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복음 폭탄

아빠와 함께 2023. 9. 20. 08:53

언약 파기

2023년 9월 17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1:9-12

(11:9)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 중에 반역이 있도다

(11:10) 그들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한 자기들의 선조의 죄악에 돌아가서 다른 신들을 좇아 섬겼은즉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 내가 그 열조와 맺은 언약을 파하였도다

(11:11)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 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

(11:12)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민이 그 분향하는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을지라도 그 신들이 그 곤액 중에서 절대로 그들을 구원치 못하리라

예루살렘이 곤란에 처해있습니다. 백성들이 잡혀가고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그 재앙이 닥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하나님께 원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언약을 파기한 징벌로서 여전히 충분치 않다”입니다. 그 정도로 언약 속에서 엄청난 가치를 품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한 자로 규정받는 이유는, 언약의 가치와 비중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애쓰고 수고한 가치보다 더 큰 가치가 없다고 여기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 본능 같은 겁니다. 이 세상 삶이 인간으로 극한으로 몰아넣습니다.

이게 사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경계가 모호할 지경으로 가면서 기어이 살아남고자 하는 이유는, 여전히 놓치지 못할 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본인의 가치입니다. 본인이 본인을 지키는 것을 타고난 충동같은 겁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실 때에는 다음의 두 가치 원칙이 동반되고 있습니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 19:4) 원칙 하나는, 독수리 날개로 업어 옮겼다는 겁니다. 아무리 애굽 사람들이 노예 생활하고 힘든 여행을 했더라도 구원은 하나님의 보내신 독수리 날래로만 성사되었다는 겁니다.

또 다른 원칙은 ‘내게로’ 곧 ‘하나님 자신에게로 자기 백성을 모집’하신다는 겁니다. 이는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 나름대의 목표나 노림수는 사그리 삭제시킨다는 것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멀쩡하게 천국가고 싶어합니다. 이 땅에서도 멀쩡하게 천국갈 때도 멀쩡하게 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기대한 자신의 이상향이 기다리는 쪽으로 가겠다는 의지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다치지 않고 온전한 바로 거기에 하나님께 같이 있어주었으면 하고 기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생각해서 나온 생각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성을 키우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겁니다.

첫째 원칙에서, ‘독수리 날개로 업어’ 구원하는 방식은 인간들이 각자 못놓고 있는 자기 가치에 대한 전면적인 묵살이요 거부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나도 일방적이어야 하기에 조금이라도 인간의 가치가 섞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평소에 인간은 한시도 자기 가치를 놓치고 살지를 않습니다.

예를 들면, 어려움에 처한 이웃에 대해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 상대의 상실을 자신의 도움으로 메울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결코 무가치하거나 무의미한 존재가 아님이 확인됩니다. 자신이 살만한 보람을 접하게 됩니다. 당연히 독수리 날개는 없어지고 날아가버리고 맙니다.

이처럼 우상숭배, 혹은 언약파기란, 결코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사투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고 고대하는 상황이란 독수리 날개의 투입과 일방적 조치를 이해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꾸만 자기에게 있는 것,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으로 내놓고 그 제시를 의미있는 받아달라는 식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내놓을 수 있는 것만 내놓을 수있다는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면 난감하고 자신이 내놓은 것을 하나님께서 거부하면 그다음 방안이 없어지는 겁니다. 평소에 대인관계에서도 이런 식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살피고 살아온 겁니다.

자기 것을 내놓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 내놓을 때, 자신의 가치가 따로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고 자부합니다. 이처럼 구약은 절망적입니다. 하지만 신약에 오면 비로소 하나님의 언약의 취지가 더욱 명백해집니다. 그것은 신약시대에 와서 비로소 세상 사정이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악마가 세상을 어떤 식으로 장악하는지 그 방식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활동 방식은 악마가 인간을 장악하는 방식과 형식으로 그대로 사용하십니다. 악마는 인간 내부를 통제합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그 통제자가 악마가 아니라 본인이라고 여깁니다. 이는 곧 인간은 자신이 자신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로 간주한다는 겁니다.

신약에 와서 이 세상은 ‘악마’라는 종교적 개념은 옅어지고 사라지고 인간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인간들에 의해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이라고 믿게 되어 있습니다. 보육하고, 교육하고 훈육합니다. 돌보고 가르치고 때립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의 인간에 의해 양육 이외에 그 어떤 양육도 부정하는 분위기를 조성해놓았습니다.

현대에 와서 인간들은 매사에 악마 탓을 하지를 않습니다. 자기 탓 아니면 남의 탓입니다. 자체적으로 모든 난관을 극복하므로서 형편이 어렵거나 나아지더라도 모두 다 인간의 덕으로 여길 마음의 준비가 된 상태에서 살아갑니다. 즉 ‘나에게’로 모든 의미가 쏟아져들어오기를 원하는 겁니다. 이는 곧 인간의 악마의 위세에서 빠져나갈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래도 좋다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 다른 가능성은 없다는 겁니다.

자율적으로 사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깁니다. 독수리 날개로 업어 온 것을 금방 다 잊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신약에 들어서서 하나님의 대처방식은 ‘남의 구원’을 제공하는 겁니다. 곧 예수님의 구원을 주시는 겁니다. 인간들은 내부적으로 이물질에 대해서 강력하거 거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은 이것은 숨어 있는 악마의 본심입니다. 잘난 인간 놔두고 왜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다는 식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

인간 내부의 악마의 방해를 부수고 들어오는 방법은 ‘창세 전의 계획’입니다. 일종의 금수저 같은 대우를 받으면서 비로소 성도는 주님에게로 갈 수가 있습니다. 창세 전의 복음의 위력은 폭탄이 되고, 자기 가치를 지키려는 모든 것들을 폭파시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이제 저를 안 살려주어도 상관없어요. 주님”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의 내세우는 것과 하나님께 주시는 것에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9강-예레미야 11장 9~12절(복음 폭탄)230917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1장 9~12절입니다. 구약성경 1067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 중에 반역이 있도다, 그들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한 자기들의 선조의 죄악에 돌아가서 다른 신들을 좇아 섬겼은 즉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 내가 그 열조와 맺은 언약을 파하였도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민이 그 분향하는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을찌라도 그 신들이 그 곤액 중에서 절대로 그들을 구원치 못하리라”

여기 오늘 본문에 “언약을 파했다”라고 되어있고 언약을 파한 결과가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성읍이 큰 곤란에 처해 지고 낭패에 처해 지는 그런 결과가 벌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언약을 파했는가.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죠. 여기서는 다른 신을 섬겼다고 나오는데, 왜 다른 신을 섬기는가.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 언약의 가치를 무시해서 그래요.

내가 할 수 있는 거, 내가 내놓을 수 있는 것이 귀하냐, 아니면 하나님 쪽에서 주신 것이 귀하냐. 그 두 개를 놓고 인간은 자기가 내놓은 것을 더 귀하게 여기는 순간 그 사람은 우상 숭배자입니다. 하나님의 가치가 내가 내놓을 수 있는 것으로 인해, 우습게 보고 하찮게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에서 더 나아가서 내가 여기에 딱하니 존재한다는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 일에 방해물로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통해서 그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름대로 생각할 거예요. ‘우리도 고생깨나 했습니다. 애굽에서 노예 생활한다고 힘들었습니다’라고 주장을 했을 것인데, ‘그 힘든 가운데서도 언약을 믿는 것이 얼마나 착하고 대견한 일입니까. 우리의 그런 성의를 좀 알아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우리는 군지렁거릴 수 있지만 출애굽기 19장 4절에 보면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여기에 독수리 날개가 등장합니다. 독수리 날개 위에, 남성만 60만을 다 태워서 옮겼다는 거예요. 독수리 날개라 하는 것은 두 개도 아니고 세 개도 아니고 단 하나의 날개에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다 실을 수가 있었던 겁니다. 그런 큰 독수리가 어디 있느냐고 하시겠지만, 주님께서 독수리라면 독수리죠. 주님께서 독수리라고 언급하신 것은 너희들이 고생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나름 애썼다고 그것이 하나님께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니고 관심사가 일방적 구원입니다.

독수리 날개에 실었다는 것은 일방적 구원이죠. 너희들이 움직였다는 것이 아니고 독수리가 움직였다는 겁니다. 너희들이 움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부지런 떨어서 구원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너희들 부지런 떤 것만 자꾸 기억하고 그것만 생각하니까 그게 결국 우상 숭배로 이어질 수밖에 없어요. 내가 행한 가치, 그것을 어디서 찾는가. 그건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행한 것은 찾지 말아야 해요. 자꾸 내가 행한 걸 생각하니까, 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이 파기되는 겁니다. 하찮게 여기는 거죠. 첫 번째는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노고와 수고를 고려치 않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수고에 의해서 단체로 움직였다는 거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그 방향 지점, 도착지점입니다. 출애굽기 19장 4절에 다시 보면 “그들을 내게로” 인도하셨다고 나옵니다.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하나님이 하나님께로 인도한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께로 인도되는 것을 원한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자기가 원하는 구원, 행복, 축복, 영원한 복락, 영생, 그것이 내게로 임하기를 바랐던 겁니다. 그러니 이건 핀트가 안 맞죠.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이 두 가지가 새록새록 들춰져야 하죠. 첫째는 ‘내가 애써서 된 것이 아니구나’이고 두 번째는 구원의 목적이 내게로 오는 것이 아니고 나를 도리어 주님에게로 강제로 끌고 간다는 사실.

이 두 가지 사실을 놓쳐버리면 당연히 언약이 파기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러한 점을 분명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바로 인간은 자기에게 있는 것 외에는 내놓을 것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상당히 어려운 문제예요. 왜냐 하면 대인관계, 남과의 관계에 있어서 남이 찾아왔다면 ‘우리 집에는 커피 외에는 내놓을 게 없네요’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상대방이 복음 아는 사람이라면 ‘안 내놓아도 괜찮아요. 주께서 만나게 해준 이것만도 충분합니다’라고 되는 거죠. 그러면 자기 것만 내놓으려고 하는 사람은 속으로 뭐라고 하겠습니까? ‘되게 믿음 있는 척하고 있네. 굳이 그런 말 안 해도 되는데’라고 하겠죠. 여기서 다르게 이야기를 해보면 이렇습니다. 인간의 본능은 방어본능이다.

내 것 지키기 위한 방어본능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떤 사람은 충동이라고 했는데, 충동 앞에 뭔가를 붙이죠. ‘죽음 충동’ 죽고자 하는 충동이 아니고 죽을까 해서 방어하는 충동. 죽으면 안 되니까 본능적으로 커버하는 충동. 죽음을 전제로 해서, 의식해서, 나오는 행동들. 인간의 행동은 모조리 죽음 충동이다. 그 사람은 두 가지를 말했어요.

인간의 행동은 방어용으로 나오는 행동과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새로운 쾌락을 추구하는 쾌락 충동. 그래서 프로이트(S. Freud, 1856~1939-오스트리아의 신경과 의사, 정신분석의 창시자)라는 사람이 이렇게 충동을 두 가지로 본 거예요. 이 두 가지 충동을 합치면 이렇습니다. 내 것을 지키려는 본능 충동.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은 독수리 날개로 이야기했다고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독수리 날개로 업었다고 하면, 그 성경을 보면서도 ‘역시 하나님은 사람을 볼 줄 아시는군. 나를 건지기 위해서 주께서 독수리 날개를 동원했구나’라고 해석을 해버려요. 그러나 그 해석 가운데 뭐가 빠졌느냐 하면, 주께로 인도한다는 것이 빠져버리고 나의 멀쩡함 그대로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거예요. 나의 멀쩡함, 나의 잘남, 나의 우수함, 이것이 손상되지 않은 상태에서 당당하게 천국 들어가려고 하는 겁니다.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의도적으로 피하거든요. 인간의 본능, 충동, 내 것 위주라는 것을 피하면서 구원하는데, 인간들은 ‘그것참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이네. 내 것을 지켜주는 것은 오직 복음밖에 없다’라고 이러면서 교회 나와서 복음 믿는다고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자기가 다칠 생각을 하지 않는 겁니다. 이것이 일상의 행동 가운데서 그대로 나옵니다.

사람이 누구를 만날 때, 상대방에게 무엇을 찾느냐 하면 상대방의 모자란 것, 부족한 거, 결핍된 것을 찾아요. 상실된 것을. 그걸 나의 것으로 채워줌으로써 고상한 나로 복귀를 시도하는 겁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게 안양 강의할 때 초반부에 나오는 내용이에요. 나의 가치, 나의 나다움을 타인을 만나서 그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거예요.

‘어디가 아파요? 부족해요? 기도해드릴까요?’라는 이게 뭐냐 하면 당신이 아프면 우리가 기도해 준다는 거죠. 이게 뭐냐 하면 내가 당신이 없는 건강을 내가 기도해서 채워줌으로써 나는 여전히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자부하면서 상대에게 그런 제안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바로 그것이 언약의 두 원칙에 의하면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미움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겠다는데, 왜 주님은 나를 개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구원하십니까? 일방적으로.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아, 일방적으로 구원하시는 것은 구원받고 난 뒤에 사람 도리 하라고 일방적으로 구원했구나’라고 해석을 해버려요. 그러면 천국 가는데 자기는 점점 더 멀쩡하게 되고 대단한 존재가 되면서 천국 가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내게 있는 것, 그것이 계속 내 안에 유지가 됩니다. 참, 이것은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찬송가 가사를 한 번 읽어드릴 테니까 이것이 얼마나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지 실감해보시기 바랍니다. 옛날 찬송가 307장입니다. 3절 보겠습니다.

너희들은 세상에서 무엇 먹고 마시며

무슨 옷을 입고 살까 염려하지 말아라

이는 이방 사람들이 간구하는 것이요

너희 하늘 아버지는 너희 쓸 것 아신다

얼른 들으면 순간 기쁨이 샘솟아요. 얼른, 후딱 들으면 고맙고 감사 하죠. 가만히 보게 되면 이것은 평소에 우리가 노력하고 애쓴 것을 완전히 짓밟아 버립니다. 네가 노력함으로써 너의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강화되고 증강되는 거예요. 내가 노력하고 애쓴 만큼.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살까 염려하지 마. 그것은 이방 사람들이나 하는 짓거리잖아”라고 주님께서 쑥 내밀고 들어오셨단 말이죠.

그러면 스스로 자기를 천국 가는 사람이라고 간주한다면, 거기에 조건을 재구성해보는 거예요. 이게 이방 사람이고, 나는 천국 가는 사람이라면 내가 천국 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조건은 뭐냐. 무엇을 입을지 먹을지를 가지고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 될 때 천국 간다는 이야기거든요. 내가 염려하지 않을 때. 이것은 이 땅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내 모습에 대한 나의 파기입니다.

내가 무너지고 부서지는 거예요. 노력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염려하지 않는 거예요. 열심히 직장 생활하고 열심히 하면서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염려하지 않고 직장 생활하고 출퇴근한다고 했을 경우에 현재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조건은 월수입이 가만히 있어도 1억 5천만 원 들어오고 집에 자산이 적어도 130억 정도는 있으면 우리는 염려 없이 놀이 삼아 일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 별거 아니잖아요. 그 정도 될 때 염려 안 하죠.

그런데 집에 돈 한 푼 없고 나갈 돈 많을 때, 직장 생활한다면 ‘나 염려 안 해’라는 이게 될까요, 안 될까요? 결국은 돈 130억 있으면 천국 가고, 없으면 모조리 다 지옥 가는 사람으로 들통나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그런 말씀을 주시는가. 네가 멀쩡한 채로 천국 못 간다는 거예요. 천국은 멀쩡한 사람을 받아들이는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죄인 된 자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본성은 분노와 화, 울분, 원통, 이런 것으로 무장되어 있어서, 비록 나는 뭔가 스스로 보기에 완전치 않지만 내가 너에게는 이 자리에서 한 십만 원 정도는 되돌려 받지 않고 줄 수 있다는 동정심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방어하고, 약간 이나마 남아있는 자기의 가치를 지켜보려는 그런 심보로써 교회 나오고 신앙생활 할 때 이건 자기 안에 언약이 없는 겁니다. 언약이 파기된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예레미야가 뭐냐 하면 구약이에요. 제가 항상 예레미야 설교하면서 이게 구약이라는 점을 상기시켜 드리고 있습니다. 구약은 언약과 인간이 매치가 안 됩니다. 만나질 수가 없어요. 안 만나집니다. 왜냐 하면 내게 있는 것, 그것 외에는 내가 내놓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여, 제가 하나님을 위해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

“그래? 내놔봐” ‘이게 제 충성입니다’ “이거 어디서 온 거야?” ‘제게 있는 겁니다’ “안 받아” 내게 있는 것을 드리기 때문에 주께서는 안 받고, 따라서 하나님 언약의 말씀은 네 것 안 받고 나 있는 곳에, 언약을 주신 분에게로 인도하겠다는데, 인간은 계속 자기 포기가 안 되고 자기 파괴가 안 되는 거예요. 이게 참 보통 문제가 아니죠. 그러면 신약으로 넘어와야죠.

구약에서 시작해서 신약으로 넘어옵니다. 신약에는 문제가 풀립니다. 구약을 통해서 문제가 뭔지를 먼저 알아야 해요. 왜 우리 선배 이스라엘은 망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해요. 구약 보면서 그것을 알라고 주께서 구약을 주신 겁니다. 안 돼요. 인간은 누가 와도 안 돼요. 파괴되지 않고, 노골적으로 말하면 자기 자신이 죽지 않고 가는 천국은 없습니다.

그러면 신약에서는 뭘 주느냐. 신약은 어떻게 하는가. 내 것이 아닌 것을 줘요. 주께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신약에 와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안에 넣어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내가 하지 않은 내 것이 들어오면요, 그 이질감에 거부반응이 일어나요. 가을철 되면 한참 알레르기가 난리도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집사님이 알레르기약을 주셔서 그걸 하루에 코안에 칙칙 두 번씩 뿌리는데, 거의 10년도 더 되었어요.

그런데 그걸 어떤 분에게 뿌리라고 하니까 이질감이 들어서 싫다는 거예요. 이물질. 이질감. 이게 뭔 뜻이에요. 내 것 아닌 외부 것이 들어올 때는 본능적으로, 자기방어적으로, 충동적으로 거부하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신약 이야기로 들어가면 구약 때는 언약이 파기되었다는 것으로 끝났잖아요. ‘나 방어할래. 하나님으로부터 나 안 다칠래’라는 이것 때문에 파기가 되었잖아요.

신약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나갑니다. 인간세계는 자체적으로 보육과 교육과 훈육으로 스스로 돌아가는 세상이라는 겁니다. 어렵지요. 보육은 보호하는 거예요. 교육은 모르는 것을 가르치는 거예요. 훈육은 말 안 들으면 때리는 것이 훈육입니다. 보육과 훈육과 교육. 이것들을 한꺼번에 해서 양육이라고 합니다. 이걸 누가 와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신약에 와서 이 세상의 시스템은요, 악마가 자기는 빠지고 인간들에 의해서 스스로 보육하고 교육하고 훈육하는 식으로 서로가 자체적으로 자기를 가르치는 시스템을 작동시킨 거예요.

누가? 마귀가. 유대교가 그렇거든요. 내가 성경 보고 내가 스스로 훈육하고 양육하고 교육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올바른 사람 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뭘 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열심히 노력했다는 것을 하나님께 갖다 바치고자 나는 천국에 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만큼 하나님에게 열심히 했으니까. 그런데 제가 아까 뭐라고 했던가요?

신약에서는 내가 만든 것 아닌, 내 것 아닌 것을 주신다고 했죠. 그걸 인간들은 차버렸어요. 예수님이 대체하는 거, 우리를 대신해서 들어와 주신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자기가 마귀인 것을 몰랐는데, 자기 안에 마귀 사는 것을 알게 되죠. 이게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주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여러분이 물으시면 주께서 일하시는 형식이 뭐냐. 악마가 인간과 결합된 형식을 그대로 빌려와서 그 양식을 가지고 일하십니다.

악마와 인간과 한쪽은 마음속으로 지시하고 인간은 대행체로 설치고 있죠. 그러면서도 뒤에 배후가 누구인 줄 모르고 이것은 내 의지와 내 이성으로 알아서 스스로 나는 이만큼 자제하고 절제하며 훈련하고 양육한다는 거예요. 늘 성경 보면서. 유대인들이 그랬어요. 유대인들은 늘 구약성경 보면서 말씀이 내 속에 삶이 되고 양식이 되기 위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머리에 신명기를 써서 달고 다닐 정도로 열심히 했어요. 움직이는 성경이 되기 위해 애썼어요.

마귀는 뒤에서 팔짱 끼고 있죠. 알아서 잘 돌아가니까. 스스로 자기에게 가르치고, 나무라고, 훈계하고, 심판하고, 정죄하고, 흠집 찾아내고, 자기를 징벌하고,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 되고, 검사되고, 판사 되고, 수사관 되고 하는 거죠. 신약에서는 악마의 정체가 그렇게 노골화되는 겁니다. 그 결과가 뭐냐. 거저 주겠다는데 열두 제자부터 해서 전부다 ‘노(No)~’라고 거부한 거예요.

그러니 이것은 아까 기도할 때도 이야기했지만, 온 천하보다 귀한 것이 생명이에요. 하지만 우리는 그 생명 원치 않습니다. 마귀의 사주를 받고 있기 때문에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흠집나지 않는 거예요. 내가 부정적 평가받는 거, 나 자체적으로 허물어지는 거, 이거 못 참습니다. 신약에 와서 들통나죠.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나를 만드신 하나님이 아니고 그 지음 받은 내가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다는 겁니다.

그건 자식들 보면 알 수 있잖아요. ‘엄마, 낳아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해놓고 사실은 그렇게 말한 자기 자신이 소중하잖아요. 이건 말릴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내 것이 아닌 걸 구원해주실 때, 그걸 받아드릴 수 있는 역량이나 방법은 막혀있죠. 내가 스스로 자기를 훌륭한 사람으로 교육해놓고 그 교육해놓은 것이 내 안에 꽉 차 있거든요.

‘나도 압니다. 나도 그 말씀 벌써 백 번 들었습니다. 나도 성경 백 독했어요. 나는 성경 백 독에 성경 쓰기까지 했습니다. 더 뭐? 더더 뭐 얼마나 더 해야 해요? 내가 스스로 알아서 교육하고 양육하고 있는데 뭘 얼마나 더 해야 해요?’라는 마음. 이제 결론 맺습니다. 인간 속에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악마의 미움이 우리 안에 들어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그 미움이 미움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나름 저도 최선을 다했습니다’라는 근사한 자기 의로움으로 이게 살포시 나오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런 입장에서 구원받을 인간은 없습니다. 신약에서 이걸 분명히 합니다. 없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택배입니다’라고 건네주면 그만입니까? 아니죠. 바로 마귀가 있는 그 자리까지 들어오세요.

마귀의 대항력, 마귀의 저항을 뚫고 나갈 수 있는 그 힘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마귀도 방해 못 하고 저항하지 못하는 더 센 힘으로 우리에게 쳐들어오게 됩니다. 그게 한 마디로 뭐냐 하면 ‘창세 전’이에요. 창세 전. 네가 본래를 알아? 네가 원천을 알아? 네가 근본을 알아? 창세 전에 너는 이미 선택되었다는 그것으로 뚫고 들어와 버려요. 할 말 없죠. 우리는 태어나서 열심히 했는데, 주께서는 “아니, 태어나서 열심은 안 받아

오직 창세 전의 하나님의 계획이 너의 속까지 들어오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금수저’라고 합니다. 집안 좋은 것을 ‘금수저’ 목소리 좋아서 노래 잘하는 것을 ‘목수저’ 아무튼 그 금수저가 목숨보다, 내가 지키고자 하는 내 자존심보다 더 소중합니다. 어느 정도로 소중하냐. 온 천하를 다 소비해서라도 창세 전의 계획을 우리 안에서 터뜨려버리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휴전선 금방에서 노는 아이들의 위험성이요, 복음을 갖고 노는데 복음이 내 안에서 터뜨려질 때, 그렇게 파괴되기 싫은 나는 산산조각 파괴될 때, 복음의 폭죽, 복음의 불꽃놀이에 우리는 너무 감격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죠. ‘그만 살아도 돼요, 주님’이라는 고백 외에는 다른 고백은 나올 수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다 예비한 것이 있고 준비된 것이 있었는데, 그게 언약이었고, 그 언약이 인간이 어떻게 나오는가를 알아서, 창세 전에 준비된 언약을 신약에 와서 우리에게 심어주니 감사합니다. 날마다, 고집스럽고 마귀 일곱 귀신 들어있는 이 장소가 복음의 폭탄이 터져서 우리가 산산 조각나도 복음만 남는다면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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