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류관
2023년 11월 8일 본문 말씀: 스가랴 6:9-15
(6:9)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6:10) 사로잡힌 자 중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온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가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들었나니 너는 이 날에 그 집에 들어가서 그들에게서 취하되
(6:11) 은과 금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
(6:12) 고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6:13)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6:14) 그 면류관은 헬렘과 도비야와 여다야와 스바냐의 아들 헨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전안에 주라 하시니라
(6:15) 먼데 사람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 만국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너희가 알리라 너희가 만일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할진대 이같이 되리라
하늘의 천사를 통해서 전 세계는 심판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이는 유일한 택한 민족 이스라엘마저 하나님의 언약을 버린 결과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포함해서 전 세상은 저주의 상태로 돌입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 있습니다.
인간들은 비록 그 언약을 이루지는 못해도 언약을 주신 하나님에 의해서 언약은 기어이 그 성취를 이루게 됩니다. 심판은 언약대로 확실하게 전면으로 실시하되 그 심판이 실시되는 그 세상 한 가운데서 ‘언약에 의한 구원’은 차질없이 구현됩니다. 전면적인 심판 속에서 부분적인 구원 현상이 일어납니다.
어떻게요? 천사에 의해서 감행된 전면적인 심판의 현장에서 이번에는 인간들에 의해서 구원은 멈추지 않고 그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작업에 동원된 자들이 바로 ‘바벨론에 포로잡혀 있던 자’입니다. 포로잡혀 있는 처지에 있지만 하나님의 구원작업은 방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4명의 인물에게 어떤 움직임을 지시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은과 금으로 면류관을 만들어서는 특정 인물인 대제사장 여호수아 머리에 씌어주어라는 겁니다. 이는 ‘면류관’과 ‘특정 인물’과의 만남입니다. 여호수아가 면류관 쓰겠다고 먼저 나선 것이 아닙니다. 사물이고 물체인 면류관이 먼저 인물을 찾아갑니다.
사물과 인물의 만남은 구약의 역사 내에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민수기 17:8-10에 나옵니다. “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 안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모세가 그 지팡이 전부를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취하여 내매 그들이 보고 각각 자기 지팡이를 취하였더라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패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
이스라엘의 언약궤 안에는 세 가지의 물건(사물)이 들어갑니다. 하나는 율법 돌판이요 하나는 만나요 또 하나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입니다. 지팡이라면 인간쪽에서 물체인 지팡이를 마음껏 다룰 수 있다고 여깁니다. 지팡이에게 어떤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은 사람이 지팡을 디루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당연한 상식이지요.
그런데 그 지팡이에서 싹, 곧 ‘순’이 나왔습니다. 이것은 여타의 인간과 차별화되는 특별한 인물됨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즉 사물쪽에서 인간의 본질을 말해주는 겁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한계, 혹은 처음 자리는 자신의 생존의 자리입니다. 흔히 세상살이 힘들면 다음과 같이 탄식입니다.
“내가 먹을 밥은 또 어디서 구하지? 내일 생활할 돈은 어디서 구하지?” 이것이 인간의 처음자리입니다. 무서워하는 죽음을 가장 가까이 느끼는 자리를 사람은 근원된 자리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처음의 자리보다 훨씬 먼저 있는 자리를 아십니다. 그 자리는 ‘진리’의 자리입니다.
즉 인간들은 자신의 생존까지만 멈추고 더 뒤로 나아가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생존보다 먼저 있는 자리, 죽음보다 더 있는 자리, 그 자리는 심판과 구원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성령받지 못한 자들은 도저히 알아듣지 못한 말씀입니다.
자기 생존을 근원의 자리라고 여기는 자들은 하나님을 이해못하기에 당연히 저주과 심판의 대상입니다.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나(예수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6) 그런데 이 말은 들은 인간들은 이런 태도로 받아들입니다. “혹시나 예수님이 길이 아니고 진리가 아니고 생명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나만 바보되는 것 아니야?”라고 말입니다.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서 과연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지를 점검해 보겠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 태도가 죽음과 저주와 율법과 악마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입니다. 당연히 심판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듯 악마에게 철저하게 매여사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 머리에 금면류관을 씌어주게 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시느냐 하면, 인간이 생각한 원천보다 더 원천적인 것이 바로 하늘에 의해서 일어나는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면류관을 통해서 ‘사로잡혀 있는 인간’과 하나님의 구원이 이어나는 인물 사이를 사물인 ‘면류관’을 가지고 연결시키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연결을 위해 싹(순)이 돋습니다.
마치 죽은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나는 것과 같은 신기한 일입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 제사장의 노력이 아니라 제사장은 언약궤와 함께 하면 참으로 위험한 장소에 강 한복판에서 서 있기에 강물은 그 흐름을 잠시 멈추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요단강을 건너가는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곧 여호수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면류관의 취지를 살려서 자신과 같은 동질의 구원을 받을 자들은 새로운 순(싹)이 됩니다. 잠언 17:6에 보면,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잠언 12:4에 보면,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라는 예수님의 본질적 기능은 본인과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을 함께 하는 원천의 자리의 기능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이로서 예수님의 구원과 동일한 구원으로 인해 금면류관을 쓸 자들이 생산되게 됩니다.(계 4:4, 10) 이들 24장로들은 자신의 구원이 예수님에게 있음을 표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썼던 면류관을 주님 보좌 앞에 던갑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양자가 입양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아버지는 이제 성도들도 아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성도들은 하나님과 한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마 12:48)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도는 세상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태어났기에 더는 슬픈 죽음이 없음을 알게 하옵소서. 에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7강-스가랴 6장 9-15절(면류관) 231108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보겠습니다. 스가랴 6장 9절에서 15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사로잡힌 자 중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온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가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들었나니 너는 이 날에 그 집에 들어가서 그들에게서 취하되, 은과 금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 고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그 면류관은 헬렘과 도비야와 여다야와 스바냐의 아들 헨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전 안에 두라 하시니라, 먼데 사람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줄을 너희가 알리라 너희가 만일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할진대 이같이 되리라”
상당히 복잡한데요. 복잡하지만 이 복잡한 것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지금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하셨다 이 말이죠. 여호와께서. 근데 그 여호와께서 6장 9절 하기 전에 천사들의 활동을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말씀을 쉽게 정리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여기 있다. 여기 있다, 존재한다는 뜻이죠, ‘여기 있다’가, ‘누가 있다’가 먼저 생각하면 안 되고 그들이 어떤 활동을 하느냐가 우선되면 정리하기가 쉬워요.
저 사람은 누굽니까 이 사람은 누굽니까 자꾸 묻지 말고 저 사람은 무슨 움직임을 보이고 이 사람은 무슨 움직임을 보이느냐? 왜 이렇게 움직임 중심으로 해야 되느냐 하면 여기 나오는 모든 계시가 하늘에서 와서 이 땅에 활동하는 천사들의 활동성과 관련되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천사보고 “당신 이름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이런 것 천사한테 묻는 게 아닙니다. 천사는 그 움직임으로 자기 자신의 본질을 보여주거든요.
그러면 시작을 천사 쪽에서 시작했다는 말은 여기에 등장하는 이 사람들은 앞으로 천사와 같은 레벨에서 하나님께서 천사에게 준 움직임을 지상에 있는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주셨다고 보시면 돼요. 천사의 기능은 6장에 보면 우리가 봤듯이 천사의 기능은 모든 것을 다 심판해 버리는겁니다. 모든 걸 심판한다는 것은 일체 존재에 대해서 의미를 두는 것을 허락지 않는거에요. “니가 여기 존재한다. 있다. 앞으로 그런소리 하지말라. 내가 여기 있는데 나는 뭘 합니까 라는 이야기를 하지말라.”
어떤 움직임이 너가 여기 있다라고 하는 그 존재성을 삭제시킬겁니다. 그게 심판이거든요. 심판은 죽인다는 뜻인데 죽인다는 말은 있었는데 없애버린다는거죠. 있었는데 없애요.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천사에게 활동성을 보여주듯이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에 대해서 “너는 이것이니 이걸 하라”가 아니라 그냥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움직이는 그 지시하는대로 활동해라. 니 존재를 따지지 말고, “나 몇 살까지 살겁니까? 내가 어디가서 삽니까? 어느 동네 이민갈까요?” 그런 생각하지 말고 천사가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활동하듯이 그냥 지시대로 움직이듯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도 앞으로 그렇게 되어야 된다는거에요.
천사와 같이 그렇게 움직여야 되는거에요. 자기 존재에 구애받으면 안되죠.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인간이 어떤 자기가 자꾸 있다고 생각하니까 인간은 자꾸 특징이 뭐냐 하면 내가 처음에 내가 있는 그 자리를 자꾸 돌아가고 싶어요. 특히 날씨 추울 때. 날씨 추울 때는 밖에 나갔다가 후딱 집에 가고싶지요. 따뜻한 집에. 그 자리에 가고싶은 거에요. 왜? 내 처음자리 내가있던 따뜻한 그 자리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줄 그게 처음 자리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처음 자리를 심판해서 없애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니가 생각하는 처음 자리보다 더 먼저 된 자리를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준비해두었습니다. 니가 알고 있는 ‘나 시작을 여기서부터 시작했어. 출발을 여기서부터 시작했어.’ 라는 그 처음의 자리를 주께서는 심판으로 없애버렸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만약에 처음 자리를 자꾸 우리가 생각하면 그건 뭐냐하면 그 처음 자리가 나의 생존을 걱정하는 자리에요. ‘나는 뭐 먹고 살지?’ 열심히 돈 좀 있을때는 활동하다가 나중에 어려워지면 다시 처음자리로 돌아가요.
‘하, 처음자리가 뭐냐? 나앞으로 어떻게 살지? 뭐해서 돈벌어가 살지?’ 그게 인간이 생각하는 처음자리의 한계에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가 앞으로 뭐 먹고 살지 어떻게 새로 시작해야되는가. 이 자리가 인간은 아직도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 못하고 자기의 존재를 건사하는데, 자기 존재 챙기는데 급급한거에요. 내 처음에 내가 알던 내가 여기있다고 알던 그 자리를 자기는 인간들은 처음 자리로 자꾸 간주를하는거에요. 그 전으로 못 돌아가요. 내가 처음 있던 내가 나라고 느꼈던 그 자리부터 새로 스타트, 새로 시작하자고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러나 주님은 존재도 아니고 생존도 아니고 주님은 진리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진리를 가리고 있는거에요. 그런 생존 문제, 내가 어떻게 살지 그런 문제는요, 천사한테는 해당 되지 않아요. 천사들한테는. 천사는 시키는대로만 움직이기 때문에 천사들은 알아요. 자기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은 인간도 영원히 죽지않아요. 나중에 무덤에서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올겁니다. 악한자는 지옥에 영원히 살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천국에서 영원히 삽니다. 어쨌든간에 인간은 죽는다는게 없어요. 그 질이 문제지요. 저주로 영원히 사느냐, 복된 상태로 영원히 사느냐 이 문제지 인간에게는 죽음이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심과 부활로 통해서 이 세상을 예수님중심으로 통합시키면서 악마가 협박했던 그 죽음이라는 요소를 하나님 쪽에서 처리해버린거에요. 그러니까 악마는 알아요. 인간에게 죽음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이 이야기하는 “정녕죽으리라”하는 그 죽음은 사실은 인간들이 아는 처음 자리 생존의 자리가 아니라 그보다 더 근원적인 자리, 저주의 자리였던겁니다. “선악과 따먹는 니가 저주받으리라” 하는 처음에 구약 때는 죽으리라 했는데 그 뒤에 신약에 오게 되면 영원히 심판을 받으리라.
그것을 둘째 두 번째 죽음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첫 번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두 번째 죽음이 이게 문젯거리에요. 두 번째 죽음을 주께서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써 우리가 생각하는 좀 이렇게 여유 있을때는 까불 까불거리다가 어려우면 또 고민되는거에요. “어이구 이거 돈 없는데 앞으로 뭐 살지.” 자꾸 되돌아오는 자리가 생존의 자리. “어떻게 살지? 죽으면 안돼. 절대로 내가 죽으면 안돼.” 그 자리까지만 인간들이 생각하는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계시를 천사 차원부터 스타트를, 출발을 천사 차원부터 스타트하는겁니다.
천사가 하는 것은 뭐냐? 이게 6장 1절에서 지난번에 8절도 그랬지만 사실은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스가랴 5장에 5장 8절에서 11절은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거기에 에바 안에 두여인이 거기에 한 음녀를 거기에 집어 넣어가지고 됫말 안에 넣어서, 영원히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에다가 옮겨서 처벌받는. 그러니까 이 천사의 역할은 철저하게 이 세상을 심판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6장에 오게되면 말 4마리가 나오는데 네 말은 뭐냐 하면 세상을 사각형으로 보는거에요.
동서남북으로 봐가지고 동서남북 어디 구석에도 하나님이 폭격하는 하나님이 저주하는 그 저주를 피할 공간이라든지 숨을 공간이 일체 없도록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그 일을 하게하신거에요. 지금 5장 6장 1절에서 8절 이 이야기는 전부다 천사 레벨에 천사 수준에서 하나님이 천사 수준에서 이야기한거에요. 천사 수준에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지금 설교하는 그대로 이야기하면 인간이 알지 못하던 그 전에 그전의 상황을 인간은 몰라요. 인간은 처음자리가 뭐먹고살지? 이게 처음이고 그 전에는 천사들을 하나님이나 천사가 알고 있는 그대목입니다.
“인간은 모두다 죽었다.” 이것을 천사들이 이 세상에다가 전부 다 알리는 작업을 하는겁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아. 어떻게 살지가 니가 고민할 문젯거리도 안된다는거에요. 내가 하는게 진리냐? 아니면 내가 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냐? 이문제가 더 우선되는 자리고 우선되는 문제라는겁니다. 그걸 다른말로하면 내가 주님의 지시를 천사처럼 주님의 지시를 따르고있느냐? 아니면 내 단독적으로 내가 내인생을 내가 꾸려나가는가? 이 문제를 봐야된다는거에요.
그만큼 성경의 내용은 눈에 보이는 것 뿐 만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전부 다 포괄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 주님께서 예수님을 소개할 때 그는 보이는것과 보이지않는 것들이 모두 다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겁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에베소서 1장 10절에, 통일되는거죠. 이미 통합이 되어있어요. 통합체제. 왜? 그분은 왕이시니까. 모든 것의 왕이되기 때문에 그 왕의권세에서 빠져나간다는 것은 이거는 있을수가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모든 것이 심판했으면 깔끔하게 끝났는데 그러면 여기 9절에 계시는 9절의 이 말씀은 또 무슨말씀이냐?
전체적으로는 심판이에요. 그런데 전체적으로는 심판인데 그중에 일부의 장소에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움직임을 보여주기 시작하는겁니다. 그러면 구원의 움직임이 계시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은 심판주지요. 그런데 여기에 9절부터는 여기에 심판이 일괄적으로 다 심판이 딱 깔려 있는 그런상태입니다. 어떤 인간도 자기의 존재너머까지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은 없기에 인간들은 마땅히 심판받는거에요. 그러면 그 존재 너머 갈 수 없는 인간들을 두고서 존재 너머로부터 뭐가 주어지느냐? 구원자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 구원자에 대해서 오늘 읽었던 본문에 보게되면 아주 복잡해요. 복잡한데, 몇 가지 단어들을 연결시켜보겠습니다. 이게 뭐냐하면 여호수아 여기 11절에보면, “은과 금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 씌우고 되어있어요. 여호수아라 하는 것은 우리말로 네자잖아요. 여호수아. 이걸 세자로 줄이면 예수아가 돼요. 이걸 두자로 줄이면 예수가 되는겁니다. 그러니까 그 말은 뭐냐? 두자 되는 예수를 세자로 늘이면 예수아가 되고요. 현재 유대인들은 예수를 예수아라고 해요. 예수아를 한자 더 늘여서 네자로 만들면 여호수아가 되는겁니다.
뜻은 동일해요.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다. 예수님의 그 풀이에 대해서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마태복음 1장에 나옵니다. 1장 21절에 보면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해놓고 그 예수 말 자체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그렇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이 구원하는 예수는 어디서 태어났냐하면 분명히 이 지상에서 한 아기로 태어났는데 그 출처가 뭐냐? 성령으로 된 것이에요. 성령으로 되었어요.
하, 참. 이것 예수님이 성령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교회 다니는 사람중에 모르는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인간은 평생 가면서 이 성령으로 태어났다는 그것이 성령으로 태어난 분 예수님. 이것이 인간에게는 목에 계륵같은 존재, 목에 걸린거에요. 목에 걸려있어요. 인간들에게. 이게 넘어가면 속까지 들어가면 진짜 그 사람은 성도죠. 근데 일반 사람들은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목에 걸려있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은 예수님 자신을 뭐라고하느냐하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했거든요.
그러면 인간들의 특징은 뭐냐? 예수님이 본인이 이야기하기를 자기가 자기 이야기하기를 나는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라고 했다. 근데 그게 구라라면, 거짓이라면, 그게 거짓말이라면, 예수님이 길이 아니라면 예수님이 생명이 아니라면, 예수님이 진리가 아니라면 아닐 수 있잖아. 라는 생각이 인간은 평생 가져갑니다. 교회뭐 직분이 중요한게 아니에요. 교회 몇 년 나온게 중요한게 아니에요. 이게 속까지 내려가지를 않는거에요. 물건을 고르듯이 “살꺼요 말꺼요?” “한번 보고요.” “얼마나 볼껀데요.” “죽을때까지 볼꺼에요.” 근데 그냥 보기만 해요. 만약에 거짓말이라면, 심지어 꿈속에서 나타나도 신학 박사 돼도 이게 사라지지 않고요, 목사되어도 사라지지 않고 일반 교인들도 마찬가지고요.
“내가 진리라니깐?” “아니라면요?” “내가 생명이라니깐?” “아닐 수 있잖아요.” “내가 길이라니깐?” “다른 길이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부처라든지 소크라테스라든지, 다른 길이 있을 수 있잖아요.” 이러한 우리 내부에서 올라오는 그 반발, 의심. 이거 무슨 수로 우리가 처리할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한테는 안 들키죠. 본인만 알고 있는 본인의 비밀이 된 겁니다. 예수를 믿고자 하지만 결탄코 못 믿을 대상이 되어요. 믿고자 하는데 못 믿겠어요. 아닌경우를 감안해야되니까.
만약 아니라면 나만 교회 괜히 다닌거에요. 안 다녀도 되는데. 하나님 안 믿었고 예수 안 믿어도 되는데 괜히 호들갑떨면서 믿어왔고 헌금했고 봉사해온거에요. 막 선교한다고 돌아다니고. 그러니까 자칫하면 자기가 평생 쪼다 돼요. 안 믿어도 되는데 괜히 성경의 한마디 나왔다고 그걸 검토해보고 믿어야되는데 그냥 덜썩 믿었다가 나는 천한의 이런 바보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내가 평생, 평생 그 예수라는 허구적 개념에 사기당하면 여러분 그 우사스러움을 누가책임질건데요?
내가 왜 이렇게 갑자기 흥분했는지. 정말 이 재미나는 현상이에요. 그럼 만약에요. 만약에 그런사람 있으면 정말 감사한데 만약에 진짜 예수님이 진리고 진짜 예수님이 길이고 진짜 예수님이 생명이라는 것을 목에 걸린게 아니고 속까지 쑥 내려가는사람이라면 특징이 있어요. 어떤 특징이 있느냐? 주님, 나 그만살래요. 나 내일 안살아도 돼요. 집에 먹을 것 없어도 괜찮아요. 돈한푼 없어도 괜찮아요. 왜? 나는 이 말을, 나는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라 이말을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진짜 성도냐 하면 나는 진리가 아니고 나는 길이 아니고 나는 생명이 아닌거에요.
그러니까 진리도 아닌 나, 길도 아닌 나, 생명도 아닌 나에게 내가 왜 나의 인생에 신경을 씁니까? 그게 말이안되거든요. 아무것도 아닌걸 왜 신경써요? 자식? 자식 진리아닌데. 자식 진리아니에요. 자식 진리아니에요. 자식은 생명 아니에요. 자식의 후반부 인생을 내가 왜 신경씁니까? 사람들은 나는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 아니라면 나는, 나만 바보등신된다는 생각에 어떻게 이것을 확답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하면 믿음 좋다는사람을 자꾸 탐색을 해요.
무슨 교회 목사님 어떻게 사는가? 같은 집사님, 오래 다닌 장로님 어떻게 사는가? 자꾸 탐색을 해보게 되면 그 사람들도, 그 사람들도 양다리 걸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목에걸렸어요. 그렇다고 또 버리는것도 아니에요. 혹시 진리일 수도 있잖아? 혹시 길일 수도 있는데 전적으로 내가 믿지는 않지만 자칫하면 진짜 쪼다 바보 되니까. 광신도까지는 나 안갈란다. 점잖은, 아주 착하고 점잖은 인격적인 교인 될란다.
이선에서 타협을 하고 협상하고있는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예수님을 구원자를 줬다는 말은 인간들은 이것을 인간의 지식과 이성으로 믿고자 한다면 이것은 실패로 끝납니다. 성령. 원천이 육이 아니고 인간이 육으로 발견할 수 있고 육으로 탐색할 수 있는 그 선을 넘어선 쪽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넘어선 쪽에서. 뭐 사람으로 보이니까 뭐 같이 뭐 이바구하고 말하면 다 통할줄 알았죠? 그게 아니었어요. 그래서 그 넘어서 오셔서 우리에게 하는 모든 말씀은 뭐냐하면 “니 존재보다 니 존재를 잊게한 그전에 원천으로 원천의 세계에 대해서 내가 왔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내가 알려 줄게”라고 하는겁니다. 니가 알고 있는 존재 세계, 눈에 보이는 세계 그것밖에 니가 모른다면 니는 눈떠도 니는 소경이다고 주님은 이야기 하는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물을 수 있죠.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어요. “주님 이 세상이 뭐가 문제인데요? 뭐가 문젠데 뭐 우리보고 소경이라 합니까?”라고 하면 주님은 이 세상은 뭐냐 하면 선과 악으로 공존하는 세계에요. 선악과를 따먹은 세계에요. 선악과는 선악과를 왜 알아선 안되냐 하면은 선악과를 아는 자체가 그게 이미 저주의 대상으로 확정나는 지식이기 때문에 뭐 잘하면 되지 않습니까? 바르게 살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 소리가 나온다는 그것이 지옥가는 사람이 지옥간다는걸 표내는거에요.
“예수믿고 바르게 살면 안됩니까?” 그게 지옥가는거에요. 이미 인간이 알고 있는 선악 지식에서 툭튀어나온겁니다. 그 선악지식은 사실 핑계에요. 자기 존재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되기 때문에 선악도 핑계에 불과합니다. 진짜 꿍꿍이는 뭐냐? 나 잘먹고 잘 살고 싶다. 나 죽기 싫다 그거거든요. 제가 아까 처음에 설교할 때 인간은 죽음이 없다 했죠. 그러나 악마가 인간의 차고 벽을 만들어와가지고 니 죽으면 안돼 벌써 악마로부터 농락 당하고있는 처지에서, 그래 죽으면 안되지, 이미 동조가 되어있어요. 악마하고 생각이 지금 공유하고있는겁니다. 그래서 무심코 툭툭 튀어나오는 이야기들이 죽으면 안돼라는 그 본심을 발현 하는거에요. “우리 아가 이번에 캐나다 가는데 장학금 삼천 나와가 갔다.” 그 무심코 나온 말이거든요. 그 캐나다에 삼천만원받고 대학들어갔다 라고 하는 그것은 뭐냐하면 덜 굶어죽을 거야. 굶어죽는것과는 이제 약간 거리가 더 멀어졌어. 이런 뜻이라는거죠.
전부 다 어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서려있는 상태로 발언이나 태도가 나오는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는거에요. 그렇다면 이것은 이 현상은 곧 천사에 의하면 이미 이 세상 전체가 저주로 완전히 확정됐기 때문에 나오는 현상입니다. 그러면 그다음 문제, 구원은? 그러면 구원은요? 누가 구원받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구원받는 하나님만의 방식에서 도입되는 단어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여기에 11절에 은과 금을 취하여 면류관, 면류관. 예, 면류관. 이 단어들을 우리가 연결시켜봅시다. 면류관. 그다음에 9절에 보면, 사로잡힌 자 중 바벨론, 그다음에 면류관, 그다음에 단어, 단어가 지금 두 개나왔죠. 세 번째, 여호수아의 머리. 세 개입니다. 또 하나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해봅시다.
12절에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다시 정리하면, 사로잡힌 것, 바벨론에 사로잡힌 것. 그다음에 면류관. 은, 금이니까 그냥 금 면류관합시다. 바벨론 사로잡힌 자, 면류관, 그다음에 여호수아, 그다음에 순. 이 단어 네 개 나왔습니다. 그 네 개가 어떻게 정리돼있느냐 하면 여호수아는 사람이에요. 순은 역시 움직이는 생물체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이게 면류관은 생물체가 아니고 무생물체, 하나의 물건이고 사물이에요. 지금 정신바짝차려야돼요. 이제부터 복잡해요 이게.
지금 제가 무엇과 무엇을 구분했느냐 하면, 생명이 없는 물체와 그 다음에. 생명 있는 것. 여호수아, 사람이잖아요. 그다음에 순, 이분도 메시아 사람이잖아요. 사람. 이렇게 구분했습니다. 자 이렇게 구분하는 이유는 구약이 율법에서 하나님께서 택한 이스라엘 가지고 다른나라와의 전쟁에서 심판을 행하게 하면서 반복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알려주는게 있습니다. 너희들은 구원받았으니, 너희들은 택한백성이니 라고 반복했다고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뭘 느꼈느냐 하면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무슨 뜻이냐하면 저쪽은 심판, 구원받지못한 심판대상이라는 뜻이에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 세상 어느누구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알죠. 성령으로 잉태해서 이 땅에 태어났고. 이 땅에서 성령으로 나신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성령으로 나신 분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니까 이 땅에 성령으로 나지 않은 모든 이들은 무슨 말인지를 못알아듣는거에요. 나름 그걸 받아들였지만 속까지 내려가지못하고 “글쎄 한번 두고는 봅시다. 혹시나 길이 될지 아나?” 뭐 이런식이에요. 그게 바로 뭐냐하면 그게 불신자거든요.
이 세상은 신자는 없어요. 전부 불신자들 뿐이에요. 신자가 있다면 예수님만 신자이지요, 성령으로 태어났으니까. 따라서 이 심판 세계 가운데서 그러면 어떻게 구원을 줄 수 있는가? 이 문제를 달리 이야기하면 예수님이 구원받으시는데 어떻게 예수님만 구원받겠느냐? 예수님의 구원이 어떻게 그 예수님의 구원과 동일하게 구원받을 사람을 어떻게 양산 시키느냐? 만들어내느냐? 그 문제와 관련되어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과 구원받은 사람이 동질성을 갖추면 됩니다. 그 동질성이 뭐냐? 면류관이에요. 면류관. 동질성이 면류관입니다.
어떤 물체가요 움직이고 있는 인간들을 동질하게 묶어주는거에요. 구약의 율법에서 예가 들면 그런 예를 드는겁니다. 언약 궤같은 경우에. 언약궤는 물체에요. 언약궤는 물체인데 요단강 갈때에 언약 그 살아있는 사람들이, 대전강의해서 했는가, 살아있는 제사장들이 물 막 내려오니까 “땅, 제사장이야, 거룩한 제사장이라. 물 저리가, 저리가. 우리 백성 지나가야돼.” 이렇게 물을 막 밀어 내었습니까? 진짜 그건 미친짓이지요.
제사장이 한 것은 인간들이 움직임은 그 언약궤의 움직임과 같이 하면 돼요. 언약궤가 요단강 한가운데서 스톱했거든요. 스톱. 멈췄어요. 그럼 제사장도 언약궤 따라서 멈추면 되는거에요. 언약궤란 물체가 멈췄으니까 본인도 멈추면 된다고요. 그런데 인위적으로서는 굉장히 난처하죠. 왜? 물은 흐르기 마련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긴데 지금은 이제 물이 좀 말라서 안보이지만 언제 또 물이 쏟아질지 계속 오는게 분명하니까. 벌벌 떨 수가 있어요. 벌벌. 언약궤라는 물체가 그 같이 있는 인간들에게 언약궤가 갖고있던 본질과 동일한 본질의 움직임으로 하나님께서 한데 묶어버리는 기능을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서 지시를 한거에요.
물체라하는 것은 스스로 못 움직입니다. 누가 이동을 시켜줘야되거든요. 그러면 이동을 시키게 되게되면 언약궤가 있다합시다. 그럼 인간들은 “저 언약궤 여기있지말고 저기로 옮겨야되겠다”라고 옮기는 순간 그 인간 죽어요. 분명히 옮겨야 되는데 옮기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 그인간은 죽는거에요. 그래서 아무도 언약궤에서 근처에 안 가려고해요. 너무 무서우니까. 근데 그 물체가 뭐가 무서워요? 그냥 물체인데. 지금 오늘 본문에서 여러분이 유념해야될 것은 여호수아가 그 금면류관을 “아, 도,도,도 내가쓸게.” 여호수아가 금면류관 요구해서 본인이 그걸 요구해서 쓰질않는다는거에요.
이건 마치 뭐냐? 그 면류관 만들어라는 그 지시는 위에서 하늘에서 내려온거에요. 시작이, 지시의 시작은 하늘에서 주어졌습니다. 하늘에서 면류관 만들어라해서 면류관이 찾아가는 식으로 특정인물의 머리에 씌우는거에요. 여호수아에게 씌워주는겁니다. 그러면 이 면류관과 여호수아의 만남이죠. 면류관과 여호수아의 만남의 이 관계. 이 관계에 대해서 어떤 취지로 여호수아가 면류관을 쓰느냐? 그 취지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 12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이렇게 돼있어요.
이게 민수기 17장 5절에 보면, 아론의 싹난 지팡이, 순이라는 것은 싹이 난다는거에요. 지팡이에 여기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지팡이는 죽은 물체에요. 그냥 물체에요. 물체는 그냥 사람이 이동해 줄때만 옮기는게 물체에요. 그런데, 인간이 알지 못하는 더 원천적인 하나님의 진리가 찾아오게되면 인간이 물체를 만드는게 아니고, 물체가 인간을 가르치고 인간을 움직임을 주고 인간을 변화시키는 그 징후가 그 특징이 물체에 의해서 신기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바로 아론의 싹난 지팡이의 아론의 지팡이에서만 싹이 나는거에요. 참, 아주 진짜 이거는 정말 무서운 이야기이지요. 정말 무서운 이야기에요. 시시한 물체로 봤는데 인간의 그냥 들고 있는 스틱으로 봤는데 스틱에서 그게, “살았어? 살은거야 그 스틱이?” 전부터 산건 아니죠. 스틱이 살았다는 말은 인간은 죽었다는 뜻이에요.
언약궤가 움직인다는 말은 인간은 언약 앞에서 죽은 존재라는겁니다. 이것 죽었다 존재라 하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10절에 보면, “사로잡힌 자”이렇게 나오거든요. 사로잡힌 자. 이게이제 핵심이에요. 자, 사로잡혔다는 것은 이미 이 세상 전체가 저주고 심판으로 가득 찼다는거에요. 저주와 심판가운데서 어떻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할 것인가? 그것은 바로 사로잡힘과 동일하게 동일하게 사로잡힌 경험을 가진 사람을 일단의 사람으로 하여금 그중에서 네 명이 와요, 네 명. 대표자로. 네 명이 뽑히는데 네 명 이름이 나와요.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가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 헬대는 건강하다는 뜻이고, 도비야는 하나님이 아신다는 뜻이고 여다야는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뜻이고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 요시아의 뜻은 하나님께서 응원하신다, 지지하신다, 지켜주신다 그런 뜻이에요. 이 네 명의 사람이 4인이 한 조가 돼요. 그래서 세 명이 한 집에가는데 어느 집에 가는가?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들어갈 때 할 일이, 어떤 움직임이 있어요. 천사처럼 어떤 움직임이 있다고요. 그 움직임이 뭐냐? 면류관과 여호수아의 만남을 해야돼요. 머리에 씌워져야 된다고요.
물체가 인간에게 찾아오는 이야기를 해요. 물체가 인간에게. 근데 이들은 누구냐 하면 사로잡힌 자에요. 사로잡혔다는 것은 이 세상의 노예, 그리고 벌 받고있는중이었어요. 포로잡힌 자에요, 포로잡힌 자. 주님께서는 뭐냐하면 이제는 새로운 시대의 출애굽을 시작하려고합니다. 전에는 인간이 애굽 나라에서 이스라엘을 뽑아내었다면 지금은 뭐냐 하면 저주로부터 뽑아내는 일단의 사람을 건져서 그들로 하여금 니가 이 죽음과 저주에서 끄집어낼 때 그의 본질은 어디서 나왔느냐? 니가 금면류관을 그 본질을, 동일성이니까, 동일성을 지니고 있는 그 면류관을 그걸 가지고 찾아가는 바로 그 사람 그 사람의 본질과 니가 구원받은 니 본질과 일치될 때 너는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예수아, 예수. 그 지팡이에서 새로운 순이 나오듯이, 여기 순이라는 이름을, 12절에, 새싹이 등장해요. 새싹. ‘새싹’이라 하는 것은 기존에 나타난 다 성장한 식물이 아니에요. 없던거에요. 없던 겁니다. 여호수아가 새싹이 나오는 하나의 바탕이 되는거에요. 그러니 이 말은 뭐냐하면 순이라는 사람부터 그분부터 먼저 저주와 죽음으로부터 출애굽되는 그런 경우를 하나님의 이 죄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구원 작업으로 실시를 하겠다는 계시 내용입니다, 이게.
근데 이 사실도 중요하지만 더 우리가 아울러 알아야될 것은 거기에 일단의 4인조, 밴드. 이 4인조라는 그냥 포로잡힌 바벨론의 포로잡힌 대표자들이 자기 자신의 본질을 포기하고 주께서 시키는 대로 움직였더니만 자기가 구원자가 아니라 구원자를 따로 마련하고 그분과 자기 사이에 면류관으로 하나의 엮여졌다는 사실을 증거해야될 자들이 바로 이 4인조, 새로운 포로잡힌 자 중에 나왔던 4인조에요. 자기들은 알아요. 내가 저주와 죽음과 심판에서 나는 벗어날 수 없다는걸. 주님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라 했지만 그 구라, 거짓말이면 나 어떡해. 내가 기껏 아는 내가 판단하고 내가 예수님을 측정하고 평가하는 아직도 자기가 마귀로부터 포로잡혔다는 인식이 없어서 그런거에요.
내 생각은 모조리 다 포로, 마귀가 마귀의 생각이고 포로잡혀있는 상태라는 것은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주님의 면류관과 연결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에요. “나 아니야,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어. 이제는 나 신경안써,” 예수님께 일어난 일과 나와 동질, 같은 동질인거에요. 그래서 뭐냐? 면류관은 예수님만 썼던 면류관이 이제는 성도도 면류관을 쓰게 되어있어요. 요한계시록 4장 10절에 보면, 거기에 면류관 쓴 사람이 24장로들이 나옵니다. 4장 10절,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내게 주어진 이 동질적인 이 본질은 원래 출처가 제가 아니고 출처는 바로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의 보좌, 우리 주님이십니다라고 반납하는 그 상황이 천국의 상황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심판의 시작도 주님이시지만, 구원의 시작도 오직 주님에 의해서 다 이루어졌습니다. 면류관이 동질성을 보장한다는 것이 바로 잠언서에 보면 나와요. 잠언서 17장 6절에보면,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 손자하고 할아버지가 동질성으로 연결되어있지요. 잠언서 12장 4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다” 같은 동질, 한 가족이다 이말이죠. 쉽게 말해서 가족이에요, 가족. 마태복음 12장에 이말씀이 나옵니다.
12장 끝에 보면, 예수님께서 설교하니까 그 제자들이, 예수님, 바깥에 예수님 가족들 있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예수님 하신 말씀이, 12장 48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다시 말해서 성도들아, 너희는 아버지한테 입양되었다, 입양. 양자라는거에요. 양자된거에요. 양자이기 때문에 전에는 아버지가 아니었는데 이제는 아버지가 되어서 예수님과 한 가족이 한 패밀리가 되는거에요.
그래서 마태복음 1장에서 예수님 구원자라 해놓고 그걸 풀이한게 22절, 마태복음 1장 23절에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뭐라 하느냐하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이 함께, 예수님이 아버지와 함께 있어서 아들 관계 형성된 그 본질이 이제는 여호수아라는 제사장, 제사장 그 위치, 오늘 본문에 자리 나와요, 그 위치에서 왕으로 오신 분이 그 제사장과 왕이 같이 평화의 의논을 한다했거든요. 아까 읽은 본문에. 그 자리를 공유하는거에요.
예수님이 왕이고 예수님이 제사장으로서 주께서는 임마누엘 하는 자리를 확보한거에요. 이 저주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하늘의 구원의 본질을 본질로서 자기 가족들을, 패밀리, 양자 될 사람들을 집어줄 그런 본질이 나올 수 있는 자리를 하나님께서 먼저 확보를 하시고 그다음에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거듭나 잉태될 사람들을 성령을 보내셔서 그들로 하여금 내가 한게 아니고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작업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 예언이에요.
그러니까 다시 설교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나는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다.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성도의 답변은 뭡니까? “아, 나는 진리가 아니고 나는 길도 아니고 나는 생명도 아니다.” 그러면 되잖아요. 참 이게 내가 내 한테 신경쓸 것을 주께서는 다 삭제시켰다. 이제는 성령받은, 주님과 가족이니까, 양자이니까, 입양되었으니까. 아버지라 부르면서 우리가 이 땅에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고 사시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판정하고 우리가 평가할 문제가 아닌 것을 새삼 우리가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마땅히 악마한테 사로잡히고 마귀의 노예였다는 사실이 도리어 구원의 고백으로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