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레위기[종말의 종말] 1강
(강의 : 이근호 목사)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모이게 하시고 듣게 하시고 구원하시고자 하는 그 모든 것이 이 말씀 속에 있사오니 이 말씀 속에 들어가서 헤엄칠 수 있고 그것이 우리를 살려냈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잊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번에 우리가 수련회에서 할 것이 레위기인데 창세기, 출애굽기 그 다음에 레위기 나오죠. 레위기 처음부터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생중계됩니까? 레위기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전에 뭐가 있었다는 겁니다. 창세기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출애굽기 있고 그 다음에 레위기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불쑥 레위기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레위기에 들어갈 때 그전에 뭐가 있었느냐? 멀리까지 갈 건 없고 아브라함 언약이라는 게 있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이 레위기보다 먼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여기서 뭐가 툭 튀어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의가 나온 거예요. 그것도 먼저 아브라함이 믿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고, 불러내셨고 거기다 약속 주니까 아브라함이 믿게 되어서 믿은 결과로 의가 나온다는 거예요.
여기는 뭐가 없느냐 하면, 행함이 없는 거예요. 어떻게 인간이 행했다는 게 없다 이 말이죠. 제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로마서 4장이나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행함으로 의롭지 않았다. 행함이 없다는 거예요. 행함이 없다는 말은, 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오는데 법이라는 걸 거치지 않고 의가 나와 버린 거예요. 뭘 지킨다는 말입니까? 법이 없는데. 하늘나라 가는데 그냥 하늘나라 갈 수 있는 의가 나왔단 말이죠. 여기에 우리가 어떤 걸 지키면 의가 생겨서 구원받습니까? 하는 우리 쪽에서 뭔가 시도하려고 하니까 우리 쪽에 시도할 게 없어요.
없다는 말은 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법이 없이 아브라함은 구원을 받은 거예요. 하라, 하지 마라 없이 구원받은 겁니다. 그것이 우리가 공부하려고 하는 레위기에 앞서서 먼저 하나님이 주셨던 아브라함의 언약의 특징입니다. 뭘 지킵니까? 지킬 게 있어야 지키죠. 법이 있어야 지키지, 줘야 지키지. 없는데. 그 뒤에 레위기 나온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레위기가 그전에 있었던 아브라함 언약의 구조를 이걸 망칠 것인가? 이걸 취소시킬 것인가? 이걸 부셔버릴 것인가? 이제 궁금하단 말이죠. 레위기는 법이 주어져 있고, 그 앞서 있는 언약에는 지킬 법이 아예 없고. 우리 보고 어떡하란 말이에요. 지키란 말이지, 법이 없다는 말이지. 어느 쪽이 우선인지 도대체 정리가 안 되는 거예요.
‘그냥 믿음으로 갑시다.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그냥 갈게요.’ ‘그래?’ ‘그러니까 레위기 법 준 것 취소하세요. 괜히 있어봐야 신경 써지니까 법 없이 합시다.’ 이래 나올 수도 있고. 아브라함 믿음 줘 놓고 뒤에 법이 주어지니까, ‘그렇다면 이 법을 다 지켜서 구원받는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앞에 있는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인되었다는 그 약 올리는 이야기는 없었던 걸로 치시던지. 괜히 남 약 올려놓고 뒤에 법주고 헷갈리게 만들고. 그럴 필요 뭐가 있느냐?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 언약과 430년 뒤에 주어진 법이라는 것이 아브라함 언약을 취소시키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 언약을 분명하게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대전강의에서 제 나름대로 쉽게 표현했다는 자신감이 있어서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이게 리모컨이라면 티비가 있단 말이죠. 리모컨을 누르니 티비가 나왔잖아요. 그럴 때 우리는 뭘 생각하느냐 하면 내가 누른 건 행함으로 말미암아 티비가 나왔다고 오해를 하기 마련인데 사실은 그게 아니고 이것과 상관없이 티비가 나오는 거예요. 행함 관계없이 이것 눌러야 나온다는 그런 법적인 요청 없이 그냥 티비가 불쑥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리모컨 뭐가 필요합니까? 하나님 아쉬울 때 마음대로 티비가 열리든지 하세요. 영상이 나오고 안 나오고를 하나님 마음대로 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리모컨을 누르게 하는 거예요. ‘그것 봐. 화면 나오는 건 네가 누르는 것과 상관없지.’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대충 이제 감이 오십니까?
아브라함 언약을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아브라함 언약을 살리고, 살려주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 하느냐? 법 지키는 것 상관없어, 상관없어. 이게 저쪽을 살리는 거예요. 거짓말 같이 안 느껴집니까, 이 말이?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천당이야? 아무개 명단해서 천국 보내면 될 텐데 왜 법이란 것을 지킴과 무관하면서 이걸 지키라고 하시는가? 그것은 우리 내부에 이미 법적인 요소가 있기 그래요. 우리 내부가 텅텅 비어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법적인 요소가 있어서 우리는 내부를 까바리고 그걸 토해내면서 천국에 몰입하도록, 거기에 빠져 들어가도록, 거기에 반해버리도록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내부에 뭐가 있느냐 하는 것은 꼬챙이로 우리 배를 쑤시면 돼요. 쑤시면 우리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행함으로 구원받겠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행했으니까 나는 의로운 사람 맞아.’ 그런 선악적인 요소가 똥처럼 가득 차있는 거예요. 그러면 팍 쑤시는 거예요. ‘이런 게 들어 있잖아. 그러니까 천국 가는 것이 내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그러한 말도 안 되는 오류가 자꾸 나오잖아.’라는 것은 폭로시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천국은 너의 행함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주께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야.’라고 대조하면서 대비하면서 가는 겁니다.
이 대비를 어렵게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우리 몸의 대비가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이 레위기를 ‘너’라는 몸으로 봤을 때 그때 인상과 느낌과 우리 말고 예수님께서 레위기를 보면서 웃으면서 ‘이 이야기네.’ 하고 예수님께서 레위기를 살피면서 보는 그런 인상과 같을 수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레위기를 보면서 ‘인간들 레위기 보고 오해 많이 하겠네. 이 레위기 나보고 이야기하는 걸 인간들은 자기 딴에 선악과 따먹어서 전부다 자기가 지키는 용도로 가져갈 것 아니야. 수고해. 해서 어떻게 그게 멸망되고 어떻게 그게 저주가 되는데 나중에 혹독하게 느낄 거야.’ 이렇게 한다 말이에요.
그 일을 단군의 자손에게 시킨 게 아니고 그 일을 이스라엘에게 시켰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상당히 특이한 민족이에요. 굉장히 특이한 민족입니다. 어떤 점에서 특이하냐 하면, 인간이 이 정도로 죄의 굴레에 빠져있음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민족이에요. ‘인간이 하나님의 하신 모든 것을 이 정도로 곡해하고 오해할 지경이다.’라는 것을 전 인류를 대표해서 보여주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유대나라 민족이 뭘 지키느냐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첨병으로 거기에 쓰여지죠. 고린도전서 2장에서 십자가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은밀한’, 다른 말로 내밀한. 더 쉬운 말로 감추어진 것.
은밀하게 감추어져서 아무리 인간들이 온 인류가 달려들어도 꼭꼭 숨겨놓고 들키지 않는 은밀함.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그것, 그걸 십자가라 합니다. 이 은밀한 것을 잠시 맛 보여주면, 그때야 ‘야 이게 십자가구나.’ 알게 되고, 맛 보여주지도 않는데 저희끼리 십자가라고 돌아다니는 가짜가 되는 거예요.
뭐 고난 받는 것이 십자가다, 어떻다 하는데 그것은 불교의 도 닦는 사람도 할 수 있는 소리고, 십자가라 하는 것은 고난 받고 이것과 상관없이 그냥 내밀한, 은밀한 것을 이렇게 살짝 알려주면 비로소 아는 거예요. 하나님 쪽에서 먼저 알려주는 사람에게만 맛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십자가라고 고린도전서에 그렇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이야기를 하면 우리 수련회 교재제목을 [종말의 종말]이라 했죠. 김재성 집사님 오셨습니까? 왜 묻는가 하면, 이렇게 예쁘게 작품으로 따로 만들어놨어요. 강사용으로. 이거 했다고 구원받는 건 아닙니다.
이 제목을 단 이유가 인간들이 종말은 자기의 죽음이라는 여기까지가 한계에요. 내가 죽는 것이 종말의 끝입니다. 사람이 자기가 죽게 되면 그동안 의미 있던 것도 다 사라지죠. 내가 믿는 하나님도 내가 사라짐으로서 하나님도 같이 사라지고. 내가 좋아하는 부동산, 동산, 사랑하는 가족들 내가 죽으면 다 의미 없어요.
그래서 인간이 꺼져버리면 동시에 세상도 꺼져버리는 거예요. 다 없어지는 거예요. 있더라도 나하고 상관없습니다. 주인장이 죽으니까 보고 있는 내가 죽으니까 있으나마나 나하고 상관없지요.
그래서 종말이라는 것은 사람의 종말을 말합니다. 그러나 진짜 은밀한 종말이 아니에요. 진짜 종말은 여기에다 뭘 플러스해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종말이란 거예요. 하나님의 종말이라면 하나님의 죽으심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죽으심을 가지고 세상에 대해서 새삼 해석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에서 경험한 종말을 여기다 첨부시켜놔야 된다 말이죠. 이것은 우리 사적인 죽음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것은 옳은 해석이 아니라는 말과 같습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자기가 살아있을 동안에 입을 나불나불 거리면서 느끼면서 단 것, 아픈 것, 짜릿한 것 온갖 것 보다가 자기가 죽어버리면 모든 것이 끊어질 때 이것으로 자기 종말의 맛은 봤는데 여기에 뭐가 기다리고 있느냐 하면, 아직 은밀한 것 근처도 안 갔어요. 이건 자기 발작하다 나자빠진 거고.
진짜 세계는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죽으면 세상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렇게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깔아놓는 판이고 무대라 이 말이죠. 놀이마당이에요. 이걸 사람들은 그동안 ‘사람이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죽는구나. 살다 죽으면 어떻게 되겠지.’ 모든 해석을 자기 죽음과 관련해서 나 죽으면 끝난다는 그 지점에서 의미가 종결돼요. ‘누가 뭐 아나. 죽어보면 알겠나.’
이 안에서 종말은 뭐냐 하면, 모든 성경해석은 ‘목사님, 내가 뭘 해야 구원받습니까? 어떻게 하면 지옥에 안 갈 수 있습니까?’ 모든 문제와 누구와 결부시키느냐 하면, ‘내가 종말을 맞이하는데 미치겠습니다. 내 종말을 맞이할 그 순간에 9회말 2아웃에 2스트라이크 3볼에 정말 극적으로 역전되어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어떤 묘책이 없느냐?’라고 묻는 거예요. 이건 내가 나에 대해서 자문을 구하는 식의 질문밖에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 같은 경우에 다메섹 내려가다가 갑자기 우리는 우리끼리 세상, 우리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이 세상에 다른 노선으로, 다른 생각으로 이 땅을 거쳐 왔던, 종말을 맞이했던 어떤 노선이 있어요? 그분이 누구겠습니까? 이 땅에 오셔서 육신을 입으신 바로 여러분이 아시는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맞이했던 종말을 사울이 종말을 맞이했을 때에 사울은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이야기합니다.
‘나 말고 따로 이 세상에 의미를 갖고 계신 분이 과연 있었더란 말입니까? 나는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모든 의미를 내가 행했다는 것을 기준 삼아서 모든 것을 나한테 초점 맞춰서 했는데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럴 때 예수님은, ‘네가 거쳐 간 세상은 너를 위한 세상이 아니고 사실은 주인공이 나고, 하나님이 갖고 있던 은밀한 십자가의 내막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미 내 위주로 꼬여져 있는 세상이 바로 이거다.’ 이 말이죠.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하죠. 나는 메시아다, 구세주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우리와 결부시켜요. 이것 때문에 레위기가 중요한 겁니다. 중요한 대목에 왔어요.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나는 예수다, 그리스도다가 아니라 반드시 예수님께서는 피조물의 존재이유가 뭐냐 하면, 핍박 기능을 해줘야 돼요. 우리가 구원받으려면 핍박을 해줘야 돼요. 주저하지 말고.
핍박을 해주셔야 사도 바울이 갔던 그 노선에 같이 일치점을 가지고 동일한 경험으로 합류될 수 있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인간들을 깔아놓은 이유는 그들의 핍박을 받음으로써 주가 제대로 종말의 값을 하는, 하나님이 자기 종말에 제대로 역할을 다할 수 있는 보조요원들이 바로 인간들이에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종말을 유발하는 피조물들이 인간입니다.
그것을 바로 창세전에 하나님이 자기 피로, 은밀한 것, 인간은 아무도 모르는 자기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거룩한 나라를 만들었다는 진짜 하나님의 은밀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만남에서 그게 발현되는 겁니다.
그걸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인간이 여기 있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계시다면, 사울이 자기 나름대로 신을 믿고 메시아를 기다렸는데 이것이 쪼그라지면서 여기 잠재돼있던 숨어있는 것을 깨면서 등장하면서 ‘나는 여호와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는데 당신은 누굽니까?’ 할 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해서 결국 인간이 상상한 모두가 하나님의 종말의 기능을 협조했던 매개체가 되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선교단체에서 많이 하고 있는 인간과 신 사이에 매개체는 십자가라는 게 걸쳐서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 이런 식이 되지만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매개체는 핍박하는 인간들이 하나의 매개가 되어서 그리스도는 주로서 은밀한 감추어진 모든 것을 비로소 공개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성경 처음부터 그런 이야기가 있는가? 약간 길었으니까 정리해봅시다. 제가 무슨 이야기냐 하면, 레위기가 처음이 아니고 그전에 창세기가 있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뭐냐 하면, 그냥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와서 법이 없이, ‘너 믿나?’ 요새말로 ‘됐나?’ ‘됐습니다.’ ‘내가 너 다룬다.’ ‘네. 다루세요.’ 찾아왔으니까 다루겠죠. ‘덮친다?’ ‘덮치세요.’ 이거란 말이죠.
거기서 의가 나온 거예요. 하나님의 의가 툭 튀어나온 거예요. 그 의의 솜씨는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의 매개체고 통로에요. 의는 하나님의 의란 말이에요. 하나님의 의가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냥 바깥으로 튀어나온 거예요.
그러면 끝난 이야기인데 왜 430년 후에 레위기의 법이란 것. 혹시 오지랖 넓은 사람들은 레위기한다고 레위기 다 읽어 오신 분들 계십니까? 이제는 우리 십자가마을은 훈련이 너무 되어서(?) 레위기 해도 레위기 안 읽어오고, 역대기 해도 역대기 안 읽어오고, 다니엘 해도 안 읽어오고. 이 교재 줘도 교재도 안 읽어오고. 보니 무슨 말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레위기를 보면 법은 왜 줬느냐? 법을 지키는 것 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매개로 삼아서 일하는 것과 아무 상관없다는 걸 고백하라고. 고백하는데 그럼 안 주고 안 받고 그냥 고백하면 되지 않느냐? 이걸 누르는 가운데서 비로소 우리는 내가 이렇게 법을 지킬 수 있고 내가 왜 쓸데없이 아브라함 같은 그런 언약을 주느냐고 하나님 하는 일에 핍박하는 기능의 주체자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법을 안다는 것 때문에, 성경 알고, 십자가 안다는 것이 예수님이 하는 일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는 일에 훼방꾼이 되는 그러한 동기유발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등장한 겁니다. 안 믿지 싶더라~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지킬 법이 없었다니까요. 아브라함은 밤새며 숙제하고 이런 것 없었어요. 그냥 아들 낳고 싶다고 종하고 관계해서 아들 낳고. 그것뿐이에요. 지는 자기 마음대로 살았어요. 아브라함이 무슨 법을 지켰습니까? 아브라함 법 지켰다는 말 처음 봐. 아브라함은 법이 없어요. 아브라함이 법 안 지켜서 죄인 되었습니까? 법을 안 지켜도 구원받는다는 그것이 나에게 들이닥친 그게 은밀한 약속의 본질이라는 것을 수용했기 때문에 의인이 된 겁니다.
내가 아무 행함이 없더라도 이미 덮쳐버린 주님께서 알아서 의를 나를 통해서 생산하다는 것을 날이 가면 갈수록 그걸 느꼈어요. ‘내가 행한 것과 주님이 날 구원하는 것과 전혀 상관없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 자체가 이미 주님에 의해서 붙잡힌바 됐기 때문에 나오는 현상인 거예요. 주님한테 안 붙잡히면 그런 현상이 안 나오게 돼있어요. 자꾸 꼼지락꼼지락 뭘 하려고 해요. 숙제하려고. 그게 아브라함 언약은 법이 없단 말이죠. 오늘 첫째 시간 이것 하나 압시다. 아브라함 언약은 일체 법이 없어요.
그렇다면 이 아브라함에 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법을 준 것은 피조물을 통해서, 빌립보서 2장에 나옵니다.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가 주가 되게 하심이라고 돼있어요. 이걸 교회 이천년 역사 동안에 눈치 챈 사람이 별로 없어요. 이천년 역사 동안에 그들이 만든 것은 삼위일체를 만들었는데 삼위일체는 성부중심입니다. 성부중심이라 하는 것은 서열을 세워요. 성부 아버지가 1등, 그 다음에 아들이 2등, 3등은 성령. 서열을 매겼어요. 서열을 매김으로써 내가 믿는 식으로 참된 신의 인식을 내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인간들이 자기가 하나님에 속아 넘어간 거예요. 왜냐하면 서열은 하나님께 있는 게 아니고 인간 내부에 있었어요. 인간내부가 하나님의 말씀, 법이죠. 인간이 아무리 믿음해도 그걸 법으로 해석해요.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인간내부가 망가진 상태에서 여기서 신을 생각할 때 신을 서열화 시키는 그런 경향을 보입니다.
여기서 간단한 수학 들어갑니다. 수학에서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기수가 있고 서수가 있어요. 서수는 순서가 들어갑니다. 1 그 다음에 2, 그 다음에 3. 기수는 1개, 2개, 3개, 4개에요. 순서가 아니에요. 서수같은 경우에는 1이 없으면 2가 없고, 3은 1, 2가 없으면 3이 없어요. 순서를 정했단 이 말이죠.
인간은 항상 순서를 정해서 그 우두머리 되는 신중의 신을, 제일 마지막 신을 잡음으로써 나머지 신은 옵션으로. 이것 하나 믿음으로서 이걸 종속시키는 그런 인식만이 인간이 갖고 있어요. 즉 순서상 최종의 것(무한대)을 잡게 되면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해결이 된다고 여기면서 수를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기수적으로 봐서 1, 2, 3할 때 2는 뭐냐 하면, 하나 더하기 하나에요. 3은 하나, 더하기, 하나 더하기 하나가 됩니다. 이런 식으로 따지면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나누어보면 그저 하나, 하나의 조각들 뿐입니다. 하나(1)의 의미에서 조금도 떠나지를 못한 겁니다. 그래서 기수는 무의미한 겁니다. 하지만 서수식으로 수를 다루면 마치 신과 접선이 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최종의 무한대 속성이 신의 무한한 속성을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전지하시고 전능하시고 최고의 최고, 제일 선한 것, 제일 아름다운 것, 제일 큰 것, 제일 무한한 것, 제일 능력 있는 것에다 신의 영역에 다 집어넣은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해서 신을 유사하게 인식했다고 처달라는 겁니다. ‘숨어있는 하나님이여, 내가 신을 이렇게 표현하니까 들리십니까? 대견하다고요? 고맙습니다.’ 그 무한과 진짜 신과 접촉을 시도하는데 이런 인간의 시도를 하나님께서 모를 리가 있습니까?
삼위일체라 하는 것은 성령, 성자는 성부에 종속되는 거예요. 세상에 재벌 아버지가 최고지 아들이 뭐가 중요합니까? 우리는 세 사람이 있으면 그중에 오야봉을 찾아요. 세 사람 동등이라는 게 우리 인생에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최고가 되고 싶기 때문에 ‘그중에 최고 나와. 나하고 붙자.’ 이런 다툼의 의식이기 때문에 어떤 대상을 봐도 최고 오야봉 하나만 나와. 최종적인 것만 나와. 그 최종적인 것을 신이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이 그렇다는 걸 어떻게 멋지게 이용하시는지 바로 그 최종적인 것을 추구하는 여호와한테 밀쳐 당하고 죽임 당하는 진짜 하나님을 보내버린 겁니다.
그래서 서열이 아니라 하나님은 불쑥 돌발적으로 나타나요. 인간의 모든 것과 상관없이 내가 나타나고 싶을 때 불쑥 나타납니다. 그걸 바람이라 하죠. 바람은 어떻게 붑니까? 바람은 교통순경의 수신호를 따른다, 안 따른다? 이건 임의로 불지요.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가 타박을 많이 받아요. 어떻게 너는 땅의 일도 모르고 하늘의 일을 논하느냐? 땅에 나타난 하늘의 일을 파악 못하면 진짜 하늘의 일도 파악 못해요. 땅에 있는 하늘의 일이 뭐냐? 바로 인자가 들리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이 알고 있는 신과는 전혀 무관한, 그걸 무효화시키는, 무산시키는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돌리는 거예요.
그래서 진짜 성경에서는 삼위일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께서 오직 예수님을 주 되심으로 드러내는 것이 모든 성경은 바로 내게 대해서 증거하는데 여기에 대해서 한 몫 거신 분이 하나님 아버지가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아버지가 그렇다는데 우리가 왜 말이 많고 서열을 세워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를 주로 등장시켜서 모든 피조물로 무릎을 꿇게 한다는데 왜 자꾸 삼위일체는 성부중심이냐 이 말이죠. 성부중심해서 칭찬받을 일도 아닌데. 그건 우리가 조작해낸 것.
하나님은 성자 중심과 예수님 중심이라 해서 욕 되게 얻어먹은 사람 있어요. 유명한 칼 바르트입니다. 그 사람 욕 얻어먹을 줄 본인도 알았어요. 왜냐하면 삼위일체로 측정하니까. 신학자들이 수천 년 내려온 삼위일체 이론으로 삼위일체 저촉되느냐, 저촉 안 되느냐? 그것으로 이단이냐 판별하기 때문에 날 잡아먹어라. 하거든요. 난 성자 중심이다.
칼 바르트 성자 중심할 때 먼저 앞장세운 게 있어요. 하나님은 언약 바깥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언약 바깥의 신은 다 우상이고, 언약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하나님이다. 이렇게 칼 바르트가 주장할 때 많은 신학자들이 네가 그렇게 하는 논리가 뭐냐고 하니까, 칼 바르트가 ‘넌 몰라도 돼.’ 이건 설명이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보니 그렇다는 거예요. 너 혼자 보니 그렇지. 난 안 보이는데. 안 보이면 네 마음대로 하세요. 언약 밖에는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서 한 거예요.
예수님 중심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제일 첫 번째 교재에 들어가 봅시다. 생명나무라는 장치가 있는데. 아브라함 이전에 뭐가 있었느냐? 아브라함 이전에는 창세기 1장까지 들어가지 마시고 창세기 2장에 생명나무와 선악과 있었습니다. 왜 창세기 1장을 이야기하지 않고 생명나무와 선악과 이야기하느냐? 그 이유는, 인간이 생명나무와 선악과와 무슨 관련성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어떤 관련이냐 하면, ‘먹어라’와 관련이 있어요. 창세기 2장에 보면, 네가 모든 것을 임의로 먹되 선악과는 따먹지 말라 했거든요. 모든 걸 먹어라. 먹으라고 해놓고 이 먹으라가 어디에 포위돼 있느냐 하면, ‘먹어서는 안 돼’에 더 큰 범위로 포위돼있단 말이죠. ‘먹어라’ 하지만 ‘선악과는 먹어서는 안 돼.’ 그렇다면 인간은 어디에 갇혀있는 셈입니까? 처음부터 먹어서는 안 되는 것에 갇혀있죠.
그렇다면 모든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데 현재 먹어야 될 인간과 먹어서는 안 되는 선악과 그 사이에 둘밖에 없지요. 그러면 여기에 빠진 게 있는데 뭐가 빠졌을까요? 생명나무 빠졌지요. 생명나무는 어디 있느냐? 생명나무는 여기에 점선으로 숨어있는 겁니다.
왜 생명나무가 처음에 먹어라에 포함이 안 돼 있느냐 하면, 나중에 선악과를 따먹을 때 생명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비로소 나타났어요. 이게 따먹기 전에는 생명나무가 어떤 의미인지 몰랐던 겁니다. 따먹기 전에는 먹어라 속에 생명나무가 포함돼있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먹지 말라 속에 갇혀있는 건 먹어라. 다른 건 다 먹되 임의로 먹되 선악과는 먹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죽는다. 그러면 인간들은 죽음 속에 갇혀 있으면서 여기까지만 먹어야 돼요.
그런데 생명나무라는 것이 막상 선악과나무를 따먹고 보니까 생명나무가 뭐라고 합니까? 절대로 못 따먹는다고 된 거예요. 그래서 생명나무는 사람들이 근접하지 못하도록 아예 길까지 차단했죠.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를 못 따먹는다고 함으로 말미암아 생명나무는 특별히 처음에는 먹어라에 포함돼있는 게 아니고 선악과나무 그 바깥에 특수한 의미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즉 인간들이 이해하는 "먹으라"에 인간 식으로 포함될 수 없는 것이 생명나무 과실이었던 것입니다.
‘선악과 따먹었어?’ ‘따먹었어요.’ ‘실수했구나. 내 이쁜 자식. 배고프지 생명나무 따먹고 영생 얻어.’ 이럴 수도 있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갑자기 선악과 따먹은 것으로 닦달 내는 것이 아니고 얼른 제일 먼저 한 조치가 뭐냐 하면, 생명나무 못 따먹게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인간과 선악과의 관계는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선악과 따먹고, 안 따먹고 관계가 아니라 결국 인간과 선악과 배치한 것은 생명나무의 의미를 백날 따먹고, 안 따먹고 간에 생명나무까지는 네가 침범하지 못할 그런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특별한 나무,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주신 거예요. 즉 선악과 나무와 인간들의 행위까지 모두 생명나무의 의미가 드러날 때까지는 진정한 의미가 유보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의미가 바로 예수님의 주되심과 관련있는 겁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죽고 사는 게 문제가 아니고 인간은 기껏 하나님의 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그냥 재료에 불과하다는 것을 초반 선악과 따먹는 사건을 통해서 그 내막이 노출된 거예요. ‘아 놀아났구나.’ 이게 정답이에요.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놀아난 거예요.
따먹어라 해서 생명나무까지 다 따먹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생명나무 먹는 것 하고 기존 다른 과실 먹는 것 하고 사실은 몰랐지요. 선악과 따먹고 나니까 후다닥 내빼듯이 ‘오지 마, 먹지 마, 먹지 마.’ 생명나무 못 따먹었잖아요. 딴 거는 다 훼손 되도 너는 생명나무 의미와 거기에 대해서 몰라야 되는 존재가 인간이라. 인간은 그냥 모르고 있어. 모르고 있다는 말은 내가 알아서 할게.
‘너는 몰라도 돼. 내가 알아서 한다.’는 말은 네가 모르는 상태에서 내가 다가갈 때는 네가 아쉬운 것, 네가 원하는 걸 제공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대로 너를 일방적으로 사용했다는 뜻에서 생명나무로 다가서는 거예요. 이제부터.
이걸 정리하면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은 선악과 따먹으면서 임으로 먹어라 하니까 자기가 돗대인 줄 알고 자기가 천지 모르고 까불다가 그런 것조차 사실은 하나님의 은밀한 숨겨진 하늘의 본 뜻에 의해서 놀이개감으로 사용되어진다는 사실을 주께서는 아십니다.
방금 장로님이 물주셨잖아요. 물주시면 이것은 내 의견, 내 의도대로 된 거예요. 그런데 ‘물주세요’ 하는데 포도주를 줘버리면 이건 뭔 뜻입니까? 너는 나한테 물 달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물 달라는 걸 통해서 내가 너를 포도주 먹이는 사람으로 내가 다루어서 내가 주 되심을 증거하는데 도구로써 사용될 뿐이다 이 말입니다. 요한복음 2장 가나혼인잔치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과 유사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여 누구십니까?’ 할 수밖에 없죠. ‘왜 저를 만들었습니까? 도대체 누구신데 내가 아는 능력 바깥에서 나를 다루십니까? 내가 손 댈 수 없는 그 속에서 다루시는 겁니까? 내가 다가가면 가버리고, 오면 좇아오고. 왜 이러십니까?’ 지르박 추는 것도 아니고. 잡히지도 않고.
그 목적은 하나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아들의 주 되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은 그건 이슬람교입니다. 개혁주의가 하는 주권은 이슬람교고 그거는 우상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권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권이에요. 인간이 만든 하나님은 하나님을 다루겠다. 선악과 따먹은 상태에서 이제는 한계가 없다. 이젠 하나님을 안다. 알기는 개코나 알아요? 몰라요.
선악과 아는 그 선에서 알죠. 그런데 그 선을 아는 것이 무지한데 그 무지한 걸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주 되심에 우리를 환원시키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에요.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을 철저하게 계속 굴리고, 계속 살려두고, 다루어서 결국 우리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주님에 무릎을 꿇기 위해서 피조물을 만들었구나를 발견케 하는 겁니다.
정리하면, 두 개의 나무가 있다. 모든 것은 임의로 먹되 선악과 따먹지 마라. 특별한 나무 두 가지 나무 심어놨어요. 이 두 가지 나무가 앞에서는 먹어라, 먹지 마라. 먹는 나무, 먹어서는 안 되는 나무 선악과 그 외에는 또 먹지 말아야 될 나무는 이야기 안 했습니다.
인간들은 ‘먹어라’ 하는 그 순간 들을 때 인간도 그렇고 마귀도 그렇게 먹지 말라 하는 그 한계에 대해서 마귀는 시험을 해왔습니다. 생명나무 따먹으라고 이런 식으로 시험한 것이 아니고, ‘너 따먹지 말라 했지.’ 그것에 대해서 시험했어요. 그 시험에 의해서 인간들이 따먹고 나니까 그 많은 나무 가운데 유독 생명나무가 황급히 자리를 피해버렸어요.
그렇다면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사실은 그러한 배치는 생명나무를 앞으로 실체를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부속품으로서의 선악과와 인간이 배치 돼있는 거예요. 마귀도 마찬가지고. 생명나무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들이 에덴동산에 심어진 겁니다. 생명나무를 차단시키는 것을 통해서.
그래서 요한복음 6장에서는 내가 바로 생명의 떡이라고 찾아오잖아요. 그리고 생명나무는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22장에 생명나무는 한 그루가 아니고 우굴우굴 있어요. 어린양의 살아나온 샘물에 의해서.
그래서 지금까지 제가 오늘 강의한 결론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은밀한 그것은 하나님 쪽에서 은밀하기 때문에 자신의 은밀한 것을 하나님 의사에 의해서 알려주면 십자가가 전부라는 걸 알게 되고 그걸 안 알려주면 인간이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편다고 삼위일체는 어떻고, 십자가는 어떻고, 언약이 어떻고. 그 펴는 이유가 뭐냐 하면, 어쨌든 간에 하나님이라는 신의 존재가 내 손에 잡히기만 해봐라. 그러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게 없는 사람은 없지요. 그중에 대표적으로 걸려든 것이 이스라엘 민족.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법을 줌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아브라함 언약과 율법의 관계를 전혀 그들은 어떻게 연결되는지 몰랐습니다. 안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그것도 본인이 안 게 아니고 다메섹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430년 뒤에 율법이 가미된 것은, 모든 사람이 저주 아래 있게 하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졌구나. 리모컨 준 것은 저주가 의를 낳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의롭기 때문에 우리는 저주스러워 한다는 것은 통보하기 위해서 우리가 저주스러운 인간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법을 주셨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죠.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것을 전하면 저주받는다.
쉽게 말해서 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지킬 법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고대하는 우리가 지키고 싶어서 환장할 것들은 성경에서 곡해된 방식으로 우리에게 해석되죠. 지키고 싶어서 환장한 것. 이걸 안 지킨 사람과 차이를 두기 위해서 환장한, 더 못 지켜서 환장했어요. 우리는 어릴 때부터 그렇습니다. 어떤 법이 주어져야 법 앞에서 우리는 내 주체가 발견돼요. 카프카의 단편소설 [법 앞에서], [유형지에서]라는 작품의 주제입니다.
법이 왔을 때는 법을 몰랐는데 법을 어길 때 비로소 법을 안다는 겁니다. 법이라 하는 것은 그냥 법이라 하면 몰라요. 그런데 법이라는 것이 바늘이 돼서 우리를 콕콕콕 찔러서 네가 세 살 때 무슨 짓을 했어, 일곱 살 때 무슨 짓을 했어? 우리 피부에 법이 와서 바늘을 찔러서 아플 때 이게 바로 법이구나.
따라서 법이라 하는 것은 처벌을 통해서 법을 아는 거예요. 처벌 받지 아니하면 법을 모른다는 거예요. 우리는 법으로 처벌 받지 않으려고 애쓰잖아요.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어쨌든 처벌 모면하려고 법을 지키지만 그것은 법에 대해서 완전히 오해한 거란 말이죠.
평소 담임선생님을 우습게보지만 언제 담임선생님을 제대로 보느냐 하면, 숙제 안 해 와서 혼날 때 비로소 우리 선생님이 이렇게 무서운 분이었구나. 농담 잘 하고 첫사랑 이야기할 때는 우리하고 친구처럼 지내고 그랬는데 화나니까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노와 화나심은 십자가 사건에서 보여준 겁니다.
그래서 그 생명나무가 우리에게 올 때 사랑, 자비로 온 게 아니고 저주의 모습으로 오는 겁니다. 그 저주스런 사건을 위하여 우리가 동원된 겁니다. 어떤 역할로? 핍박을 하는 역할로. ‘당신 메시아 아니야. 당신 가짜야.’라고 밀쳐 버리고, 무시하고, 모독해야 될 그러한 아주 악한 역할을 감당해야 돼요.
그것이 우리에게 법이 찾아오게 되면 그런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잘 하고 있습니다. 이건 시키지도 않았는데 참 잘해요. 사람이 뭘 하게 되면 이게 법입니까? 회비 내는 게 법입니까? 뭐든지 자꾸 법으로 따지는 거예요.
제가 어제 설교했지만 산책길에 어떤 할머니가 산책하면서 이번 달에 제사가 두 번이라는 거예요. 그분은 제사를 두 번 할 때 비로소 내가 이 집안에 참 좋은 어른이다, 아니다를 결판 할 수 있는 것은 제사 두 번이 없었으면 자기가 얼마나 집안에 큰 필요한 존재인지 드러날 수 없는데 제사 두 번이 있음으로서 ‘반갑다. 제사야.’ 제사를 드림으로서 얼마나 이 가문을 일구는데 제사란 방법으로 내가 본래의 가치를 다했느냐 보여줄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라 하는 것은 결국 주체라 하는 것은 무엇에 둘러싸여 있습니까? 자아라 하는 것은 어디에 둘러싸여서 자아가 되는가? 동서남북 천지가 법이에요. 이 법을 레위기에서는 전부다 아예 법속에 풍덩 집어넣어버리는 거예요. ‘법 좋아하네. 오냐. 법대로 살아봐라.’ 하고 우리를 레위기에 집어넣어서 법대로 살라고 허우적대다가 만날 고생하고 얻어맞는 레위기입니다. 레위기의 마지막에 비극으로 끝납니다.
이걸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레위기의 진수는 법대로 문자로 지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법을 안 지키는 사람을 동원해서 그 레위기 밑바닥에 있는 본질을 찾아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원 출입구가 거기에 있어요. 어릴 때 궁금해서 초코파이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그거는 어떻게 합니까? 뗄 때. 그래서 레위기에 법이 떼어지는 그 균열을 통해서 진짜 레위기의 법이 진짜 안고 있고 품고 있는 왜 법을 주셨는가 내막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레위기를 볼 때 지킬 생각 말고 어디서 떼어지는가?
네가 이모하고 성관계 하지 말고 이런 것 나오죠. 기괴한 것 아닙니까. 그래놓고 들어가는 거예요. 안식일에 나무하다가 돌에 맞아 죽은 인간. 일부러 안식일 어겨보지 돌에 맞는지, 안 맞는지. 항상 이렇게 뭔가 법의 해석에 안 맞고 어긋나고 법이 비틀거리고 왜곡되고 찌그러질 때 그 순간이 어떤 순간이냐 하면, 비로소 법의 내막을 찾아가는 출입구가 열리는 순간입니다. 그냥 시멘트 가지고 몰라요. 뭔가 깨야 돼요. 탁 깨야 그 깬 틀로 재빨리 그 안에서 내막을 헤엄치면서 이런 뜻이었구나 법이. 안다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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