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복된 자리

아빠와 함께 2023. 9. 10. 19:37

복된 자리 

2023년 9월 10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1:1-5

(11: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라 가라사대

(11:2)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고하라

(11:3)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을 좇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11:4)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열조를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11:5) 내가 또 너희 열조에게 한 맹세 곧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한 언약을 이루리라 한 것인데 오늘날이 그것을 증거하느니라 하라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여 가로되 아멘 여호와여 하였노라

언약은 함부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조건을 보면서 주시는 겁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뭐든지 좋은 것이라고 여깁니다. 즉 인간들은 하나님에게 은근히 고대하고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 저를 파멸시켜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뜻은 인간이 원하는 바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 언약과 더불어 저주가 제공됩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언약의 말을 좇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주를 동반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말은 곧 인간이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거절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상대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인간 속에 하나님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주의 이름을 위한 자리’가 저주받을 인간 속에서 만들기 위함입니다. 굳이 인간 속에 하나님 자리를 만드시는 이유는, 인간은 이미 몽땅 저주받아 마땅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주시기 전에 먼저 주변 상황을 저주의 상황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이 저주를 된통으로 당한 민족이 애굽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저주받아 마땅함을 분명코 봤을 겁니다. 즉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예외없이 저주받아야 될 존재’였던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는 저주를 내리시지 않고 특혜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 특혜는 지연되는 특혜입니다. 영원한 특혜는 아닙니다.

복은 저주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기에 주어지는 겁니다. 인간이 있기에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과 동반하기에 주어지는 ‘저주 속에서 만들어지는 자리’입니다. 자리와 동반할 수 없다면 복된 특혜도 언제든지 저주로 바뀝니다. 이스라엘 내의 복된 자리는 출애굽 이후에도 같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자리는 저주를 유발하면서 이어집니다. 이 이어짐의 흐름은 ‘보존’되는 요소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주의 이름 자리’의 보존입니다. 이 보존을 위한 힘은 충돌을 통해서 생깁니다. 물리학에서 ‘작용-반(反)작용’의 법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사람이 벽을 밀면 벽도 반대방향으로 민다는 겁니다.

그래야 힘이 생기는 겁니다. 저주를 이기는 ‘복의 힘’말입니다. 저주가 유발된 상황 안에서만 복이 확인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꾸만 힘센 이방민족과 전쟁을 붙이게 됩니다. 이런 작용을 통해서 언약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을 복되게 하는데 관심두는 자들을 탈락시키게 되는 겁니다.

인간은 마땅히 저주받아야 합니다. 그런 인간이 복을 탐을 내면 아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주받은 이방민족과의 마주침을 통해서 저주와 저주 그 틈 사이에서는 복의 자리를 형성시키십니다. 그 자리는 오로지 ‘하나님의 이름’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이 기대하고 고대하는 바를 접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이 친히 해내시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신약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받지 않고 성경을 보는 것과 성령을 받은 것과 성경을 보는 것이 너무나도 확연해서 대화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성령없이 구약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사 약속의 땅에서 추방되고 난 뒤에도 언젠가는 약속의 땅에 이스라엘을 재집결시킨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령을 통해서 성경을 보게 되면 제 2의 출애굽이 지리상의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 즉 ‘주의 자리’가 이 지상이 아니라 따로 하늘나라를 만들어서 거기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부활의 자리입니다. 성령이 없는 사람들은 어쨌거나 자신이 죽지 않고 어떻게든 자신의 기대를 달성하고 싶어합니다.

즉 자신이 생각한 복된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기를 고대합니다. 그러나 에스겔 37:11-13에서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기대와 소망을 가차없이 묵사발 만들고 맙니다. “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즉 필히 모든 인간은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덤에서 나와야 합니다. 세상 전체가 곧 하나님께서는 거대한 무덤으로 간주하시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되시는 분의 경로를 백성들이 따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죽었다면 성도도 죽어야 하고, 예수님의 부활하셨으면 성도도 부활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령이 없는 사람은 예수님으로 인해 기존 세상 말고 또다른 세계가 마련됨을 알지 못합니다. 이런 예가 누가복음 2:48-49에 나옵니다.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눅 2:48-49)

무덤에서 나오는 자들은 자신이 죽어 마땅한 자로 간주하기에 더는 자기에게 관심두지 않고 언약에 관심두는 사람입니다. 이는 자신이 행함보다 예수님의 행하심이 우선이 되는 산다는 뜻입니다. 죽어도 좋은 나라에 가겠다는 것은 성령없는 자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미 살아서 천국생활을 하는 사람이 바로 성령받은 자입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행 7:55-56) 이처럼 죽기 전부터 이미 천국생활이 개시된 자, 곧 다 이루어진 언약의 힘만 생각하는 자들이 구원받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주가 언약과 동반된 사실을 도리어 반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8강-예레미야 11장 1~5절(복된 자리)230910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1장 1~5절입니다. 구약성경 1067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라 가라사대,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고하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을 좇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열조를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또 너희 열조에게 한 맹세 곧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한 언약을 이루리라 한 것인데 오늘날이 그것을 증거하느니라 하라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여 가로되 아멘 여호와여 하였노라”

여기 언약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약속이죠,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약속들을 많이 합니다만은, 지키라고 맺는 것이 약속인데 지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인간과 인간의 약속도 서로 위반할 수밖에 없다면 하나님과 인간의 약속을 인간들 쪽에서 지킨다는 것을 기대하는 자가 나쁜 거죠.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 3절 끝에 보면 언약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마치 이 언약의 결과 중에서 복과 저주가 있는데 저주를 아주 기정사실화 시킵니다. “이 언약의 말을 좇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언약이 없었으면 저주받고, 저주받게 된다는 이야기도 아예 없었을 건데 언약이 주어짐으로써 내가 생각한 나를 위한 현실과 저주라는 현실이 서로 맞닿게 된 겁니다.

어느 인간이 살아가면서 ‘나, 저주받고 싶어요’라고 할 인간 아무도 없지요. 모든 인간이 생각하는 약속은 ‘나는 저주받을 필요 없어. 나는 저주 안받을 거야’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맺는 약속들입니다. ‘우리 둘이 약속하자’라고 해놓고 약속 안 지키면 우리 저주받기로 그렇게 하지는 않죠. 약속 깨지면 깨지는 거고, 다시 원상복귀 하면 되지 저주까지 나갈 것은 없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저주는 인간이 본래 제 자리를 돌아갈 수가 없고, 오히려 인간의 원래 자리가 저주였다는 것을 밝혀주는 언약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리는 원래 저주였구나. 그런데, 그게 저주인데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약을 주시면서 이 저주가, 이 저주 속에서 유일하게 빼내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저주의 상황을 만들어 놓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저주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고, 그다음에 언약을 주시면서 “이 언약의 말을 좇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라고 하신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이걸 줄여보면 하나님은 저주의 하나님입니다. 지옥의 하나님이시고, 저주의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그 처음의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되려면, 처음 이스라엘이 나올 때 언약을 주셨던 그 저주의 상황이 끊임없이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해야 하고, 같이 움직여 주고, 동반해줘야 해요. 그래야 언약이 사니까요. 만약에 학교 선생님이 학생들보고 숙제 안 해오면 손바닥 맞는다고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숙제라는 것을 몰랐던 그때, 일방적으로 아무나 손바닥을 때려놓고, 그다음에 ‘너는 조건을 줄게. 숙제 지키면 손바닥 안 때릴 게’라는 식으로 선생님께서 그 학생들에게 특혜를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인간의 자율성을 완전히 빼앗는 겁니다.

사람은 인생길을 내가 결정하고 내가 선택하겠다는 겁니다. 자기가 선택하고 결정하면 저주라는 것이 해당되지 않죠. 저주 없이, 애초부터 저주가 없는 그러한 세상을 인간들은 누구나 찾게 됩니다. 누구나 그렇게 결정하게 되어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결혼인데, 결혼이라는 것은 왜 결혼은 결혼이 아니었음을 아는 그런 상황 속에 몰아넣는 것이 결혼입니다.

결혼하기 전에 사람들이 생각한 것이 있잖아요. ‘나는 결혼해서 꼭 저주받을 거야. 암, 저주받고말고. 내가 저주받는 방법은 결혼이야’라고 하면서 결혼한 사람은 없습니다. 결혼하면서 저주를 생각하고 결혼한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결혼한 뒤에 문제 있으면 ‘혼자 살걸’하는 마음이 생기죠. 그러면 애초에 결혼할 때, 결혼을 위해서 결혼한 적이 없고 나를 위해서, 내가 더 행복하기 위해서 결혼한 바가 되는 거예요.

어디까지나 일방적인 주장이고 생각입니다. 그래서 결혼이라는 것은 결혼을 계속 유지하면서 얼마나 나 일방적인가를 혹독하게 체험하는 그 관계가 결혼 관계예요. 결혼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게 끝까지 자기 자신을 안 버리죠. 못 버리는 겁니다. 자기를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말이 있어요. 물리학에 나온 말인데, ‘보존이 없으면 흐름이 없다’ 보존하는 것이 없으면 파동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뜻이죠.

나를 지켜내야 비로소 내가 이겨내는 내 인생이 거기서부터 나오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내 인생이라는 것이 성립되려면 끝까지 나는 부서지지 않고 모여져야 한다는 겁니다. 내 것이 하나라도 손상되면 안 된다고 이렇게 주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나를 지켜서 보존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역시 물리학에서 나오는 이론인데요. 작용과 반작용입니다. 일반 사람들이 들으면 이상한 말인데요.

‘내가 벽을 밀면 벽이 나를 민다’가 됩니다. 살아있는 우리가 벽을 민다는 것은 알겠는데 생명이 없는 벽이 나를 민다고 하면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죠. 내가 벽을 밀지 아니하면, 벽이 나를 밀지 아니하면 여기서 힘이라는 것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게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라는 건데 힘이라는 것은 반드시 충돌을 통해서 힘이 생깁니다. 충돌을 통해서.

충돌을 계속해서 맞닥뜨리면서 내가 누구이고 내가 어디까지 나를 규합할 수 있는가를 계속 내가 작업할 수가 있어요. 이게 인간입니다. 인간이 결혼하든, 배우자를 만나든, 자식을 키우든, 하여튼 인간은 누구를 만나게 되어있는데, 그 만나는 목적이 나를 더욱 단단히 하기 위해서 만나는 거예요. 보존해야 하니까. 보존해야 내 인생이라는 것이 뭔가 하나의 결과물로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어떤 사람이 ‘네 인생은 그동안 어떻게 살았어?’라고 물으면 ‘뭐, 중구난방이지. 내 인생이 어디 있어. 다 깨졌지’라고 대답하면 이건 내 것이 없잖아요.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 충돌하면서, 어떻게 인생을 힘들게 살아가면서, 작용과 반작용을 통해서 남과 만나면서 나에게 힘을 비축하는 거예요. 사기꾼이 전세 사기를 치면서 자기 재산을 모을 수 있는 것처럼요.

그것은 사기 치는 거라고 하지만 어디 사기 안 치고 살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이 나를 보존하고 힘을 모으기 위해서, 끊임없이 우리는 타인과 부딪히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도 아시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스라엘 되게 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이방민족과의 전쟁을 시켜요. 전쟁을. 그러니까 언약이 그냥 언약이 아니고 언약 없는 민족과 마주치면서 하나님 쪽으로 나가는 출구와 하나님 쪽에서 안 받아주는 출구와의 차이점을 보게 하는 거예요.

언약을 주신 분 쪽으로, 낚시하듯이 언약을 주신 분이 당겨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스라엘은 언약 없는 사람들이 왜 저주받는가를 그들이 실제로 경험해주어야 해요. 그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의도적으로 힘센 이방 나라와 자꾸 경쟁하게 되어있어요, 전쟁하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어떤 반발이 오게 되어있느냐 하면 이스라엘 내부에서 충돌이 일어나는 거예요.

‘힘도 없는 주제에 무슨 힘 있는 나라와 싸우느냐. 이건 무리한 짓이다’라는 쪽이 있는 반면에, 이건 붕괴될 이스라엘이죠. 하지만 이번 거사를 하게 하신 것은 우리가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언약 되게, 그 현장에서 드러내서 의도적으로 충돌하게 했다는 쪽은 끝까지 언약을 신뢰하는 사람이에요. 언약을 믿는 사람이죠. 갈렙과 여호수아예요.

여기 5절에 보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나오죠. 4절 끝부분부터 보면 “나의 모든 명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라고 하시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케이, 하나님 인정합니다’라고 해도 그 인정하는 거 하나님이 안 받습니다. “네가 인정하고 안 하고는 나는 모르겠고, 내가 내 백성 되고 내가 하나님 됨을 친히 보여 주겠다”라고 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광야로 통과하게 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거하는 본토에 강력한 군대와 아무 힘도 없는 이스라엘과 전쟁에 나서게 만들죠.

그러면 이건 어디까지나 언약을 주신 하나님 본인의 일을 위해 이스라엘을 그냥 다루시는 거죠. 이스라엘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것도 아주 숫자가 없고 약한 이스라엘을 가지고 이 세상 나라에, 저주받는 나라에 보내는 겁니다. 그러면 그 가운데서 복을 받고자 하는 이스라엘 나라가 결국 그들도 나중에는 지쳐서 하나님을 배신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그거예요. “모든 인간아 좀 배신해라. 다 배신해버려라. 떠나버려라.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다. 맞다. 하지만 내 아들은 집단이 아니고 오직 한 사람만이 내 아들인 것을 들춰내기 위해서 여러 다수의 사람을 붙여놓고 다 떨어뜨리는 거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사람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홀로 뭐 하느냐. 홀로 언약을 이루죠. 홀로 언약을 이루면 결과가 뭐냐. 모든 자가, 결국 이스라엘마저 저주받아 마땅한 저주의 바닥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주시고 그러면 언약에 의하면 복을 받는다는데, 복은 어디 있느냐. 그 충돌 사이에서 만들어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설교에 들어갑니다.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하나님께서 언약을 줄 때는 ‘너는 이렇게 살아라’가 아니라 ‘네 자리가 원래 네 자리가 아니고 언약의 자리야. 언약의 자리에 네가 끼어든 거야’라는 것을, 그 본질을 들춰내기 위해서 이스라엘과 함께 언약을 준 거예요.

인간은 ‘나는 내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내가 남의 자리를 깔고 앉았다면 내 방석도 아닌데 남의 방석을 깔고 앉았다는 생각을 인간은 못 합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의 자리를 이스라엘은 미리 깔고 앉았는데 이스라엘은 그것도 모르고 이것이 자기를 위한 자리라고 오해한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의 이름을 위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데, 주의 이름이 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있는 주의 이름, 그것을 성소라고 하고 성전이라고 하는 거예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영원토록 성전이 세워지는 곳이에요. 성전은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젖과 꿀이 흐르면 내가 얼마나 행복하고 내가 얼마나 풍요할지 신나 하면서 그것이 마땅히 자기에게 오는 거라고 생각 하는 겁니다. 주님의 자리가 있고 주님의 자리에 합류된 자에게만 젖과 꿀이 흐르고 복이 주어지는 거예요. 인간은 뭘 모르느냐 하면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언약을 방석이라고 봅시다.

이 방석은 내가 앉을 자리가 아니고 주님이 앉을 자리예요. 그러면 우리가 그 방석을 깔고 앉는다는 말은 황공스러운 거고,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거죠. 나에게 안 맞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우리는 어디에 맞느냐. 저주가 딱 우리에게 맞아요. 저주 속에서 복을 끄집어낼 때, 그 복이 어디 있느냐. ‘나’라는 저주와 주님이라는 복과 견주면서 복을 복대로 증거 하고 감사하는 거예요.

내가 아이들 둘 낳고 산다는 이 자리가 주님의 자리란 말이죠. 그런데 이걸 내 자리로 여기는 거예요. 그리고 아침에 이야기했던 판돈, ‘이 정도면 밥 먹고 사는데 실실 교회나 다니고 하면 되고’ 그 ‘실실’이 실실 웃다가 실실 가는 수가 있어요. 무슨 판돈이 있어요? 나를 위한 돈은 없어요. 주어진 모든 돈이나, 직장이나, 심지어 목숨까지 주를 위한 겁니다. 나를 위함이 아니고.

이 과정을 하나님의 언약이, 죽어도 말 안 듣는 이스라엘, 그 말 안 듣는 이스라엘 가지고 주님께서는 어떻게 끝까지 그들을 언약 백성으로 만들어내는가. 그게 에스겔에 나옵니다. 에스겔 보기 전에 여기서 오늘 본문에 다시 보게 되면, 여기 4절에 나와요.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열조를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던 날에” 애굽 땅에서 이끌었어요. 애굽 땅. 지리적으로 평면적으로.

애굽 땅에서 끄집어낸 거예요. 그래서 예레미야를 보는 사람들은 애굽 땅에서 끄집어냈으니까, 그래서 가나안 땅, 약속의 땅에 들어갔기 때문에 장차 하나님께서는 각기 다른 나라로 흩어져도 그들로 하여금 다시 옛날 애굽에서 건져내듯이 각 애굽에서 약속의 땅에 오게 할 것이다. 이스라엘 땅에 오게 하고 거기에 성전을 세울 것이다. 사람들은 문자적으로 보고, 다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면 주의 일이 하시는 일은 날아가 버렸어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취지는 없는 겁니다. 미리 생각하는 우리의 희망, 우리의 기대감, 이거는 성령 받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거죠. 성령 받지 않은 사람들의 성경 해석과 성령 받은 사람의 성경 해석이 어떻게 다르냐.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성경을 보고, 현재 내가 원하는 것을 주께서 어떻게 채워주실 것인가. 이건 성령 없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예요.

그러면 성령 있는 사람은 어떻게 출애굽을 생각하느냐. 제2의 출애굽을. 에스겔 37장 11절에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그때 12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무덤을 열고 나오는 거예요. 무덤.

성경을 제대로 보면 성경이 미쳤어요. 정말. 내가 아는 지혜와 내가 아는 지식으로 성경을 본다는 것은 성령 없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에요. 무덤을 열고 나오려면 나는 말라 비틀어져야 하고, 소망이 없고, 멸절되어야 해요. 멸절된다는 이야기예요. 언약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말은 네가 말라 비틀어져 죽더라도, 객사하더라도, 너는 어차피 저주받을 자니까 끽소리 말라는 것이 성경 이야기예요.

이게 성경 이야기예요. 뭐 성경 보고, 기도하면 어떤 거 주실랍니까. 그건 성령 안 받은 사람이나 그런 소리 많이 하라고 하세요. 이것이 예수님 가족에게도 이러한 균열이 발생한 겁니다. 누가복음 2장 48절에 보면 축제 때, 예루살렘 유월절 때,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과 가족끼리 유월절 참석하려고 모였어요. 그날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모였어요. 어떤 서적에는 100만 명 모였다고 하는데 엄청나지요.

아버지 요셉이 어린 예수님을 잃어버렸어요. 잃어버렸는데 며칠 찾았는가. 사흘 동안 찾았어요. 사흘 뒤에 동행중에 있는 줄 알고 한동안 가다가 하루 지나고 난 뒤에 보니까 예수님을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다시 예루살렘에 가서 사흘 동안 찾았어요. 그러니까 총 나흘을 허비했어요. 참, 아버지들이 자기 자식 생각해 보세요. 가슴이 타들어 가죠. ‘내가 그동안 왜 살았느냐. 그 아이 없이 무슨 낙으로 사냐. 차라리 내가 죽는 것이 낫지’라는 온갖 생각 다 드는데 어떻게 해서 찾았어요.

찾고 난 뒤에 아버지가 화가 난 것을 억누르면서 좀 많이 나무랐지요.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라고 고함을 질렀겠죠.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라고 화를 내니까 49절에서 도리어 예수님이 부모님에게 화를 냅니다.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지금 누구의 화가 정당하죠.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이게 무슨 생뚱 맞는 이야기입니까, 이게. 예수님은 지금 성령과 함께 있고, 아버지는 성령 없이 세상을 보고,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아버지를 보면서 “내가 아버지 집에 있는 것을 당연히 아셔야죠. 아버지는 나랑 있으면서 그동안 무슨 공부 했습니까”라는 것과 똑같은 거죠.

성령 받지 않은 입장에서는 도대체 대화가 안 됩니다.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어요. 무슨 말인지를. 에스겔에서 말하기를 “이스라엘, 다시 출애굽 할 때”라고 하시니까 백성들이 “아이고, 고맙습니다. 우리가 이집트에 멀리 있다가도 이스라엘 땅에 다시 모이겠죠”라고 하는데, “아니야. 그거 아니야. 이 세상은 저주받은 세상이야.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라고 나오신다고요.

주님 계신 곳이 천국이니까, 주께서 죽었다가 부활했잖아요. 그러면 우리를 죽여서 부활한 나라에서 우리를 다시 만나잖아요. 이 땅에 희망은 끊고요. 이 땅에 희망 끊으세요. 내년 대선 할 때 국민의 힘과 민주당 누가 많으냐는 그런 거는 희망 끊으세요. 북한의 핵 포기도 희망 끊으세요. 지금 그런 것에 신경 쓸 것이 아니에요. 교회 다닌 인간이나 안 다닌 인간이나 다 죽어야 합니다.

어떻게 죽든, 암 걸려 죽든, 다 죽어야 해요. 일단 죽고 보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나오는 이야기가 ‘죽었는데 안 살려주면 어떻게 합니까’ 죽었는데 안 살려주면 약속 파투나는 건데. 나는 믿고 싶은데 죽고 나서 안 살려주면 어떻게 하느냐. 어떤 정신병자가 닭이 자꾸 자기가 옥수수인 줄 알고 따라온다는 거예요. 그래서 정신병 치료받고 난 뒤에 ‘이제 당신은 옥수수가 아니고 사람입니다’라고 의사가 말하니까 그 정신병자가 ‘저는 제가 사람인 줄 믿습니다만 닭이 저를 계속 옥수수로 생각하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죽여놨는데 약속에 의하면 부활한다고 했는데 부활 안 해주면 어떻게 할 거냐는 거죠. 안 해주면. 걱정이 늘어지는 거예요. 사도행전 7장에 나옵니다. 거기에 스데반 집사가 나오는데, 55절에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성령이 충만했어요. 성령이 충만했다는 것은 오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자기에게 관심이 없는 겁니다. 자기를 안 찾아요.

난 뭔데. 나 죽을 인간인데 뭘 찾습니까. 내가 뭘 해보겠다? 내가 그걸 안 믿어요. 인간이 성령 받으면 본인이 하는 것에 대해서 본인이 믿지를 않습니다. 자기 희망과 기대를 믿지 않습니다. 왜? 나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저주받을 인간에게서 나온 것을 저주받을 인간이 왜 거기에 기대를 겁니까? 언약에 의하면 우리는 저주받을 사람이에요. 언약 때문에 우리는 복 받은 겁니다.

그렇다면 저주받을 나에게는 신경 쓰지 말아야죠.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았느냐’라고 예수님의 아버지처럼 그렇게 걱정하면 안 되죠. 예수님은 예수님 알아서 하는 거예요. 언약은 언약이 알아서 하는 거예요. 스데반 집사는 이미 천국 생활을 한 겁니다. 죽기 전에 이미 천국 생활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죽고 난 뒤에 천국 생활하는 사람은 그건 아니에요.

이미 이 땅에 살아있으면서, 나 아니야, 나 행한 거 안 믿어. 주님의 행하심만 믿는 사람, 그것만 관심 있는 사람, 죽어도 사는 겁니다. 왜냐 하면 이건 내가 보더라도 내가 생각한 내가 아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자아가 있어서 내가 행한 것만, 그것만 기억하고, 그것만 붙들고, 자기 잘난 체하고 자기를 지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있는 사람은 본인이 놀라요.

나도 다른 사람처럼 그렇게 되는 것이 마땅한데 왜 내가 행하지 않는 주님의 죽으심과 죄사함에 대해서 내가 왜 그렇게 신경을 쓰고 있습니까? 심지어 내 목숨보다, 내 가족보다 그게 더 중요해져요.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합니까? 스데반 집사거든요. 성령이 함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언약 탓이고 언약 때문에 여러분은 죽어도 다시 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도저히 통할 수 없는 이야기, 알아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실망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심지어 우리 자신에게도 늘 실망하는 그런 복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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