나 폭력배에 휩쓸리지 않고 이 법 자체를 지켜내는 것이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들은.

그러니 세례요한의 잘못은 사랑을 위해서 세운 이 법에 감히 도전했던 것이 세례요한이 그들보기에는 사형받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들이.

그리고 마태복음11장에서 옥에서 그리스도보고 제자들 보내서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 맞습니까?” 묻는 것. 이 말은 이렇게 이해하시면 돼요. 왜 당신이 내 편을 안드느냐, 왜 나를 안 도와주느냐, 왜 나를 도와주지 않느냐, 내가 이 정도 수모를 당했으면 진짜 당신은 오실 메시아라면 지금이라도 하늘에서 뭐가 떨어져야 돼요? 불이 떨어져야 되는데,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느냐. 다시 말해서 내가 하는 일에 진짜, 내가 당신보다 먼저 온 선지자고, 당신은 내 뒤에 오실 완성하실 분이라면 내가 하는 일과 당신 하는 일이 연속성이 유지되어야 되는데 그 연속성을 찾을 길이 없는 거예요.

한 번 적어볼게요. “왜 당신은 나를 안 도와주는가?” 왜 안 도와주는 거예요? 왜 이 세상의 폭력의 희생물이 되는가, 폭력의 희생물이 되어야 이 세상에도 법이 있다는 사실이 확연하게 하나의 현실로 등장하게 되는 거예요. 현실은 법이다. 나를 지키기 위한 법이 아니에요. 법 자체를 지키기 위한 현실이 이 세상 현실입니다. 법 자체를 지키는 거예요. 인간에게는 법이 없다는 것이 상상이 안돼요. 법이 없으면 뭐 망치들고 남의 집에 가가지고 유리창 깨도 괜찮고 왜 남의 집에 가가지고 유리창 왜 안 깨느냐, 뭐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법이 있기 때문에.

법이 우리들을 가정들을 직장을 얼추 지켜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법은 뭐냐, 현실이 법이고 법이 곧 뭐다? 법이 사랑이다. 이 말이지요. 법이 사랑이에요. 법을 무시하면 뭐가 날아가요? 누가 나를 지켜주지. 지켜줄 게 없잖아요. 이 의문점을 세례요한이 갖고 있었던 거예요. 내가 와서 새로운 나를 만들고 새로운 세계가 이런 세계라고 소개했으면 주님이 전적으로 나를 보호해주고, 협조해주고, 나를 지켜줘야 되잖아요. 요나가 니느웨에 갔을 때에 심판할 때 요나는 하나님과 자기가 단짝이라고 여겨가지고 마음껏 심판을 전했습니다. 사흘만에 다 전했어요.

그런데 누가 안 도와줬어요? 하나님이 요나를 안 도와주는 거예요. 나를 도와주지 않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사랑. 나를 도와주지 않는 것. 나를 세상에 폭력에 희생물이 되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 사랑이 뭐냐 복이 되는 겁니다. 복. 혹시 자녀들 가운데 이름이 ‘복’자 있습니까. 또는 사랑이 있습니까. 누가 이름을 함부로 짓는가.

세례요한이 죽음으로서 율법의 시대는 끝납니다. 세례요한이 안 죽으면 안돼요. 왜? 안 죽어버리면 율법의 시대가 끝나지 않아요. 세례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당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 세례요한까지. 말라기가 세례요한까지에요. 말라기가.

예수님이 말라기를 이룰 때는 연속성으로 이루는 게 아니고 불연속성으로 이루어지는 거예요. 불연속성으로. 연속성으로 이룬다는 것은 말라기 다음에 마태복음이잖아요. 불연속되면 마태복음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말라기에요. 역사가 바뀌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조그마한 종이 공작하나 준비했어요. 간단히 준비했어요.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예언을 믿습니다. 그리고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했습니다. 가까이 왔다. 가까이 왔다는 말은 시간을 수직선상으로 연속적인 단선으로 보는 거예요. 어제 있고 그 다음 그 다음 오늘이고 그 다음 내일 있고. 지금은 내가 회개하고 전하는데 이건 오늘이고, 그 다음에 뭐냐 메시아가 와가지고 불로서 심판한다. 그 순서대로 알았던 거예요. 세례요한이. 단선적인 시간관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자신만만하게 전했지요. 도끼이야기도 하고.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시간을 이렇게 보면, 주님께서 시간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요걸 세례요한의 시간을 이렇게 안에 집어넣어버려요. 거꾸로. 시간이 세례요한의 속으로 파고 들어가 버려요. 미래가. 미래가 세례요한 안으로 파고들어갑니다. 파고들어가 버리면 전에는 단선일 때는 율법 바깥의 세계와 율법세계가 구분되었는데, 율법의 바깥세계, 율법의 완성된 세계, 율법대로 다 심판이 완료된 세계가 요 안에 세례요한 안에 들어와 버립니다.

들어와 버린 이 세레요한이 바로 엘리야가 되고 그 엘리야와 일치된 분이 예수님이에요. 세례요한도 이 점에서 언급했어요. 나중에 온 분이 나보다 먼저 있다. 언급을 했는데 요한복음1장에 그렇게 했거든요. 사실은 나중에 온 분이 사실은 나보다 앞서있다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런데 그 깊은 뜻을 자기는 몰랐지요. 자기는 자기 일에 충실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안 죽이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기 때문에 죽어야 되는 거예요. 말씀과 예언을 가진 자가 죽는 것이 이게 율법 외의 사랑이다. 이 말이에요. 사랑.

한 가지 더 성경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10장에 나오지만 어떤 율법사가 좀 아는 척을 하면서 율법의 핵심은 뭡니까, 하고 물으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했다 말이지요. 율법사가 거기에 동의하면서 그런데 거기서 이웃이 누굽니까, 이웃에 대해서만 궁금해했던 겁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웃이라 하는 것은 율법에 의해서 율법 전체를 갖고 있는 그 결과를 본인이 품을 수 있을 때만 이웃이 발생돼요. 이게 뭐냐 하면 율법이 인간에게 다가갔을 때 그게 뭐로 이어졌다 했습니까. 폭력으로 이어지잖아요. 헤롯이 동방박사를 죽이려고 했잖아요. 베들레헴 2살 애들 다 죽였지요. 그 다음에 다니엘과 세친구에 대해서 느브갓네살이 폭력을 행세했잖아요. 에스더에 가면 하만이 대신 반지 끼고 유대인을 다 몰살시키려 했지요.

왜 그런 짓을 합니까. 특히 가인이 아벨을 죽였잖아요. 왜 인간은 그런 짓을 하느냐 말이지요. 그들은 그걸 하면서도 법을 내세우는 거예요. 법을. 어제 수요일날 제가 설교하는 가운데서 제가 새롭게 알게 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아버지 이삭이 큰 아들 에서한테 하는 말, “줄 게 없다.” 줄 게 없다는 말은, 이게 줄게 없다는 말에 아버지를 나쁘다고 하지 말고, 그걸 받을 게 있다고 여기는 본인이 나쁘다는 생각을 에서가 해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법은 스스로 자신을 법의 희생타로 만든다.” 이게 법의 완성이에요. 법이 나를 보호하고 지켜주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보게 되면 하나님의 법의 완성 약속이잖아요. 약속. 아까 이야기했지요. 법은 심판하기 위해서 온다. 그 심판에서 건지는 것은 언약이라 했지요. 약속. 그러면 그 약속된 자가 이삭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아버지가 이삭을 어떻게 합니까. 아버지가 이삭을 “같이 살자. 내 니 사랑한다.” “저도 아빠, 사랑해요.” 그렇게 인간적인 사랑으로 하게 되면 그게 이웃사랑입니까. 그게. 그게 이웃사랑이에요?

그게 정이지, 이웃사랑이 아니에요. 이웃사랑이 되려면 율법이 축약이 되어야 돼요. 법이 완성이 되어야 돼요. 압축해서 완성이 되려면 법은 스스로 자신을 법의 희생물로 만들어버려야 돼요. 그래서 세례요한이 기존의 인간들의 율법에 의해서 사형을 당하는 것도 폭력의 희생자가 되거든요. 그렇게 함으로서 엘리야의 역할을 다 한 겁니다. 엘리야의 역할.

‘아, 말라기에서 말하는 엘리야는 인간이 율법을 다루는 선상에서는 이루어지는 게 아니구나!’ 라는 것을 세례요한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법이 있음으로서 우리가 인간들의 질서유지에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됩니까. 법이 없는 세계는 도저히 이건 아귀들의 세계, 귀신들의 세계지요. 법이 있음으로서 질서가 잡히고 그 법을 집행하는 권세자가 있기 때문에 권세자에게 복종하라고 로마서13장에서도 이야기했잖아요. 디도서3장에서도 저번에 이야기했고.

권세가 두가지 있다고 했지요. 주일 낮에.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어떤 권세자나 어떤 인간도 이렇게 법에서 보호 받을 생각을 하고, 법으로 사랑 받을 생각을 하지, 법이 준 폭력성을 자기 내부로 집어넣는 복이 주는 그 저주를 자기 내부로 가져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세례요한도 아니에요. 세례요한은 억지로 됐지요. 세례요한은 끝까지 예수님의 선지자 역할을 했기 때문에 바른 소리 해놓고 죽어버린 거예요.

죽어 놓고, 바른 소리해서 죽었다고 자기가 법의 완성자가 아닌 것은 어떻게 아느냐, 오실 그 분이 당신입니까. 묻는 걸 봐가지고 세례요한으로 율법이 마감되게 만들어요. 율법의 한계. 인간의 율법 이해의 한계. 그래서 어떤 인간도 말라기에 있는 엘리야를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세례요한을 보냈지만, 그들이 세례요한을 죽였잖아요. 민중들은 세례요한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알았잖아요. 선지자로 알면 뭐합니까. 기존의 있는 법의 권력이 더 센데요. 세례요한이 죽었다고 사람들이 막 데모했습니까. 그런 거 없어요.

인간은 세례요한 편도 아니고 권력편도 아니고 누구 편이다? 자기 편이에요. 누구든지 나한테 잘해주면 사랑으로 여기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율법을 가지고 우리를 사랑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놓고 하는 말이 이웃사랑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이건 지가 하는 소리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소리를 한다고요. 무슨 사랑을 해요? 자기를 챙기는데 무슨 사랑을 합니까. “그럼 이웃사랑을 못하니까 안 하면 그만이지.” 안 하면 교만하고 악이 되어가지고 마지막 심판이 있는데. 이 계획은 변동이 없어요.

그러면 이웃은 어떻게 등장하는가, 적어볼게요. 이웃은 어떻게 등장하는가, 명령하지 않은 채로 등장해요.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쓱~ 오시는 거예요. 내가 바라지도 않았는데 오신 거예요. 오셔서 나에게 명령하지 않아요. 그 명령하지 않는 것.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랑.

주님 자신이 이웃사랑으로 오신 거예요. 그리고 이웃사랑이라는 말은 지금까지 모든 폭력은 명령에서 온 거예요. 그게 율법체제 안에. 율법체제가 명령이거든요. 그런데 율법 외에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고, 하나님을 흐뭇하게 하는 겁니다. 율법 외에. 율법 지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게 아니고,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게 아니고, 율법 외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하면 기쁘고 구원 받습니까.” 그걸 물으면 안돼요. 그건 아예 성경에 없어요. 주님이 뭘 기뻐하느냐가 관건이에요.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서 우리에게 명령자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시는 자이고 찾아오시는 자에요.

이 점에 연관해서 하나의 예가 그게 뭐냐 하면 바로 광야 때 불뱀 사건이에요. 우리 인간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 광야에서 애굽으로 돌아가자, 까불다가 원망했잖아요. 하나님께서 벌로 불뱀을 보냈지요. 불뱀을 보내서 물리게 했어요. 아프게 했어요. 어떤 사람은 죽은 사람도 있고. 아퍼서 죽어가는 사람도 있다 말이죠.

그 때 하나님께서 치료하는 방법이 뭐였습니까. ⓵번 불뱀 저리 가! ⓶번 불뱀 오라! 하는 거예요. 어느 거예요? 몇 번이었습니까? 불뱀보고 가라한 거예요? 오라한 거예요? 오라했지요. 그 불뱀을 고정화시켰어요. 놋뱀으로 고정화시킨 겁니다. 니가 하나님앞에 불뱀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지요. 네가. 자꾸 하나님 앞에 지켜달라, 도와달라, 해요. 그럴 입장이 아닌데.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이러고 있다고요.

이게 안 돼요. 내가 내 속에 하나님의 미래의 심판과 저주를 내 속에 품을 줄 몰라요. 내빼기 바빠요. 후딱 도망치기 바빠요. 어떻게 하면 행운만 따라오고, 어떻게 하면 내 인생에 저주가 꼬이지 않을까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 쪽은 어느 쪽이었습니까? 세례요한도 그러기를 원했어요. 자기가 힘들지 않기를 원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약속하기를 세례요한을 어떻게 했습니까? 그 인간들이 함부로 다루는 율법의 체계의 폭력에 그냥 미끼로 세례요한을 거기다가 집어던진 거예요. 인간 구조는 끝났다. 인간이 율법으로 만든 구조 질서는 세례요한을 삼킴으로서 그들의 속성과 한계는 다 드러났다고 보여주는 겁니다. 끝난 거예요.

그렇다면 이젠 세례요한 이름으로 구원받는 건 있다? 없다? 없어요. 왜? 세례요한도 율법에 속했기 때문에. 율법 외가 아니고 율법에 속했던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주의 이름으로 나오지요. 자, 주의 이름으로 나왔는데 나온 사람의 특징이 무엇에 비유했습니까? 송아지에 비유했지요. 송아지가 어떤 상태로 삽니까? 그냥 송아지가 정숙해 있습니까. 기도하고 있었습니까. 뭡니까. 천방지축 마구 구애받지 않고 뛰놀아요. 율법 외에 속한 것 같아요. 그야말로 자유인입니다. 자유소.

그리고 그 근거가 주의 이름으로 치료가 된 상태가 그런 상태에요. 치료된 상태가. 또 제가 이리 이야기하면 이런 생각을 하시는 사람이 있어요. 그 송아지가 마냥 철딱서니 없이 뛰어놀 게 아니고 송아지도 자기의 저주를 자기 속에 집어넣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가지고 또 부들부들 떠는 사람이 있을 건데.

제가 말하는 송아지가 뛰어놀 때 도살장에 들어가기 2분 전까지 뛰어놀아요. 도살장에 들어가도 뛰어놀아요. 그러면 되잖아요. 그러면. 세례요한처럼 오실 분이 당신입니까? 안 묻고 전제를 따지지 아니하고 이게 도살장인지 놀이터인지 분간 못하잖아요. 이게.

다시 말해서 내가 나에게 명령할 것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 상태. 나는 나에게서 내 이름에서 출생하지 않았다는 것. 내가 나를 태어나게 한 게 아니라는 것. 바로 오실 엘리야가 나를 출생시킨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말씀으로 나를 출생시킨 거예요. 외양간에 막 뛰어나온 송아지처럼 그렇게 만든 겁니다.

그 치료는 우리 담당 아니지요. 누가 했습니까. 주의 이름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주님은 세례요한을 유도하신 거예요. 죽기를 바라면서 유도하신 겁니다.

지금까지 한 거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세례요한에 관련해서. 외부의 사건이 내부로 들어온 거예요. 들어온다. 내부는 세례요한. 세례요한은 혼자 있는 게 아니고 뭐가 있다? 말라기 계시와 더불어 있지요. 말씀과 더불어 있어요. 말씀.

세례요한이 있는 말씀은 무엇과 분리된다 했습니까? 율법 말고. 율법은 뭐라고 했습니까. 율법은 모든 것을 교만케 하고 악을 만들지요. 그러나 세례요한에 주어진 계시는 율법적인 지적이 아니고 주의 이름이 와서 치료해서 외양간에 송아지 뛰어놀듯이 뛰노는 그 결과물을 세례요한이 품고 이 땅에 뭐로 왔다? 엘리야로 온 거예요. 엘리야로.

주의 이름이 엘리야의 모습으로 왔다 말이지요. 그런데 막상 엘리야로 온 자가 세례요한인데 세례요한과는 노선이 달라요. 율법 노선이 아닙니다. 내 뒤에 율법이 있다, 가 아니에요. 세례요한이 활동하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물었잖아요. “너 제사장이야? 선지자야? 뭐야? 너, 누가 시켜서 이런 일을 해?” 할 때, 나는 제사장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라는 말은 너희들의 율법체제 노선과는 다른 노선이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감히 그분의 신발 들기도 뭐하다. 그분은 내 뒤에 오지만, 내보다 앞서있다.

그 정도가 세례요한 정도 된다면, 그러면 세례요한이 엘리야냐, 하는 문제가 생겨요. 세례요한이 엘리야냐, 구약은 끝까지 그게 율법체제 구조로 담아버려요. 그러면 세례요한은 예수님에게 속했지만, 구조는 어디에 속합니까. 율법적 구조안에 그대로 놓여있는 거예요. 참, 이게 어렵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지요.

우리들 생각은 그렇잖아요. 어떻게 그렇게 주님 앞에 선지자이면서도 왜 “오실 분이 당신입니까?” 말을 왜 묻느냐. 그걸 왜 묻느냐 그 말이지요. 진짜 몰라서 물었어요. 의심돼서. 아, 인생, 세상 끝내야 되는데. 안 끝내는 거예요.

자, 마태복음11장 봅시다. 자기는 지금 정권가진 헤롯왕이 잘못됐다고 지적할 때 왜 자기를 옥에 갇히게 만들고 왜 자기를 죽게 만드느냐 이 말이지요. 그게 하나님의 율법 완성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이건 세례요한의 방식이 옛날 방식이라는 뜻이에요. 구약에 속한 방식이에요. 그럼 구약에 속하지 않은 새로운 노선으로 전혀 다른 노선에서 율법을 완성하는 방식. 그 방식은 세례요한의 몫이 아니고 누구의 몫이다? 주님의 몫이 되는 겁니다.

주님의 어떤 방식인가, 마태복음11장4~5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리 되어있어요. 그럼 여기에 세례요한의 요소와 이게 연속성이 있습니까? 아니면 불연속성입니까? 완전히 불연속적이지요.

왜 불연속적인가, 그 아까 설명했는데 또 설명하면, 세례요한은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 미래의 완성 이리 본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어떻게 했느냐 하면 내가 그 모든 시간보다 앞서 계신 분이 바로 나라는 거예요. 그러면 시간은 뭐냐, 앞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 이미 다 이루어진 것에서 그냥 전개하고 펼쳐지는 것. 그게 구약 성경이지요.

구약보다 먼저 계신 분이 구약을 깔아놓고 그것을 먼저 계셨다는 것을 신약의 내가 한 일이 너희들보다 먼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구약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 소경된 자, 문둥병, 귀머거리, 이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그들은 누가 와서 고치지 아니하면 그들은 고침을 받지 못한다는 거예요.

세례요한은 마태복음3장에서 뭘 하라고 했잖아요.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뭘 하라 했잖아요. 마태복음3장10절,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누가복음3장에서도 지시를 했다고요. 그러나 뭡니까. 아까 했지요. 지시하고 명령하는 것은 뭐가 아니다. 이웃사랑이 아닙니다.

지시하고 명령하는 것은 이웃사랑이 아니에요. 사랑은 명령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와서 그냥 줘요. 만약에 명령을 해버리면 명령에 대해서 했던 결과가 올 때까지 시간이 흐르잖아요. 그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명령없으면 그냥 시간관계없이 이미 완료가 되어버리는데. 명령을 하면 “조금만 기다리세요. 시키는대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시간 틈이 생긴다고요. 제대로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제대로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짤립니까. 그럼 율법하고 차이점이 뭐예요? 율법하고 똑같은 거예요.

누가복음3장11~14절에 보면,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하고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이러면 마지막 불심판 제대로 대비한 거예요? 아니에요? 이게 이웃사랑 아니지요. 훈계하는 거예요.

엘리야. 오실 엘리야가 두 겹으로 되어있었던 겁니다. 한쪽은 오실 엘리야고, 또 한쪽은 이미 오신 엘리야고. 그 둘 사이는 연속성도 있지만, 불연속성이에요. 연속성이라 하는 것은 율법 외에 오셔가지고 치료하는 것, 율법과 상관없이 치료하는 것. 그게 세례요한과 예수님과의 연속성이라면, 그 외의 방법에 대해서는 세례요한이 전혀 모른다는 겁니다.

이유가 뭐냐, 세레요한은 여전히 기존의 율법의 구조 안에, ‘이 구조를 어떻게 하나님께서 구원하실까’ 하고 생각하는 거예요. 요 구조 자체를 박살 낸다는 생각은 못한 겁니다.

주님의 뜻은 이거에요. 속세를 어디서 찾는가, 속세를 절에서 찾는 거예요. 속세를 내 안에서 찾는 거예요. 속세를 피해서 머리 깎고 온 절에다가 속세를 집어넣는 거예요. 절에 밥이 밥맛없거든 서브웨이 베지터블 배달의 민족한테 시켜가지고 “여기 배달하신 분!” 하듯이 굳이 절로 피했다는 게 아무 의미가 없어요. 내가 절만 이야기합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잖아요. 교회도.

그래서 복음은 사랑은 우리의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내부에 들어와요. 그게 바로 새언약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피의 구조에 잠기게 하는 거예요. 옛날에는 물에 잠기듯이, 앞으로는 불에 잠기듯이, 우리들 속에 피에 잠기도록 주님의 그걸 능가하는 모든 죄를 능가하는 그 용서의 구조에 우리를 잠기게 하는 것.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이웃사랑의 증인으로 살게 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 하면서도 뭔가 내 일에 도와줄 것처럼 기대했던 그 자체가 이게 우리의 잘못된 율법적 구조인 것을 저희들 깨닫게 해주시고 주의 사랑이 왔으면 천방지축 막 태어난 송아지모양 세상물정 몰라도 심지어 죽는 자리에 간다할지라도 그것조차 감사하고 주의 일로 여기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안양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정한 보상  (1) 2024.02.24
외지인  (1) 2023.12.21
파과와 치료  (0) 2023.11.04
타는 냄새  (1) 2023.09.28
율법 돔  (0) 2023.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