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초 인간

아빠와 함께 2023. 12. 13. 22:26

초 인간

2023년 12월 13일                     본문 말씀: 스가랴 8:14-17

(8:14)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전에 너희 열조가 나의 노를 격발할 때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뜻하고 뉘우치지 아니하였었으나

(8:15) 이제 내가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지니라

(8:16)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8:17) 심중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나의 미워하는 것임이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서 망했다는 것이 선지자들의 공통적 견해입니다. 하지만 백성들 입장에서 이점이 이해되지 않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만드신 나라를 자신의 손으로 무너지게 하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무너짐마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포함된 절차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 범죄하지 않는 아담 사이에 뭔가가 있었습니다. 이 뭔가에 의해서 인간이 다시 생명나무 있는 곳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끼여있는 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닙니다. 죽음보다 더 한 것이 끼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목하에 애굽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출 4:22) 하지만 정작 그들에게는 조건이 붙었습니다. 그 조건을 바로 율법이었습니다. 이 율법에는 축복 요건도 있지만 저주 요건도 있었습니다.

축복과 저주란 곧 낙원에 있는 두 나무의 효과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즉 현 인간 세계의 형편을 결정짓는 기준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셨습니다. 이것을 ‘모세 언약’, 혹은 ‘옛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노를 사서 망해버린 것도 이 율법에 근거해서 받은 조치입니다.

히브리서 8:8-9에 보면,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는 범죄하므로 흙이 됩니다. 즉 ‘인간→비 인간’이 된 겁니다. 더는 인간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흙이 되는 이유는 모세 율법의 주입으로 보다 명확해졌습니다. 인간은 늙어 죽는 것은 단순히 기력이 쇠퇴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아서 그러한 겁니다.

저주받는 이유는 율법대로 살지 못해서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계속 진행하시는 계획에 의하면 이 모세 언약은 후에 주어지는 언약과 같이 않다고 하십니다. 이 새 언약에 의하면 ‘인간→비 인간(흙)→ 하나님의 아들(=초인간)’이 되는 겁니다. 즉 더는 ‘사람의 아들’이 아닌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새언약에 의해서 가능합니다. 새 언약의 바탕은 유다지파입니다. 전체 이스라엘 지파가 아닙니다. 그 중에 선택된 지파인 유다지파입니다.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고”(시 78:67-68)

유다지파로부터 왕 하나의 전쟁으로 전체 백성이 사는 시스템이 가동됩니다. 유다지파는 야곱의 축복에 의해서 사자짐승처럼 찢고 먹이감을 빼앗는 식으로 활동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창 49:9)

이런 식으로 전쟁을 벌린 최초의 이스라엘왕이 다윗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다윗의 자손에서 비로소 개인을 향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언약을 주십니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삼하 7:14)

그런데 이 다윗 내부에 초(超)-다윗이 되시는 분이 계십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는 시편 설교를 통해서 다윗과 초(超)-다윗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시편 16에 나오는 내용이 그냥 보면 다윗 자신의 고백으로 보이지만 실은 다윗 안에서 활동하시는 분은 따로 계십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십니다.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행 2:25-27)

여기서 다윗과 초(超)-다윗의 결정적 차이점은 다윗의 무덤은 그대로이지만 예수님의 무덤은 빈무덤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그토록 빈번한 전쟁을 치른 다윗은 실은 장차 초-다윗 되시는 주님이 치르는 전쟁을 미리 보여준 바가 됩니다. 모세 언약에 의해서 인간은 율법의 종입니다. 하나님 아들이 아닙니다.

따라서 짐승 사자와 같은 찢는 식으로 저주와 죽음에 갇혀 있는 자기 백성을 강제로 끄집어낼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이로 인하여 종이 되었던 자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됩니다. 이는 곧 성도란 늘 주님에게 모든 것이 빼앗기는 경험을 해야 하는 겁니다. 이처럼 철저하게 주님에게 빼앗기는 것을 예수님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하십니다.(마 25:21)

그렇다면 주님에게 어떤 것을 빼앗겨야 성도가 마귀의 권세로부터 벗어났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마태복음 10:28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즉 자기 몸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간주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미 모든 인간은 악마의 권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악마를 상대로 예수님 홀로 이겼습니다. 따라서 주님만이 전쟁에서 전리품을 노획하듯이 자기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자를 뽑아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에베소서 4:8에서는 ‘사로잡았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흙에 불과한 자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선물을 받는 수 외에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2:38에 보면, “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스데반집사님처럼 성령을 선물로 받은 자는 자기를 죽이는 자를 용서해 달라는 여유까지 부릴 수 있습니다. 즉 모든 일에 감사하는 자가 예수님과 한 몸이 된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우리의 과거가 실은 주님의 과거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2강-스가랴 8장 14-17절(초인간) 231213 - 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스가랴 8장 14절에서 17절 까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전에 너희 열조가 나의 노를 격발할 때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뜻하고 뉘우치지 아니하였었으나, 이제 내가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지니라,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심중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나의 미워하는 것임이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아멘.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만 나온 게 아니고 열두 지파가 나왔습니다. 유다 지파는 열 두 지파중에 한 지파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을 다 멸망 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노를 격발했다고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데, 하나님의 진노가 격발되어서 이스라엘을 뿔뿔이 다 흩어지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끝인가? 끝이 아니고 여기 하나님의 새로운 뜻이 주어지는데 15절에 보면 “내가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다.” 되어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어느 지역에 있느냐? 열두 지파가 살던 지역 가운데서 유다 지파에게 속한 땅이 예루살렘입니다. 그 예루살렘에서 이제 와서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하셨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스라엘 전체에게 은혜를 베풀어야지 왜 유다 지파만 딱 떼내어서 그들에게만 은혜를 베푸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망해야 마땅했다는 그 증거. 그 증거로 없어져야됩니다. 그런데 그게 이스라엘 지파가 다 이방 나라로 흩어지는 그 하나님의 조치가 있어 줘야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유다 지파만 선택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어있어요.

망할려면 다 망해야 되는데 왜 하필이면 유다 지파만 쏙 빼서 그들에게만 은혜를 주십니까? 유다 지파 속에 하나님의 숨겨진 뜻이 있어요. 이제 오늘 설교에서 유다 지파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이제 알아 볼겁니다. 그 유다 지파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거기서 등장하게됩니다. 하나님의 아들하고 인간하고 이게 차이가 나요.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 그 사이에 뭐가 중간에 과정이 하나 단계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원래 하나님께서 하나님 형상으로 아담을 만들었잖아요. 근데 아담이 뭐가 되느냐 하면 죄 짓고난 뒤에 흙이 되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이렇게 보면 돼요. 인간은 흙이니까 비인간이다. 이것은 인간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냥 흙이니까. 인간이 비인간이 되는 과정을 겪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도 다 알고 있어요. 사람이 늙어 죽으면 흙 된다는 사실을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가 흙된 것을 알고서도 하나의 진흙에 불과한걸 알면서도 진흙이 될 수 밖에 없는 그러한 시점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계속해서 인간인냥 위세 떨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거에요.

인간으로 시작했는데 인간처럼 시작했는데 흙으로 끝났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인간들은 자기한테 묻지도 않아요. 질문도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거기에 대한 해답을 준비되어있습니다. 인간에서 비인간. 그다음에 비인간에서 초인간이 되는거에요. 인간 이상의 인간이 되는 것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순서는 왜 처음부터 그걸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주님께서 죄없는 아담에서 범죄한 아담으로 선악과 따먹으면서 나무를 건드렸거든요. 따먹지 마란 나무를 건드림으로써 인간이 비인간화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뭐가 끼어있는가? “선악과 따먹지 말라 했지”라는 말씀이 거기에 끼어있어요.

그 말씀의 특징은 한번 말씀을 위반하게 되면 위반한 자가 다시 말씀을 지킬 수가 없다는 원칙이 있어요. 다시 유턴이 안되는 겁니다. 인간의 인생은 유턴이 안돼요. 중간을 넘어왔잖아요. 선을 넘었으면 중간을 했으면 다시 백해서 빠꾸해가지고 뒤로 가는 수는 인간에게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흙일 수 밖에 없어요. 그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방금 이야기 한 초인간. 기존의 인간이 아니고 인간을 초월하는 인간은 이것은 하나님의 무슨 계획인가? 그것은 기존의 인간하고 다른 인간을 하나님이 준비해두었습니다. 그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하는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그럼 그전에는 무슨아들인가? 사람의 아들이었어요.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 자식을 낳아야 흙이 흙을 낳는 거에요. 자식 백날 낳아봐야 내 흙되고 그 다음차례는 니 흙되고. 어떤 경우는 순서 바뀌어서 자식이 먼저 죽는수도 있어요. 부모가 살아있는데 자식이 먼저 죽는 그런 경우가 있거든요. 순서에 관계 없어요. 같은 종류의 흙이기 때문에. 그것도 찰흙이기 때문에. 흙이 흙하고 결혼해서 흙을 낳은거에요. 이게 진실입니다. 이거 누가 반박못해요. 끝 모습이 본모습이기 때문에. 인간의 끝 모습이.

그래서 누가 올림픽에 금메달 따오거든요 “아이고 잘했다” 하지 말고 흙이 금메달 목에 들었다 보면 돼요. 흙인데 목에 반짝반짝 금메달 한거에요. 결혼식장에서 신부가 이쁜 순백의 웨딩드레스 입고 왔거든 흙이 웨딩드레스입었다고 생각해보세요. 잘 실감이 안나요? 그러면 80넘은 할머니가 웨딩드레스 입었다 생각해보세요. 아,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요. 이게 진실입니다. 사람들은 그것까지만 진실로 봤어요. 그것까지만.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도로 타 넘고 되돌아 갈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오신 분을 따로 준비해 놓으셨는데 그분이 바로 말씀에 입각해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이제 그 아들 자체가 말씀이기 때문에 그 아들과 더불어 합류가 되게되면 우리는 갈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 생명 나무를 과일을 따먹을 수가 있는 거에요. 창세기 3장에서는 못 따먹게 했는데 요한계시록 22장에는 마음대로 따먹게 되어있어요. 21장 끝과 22장 초반에 보면. 거기에 생명 나무가 강가에 쫙 있고 그 강에 흐름은 하나의 생명 나무에서 흐르는 하나님의 두 개의 보좌에서 흐르는 물, 가로수처럼 형성 되어있어요 생명 나무가. 그러니 이거는 인간보고 인간들이 그 나라에 갈 수 없어요. 인간이 아니라 초인간이 되어야 돼요.

다시 말해서 인간이 아니라, 흙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됩니다. 이 무슨 수로 아들이 돼요 이미 흙인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흙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과 연계하는 그러한 프로젝트, 계획을 이스라엘 속에 집어넣었는데 그 이스라엘 집어넣는 그 지파가 유다 지파에요. 유다 지파. 유다 지파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거기서 만들어집니다. 사무엘하 7장 1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유다 지파에 대해서 이렇게 합니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사람의 아들 아닙니다. 날이면 날마다 이야기 할 꺼에요. 우리가 사람 될려고 교회 오는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아들 될려고 교회 오는거에요. 주께서. 뭐 시시한 사람돼 가지고 도로 흙되면 그게 무슨 허망한 짓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되는거에요. 하나님의 아들 되는 것은 우리의 소원이 아니고 주님의 계획, 주님의 계획이 이미 잡혀있는겁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인데 그 아들의 노선이 뭐냐? 유다 지파에서 나오는거에요. 그 유다 지파에 나온 다윗에게 사무엘하 7장 14절을 그러한 약속을 했는데 이 약속을 다윗에게 했다고 해서 다윗 언약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윗 언약.

여기까지는 여러분들이 별로 어렵지 않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8장 9절에 보게되면 거기에 약간 어려운 게, 뭐 심하게 어려운건 아니고 약간 어려운 게 나와요. 히브리서 8장 9절에 보면, 8장 8절에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여기서 이스라엘과 유다 지파가 단독 지파로서 나오지요. 유다 지파를 주목하라 이 말이죠. 그 안에 하나님의 창세 전부터 계획이 그 안에 담겨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어떻게 살 생각 하지 말고 이스라엘에서 따로 취급받는 특정한 지파, 유다 지파를 주목하라 이 말이죠.

하나님의 유다 지파를 하나의 인간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을 쏙 집어넣은 하나님의 특별히 다루는 지파로 보신다 이 말입니다. 유다 지파에서. 그 유다 지파가 왜 주목 되어야 되는가? 9절에 나옵니다.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다. 다시 말해서 다윗에게 준 다윗 언약 이전에 하나님의 언약을 준 적이 있다는 겁니다. 그때 그 대상은 모든 이스라엘이었어요. 모든 이스라엘에게 주는 그 때를 언제냐 하면 애굽에서 나올 때 시내산에서 받은 언약입니다.

그때 그 언약 받은 자가 모세에요. 그러니까 모세 언약 애굽나올 때 모세 언약 받았고 그다음에 후에 다윗 때는 다윗 언약 받는겁니다. 그런데 이 히브리서 8장에서 하는 말이 뭐라느냐하면 9절에서 “같지 아니하다”에요. 같지 아니하다. 이게 어려운거에요. 다 같이 하나님이 주신 언약인데 그 언약의 내용이 같지 않다. 동일하지 않다는 겁니다. 전혀 다른 내용으로 되어있다는 거에요. 언약 스스로가 어떤 변천 변화를 겪는 겁니다. 이거 뭐 인간들이 어떻게 할 수 없죠. 왜? 이 계획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신 언약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언약이 어떻게 변천되는가 그것만 알면되니까요. 그것만 알면 돼요.

자, 설교 다시 해봅시다. 현재 인간은 흙입니다. 흙인데, 지금 하나님의 계획은 뭐냐? 흙 중에서도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사람을 흙 가지고 만들어 내겠다는거에요. 흙이 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바로 아담에게 준 언약은 흙이 돼요. “아담 니 후손은 흙이 된다.” 그걸 아담 언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약속을 그렇게 했으니까요. 근데 그게 애굽에서 나올 때는 이스라엘을 특별히 취급합니다. 이스라엘을 취급하면서 “너희들은 내 아들이 된다”라고 이야기했어요. 너희들은. 그런데 그 아들이 되면서 그때는 무엇을 하나님께서 아직 감추고 있느냐 하면 다윗에게 줘서 “너희들은 내 아들이다”는 그 뜻은 날아가고 “너는 내 아들”이라고, 너희들이라는 건 집단을 말하는데 다윗 언약에서는 너라고 한 사람을 딱 집어서 “너는 내 아들 된다”고 꼬집은 약속했던 언약이 있어요. 그게 다윗언약입니다.

그러면 모세에게 준 모세 언약을 이스라엘 집단에게 받았을 때 그들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느냐?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종이 되었어요. 죄의 종, 저주의 종, 죽음의 종, 마귀의 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준 율법은 인간이 왜 죽어야 되고 인간은 왜 사는게 힘든가 그 실상을 그 인간이 속해 있는 환경과 결부해서 알려주기 위해서 율법을 준겁니다. 이유가 뭐냐? 율법에 이런 게 있어요. “내가 준 이 모세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너희들이 저주를 받는다”는 저주를 거기다가 언급을 한거에요. 저주를. 그러면 그 율법을 받은 사람은 복을 탐낼 게 아니고, 지키면 복 받는다 거기에다가 마음둘 게 아니라, 그 맞은편에 있는 저주 이야기에 관심을 둬야 돼요.

저주는 죽음이 아닙니다. 저주는 그냥 저주 덩어리에요. 그냥 살다 죽는 게 그게 저주가 아니고 저주는 죽음의 실제 내용을 말합니다. 인간이 죽고 싶어도 저주가 살아있는 한 못 죽어요. 저주와 함께 영원히 저주 받아야 돼요. 그게 인간의 운명이랍니다. 현재 처해있는 운명이라는거에요. 그러니까 이런 것을 모르면 참 인간들이 한심스럽죠. 하루하루, 오늘 몇일입니까? 12월 13일. 오늘 저주의 날이에요. 내일 되면 저주의 날이에요. 지금껏 저주받았던 날이에요. 이 불신자들의 제일 큰 문제는 희망을 자기 고유의 희망, 꿈을 갖는다는 거에요. 주님께서 이야기합니다, “니 미친거 아니야? 니 희망은 이미 내가 정했어. 저주나 받아라” 저주나 받아라. “아이고, 살다 죽지.” “아니, 니 내가 그냥 너 곱게 죽도록 내가 놔두질 않아. 저주 받아야돼.” 살다 그냥 흙이 되는게 아니고 “흙되면 모든 게 다 편하겠지”

천만에 말씀요. 저주가 본격적으로 저주 속으로 들어가요. “목사님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모세 율법속에 있는 건데요. 저주의 종입니다. 종이라는 말은 저주가 주인 되고 인간은 종이 되는거에요. 저주에서 못 빠져나옵니다. 이게 로마서 3장에 나오지요.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저주 아래에 있게 함이라. 그래서 인간들이 왜 고생하느냐? 저주 안 받으려고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는데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이 땅에서 저주받고 죽어서 또 저주받고 기다리는 저주받고. 그래서 인간이 흙이 된다는 것은 모세 율법에 의해서 보다 더 내용이 깊어졌어요. 그냥 흙이 되는게 아니고 본격적인 저주 받는 그러한 순서에 들어간다는 거에요.

그걸 하나님의 다윗 언약. 하나님의 아들 되는 언약의 입장에서 보면 아들이 되지 않는 자는 모조리 다 죄의 종이라는 결정을 갈라디아서에서 나오는 결정이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순서를 정해보면 처음에는 인간이었는데 죄 짓고 난 뒤에 비인간. 흙이죠. 비인간. 그다음에 뭐냐? 인간은 인간인데 초인간. 어떤 인간? 하나님의 아들 되는 것. 그게 다윗 언약이에요. 그러면 다윗 언약이 어떤 내용이기에 이게 우리가 흙의 저주받을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가? 바로 그 점을 다윗 언약인 유다 지파가 그 일을 해줘야 되는 거에요. 유다 지파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고 아들이 그냥 “나 아들 되었으니까 너 아들 된다.” 이런 법은 없어요.

아들이 무슨 일을 해야돼요. 아들다운 일. 다윗 언약에 준한 일을 해야돼요. 그게 뭐냐 하면 다윗이 뭐하는 사람이냐 하면 전쟁하는 사람이었어요. 전쟁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을 줬다는 말은 다윗의 아들로서 와야될 그 사람은 다윗의 전쟁에 결과로서 주어진 아들로 태어나는거에요. 결과로서. 그러면 그 다윗 유다 지파가 전쟁하는 내용이 창세기 49장 9절에 나옵니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되어 있어요. 유다지파의 특징이 뭐냐? 사자에요 사자.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이렇게 돼 있어요. 창세기에서 야곱이 유다 지파에게 축복할 때 그런 이야기 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사자, 왜 사자, 영어로 하면 라이온(lion) 짐승, 사나운 짐승 사자라 이 말이죠. 사자가 하는 일이 뭐냐?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다 했어요. 그러면 이것은 뭐냐 하면 이 사자가 하는 일은 싸움을 하는데 어떤 싸움을 하느냐 하면 장차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아들 될 사람을 누군가가 움켜쥐고 있어요. 누군가가 움켜쥐고 있는데 그 움켜쥐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된 자는 자기 힘으로 자기 움켜쥔 센 힘을 제끼고 탈출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여기 유다 지파가 어떤 사자니까 찢고 움켜쥔 것을 찢고 그 안에서 자기 백성을 거기서 강제로 끄집어내는거에요. 그 이야기가 요한계시록 5장 5절에 보면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5장 5절에 보면 이제 사도 요한이 책을 받는데 내용을 펴야 되는데 펴야 이게 현실이 되는데 못 펴서 울고 있을 때 장로죠,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라이온입니다. 짐승.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뗀다는건 찢는 것을 의미하죠. 그 라이온 역할 하는 그 사람이 이건 짐승이니깐 앞뒤 보지도 않고 짐승처럼 강제로 찢어버려요. 이게 바로 성도의 받은 복이라 하는 겁니다. 성도는 자기 노력으로 율법도 못지키고 자기 노력으로 저주와 이 종의 신분에서 탈출할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움켜쥐고 있는 마귀가 너무나 강력한 권세로서 우리를 쥐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죄의 종으로서 자진해서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유다 지파에 출신이 어떤분이 오셔가지고, 다윗이죠. 다윗 계통의 어떤 분이 오셔가지고 우리를 이 악마에 있는 형국, 형편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을 강제로 찢어버려요. 강제로 찢어버린다고요. 찢어버리고 그 안에 있는 우리를 강제로 채 가듯이 그냥 채 가서 하나님의 아들 만드는 작업을 하는겁니다.

자, 제가 여러분한테 속으로 묻고 싶은게 있어요. 여러분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못벗어나는 그것을 무엇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고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은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그 같이 있는 설교할 때 있는 사람들도 같이 궁금하다고 생각해서 언급한 내용입니다. 거기에 보면 사도행전 2장 29절에 보게 되면, 다윗, 흙에 속한 다윗 있고요, 초다윗, 다윗 언약에 의해서 새롭게 등장하는 하나님 아들로서의 다윗이 따로 있어요. 초다윗은 예수님을 이야기하고 흙에 속한 다윗은 옛날 한때 역사적 인물로 있던 다윗입니다. 이름은 동일한 다윗이에요. 왜? 이름은 그 기능의 함축이니까. 그가 했던 전쟁 이스라엘을 적들로부터 찢어서 사자처럼 뽑아내는 일을 했다면 동일한 기능을 초다윗에 해당 되는 주님이 그 일을 우리에게 해내신다는 뜻이에요.

자, 그러면 다시 제가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속으로 답변하세요. 우리들을 꼼짝마라 할 정도로 강하게 묶어두는 그 힘은 뭐라고 생각하느냐? 그것을 여기서는 바로 베드로는 말하기를 그거를 죽음이라고 하는거에요. 죽음. 인간은 죽음에 위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 인간에게 제일 무서운 것은 자신의 죽음이에요. 그래서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뭔가 쫓기듯이 행동하는데 어디에 쫓기는가? 죽기를 무서워서 쫓기기 때문에 나오는 행위들이 그들의, 인간들의 말과 행동과 평소에 습관이나 태도를 뜻합니다. 어떻게 하면 넉넉하게 사느냐? 관심사가 그뿐이에요. 어떻게 넉넉하게 사느냐. 어떻게 죽음에 안 쫓기는가. 내 하고싶은 것 더하고, 죽음과는 거리를 멀찍하게 두고 살아있는 티를 내보자.

이거는 뭐냐 하면 두렵다는 뜻이에요. 무섭다는 뜻이에요. 내꺼 없으면 굶어 죽는다는 것입니다. 무서워요. 이 공포는 인간을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지요. 이 무슨 수로 이 죽음으로부터 벗어납니까? 성경은 간단해요. 주님한테 다 빼앗기면 된다는 거에요. 참 쉽죠? 성경의 해결책은 굉장히 쉬워요. 주님에게 다 빼앗기면 된다는 거에요. 이 뭘 빼앗기느냐? 돈? 뭐 어떤거? 뭘 빼앗기면 될까요?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나옵니다. 10장 28절에 아주 깔끔하게 무엇을 빼앗기면 되냐를 우리에게 친절에 친절을 더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무엇을 빼앗기느냐? 몸 빼앗겨라 이 말입니다. 몸을 빼앗겨라. 몸을 빼앗겨도 주께서 우리의 영혼을 지키면 남는장사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너를 지켜 줄 터이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몸? 마귀한테 줘버려라.” 이거죠. “니가 몸 간수하지 말고 니 육신을 마귀한테 죽음한테 빼앗겨버려라.” 다시 말해서 주님한테 생명 얻고 몸은 개나 줘버려라 이뜻이에요. “괜히 니가 몸 챙기다가는 무서움과 공포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결국 그것이 너한테 족쇄가 될 것이다. 늪에 빠진 것이 될 것이다.” 빼앗기는 게 빼앗기는 삶이 빼앗겨주신 내가 귀하게 여기고 내가 이것 없으면 안 된다 하는 것을 주님께서 강제로 찢어서 그것을 뺏는 방법을 해주신, 뺏게 하시는 주님께 감사하는 삶이 성도의 삶입니다. 내거라고 여긴거는 다 날아가요. 다 잃어버리고, 내 꿈 내 소망 다 날아가요.

마태복음 교회 좀 나온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말씀이 있어요. 마태복음 25장에 달란트 비유라는거에요. 한 달란트 다섯 달란트 열 달란트 이야기 나오죠. 그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이 칭찬하는 사람이 나올꺼에요. “충성된 종아.” 그 충성된 종이 어떤 사람인지 여러분 잘 아실거에요. 충성된 종이 뭐하는거냐 하면 자기가 노동한 것 주인한테 홀라당 다 빼앗긴 사람을 말합니다. 주인이 나를 뺏아가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이 없는 사람. 이걸 충성된 종이라 하는거에요. 그 단계. 그 종의 단계. 그 종의 단계를 거쳐서 그다음에 무슨 단계가 되느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단계가 되는 겁니다. 다윗 언약은 처음에 출애굽때 나왔던 것은 모세 언약이었어요. 인간이 자기 주제 파악이 안되거든요. 인간은 뭐 아는 것도 없고 해답도 없어요.

내가 왜 이렇게 힘들게 사는지 아는게 아무것도 없어요. 모세 언약이 율법을 딱 보니까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은 죄를 지어서 정도가 아니고 우리가 죄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힘든 거에요. 어느 인간이 벗어납니까? 매 순간이 무서움인데. 매 순간이요. 어떻게 성공해도 근심이 오는데요. 한순간 한 시간 일 분 한 시간 동안 염려 안 한적 없고 걱정 안 되는적 없잖아요. 매일 24시간이 염려와 걱정으로 연결되어있어요. 점철되어있어요. 계속 이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그게 모여서 인생이 되는거에요. 그러다가 결국 남는 것은 흙이 되는거죠. 흙되면서 어디로 가는지도 몰라요. 흙이 끝인 줄 알고 있어요. 지옥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런데 성도는 뭐냐 하면 우리가 인생을 그렇게 되는걸 보고 성도는 뭐라고 하느냐, “주님 참 멋진 계획을 세우셨네요.” 멋진 계획이라는 거에요. 왜? 그게 인간이 비인간을 거쳐야 초인간이 되기 때문에. 자, 그렇다면 이제 초인간은 어떻게 되는가? 사도행전 2장 38절에 보면 2장 38절 보기 전에 하나 설명할 게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25절에서 28절 베드로가 그 이야기 할 때 이것이 25절에 “다윗이 저를 가르켜 가로되” 이렇게 되어있어요. 다윗이 시편 16편에 나오는 이야기 거든요. 시편 16편을 이야기해서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이걸 전에 있는 다윗이 볼 때는 다윗이 그런 이야기 한걸로 되어 있지만 여기에 베드로의 해석을 보면 이거는 죽을 다윗이 아니고 다윗 속에 초다윗이 함께 들어 있었다는 거에요.

예수님이 자기 시대의 이야기를 다윗이 앞 당겨 이야기 한 걸로 되어있어요. 이점 여러분들이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되게 되면 처음에는 성도 되기 전에는 “내가 예수믿고 구원받아야지” 이게 내일이 되잖아요. 그러나 정말 말로 예수 믿는게 아니고 주께서 성령이 와서 예수를 믿어버리면 이거는 내일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나의 과거를 주의 자신의 과거로 되돌려 버려요. 나의 과거가 없어지는거죠. 전부 다 주의 과거로 덮어지는겁니다. “니가 그렇게 한게 아니고 내가 그렇게 하도록 했다”는 거에요.

왜? 니 일은 없고 내가 내 일, 니 안에서 전에부터 내가 일해왔기 때문에 라는 이야기를 해요. 초인간은 어떻게 되는가? 38절에 나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여기에 선물로 받는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초인간. 하나님의 종에서 하나님의 아들 되는 것은 이거는 선물 여부입니다. 선물을 받으면 돼요. 성령을 선물로. 그러면 성령의 선물 받는다 해서 그냥 선물 주면 되지 다윗은 왜 등장하는가? 다윗은 사자에요. 싸워야 돼요. 마귀와 싸우는 겁니다. 그게 언약이에요. 다윗이 싸울 때 선물을 어디서 오느냐? 싸움을 이겼을 때나 선물이 오는거에요. 싸움을 이기지 아니하면 선물이 오지를 않습니다.

그 내용이 에베소서 4장 8절에 나옵니다. 4장 7절에서 8절에 보면,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이거 굉장히 어려운 대목입니다. 이게 사무엘상 30장에 다윗이 아말렉하고 전쟁하면서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어요. 그 이야기를 제가 필히 해야됩니다. 이거 빠뜨리면 이게 무슨 내용인지 몰라요.

사무엘이 아말렉하고 전쟁할 때 백성들 다 데리고 전쟁하는게 아니에요. 군인들이 있어요. 30세 이상 젊은 청년들이 있거든요. 그 군인들을 데리고 전쟁을 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아말렉에게 승리를 했어요. 승리하면 그 전리품들이 있어요. 그걸 갖고 온겁니다. 갖고 왔을 때 거기에 전쟁하러 갔던 젊은 사람들이 다윗에게 불만이 있었던 겁니다. 힘들게 전쟁한 것은 우리가 왜 전쟁했는데 집에서 놀고 있는 부녀자 아녀자들한테 왜 그 선물을 전쟁의 전리품을 왜 그들에게 나눠주느냐 하는거에요. 이스라엘이 하마스하고 전쟁하는데 지금 이스라엘이 하마스 전쟁할 때 군인들하고 예비군들이 거기에다가 소집되어서 하마스하고 전쟁을 벌리잖아요. 가자지역에서. 그런데 그렇지 않고 현재 이스라엘 본토에 있는 나이 많은 사람 아줌마들 이런 사람들 어린애들. 그들에게도 전쟁의 혜택이 돌아 가느냐 마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혜택이 돌아가야 된다는 거에요. 다윗은 돌아가야 된다는 거에요. 그들은 전쟁에 참석 안해도 선물은 똑같이 받아야 된다는 거에요. 그게 이유가 뭐냐는 거에요. 그 이유는 왕의 전쟁에서, 다윗은 왕입니다. 왕의 전쟁에서 왕이 패배할 경우에는 집에 가만히 있는 자들도 적들의 노예들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왕이 전쟁을 했을 때 다윗은 전쟁을 할 때 분명히 하나님이 자기 안에서 전쟁을 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거는 왕의 전쟁 다윗 본인의 전쟁인 동시에 하나님 전쟁이에요. 하나님 전쟁 특징이 뭐냐? 모든 인간을 악마의 포로잡힌 자로 보는거에요. 그중에서 일부를 천국 백성으로 삼는거에요.

그러면 왕은 누구냐? 다윗. 신약에는 초다윗이죠. 누구냐?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그 전쟁에서 그 적군에 잡혀있는 자를 사로잡을 때 그들도 전에는 적군이었던 거에요.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그러니깐 이거는 하나님의 백성 될 자격이 전혀 없어요. 주님 혼자하고 모든 인류하고 다 싸웠으니까. 마귀하고 싸웠으니까. 주님 혼자 승리한 거에요. 나머지는 뭐냐? 포로 되어야 마땅한 자들이죠. 주께서 그들에서 악마의 권세에서 일부 사람을 빼앗아내요. 뽑아내요. 사자가 찢듯이 뽑아내요. 그 뽑힌 사람은 뭐냐? 이거는 구원될 자격 없음을 아는 사람이에요. 그니까 전쟁은 예수님 홀로 했기 때문에 “나도 좀 기여했습니다”는 말을 절대로 입에 담으면 안 돼요. 왜? 다 죄의 종이고 저주의 종이고 율법의 종이기 때문에. 구원될 자격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종이라는 말은 못 빠져나왔다 이 말이죠. 저주에서 빠져나올 수 없고 죽음에서, 지옥에서 못 빠져나와요. 못 빠져나오는 것을 사자의 기능으로 찢어버리고 거기서 빼내줬으니까 빼내주고 난 뒤에 승리하고 위에 올라가실 때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그들에게 뭘 주었다? 선물을 준거에요. 그 선물이 뭐냐? 성령입니다. 선물이 성령이에요. 예수님의 공로입니다. 성과입니다. 이게 사도행전에 바로 나오는거에요. “그러니까 니 몸, 그거 개나 줘버려.” 그 모습이 뭐냐? “니가 이 몸으로 노동해서 그것 내가 했어. 내 한테 빼앗겨.” 그래서 성도의 즐거움은 어떤거 하나 주님한테 안 빼앗긴게 없다는 게 감사 거리고 고맙고 즐거운 이야기에요.

내 것으로 남겨둘 게 하나도 주께서 친히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런식으로 일 하신다는거에요. 내꺼라고 여기는 건 족족 다 뺏아 버려요. 왜? 내가 내 소유가 되면 나는 그것으로 위세 떨고 허세 떨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요. 가능성이 아니죠. 실제로 그런 짓을 해요. “나도 인간이다.” 뭐가 인간이에요. 흙인데 뭐가 인간이에요. 인간 아니에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내것 내가 자유로워서 내가 다룰만한 게 있을 때 인간으로 자부해요. 인간은 인간 아니에요. 인간이 어디 있어요. 흙인데. 내 것이 어디 있어요? 없어요. 인간에게 있다면 저주 거리만 있지. 저주나 인간이 함께 있을 뿐이에요. 사도행전 2장 38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는 말은 내가 이렇게 주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빼앗겼습니다라는 자리가 내안에 생겼다는 뜻이거든요.

전에는 내가 나를 지시하고 내가 나한테 마음먹고 내 의지와 내 이성과 내 감정이 있던 자리가 뻥 하고 구멍이 뚫리면서 거기서 주님의 의지와 주님의 감정과 주님의 사랑이 거기에다가 들어오게 되었다 이 말이죠.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여러분들 생각하길 “그런 사람 있습니까?” 하는데 있어요. 누가? 스데반 집사. 최고에요. 돌이 날라와서 자기 목숨을 뺏을 때 스데반 집사는 이게 고마운 정도가 아니고 누굴 배려하느냐 하면 돌 던질 사람을 배려할 정도로 여유가 있어요. 그들을 보고 뭐라고 하느냐? “주님, 저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내가 이미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몸과 내 몸이 한 몸으로 통하게 된 거에요. 내 몸은 없어요. 내 몸은 버릴 몸 밖에 없어요. 내 몸은 없고 성령으로 주님이 머리고 우리는 몸의 지체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몸이에요. 스데반 집사가 그렇죠. 또 한 사람은 누구냐 하면 삼층천에 올라간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냐? 사도바울이에요. 따라 올라면 따라 와봐.

마귀가 아무리 쎄도 삼층천까지 못 따라옵니다. 닭 쫓는 개 신세 돼요. 오늘 스가랴에서 이 유다에 대한 전에는 니가, 유다가 완전히 작살 났지만 이제 새로운 유다 지파의 기능으로 하나님께서 너에게 은혜를 주겠다는 이런 내용이에요. 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앞으로는 거짓말 하지 마라. 거짓말 두 개 나와요 오늘 스가랴에 보면. 니가 거짓말 하지마라. 자, 거짓말이 뭐냐 하면요 새 언약이 주어질 때 새 언약을 모르는 게 거짓말이에요. 새 언약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 되는 그 일을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구하고 옛날 율법을 거론하는 게 거짓말이 돼버려요. 주께선 일을 진도가 나갔는데 주님이 진도 나간건 생각 안 하고 자기의 행동으로 구원받을 생각만 하고 있을 때 이게 거짓 맹세가 되고 거짓말 되는 거에요.

따라서 여러분들이 성도라면 뭐를 아느냐 하면, 나의 과거가 주님의 새로움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서 끄집어낸 모든 아이디어가 이게 내 몸이 이미 주의 몸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내 멋대로 한번 보란 듯이 인생을 살아보겠다는 이 허풍, 허세. 주님께서 찢어버립니다. 작살 내버리죠. “그래, 니 고집이 센지 내 고집이 센지 함 해볼까? 어디 니 뜻대로 되는가 봐?” 그럼 니 뜻대로 된다면 주께서 안 찢어진 사람이에요. 끄집어내지 않은 사람이에요. 끄집어 낸 사람이라면 주께서 가만두지 않죠.

끄집어 낸 사람 같으면. 그럼 끄집어낸 사람은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옛날에 내가 내식대로 했는데 주께서 이걸 몽땅 탈취해갔다는 빈자리가 생겨요. 하나님 아들한테. 빈자리가 생기면서 그 자리에 주님의 죄사함의 새 언약의 피가 거기에 비치게 되고 나타나게 됩니다. 주님의 죄 용서 때문에 제가 죄의 종이였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것이 나의 노림수가 아니라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내 아들이 되라는 하나님의 멈추지 않는 하나님의 추진력있는 계획이 일관성있게 제게까지 도착했군요. 여러분 속에 도착한 주님의 일관성 있는 언약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맘대로 살았습니다. 남 보란 듯이 살았습니다. 내 자랑하기 위해서 살았습니다. 이제는 그것이 십자가 앞에서 다 마귀 짓인 것을 깨닫게 해서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내 안에 나만 있지 않고 주님이 들어왔음을 한시도 놓치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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