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질투 안에서

아빠와 함께 2023. 11. 30. 10:13

질투 안에서 

2023년 11월 29일                        본문 말씀: 스가랴 8:1-8

(8:1)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8: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8: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8:4)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지아비와 늙은 지어미가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 많으므로 각기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8:5) 그 성읍 거리에 동남과 동녀가 가득하여 거기서 장난하리라

(8:6)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 어찌 기이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8: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을 동방에서부터, 서방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8:8)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성실과 정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기이하고 신기한 일, 그것은 인간들이 기대하는 대로 자기 구원이 성사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들이 동원된다는 점이 구원받은 자에 한해서만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일이 됩니다. 여기에 동원되는 자들은 구원되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 구원이 애초에 성립되지 않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명기 29:27-29에 보면,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땅을 향하여 진노하사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재앙을 내리시고 여호와께서 또 진노와 분한과 크게 통한하심으로 그들을 이 땅에서 뽑아내사 다른 나라에 던져 보내심이 오늘날과 같다 하리라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기이하고 오묘한 일인가 하며는,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고 진노를 내리시는 바로 그 작업이 인간은 해내지 못하고 하나님만이 해내시는 구원작업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신다’하고 하니 사람들이 궁금한 것은 “언제?”입니다. 이 ‘언제?’라는 질문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예루살렘 방문은 모든 시간이 다 끝나고 난 뒤에 나타날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12월달 달력은 11월달 달력 뒤에 있기에 11월달 달력을 찢어버리지 않고서는 나타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질투심으로 이 지상을 찢어버리십니다. 질투란 사랑하는 관계를 전제로 나타납니다.

사랑이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둘 이상이 되면서 이루어집니다. 질투란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서 서로의 시선이 오로지 서로를 향해서만 꽂혀야 합니다. 그런데 상대를 주시하는데 그 상대가 딴 곳을 본다면 여기서 질투가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은 오로지 최종적으로 자기를 주시합니다.

따라서 타인에 대해서 인간들이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현재 나가 있기까지에 쏟아부은 나의 정성에 대해서 경의를 표해달라”는 겁니다. 즉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이나 나를 사랑해야 달라는 겁니다. 인간들은 개별자로서 자기 노동에 대한 대가를 따지면서 살아갑니다.

아무리 인생을 길게 끌어봤자 결국 이것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따로 사랑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신명기 32:21에 나옵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로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 하나님 자신 외에 딴 것에 눈 돌리면 하나님께서 질투를 내십니다. 이 질투는 단순히 감정 나타냄으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신명기 4:24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옥불과 이 지구상이 다 불타버리는 심판은 하나님의 질투심의 소산입니다. 하나님의 질투가 단순한 엄포에 끄치지 않고 실행에 옮긴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상이 곧 이스라엘 역사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고 자부했던 예루살렘이 불타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질투심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오신다는 예루살렘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이스라엘 존재는 그 자체가 필터Filter 기능을 합니다. 마치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오면서 하늘의 광채를 가리기 위해 자신의 수건을 얼굴에 덮었는데 이 수건이 바로 Filter 기능을 하기 위함입니다.(출 34:34) 찢겨나갈 지난달의 달력 같은 겁니다.

뒤에 있는 달력의 내용을 위하여 앞의 달력이 찢겨나가야 하는 겁니다. 구원이란 바로 ‘흙’에 속한 내가 ‘천사의 형상을 지닌 나’가 되기 위해 마땅히 죽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투심 속에서 죽어야 하는 겁니다. 인간이 아무리 애써도 자기 사랑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죽은 자로서 하나님 작업에 다루어지면 됩니다. 해와 달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이 오실 예루살렘은 이미 구약 에스겔 48장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정사각형 도읍입니다. 12개의 문으로 되어 있는 둘레를 갖고 있습니다. 그 12개의 문에는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기능은 결코 자진해서 구원을 요청할 권한이 없다는 말이입니다.

모든 것은 그 안에 계시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의 결정에 따라 천국에서 살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주도권 결정을 나타내기 위해 인간의 존재는 출입문의 기능으로 표현됩니다.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오는 144,000이라는 숫자로 마찬가지입니다. 12 ×12× 1000의 내용을 갖고 있습니다. 정사각형의 표시는 장광의 길이 동일하다는 점입니다.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계 21:16) 이러한 천국, 곧 예루살렘은 필터 역할하는 이 세상의 구조로 가리워져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저주로서 정방형 형태를 갖춥니다.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계 14:20-21) 여기서 4×4×100으로 표현됩니다. 즉 이 세상은 정사각형으로 조금의 모자람이 없은 구석구석 저주로 꽉찹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계 21:16-17) 여기서 ’12×12‘ 원칙이 지켜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참으로 오묘한 일은 흙에서 천사가 되는 구원작업이 하나님의 성의있고 치말한 심판과 더불어 빈틈없이 수행된다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인생 자체를 죽은 자를 살리는 과정임을 알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강-스가랴 8장 1-8절(질투 안에서) 231129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스가랴 8장 1절에서 8절까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지아비와 늙은 지어미가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 많으므로 각기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그 성읍 거리에 동남과 동녀가 가득하여 거기서 장난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 어찌 기이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을 동방에서부터, 서방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성실과 정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아멘.

이와 같은 오늘 방금 읽었던 이 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상당히 기이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각자 자기가 정해서 살던 또 자기의 출생지가 있고 살던 곳이 있고 자기가 선택해서 살기로 마음먹은 장소가 있습니다. 따로 있는데 오늘 말씀에 의하면 예루살렘 아니면 그거는 장소도 안되고 살 수도 없는 곳으로 이렇게 단정 지어있습니다.

당신들 사는 데 그것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인정하는 유일한 장소는 예루살렘뿐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하나님이 기거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 예루살렘으로 이사가면 될게 아니냐. 예루살렘에 이사를 못갑니다. 갈 수가 없는 이유는 예루살렘에 하나님이 돌아오는 그 예루살렘에 가려면 시간이, 모든 시간이 다 흐르고 난 뒤에 그때 예루살렘이 등장하는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예루살렘에 주님이 오신다니까 쉽게 나오는 질문은 “주여, 주님은 언제오십니까?”라고 언제라는 말, 시간에 관한 질문을 하게 되어있어요. 언제 오십니까. 근데 그 예루살렘은 언제라는 질문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언제라는 것은 아직도 시간이 진행되고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시간이 마감이 났을 때 시간이 끝이 났을 때 비로소 진짜 예루살렘이 그때 등장하게됩니다.

그러면 기존의 현재 하마스와 전쟁하고 있는 예루살렘은 뭐냐? 그 예루살렘은 필터에요. 가리는겁니다. 모세가 수건을 가리듯이. 원래 모세 수건은 모세꺼 잖아요. 모세가 자기 수건을 가지고 가렸는데 뭘 가렸느냐 하면 인간세계에서 나타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광채를 가리기 위해서 인간들이 평소에 쓰던 수건을 가지고 자기 얼굴을 가렸습니다. 인간들의 생각하는 거주지라는 것은 인간들이 벌써 알고 있어요. 사람살면 거주지잖아요.

근데 그것이 하나의 수건 역할을 하는거에요. 필터 역할을 하는거에요. 필터 역할에 가장 적절한 예가 뭐냐하면 달이 바뀔 때 달력을 한 장 쫙 째지요. 11월달 달력 째야 거기에 그 뒤에 12월 달 달력 나옵니다. 필터가 제거 될 때 비로소 성경에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예루살렘,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당도하신다는 예루살렘이 그때나오는겁니다. 그러니까 그전에 뭐가 필요하냐? 찢어지는게 필요해요. 주께서 찢어질 때 인간세계 자체를 찢어지는데 그냥 찢어지는게 아니고 거기에 이유를 붙이고 단서를 붙입니다.

“내가 질투 함으로 이 세계, 예루살렘을 내가 불태워버렸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스가랴 선지자 이전에 예루살렘은 불타버렸어요. 지금 다시 돌아왔지만 그건 황폐한 겁니다. 신명기 4장 24절에 보면 그 질투를, 질투하신다는 것이 그냥 하나님의 마음 씀씀이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행동에 옮기는 질투에요. 실제로 하나님의 행동을 주관하는 동력, 그 힘이 질투로 이루어지는데 그 질투와 만나는 것은 바로 심판입니다.

신명기 4장 24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라. 말로? 아니죠. 어떻게? 소멸시킴으로써. 뭘로? 불로서 소멸시킴으로써 하나님은 불로서 이 세상이 지구가 타거든 내가 질투했다고 여겨라 이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질투했다고. 그렇다면 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예루살렘이 등장하려면 세상 끝날이 되어야 되는데 이 말을 방금 질투와 관련시켜서 이야기하면 이렇게 정돈됩니다.

내 질투의 끝장을 보는날 그날 진짜 예루살렘이 나타날 것이다.” ‘내 질투’가 항상 진행되는 상황에서는 예루살렘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질투라는 말을 쓰는데 왜 질투라는 말을 굳이 하나님께서 언급을 하셨는가? 그것은 질투라 하는 것은 꽂히는 사랑의 대상이 없으면 질투가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뭐냐 하면 누군가 사랑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 사랑받는 저쪽도 나를 사랑하고 있어요.

사랑이 성립되려면 하나가 아니라 둘이 있어야 사랑이 성립되거든요. 서로가 서로 동일한 사랑으로 꽂힌다면 질투는 없습니다. 근데 둘 중에 하나의 사랑이 한쪽은 저쪽을 쳐다보고있는데 저쪽은 엉뚱한 것을 볼 때 사랑을 주고 있는 쪽에서 질투가 불같이 일어나지요. 이 아가서 8장 6절에 보면 그 지옥이라는 것이 어디서 생겼느냐가 거기에 나옵니다. 지옥에서 어디서 생겨났는가? 아가서 8장 6절.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여기 투기, 질투. 질투는 음부, 지옥같이 잔인하고 불같이 일어난다. 불같이 일어난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에요. 도저히 참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동안 끈질기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근데 그 은혜에 대해서 하나님 은혜 준 것에 대해서 인간들은 감사하지도 않고 고마워하지도 않아요. 그게 로마서 1장에 보면 나옵니다. 평소에 내가 계속해서 선인과 악인에게 햇빛과 공기와 사랑을 줬는데 그들은 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다른 신이라든지 자기 자신의 공로로 모든 것을 돌려버렸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을 내어버려두사 마지막에 그들을 질투의 불로서 심판해버린다. 진노의 날이라. 로마서 2장에서는 진노라고 되어있어요. 성경에선 그렇게 이야기하지만 일반 사람들의 평소의 생활은 이렇습니다. 내가 왜 사는가? 사는 이유가 뭐냐? 사람은 무슨 보람으로 사는가? 딱 정해져 있습니다. 인간의 개별적인 노동의 대가를 가지고 살아가요. 자기가 노동한 대가를 가지고 살아간다고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하면 나는 꽂혔다. 무엇에 꽂혔는가? 내가 내 노동하는데 꽂혀있고 나는 거기에 나를 사랑한다는 거에요.

나는 나를 사랑한다. 이걸 아주 쉽게 접할 수 있는 경우가 뭐냐 하면 이 문장을 보시면 여러분들이 이게 얼마나 일상화 되어있는가를 알 수 있을거에요. 자기 것이 있는 자가 예수를 믿는다? 그거는 믿는 것 아닙니다 라는 문장이에요. “내 것이 따로있는데 내 것도 따로 있고 예수 믿습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그건 완벽하게 거짓말입니다. “나 내 자식있는데 예수 믿는다.” 거짓말입니다. 내 자식있는데 어떻게 예수를 믿어요. 사랑의 대상이 자식인데 어떻게 그게 하나님이 보는 사랑과 같이 꽂힐 수가 있습니까?

나는 지금 엉뚱한데 보고 있는데 내 자식을 보고 있는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요? 구라를 떠세요 구라를. 사람들 예배마치고 집으로 좇아가는 이유가 뭡니까? 집에 진정 내 사랑이 꽂혀있는곳이 있기 때문에 집에 가는거에요. 이걸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노동에 나의 개별자, 나라는 개인의 사적인 노동의 성과에 우리는 미쳐있고 거기에 꽂혀있습니다. 그걸 사랑합니다. 인생? 인생 뭐있어요 자기 일해서 그냥 돈벌어 이만큼 살아왔는데. 그게 인생이잖아요. 어떻게 그걸 부정합니까?

흔히 그렇게 이야기하는사람 참 많아요. “나는 예수님도 믿고요 우리 가정에 충실해요.” 세상에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건 예수 안믿는거죠. 자기 가정을 믿는거죠. 그래놓고 예수 믿는 흉내 낸다고 티 낸다고 이런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하면 주의 말씀대로 바르게 사는거에요? 어떻게 하면 주를 위해서 사는 겁니까?” 라고 물어요. 아무리 경건하게 질문해도 제가보기에는 죽기 싫다는 뜻이에요. 죽기 싫어 요령부리고 있는겁니다.

인간은 자기 사랑에서 못 벗어나요. 발을 못빼요. 그러면 뭐냐? 자기 사랑에 미쳐있는 것 그냥 하나님의 조치는 죽여 버리는겁니다. 좀 어려운 이야기 해볼게요. 과학자한테 물어봐요. “해가 죽어있습니까 살아있습니까?” “해는 뭐? 수소가 헬륨으로 융합되서 나오는 핵융합 에너지에 의해서 빛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해가 죽어있어요 살아있어요?” “해는 죽어있죠 물질인데.” “그럼 달은요?” “달은 뭐 이거 컴컴하니 완전히 먼지덩어리 돌덩어리 암석덩어리 용암덩어리 이거는 죽어있는거죠.” “땅은요?” “땅도 죽었죠. 땅 밟아도 “아야” 안하니까 땅도 죽었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럼 물은?” “물은 H2O지 뭐. 몰라요 H2O? 죽었지 뭐. 살아있는 것은 생물체 인간이 살아있는거죠.”

이렇게 과학자들은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다 배웁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해가 살아있고 달이 살아있고 별이 살아있고 물이 살아있어요 죽은 것은 인간이 죽었어요. 왜냐하면 해와 달과 별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살아 움직이기 때문에. 죽지 않기 때문에 죽은거에요. 죽어있으면 주님의 말씀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게 하나님 보시기에 산 것이 되는데 자기 노동이 살아 있어버리니까 말씀이 안 들어오니까 이거는 완전히 죽었는데 지는 지금 살았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노동과 자기 사랑에 미쳐있으니까 그것이 어떤 행동도 하나님 보시기에 죽여버릴래 하는 죽음의 대상, 분노의 대상, 하나님의 질투의 대상이 되어버린거에요. 물조차도 주의 지시받습니다. 예수님하고 제자들하고 갈릴리 호수에 갈 때 예수님 물 보고 꾸짖었어요. 살아있으니까 꾸짖는거에요. 살아있으니까. 창세기 4장에 보면 땅이 살아있어요. 가인이 아벨을 죽이니까 누가 호소했는가. cctv 아무도 본 사람 없는데 하나님은 알고 계세요. 왜? 땅이 핏소리가 땅이 아래서부터 하늘로 호소하고 있었어요. 밤말은 새만 듣는게 아니라 온 우주가 다 듣고 있어요.

근본적으로 우리는 우리 인간에게도 질투심이 있는데 그건 뭐냐하면 내가 노동하고 내가 애쓰고 내가 힘들게 가꾼 것에 대해서 나만큼 내가 나에게 쏟아 붇는 애정과 관심만큼 주지 않으면 우리는 타인에 대해서 질투합니다. 시기하게 되어있어요. “저 인간 죽여버릴까?” 부부싸움 뭐 여러분들은 거의 부부싸움이 없잖아요. 거의 없지요. 부부싸움 혹시 있다면 왜 합니까? 니가 와 내 한테 경외하지 않아? 김정은이한테 경외하는 만큼 니는 내한테 왜 경외하지않아.

저 상대가 “니는 뭐 니가 먼저 나한테 나를 경외하지 않고 무시했잖아.” 결국 다 빼놓으면 이것 때문에 하는거에요. 시갓집 어떻고 친정이 어떻고 “니 갑자기 왜 시가 욕하노.” 이 뜻은 무슨뜻이냐 하면 지금 나라는 존재가 있기까지 모든 내가 내한테 투자하고 내한테 노동 퍼부었던 모든 애씀을 너도 내가 나의 애씀을 그것을 지키는것처럼 너도 나에게 경외 좀 하고 충성 경배하라 이 말이죠. 참, 그러니 인간이, 인간의 말에 사랑한다는 말은 그건 거짓말이죠.

그저 인간은 죽자고 자기사랑 밖에 없어요. “내가 너를 사랑할 테니까 내가 너를 사랑하면서 기울인 정성에 대해서 너는 10분의 1이라도 나를 사랑하라”라는 뜻에서 압축하면, 사랑해. 그걸 3자로 줄이면 “사랑해” 이런 뜻이에요. 인간은 자기의 행함을 포기할 수가 없어요. 왜 인간은 자꾸 행함에 해와 달과 별과 땅처럼 그렇게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왜 그렇게 자기한테 집착을 그렇게 합니까? 이게 죽어있기 때문에 그런거에요. 애쓰지 않으면 죽는다는 죽음에 쫓기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그러면 여기에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해서 모든 질투심을 끝장까지 가게 하는데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 수있는 것은 그럼 시간의 끝은 어디 있는가? 시간의 끝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13장 33절. 여기 시간의 끝이 나옵니다. 32절요.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원, 투, 쓰리로 끝나버려요. 원, 투, 쓰리.

어제, 오늘, 내일로 끝나버립니다. 제 3일에, 제 4일이 없어요. 제 3일로 모든 시간은 주님의 카운트에서 하루 이틀 사흘로 끝나버려요.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시간을 시작하신, 시간을 만드신 예수님 자신이 그 시간을 품고 죽어버리는 그 순간이 모든 시간이 정지된, 중지되고 끝장이 나는 순간이에요. 근데 그 장소가 뭐냐? 그 장소가 예루살렘이에요.

그러면 예루살렘에 십자가 죽는 사건이 벌어진다면 “주님 언젭니까”는 언제라는 말은 시간개념을 거기다 붙이면 안돼요. “어디에서 마지막 사건이 어디에서 벌어졌습니까?”라고 물어야 돼요. 하마스 전쟁? 아닙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아닙니다. 십자가 전쟁이죠. 십자가 지실 때 시간은 끝났어요. 중지됐습니다. 왜 그러느냐? 그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 인간들은 아무리 길길이 뛰면서 수명을 연장해도 이미 죽은 것으로 확정 났기 때문에 그래요. 확정일자에요. 그래서 우리의 생일은 몇월 몇 일이라는 것은 질문이 잘못된거에요. 우리의 생일은 몇월 몇일이 아니고 우리의 생일은 십자가에요. 장소입니다.

십자가 사건의 장소. 그게 우리의 생일날이에요. 죽고 다시 태어난 날. 태어난 날이 아니고 죽고 태어난 날. 그렇지 않으면 거듭남이 성립이 안되니까요. 그러면 여러분 생각하기에는 왜 인간을 하나님께서 못 죽여서 그렇게 안달나는 것처럼 닦달하는 것처럼 그렇게 죽이고 싶은가? 이것은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이런 기쁜소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그러니까 이게 뭐냐하면 인간은 흙에서 시작했어요. 흙인데 과연 천사가 될 수 있는가? 무슨 수로요? 내가 노동해서요? 내가 평생 동안 직장 생활해가지고 천사돼요? 안됩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변화산상에서 예수님이 해같이 빛나는 것은 일단 그거는 기본이고요. 그 옆에있던 두 사람. 모세와 엘리야도 해같이 빛났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너무 빛이 나가지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모세 엘리야 주님 근처도 못 가지고 뭐라고하느냐? “아주 초막에다 가둬놓으려고 초막 셋을 지어드리겠습니다. 어르신내들 저쪽에 계세요 우리는 이쪽에 우린 초막밖에 있을테니까 초막 안에 그 광채를 들어가 계시기 바랍니다.”

이 땅 자체가 필터이기 때문에 모세의 광채나는 얼굴을 감당못했듯이 인간이 우리가 노동으로 살아가는 일상은 주님의 천사의 빛나는 광채를 감당할 수가, 버텨낼 수가 없어요. 근데 문제는 우리의 몸이 그렇게 된다는 거에요. 고린도후서 5장에. 우리의 이 흙이 하나의 옷으로 간주해서 이 옷을 벗어버리고 이 장막을 벗어버리고 완전히 예수님이 입었던 그 영광스러움으로 갈아입는거에요. 제가 이 말씀 드리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죽이는 것을 고마운 줄 아셔라 이 말입니다. 인생의 과정 자체가 우리를 죽이는 과정이니까 이 얼마나 즐거운 인생입니까?

허무란 말은 붙이지 마세요. 허무한 게 아니고 신나는 인생입니다. 그냥 죽으면 흙에서 흙 죽잖아요. 그것도 저주받은 흙으로 죽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 인생 가운데서 우리 뜻이 아니고 주님의 질투심이 꽂혀서 우리를 흙으로 저주스러운 존재로 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천사와 같이 영광스러운 인간으로 바꿔 줄려고 주께서 우리를 미리 십자가 사건에 눈을 뜨게 해가지고 이미 시간은 끝났네. 수명과 상관없이 우리 시간은 끝났어요. 흙 시간은 끝났고, 이제 천사와 영광된 시간. 시간이 되는데 언제냐고 묻지 말고 “어디서 우리가 천사가 됩니까?”를 물어야 돼요.

장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늘 스가랴 본문은 뭐냐 하면 시간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장소. 예루살렘에 온다는거에요. 예루살렘에. 그러면 예루살렘에 오시는데 그 예루살렘에 기존의 현재의 이스라엘 하마스 싸우는 예루살렘은 가짜니까 필터니까 그거는 찢겨가야 돼요. 질투심으로. 그러면 하나님의 질투심에 의해서 우리가 이끔을 받게 되는 그 예루살렘은 어떻게 만들어져야 돼요. 새로 만들어져야 되거든요. 그러면 먼저 알려면 주님께서는 누구를 사랑했는가? 주님은 누구를 사랑했는가를 먼저 알 필요가 있어요. 하나님은 누굴 사랑하지? 뭐 일반교회 물어보면 사람들은 노래부터 먼저 나오죠.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우리 사랑한대요.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는게 아니에요. 우리를 사랑하면 아예 여호와의 증인처럼 지옥 자체가 없어야 돼요. 하나님은 누굴 사랑하는가. 신명기 32장 21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로다, 내 분노의 불이 일어나서 음부 깊은 곳까지 사르며 땅의 그 소산을 삼키며 산들의 터도 붙게 하는도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21절에 그들이 하나님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켰다는 말은 하나님의 상대자가 누구냐? 하나님 자신이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는 거에요. 이것을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평소에 늘 이야기 한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세례요한한테 세례받을 때 이야기하는거에요. 하늘이 열리면서 나오는 음성이 있어요.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하나님은 아버지를 사랑하는 거에요. 이유가 있어요. 왜 다른 사람 놔두고 왜 예수님만 사랑하는가.

그것은 요한복음 17장 11절에 나옵니다. “내가 아버지 이름으로 왔기 때문에.” 내가 아버지 이름으로. 아버지가 이 땅에 사람으로 왔다면 어떻게 오겠느냐를 아들이 그 아버지의 뜻을 아들이 받들어서 이 아들이 말씀이 육신이 돼서 하나님이 육신으로 이땅에 오신거에요. 이름이 있다는 것은 인간이라는 뜻이거든요. 인간은 인간인데 아버지의 이름이에요. 하나님의 모습.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거에요.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닙니다.

11절에 보면, “내가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기 때문에 내가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호해 달라는 거에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모든 인간은 흙에 속하고 마귀의 심정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인간의 이름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이름은 공통점이 있는데 첫 번째는 모두가 흙이다는 것. 두 번째는 다 죽는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남자냐 여자냐 나이 많은 사람이냐 어린 아이냐 직업이 농부하냐 고기잡느냐 공직 있느냐 일체 주님 보시기에 일체 하나님의 질투심만 야기할 죽어있는 존재일 뿐입니다. 평등해요 그런 점에서. 다 같이 질투심에 의해서 불 심판 되야될 점에서 그들은 평등한 관계입니다. 이 평등한 대상이라는 것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사각형으로 표현해요. 사각형으로. 사각형이 되려면 가로 세로만 있으면 사각형 돼요. 곱하기하면 사각형, 면적 나오니까요. 그런데 가로 세로가 정사변형이에요.

이 예루살렘에 대해서 에스겔에 48장에 보면 이미 하나님께서 예언을 하셨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측량을 하는데 성전을 측량하듯이 측량을 하는데 측량을 어떻게 하느냐하면 면적으로 측량을 하는 것이 아니고 둘레로 측량을 해요. 에스겔 48장 30절에 보면, “그 성읍의 출입구는 이러하니라 북편의 광이 사천 오백척이라” 해놓고 “그 성읍의 문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을 따를 것인데 북으로 문이 셋이라 하나는 르우벤 문이요 하나는 유다 문이요 하나는 레위 문이며” 이렇게 해서 북쪽, 그다음에 동쪽, 그다음에 남쪽 그다음에 서쪽. 이렇게 해서 전부다 이게 4,500척이에요.

4,500이니까 그게 둘레로 계산하면 18,000이에요. 18,000을 현대 필터. 현대 인간들이 노동해서 세워지는 노동이 통하는 이 사회에 측량하게 되면 9.36km가 돼요. 4,500규빗 자체가 2.4km이니까. 여러분들이 옛날 이스라엘 살던 그 약속의 땅 자체가 필터라고 생각해보세요. 필터. 가림막. 모세의 수건. 가림막으로 생각한다면 그 크기는 12월 달 되었으니까 11월 달을 식으로 12월 달을 11월달 달력에 감추어진 12 달력을 표현하기위해서 11월달식으로 이야기한거에요.

인간세계를 질투심으로 불 질러 쫙 찢어버려야 12월 달 나오듯이 이스라엘이라는 필터를 통해서 하나님의 예루살렘은 어떤 식으로 구성되느냐를 에스겔을 통해서 미리 이야기를 해주는겁니다. 여기에 보게 되면 그러면 열두 지파가 차지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열두 지파가 차지하는게 아니고 열두 지파가 그냥 문이에요 문. 문은 울타리와 울타리 사이에 빈 공간이 문이거든요. 그냥 문 세 개 북쪽에 문 세개 동쪽에 문세 개 남쪽에 문 세개 서쪽에 문 세개 뿐이에요.

그러면 이 말은 그냥 열두지파가 문에만 기능을 한다는 것은 안쪽의 주인공은 어린양의 보좌. 하나님이 그 땅의 주인이지 인간은 주인이 아닙니다. 이점이 상당히 중요해요. 제가 한번 질문을 한번 던져볼게요. 학교에 학생이 6명인데 의자가 10개있다. 그러면 의자 4개 남지요. 그게 빈 의자가 되겠죠. 주님께서 안쪽에 예루살렘 안 쪽에있는 어린양의 보좌. 보좌가 두 개 있어요. 어린양의 보좌 하나님의 보좌 두 개 있는데. 보좌가 자기의, 하늘나라죠. 하늘나라를, 예루살렘이 하늘나라니까, 하늘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할 때 학생 6명 의자 10개를 만드는 그런 경우는 없어요.

학생 6명 같으면 의자가 딱 6개 만듭니다. 빈틈이 없어요. 이것은 뭐냐하면 인간이 자기 구원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호출해서 빈자리가 있으니까 넣어 채우는 식이에요. 요한복음 14장에. “베드로야 내가, 니 지금 오지마.” 왜냐하면 베드로 니가 올려고하니까 못오는거에요. “주께 계신데 가겠습니다.” “오지마. 니가 오겠다하기 때문에 나는 너를 데리고갈수 없는거”에요. “기다려라. 내가 하늘나라에 처소가 마련하게 되면 처소에 딱 맞게 내 니한테 올게. 처소에 맞게.” 그래서 이 천국의 특징은 정사각형이라는거에요. 정사각형.

정사각형은 어떤 개별성도 어떤 인간의 고유성도 일체 인정하지 않는거에요. 정사각형 미리 빈 공간을 채우는 몫은 그 권한은 주님에게 있어요. 우리 인간에게 있는게 아닙니다. 그냥 우리는 파수꾼으로 세워진 거에요. 파수꾼으로. 요한계시록 21장 12절에 보면,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방금 이야기했던 에스겔 48장에 나오는 그 30절에 그 성읍. 여기 성읍에 35절에 보면 마지막에 그날 이후에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 여호와 삼마라는 것은 하나님이 바로 거기에 있다는거에요.

하나님이 바로 거기에 있다. 이게 하늘나라에요. 인간은 하늘나라 못 가게되어있어요. 창세기 3장에. 쫓겨났으니까. 쫓겨났기 때문에 그냥 쫓겨난 채로 그냥 계세요. 들어 올 생각하지 말고. 주님께서 뭐를 만드느냐 하면 중심을 만드는거에요. 주님께서 중심을 만들면 열두 지파는 그 주위에 마치 파수하듯이 열두 지파 세 지파 세 지파 세 지파 세 지파 각 진영을 이뤄서 중앙에 있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것을 지키는 식으로 사각형이 되어서 이동하게 돼 있어요. 민수기 2장에. 민수기 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진을 할 때 이게 전쟁, 물론 영적 전쟁이죠. 전쟁을 하는데 거기에 민수기 2장에 보면 거기에 진이 동쪽에는 유다 진, 조 편성한거에요.

남쪽에는 르우벤 진, 북쪽에는 단 진, 서쪽에는 아브라함 진, 그래서 열두 지파 배정을 각 편에 세 개씩 세 개씩 열두 개를 하고 그 가운데는 뭐냐? 레위 지파가 있는데 레위 지파가 뭘하느냐? 언약궤를 메고 들어갑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에요. 그렇게 보면 어떤 문제가 풀리느냐하면 요한계시록에,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거기에 14만 4천 나와요. 인맞은 자들이 14만 4천. 14만4천이란 말은 뭐냐 하면 숫자 14만 4천이 아니고 12 곱하기 12에요. 12와 12의 정사각형의 형태에요.

1,000이라 하는 것은 인간 숫자가 아니고 하늘나라 숫자가 1,000이니까요. 창세기 5장에서 아무리 인간의 수명이 아무리 오래 살아도 1,000을 못 넘습니다. 970 뭐 이래 되죠. 1,000을 못넘어요. 1,000은 인간의 세계와 위의 세계, 다른 시간이 계재 된다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인간의 시간이 넘어설 수 없는 세계가 숫자로 하면 1,000이되는거에요. 그러니 이것은 14만 4천도 12 곱하기 12에요. 정사각형이에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계실 예루살렘 성전을 정사각형 만들었다는 말은 인간들이 불로 태워야 될 인간들이 불로 싸질러야될 인간의 세계도 거기 따라서 같이 사각형으로 되는거에요.

정사각형. 정사각이기 때문에 방향이 동서남북 되기 때문에 스가랴에서 천사들이 네 명의 천사가 동서남북으로 각각 자기 역할 맡아서 거기 손살 같이 달려갑니다. 모든 끝까지 죄로 채워버려요. 이 천사들의 활동을 생각하게 되면 저는 뭐를 생각하느냐 하면 도배기술자가 도배하는 것 생각합니다. 딱 모서리 맞춰가지고 하나 빈틈없이 풀칠을 끝까지 다 메우잖아요. 또는 타일하는 사람이 타일을 끝까지 다 하듯이 정사각형 빈 틈이 없어요. 완전히 다 정사각형이에요. 모서리 하나 빈틈없이 다 채워버립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14장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7절에 보면,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또한 이한 낫을 가졌더라” 성전은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사랑이 있다는 말은 그 외부는 질투한다는 거죠. 질투하면 18절에서 불이 나오죠. 질투의 불이 나와서 다 싸질러야 되니까. 하나님의 예루살렘만 건지기 위해서 나머지는 불 태워버려야 되니까요. 그것도 지옥불로요.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죄가 익은거에요. 죄가 익으니까 옛날 농부들이 한때 발로 밟거든요. 틀에다가 포도 집어놓고 지근지근 밟아버려요. 밟으면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하면 피가 나와요. 더러운 피가 나온다고요. 농부는 뭐 포도 피지만, 여기는 천사가 밟아버리면 더러운 피가 나오는데 여기서 피가 나오는데 그 피가 뭐냐? 성 밖으로 피가나오는데 그게 일천 육백 스다디온, 4 곱하기 4 곱하기 100이에요. 또 동일하게 정사각형이에요. 심판도 정사각형, 구원도 정사각형, 천국도 정사각형. 에누리 없다는거에요.

에누리 없어요. 이거뭐 세상에 틀로 이야기하면 320km죠. 요한계시록 21장 16절에 보면, 천국이 나오는데 예루살렘 성이 나오는데 그 성은 16절에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그냥 11월달 달력. 이 세상 필터로 계산하면 뭐냐? 2,400km 하지만 2,400km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장광이 똑같다는 것. 정사각형이라는 것이 중요해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하시는 일에 인간들의 개별적인 욕구에 의해서 구원시켜주지 않는다는거에요.

인간은 자기 사랑에 미쳐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보좌가 있는데 그 보좌가 무슨 보좌냐? 22장에 보면,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에스겔 48장에서 하나님의 그 보좌가 있는데 거기서 물이 나오듯이. 하나님의 측량을 했던 것. 에스겔에서 성전 측량하고요. 성전만 측량한게 아니고 나라 전체, 가나안땅 나라 전체를 측량해요. 특히 그 측량하는데가 레위인과 제사장 지역만 측량하는 것이 에스겔 48장에 나옵니다.

그게 2만5천 척이라고 되어있는데. 에스겔 48장 13절부터 쭉 나오는데요. 13절에 “제사장의 지계를 따라 레위 사람의 분깃을 주되 장이 이만 오천척이요 광이 일만척으로 할찌니 이 구역의 장이 이만 오천척이요 광이 각기 일만척이라” 측량이 돼요. 측량한다는 말은 쓸 때 없는 인간이 구원되지 않도록 철저에 철저를 기한다는 말입니다. 측량해놓고 사람 맞춰서 거기에다가 집어넣는거에요. 어떻게? 누굴 집어넣는지 오늘 본문에 스가랴에 있는 것처럼. 지팡이 짚는 노인네나 동남 동녀 어린애나 상관없어요. 그때는. 왜? 인간이 흙이 되는데 구분 없듯이 인간이 천사가 되는데도 나이 많은 사람 그리고 어린아이 나이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 상관없이 그곳에 온다네. 호출돼서 오는 거에요.

호출돼서. 십자가 사건에서 역사의 끝인 십자가 사건에서 호출돼서 오는 거에요. “각기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그 성읍 거리에 동남과 동녀가 가득하여 거기서 장난하리라,”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되어있느냐 하면 이렇게 돼요. “참 기이하다.” 참 기이하다. 신명기 29장 27절에서 29절에서는 참 오묘하다고 되어있어요.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땅을 향하여 진노하사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재앙을 내리시고, 여호와께서 또 진노와 분한과 크게 통한하심으로 그들을 이 땅에서 뽑아내사 다른 나라에 던져보내심이 오늘날과 같다 하리라,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개역한글)

 The secret things belong to the LORD our God, but the things revealed belong to us and to our children forever, that we may follow all the words of this law.(NIV)

The secret things belong unto the LORD our God: but those things which are revealed belong unto us and to our children for ever, that we may do all the words of this law(KJV)

"The secret things belong to the LORD our God, but the things revealed belong to us and to our sons forever, that we may observe all the words of this law.(NASB)

숨겨진 것은 우리 하느님 야훼께서나 아실 일이다.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언제까지나 할 일은 이미 드러난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 법에 있는 모든 말씀대로 실천할 뿐이다.(공동번역)

 세상에는 주 우리의 하나님이 숨기시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일도 많다. 그것은 주님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뜻이 담긴 율법을 밝히 나타내 주셨으니, 이것은 우리의 것이다. 우리와 우리의 자손은 길이길이 이 율법의 모든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표준새번역)

 비밀스러운 일들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해 있지만 율법을 계시해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영원히 있게 하신 것은 우리가 이 율법의 모든 말씀들을 따르게 하려는 것이다.”(우리말성경)



하나님이 참 오묘하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하면 어떤 점에서 오묘하다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질투한다는 그점이 오묘하다는 거에요. 이게 무슨 뜻이냐하면 하나님의 질투하심을 받지 아니한자는 구원된 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점이 오묘하다는 거에요. 이게 방금 제 이야기는 스가랴 오늘 본문의 이야기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어떻게 하면 바르게 삽니까? 어떻게 하면 착실하게 삽니까?” “죽어라.” 이게 오묘함이에요. 그냥 죽으면 안되고 주님의 십자가에 의해서 내가 죽어 마땅함을 아는 그 마음 자체가 참으로 기이하고 오묘한 일이에요. 신기한 일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인간이 하루하루 살면서 우리는 오묘함을 잊어버렸어요. 왜냐하면 자기 노동으로 살기 때문에 바들바들 떨면서 내가 노동한 대로 대가가 주어질까 말까 벌벌 떨며 살기 때문에 이건 전혀 오묘하지 않아요. 신기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불평 덩어리에요. 나는 노력을 이만큼 했는데 하나님이 거기에 대해서 적절하게 보답을 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그게 오히려 이상한 거에요. 그러나 신명기 3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은 그들은 귀신을 섬기고 마귀를 섬기게 될 겁니다.

신명기 32절 20절에, “그들의 종말의 어떠함을 내가 그들에게 보여주는 건데 그게 바로 질투심으로 내가 바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바로 그 경험.하나님이 질투하심으로 우리를 우리의 본색을 우리가 왜 죽을 수밖에 없는가를 들추어 내는 그 사실을 접하게 되는 것. 세상에 이것보다 더 오묘한 일은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 효과로 그 결과로 우리가 성도로 제조가 되었다는 사실을 이 세상에서는 들을 수 없는 볼 수 없는 찾을 수 없는 하나님만의 일인 것을 왜 우리가 진작 기뻐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했는지요. 우리의 노동에, 우리의 대가에 모든 정신을 다 팔려버린 이러한 죄 때문인 줄 아오니 이제는 이 죄를 뚫고, 말씀이 뚫고 나와서 주님이 하신 다 이루신 일만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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