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기쁨
2023년 11월 22일 본문 말씀: 스가랴 7:8-14
(7:8)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7:9) 만군의 여호와가 이미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7:10)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남을 해하려 하여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7:11) 그들이 청종하기를 싫어하여 등으로 향하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7:12)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신으로 이전 선지자를 빙자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노가 나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나왔도다
(7:13)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었노라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은즉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고
(7:14) 회리바람으로 그들을 그 알지 못하던 모든 열국에 헤치리라 한 후로 이 땅이 황무하여 왕래하는 사람이 없었나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으로 황무하게 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전체를 다 알고 조성해 나가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의도적으로 만드신 이유는, 하나님쪽의 변화를 그 이스라엘을 통해서 전하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금식은, 갈급한 심정으로 하나님에게 살려달라고 할 때에 처음 등장합니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삼상 7:6)
이스라엘의 능력으로는 자신에게 쳐들어오는 블레셋 군대에 대해서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었던 겁니다. 따라서 이들의 금식 의식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와서 제발 이스라엘이 몰락하지 않기를 바랬던 겁니다. 곧 이스라엘만큼은 실패하지 않기를 원했던 겁니다. 하지만 이런 정신은 결국 ‘하나님을 위함’이라는 이스라엘의 본래의 취지와 맞지 않습니다.
율법이 시내산을 통해서 지상에 내려온 이유는, 이미 율법은 하늘나라에 통하는 원리가 되어 있었던 겁니다. 타락한 천사를 벌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굳건히 다지고 지키는 원리인 이 율법이 시내산 모세를 통해서 지상, 곧 이스라엘 내부에 확대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율법의 내용 중에는 그들의 본질에 관한 내용도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지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출 22:21-24)
오늘 스가랴 본문에는 제대로 된 금식의 취지를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돌보는 내용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즉 율법의 취지가 건지기 위해(구원) 금식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선지자의 지시에 대해서 인간이 따라 줄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지상에 확대되는 이유는, 하나님쪽에서 인간 세계의 사정을 진단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즉 율법을 통해서 질문을 하시므로서 인간들은 자신의 마음이 금강석처럼 요지부동 딴딴하다는 사실이 들추어지는 겁니다. 이는 평소에 인간들이 자기 마음 상태에 대해 전혀 아는 바없이 오해하며 살아오고 있다는 겁니다.
강퍅하고 교만한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 하나님의 가차없는 조치는 파괴입니다. 심판입니다. 저주입니다. 이를 본건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내부에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같은 인생을 유발하도록 하신 이유가 밝혀집니다. 즉 그들의 인생은 정지된 인생입니다. 다시 나아질 가능성은 없습니다.
불행스러운 인생으로 평생 굳어져버렸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이런 처량한 인생들을 만드시는 이유는, 이스라엘 전체가 애굽에 있을 때에, 객이요 나그네요 고아요 과부들 신세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즉 아무도 우호적으로 자신을 돌본 자가 없이 학대받는 이 일상이 된 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내에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는 하나님께서는 ‘자비의 하나님’이신 것을 유지시켜 주는 징표들입니다. 친히 하나님께서 그들과 결부해서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사랑과 긍휼을 알리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이 지사와 율법에 대해서 당연히 실패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여유가 있을 때,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 궁핍한 자들을 도우려하기 때문입니다.
즉 어느 누구도 도움받아 겨우 아슬아슬하게 사는 가난한 자되기를 소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려고는 하지만 도움을 받는 처량한 존재가 되어지는 것은 인생 실패라고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실패한 자’가 되면 안된다는 강박증세를 갖고 있습니다.
매일의 삶이 ‘내가 승리할 것을 찾고 찾지 못하거나 패배하면 좌절하는’ 일과를 보내고 있습니다. 주위에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지는 그 자체가 곧 자신이 실패자가 아님을 확인하는 행위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인간의 마음은 한결같이 완악합니다.
그 결과로 이스라엘은 망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신 취지는 이스라엘을 율법 앞으로 불러내었다가 다시 저주의 자리로 돌려보내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이라는 하늘의 원리를 전하고자 하시는 겁니다. 존재함을 통해서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고, 이미 존재하지 말아야 하는 이스라엘을 참으로 존재하는 이스라엘을 최종 등장시키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망하는 이유는, 어렵고 가난하고 무식하고 외로운 사람들이 국가 이스라엘을 굴려가게 하는 연료가 된다는 점입니다. 강하고 힘센 부류가 등장하는 이유는 상대적으로 여러 사람들이 망했기 때문입니다. 인간 사회에는 그렇게 운영되는 겁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희생물이 되고 에너지원이 되는 겁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다는 명분으로 이스라엘은 돈을 모으게 됩니다. 하지만 율법을 준수한다는 주최측에서 돈에 대해 더욱 집착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른 이스라엘 건설’이라는 명분이 그들에 의해 제시되기 때문입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눅 16:13-14)
예수님께서 율법으로 먼저 인간 세계를 넘치게 하시므로서 모든 인간들을 하나 예외없이 저주 아래 있게 하십니다. 어느 인간치고 완고한 마음이 없는 이가 하나도 없음을 분명히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율법 완성이 되어 심판하시는 그 심판이 ‘타작 마당’입니다.(마 3:12) 여기에 ‘알곡’이 나옵니다.
모든 인간들이 심판받아야 될 그 심판을 먼저 예수님은 자신에게 떠안습니다. 이렇게 되면 비로소 사랑과 긍휼이 발생됩니다. 마지막 심판은 ‘심판 속의 사랑’을 발견한 자만을 따로 골라내는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율법 앞에서 자신이 마땅히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되어야 함을 아는 그들이 바로 사랑이 주어진 진짜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변함이 우선이 아니라 심판에서 긍휼로 변하신 예수님의 변함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대상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9강-스가랴 7장 8-14절(실패의 기쁨) 231122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가랴 7장 8절에서 14절까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미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남을 해하려하여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청종하기를 싫어하여 등으로 향하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신으로 이전 선지자를 빙자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노가 나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나왔도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었노라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은즉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고, 회리바람으로 그들을 그 알지 못하던 모든 열국에 헤치리라 한 후로 이 땅이 황무하여 왕래하는 사람이 없었나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으로 황무하게 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지난 시간에 금식에 대해서 사람들이 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금식에 대한 하나님쪽의 반응을 나타냈어요. “그거 금식아니다. 금식 왜하냐? 너희 다른 마음 있었잖아.”라고 지적하면서 진정한 금식은 이사야도 나오는 말씀인데, 진정한 금식은 몇 가지 여기서 하나님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진실하고 공정된 재판을 행하고, 첫 번째. 두 번째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고 세 번째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고 네 번째 남을 해하기 위해서 계획을 심중에 도모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금식하는 자의 마음자세이어야 한다는거에요. 지금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이 말씀을 왜 하느냐 하면, 형식으로는 금식을 하는데 그 금식이 니 마음의 금식으로 이렇게 확대,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겁니다.
그렇다면 그러면 진실하고 공정된 재판을 행하고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않고 남을 해치려는 계획을 도모하지 않으면 될 것 아니냐? 그렇게 생각 하는데 그래서 이 성경이라는 것이 우리의 속마음을 꿰뚫고있는겁니다. 그렇게 안 해야되는데 12절에, 그 마음이 금강석같이, 다이아몬드 같아서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이야기한 것을 너희가 듣지 아니한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건 주님께서 무슨 취지로 지금 이말씀 하는가 하면 아무리 금식을 해도 본인의 마음이 다이아몬드라는 사실까지 인간은 스스로 캐낼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거에요. 그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섬겨도 하나님을 섬깁니다,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정작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우리가 단단한 마음으로 거부하고있다는 이 사실을 자꾸 놓치고 있는거에요. 이걸 인정하지 않고 있는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줄때는 우리보고 어떤 일을 시키기 위해서 말씀을 준다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거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모든 율법과 말씀은 니 마음이 다이아몬드처럼, 금강석처럼 단단하다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서 말씀을 주는거에요. 말씀은 일종의 질문입니다. 질문이고 거기에 대해서 인간은 백프로 엉터리 답을 내놓아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바르게 살겠습니다. 시키는대로 진실하고 공정한 재판을 하고 어떻게 어떻게 하겠습니다.” 말을 이렇게 답변을 청산유수같이 해내는데 그 답변이 어떤데 쓰여지는 답변이냐하면 자기 마음이 이미 썩었고 자기 마음이 완고하고 완악하다는 것을 감추는 용도로 그 답변이 나온다 이 말이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질문하는 것은 그 인간이 파악하지 못한 우리의 마음을 진단하는거에요. 임신테스트기. 두줄나오면 임신아닙니까. 주님께서 말씀은 질문을 한다는 것은 그 어떤 답변을 해도 주님의 질문 취지와는 벽으로 가로놓여있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내가 일방적으로 처리해줄게. 라는겁니다. 그 처리가 어디에 나오느냐하면 바로 12절 13절 14절에 나와요. 너희가 이땅에서 쫓겨나고 알지못하는 열국으로 내가 다 흩어지게 한다. 이스라엘이 사라지게 만들겠다는겁니다.
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의 첫 번째 질문을 통해서 두 번째 그들의 마음을 진단하고 세 번째 일방적인 처리를 해버립니다. 완고한 마음에 대한 일방적인 처리까지 주께서 다 사전에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시키는거에요. 그렇게 되면 이제 사람들은 궁금할거에요.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 ‘이스라엘 나라를 이렇게 흩어지게한다면 만들어서 없애버린다면 애초부터 이스라엘을 만든 그 취지가 뭐냐?’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지요.
이스라엘을 만든 것은 이렇습니다. 쉽게 말하면, “너 이리 나와.” 어떤 사람 불러내요. 학생들한테 수학시간에 학생 불러내서 칠판에다가 미분 방정식하나 쭉 쓰는거에요. 초등학교 2학년, 구구단 7단 겨우 외우는. “미분방정식 풀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들어가” 불러내고 그의 무능성을 다 까발리고, 율법 앞으로 불러내고 까발리고 그 율법의 저주의 자리로 돌려 보내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만든 겁니다. 잠시 불러냈다가 돌려 보내는거에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얻고자 하는 내용은 뭐냐? 이미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작동중이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작동중이에요. 이거는 한마디로말해서 이렇습니다. “인간아, 도망칠 수 없다.” 인간은 도망칠 수 없다. 작동 중인 그 도망칠 수 없는 인간을 심판하고 저주하고 하는 그 언약이 인간의 의견을 물어서 작동한게 아니고 인간과 이야기한적 없이 일방적으로 이걸 작용시켜버렸어요. 그리고 인간은 못 벗어나요, 벗어날 수가 없어요. 도망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거 인간이 도망칠 수 없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 승리라는 것은 애시당초 없었다’는 거에요. 인간승리. 그럼 인간은 뭐냐? 실패만 있는거에요. 인생은 실패하기 위해서 이땅에 태어난겁니다. 실패는 실패라는 것을 아는 성공을 위해서 어머니에요. 실패를 알기위해서 실패를 하니까 이 실패가 일종의 성공작이죠. 실패를 통해서 인간은 자기의 실패와 그리고 자기는 죽음을 배우게 됩니다. 죽음이 있는 이상은 어떤 인간도 성공이라는 단어를 거기다가 붙일수가 없습니다.
보통사람들은 왜 인간이 죽는지, 왜 사는게 힘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걸 특별히 알려주기위해서 시범조로 이스라엘 나라를 만들어서 율법앞에 잠시 마주했다가 “도로 돌아가. 니자리 저주의 자리로 가” 하면서 그들을 열국속에 율법없는 나라속에 다 흩어 버린거에요. 이게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자 그렇게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일을 그렇게 추진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지자를 통해서 알리고자 하는 내용은 이겁니다. 존재하는걸 통해서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방식이에요. 이스라엘이 잠시 존재했잖아요. 이스라엘이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는 존재하는 이스라엘 같은 나라가 진짜 존재가 아니고 이스라엘을 있다가 없애버린 분이 진짜 살아계시다는 것을 이스라엘 없애는 과정속에서 이 세상에 자기를 계시하는거에요.
이스라엘도 아닌 존재를 이스라엘로 만들어서 그 이스라엘 아닌 것을 이스라엘 아닌 것으로 분명히 드러나게 함으로써 진짜 이스라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일관된 뜻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요 불필요한 일이 전혀 없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이라는것과 율법을 하나님께서 만나게해줘요. 근데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될 것은 이 금식에서 알아야될 것은 금식은 원래 율법에 없습니다.
유월절날 고난의 떡을 먹는 것은 있지만 자기를 괴롭게 하는건 유월절에 들어있어요. 하지만 금식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최초에 등장하는 것이 뭐냐하면 인간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대로 안되니까 악바리 악을 쓸 때 이거는 적들이, 블레셋 적들이 포위됐는데 그게 밥맛이 나겠어요? 어쩔수없이 사무엘하고 같이 금식해서 이것은 다급한 이스라엘의 위기에 대해서 이거는 뭐 엎어지는쪽으로 밥도 굶어가면서 하나님께 매달렸죠. 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 금식한거에요.
이 금식이라는 율법은 없어요. 하나님 이스라엘좀 살려주세요 적들앞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거였습니다. 블레셋이 너의 적이냐 아니면 율법이 적이냐를 묻는거에요.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오해하고 있습니다. 저 이스라엘 포위하는 적들이 우리나라, 이스라엘 적인줄 알았어요. 참 인간의 존재성이라는 것은 이렇게 고질병같은 거에요. 고질병입니다.
어제 중국하고 한국하고 축구를 하는데 제가 중국 국가 대표한테 질문을 해본다 칩시다. “중국대표님 어제 3-0으로 졌는데 너 누구하고 붙었어?” “손흥민하고 붙었습니다.” “아니야, 너는 율법하고 붙었어.” 왜? 율법은 보이지않는거니까. 보이지않는거니까. 중국과 한국대표 축구하면서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지 싶어요. 왜? 한국 국가축구팀하고 붙은줄 알고 있어요. 인생이란게 인생의 모든 행동같은게 이런겁니다. 내가 이길 자리를 기어이 찾아서 내가 승리 할 것을 찾고 그 승리 할 걸 찾지 못했을 때 좌절하는게 우리내 인생이에요.
그 하루하루 삶이라는게 그렇게 여러분, 복잡한게 아니고 간단해요. 이기는 재미, 승리하는 재미로 산는거에요. 이말은 뭐냐? 실패하고 패배해버리면 그냥 죽고싶어요. 이건 말릴 수도 없어요. “아이고 인간아, 왜 사냐 인간아” 자기가 자기보고. “콱 죽어버려라 인간아, 왜사냐? 그놈한테 지냐” 이런거. 그러면 이것을 평소에 극복하기는 뭐냐면 밋밋한 인생은 싫어요. 뭔가 하루에 보람찬 하루가 될려면 누구 상대를 만나고 그 상대가 나한테 져야 보람찬 하루가 되는겁니다. 모든 피곤이 사라져요.
“감히 내한테 말이야.” “음메 이겼다.” 저쪽은 “음메 기죽어.” 사는 재미 그 재미 외에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금식을 했어요. 이스라엘 살려달라고.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걸 하나의 하나님으로 벌이는 게임으로 보는거에요. “니 금식해서 누구한테 이길려고? 금식해서 하나님마저 이길려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심보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니가 금식하는 것이”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여기 7장 6절에 나오지요. 이게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하는데 이게 ‘하나님 나를 위함이냐 아니면 너를 위함이냐’ 하는거에요. 여기서 하나님의 적은 ‘나’가 되는겁니다. 나는 개별적으로 나는 남한테 지기 싫어요. 근데 하나님뜻은 뭐냐? 그런 개별 인생은 하나님 허락한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인생은요. 전체가 다 보이는 인생을 원해요. 전체가 다 보이는 인생.
그러면 전체가 다 보이는 인생은 어떤 인생인가. 하나님은 인간들이 금식을 하니까 금식과 율법을 연결시킵니다. 그 연결시키는 것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오늘 본문 10절에 나옵니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압제하지 말라는 것은 이거는 바로 출애굽기 22장에 나오는거에요. 출애굽기 22장 20절부터 나오는데요. 뭐라고하느냐하면 “너는 애굽 땅에서 나그네되었고, 애굽땅에서 고아였고 애굽땅에서 과부였다”는거에요.
어떤 인간도 너를 돌봐줄, 히브리 노예를 돌봐줄, 없었고. 이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양자삼았다 하는거에요. 이걸 후견인제도라고해요. 후견인 제도. 고엘 제도. 그 히브리말로 고엘이라고하는데. 하나님께서는 홀몸된 자, 아무도 돌보지 않는 히브리인들을 주님께서 돌보지 않는 상태로 의도적으로 만들어놓고,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사람이 누굴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의 도움으로 끊어졌을 때 비로소 누가 보이느냐? 하나님이 하나님다움을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금식의 취지는 뭐냐?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도와주지 말고 니가 고아되고 니가 과부되고 나그네 되라는거에요. 니가.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는 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했어요. 금식하면서 여유있는 양식을 모아다가 하나님의 뜻대로 뭐 이사야 선지자 나오니까. 이것 모아서 어려운 사람 도와주라니까 스가랴가 나오니까 도와준 거에요. 이게 바로 신약의 바리새인들이 한거에요. 그들이 금식한 것은 금식해서 어려운 사람 고아와 구제하기위해서 돈을 모은겁니다.
그러나 그 말은 뭐냐? 내가 때려 죽어도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가 되기 싫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금식은 일종의 인간승리가 되어버려요. 거기에 반해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는 이거는 어떤 인생이냐? 정지된 인생이에요. 정지된 인생. 시간 보내봤자 낙이 없는 인생. 정지상태에 들어가요. 스톱. 스톱 모션. 지금은 상업도 하고 장사도 하지만 옛날에는요 농경시대는 땅에서만 생산하기 때문에 힘없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그 사람들은 거의 백프로 빚을 지게 되어있어요.
살길이 없으니까. 뭐 옆에서 좀 도와주면 되지 않느냐. 사람이 도와줘도 일단은 제일 0순위는 자기부터 무언가 입에 풀칠을 하는것부터 순위가 그렇게 되는거에요. 여유분이 있으면 도와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안 도와주게 되어있어요. 다시 말해서 어떤 인간도 고아와 나그네 과부 어려운 사람을 도와줄 수는 있어도 어떤 인간도 본인이 스스로 “나 고아와 과부 나그네 될래요. 나 얻어먹는사람 될래요.” 나설 사람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기 때문에 너희들의 모든 금식은 가증된 금식이다 이말입니다.
율법과 관련성이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니 마음은 다이아몬드다, 금강석이다 이말이죠. 원래 율법이란 시내산에서 내려온겁니다. 시내산 내려와서 지상까지 확대시키는 거에요. 확대시킨다면 이 고아와 과부 나그네 어려운사람을 도와주라고 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런 하나님에 대한 반발심이 생겨요.
뭐냐하면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서. 하나님 못할게 없다면서. 그러면 그 하나님이 친히 왕이 되시고 임금되시는데 자기 백성이 고아와 나그네와 과부와 궁핍한 그런 사항이 애초부터 아예 일어나지 않도록 해 주는 것이 그게 올바른 제대로된 통치가 아니냐.” 왜 의도적으로 고아와 과부는 만들어 놓고 우리보고 안도와준다고 하나님께 닦달내 버리면 우리 무슨 돈, 우선 내부터 풀칠을 해야지 남 도와주는 그것 때문에 사는건 아니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쪽에서 잘못해놓고 그 행정적 잘못을 왜 우리한테 덤탱이를 씌우냐 이런 불만이 안나오겠어요? 나오지요. 그게 바로 하나님에 의한 율법에 대한 엄청난 오해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주신 이유는 하늘에 있던 원칙이에요. 하늘의 원칙에는 선악 원칙이 작용합니다. 인간들이 선악을 아는데 우리와 함께 되었다 할 때 그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있는 모든 영적존재에요. 천사들도 선악에 대해서 알고 있어요. 특히 선악에 대해서 잘 알고있는 것은 악마입니다. 마귀가 알아요. 그래서 마귀가 인간에게 선악과 따먹으라고 부추긴거에요.
‘선악과를 따먹지 마라’하는 것은 악마를 영원히 저주하기 위해서 그렇게 법칙이 만들어졌거든요. 그러면 그 율법, 하늘나라에서 통치되는 원리가 그냥 하늘나라에 머물러 있지 시내산을 통해서 내려와요. 그러면 율법이 먼저 시내산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래 임시적 이스라엘이지만, 내려왔을 때 왜 그걸 하늘에 있는 것을 지상까지 확대시키는가? 그 확대 되는 것은 뭐냐? 선악과를 따먹은 자는 모조리 다 저주받습니다.
하늘의 준비된 저주가 지상까지 밀려 내려와서 모든 인간을 저주케 함으로써 그 뒤따라서 누가 오느냐 하면 예수님의 메시아의 긍휼이 그 노선을 따라 딱 따라오게 되어있어요. 모든 인간을 율법으로 저주케하는거에요. 로마서 3장에나오는 말씀처럼. “율법을 준 것은 너로 인하여 하나님의 저주아래 있게 하심이라.” 그 말씀은 하나님의 율법의 저주 아래있지 아니하면 예수님이 주시는 사랑과 긍휼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뜻이에요.
로마서 3장 19절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심판에서 도망칠 사람이 단 한명도 남기지 않겠다는 취지가 율법을 주신 취지에요. 구원 없다는 뜻이에요. 무슨 구원이. 저주받을 인간밖에 없지 구원받을 인간은 없어요. 이세상에 구원받을 인간 없습니다. 저주 받는걸 인정해 줘야돼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율법안에 사랑이 따라온다면 사랑의 증거라는게 율법안에 이스라엘 속에 있어야 되지 않느냐? 그 사랑의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서 고아와 과부 나그네라는 그런 형편이 그런 처지가 발생된 거에요. 그게 하나님의 전능하심입니다. 어제 그 뉴스에보니까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하나의 예가 나오는데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차를 몰고가는데 차를 운전해요. 운전하는데, 서류가 이렇게 차에 얹어놨어요. 서류가 흔들려서 차에 떨어졌어요. 떨어져가지고 “오, 서류 있네”하면서 서류줍고 차가 움직이면서 서류 주으면서 횡단보도기 때문에 브레이크를 밟아야 되는데 엑셀을 밟아버렸어요. 4명이 다쳤는데 그중에 24살 아가씨가 죽었어요. 전능하심. 하나님의 전능하심이에요. 이게 전능하심이에요.
만약에 24살 아가씨가 죽은게 아니고 한 40넘은 어떤 남자가 죽었다면 그 아내는 졸지에 과부가 되는거에요. 뭐 부부가 다 죽었다면 애들은 고아가 되는거에요. 주께서 이 전능하심을 계속 가동시킨겁니다. 이스라엘 안에. 모든 인간이 승리에 미쳐있는거에요. 승리에 미쳐있으니까 율법을 주신 취지를 전혀 모르고 있는거에요. 그 시범조로 이스라엘을 뽑아 세운거에요 시범조로. 그래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율법으로 이 세상을 심판을 합니다.
심판을 하는데 아주 적절하게 심판받을 대상자로 이스라엘 나라를 만들어서 그들 속에서 그들이 어떤 식으로 율법에 대해서 곡해하고 오해하고 있는지, 달리 말해서 인간 내부에 있는, 율법이 저주를 한다는 말은 저주받을 거리가 인간 내부에 들어 있다는 말이거든요. 그래서 그 율법과 스스로 인간이 끄집어 낼 수 없는 것, 아까 금강석, 다이아몬드라 했어요. 다이아몬드 심보를 같이 만나게 해주는 거에요. 율법을 통해서 죄를 무르익게하는겁니다.
그 무르익는 그 방법중의 하나가 고아와 과부 나그네 될 자를 전능하심으로 그인간 신세를 그렇게 만들어버려요. 만들어놓고 출애굽기 22장의 말씀처럼, 너희들이 처음에 애굽 나올 때 전부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였어. 그런데 너희들은 그 고아와 나그네보고 동정이나 하고 도와줄 생각은 하지 본인의 신세가 고아와 나그네하고 일치된다는 생각을 안 하고 있는 거에요. 벌써 이것은 안 하고 있다는 것은 출애굽의 정신에서 벌써 이탈한거에요. 그러면 그렇게 해서 인간들이 이스라엘이 뭐를 시도했습니까? 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일치된 마음을 갖지 않고 또 그들을 무시하고 무시하면서 결국 그들이 추구하는게 뭐냐는거에요. 추구하는게.
그게 바로 국가 이스라엘이였습니다. 하나의 국가가 된다는 것은 희생물이 없으면 국가가 동력을 얻을수가 없어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는 하나의 국가가 굴러가는 연료, 땔감, 에너지원입니다. 대기업은, 잘 들으세요. 대기업은 중소기업이 작살나야 대기업이 잘돼요. 중소기업이 연구한 것 대기업이 협박해서 기술을 빼내어야 대기업은 다른 은행에서 중소기업보다 1순위로 대출을 받을 수 있고 그게 광고비로, 홍보비로 나가면 소비자는 대기업에 대해서 신뢰를 하고 신뢰를 하게되면 단가가 헐어지고 그러면 대기업의 메이커를 보고 사람들은 구매를 하고 대기업은 점점 더 하마처럼 커지게되는거에요. 중소기업을 희생타로 삼아서.
이거는 기업뿐만아니고 국가도 마찬가지에요. 소위 공부를 잘하는사람, 공부를 잘했다는 말은 언어가 법에 대해서 잘아는 쪽이 법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을 등쳐먹어야 그들이 노동 적게하고 밥을 먹을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왜 어려운 사람들은 그렇게 자꾸 속임수를 당하고 사기를 당하느냐? 공부할 기회가 없어요. 공부할 기회가. 돈이 있어야 공부하지. 강남의 대치동 학원에 돈이있어야 다닐 것 아닙니까. 가난한 사람이 없으면 이 세상에 부한사람이 생기지 않아요.
반드시 가난한 사람이 있어줘야 부한 사람이 생겨나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의도한 바에요. “이스라엘 너도 똑같애. 율법있어도 소용없어. 니 속에 있는 저주 받을 그 심보는 율법이 아니라 뭐가와도 그거는 니가 다른 인간이 절대로 될수 없다는 것을 도리어 증명할거야.” 증명을 해주는거에요. 인간은 말씀 지켜서 인간 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은 누가 가느냐? 천국은 뭐냐하면 그 하나님의 율법. 율법에 의해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 대한 긍휼이 있잖아요. 그 긍휼을 받을 자들이 이 땅에서 받아야될 긍휼을 받지 못합니다. 이게 이 땅의 운명이에요. 이 땅의 운명이거든요. 그 땅의 운명이 율법이 하늘에 있는 율법이 내려오면서 하늘에 있는 그 분위기가 그대로 땅까지 이어지는거에요.
하늘에 있는 분위기가 뭐냐하면 하늘엔 천사들이 거기에 보좌해 있거든요. 그러면 이 지상에내려온 하나님의 보좌는 누가 하냐?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이 천사 기능으로 보좌하고 있는겁니다. 쉽게 말해서 성도는 이 땅에서 주님세계의 공기질이에요. 주님세계의 기후입니다. 환경요소에요. 주님이 그들 안에 계십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안에. 주님의 전능하심으로서 신세 조져놓은사람. 그리고 그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는요, 그 당시에는 한번 그렇게 되면 신세가 호전되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율법이라는거에요.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을 해야되는데 그 사랑의 대상은 이미 주께서는 지정해놨어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사랑하라 이 말이죠. 일치시키라는 거에요. 일치. 도와주는게 아니고 “내가 바로 너다” 라고 일치시키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이 율법은 지킬 수가 없습니다. 율법을 못 지키게되면 어떤 경우냐? 그쪽을 이용하는거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그들이 돈을 약간 도와주고 나머지 수수료를 챙겨주는 겁니다. 그걸 누가했는가? 바리새인들이 한거에요. 그 바리새인들이 했다는게 어디나오냐면 누가복음 16장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과 돈을 연결시켰어요.
율법과 돈을 연결 시켰다는 말이, 예수님이 연결시켰어요. 예수님이. 13절에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하니깐 “바리새인들이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비웃거늘이라고 되어있어요. 이게 지금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이야기이거든요. 바리새인의 이중성을 이야기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뭐냐하면 돈을 좋아하면 안되고 하나님을 돈처럼 좋아해야 구원받는다고 우기는 자들이 바리새인들이에요. 그렇게 가르치는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의 금강석 같은 이중 위선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16장 1절에 불의한 청지기. 돈 때문에 사기치고있는 불의한 청지기를 돈과 관련한 인물을 등장시켜요. 그래놓고 이야기합니다. “돈 밝히려면 제대로 돈을 밝혀야지. 그래야 니가 죄인되지.” 이거에요. 돈은 돈대로 밝히면서 돈에서 초월하라? 이게 어디 사기를 치냐 이 말이죠. 어딜. 그러고 난 뒤에 바리새인 돈 좋아한다고 지적하고 난 뒤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예를 들은 것은 어떤 인간 치고 아무리 거지가 아브라함 품에 낙원에 간다 하더라도 어떤 인간치고 거지되고자 하는 자는 이 세상에 단 한명도 존재하지 않아요. 그걸 증명하는 것이 타작마당입니다. 마태복음 3장 12절. 주님께서 이 땅에 심판주로 오셨거든요. 율법의 노선이기 때문에 심판 주에요. 이 땅에 인간을 구원하는 구원주는 없습니다. 이땅에 오신분은 심판주에요. 구원주아니고 심판을 할 자를 제대로 심판하러 오신 분이에요. 그래서 준비된 것이 타작마당이에요.
내가 타작마당했는데 거기에 뭘 하느냐하면 타작을 합니다. 알곡과 가라지로 타작을 해요. 구분을 합니다. 자, 여기서 알곡과 구분을 할 때 그 구분 짓는 기준이 뭐냐? 그 기준은 여러분 다 아시다시피 그 기준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고 있느냐는 겁니다. 그 기준이. 율법대로 하면 알곡이 생길 수 없어요. 근데 주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면서 그 심판을 먼저 누구한테 적용 시키느냐 하면 본인에게 적용 시켜요.
뭐라고 적용 시키느냐 하면 “너희들은 당연히 지옥가야되고 당연히 저주 받아야돼. 당연히 저주받아야 돼”라는 사실을 예수님이 자기 몸에다가 품고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나 저주받아야 돼. 너 죄 때문에 저주받아야돼.” 이것을 가지고 베드로전서에서는 이걸 뭐라고하느냐하면 이것을 건축가의 버린 돌이라 하는거에요. 버린 돌. 주께서 자진해서 자기가 사람들에게 버리움 받는 돌. 마치 스스로 고아와 과부 나그네가 되는거에요. 이 땅에서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되는거에요. 이거는 아버지로부터 저주받았기 때문에 예수님께 발생되는거에요. 그러니까 율법에 의해서 저주를 받는 그것이 구약이라면 신약에 와서 십자가에 대해서 아는바가 없는게 지옥가는 이유가 되는겁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결국 같은 저주거든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받을지어다. 또는 율법 지키지 않는 자, 율법을 다 지켜야 돼요. 다 지키지 않는자는 저주받을지어다. 같은 저주에요. 똑같은 저주를 받는다고요.
어쨌든 인간은 그 저주에서 도망칠 순 없습니다. 그러면 알곡은요? 알곡은 주님께서 심판하시면서 그 심판을 예수님이 먼저 자기에게 율법의 저주를 먼저 받았거든요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율법의 나무에 달려 죽으사. 율법의 저주받은 것으로 주님께서는 무엇을 유포하느냐 하면 주의 말씀을, 예수님의 말씀을 완성된 율법 차원에서 말씀을 외쳐버려요. 그러면 그 예수님의, 그 말씀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쭉 들으면서 그 말씀이 어떻게 들려야 하느냐면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그 자체가 우리가 내가 실패를 실패답게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이걸 알아 먹는거에요. 성령에 의해서.
왜냐하면 예수님마저 실패자이기 때문에. 고아 실패했죠. 나그네 실패자죠. 그다음에 과부 실패지요. 어느 누구도 자기를 돌보지 않는거에요. 이건 뭐 살아도 죽은 자와 진배없어요. 똑같아요. 주님의 복음을 통해서 내가 죽은 자라는 사실을 발견하는거에요. 내가 죽은 자. 죽은 자로 발견하면 좋은 점이 뭐냐? 더는 내가 죽는 것 이상으로 실패담이 없다는 것. 더 이상 남겨진 실패는 더는 없는거에요. 오히려 살아있는 것이 기이한 현상이다는거죠.
“내가 왜살아있지?” 우리는 이렇게 육신의 고집이 있기 때문에 남한테 안 질려고해요. 그런데 주님의 주특기가 뭐냐? 아무것도 아닌 것을 매일같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돌려 주는 것이 주님의 주특기에요. 아무것도 아닌걸로.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날마다 실력을 키우고 힘을 키우려고 합니다. 그럴려면 바로 자기보다 무식하고 못난 것들을 이용해야 되고 사기를 쳐야돼요. 왜 그런 짓을 하느냐 하면 내가 살기 위해서 에너지를 필요하고 에너지는 저쪽에것을 내가 가져와야 내가살아요.
저기는 죽든, 살든 말든 난 모르겠고 내가 살아야 그다음에 어려운 사람있으면 내가 도와주게되면 이게 내가 나에게 “이렇게 착합니다”라는 것이 또 그것 자체가 내가 이렇게 의롭게 주의 말씀대로 산다는 그 자체가 또 내가 나를 살리는 하나의 에너지가 되니까요. 못 되먹었죠. 근데 성경 전체를 아시는 분이 예수님이에요. 그 전체를 아는게 우리가 그 성령을 받아서 전체를 아는데 전체를 안다는 말이 뭐냐?
이래요. 내가 달라지는게 아니고 주님 쪽에서 달라져서 구원 받는겁니다. 우리는 아직도 그렇게 못되먹었어요. 심지어 말씀 가지고 이용해서 지 잘난체하는데 중요한 것은 이렇게 못된 나는 주님이 심판의 주님이 사랑의 주님으로서 심판을 먼저 줬다는 주님의 자체적인 달라짐이 나의 모든 것을 달라지게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주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죠. “나는 오늘도 뭔가 많이 착했다.” 자기 자신을 달라지는것에 대해서는 그거는 이거는 큰일날 인생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뭐냐? 니 금식. 다시말해서 금식이라는 말은 니 자신이 이땅에서 하나님 너를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 만들어주는데 돈이 없어 고아와 과부 나그네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나는 이미 주님의 사랑 아니면 가망없는 고아고 나그네고 그리고 과부라는 사실을 받아드린 사람. 이게 바로 숨어있었던 진짜 이스라엘입니다. 이게 이스라엘입니다.
‘사랑없이 난 못살아’라는 노래가 있지요. 주님의 사랑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한시도 쉬지 않고 우리로 계속 오늘도 실패 내일도 실패 항상 끝내 실패하리라. 끝내. 상록수 노래에 나오죠. 끝내 실패하리라. 끝까지 실패자로 만들어주시는 이 고마움. 내가 바로 남에게 동정할 권한도 없고 자격도 없는 천하의 저주받을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아는 것.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저 창기와 저 세리가 너희들보다 먼저 천국에 가리라. 예수님의 그 말씀 안에는 심판과 구원이 겸하여있기 때문에 그 겸하여 있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운명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께서 다 작정하시고 전체를 다 알고 계시는분이 저희들에게 이 말씀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전체는 모르겠고 자기 살 궁리만 찾고 체면 치레만 하는 우리. 철딱서니없는 우리. 다시한번 말씀을 통해서 이제는 십자가 앞에서 내가 뭘 할것인가가 아니라 주께서 뭘 해주셨는가에 고마워하고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