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출된 복
2023년 12월 6일 본문 말씀: 스가랴 8:9-13
(8: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집 곧 전을 건축하려고 그 지대를 쌓던 날에 일어난 선지자들의 입의 말을 이 때에 듣는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
(8:10) 그 날 전에는 사람도 삯을 얻지 못하였고 짐승도 삯을 받지 못하였으며 사람이 대적을 인하여 출입에 평안치 못하였었나니 이는 내가 뭇 사람으로 서로 치게 하였음이어니와
(8:11)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이제는 내가 이 남은 백성을 대하기를 전일과 같이 아니할 것인즉
(8:12) 곧 평안한 추수를 얻을 것이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산물을 내며 하늘은 이슬을 내리리니 내가 이 남은 백성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리라
(8:13) 유다 족속아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방 가운데서 저주가 되었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너희로 축복이 되게 하리니 두려워 말지니라 손을 견고히 할지니라
이스라엘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시대를 둘로 나누십니다. 성전이 있던 시절과 성전이 없던 시절로 말입니다. 성전이 없던 때에는 저주스러웠던 환경이었지만 성전이 있을 때는 복된 환경입니다. 이렇게 되면 ‘복’이란 ‘하나님의 집’이 있는 환경이요 저주란 ‘하나님의 집’이 없는 환경을 말합니다.
이는 곧 복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없던 시절에 사람들은 ‘자기 집’만 있는 것으로 족한 줄을 아는 환경을 뜻합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복된 상태’를 구상합니다. 세상 살기에 편한 상태를 복이라고 규정하고 싶은 겁니다. 하나님의 집이 있든 없든 내몰라라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심보에서 더 나갑니다. 즉 하나님 집도 챙기면서 자기 집도 챙기겠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도 섬기면서 자신이 복받는 것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들이 모르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집’이 ‘사람 죽이는 집’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내리시는 저주의 이유는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근원부터 밝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인간들은 저주를 받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이미 악마의 지시를 거부감없이 쏙쏙 잘 받아들이는 수용체 노릇을 하도록 악마가 인간의 몸과 정신을 변형시켜 온 겁니다. 이미 인간은 저주에 최적화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집’은 “백성아, 너는 나랑 같이 죽자”고 하면서 불러내는 본부입니다. 성전이 있어야 복이 오는데 문제는 그 복이 저주를 배경으로 해야 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인간은 자진해서 저주받겠다고 나설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정신으로 인하여 저주 환경이 조성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복은 오로지 ‘남은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이 ‘남은 자’를 유다 족속이라고 합니다. 이 유다 족속에서 다윗이 나오고 그 다윗의 혈통에서 메시야가 오십니다. “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3-4)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제거하므로서 이스라엘을 떠오르게 하시고, 유다지파를 제거하므로서 유다지파를 떠오르게 하시고, 모든 인간을 죽임으로서 참된 남은자로서 최후의 참된 인간을 나타나게 하시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따라서 유다 지파는 왜 우리마저 결국 잘리느냐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2:20-22에 잘 나와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46년 째 공사를 벌리고 있는 성전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사흘만에 참된 성전을 지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주위의 유대인은 물론이고 같이 다니고 있는 제자들도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뒤에 모든 사실을 알게 됩니다. 즉 저주받아 죽지 아니하면 성전, 곧 ‘하나님의 집’에 합류될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원리는 구약 내내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메시야가 다윗 혈통, 곧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 유다지파를 따라 오셔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유다가 겪으면서 알게 된 하나님의 일의 취지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8장에서 유다는 아들 세 명, 딸 하나를 두게 됩니다.
그러나 큰 아들이 죽고 둘째 아들마저 죽습니다. 큰 며느리의 이름은 다말입니다. 이방여인입니다. 유다는 생각합니다. 첫째 아들 죽고 둘째 아들 죽은 것은 다말에게 원인이 있기에 다말을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율법으로는 다말은 막내 시동생은 셀라와 동침해서 또 자식을 낳아야 하지만 유다는 그렇고 싶지 않았습니다.
셋째마저 큰 며느리 때문에 죽는다면 하나님이 주신 복이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하든지 막내 아들 만큼은 큰 며느리와 연관 짓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바로 이러한 유다의 의식이 하나님 보시기에 저주스러운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집은 모든 인간을 저주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죽여버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다 집안에게 주어진 언약은 마지막 메시야를 낳는 유다노선이 이어져야 하는 겁니다. 며느리 다말은 잠시 창녀가 되어 시아버지인 유다와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로서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유다가족의 저주에서 유다가족의 복이 나올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소위 ‘복받겠다는 의지’를 고집하는 자에 의해서 저주받게 된 자의 등장이 기반이 되어야 하는 원칙이 유지되어야 성립하는 겁니다.
유다는 자기 집안의 며느리가 부정한 짓을 했어 임신이 된 것으로 알고 당장 불태워기를 요청합니다. 도대체 자기집 며느리를 부정케 한 자로 만든 자가 누구입니까? 그것은 부정했다고 단정짓고 며느리를 잔인하게 죽이려고 하는 유다 본인이었던 겁니다. 즉 인간의 육을 고수하면서 그 육이 복을 받겠다는 시도가 곧 저주의 원인이었던 겁니다.
이러한 저주성의 희생자가 바로 유다의 며느리 다말입니다. 바로 이 계통, 곧 유다의 혈통를 따라 메시야가 오십니다. 곧 언약이 차질없이 성취되고 있었던 겁니다. 유다와 며느리 사이에 쌍둥이가 태어나는데 순서를 바꾸어 먼저 태어난 자가 베레스이고 그 베레스의 부인인 이방여인 룻이 다윗의 증조모가 됩니다.(룻 4:18-22)
즉 희생자가 출몰하는 족보가 구원계통이었던 겁니다. 이 계통이 남은 자 계통인 유다족속이며 이 유다족속을 통해서 최후의 남은 자이자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십니다. 모든 인간이 악마스러운 이 저주의 환경에서 철저하게 악마에게 충성하고픈 마음을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이 마음씨는 그 어떤 경우에도 복받기를 포기하지 않고 성공하고 싶어하고 실패를 싫어하는 태도로 변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저주를 피하고 복받는 쪽으로 피신하라!는 악마의 사주에 철저하게 따르고 충성하는 인간이 되어버린 겁니다. 복은 돌출하는 겁니다. 우리가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복이 출몰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곧 복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분의 환경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천국에 적합한 몸과 정신으로 변형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1강-스가랴 8장 9-13절(돌출된 복) 231206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가랴 8장 9절에서 13절까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집 곧 전을 건축하려고 그 지대를 쌓던 날에 일어난 선지자들의 입의 말을 이 때에 듣는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 그 날 전에는 사람도 삯을 얻지 못하였고 짐승도 삯을 받지 못하였으며 사람이 대적을 인하여 출입에 평안치 못하였었나니 이는 내가 뭇 사람으로 서로 치게 하였음이어니와,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이제는 내가 이 남은 백성을 대하기를 전일과 같이 아니할 것인즉, 곧 평안한 추수를 얻을 것이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산물을 내며 하늘은 이슬을 내리리니 내가 이 남은 백성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리라, 유다 족속아,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방 가운데서 저주가 되었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너희로 축복이 되게 하리니 두려워 말지니라 손을 견고히 할지니라” 아멘.
복과 저주와 서로가 이것은 개인이 소유하고 집단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상태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이 상태에 관여하는 것이 이슬이고 또 짐승까지 거기에 개입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복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 전체가 복된 상태로 전환되는 바로 그러한 상태를 복된 상태라고 언급을 해 주시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점에서 어떤 요소를 놓쳤느냐 하면 자신 혼자 자기 혼자 힘들다는 것을 그걸 저주로 간주했을 때 그 저주 개념이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너만 힘든 것이 아니고 짐승도 같이 힘들고 그리고 대자연도 거기에 부응하여서 이슬을 내지 않았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았다. ‘포도나무가 인간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포도나무 그 자체도 저주를 느끼고 그리고 복을 느끼는 그런 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그동안 인간들이 복은 오직 나에게만 와야 되고 저주는 절대로 나에게 오지 않아야 된다는 그 생각 자체가 잘못된 생각이에요.
복과 저주 둘 다 환경이 환경 그 자체가 저주스러운 환경 또는 환경 자체가 복스러운 축복의 상태, 상황. 그런 식으로 복과 저주가 제공된다 그걸 의미하는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할 일은 뭐냐? 여기서 인간의 할 일이라는 것은 없고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할 일이 뭐냐 라고 이렇게 수정 질문을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인간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은 뭐 특별하냐? 특별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도달된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 관계에 놓여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집니다.
그러면 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대로 해서 저주스러운 상황이 복된 상황으로 바뀔려면 이스라엘은 뭘 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지시하신 게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집이에요. 하나님의 집입니다. 이스라엘 집이 아니에요. 사람이 살려고 짓는 집 말고요. 인간이 자기가 주인 같으면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니까 타인이 되는겁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모든 세상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살고 행동하는데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면 안되고 내가 아닌 분을 위해서 존재 해야된다는 그것을 언약을 통해서 지시받는 자들이 바로 이스라엘 되는겁니다.
내 일도 아닌데 나의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일 해야된다? 인간으로서는 상당히 어색하죠. 어릴때부터 양육 받은 그 모든 양육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겁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일본말로 이야기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시다바리가 되는겁니다. 종이 되는거죠. “내 집 지어라. 그러면 저주가 복으로 바뀐다”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에요. “내 집 지어라. 니집 아니야. 내 집이야.” 니가 그동안 저주를 받았던 이유가 바로 너의 일을 해서 그런거죠. 너의 일을 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오늘 본문은 뭐냐? 성전을 짓기 전과 후로 이렇게 나눕니다. 시기를 둘로 나눠요.
전에 성전을 건축하기 전에는 뭐냐? 10절에 보면, “그날 전에는 사람이 삯을 얻지 못하였고 짐승도 삯을 받지 못하였다” 돼 있는데 여기에 삯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삯이라는 말은 인간이 일의 대가를 두고 삯이라고 이야기해요. 노동의 대가죠. 자, 여기서 우리가 한번 정리해 봅시다. 노동이 뭐냐? 우리의 상식에서 약간 더 깊이 한번 들어가 봅시다. 인간의 노동은 자기가 일하는 것을 노동이라고 한다. 어떤 대가를 위해서 일하는 것을 노동이라 한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게 노동이 뭐냐 하면 교육 받는거에요. 이 세상에 노동치고 교육 안 받고 학습 안 받고 현장 실습 안 하고 취업되는 경우가 없어요. 노동은 일할 환경에 의해서 내가 변형되는거에요. 이게 상당히 중요한거에요. 새로운 환경이 되게 되면 우리의 일상적인 생각을 해봅시다. 나는 현재 나인데 새로운 시기가 오면 나는 그 시기에 나는 내가 그 시기에서 열심히 일해서 그래서 돈을 벌어야지 그렇게 일방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걸 생각해보세요.
내가 어디 가서 돈 벌려고 하는데 나에게 일을 시키는 그쪽에서 나의 변형을 요구하게 돼요. 나의 변형을. 고3 같은 경우는 그래요. 고3은 시험치면 대학 들어가면 대학 생활한다. 고3있던 내 모습이 대학에 합격하게 되면 이제 대학 생활하면 된다. 이것만 생각해요. 아주 철이 없어도 보통 철이 없는게 아니에요. 그러나 대학에 딱 들어가게 되면 교수가 요구하는게 있어요. “니 수학 기초 다 뗐어? 내 지금 강의 할건데 물리학 서론 강의 할건데 수학 미분방정식 안되면 이공계 이거 내 강의 학점 못 따.”
그러면 학생들이 “고등학교 때는 이런 이야기를 안 했는데요.” “그러니까 니는 고등학생이 아니야. 지금 니가 변형돼야 돼. 니가 사고방식이 변형 되어야 돼.” 고등학교 때 대학 들어가서 미팅가고 어디 엠티가고 놀러가고 지금 그런 철딱서니 없는 생각이에요. 이미 고등학생 끝나고 대학이 들어가 버리면 그 환경에서 요구하는 바가 있어요. 이게 변형입니다. 이게 왜 성경에서 중요하냐 하면 인간세계에서는 사람들이 뭐 마귀나 누구하고 상대를 하려고 해요. “마귀야 오라, 내가 한바탕 붙겠다.” 이렇게 하는데 마귀가 바보가 아니에요.
어떤 식으로 하느냐 하면 마귀는 이 세상의 환경 속에 인간에게 인간을 어떻게 다루느냐 하면 마귀의 지시에 적합한 수용체로 모든 인간과 정신의 몸을 변형 시키는 거에요. 변형시킵니다. 다른 소리는, 주의 소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들리지도 않아요. 마귀 말만 쏙쏙 잘 들리고 복종, 충성 할 수 있는 정신과 인간의 몸으로 이게 변형이 되게 돼 있어요. 뭐 이거 그런 예는 많지요. 교회 안 나오다 교회 오게 되면 소위 쉽게 말해서 분위기 파악 해라. 분위기 파악하라는 거에요. 그러면 그 교회라는 환경이 요구하는 인간상이 따로 있어요.
그걸 따라줄 때 그걸 노동이라고 하는겁니다. 노동. 대학 졸업하고 회사 가게되면 “나 이제 회사에서 가방들고 일해가지고 그리고 따박 따박 월급가지고 내 가정을 일구어야지.” 이렇게 아주 순진하게 안일한 생각을 해요. 회사 딱 가게 되면 아침에 책상 딱 앉았다. 앞에 컴퓨터 탁 틀면 오늘 일과 메일, 일과가 메일로 백 열까지 쭉쭉 내려옵니다. 쭈르륵 내려와요. “아침부터 이거하고 이거하고 이거하고 이것까지, 점심까지 이거하고 오후에는 이거하고 이거안되면 퇴근시간까지 다 반납하고 이거하고 그리고 집에 가” 딱 내려와요. “나는 커피나 따르고 복사만 하면 됩니까?” 무슨 복사하는데 월급을 3, 400 주는게 어디 있어요.
커피 따라주는데 그거 뭐 왜 돈을 그렇게 주겠어요? 어떤 조직에는 철저하게 그 사람으로 하여금 ‘조직맨’, 그 조직에 적합한 사람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조직의 힘이에요. 구조의 힘입니다. 이 세상은 신이 있어요. 이 세상 신은 뭐냐? 악마입니다. 악마는 인간을 그렇게 어떻게 다루느냐? 악마 말만 들리고 악마의 말만 순종하도록 인간을 변형시키는 작업이 이 세상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이루어지는 방법은 뭐냐? “니 복 안 받을 거야?” 딱 한마디에요. “니 나중에 출세 안 할거야? 니 욕망 있잖아. 니 욕망 달성 안할거야? 니 남한테 자꾸 뒤떨어질래? 니 남하고 성공하고 출세해야지. 그러니까 저주를 피하란 말이야. 저주를 피하고 잘 되는 쪽으로 가야 너는 사람에게 인정 받는 사람이 되는거야. 어디 가도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
이게 마귀의 전략입니다. 방금 제가 후딱 이야기했죠? 마귀의 전략은 무엇 피해라? 저주를 피해라. 오늘 본문은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저주를 거쳐야 복이 와요. 이게 성경입니다. 저주를 기피하지 말고 피하지 말고 저주를 감내하고 저주를 감수해야 저주를 받아내야 비로소 생각하지도 못한 하나님의 복이 옵니다. 이유가 뭐냐? 인간은 복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성공할 자격이 없어요. 처음부터 다시 해볼게요. 오늘 본문 내용이 뭐냐 하면 이거에요.
하나님이 복이냐? 축복이라 하는 것은 복의 상태가 되고 저주상태가 되는 그 토대는 성전의 유무입니다. ‘성전이 있느냐 없느냐’에요. “내가 여기 있으니까 하나님 복주세요.” 이거는 마귀가 만든 망상이죠. 성경을 보게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집을 위해서 하나님이 있어요. 이땅이 하나님의 집이에요. 하나님의 집이 현재 있으면 복이 오고 하나님의 집이 없으면 집이 없다는 말은 이 땅은 저주 받아 마땅하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는 것은 너희들이 하나님의 지대를 쌓고 전을 건축하게 되면 그것은 뭐냐 하면 드디어 너희에게 복이 온다는 거에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어디를 연계하느냐 하면 나와 복과 연관 되는게 아니고 나 말고 하나님의 성전이 있음과 복과 연관이 되어있고 하나님께서는 성전이 없다면 그 자체가 나에게 저주가 오는거에요. 그러면 인간 세계에 있어서의 성전이라 하는 것은 필수 요건이 아니고 인간들은 성전을 굳이 필요로 하지 않아요. 내 집 있으면 되지 하나님의 집이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귀찮은 일이에요. 그런데 내 집있어 내 행복하게 살면 되잖아. 그 자체가 하나님의 집이 없다는 조건에 부합되어서 그 자체가 저주상태입니다. 노동의 삯은 백날 배워봐야 너희들이 기대하는 그 월급 그래 그 성공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인간이 아니고 언약과 관련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언약과 관련된 거에요. 뭐 이방나라야 어떻게 하든 그거는 뭐 저주 상태이기 때문에 신경쓸 것 없고 오늘 스가랴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지는데 그들을 통해서 어떤 경우를 복이라 하고 어떤 경우를 저주라 하느냐 하는 그것을 이스라엘 사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확인해주는거에요. 얼마나 하나님이 친절하십니까? 정말 하나님이 너무 친절해요. 자, 그다음이 문제에요. 그러면 “지금 성전을 짓고 있는데 이 성전을 우리가 지으면 복이 옵니까?”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어요. 성전을 짓기 시작한 후부터 이슬이 오면서 전에처럼 살지 않고 이 약속의 땅이 살기 좋은 조건으로 드디어 무르익기 시작 하는거에요.
그럴 때 하나님이여, 이제 성전 지었으니까 이 성전 짓는 것이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성전을 지은 것인지 아니면 그냥 성전 지으면 복 온다 해가지고 우리 마음대로 성전 짓는 것인지를 어떻게 그것을 구분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이 또 성립돼요. 아주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너 교회 나가야 복 받는다. 그러면 내가 교회 나온다는 것이 하나님이 생각하는 교회나오는것과 내가 교회나와서 복받겠다는 그 교회나오는것과 이게 같은 생각이냐를 무슨 수로 확인되느냐 하는 겁니다. 교회에서 헌금하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헌금을 합니다. 목사가 말하기를 “헌금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는 바입니다. 옛날 구약 때 제사장에게 십일조도 하고 헌금했으니까 여러분들도 성도 같으면 헌금을 하세요.”라고 하는 거에요.
그럴 때 목사가 그렇게 이야기했을 때 교인들은 무심코 목사가 시켰으니까 “나는 그러면 헌금 하라매? 헌금 합니다? 복 안 주기만 해봐라. 30배 60배 100배. 완전히 헌금한 액수 보다 30배나 60배 100배 안 오기만 해봐라” 이렇게 경솔하게 생각하거든요. 그러나 좀 더 생각해보세요. 내가 하나님이 “헌금 하라” 하나님이 헌금하라는 이야기를 신약 때 한 적이 없어요. 없는데 하여튼 구약 때 있다 하고 하나님은 주시는 하나님이지 받는 하나님이 아니거든요. 헌금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성령께서 “야 니, 헌금하라.” 했을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헌금을 했어요. 했는데 뭐가 사단났냐하면 내가 헌금했다는 이 내 뜻과 하나님이 헌금을 받으시는 헌금의 뜻과 서로 사맛디 아니할세. 이게 맞지가 않네요. 맞지가 않아요.
그것은 하나님이 연이어 주어지는, 하나님이 계속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을 변형시킵니다. 오늘 나는 헌금을 하는 것을 주의 뜻이라 여겼는데 내일 되면 “아, 어제 생각했던 그 헌금의 뜻이 주의 뜻이 아니었구나. 내 욕심이 가미된 뜻이었구나.” 내가 저주 안 받고 복 받겠다는 그 음흉한 노림수가 합류된 그러한 몸짓이었다는 것을 어제가 지나고 오늘 되면 파악하는 거에요. 그러면 오늘은 이제 옳다고 본거죠. 내일되면 “오늘 생각한 것이 그게 아니었구나. 그 뜻이 아니었었어.”라고 또 다른 새로운 의미를 주께서 허락해 주시는거에요.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마지막 남는 게 뭐냐 하면 성전 짓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예배참석하고 교회참석하는 내가 잘립니다.
이게 주의 뜻이에요. 뭔가 했는데 그 한 내가 하는 나를 잘려요. 잘린다는 말은 죽는다는 말이에요. 그 죽는다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바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는게 원하는 바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집, 성전은 인간을 죽이는 집이기 때문에. 인간을 죽이는 집. 인간을 죽이는 힘이 거기서 나와요. “나 저주 받기 싫어요 하나님. 나 복받고 싶어요.” “이리 와, 이리 와. 내가 죽여줄게, 그 생각.” 그게 틀려먹은 생각이었어요. 그러면 내가 죽어버리면 나 시킨대로 했는데 그럼 복 받을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이게 이제 결정적이에요. 복받을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해서 복받을 사람을 따로 거기서 생산해내요. 내가 받는 게 복이 아니고 어떤 분이 돌출하는게 복이에요.
그분이 누구냐?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복은 내가 받는 게 복이 아니고 복 받을 자격도 없는 인간들 무리에서 뭔가 하나의 돌출하는, 돌출이라는 말은 미사일 로켓이 쏠 때 숲속에서 로켓 탁 올라오잖아요. 없는 데서 돌출해서 솟아올라 오잖아요. 주님께서는 이 땅에 어떤 인간도 복 받을 사람 없고 저주에 합당해요. 저주에 합당한데 여기서 무엇이 새로 생기느냐? 복이 생겨요. 복받을 사람이 생깁니다. 유일하게.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두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두 가지 다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하는 그것을 가지고 유다 족속이라 하고 두 번째 같은 뜻으로 그걸 뭐라 하느냐 하면 남은 자라고 하는거에요. 유다 족속, 남은 자. 남은 자, 유다 족속 같은 뜻입니다.
솔로몬 이후에 이스라엘 나라가 두 조각 나는데 한쪽과 북쪽 나라 남북으로 나눠져요. 남쪽과 북쪽의 차이점이 있어요. 남쪽에는 유다 족속인데 유다 족속에 뭐가 있느냐? 성전이 아직도 유효하게 있습니다. 북쪽은 열 지파가 있었는데 열 지파의 특징이 뭐냐? 성전이 없어요. 잘립니다. 북쪽을 봤을 때 남쪽은 남은 자가 되는거에요. 그러면 우리들 생각에서는 “야, 유다 지파는 이제는 복 받았겠네.” 아닙니다. 유다 족속, 남쪽 유다 지파 자체를 또 작살 내게 자근자근 또 썰입니다. 썰어가지고 아예 톰배기 썰이듯 다 썰어가지고 아예 훅 불고 도마에서 없애버려요. 어떤 인간도 남은 자에 적합지 않다는 것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보여줍니다. 어떤 인간도 복 받기에 적합한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저주나 받아라.” 이거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 유다 지파만 남은 자라 하는 말이 이게 “하나님께서는 실효성이 없는 괜히 하는 이야기잖아”라고 생각 하실거에요. 로마서 1장 3절에 보면 하나님께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다. 그러니까 다윗의 혈통. 다윗이 유다 지파에요. 유다 지파가 유효한 거에요. 유다 지파가 유효하기 위해서 유다 지파로 자처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저주로 돌려버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구원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저주로 돌려버려요. 이스라엘을 다 죽임으로써 죽는 이스라엘 속에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 이스라엘 속에서 주님께서 친히 야곱 이스라엘 되시고 친히 유다 족속이 되는겁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아주 어려워 보이지만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쉽게 이야기할 테니까 잘 들으세요. 쉽게 이야기하면 뭐냐? 죽었다가 살아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사람 아니다. 이 말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지 아니하면.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순서를 먼저 ‘죽었다’를 먼저 지내요. ‘죽었다’를 먼저 지내줘요. 죽는데 그냥 죽지 않습니다. 저주받아 죽어야 돼요. 이 땅에 태어난 모든 혈육은 저주받아 죽어야 됩니다. 왜? 아무도 다시 살 자격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요한복음 2장에서는 그걸 가지고 성전이라고 하는 겁니다. 자, 성전은 제가 아까 말씀드립니다. 성전은 뭐냐? 성전은 사람 죽이는 곳이에요.
더 정확하게 말해서 사람 죽이는 이유를 밝혀 주는 곳이 성전이에요. 다시 말해서 성전은 하나님의 집인데 성전에서 사람을 죽인다는 말은 ‘어떤 인간치고 하나님의 집에 동거할 수 있는 자격자는 이 땅에 아무도 없다’라는 것을 밝혀 주는 게 성전입니다. 그 성전이 성전기능 되기 위해서 요한복음 2장 21절 22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20절부터 22절까지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비아냥댔어요.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짓는다 하니까 유대인들이 같잖아서 이렇게 합니다. 성전 두드려보더니, “성전 이거 46년째 짓는거야.”
근데 46년째 되어도 다 못 지었어요. 그만큼 대단한 공사였습니다. 46년이에요. 숫자 계산하려고 하면 복잡해요. 1년 곱하기 365일 계산하면 복잡한데 주님께서는 복잡하지 않아요. 사흘 만에 성전 짓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을 사흘 만에 지어요. 이 이야기를 누가 들었느냐 옆에 제자들이 들었어요.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유대인들이 못 알아 듣는건 당연하고요. 예수님 따르는 제자들도 예수님 말을 못알아들어요. 못알아 듣는데 나중에 알아듣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의 복이 뭐냐 하면 오늘날 우리의 복이 뭐냐, 제자들의 복이 뭐냐? 예수님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귀에 들어오는거에요.
뭐라고 되어있나 하면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되어 있어요. 성전은 사흘 만에 짓는 게 뭐냐 하면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살아나는 그 일로 인하여 이 땅에 인간 손으로 지을 수 없는 성전, 그래야 그게 하나님의 집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인다는 것이 우리를 지금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저주 속에 있는 우리를 복으로 이동하기 위해서 “내 너 친히 내가 너를 죽여줄게”라는 말씀을 하신 거에요. 얼마나 고맙습니까? 뭐 안 죽을려고 안 죽으면서 복은 복대로 받을 려고 애쓰는 이거. 이거는 그것 자체가 저주에요.
복으로 갈려면 그렇게 복 받으려는 나를 주께서 없애줄 때 우리는 곱게 죽어야 돼요. 죽으면 주님께서 우리를 다시 살려줄 때 “아, 그 말씀이 그 말씀이었구나.” 우리가 아무리 애쓴들 저주밖에 안 받고 복 받는 것은 주께서 우리를 자기가 산 것처럼 그 영을 보내서 예수님이 성령에 의해 산 것 처럼 그 성령이 우리를 살려줄 때 우리는 복 받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 입장에서는 어떤 일을 하느냐 하면 천국에 천국 상황에 복된 상황에 합당한 인간으로 변형 시켜주는 것이 하나님으로서는 관심사에요.
“아이고 저 인간 저거 천국 가야 되는데. 아, 천국 가야되는데.” 지금 마귀 말 만 잘 듣는 인간으로 변신되어있거든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마귀 말에 최적화 되어있어요. 그래서 마귀가 뭐라고 협박했느냐 하면 “니 그래하면 망한다, 실패한다. 니 그러면 인간 대우 못 받아. 열심히 노력해. 그러면 너는 성공할 수 있어.” 이게 우리 귀에 쏙쏙 들어오는지. “그래, 성공. 그건 내꺼야. 나는 실패하기 싫어.” 이런 소리가 얼마나 쏙쏙 들어오는지요. 주님은 그 반대에요. “열심히 살아. 내 너 죽여줄게. 놀지말고 열심히 해. 내 필히 너 열심히 한 삯 아무것도 너는 허무하게 삯을 받지 못하고 쫄딱 망하게 해 줄테니까.”
이 세상 인간 치고 그 말을 기쁘게 들을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악마에 최적화되어있기 때문에.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야, 진짜 왜 이걸 몰랐을까?” 주께서 말씀 하나가 천국에서 최적화된 사람으로 변형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악마 말에 친근성을 갖고 있던 인간을 하나님이, 우리가 스스로 그 발을 못 빼요. 우리는 너무 길들여져서 주께서 빼주시겠다는겁니다. 자, 그러면 그 빼내는 어떤 식으로 빼내느냐? 그것만 알면 오늘 설교 끝나는 거에요. 어떤 식으로 빼내주는가? 빼내 주는 방법이 창세기 38장에 있습니다. 창세기 38장에 누가 나오느냐 하면 유다가 나와요. 아까 오늘 우리 스가랴 본문에서 유다 족속이 남은 자라고 했지요. 그 유다 족속의 원조가 유다입니다.
38장에 보면 유다가 이방 여자하고 결혼해서 아들 셋 놓고 딸 하나 놓습니다. 아들 셋 놓고 딸 하나 놓는데, 아들 큰아들 죽었어요. 큰아들 죽었습니다. 큰아들 이름이 ‘엘’인데 그가 죽었어요. 그다음에 또 아들 나았는데 이름이 ‘오난’이에요. ‘오난’ 그 아이도 죽었습니다. 이럴 때 유다라는 아저씨가 있는데 그 아저씨 안에 아저씨에게 아들 셋 있고 딸 하나 있는데 벌써 아들 둘 작살 났어요. 죽였어요. 죽였을 때 여기서 유다라는 인간이 이 저주스러운 상황에 최적화된 자기의 본심을 팍 들어 내요. 숨길 수 없습니다. 아들 셋 중에 둘 죽었으니까 아들 하나는 내가 지켜줘야 되겠다. 근데 아들 둘이 왜 죽었는가를 조사를 해봤어요. 탐정 불러다가 조사를 해보니까 이게 그 큰아들 부인 이름이 이방 여인인데 이름이 다말이에요. 다말.
그 다말이 결혼을 했는데, 큰아들 며느리죠, 며느리가 다말인데 큰아들 죽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큰아들 죽었으면 그 집안에 대를 잇기 위해서 그 형수는 남아있고 아들은 죽었잖아요. 그 형수가 시동생 오난하고 혼인해야 돼요. 오난하고 혼인해야 되는데 그 오난이 자기 형수하고 동침을 해서 애를 낳아봤자 이건 자기 아들이 안되는걸 알고 결정적 순간에 그 형수 몸에다가 사정을 안 해버리고 피해버렸어요. “어짜피 내 애 아닌데 내가 애 낳을 필요가 뭐 있느냐. 나는 새장가 들란다” 이렇게 하니까 하나님의 율법에 위반했다고 둘째 아들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남은 것은 아들 하나 셋째아들 있거든요. 셋째아들하고 이제 큰 형수하고 혼인을 해야 하는데 그 셋째 아들 이름이 셀라가 아직까지 어렸어요.
어려가지고 동침이 가능하지 않아요. 그래서 기다려야 돼요. 남성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돼요. 근데 유다 입장에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기다려봤자 또 죽을 것 같은 거에요. 왜냐하면 여자하나 잘 못 들여가지고 아들 죽여놨지, 그다음 두 번째 죽었지 나머지 세 번째 애까지 결혼하면 세 번째도 죽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차일피일 미뤘습니다. 다말이 저 시아버지보고, “아버님, 빨리 대를 이을 려면 셋째아들 있잖아요. 셋째아들하고 관계 맺도록 좀 해주세요. 그래야 하나님의 축복의 계통이 설게 아니겠습니까” “그래, 알았다.” 알았다 해놓고 보나 마나 또 죽을꺼니까 아들을 빼돌릴 생각을 했던 겁니다.
그때 유다가 세 번째 딸이 죽어요. 딸이 죽어요. 진짜 하나만 남았어요. 딸이 죽고 난 뒤에 “하, 이제는 셀라 빼놓고 다 죽었구나”해가지고 이제 위로받기 위해서 유다가 여행 가서 거기서 누굴 만났느냐 하면 자기가 마음 풀이하기 위해서 창녀를 찾았다가 그 창녀하고 관계를 맺습니다. 창녀하고 관계를 맺어 가지고 자기가 스스로 위로받고 오는데 이 창녀에게 “내 당신 값을 치러줄게. 염소를 줄게. 염소를 주려고 하니까 지금은 염소가 없고 나중에 염소 줄게.” 그러니까 그쪽에 창녀의 모습을 한 그 여자가 하는 말이 “그렇다면 준다 안준다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뭐 보증물을 미리, 입싹 닦고 가면 안되니까, 보증물을 달라.” 이러한 요구조건 자체가 완전히 확실하게 창녀라는 것이 분명해졌어요.
“뭐 줄까?” “당신이 나에게 뭘 주느냐 하면 당신의 도장하고 끈과 당신의 지팡이를 일단 임시적으로 내가 보관하겠습니다.” 이렇게 된거에요. 그리고 난 뒤에 친구한테 자기는 안가고 친구보고 염소 맡겨놓고 염소 줘라 했어요. 근데 친구 하는 말이 우리 동네에, 이게 딤나인데, 딤나라고 중앙에 있어요. 가사하고 헤브론 중앙에 딤나라는 지역이 있는데, 거기서 하는 말이 “우리 동네는 창녀란게 아예 애초부터 창녀가 없었대요.” 그러면 유다가 있다가, “그럼 뭐냐?” 몇 달 뒤에 석 달쯤 뒤에 자기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유다가 참을 수 없어요. “이게 우리가 어떤 집안인데. 하나님 있는 집안인데 며느리가 그새 참지 못하고 행음을 했어? 그러면 그런여자는 우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죽여버려야 돼.”해서 심문을 합니다.
“야, 며느리. 니하고 같이 잤던 남자가 누구야? 남자가 어떤 남잔데?” “남자가 이런걸 맡겨 놨습니다.” “어떤걸 맡겨놨는데?” 도장, 끈, 지팡이를 딱 내놔요. 여기서 유다가 뭐라고 하느냐하면 하나님의 그 남은 자라는게 철저하게 내가 남은 자, 하나님의 언약에 축복된 사람이라고 남겠다고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서 배제 시키는 그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거에요. “나는 계속 하나님의 복을 받고 싶어. 복 받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 어떻게 하든지 반듯하게 살아서 하나님 잘 믿어서 나는 하나님의, 이 힘든 세상 벗어나서 천국가야 돼”라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그 본색을 들추어내서 “너는 못가”라는 것을 분명히 새겨주는 일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어떤 인간도 천국갈 수 없고 어떤 인간도 복 받을 자격 없어요. 중요한 것은 유다가 그걸 알았다는 거에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유다가 이런 말을 합니다. “너는 나보다 옳다.” 그렇게 욕을 했던 며느리보고 “며늘아기야. 너는 나보다 옳다” 이 말은 뭐냐. 니가 옳았고 내가 잘못됐다. 너는 우리 집안을 위해서, 우리 집안의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니가 창녀도 아니면서 창녀이어야 했던 그것이 너에게 얼마나 큰 희생이었던가. 너의 의로운 희생 덕분에 우리 집안이 드디어 임신을 하고 대를 이었다. 내가 아는 셀라 계통이 아니고, 너하고 너가 임신한 그 계통으로 하나님께서는 복을 우리 집안에서 거두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돼요. 나는 완전히 쪼다 되고 나를 쪼다 만드는 아주 내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이바로 축복노선이 우리를 관통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저주를 내가 처음부터 저주 안에 있었고 이 저주 안에 있다는 것이 이게 축복의 바탕이 된다는 사실을 유다는 발견했지요. 그렇다면 그 뒤에 유다에서 예수님이 마지막 남은 자니까, 그 유다 노선에서 계속해서 이런 일들이 연이어 터집니다. 유다 노선에서. 유다 집안에서 발견했던 유다의 인식변화. “나는 내 자식을 잘 건사해야 돼”라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처단했다는 사실. 내가 복 받기 위해서 자식을 잘 키워야 된다는 이 자체가 얼마나 저주스럽고 마귀적 생각인 것을 발견한 사람. 그 발견한 경우의 연속으로서 하나님께선 예수그리스도와 이렇게 이어지게 하나님께선 일하시는거에요. 먼저 저주가 찾아가고 그 저주 속에서 우리는 복받을 자격없음을 확인하면서 하나님께서 유일한, 내가 복받는게아니고 유일한 복은 예수님이 바로 복이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는겁니다.
그러면 그 과정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바로 룻기에 나옵니다. 룻기 4장 18절에서 22절 쭉 보게 되면 거기에, “베레스의 세계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았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아까 예수님은 누구의 자손이라 했습니까?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죠. 자, 이 다윗의 계통이 나오는데 아까 창세기 38장에서 끝에 보게 되면, 30절에 보면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그 형제 곧 손에 홍사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여기에 베레스. 다시 말해서 유다하고 며느리 다말하고 혼인은 안 했어요. 그냥 동침을 해서 쌍둥이를 낳았는데 그 쌍둥이 첫째아들이 베레스고 그 베레스 계열, 그러니까 유다는 잘못생각했고 잘못된 생각 때문에 며느리가 창녀가 되어야 될 그 희생. 너 같은 것은 불타버려야돼.
맞아요. 창녀는 불타버려야돼요. 그 불타버려야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더러운 존재인 것을 알면서도 더러운 존재를 하게 했던 그 정신. 그 정신 계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는 거에요. 모든 인간이 스스로 구원받겠다는 그 마귀 생각을 없애기 위해서. 니가 무슨 자격으로 천국을 가요. 못가요. 인간은 자기가 안 죽을려고 합니다. 왜? 자기가 살고자 해요. 그러나 성전은 뭐냐? 우리를 죽이는 데입니다. 죽어야 살아요. 안 죽고 사는 법은 없어요. 그게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지 잘난 맛에 사는 것은 그거는 마귀와 단짝입니다. 그 계통, 그 베레스 계통에 누가 나오느냐? 룻이 나와요. 이방 여인 룻이나옵니다.
그리고 그 베레스 계통에 누가 있느냐 하면 살몬이라는 사람이 나오거든요. 살몬은 누구하고 결혼했느냐 하면 역시 이방인, 여호수아 때 기생 라합. 라합과 그 베레스의 계통에 살몬이 둘이 혼인을 해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가 이새를 낳고 드디어 이새에서 다윗을 낳고 그 다윗의 후손이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에요. 이게 바로 남은 자 계열이에요. 남은 자 계열. 저주를 아는 자의 계열. 저주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인정하는 계열. 저주 없는, 저주받아 마땅히 죽어야 됨을 그걸 받지 아니하면 그걸 인식하지 못하면 다시 사는것도 없습니다. 저주 받는자들은 자기가 저주 받는걸 모르고 무조건 복 받아야된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남보다 성공하고 잘되어야 되고 실패 없어야 되고 남한테 칭찬 받아야되고 이 땅에서 으쌰 으쌰하고 “아이고 니 잘한다” 그 소리 들어야 되고 그것이 바로 악마의 세계에 최적화된 그 자체가 저주스러운 인간이에요.
그런 인간밖에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인간을 위해서 다말 같이, 그리고 룻 같이, 기생 라합 같이 희생을 해주셔서 죽어마땅함을 깨닫게 하시고 그리고 다윗의 유일한 남은 자, 부활하신 그분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너는 내가 너희를 다시 축복된 사람으로 내가 변형시켜줄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남은 자에게 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내가 원하고 희망했던 것이 실은 마귀가 우리에게 세뇌 준 교육방식이란 사실을 저희들 깨닫게 해주시고 주께서는 놀랍게도 천국에 합당한 사람으로 맞추기 위해서 그동안 내가 알던 나의 소망을 꺾어버리고 주님의 소망을 우리에게 심어주시니 그것을 통해서 우리 주님의 희생을 새삼 발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