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상처

아빠와 함께 2023. 8. 27. 20:14

상처

2023년 8월 27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0:17-22

(10:17) 에워싸인 가운데 앉은 자여 네 꾸러미를 이 땅에서 수습하라

(10:18)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땅에 거하는 자를 이번에는 내어던질 것이라 그들을 괴롭게 하여 깨닫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10:19) 슬프다 내 상처여 내가 중상을 당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라 이는 참으로 나의 고난이라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

(10:20) 내 장막이 훼파되고 나의 모든 줄이 끊어졌으며 내 자녀가 나를 떠나가고 있지 아니하니 내 장막을 세울 자와 내 장을 칠 자가 다시 없도다

(10:21) 목자들은 우준하여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므로 형통치 못하며 그 모든 양떼는 흩어졌도다

(10:22) 들을지어다 북방에서부터 크게 떠드는 풍성이 오니 유다 성읍들로 황폐케 하여 시랑의 거처가 되게 하리로다

선지자 당시에 외세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유다나라를 넘보는 일이 노골화되었습니다. 따라서 나라는 결속에 나서고 힘을 합쳐 나라를 지켜보려고 애씁니다. 내 나라 내가 지키는 정신은 너무나도 합당하고 타당해 보입니다. 참으로 정의롭게 보이는 태도입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말합니다. ‘그게 우준하다’고 말입니다.

‘우준하다’는 말은 어리석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태도가 극히 정상적이며 어리석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예레미야의 주장은 이러합니다. “망해버려라. 망하게 하려고 오는 적들에게 곱게 항복해 버려라. 그게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이다”입니다.

그러니 그 당시 지도층에서 예레미야를 가만 두지 않을 겁니다. 공격할 겁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선지자는 상처받았습니다. 선지자가 받은 상처는 장차 오실 메시야의 상처를 미리 받은 겁니다. 결국 상처라는 것은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서 발생되는 겁니다. 사람은 같은 사람 없이는 못삽니다.

사람이 밥만 먹는다고 사는 게 아닙니다. 사는 의미가 발생될려면 필히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타인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사정없이 싸우는 관계라 할지라도 자신의 말과 행동을 받아주는 자가 있다면 인간은 살 보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곧 인간들은 같은 인간들과 힘을 모아 자꾸 뭔가 이루어보고자 합니다.

두 사람만 모여도 그럴사한 성과를 지상에 남기고자 합니다. 자신의 업적이요 자신의 존개감을 기념할만한 것을 성사시키려고 합니다. 즉 인간은 자신이 무의미해지는 것을 참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벨탑이 그런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지자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삽니까?

그는 왜 그 시대 유다나라의 대부분의 의견과 다른 의견을 내어놓는 겁니까? 선지자는, 인간의 역사가 사람들과 힘을 모아서가 아니라 담합하고 단결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으로 진행된다고 보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선지자가 사람들로 인하여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도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는 분이라는 점을 자신을 통해서 내비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것도 소극적으로 상처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비난받고 욕얻어먹을 수 있는 상황임을 알면서도 담대하게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그 어떤 주저함도 없습니다. 선지자가 상처를 받게 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이처럼 상처 중심으로 진행됨을 나타내는 겁니다.

사람들은 될수 있는대로 상처 받지 않는 식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자기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여기는 사람과 잘 사귀어놓으려고 하다면 좀 더 사귀어보면, 추잡고 더러운 속내가 드러나서 기겁을 하고 물러가게 됩니다. 이런 경우는 우리 자신들로 마찬가지입니다. 홀로 살게 되면 천하에 점잖은 사람인 것처럼 간주될 겁니다.

하지만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서 비로소 ‘나는 얼마든지 타인에게 상처를 안겨줄 수 있는 인물임’이 밝혀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사람들과 만나지 말아야 할까요? 아닙니다. 성도에게 있어 ‘나’는 먼저 예수님의 상처와의 만남에서 규정되어야 합니다. 타인과의 만남에서 자신의 하지없음과 우수함을 갖추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상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가 규명되어야 합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7-28) 도마는 비로소 왜 예수님께서 죽으셔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즉 도마는 자신이 믿음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도마가 믿게 된 겁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에, 일반인들을 선택해서 사귀는 식으로 사귀려고 합니다. 자신의 단점이 발각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예수 믿어주는 것’이 자기에게 의가 되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사람들이 이런 오류에 빠지는 것에서 빼내시려고 합니다. 그 방법은 예수님 주위에 달무리같은 것도 같이 등장시키는 겁니다. 예수님 주변에 지옥도 같이 보여주시는 겁니다. 이 방법이 바로 상처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자들로 인해 생겨난 상처, 그 상처가 예수님에게 남아 있는 한 성도는 예수님과 헤어질 관계가 아닌 것이 됩니다.

따라서 참된 성도라면 예수님의 몸에서 그 상처 난 곳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 상처를 통해서 자신이 저주받을 자임을 파악하게 됩니다. ‘나 때문에 난 상처가 계신’ 바로 그분만이 우리의 목자가 되는 겁니다. 나로 인해 상처가 없는 목자는 목자가 아닙니다. 나의 지도자도 아닙니다.

우준한 자들입니다. 상처를 집중하게 된 성도는 이제 세상에 생활하면서 그 상처를 본인들도 경험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7:13-14에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모르고 믿지 않는 자로부터 상처받지 않게 위해 부부 사이에 갈라서는 것은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상처받지 않는 나’는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성도가 아닙니다. 성도는 뭡니까? 마태복음 7:12에 보면,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라는 심정으로 세상 속을 살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받은 상처가 그렇게 해서 얻어진 상처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렇게 받은 상처로 인하여 성도는 이 세상이 천국이 아니며 도리어 지옥으로서 항상 예수님에게 대드는 요소로 가득 차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중심으로 역사를 이끌어 나가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토지 위에 이스라엘은 그냥 덤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 상처에서 나오는 혜택 덕분에 살아가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의 상처만 쳐다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6강-예레미야 10장 17~22절(상처)230827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0장 17~22절입니다. 구약성경 1067페이지입니다.

“에워싸인 가운데 앉은 자여 네 꾸러미를 이 땅에서 수습하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땅에 거하는 자를 이번에는 내어던질 것이라 그들을 괴롭게 하여 깨닫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슬프다 내 상처여 내가 중상을 당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라 이는 참으로 나의 고난이라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 내 장막이 훼파되고 나의 모든 줄이 끊어졌으며 내 자녀가 나를 떠나가고 있지 아니하니 내 장막을 세울 자와 내 장을 칠 자가 다시 없도다, 목자들은 우준하여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므로 형통치 못하며 그 모든 양떼는 흩어졌도다, 들을찌어다 북방에서부터 크게 떠드는 풍성이 오니 유다 성읍들로 황폐케 하여 시랑의 거처가 되게 하리로다”

여기 21절에 보면 목자들이 우준하다고 되어있는데, 어리석다는 뜻이죠. 어느 정도로 어리석으냐면 짐승 수준만큼 어리석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왜 이렇게 어리석으냐면 내가 잘 되는 쪽만 생각하고, 내가 파괴되고, 내가 망하고, 실패하는 것은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그 점이 우준하고 어리석은 것이고 짐승처럼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왜 내가 안 아파야 하고, 왜 내가 실패하지 않아야 합니까. 뭐 그런 근거가 있습니까? 우리 자신이 그렇게 훌륭하고 마땅히 건사 될 그런 가치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그들이 알지 못하고 그냥 주께서 주시는 상황 따라 당하기만 하는 그 망하는 이스라엘, 유다 나라죠, 망하는 유다 나라를 때리시는 아픔이 선지자에게는 뭐로 나타나느냐 하면, 선지자가 중상을 입고, 19절에 보면 “슬프다, 내 상처여 내가 중상을 당하였도다”라고 되어있어요.

선지자에게 상처가 있다. 선지자가 뭐 잘못한 거 없잖아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선지자가 상처를 입어야 하는 겁니까? 세상 사람들 같으면 ‘내가 뭘 잘못했는데 이런 어려움이 오는 겁니까?’라고 항의할 거예요. 그러나 선지자 입장에서 이런 상처는 장차 올 구원자가 이 땅에 올 때 보여줄 상처가 미리 앞당겨서 선지자에게 생겨버린 겁니다.

이 상처는 어디서 생겼는가. 그건 바로 인간관계에서 생긴 거죠. 타인과의 관계. 남들과의 관계. 남들과의 관계에서 왜 선지자가 상처를 입느냐. 그거는 사람들이 자기 것을 교묘하게 감추면서 상대에게 다가서기 때문에, 더이상 감추지 않는 선지자의 입장에서는 하나하나가 전부 다 상처가 되는 겁니다. 사람 대 사람의 사귐에서 결국 기겁을 하고 돌아서는 경우가 어떤 경우냐 하면 처음에는 좋은 것,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 나타나니까,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생각되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들의 더러운 것과 죄가 보이죠.

모든 인간은 죽음을 실어나르는 전달체인데 그런 죽음을 나르는 전달체로써 교회 와서 하늘나라까지 올라간다면, 그건 전달체가 아니라 발사체입니다. 죽음을 실어나르는 발사체.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발사체 제3단계에서 실패하게 만들어버리죠. 이게 어디서 기어들어 오고 있어? 본인의 더러운 것과 추잡한 것을 교묘하게 감추면서 하늘나라에 가겠다는 것은 그 자체가 바로, 자신이 죄를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동안 몰랐던 거예요.

인간관계에서 처음에는 뭐, ‘사랑합니다. 좋아합니다’라고 만났죠. 나중에는 질겁을 합니다. ‘네가 이런 자였어? 너에게 이런 면이 있었어? 나는 왜 바보같이 그걸 몰랐지?’라는 이 더러운 거, 이 더러운 것이 인간관계 속에서 삐져나와서 그게 성도나 선지자에게 상처로 스며들어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남에게 상처 주는 일이 없는가. 성도도 남에게 상처를 주죠.

그런데 성도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창조를 하시기 때문에 기존에 누구를 만나서 상처를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의 만남을 통해서 나의 더러운 것을 올라오게 만들고 그걸 노출 시키는 계기로 삼는다는 겁니다. 누구와의 모든 관계를 통해서. 이것을 간단하게 이렇게 예를 들 수 있어요. 인간은 예수님과의 관계가 성립되지 아니하면 나에 대해서도 언급을 보류해야 합니다.

‘나는 이렇습니다’라는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라고 할 때는 ‘나’라고 이야기하세요. ‘나는 예수님을 만난 순간 죽음의 전달체였고 죄의 전달체였습니다’라고 이야기해야 하고, ‘나로 인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상처를 입었습니다’라는 말을 곁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나라고 말할 때의 가치와 의미가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되는 겁니다.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상처 많고 죄 많을 것 같으면 남과 굳이 만날 이유가 없지 않으냐. 그런데 여러분은 이걸 알아야 해요. 인간은 타인이 없으면 내가 죽어요. 사람이 살아있다는 이유가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있을 때 비로소 나는 살아있는 거예요. 뭐 정다워서가 아니라, 무조건 상대는 내 말을 들어줘야 해요. 내가 살아있음을 네가 증명해줘야 해요. 그때 우리는 살아있는 거예요.

그런데 주변에서 내 말을 들어줘도 먹히지도 않고 아무도 말을 들어주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죽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외롭고 쓸쓸하고 살 의미가 상실되는 구나를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살아있다는 것은, 상처를 주든, 뭘 주든 간에 함께 할 때 인간은 살아있어요. 함께 할 때. 함께 하던 자가 아프든지, 함께 하던 자가 사라지게 되면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습니다.

제가 지금 살고 있는 빌라에 온 지 20년 되었는데, 올 때부터 계셨던 할아버지가 어제 돌아가셨어요. 죽었습니다. 그걸 볼 때 저는 처음부터 죽을 줄 알았어요. 왜? 인간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죽기 위해서 태어났고, 85세 동안 살면서 이제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그 할머니가 문제입니다. 얼마나 둘이 싸우는지. 어떤 때는 새벽에도 싸워서 잠을 깰 때가 있었어요. 얼마나 싸워대는지.

젊은 사람들은 저렇게 싸울 것 같으면 그냥 헤어지지 뭣 때문에 싸우고 그러느냐고 하겠지요. 사실 그분들이 한 번 헤어졌어요. 너무 싸워서 헤어졌는데, 헤어지고 난 뒤에 자기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는 거예요. 자기 속상한 것을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 이혼한 상태에서 다시 만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만나고 나서 계속 싸웠는데 해줄 것은 다 해주면서 마지막에는 미숫가루 먹고 싶다고 해서 타줬는데 그거 마지막으로 마시고 할머니 나가신 사이에 돌아가셨어요.

그러면 여기서 새로운 창조가 뭐냐. 새로운 창조는 예수님을 나의 타인으로 만나게 되는 경우를 창조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람을 상대로 해서 외로움을 덜려고 하고, ‘나는 너 없이는 못 살아’라는 이것이 창조가 아니고 그건 옛사람이고요,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과 더불어서 ‘나 때문에 상처를 입었구나’를 그러니까 나 때문에 예수님이 상처를 입었다면 그 상처가 있는 한,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살게 되어있어요. 영원히~. 주님의 그 상처가 있으니까요. 십자가 상처가 있으니까요. 나 때문에 생긴 상처가 그분에게 있기에, 손에 못 자국, 창 자국이 있기에, 우리는 그분으로 인해 함께 살게 된 거예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사이가 좋은지 아닌지, 그런 것까지 신경 쓰지 말고 주님과 함께 영원히, 주님이 함께 계신다는 거. 내 형편 좋으려고, 나 편하려고 함께 계신 것이 아니에요.

그걸 부동산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지상권 주택이라고 합니다. 지상권 주택이라고 하는 것은 토지는 남의 권리로 남아있고 집만 내 집이 되는 경우에 집이 싸게 나옵니다. 촌집은 천만 원대로 나옵니다. 이 지상권 주택을 구입할 때, 선 듯 손이 가지 않고 토지를 가진 사람이 나가라고 하면 어쩔지 걱정이 되는데, 실은 지상권을 얻게 되면 10년 동안 법적으로 보장됩니다. 못 쫓아냅니다.

그리고 10년 이후에 토지를 사게 되면, 주인이 시세보다 헐값에 팔게 되어있어요. 갑자기 부동산 정보를 말씀드린 건데, 이게 뭐냐 하면 내 집이 아니에요. 내 토지가 아니에요. 내 토지가 아닌데, 내 것도 아니면서 토지는 확보되어 있고 그 위에 집을 짓고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바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임대차계약하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 땅은 절대로 이스라엘 땅 아닙니다. 이스라엘 땅 아닌데 그때가 가장 좋았던 때예요. 왜? 내 땅이 아닌데 내가 살기 때문에. 더 이상 내가 손해 본다는 위기감이 없어요. 그냥 덤으로 사는 거예요. 덤으로. 그러면 그 위에서 죄지으면 어떻게 되냐. 그 죄라는 상처를 토지가 되시는 주님이 다 담당을 해버립니다. 시편 85편 3~11절에 보면 거기 나온 내용을 길어서 다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간단히 줄이면 이렇습니다. 그들로 인하여 내가 상처를 입었지만, 그들은 내 상처를 돌아보지 않는다. 예수님 이야기죠. 시편 22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로 인하여 상처를 입었지만, 그들은 도리어 히히거리면서 나를 놀리고 있다는 겁니다. 1절에 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렇게 중얼거리고, 이렇게 외쳤을 때, 그 말이 나로 인하여 저렇게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사이는 영원히 천국에서 함께 가는 사이예요. 떨어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자기와 함께할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의 타인으로 여겼어요. 자기는 인간들과 상대하기에 거기에 급급했고 그게 인생사는 재미라고 여겼던 거예요. 어쨌든 외로우니까 사람과 함께 하기는 하지만 거기서 예수님만을 빼버린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들과 나와 남과의 관계에서, 주님께서는 상처 입은 모습으로 끼어들고, 인간들은 그 상처가 싫어서 예수님을 밀어내고, 그래놓고 무슨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그건 상처 없는 하나님을 우리가 원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해요.

영사운드라는 밴드가 불렀던 유명한 노래 있지요. ‘달무리’라는. 그 달무리에서 달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그 주변에 아우라(Aura)가 같이 등장하거든요. 예수님이 등장하는 그 주변에 지옥도 함께 등장해요. 사람들은 자꾸 골라잡아서 예수님만 믿으려고 하는데 예수님 주변에 우리가 몰랐던 ‘왜 이 세상이 지옥인지’ 그 사실도 달무리처럼 같이 끼어듭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만 달랑 믿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도 동시에 파악할 수 있어요. 예수님을 죽였다. ‘예수님을 믿는다’가 아니고 ‘죽은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할 때 누가 예수님을 죽였는가를 같이 거기에 동반해서 주께서는 우리에게 그 내용을 복음으로 알려줍니다. 그럴 때 우리가 ‘예수님 좋아요’라고 마냥 좋아할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예수님을 죽였던 예수님 옆에 달무리 같은 요소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평소에 무심코 살아가는 나만 챙기는 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왜 예수님께 상처가 생겼느냐는 겁니다. 왜 우리는 그 상처가 생겼는지도 모르고 남들과 으싸으싸 살아가는 그 이유가 뭐냐. 어떤 노래 가사를 한 번 읽어 들릴 텐데, 여러분 중에 듣고 아시는 분이 있을 수도 있어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노래입니다. 이쪽은 잘 안 부르는데 저쪽에서 잘 부르는. 이걸 백기완씨가 작사를 했는데, 이게 뭐냐 하면 동지애(同志愛)예요. 동지애. 지금 우리가, 예레미야가 “슬프다, 내 상처여 내가 중상을 당하였도다”라고 하는 데, 이스라엘이 정치적 어려움이 일어나니까 백기완씨처럼 자기들이 정치적 그룹을 형성해서 똘똘 뭉쳐서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거예요.

이건 누가 봐도 굉장히 애국심이 넘쳐나잖아요. 이건 누가 봐도 소위 정의, 정의로운 일로 간주 될 거예요. 우리 한번 힘을 합치자. 이게 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고 교회도 마찬가지잖아요. 패싸움하고, 네 패, 내 패, 너는 라인이 어디고, 이런 것들을 왜 하는 겁니까. 이걸 에베소서에서는 편당 짠다고 하는데요. 갈라디아서에서 육체의 소욕 중에 파당이 포함되어있거든요.

그거는 뭐냐 하면 사람을 상대하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을. 나는 너 없이는 못 살아. 듣는 사람이 굉장히 기분 좋아 보이죠. 그게 결국은 그 사람에게 상처를 남깁니다. ‘나는 너만 의지했는데 네가 나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노?’라고 나와요. 이건 멀리 갈 것도 없어요. 가정문제예요. 우리들 가정문제. 가정문제에서 부부의 모든 대화라든지 이것이 상처를 줄지언정, 절대로 상처받지 않겠다는 자기의 타고난 고집 같은 것이 결혼해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어요.

그러면 어떤 해결책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 그 해결책을 언급하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해결책 아까 드렸습니다. 예수님과 인간관계를 성립해버리면 예수님이 나 때문에 상처를 입어요. 그러면 그 상처를 보고 주께서 나를 떠나지 않으리라고 생각되는 겁니다. 그게 가정문제에 이렇게 되어있어요. 전부터 제가 이 대목을 설명할 때 설명이 잘되지 않았어요.

고린도전서 7장 13~14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라는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하면 믿지 않는 남편이 있더라도 갈라서기를 원하지 말고 남편이 나를 버리지 않거든 같이 살라는 말이거든요.

왜? 왜 그래야 하는데요? 그게 전에는 잘 풀리지 않았어요. 지금은 알아요. 마태복음 7장 12절 때문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다시 말해서,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를 위해서 결혼했다는 거예요. 상대방에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러면 무엇을 도와주는 가운데 나는 뭘 얻느냐. 상처를 얻어요.

이건 정말 성령 안 받으면 될 수 없는 일이에요. 나는 상처를 받아요. 상대가 믿지 않기 때문에. 자기 잘났다고, 자기 잘난 체한다고, 그 상처가 믿는 사람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에게 얼마나 많은 상담을 했겠습니까. 안 믿는 남편이 어쩌고저쩌고, 갈라서면 속 편하겠는데 갈라설까요, 말까요? 그때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그쪽에서 나를 버리지 않거든 무슨 뜻이 있다는 거예요.

그 뜻이 뭐냐. 사람과 좋은 관계, 남편과 좋은 관계, 아내와 좋은 관계로 만나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인간관계가 아니고 주님이 그사이에 개입해서 주님과의 관계, 주님은 나 때문에 상처받았다는 내가 이 땅에 살면서, ‘예수님이 왜 인간들에게 상처를 받았지?’라는 그 받은 상처를 말씀대로 받는 거예요. 우리가. 안 믿는 사람으로 인하여. 그런데 행여나, 그런 일은 없지만 행여나, 그 안 믿는 남편이나 아내가 ‘이럴 거면 우리 헤어져’ 나오면 찬스(기회) 잡은 거예요.

‘이제 걸려들었어. 내가 그 말 듣기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헤어져’ 이렇게 헤어지면 된다는 거예요. 그 사람은 아무 생각 없다가 이혼하게 된 거죠. 그러니까 그쪽에서 ‘나는 네가 필요해. 나는 너 없이는 못 살아’라고 할 때, 이것이 그 사람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있는데 그 뜻이 뭐냐 하면 주님이 당한 상처를 너도 한 번 당해보라는 겁니다.

불신자를 안고 사는 상처가 얼마나 아픈지를요. 이혼이 묘책이고 대안이 아니라, 그쪽에서 뭔가 군시렁궁시렁 하는지 듣고 있다가, 혹시 밤에 자다가 라도 뭔 말이 나오는 듯싶으면, 대번에 녹음해 놨다가 헤어지자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자유 할 수 있는 것이 성도의 자유권이란 말이죠. 이 땅에서는 뭐냐, 지옥같은 삶 속에서 불신자로 인한 상처를 통해서, 주님은 나로 인해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그 상처가, 나로 인한 그 상처가 있다면 우리는 주님과 헤어질 수 없는 그런 성도의 관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위주로, 우리 좋아라고, 우리 행복하려고 있는 세상이 아님을 깨닫게 하옵소서. 선지자가 상처를 입었습니다. 메시아의 상처입니다. 백성들은 그것도 모르고 우준합니다. 바로 그 백성들의 모습이 우리 모습이 아닌지, 예수님을 그렇게 대우하지 않았는지 돌이켜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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