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2강-2010여름수련회

아빠와 함께 2014. 1. 3. 17:08

2010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레위기[종말의 종말] 2강

(강의 : 이근호 목사)


성부, 성자, 성령이 있더라도 인간은 성부, 성자를 파악하는 내가 한 사람이잖아요. 한 사람 앞에 신이 세 분 계신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하나같으면 저도 빨리 서열 정해서 대표자 나오라 이 말이죠. 시어머니 세 명 되니까 귀찮아서 안 돼. 그 중에서 대표자 누구야? 성부, 아버지가 대표자야? 아버지 위주로 섬기고 그 다음에 밑에 섬기겠다는 거예요.

사람은 두 주인도 못 섬기는데 무슨 재주로 세 주인을 섬깁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성경에 두 주인도 못 섬기는데 무슨 세 주인을 섬깁니까? 그러니까 이게 인간의 한계이기 때문에 한 분만 나와. 인간은 자기가 기준이고 자기 입장에서 ‘하나님 나오세요. 우리 대화합시다.’ 하는 자체가 할 때마다 계속해서 상상하는 하나님이 자꾸 번지는 커지는 거예요.

이만큼 커지면 진짜 하나님을 핍박하는 강도가 커지고 이만큼 작으면 핍박의 강도가 약해지요. 처음 교회 오는 사람이 주님을 핍박하진 않아요. 왜냐하면 무식하니까. 아직까지 강도가 적어요. 그런데 목사 쯤 되면 핍박의 강도가 세져요. 적어도 율법에 흠이 없을 정도면 핍박의 강도는 격해집니다. 사도 바울처럼 말입니다.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 같으면 이건 엄청나요. 그만큼 법적으로 놀자는 거예요.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인간의 몸은 그냥 몸이 아니고 선악과가 사라진 게 아니고 인간의 몸으로 변했어요. 인간이 선악과가 되고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를 차단시킨 이유가 어디서 선악과 자꾸 섞여서 생명나무와 하나가 되려 하느냐 말이죠. 선악과는 선악과대로 기능이 있고, 생명나무는 생명나무대로 기능이 있어서 이 두 기능을 바로 예수님의 주 되심을 드러내는 겁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바로 예수님의 주 되심을 드러내는데 선악과는 선악과 기능을 다해야 되고, 생명나무는 생명나무 기능을 하기 때문에 둘이 섞이면 안 돼요. 그런데 인간들이 선악과 따먹고 선악과적인 몸이 돼서 거기다 생명나무를 짬뽕도 아니고 비빔밥도 아니고 어디를 집어넣어요. 그래서 차단시킨 거예요. 제발 선악과 잡수었습니까? 선악과 몸으로만 사세요.

그러면 인간의 선악과적인 몸이 생명나무와 결별되었지요. 생명을 가질 수 없지요. 그러면 생명나무의 취지를 알려면 여기 선악과 가진 몸 말고 다른 몸, 생명나무의 취지를 가지고 인간에게 찾아오게 하나님을 통해서 알아야 합니다. 가까이 온다고 해서 이해하게 쉽게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가까이 하면 할수록 그 차이는 더욱 과격스럽습니다. 인간 본인들이 몰랐던 선악과의 본색이 점점 더 노골화되겠지요. 우리의 법적인 관점하고 예수 당신의 이야기하고 말입니다. 전혀 소통이 안됩니다. 

우리 주장은 이렇습니다. "천국, 지옥 선택권을 우리한테 좀 맡겨 달라. 내가 천국을 좋아하면 천국에 가게 해주시고, 지옥이 좋으면 지옥가게 해주시고 그런 선택권을 우리에게 주세요"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은 뭐냐 하면, 천국과 지옥은 네가 어떻게 살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님으로서 고유 권한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천국과 지옥이 존재하는 거예요. 어디 갈까가 아니라.

다시 할게요. ‘지옥 가서 벌 받고, 천국 가서 복 받는 그 주인공은 우리니까 우리가 살 테니까 그 선택권은 우리한테 넘겨져야 옳은 게 아닙니까?’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뭐냐 하면, ‘네가 옳을 것 같으면 생명나무를 따먹으라고 했지, 왜 생명나무가 너한테 피했겠는가?’ 우리는 항상 선악과 따먹은 티를 다 내는 거예요. 죄악 된 티를 그따위로 식으로 다 드러낸다 말이죠.

그러니까 천국과 지옥은 어디 쪽으로 갈까가 아니라 천국과 지옥은 ‘내 손 안에 있소이다.’ 라는 말을 함으로써 비로소 예수님의 주 되심이 드러나요. 예수님의 주 되심은 인간의 선택권을 묵사발 냄으로써 드러나요. 인간을 묵사발 내는 이유가, 인간이 바보, 등신이라서가 아니라 뭘 해도 선악과 따먹었다는 티를 내면서 표를 내기 때문에 그거는 생명나무와 격리돼야 될 속성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격리시키는 자체가 예수님의 주 되심의 솜씨라니까요.

하나님께서 선악과 안 따먹도록 사전에 조치하셨으면 문제가 없지 않았느냐고 우리 내부에서 반발과 반문이 일어나겠지만 그런 식으로 선악과를 다루게 되면 예수님의 주 되심이 사라져버립니다. 불신자에게 전도하면 이런 소리 얼마나 들었는지 몰라요. 선악과를 왜 따먹어서 접근하면 발포한다고 아예 전기철조망을 쳐서 가지 못하게 하든지, 뱀이라면 잡아 죽이던지 인간을 보호해야 자비의 하나님인데 선악과 열매도 봐도 진짜 안 먹을 정도로 해야 하는데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따먹었다고 죽여 버리고. 이런 깡패 같은 행패가 어디 있어요. 세상에 깡패도 이런 깡패가 없어요. 너무 심한 거예요. 건전한 사고를 지닌 인간 입장에서 볼 때에 말입니다.

그러니까 공부했다는 중들 맨날 씹어대는 겁니다. ‘성경은 모순으로 가득 차있다.’ 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그런 식으로 가득 차야 주님의 은밀한 맛이 나지요. 그래야 네가 알고 싶어도 알지 못하게 하시고  어리석게 보여야 그게 구원의 능력 아닙니까? 그래야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효과 나잖아요. 내 행함도 아니고. 행함이란 실천력이거든요. 알아서 실천해서 제대로 알고 이런 식으로 구원 못 받습니다.

이런 이야기하면, ‘그럼 우리는 집에 가만히 처박혀 있을까요?’는 식으로 나옵니다. 오늘 오후설교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다윗 언약에 있어서 그 당시 간부급들이 다윗 언약을 시비 걸고 압살롬을 공격하자, 압살롬을 치자 하는데 ‘네가 압살롬이야.’ 다윗 언약 속에 압살롬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다윗이 뭐라 하냐 하면, 이 한 마디 던져버려요. 그러니까 발끈하면 압살롬 잡는 동시에 다윗을 공격하게 됩니다.

간부급 이 사람들이 왜 다윗의 말을 무시하느냐 하면, 다윗을 자신들과 같은 레벨의 인간으로 본 겁니다.  다윗 속에 멜기세덱이 있음을 보지 못한 겁니다. 멜기세덱 반열을 통해서 다윗이 다윗형 인간으로 움직입니다. 그 멜기세덱 위치에서는 저멀리 아담이 보입니다. 저 역사 시작과 끝이 보여요. 역사 끝에서 보면 모든 인간은 한 명이에요. 열 명이 아니고 말입니다. 십자가마을 몇 명 참석하는지 압니까? 한 명 참석해요. 가까이 가서 보니까 여러 명 보이죠. 위에서 보면 한 명이라니까. 전부다 아담 속에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멜기세덱 반열에 의하면 역사란 것은 흘러도 흐르지 않았어요. 항상 그 아담의 세분화와 분열과정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아담을 한 아담과 상대하시듯이 상대하시는 거예요. 맨날  ‘선악과 왜 따먹었어?’  이야기에요. 시간은 흐르지 않습니다. 아담 안에서는 시간은 흐르지 않아요. 천년을 살든, 만년을 살든 소용없어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아요. 변함없습니다. 동일합니다. 

다만 흐르지 않은 시간 속에 예수님이 들어 와 버리니까 비로소 시간이 발생된 겁니다. 시간이 흐르는 거예요. 예수님에 의해서 창조된 시간이 있게 됩니다. 과거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예언하기 위해서. 이미 우리는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비로소 시간은 의미를 갖고 우리를 지배하는 거예요. 예수님을 위하여 태어나야만하고 예수님을 위해 성장해야만 하고 예수님을 위하여 죽어야만 하는 시간이 생겨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을 위한 세계가 아니고 모든 피조세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영역이었고, 활동장소였고, 이 세상을 거쳐 갔던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주님이  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시간과 공간의 놀이마당이 되는 겁니다. 그게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옵니다. 에 모든 피조물들은 누굴 위하여? 오직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직 주를 위해,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어졌고, 예수님을 위하여 진행되고 있고, 모든 것을 예수님이 알아서 전부다 폐품을 폐품대로 알곡은 알곡대로 처리할 수 있는 권한도 주님한테 있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를 위한 시간은 전혀 흐르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순간은 자기가 죽었을 때에요. 그래서 오후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죠. 죽을 때 그냥 죽지 말고 관을 위로 밀어 조금 열어보고서는 주위의 가족들이 자신의 죽음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는지를 한번 보라고 했지요. 그들이 이해하는 죽음과 죽는 본인이 이해하는 죽음이 확연히 다릅니다. 이를 통해서 내가 이해하는 죽음은 너무나도 나 일방적인 죽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후손들이 무슨 짓을 하는가 보란 말이죠. 

죽을 상태가 되면 지나온 것이 많이 산 것 같지요. 놀라운 사실은 지나간 시간은 이미 순식간에 다 사라져버립니다. 태어날 때하고 죽는 순간하고 다를 바가 없어요. 이십 년 살아왔습니까? 십구 년 11 개월 29일 다 날아갔어요. 없어요. 여전히 선악과 따먹은 몸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아담이라니까요. 이십 세짜리 아담, 오십 세짜리 아담, 팔십칠 세 되는 아담. 전부다 하나의 아담 그냥 하나님이 그렇게 다루는 거예요. ‘나, 나이께나 먹었습니다.’ 라고 나서지만 하나님 그 말 안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떤 식으로 보는 게 중요하지 내가 나를 보는 것은 의미없습니다. 

삭개오는 키 작지만 나무에 올라가서 비로소 자신의 인생은 자기를 위한 인생이 아니라 예수님의 주되심을 주목해야 하는 인생임을 압니다. 작은 키로 태어나서 나무 위에 올라가게 만들어서, 너희 집에 가자해서 이 집에 구원이 이루지는 절차가 왜 필요했던 것입니까? 그것은 삭개오 구원이 그의 인생에 있어 주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지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런 결과로서 살아야 예수님의 주 되심이 여전히 드러나게 됩니다.  삭개오라는 보조물, 보조매개를 통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주 되심을 드러내신 겁니다.  모든 게 다 그래요.

예수님께서 성전 청결할 때 제자들 몰랐습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고 난 뒤에 비로소 그 성전이 그리스도의 몸을 두고 이야기하신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구약의 모든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나오는 성전구조는 결국 뭐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하는 기능을 법이라는 형식 안에서는 어떤 식으로 그리스도 몸이 드러나는가를 보여주는 그러한 장치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레위기를 볼 때는 보통 시력이 안 좋을 때 돋보기로 보는데 우리는 십자가로 레위기를 들여다보죠. 십자가로 봐야 될 걸 십자가 때려치우고 자기가 보게 되면 여기서 두 가지 나와요. 문법적 해석과 역사적 해석이 나옵니다. 문법적 해석은 딴 게 아니에요. 뼈대는 ‘주어+술어’입니다. 각종 양념 치듯이 목적구, 부사구들이 나중에 겉가지처럼 달라붙는 겁니다. 양념 치킨처럼 말입니다. 언어학자 촘스키에 의하면 이것은 어릴 때부터 우리 인간의 구조 속에 형성되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미국의 촘스키라는 그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은 선악적 성향을 드러내는 선악적인 몸으로 레위기든 성경을 해석하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모든 문법은 "내가 무엇무엇을 행한다,"입니다. 같은 뜻으로 풀이하면 "누가 무엇무엇을 행함을 내가 알아챈다"입니다. 그게 모든 문법구조에 의한 의미의 귀착점이에요.  하여튼 '나'가 주인공이에요.

그럼 여기서 성경을 누가 반발하게 됩니까? 처음부터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극구 떼어놓으려고 하시는 생명나무의 정신을 가진 예수님의 몸과 선악과의 몸이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 부딪치게 되죠. 그 부딪치는 균열을 통해서 일어난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결국은 문법적-역사적 해석이 뭘 낳는다? 바로 이단이죠. 개혁주의신학이 이단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개혁주의신학 말고 나올 신학이 없어요.

고로 결론은 간단하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단이다. 그걸 즐거워하자는 말입니다. 즉. 나로 하여금 이단 되게 하시는 것은 생명나무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주께서 나를 세울 때 비로소 발견되는 겁니다. ‘내가 이단이구나.’을 알 때 울고 통곡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도리어 즐거워하고 감사하자는 말입니다.  이단이 된 나보고 이단이라ㅡㄴ 점을 너무 기뻐하자는 말입니다. 왜요? 이단이 지킬 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네가 무슨 법을 지켜도 이단이에요. 그러니까 이단이 지킬 법은 아무것도 없거든요. 얼마나 홀가분합니까? 나 혼자 흥분했다^^


그렇다면 레위기에 율법, 모든 제사법은 뭐냐? 이 법이 인간의 선악과 몸과 결부될 때 그 몸이 어떻게 생명나무 몸으로 전환하는가? 전환되는 변환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레위기입니다.  독수리 5형제가 변신하죠. 그 변신의 절차를 보여주는 게 레위기입니다. 선악과 몸으로 들어갔다가 그 다음에 생명나무 몸으로 빠져나오는 거예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빠져나오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선악과 몸으로 들어가서 빠져나올 땐 생명나무 예수님 몸이 빠져나온 게 레위기입니다.

어떻게 그런가? 레위기에서 모든 제사가 지킬 수 있는 제일 대표적인 한 군데가 바로 법과 인간 몸이 만나는 대목인데 레위기 8장인데, 그게 대제사장 위임식이에요. 대제사장 위임식할 때 모세가 아론과 아들들을 불러요. 내일 위임식하자. 우리 일주일 동안 위임식하자. 성막 앞에 나오라. 공고해요. 이장님이 광고를 해요. 하면 성막 앞에 쭉~ 성막 또 모으죠.

성막이 여기 있어요. 간이식 텐트, 커튼이 쳐있고, 안에 지성소. 동쪽 한 군데가 정해지면 서쪽, 북쪽, 남쪽도 정해지고 마당에 번제단 있고, 물두멍 있고. 성도 안에 들어가면 떡을 놓는 소반이 있고 향로와 촛대가 있고, 향단이 나와요. 끝이 뾰족하니 뿔처럼 생긴 향단이 있습니다. 회막문은 여기 있는데 여기에 회중들이 집결하는 거예요. 이장이 광고하는 거예요. ‘ 여러분. 내일 위임식 한답니다. 전부다 모이세요.’

모여 있으면 아론과 아들들이 나타나요. 이 사람들은 안에서 일을 해야 될 사람들이기 때문에 일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접촉을 해야 되기 때문에 보통 인간 되면 안 되거든요. 보통 인간이란 말이 추상적이고 구체성이 말이 되지만 모세, 아론과 그 자식은 그런 추상적인 인물이 되면 안됩니다. 구체적인 인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여러 가지를 준비를 해요. 기름을 준비하고, 그 다음에 수송아지 한 마리하고 수양을 두 마리 잡아요. 그리고 무교병이라는 이스트가 없는 딱딱한 떡을 또 준비합니다.

수송아지는 속죄제 하기 위해서 온 거고, 수양 두 마리를 번제하기 위해서 온 거예요. 왜 두 마리냐 하면, 하나는 그냥 번제하기 위해서고, 또 한 마리는 위임식할 때, 법이 인간에게 와서 인간이 거룩한 인간으로 달라지는 전이과정에서 전에는 이런 인간인데 이렇게 되었다를 보여주기 위해서 절차를 차이나게 보여주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양 한 마리 조지고, 또 한 마리 조져서 어떻게 거기다 입히는 과정이 있어요. 그래서 수양 두 마리 필요합니다. 

근데 이걸 준비하면서 제가 느낀 점이 뭐냐 하면, 이 민족이 희한한 민족이다. 이걸 왜 하느냐 이 말이죠. 문제는 그걸 지금 사람들이 까라 하면 까겠다는 식입니다. 하여튼 지금 이스라엘 민족은 다른 이방민족에서는 안 하는 짓을 하는 겁니다. 이걸 보고 제가 느끼는 바는 십자가마을 사람들이 더운데 무슨 짓이냐 하는 거예요. 도대체. 피서 가고 해수욕장 가야지 무슨 짓이냐 하는 거예요.

왜 하나님깨서는 성도에게 ‘특이성’을 보이게 하시느냐 하는 겁니다. 특이성의 특징은 뾰족함에 있어요. 뽀족함이란 그 지점을 경과하면서 상반대는 성질이 시작됩니다. 그 뽀족함 지점이 기준이 되어 양쪽이 확연하게 반대가 되는 세계가 펼쳐지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은밀한 사건인 십자가 사건이 우발적으로 발생할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 특이한 현상은 본인이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터지는 특이성입니다. 꼭 무당 신 내림 같습니다. 무병도 이런 무병이 없습니다. 이것을 두고 '말씀에 의한 체험'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이게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잇어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집단이 좀 살만하면 이런 특이성을  굉장히 부끄럽게 여겨요. ‘미쳤어, 미쳤어. 이건 말도 안 돼. 다른 미국과 아르헨티나, 잘 사는 일본 같은 데는 이런 짓 안 하는데 무슨 짓이야? 우린 구세대 민족 아니야? 우리가 이렇게 특이하니까 저쪽 사람들이 우리하고 교류 안 하려고 하지. 종교 다 바꿔.’ 그래서 안 특이하려고, 안 튀려고 하면서 주위 이방민족과 조심스럽게 교류를 시도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특이성은 무시됩니다. 휴, 꼭 오늘날 교인들 같아요. 어쨌든 안 튀면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온갖 변명과 묘책을 구상하는 현대 교인들 같습니다. 

레위기 시대에는 아직도 순진하다고 할 수있습니다. 나중 후대 이스라엘 가면 뺀질이가 되서 십일조 안 한지 오래 돼버렸고. 그러면 레위기 말씀을 통해 이익을 얻고자 하는 레위인이나 제사장 쪽에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큰 실망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나라, 유다 나라가 엉망진창 되는 것을 뻔한 이야기입니다.  왜 엉망진창이냐 하면, 율법이 미워서가 아닙니다. 안 특이해도 다른 나라가 우리쪽보다 더 잘 산다는 것이 화가 나는 겁니다. 복음을 무시해도 도리어 큰 에배당 짓고 기독교계에서 어른 교회 행세하는 것이 화가 나는 겁니다. 우상숭배, 그것 참 쉬운 일입니다. 

삯꾼 목자가 양을 잡아먹는다는 이야기가 성경에 있는데 우리 한 번 생각해봅시다. 목자가 양치는 이유가 뭡니까? 잡아먹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잡아먹는게 정상이죠. 무슨 목자가 양을 위해서 목숨 바치는 그건 뭔가 주객이 전도된 미친 목자가 다 있단 말입니까. ‘암소야, 암소야. 내가 널 위해 목숨 바칠래.’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럼 목축업을 왜 합니까? 축산업을 왜 해요? 양을 잡아먹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하지만 이게 과연 특이한 이야기입니까 아니면 상식적인 이야기입니까? 성경은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하여튼 레위기라는 이 이상한 짓을 따라가 봅시다. 그렇게 회중들이 회막문 앞에 모이니 모세가 회중들에게 명령합니다.  ‘여러분, 아론과 아들들의 평상복을 다 벗기세요.’ 벗기고 물 떠서 안쪽에서 목욕을 시키네요. 부끄럽다고 할만 할 것입니다. 목욕을 시키고, 속옷을 입히고 띠 하나 두르고, 그 다음에 겉옷 입히고 에봇을 더하고, 그 에봇을 띠 두르고, 그다음에 흉패를 붙이고 흉패에 우림과 둠밈을 넣고, 그 다음에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안 전면에 '거룩한 관이라는 금패를 붙이게 합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게 뭐냐 하면, 모세가 아까 준비했던 기름을 장막과 온 성소기구에다 떡칠합니다. 단에 7번 뿌리고서는 제단에 속한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에도 기름을 바릅니다. 그래놓고 '거룩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 이번에는 사람에다 기름을 바르게 합니다. 아론의 머리에다 기름을 바릅니다. 그리고 아들들에게 속옷을 입히고 따를 띠고 관을 씌움입니다. 

그러면 거룩한 공간과 아론이란 인격체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생겨요. 둘 다 기름 처발랐다는. 기름으로 기름부음 받은. 혼자 기름 부은 게 아니고 이미 성소에 기름부음으로 말미암아 기름 부었다는 그 자체로서 기구와 움직이는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몸체로서 기름 부은 자가 한 공간에 놓이게 되는 그런 요건이 발생됩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한 인간이 어떻게 거룩한 인간으로 이전되느냐 그 과정을 설명하는 겁니다.

이것으로 거룩 절차가 끝난 게 아닙니다. 아까 준비한 송아지를 끌고 와서 회막에서 잡습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이 달려들어 소에다 안수를 합니다. 모세가 피를 취하여 손가락으로 제단의 네 귀퉁이 뿔에다 바릅니다. 즉 기름 위에 피를 바르는 겁니다. 이게 속죄제라 하는 거예요. 피를 내면서 피뿐만 아니고 내장을 덮은 기름과 두 개의 콩팥과 간 꺼풀과 기름과 따로 분리해요. 그러니까 속죄제사에서 중요한 부분은 뽑아내는데 그것은 피와 기름 입니다. 

그런데 아까 인간은 기름칠로 떡칠 돼있죠. 이미 그 인간은 기름을 유발하는 제사 제물, 수송아지나 수양이나 기름을 제공하고 피를 제공하는 그 안수한 제물과  순식간에 바꿔치기할 그런 만반의 준비가 돼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선악과 몸과 생명나무 몸 그리스도와 싹 바꿔치기해야 돼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뭡니까?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젠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뭔가 바꿔치기하는 거예요. 이 바꿔치기 때문에 그렇게 특이해야 되는 겁니다.

우리나라 무속신앙은 결과를 얻기 위해 팔짝팔짝 뜁니다. 뛰면 뭐든지 받습니다. 그런데 이쪽 이스라엘은 뛸 필요가 없어요. 처바르면 돼요. 그렇게 해서 수송아지에서 속죄제로 기름과 피를 끄집어내고 나머지 똥과 가죽과 고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진 바깥에서 불태워버리죠.

그러니까 그 다음 절차로 수양으로 제단에서 번제를 드리게 되는데 제단 위에서 불태우든지 바깥에 불태우든지 하여튼 모든 것은 불태웁니다. 불태우면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냐 하면 "거룩케 되느니라"하십니다. 누구 마음대로? 하나님 마음대로. 우리는 아무리 들여다봐도 죄가 날아가는 모습이 안 보입니다. 안 보이는데 주님은 그걸 죄 사했데요. 누구 마음대로요? 하나님 마음대로요. 요즘 과학자 같으면 현미경으로 죄가 어디서 어떻게 나갔는지 추적할 거예요. 해봐야 CSI 와서 과학수사해도 소용없습니다. 죄가 어떻게 됐는지 안 보입니다.

노아가 방주 만들어서 구원받았습니까? 아니죠. 노아는 은혜 받아서 구원받은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할 때 방주가 나를 살린다는 해석을 할 수 있는데 구원은 그 인간들의 아이디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냥 내가 은혜 주면 구원받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꾸 오해해요. 이렇게 함으로써 내가 구원받았다고 자꾸 오해를 해요. 오해를 하니까 그걸 모방을 함으로써 똑같은 효력이 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누가 간증집회해서 십자가 이야기하니까 자기도 그 꿈을 꾸려고 연습을 하고 난리 나요. 어떤 사람이 암 걸려서 기도해서 낫다 하니까 자기도 암 걸리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거예요. 암걸려서 어떻게 하든지 암에서 나은 기적을 내용으로 하는 간증거리 하나는 훈장처럼 갖고 싶은 겁니다. 줄담배 펴보세요. 폐암 걸리지. 사람은 기껏해야 모방이 똑같은 효력을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홉니와 비느하스가 어디서 죽었습니까? 언약궤에서 죽었지요. 왜 언약궤에서 죽습니까? 옛날 언약궤로 한번 효과 봤거든요. 지금 똑같은 짓하면 되는 줄 알고.

사무엘이 금식했잖아요. 금식해서 승리했지요. 그 다음에 금식하니까 승리하거던가요?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놀라운 것은 두 번 다시 똑같은 짓을 홍해 같은 똑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함이 가미될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혀 인간의 행함이 가미될 수가 없는 십자가 사건은 두 번 아니라 세 번, 천 번을 반복해서라도 동일한  의미와 구원의 효력을 나타내는데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효력의 은밀성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무슨 짓을 해도 구원과 아무 상관없다는 이야기가 십자가에요. 네가 용 써야 소용없어. 내가 죽은 그것이 구원되지 네가 앞에서 용 쓴다고 십자가 지고 이벤트 벌인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그 십자가 능력이 임하는 곳에서는 다양한 면면을 보여줘요. 옛날에 지리 시간에 배운 기억이 나는데요. 강물이 흘러흘러 바다까지 오게 되면, 델타라는 삼각주가 생기면서 삼각주 모래톱에서는 수면이 얕아져요. 이때 삼각주 오기 전에 강물 속에 있던 부유물들, 각종 강물에 떠내려 온 내용물들이 그 실체를 안 드러내다가 이 모래톱에 걸리면 온갖 것들이 다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구약에서는 홍해, 요단강, 여리고 성 무너지는 기적들이 있지만 이게 십자가에 와서 모래톱, 삼각주가 되서 모든 사람에게 일치되지 않는 같은 형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같은 현장에서 나름대로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비밀을 아는 사건들이 벌어집니다. 이것을  다양성이라 합니다.

다양성은 획일성의 반대말입니다. 교회에서 목사 중심의 신앙 획일성을 십자가 자체가 반대합니다. 목사는 자기 신앙 위주로 교인들을 줄 세워놓고 싶은 겁니다. 이렇게 되면 주께서 주신 다양한 은사가 서열화, 계급화로 굳어져 버립니다.. ‘너는 이것이 모자라니까 하수야.’라는 식의 서열적인 개념 속에는 교회 기강을 세움을 빙자해서 법이 동원돼요. 좀 수준 높은 사람은 여기까지 지키시고, 수준 낮은 사람은 여기까지 지키세요. 서열화의 관점에서 나왔던 레위기의 주석과 해석이 오늘날 전부입니다. 그래서 위험한 세계에요. 신학계가 보통 위험한 세계가 아니에요.

레위기 해석은 어떻게 한다? 레위기 법을 어겨서 거기서 깨지고 균열된 그 지점이 무슨 지점입니까? 비로소 레위기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열려진 장소라 했죠. 그런데 그게 아니고 레위기를 두고 그냥 법으로 봐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서열화죠. 그 서열화의 선배님들이 누구죠? 예수님 당시에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율법사들이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겉으론 평토장한 예쁘장한 무덤이구나. 하지만 속에는 해골 들어 있잖아요. 네가 아무리 완전무장 해봐도 나는 너를 해골로 본다.  

바꿔치기 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안에 것이 겉으로 드러나고 겉의 것은 날아가 버려야 되죠. 그것이 바로 동일하게 속죄제 아까 하다 말았는데 아론하고 아들들이 우르르 가서 안수를 해요. 보통 안수는 한 손으로 해요. 아사셀 염소 할 때는 두 손으로 하지만 나머지는 한 손으로 한다 이 말이죠. 전부다 안수를 한다는 말은 네가 나고, 내가 너다 이 말이에요.

네가 나대신 됨으로써 나는 네가 갖고 있는 그 위상, 하나님이 ‘너는 속죄제야’ 하는 그것이 나에게 전수되는 겁니다. 다시 묻습니까? 그렇게 제사 지내면 구원받습니까? 이 많은 사람 중에서 답변하는 사람 없어요. 그렇게 제사 드리면 구원됩니까? 속죄됩니까? 속죄가 안 돼요. 속죄제 드림은 드림이고, 하나님 마음입니다. 이게 안 믿어지면 곤란한데.

다윗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하나님은 제사나 번제를 원치 아니하시고 뭐 한다고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다. 다시 말해서 문둥이 같은 상한 손으로 안수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제사할 때. 자기 딴에 여기 올 때까지는 자기는 괜찮은 손 씻은 손으로 지킨   문법적으로, 역사적으로, 문자적으로 그대로 율법 예시대로 했다고 여겼는데 나중에 자기가 자기 속에 있는 근원을 알고 보니까 문둥이 같은 천하 죄인 중의 괴수의 입장에서 더러운 손으로 안수한 거예요.

그러니까 제사를 한다는 것은 나로 하여금 더욱더 죄인으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멋진 늪이었어요. 계략이었습니다. 그 계략에 말려드는 즐거움, 보통 즐거움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는데 구원은 십자가에서 이뤄진다는 걸 아는 그 즐거움. 그 즐거움 아니면 신앙생활 어디서 못 찾습니다. 성도의 행복은 거기에 있어요. 내가 하는 것과 상관없이 주님께서 십자가로서 이미 구원했다는 즐거움.

그걸 어떤 사람들은 무율법자다, 율법폐기론자다, 자기 마음대로 살아라 하는데 그건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게 아니고 충실하게 율법에 대해서 내밀하고 굉장히 민감한 사람에게만 그렇게 '거룩한 띠'로서 작용하는 겁니다. 성경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성경전체가 다 밀려오는 것을 느낍니다. 

밀려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한 발자국 뗄 때마다 성경의 어느 구절과 연관 돼있고, 밥 먹을 때마다 성경 어느 구절, 레위기의 먹지 마라, 먹어라에 연관 될 정도로 완전히 말씀의 수풀 속에 섞이면서 그 안에 놓여있으면서 ‘주여, 이런 율법하고 구원하고는 상관없음을 율법 속에서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게 무슨 무율법주의자입니까? 아주 철저한 율법주의자죠. 율법폐기론자 아닙니다. 더욱더 성경 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이래서 내가 전에 의롭다고 여겼던 것이 사실은 성경을 다시 보니 그것마저 죄였구나. 아주 신난다. 특이성? 쉽게 말해서 미친 것. 좋게 해서 특이성이지 완전히 미친놈이에요. 고린도전서 5장에 나오죠. 사도 바울이 나는 미쳤다 하죠. 어디에 미쳤다 합니까? 주님의 사랑에 미쳤다. 특이성입니다.

아예 성경도 안 보고 하는 것은 아까 이야기한 그거는 뭐냐 하면, 성경에 관심 없는 것은 ‘이 몸으로 살래. 간섭하지 말라’는 자기가 이미 신으로 사는 사람이고, 항상 성경을 보면서 ‘이래서 내가 착하다고 한 짓도 이 대목 보니까 착한 게 아니네. 그때 건성건성 봤구나.’ 다시 십자가 돋보기로 보니까 전부다 죄로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안수해서 네가 나고, 내가 넌데 모세는 사정없이 방금 뭐라 했어? 내가 소 되고, 소는 애가 됩니다. 그럼 그 자체에서 이미 바꿔칠 수 있는 요건 됐지요. 그러면 ‘네가 누구라고?’ ‘소입니다.’ 송아지 끌고 가서 제단에서 각을 떠서 잡는 거죠. 그러면 끝났습니까? 그거는 속죄제고. 이거는 죄가 이런 식으로 된다. ‘하나님 어째서 그 절차가 죄가 없어지는 게 됩니까?’ ‘따지지 마. 내가 일방적이야.’ 하나님이 만든 절차로 그냥 죄 없어지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레위기 주석 보면 소가 어떻고 저떻고 하면서  여러 가지 알레고리가 시작되는 거예요. 소가 누웠을 때 얼마나 아팠겠느냐? 이것은 예수님의 아픔이다 하는데.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아픔을 모릅니다.  단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십자가 아픔을 흉내 내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모방하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여튼 우리가 믿는 것은 예수님의 피를 근거로 선언하신 그 선언입니다. 그걸 새 언약이라 합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어라 할 때 거기에 치수가 안 나와요. 레위기 같으면 나와 있죠. 피를 먹을 때는 양푼에 담아서 2리터를 먹으세요. 나왔을 거예요. 우습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살을 먹을 때는 엉덩이 살을 먹고 딴 살은 먹지 마세요. 가슴살은 다이어트 할 때 필요하고 그건 놔두고. 안 나온다 말이죠.

레위기는 나와요. 두 마리 양 중에서 첫 번째 양은 그냥 번제로 다 태우는 거고, 두 번째 양은 다 태우지 않고 피를 받아냅니다. 이 받은 피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각각 오른쪽 귓볼과 오른손 엄지가락과 오른발 엄지가락에 바릅니다. 그리고 오른쪽 뒷다리는 남겨놔요. 오른쪽 뒷다리가 뭘 얹느냐 하면, 아까 무교병 해서 누룩 넣지 않은 딱딱한 빵을 얹고, 전병도 얹고 그 다음에 기름에 튀긴 떡도 얹어서 거기다가 오른편 뒷다리, 흔들어요. 요제. 흔들어놓고 불에 태웁니다.

이 말은 두 번째 위임식용 번제를 드릴 때는 거기에 뭐가 가미되느냐 하면, 인간이 평소 먹고 살기 위해서 먹는 본인들이 음식이 감히 거룩한 제사에 들어가는 것을 주께서 허락을 해요. 드디어 결합이 된 겁니다. 인간들의 먹고 살기 위한 음식과 음식이 들어가니까 이런 식으로 새로운 삶은 사는구나. 인간의 양식과 하나님의 양식이 뒷다리 위에 얹어서 하나님께 허락을 받고 이제 완전히 결합이 되면서 선악과 먹은 몸이 생명나무로 빠져나오는데 빠져나올 때 주의할 것은 아까 드렸던 번제와 속죄제에서 쏟아진 그 기름과 피를 거기다 처발라버려요.

이 오른쪽과 관련된 게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나옵니다. 하나님의 일은 왼쪽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전부다 오른쪽에 계신 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물론 감추어진 겁니다. 오른쪽의 계신 분에 의해서 오른쪽 계신 분의 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오른쪽이란 의미를 강조하면서 구약부터 줄줄이 특이한 사건들이 자꾸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제사 마치면 기름과 제단 위의 피를 취하여 아론과 아들들의 옷에 뿌립니다. 그리고 나머지 고기는 먹자에요. 먹어라! 일주일 동안 있으면서 먹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먹는 게 뭐예요? 그 사람들이 먹는 것이 먹을 수 있는 자격자가 된다는 것과 먹을 것을 누가 줬습니까? 자기가 가져온 것은 다 불태워지고 없어요. 불태워질 때 주께서 불태워질 것에서 뭐만 뽑아냅니까? 기름과 피만 뽑아내서 이제는 먹을 때 음식을 먹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흡족히 받았던 하나님이 제공한 새로운 고기에 피와 기름을 바르고 피가 공유됨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언약에서 무사히 귀가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는 겁니다.

이게 거룩이에요. 레위기에서. 저는 보기에 그게 어떻게 거룩인지 잘 이해가 안 돼요. 그래서 거룩이란 게 나와야 되는데 그게 무슨 거룩이냐. 그런데 이사야 6장을 보니까 이사야가 거룩을 봤어요. 얼마나 무서운 거룩인지 세퀴나의 거룩, 하나님이 임재했던 거룩인데 이거는 이사야는 그냥 보기만 하고 감당을 못했고 그 거룩 속에서 감당이 안 된 피조물이 나옵니다. 이 피조물이 나오는데 누구 게요? 천사.

천사가 어떻게 합니까? 날개 여섯 가지고 얼굴 가리고 몸 가리고 발 가리죠. 같이 늘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그분도 영광이 드러나게 되면 그 영광을 감당을 못해서 가릴 것 같으면 이 이사야는 뭐라고 합니까? 난 끝났다. 이사야가 레위기를 모르겠습니까, 레위기 제사법을 모르겠습니까, 성경 사무엘상하를 모르겠습니까? 성경의 도사에요.

그런데 그걸 안다고 해서 그 영광에 동참할 수 있는 지식이나 능력이 된다 말입니까, 안 된단 말입니까? 안 돼요. 될 수가 없습니다. 결국 거룩이라는 것은 거룩이 드러내는 거룩을 커버하는 천사가 자기를 가릴 수 있는 가림막, 가리개가 필요했던 겁니다. 이사야 같은 경우는 숯불로 완전히 지져버리죠.

내가 그 앞에서 천사가 이러고 있는데 ‘하나님, 저 구원문제는? 천당 가요, 지옥 가요?’ 어디서 그런 걸 물어요. ‘주님 물어봅시다. 천당 갑니까, 지옥 갑니까?’ ‘너는 아담이야.’ 아담의 후손에게 저주 내린 조치가 하나님의 거룩한 세퀴나의 영광에서는 너무나 합당한 조치에요. 저주받는 게 합당한데 거기서 입을 떼서 구원문제, 어떻게 해야 천당 갑니까? 영광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삼층천에 올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게 과연 지가 할 소리냐 이 말이죠. 건져주면 고마운 줄 알고, 안 건져주면 당연한 조치인 줄 알고 지옥 가란 말이죠.

그러면 천국은 뭐냐? 천국은 영광이 없기 때문에 그 가리개 안에 우리가 포함이 되면 그걸 구원이라. 하나님의 영광, 아들의 영광에 포함이 되면 그게 가리개가 되는데 그 들어가는 방법이 뭐냐? 기름부음 받은 자의 피, 그야말로 영원한 대제사장의 품속에 들어갈 때 그 대제사장이 가리개 역할을 해서 우리는 영원히 영광 중에 살 수가 있는 겁니다.


오늘 공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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