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식의 공간
2023년 11월 15일 본문 말씀: 스가랴 7:1-7
(7:1) 다리오 왕 사년 구월 곧 기슬래월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7:2) 때에 벧엘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 종자를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7:3)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가 여러 해 동안에 행한 대로 오월간에 울며 재계하리이까 하매
(7:4)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7:5)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7:6) 너희의 먹으며 마심이 전혀 자기을 위하여 먹으며 자기를 위하여 마심이 아니냐
(7:7) 여호와가 이전 선지자로 외친 말을 너희가 청종할 것이 아니냐 그 때에는 예루살렘과 사면 읍에 백성이 거하여 형통하였고 남방과 평원에도 사람이 거하였었느니라
금식은 개인 금식이 아니라 집단 금식이어야 합니다. 사적인 사는 형편을 개선하기 위한 금식은 성립되지 않고 오로지 ‘진리 추구’를 단체로 하기 위한 금식 뿐입니다. 개인 금식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입니다. 모세는 일반인들이 하는 금식이 아니라 금식의 원형을 참석한 유일한 인간입니다.
그는 시내산 꼭대기에 40일 밤낮으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면서 지냈습니다. (출 24:16
-18) 거기서 모세는 신 밑의 사정을 걱정하거나 염려하지도 않습니다. 더나아가서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일에도 관심두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나님 앞에서만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까지 내려오셨다는 것은 인간이 들어설 수 없는 ‘근원의 자리’를 마련하시기 위함입니다.
그곳이 바로 ‘금식의 공간’입니다. 하나님과 모세가 같이 금식하시는 공간입니다. 거기서 모세는 진리를 접하게 됩니다. 따라서 산 위의 금식이 산 아래로 내려오면서 그 모세의 사적인 금식의 취지가 확대가 되는 새로운 ‘금식의 공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금식의 공간이 곧 성전이며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이 됩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마 4:1-2) 이 세상이 그 누구도 하지 못하는 악마의 영적 전쟁을 예수님께서 마주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에 의해서 40일간 금식하게 됩니다. 이처럼 영적 전쟁이란 사사로운 개인이 해내는 일이 아닙니다.
모세는 시내산 위의 ‘금식 공간’에서 자신에 대한 관심사는 빠지만 그 ‘자리’만 있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자리는, 감히 죄인인 인간들이 자기 죄를 처리하기 위해 들어설 자리가 아닙니다. 도리어 그 자리는 인간이 해내는 모든 것을 금지되는 자리입니다. 즉 인간들이 해야 할 것을 하는 자리가 아니라 도리어 해야 할 것이나 안 해야 할 것까지 모두 금지당하는 자리입니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내려오고 우리 하나님도 뒤따라 산에서 내려옵니다. 그렇게 해서 형성된 특별한 공간이 성막이며 그것이 성전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벧엘 사람들은 성전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자신의 생활 여건이 호전되기를 기대하면 줄곧 금식해 왔음을 강조합니다.
즉 그냥 70년 동안 5월 달이나 7월 달에 정기적으로 금식을 해왔던 것은 자신들의 사는 처지가 하도 비참해서 애통하면서 금식해 왔던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약간의 동정성을 얻어내고자 했던 겁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다음과 같이 이해합니다. “성전이 있을 때에는 우리는 성전의 도움으로 풍족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계시는 발판으로 여기는 성전을 지켜주시기에 우리는 그동안 그 곁에서 덕을 보았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전처럼 여유롭게 살 날을 위하여 금식해 왔던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평하십니다. “그런 금식은 너를 위한 금식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을 위한 금식이 되지 않는 것을 어떤 금식을 의미할까요? 사무엘상 7:5-6에 보면, “사무엘이 가로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을 거룩한 하나님의 전쟁에 참전시킵니다. 이 전쟁은 인간이 제정신으로 수행할 수 있는 전쟁이 아닙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전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데리고 다니십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애굽의 나라와 분리된 나리이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7:1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 즉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출애굽의 취지를 상실하고 애굽나라의 생활을 연모하고 여망하는 것은 여전하기에 그들은 애굽과 꼭 빼닮은 앗수르 나라로 갔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집단금식은 애굽의 방식 의식을 배설물처럼 빼내는 겁니다. 빼내는 방법은 인간의 힘으로 감당못하고 전쟁을 일으켜서 거기서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초월하는 힘을 경험하는 겁니다. 모세의 금식은 실은 신약 때,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행하셨던 40일 금식의 모형이라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모세의 얼굴에서 발산되는 광채는 다 예수님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금식은 자신의 깨어짐입니다. 세상적으로 자신이 자기를 살리고자 하는 애굽적 방식을 버리는 겁니다. 요한복음 12:24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깨어지지 아니하면 나올 열매도 없는 겁니다.
애굽식으로, 인간의 힘으로 해낼 수 있는 식으로 세상을 살면, 진리라는 열매는 맺혀지지 않는 겁니다. 예수님의 금식의 효과는 요한계시록 1:14-16에 잘 나와있습니다.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한마디로 말해서 ‘힘’입니다. 하나님 금식의 능력이요 효능입니다. 성도의 금식은 바로 이 예수님의 금식에 참여되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요? 이미 무너져 내리는 이 세상 속에서 속속들이 지옥의 체험을 하는 겁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 성도의 삶은 자기 부정의 삶입니다.
세상의 비위를 맞추려는 삶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던 전혀 진리가 아니며 고로 진지하지 아니하며 장난같은 겁니다. 장난치고는 혹독한 장난입니다. 지옥의 체험입니다. 세상으로부터 그 어떤 것도 받을 게 없음을 인식하는 만듭니다. 세상은 그 어떤 기대를 걸어서는 안됨을 “먹지 말라!”라는 복음을 통해서 전달받게 됩니다. 성도만이 죄의 근원을 주님의 금식 공간에서 발견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위한 삶이 되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8강-스가랴 7장 1-7절(금식의 공간) 231115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보겠습니다. 스가랴 7장 1절에서 7절까지입니다.
“다리오왕 사년 구월 곧 기슬래월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때에 벧엘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 종자를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가 여러 해 동안에 행한대로 오월간에 울며 재계하리이까 하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의 먹으며 마심이 전혀 자기를 위하여 먹으며 자기를 위하여 마심이 아니냐, 여호와가 이전 선지자로 외친 말을 너희가 청종할 것이 아니냐 그 때에는 예루살렘과 사면 읍에 백성이 거하여 형통하였고 남방과 평원에도 사람이 거하였었느니라”
아멘.
여기에 금식이 나오는데 금식은 무엇과 겸하여 나오느냐 하면 애통과 같이 결부, 연결되어있습니다. 5절에 보면 “너희가 70년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애통할만한 일이 있는데 금식하는 너희들이 마음 씀씀이, 마음가짐이 너희들의 생활에 불평 때문에 애통해서 금식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니가 애통한 적이 있느냐를 묻는겁니다.
너희들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금식하고 애통하는데 그것은 진정 하나님의 성전을 없애버리고 성전을 불태워버린 하나님의 뜻을 무엇인지를 그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금식하고 애통하는 것, 그래야 되는데 너희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우리가 사는 것이 힘들어서 좀 풍족하게 살게 해달라고 금식하고 그리고 애통하고 있다는 것을 지금 지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성전이 제대로 잘 되어가고 있거든요. 주님은 성전중심인데 그들은 성전은 성전이고 우리 살림살이가 나아지지가 않으니까 도대체 이 금식을 언제까지 계속해야 되느냐고 물어온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참에 잘됐다.” 하나님께서 “니 속내를 다 까발리리라. 너희들이 성전을 생각하느냐, 너희의 삶의 형통을 생각했느냐.” 7절 끝에보면 “예루살렘과 사면읍에 형통하였고 남방과 평원에 사람이 거하였었느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 당시에 사람 사는게 형통했고 사람들이 번창한 것은 무엇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냐 하면 성전이 온전하게 성전의 기능이 제대로 돌아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예루살렘을 형통했고 사람들이 거하게 했다는 겁니다. 근데 그 당시에도 이렇게 형통하고 사람들이 번성할 때도 선지자들이 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외쳤습니다.
언제 성전 망하면 성전 없어지면 너희도 같이 거덜난다. 이 뭐 수십차례 이상이죠. 성경만 해도 수 백 차례 이상으로 그걸 경고 했었습니다. 근데 그들은 성전은 뒷전이고 자기 생활 여유있는 생활만 신경쓰면서 그렇게 그들은 보내왔습니다. 그 성질이 그대로 있어가지고 다시 하나님께서 성전 지으라고 70년만에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에 보냈는데 그들은 좀 짓는척하다가 안 지었어요. 우선 살고 보자는 식이죠.
우선 내 살고, 내 생활이 안정되고 난 뒤에 그다음에 성전은 그때 가서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이러다가 에스라 느헤미야한테 된통으로 많은 핀잔을 받게된겁니다. 그러면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기적으로 금식을 했는데 여기보면 여기 5절에 다시보게되면 4절에도 3절끝에도 “여러 해 동안에 행한대로 오월간에” 5월달에, “울며 재계하리이까 하매” 5월달에는 그들이 정기적으로 금식을 했는데요.
금식을 한 이유가 5월 달에, 5월 달하는 것은 우리식으로하면 7, 8월 달이에요. 그달에 성전이 불타버렸어요. 성전이 불탄 그때 5월 달에 그들은 성전 없다고 그들은 울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뭐냐하면 성전이 뭐냐, 성전이 왜 있느냐하는 생각은 없고 상당히 성전을 마법적으로 여긴거에요. 그들의 논리는 이랬어요. ‘성전이 있으면 성전은 하나님의 발등상이니까, 발판이니까 하나님이 거기에 계실거고 하나님이 계시면 그 덕은 우리가 본다’.
결국은 마지막은 뭐냐? “하나님의 덕 좀 봅시다” 그것 때문에 그들은 성전이 불탄 것이 애석하고 애통해서 그렇게 금식하면서 다시 그때 좋았던 시절을 생각했던겁니다. 근데 “오월달에 금식을 합니까?” 라고 벧엘 사람이 스가랴한테 물어왔는데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70년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했다.” 칠월 달 금식을 여기에다 추가를 시켜서 너희도 칠월 달도 금식했다는 거에요.
칠월달은 뭐냐하면 우리 요새식으로하면 9월달 10월달 말하는데 항상 숫자보다 2개월, 7월달같으면 9, 10월달이에요. 이때가 다 포로잡혀간 사람은 포로로 가고 남아있는 유대인들이 학살당한, 내란이 일어나서 학살당한 그 유대인이 학살당한 그 사건이 있었어요. 그것 때문에 그들은 그 아픈 기억을 생각해서 그때 추억을 잊지 말자고 공감한다는 의미에서 금식하고 애통한겁니다.
자, 이렇게 여길 통해서 우리가 알수있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 짓는 취지하고 인간이 금식하고자 하는 마음가짐하고 전혀 이거는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냥 성전 지으면 되는데 그들이 그냥 성전 지으면 되는데 그들이 성전 짓는것보다 금식 하겠다는 것은 성전이 지금 준공을 반 정도 남겨놨어요. 7장 1절에, 다리오왕 4년인데 다리오왕 통치 2년에 성전 짓기 시작해서 통치 6년에 마감되거든요. 중간 쯤 온거에요. 4년 9월에.
절반쯤 지었다 이말이죠. 그러면 여기에 충실해야될텐데 성전 짓는데도 우리의 살림살이 안 나아진다고 그래서 뭐 “금식을 언제까지 해야됩니까?” 라고 한거에요. 이 금식이 자기 생활 나아지는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 이것은 전혀 하나님의 성전취지하고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맞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제 알아야되죠. 금식이 뭐냐?
금식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래갔을 때 그게 금식의 시작입니다. 출애굽기 24장 16절 1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 불러 올라갈때에 18절에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사십일 사십야를 산에 있으니라” 돼 있어요. 아무것도 물도 마시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를 않았어요. 이 모세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것도 마시지 않은 채 40일 있었다는 말은 모세가 굶고 물 안 마시는데 치중한게 아니고 누구를 만났어요. 누구? 그 산에서 누구를 만났다이말이죠.
그게 뭐냐? 금식의 자리에요. 금식의 자리는 요즘처럼 TV앞에 컴퓨터앞에 앉아 있는게 아니고 하나님 앞에 있는겁니다. 그래서 모세가 시내산 올라오고 난 뒤에 하나님 보는데 집중했기 때문에 산 밑에나 세상 일에는 신경쓸 필요가 없지요. 이게 금식이에요. 세상 일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 그리고 금식은 굶는게 초점이 아니고 ‘내 자리’, 이 금식의 공간에 내가 들어 왔다는거에요. 어떤 금식의 공간? 하나님 만나는 그곳.
그러면 ‘모세가 하나님 만날 때 40일 굶었다, 물도 마시지 않았다’는 말은 그 하나님이 장차 모세가 행한 일을 그대로 하시기 위해서 모세를 불러 세운거에요. 본의 아니게 먹을 필요도 없고 마실 필요도 없는 그 모세와 함께 동일한 공간에 있는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중에 육신이 되어서 오실 때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을 때 며칠 동안, 40일 동안 밤낮으로 금식했다. 밤낮으로. 40일 40야. 밤낮으로 금식했습니다.
이거는 뭐냐하면 주님의 금식 앞에 모세도 본의 아니게 금식하면서 금식의 공간을 형성한 거에요. 금식의 공간은 하나님만 쳐다보면서, 주님이죠, 주님께서 앞으로 하실 일에 같이 합석하는 것, 합류하는 거에요. 그래서 성경에서 금식은 개인 금식은 없습니다. 집단금식밖에 없어요. 이 집단금식을 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본분이 뭐냐 하면 사적으로 내 인생이 꼬인 것을 풀어보겠다. 내가 이렇게 힘들게 되어간 인생을 어떻게 다시 회복해보겠다고 악바리 쓰면서 “내가 이렇게 굶는데 주께서 안 도와줄거요?”라고 떼쓰는게 금식이 아니라 진리를 형성하기 위해서 집단으로 합력하여 진리를 촉구하는데 거기에 금식이 동원되는거에요.
‘신앙생활, 복음 좀 들었다. 신앙생활 한 수십 년 했다.’ 하면서도 여전히 뭔가 감을 못 잡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복음을 준 것은 집단이에요. 개인이 아니고 집단적으로 합력하여 진리를 추구하는거에요. 진리를 형성하는 겁니다. 진리에요. 사적인 애로사항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진리입니다. 관심사가 진리에 있어야지 사적인 일에 징징되면 안돼요. 그 사적 금식은 누구만 하느냐 하면 우리 주님만 해요.
주님만 하시는 사적 금식이 어떻게 효과를 이 세상에 어떻게 퍼지게 만드느냐. 그 주님의 사적 금식이 유발한 그 금식의 여파를 따라가게 되면 거기에 집단적으로 참석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홀로 하시는 거룩한 전쟁에 참여가 가능합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금식할 때 어떤때 금식했느냐. 사무엘상 7장 6절에서 8절보면, 5절부터보면 “사무엘이 가로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그들은 금식했어요. 자 그렇다면 인간이 하는 금식은 무엇인가? 금식은 인간 자체의 한계를 지적하는 겁니다. 이게 죄 때문에 금식했다는 것은 금식하면 죄가 용서된다는 것이 아니고, 잘 이해해야 돼요. “죄인으로서 나는 죄인은 맞는데 그 죄인의 근원에 대해서 죄인 입장에서 나아갈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라는 고백이에요. 분명히 나는 모든 생각이 죄인데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내가 죄의 근원에 내가 나서서 뛰어들 수 없는 것. 그래서 근원에 가지 못하고 근원 앞에서 스톱하는 것. 이게 금식이에요.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평소에 활동하는 것. 지금 거룩한 하나님의 전쟁 앞두고 그럴 기분이 안돼요. 왜 그러냐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은 인간들의 전쟁이 아닙니다. 사람이 해낼 수 없는 전쟁이에요. 따라서 인간이 해낼 수 없다는 것. 인간은 불가능하다는 것. 그 불가능함을 금식을 가지고 표해야 되는거에요. 이번에 일어난 전쟁. 그 막강한 블레셋 전쟁 앞에서 “하나님, 우리가 할수있는 것은 제로입니다. 결코 우리가 끼어들 자리는 전혀 없습니다.” 그걸 보여주는게 금식이에요.
금식함으로써 금식의 공간, 주님의 공간을 마련하는 겁니다. 모세가 40일 잠도 안 자고 안 마시고 안 먹어도 모세는 죽어야 되는데 사람은 40일 동안 안 먹으면 죽잖아요. 죽어야 되는 모세가 안죽었다 이 말이죠. 안 죽는 정도가 아니고 얼굴에 광채가 빛난채 내려왔어요. 오메가3 효과입니까? 뭡니까? 왜 얼굴에 광채가나요? 얼굴이 왜그렇게 좋은거에요? 주님의 금식의 효과입니다.
나중에 주님의 금식은 구약에 나타나지 않고 신약에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 광야에서 시험받을 때 그때 주님의 금식이 등장하지요. 그러니까 이거는 인간의 모든 금식은 금식 행위 자체에 대한 부정이 포함되어있어요. ‘내가 금식 한다. 근데 금식 어떤 효과 있을 것이다.’ 아싸리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라는 거에요. 마태복음 6장에 그 바리새인들이 금식을 하죠. 6장 16절에 주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아, 이거 이거, 또 정치적 발언 나오지요 여기서. 단식하고 난 뒤에 수염도 안 깎고 검찰청에 간 사람있지요. 그게 슬픈 기색. 티 다내고있어요. 금식한 티를 낸다고요. 내 뜻이 좀 반영되었으면 좋겠다는거죠. “금식할 때 너희는 외식하는자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일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사람에게 보일려고. 그러면 주님이 말하는 금식은 사람에게 보이는 금식은 애시당초 금식 자체가 성립이 안된다는 거에요. 모세가 금식한 것은 주님의 금식과 합류된거에요.
나중에 모세가 내려오게 되면 이스라엘 전체가 집단적으로 금식을 합니다. 무슨 공간을 위해서? 금식의 공간. 저는 이것을 자리. 플레이스(place), 자리에요 자리. 자리를 비워 놓는거에요. 인간의 자리를, “저리가 저리가, 개도, 고양이도 저리가.” 비워놓는거에요. 주님의 금식의 자리. 다시말해서 시내산에 내려온 그것도 주께선 고생인거에요. 어디 시내산까지 내려오겠습니까 그 척박한 산에. 그것도 고생이에요.
금식이 주님의 금식의 의의가 요한복음 12장 24절에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깨어져야 내놓을 열매가 있어요. 깨어져야. 망해야 내놓을게 있어요 망해야. 주님만이 할수 있습니다. 세상에 어느 인간이 자진해서 자기인생 망하고 싶어 환장한 사람 누가 있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금식은 인간들이 해야할 것을 하라는 말이 아니고, ‘해야할것이냐 안해야할것이냐’ 안 하는게 금식이에요.
“이거 해야지”, “하지마”, “저거 안 해야지”, “하지마” 이게 금식이에요. 금식 자체에 금식에대한 부정도 포함이 되어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금식은 뭐냐? 금지에요. 금지. 창세기 3장. 따먹지 마라했지?
하나님의 전쟁은 이미 인간들의 거짓적으로 유포되어있는 환상적인 이 현실관에 대한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자기중심으로 자기 편하게 살고 싶고 여유있게 살고 싶어요. 제때 밥 먹어가면서 씩씩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모세 보세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는데 그 영광된 힘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예수님의 금식.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죽으신 그 효과에 대해서는 요한 계시록 1장에 보면 예수님의 얼굴로 나와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 내려올 때 영광스런 얼굴로 비쳤잖아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영광된 얼굴을 모형으로 보여준거에요. 모세는 철저하게 히브리서에 의하면 종이에요. 주인의 본질을 종이 앞당겨 보여준 것이 모세입니다. 오늘날 성도이고요. 그래서 성도한테는 늘 주님께서 이런식으로 말씀하시죠. “니가 있음에 내가있다 참 신기하지않느냐?” 사람들이요 자꾸 다른 인간들만 보이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내가 어떻게 보이는가에 주눅이 들어있어요.
행동 하나에 주눅이 들어있다고요. 가정에서도 그렇고 자식과 부모 사이도 그렇고 직장에서도 전부 다 그래요. 그러나 근원적으로 한번 생각해보세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니가 거기에 있다. 있지?” “있습니다.” “그거 내가있게 한거야. 그러니까 니가 있음에 내가 있다. 이것보다 더 신기한 기적이 있어?” 이게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그게 바로 뭐냐 하면 자리에요. 자리고 이게 금식의 공간입니다. 내 공간이 아니에요. 나의 모든 행할 것 행하지않을 것이 금지당한 공간이에요. 주님만 바라보는 거에요, 거기서. 모세처럼.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는 것은 더도 말고 모세처럼만 되어라 이 말이죠. 먹는 것 입는 것 신경쓰지 않고 주님만 쳐다봤던 그 모세. 모세가 산에 내려가고 난 뒤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모세 따라왔지요. 모세가 봤던 그 성전 설계도. 제사법 설계도. 그것 따라서 쑥 들어오신거에요. 하나님께서. 모세 영광은 장차 오실 주님의 얼굴의 영광이었습니다. 그 영광에 대해서 소개 해드리고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14절에서 16절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힘차게죠. “비취는것 같더라” 이 14절 16절 읽었던 이 전경, 이 상황을 우리 한국말로 딱 한자로 이야기한다면 그게 뭐냐? ‘힘’이에요. 힘.
주님의 십자가의 힘. 주님의 고난의 힘. 주님의 금식의 힘. 금식의 효과에요. 효능이에요. 힘이에요. 힘이 어떻다고요? 해같이 힘차게 빛나는거에요. 누가 감히 해를 정면으로 쳐다봅니까? 모세가 40일동안 안 굶어죽었던건 그 힘 때문에 그런거에요. 장차 오실 장차 예수님의 얼굴에 비친 해 같은 힘이 모세는 일찌감치 그걸 시내산 위에서 체험한거에요. 자, 모세가 뭘 체험했는가? 세상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체험한 거죠. 이 자리, 금식의 공간 외에는 다 무너져요.
그 금식의 공간이 시내산에서 내려와서 지상에 된 것이 뭐냐? 성전입니다. 성전 빼놓고 다 무너져요. 성전 빼놓고. 그 무너지는 축구장에서 손흥민은 또 한 골 넣고 이러죠. 그 무너지는 세상에서 방탄소년단은 또 히트곡 내고 하죠. 그러니까 이 금식의 공간에 다시 말해서 금식의 공간을 여러번 이야기했지만 쉽게 말해서 주님만 쳐다보는 거에요. TV말고 컴퓨터말고 주님만 쳐다보는 그 공간에서 주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거에요.
“자꾸 세상 무너지는데 자꾸 엉뚱한 세상 생각 할래? 무너지는 것 니가 왜 생각하느냐?” 이스라엘 백성들로하여금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초청하는 거에요. 초청 방법이 뭐냐? 전쟁입니다. 와, 이것참 초대장 해가지고 이쁘게 초대장 주는게 아니고 전쟁 방식, 전쟁을 통해서 초대합니다. 그 전쟁이 만만한 전쟁 같으면요, 금식은 하지도 않아요. 훈련이나 하고 무기나 수입하면 돼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데리고 하는 전쟁은, 겁나는 전쟁. 도저히 이거는 엄두가 나지않는 전쟁이에요. 감당이 안되는 전쟁에 보냅니다.
그것은 정탐꾼에서 마찬가지죠.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가기전에 열두 정탐꾼을 미리 보냈잖아요. 그 뭐 사람들이 요구해서 보낸것도 맞지만 하나님께서 그걸 의도했었어요. 열두명 정탐꾼대표 열두 지파한테 한 사람당 대표해서 열두 명 갔는데 요즘 민주주의 같으면 다수결의 원칙 같으면요 저쪽에 열 명 대 두 명이기 때문에 진리가 열 명 쪽이에요. 그런데 갔는데, 벌써 정탐꾼 돌아와서 하는 보고를 듣고 온 백성들이 전부 다 울었어요. 이젠 죽었다.
호세아 7장 11절에 이런말씀 나옵니다. 7장 11절.“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을 에브라임이라해요. 그러니까 북이스라엘땅은 에브라임지파가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표성을 갖고 있어요.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 여기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가기는 어디로가는가? 앗수르로 가는도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미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애굽에서 분리되어서 나온 나라가 이스라엘이에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든 것은 전에는 애굽에 삶의 태도로 무장되어있던 그들인데 그 애굽에 삶에 무장된 것을 그걸 빼고 쏙 빼고 거기다가 천국, 하나님이 사는 방식을 거기다가 대신 집어넣는나라가 이스라엘이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게 금식이 뭐냐? 아주 쉽게 말해서 금식이라는 것은 변보는 것. 배설하는거에요.
뭐를 배설하느냐? 애굽 요소를 빼는 거에요. 애굽 요소를 빼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하면 출애굽이라고 합니다. 출애굽의 취지에요. 하나님께서 주님만 쳐다보는 그 주님의 금식의 공간. 주님만 바라보는 그 자리에는 어떤 자리였느냐 하면 출애굽 할 때 그 취지를 담고 주님만 바라봐야 돼요. 그러면 이 출애굽 취지와 대치가 되고 반대가 되는게 뭐냐? 애굽의 생활방식이었습니다. 애굽의 생활방식이라는 것은 뭐냐하면 내가 요령부리면서 내가 할수 있는대로 사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역량것 사는게 바로 애굽의 생활이에요.
그걸 우리한테 빼라는 거에요. 빼는 방법은 전쟁입니다. 정탐꾼이 가보니까 이거는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아요. 정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전쟁에 맞닥뜨리게 하는겁니다. 전쟁에, 그걸 맞닥뜨린다고 되어있는데 성경 용어로 하면 붙여주는 전쟁이에요. 붙여주는 전쟁. 그 전쟁할 때 아까 사무엘상 봤듯이 그들은 그들의 이스라엘에 자기의 한계. 다시 말해서 애굽적인 사고방식의 한계를 인식할 필요가 있어요.
이것까지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다 할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신 것 밥 먹고 물준 것 물 마시고 이게 우리가 할 수 있는거에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지금 맞닥뜨리게된 상황은 이거는 인간의 능력으로 해내지 못하는 인간으로 할 수 없는 주님만이 하는 그 금식의 공간. 주님의 자리이죠. 금식의 공간 말도 어려우면 그냥 주님의 자리. 주님 계시는 그 자리. 주님만 쳐다봐도 아무 문제없는 그 자리에 지금 이스라엘은 들어갈려고 하는거에요.
그러니까 그 자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모든 것은 금지당하거든요. 인간이 할 수 있는건데 그걸 금지당한다. 그럼 인간이 할 수 있는건 뭐냐? 먹는 것은 먹고 마실거는 마시고. 뭐 그거죠. 잠잘 때는 잠자고. 그거 우리 다 하잖아요. 그걸 거기서 멈추고 금지 당하는거에요. 그게 금식이에요. 그러니까 금식은 ‘나 그만살래’가 금식이 아니고 ‘나 돌아버릴래’가 금식이에요. ‘나 미쳤어 미쳤어. 나 이거 미친거야 정말. 어떻게 이런 발상이, 어떻게 이런 발상이 내안에서 나와.’ 이게 금식이에요.
‘그래 금식하면 나는 죽지만 내가 죽으면 다시 살겠지.’ 내가 죽고 내가 사는 그런 구원은 성경에는 없어요. 내가 죽고 주님이 사는 것이 구원이죠. 지가 어디 뭐 도 닦아서 어디 부처입니까? 도 닦아서 해탈하고자 해요? 그런건 없어요. 그런건 수녀원 수도원 기도원에서 하라고하세요. 그런건 없어요. 그건 하나의 정신차리는거에요. 요령 부리는거에요. 금식은 뭐냐? 나 돌아갈래가 아니고, 박하사탕(영화)에 나 돌아갈래가 아니라 나 돌아버릴래. 나 이거 완전 미친거지 이게 미친거야. 논리상 앞뒤가 안맞아요.
우리 속에서 애굽적 요소가 시원하게 배설되는 순간입니다. 정신 바짝 차린다고 마귀가 넘어가지 않아요. 마귀가 “아이고 기죽어” 이러지 않습니다. 정신 바짝 차리기 때문에 마귀가 더욱더 마귀의 종이 된 거에요. 돌아버리면 되는데 왜 정신을 차려. 성경 공부하고 정리하고 그런다고 마귀가 “아이고 아이고 겁난다 야” 마귀가 이러고 있습니까? 지금 놀리고 있습니다. 정신을 이렇게 돌아버리면 우리가 아는 것은 뭐냐 하면 인생은 하나의 장난입니다.
인생은 장난이에요. 연세 많은분이 아멘 하니까 이제 아멘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냥 인생은 장난이에요. 진지하는게 우스워요. 진지한게. 근데 TV나 컴퓨터보면 전부 다 진지해요. 뭐 민식이법. 이야, 그놈의 법, 법.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안 죽고 버틸려고 하는 그 법들, 남한테 웃음거리 되지 않기 위해서 자기가 법 지켰다고 우기는 그 법. 착실하고 성실하게 살았다고 우기고싶은 그 모든 법들. 그게 바로 애굽이에요. 그걸 빼야 된다니까요.
정신 차리고 사는게 아니고 정신 빼고 살아야 돼요. 그게 정신 차리면 성전 되신 주님이 죽어나가요. 주님의 목적은 뭐냐? 이 세상이 다 무너져도 성전만 있으면 돼요. 이게 바로 우리가 금식 해야될 이유입니다. 그러나 정신 차리면서 금식하는사람 나와요. 누가복음 18장 12절,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정신 너무차렸어. 정신 너무 똑똑해요 이사람은요. 이거는 이 금식은 자기를 위한 금식이에요. 이 사람은 아직 성전이 불탄 이유를 모르고 주님께서 금식한, 금식하신 주님께서 십자가 죽기까지 복종하는, 복종하기 위해서 금식했거든요. 주께서 광야에서 시험받고 그 금식의 효과로서 십자가 죽어버린 주님의 금식의 의미를 모르는 거에요. 이 사람은 끝까지 자기만 쳐다보고있는거에요. 금식을 하고있는 자기만 쳐다보고있어요. 십일조하는 자기만 쳐다보고사는거에요.
정신차리지 말고 주님만 쳐다보면 돼요. 왜? 너나 할 것 없이 진리를 형성하는 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오직 하나밖에 없는 사명이기 때문에 그래요. 진리에요. 나 아니고 사적인 것 아니고 진리입니다. 사적인 것 추구하다가 다 거덜난 사람 나옵니다. 창세기 27장 38절. 아, 거기에 안타까운 사연이 나와요. 뭐냐 하면 아버지여, 그 아버지 이삭이 에서와 야곱한테 복줄 때 야곱한테 줬거든요.
주고 난 뒤에 뒤늦게 에서가 와서 하는 말이 “아버지여, 내게 줄 것 없습니까?” 내게줄 것 없습니까. 아버지 하는말이 “너한테 줄게 없다.” 자동금식. 줄게 없어요. 금식이란 바로 저주의 자리. 죄인으로서의 이유는 모르겠고 죄인은 확실하고 따라서 이후에 들어갈 수 없는 죄인의 한계를 표하는게 바로 금지된 창세기 3장, 금지된 상황을 다시 반복하는거에요.
“주여 내한테 줄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내가 수긍하게 하옵소서.” 수긍하게 하옵소서. 이 밥 나를위한 밥 아니고 물 나를 위한 물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분을 위해서, 어떤 다른분을 위해서 저한테 물주고 밥 줬잖아요. 그러면 다른 분이 누군지 그 자리에 들어가는, 그 자리에 가는데 그 자리가 영적 전쟁이에요.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을 하고 있는겁니다.
인간이 해내지 못한 전쟁이에요. 인간들은 전부다 애굽에 갇혀있어요. 약속의 땅에 못 갑니다. 배운 것이 애굽이라서 애굽 요소를 스스로 자기가 빼내지를 못해요. 그러니까 애굽요소를 가지고 거기서 완전히 돌아버리는거에요.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돌아버린것이지 그냥 돌아버리면 정신병원 가야돼요. 주님앞에서 돌아버리는거에요. 왜? 논리로 합리적인 윤리도덕으로 도저히 납득이 안되는 분이기 때문에. 이 말이돼요? 사십일동안 안 먹어도 산다.
이게 말이 돼요?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는데 영생 얻었다. 이게 말이 되냐 이말이죠. 나쁜짓은 다했는데 피로 용서받았다 이게 말이 돼요? 말이 안 될때는 그냥 돌아버리면 되는거에요. 이 오늘날 이 시대에 그럼 이시대는 어떻게 금식하는가? 금식하는 방법이 나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 이런 말씀있습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이게, 먹지도 말라 이게 뭐냐 하면, 지옥의 체험을 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거에요. 우리는 지옥 체험하기위해서 살아가는거에요. 왜? 무너지는 세계이기 때문에. 인생은 장난이에요. 뭘해도 장난이에요. 성공은 없습니다. 원래 장난치는거에요. 그러니까 장난치는 인생 이 땅에 이미 영생얻은 사람은 지옥 경험을 속속들이 경험하는 장난이에요. 그 지옥경험을 어떻게 하는가? 사업가들이 직원을 고용할 때는요 지 책임을 전부다 직원들에게 돌리기 위해서 직원을 채용하고요, 직원들의 회사생활은 노는데 급구하는게 직원이에요.
뭐 둘 다 사기꾼이다 이 말입니다. 둘 다 사기꾼. 사장은 놀기 위해서 직원 고용했고 직원은 ‘우야면 시간 일안하고 떼울까’ 그것만 생각하는게 직원이고. 그런데 인간을 믿어요? 누굴 믿어요? 아무도 이 세상에 믿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모두 다 진리도 모르는채 그냥 무너져 가고있는거에요. 그러나 성도는 알지요. 왜 일해야되는가? 지옥 체험하라고 일하는거에요. “아, 이게 지옥이구나. 아이고 더러운 인간들 다 만나. 아아 이게 지옥 체험이구나.” 이게 지옥 체험이에요.
그런데 지금 지옥 체험을 어떻게 편하게 할까? 편하게 하는 것 없어요. 진짜 지옥체험 편하게하는 것은 이렇게 고생해봐야 이것도 잠깐 지나가는 장난이다. 소꿉놀이에 지나지 않아요. 모든 구원은 예수님의 금식,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그 열매로, 그 열매로 주어지기에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주님하신 것을 받으면서 세상에 나가서는 “그래, 내 속에 있는 애굽이나 빼자. 더러운 내 죄나 빼자.”
자기의 죄를 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속에서 금식하는 금식.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라면도 먹지마, 놀거같으면. 먹지도말라는 그 혹독한 그 금식의 체험을 주께서 하게 하시는겁니다. 금식은 오직 주님의 금식 자리, 그 앞에서 우리 어떤 세상의 일이 있더라도 주님 앞에서 주님 바라보면서 세상 장난 같은거 보지 말고 신경 쓰지말고 진리, 그 진리, 이 주님의 진리를 위해서 주께 금식에 참여한 것을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행함으로 우리의 인생이 호전되는게 아닌 것을 그것이 얼마나 교만한 짓인 것을 그게 마귀짓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주님이 어떤 생각으로 이땅에 오시는가는 관심없이 내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는가만 불평하는 그런 철없는 저희들 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