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왕
2023년 9월 3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0:23-25
(10:23)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10:24)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나로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10:25) 주를 알지 못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그들은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고 그 거처를 황폐케 하였나이다
선지자는 당황합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친히 인도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현 이스라엘의 운명이 붕괴되기 직전입니다. 선지자는 이 징계에 본인도 포함되어 있음을 간파합니다. 그 징계를 너그럽게 해 달라고 합니다. 어쨌든 이 징계의 특징은 선지자를 비롯해서 모든 것들을 없애버리는 징계라고 알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없애려고 하실까요? 친히 세우신 나라요 그동안 이끌어오신 나라인데 왜 이 나라를 굳이 제거하려고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나라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왕이 필요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왕이 되신다는 점에서 다른 나라와 차별화됩니다.
이 차별화는 모세를 통해서도 애굽나라에 실시한 적이 있습니다. 10가지 재앙 중에서 네 번째 재앙, 곧 파리 재앙부터 히브리인들이 사는 땅에는 재앙이 없었습니다.(출 8:22) 이것은 눈에 보이는 인간이 왕의 영웅적 혜안으로 된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관계 속에 괜히 인간이 끼어들면 안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왕되심이 가려집니다. 여기에 비해 이방나라는 신을 섬기면서도 인간 왕이 도입이 정당하게 여겼습니다. 즉 왕이 눈에 보이는 신, 혹은 신의 아들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신에게 나아가는 것은 곧 눈에 보이는 왕에게 나아가는 것으로 대신하게 됩니다. 신이란 모든 힘의 결집이요 중심처를 뜻합니다.
이것은 인간 왕이 독점해 있는 겁니다. 그런 결과, 이방나라는 너무나도 강대국이 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에게 당부했습니다. 아무리 이방나라가 강대하더라도 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없이 인간 왕이 대신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가 진척되면 될수록 그들은 자신들에게 왕이 있음이 더 안심된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삼상 8:5) 왜 인간은 인간 왕을 원할까요? 그것은 인간들은 힘을 항상 찾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늘 자기 걱정하고 자기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자기를 지키고 싶은 겁니다. 당연히 힘 가진 자가 필요로 합니다. 힘과 힘들을 모아서 그 안에 자신이 놓여 있다면 그 사람은 안심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왕이 없습니다. 이는 곧 자신이 원하는 힘을 자기 방식으로 얻을 수없음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은 독자적으로 자기 뜻을 구현될 수가 없고 하나님께서 이끄시는대로 살 수밖에 없다는 점에 불안과 불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즉 인간은 자율성을 지니고 늘 자기로 인해 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자율성을 포기해야 함을 뜻합니다.
종이라는 것이 과연 불행한 사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의 종이 된다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주인님이 따로 계시다는 뜻입니다. 주인은 종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는 분입니다. 종은 그저 주인님께서 지시하는 대로 살면 그만입니다. 이스라엘은 그저 하나님께서 인도하는대로 살면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게 싫은 겁니다. 각 사람들이 본인 소견대로 살고 싶은 겁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2:25) 이 말씀은 왕이 있으면 사태가 호전된다는 말이 아니라 이들 이스라엘이 각자 하나님을 다 버리고 난 뒤에 그 어떤 대책이 없다는 뜻입니다.
즉 ‘친히 하나님께서 각자의 인생을 인도하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다움이 사라집니다. 이방나라와의 차이점이 없습니다. 이방나라의 국가 만들기는 왕에게 절대적 권력을 주므로서 왕 중심으로 결집을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바로 이런 구조들이 하나님의 왕 되심을 훼방하게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가만 있지 아니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강력한 벌칙을 내리므로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신의 왕되심을 강력하게 지켜보려고 했는지를 드러내십니다. 에스겔 9:6에는,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 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 2:20에 보면, “여호와여 감찰하소서 뉘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손에 받든 아이를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살륙을 당하오리이까”고 되어 있습니다. 즉 양식이 다 떨어져서 자기 자식을 먹기까지 합니다. 이 참혹한 광경은 곧 하나님께서 얼마나 화를 내고 계시는가를 이스라엘에게 알리십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영영히 버리시는 걸까요? 오늘 본문 25절에 보니, “주를 알지 못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그들은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고 그 거처를 황폐케 하였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주님께서 직접 왕으로 오시는 그날을 하나님께서는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것이 신약에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을 최후로 심문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가 그 당시에 실질적으로 유대나라의 최고 통치자로 와 있기 때문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 있어 왕은 당연히 가이사입니다. 그런데 평소에 예수님께서는 가이사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를 구분지었습니다.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마 22:21) 그러다면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보고 질문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 18:33) 예수님은 “내가 유대인의 왕이다”고 했습니다.
과연 이 답변이 옳은 걸까요? 본디오 빌라도는 묻습니다. 그렇다면 왜 너의 백성들이 너를 버리느냐고 말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보이지 않는 나라의 보이지 않는 왕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이 세상 나라가 아니라 주의 나라로 이끌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7강-예레미야 10장 23~25절(진정한 왕)230903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0장 23~25절입니다. 구약성경 1067페이지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나로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주를 알지 못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그들은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고 그 거처를 황폐케 하였나이다”
선지자의 기도입니다. 선지자의 인생은 책임자가 여호와께 있음을 압니다. 우리가 보통 종이라 할 때, 상당히 듣기 기분 나쁘죠. ‘살려면 주인으로 살아야지 어떻게 종으로 살 수 있느냐. 이 한심스러운 것아’라고 이렇게 우습게 보는 대상이 되지만, 종으로 사는 것이 편하고 좋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은 종을 먹여 살릴 책임자를 주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신만만하게 자기를 종이라고 하는 것은 ‘나 잘났다’가 아니라, ‘우리 주인님 너무 잘났다’라는 것을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때, 누구누구의 종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관계인지 말할 수가 없습니다.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내 인생은 나는 내 손에서 손 털었습니다. 나는 누구의 종이 됨으로써 드디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것에 나는 도착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선지자를 보내신 이유는 선지자 배후에 주인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신을 받을 때, 하나님의 성령을 받을 때 비로소 가능한 거죠. 하나님은 나를 버릴 수 없는 이유가 선지자를 통해서 알려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우리들을, 성도를 버릴 수 없는 이유가 에스겔 36장 26~27절에 보면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라고 되어있어요.
우리 속에 있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성령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종이 되고, 주님의 종이 되는 그러한 시대가 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그 마음은 내가 내 주인 노릇하는 옛날 그 마음이 아니고 새마음이 된다는 겁니다. 성령이 되면 새마음이 되고 그 새마음은 우리가 철저하게 주님의 종이 되는 그 영광을 누리는 그때가 온다고 되어있어요.
주님의 주인 됨이 유지되는 한, 우리의 종의 관계도 소멸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사라지느냐, 안 사라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관계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 언약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성도도 역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언약 관계 때문에 성도는 영원히 주님의 나라에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어디를 쳐다보느냐가 중요하겠지요.
나의 행동, 나의 태도를 보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을 보느냐의 그 차이입니다. 어떤 식으로 말씀이 우리에게 작용하느냐가 중요하지, 내가 하나님께 뭘 드리고, 뭘 바치고 충성했느냐는 완전히 무시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라는 것은 상황 따라서 내가 결정되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현실을 읽어내느냐가 아니라, 현실이 나를 어떻게 읽으라고 가르치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현실이 나로 하여금,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내는 그 작용을 현실이 우리에게 현재, 실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어진 현실은 언약안에 현실이죠. 그 현실은 어떻게 작용하느냐. 네가 너를 이해하는 것을 버리라는 겁니다. 그걸 포기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포기하는 쪽으로 주께서 상황을 몰아갑니다. 몰아가니까 선지자도 인간인지라 겁이 났던 모양이죠.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겁이 나니까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라는 이런 발언을 왜 하느냐 하면, 지금 주어진 유대 나라의 상황이 자기가 예측한 것과 지금 다르게 움직거리고 있다는 거예요. ‘야, 망하겠다. 진짜 유대 나라 망하겠다’ 유대 나라 망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유대 나라에게 주신 하나님의 다윗에게 주신 약속, 언약이 있어요.
언약대로 한다면 반드시 다윗의 나라, 유대 나라는 안 망해야 하거든요. 여기서 선지자가 약간 혼란이 오는 겁니다. 왜냐하면, 구약 사람이기 때문에, 신약의 다 이루심을 모르기 때문에, 약간의 갈등이 생기는 겁니다. 인간의 주체라 하는 것은 외부와 갈등이 발생 되면서 정립되는 거예요. 집에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부딪히는 가운데서 내가 누구냐가 그때 우리는 구체화 되는 겁니다.
만나고 부딪히고, 그렇게 함으로써 내 상상에서 내가 벗어날 수 있어요. 상상이냐, 아니면 실제 현실이냐. 현실을 내가 읽어 낼 것이 아니라, 현실이 나를 어떻게 만들어나가는가를 아주 짜릿하게 느끼시기 바랍니다. 마치 선지자처럼.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아, 이러다가 진짜 내가 죽는 것이 아닌가. 이러다가 내가 망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그럴 때, 그렇게 염려가 될 때 여호와께서 이 땅을 어떤 법칙과 어떤 질서로 이끄시는지, 그것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선지자의 발걸음 하나하나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구체화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당하는 여러분의 발걸음과 여러분의 일상을,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일상으로 만들어내십니다. 언약의 일상으로.
그렇게 되면, 아브라함이 겪었던 거, 이삭이 겪었던 거, 야곱이 겪었던 거,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을 고유명사라고 하는데, 개인에게 주어진 이름을, 그 개인에게 고유한 것이기 때문에 주어진 그 고유명사를 주님께서 점차 보통명사로 바뀌게 하십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다, 공히 같이 겪을 언약의 일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먼저 겪게 한 것뿐이죠.
그러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겪었던 거, 지금 선지자도 같이 겪고 있습니다. 겪으면서 선지자가 전에 몰랐던 일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 나라를 완성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일에 목적이었다는 사실이 서서히 감이 오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본문 25절에 나옵니다.
“주를 알지 못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이 말은 하나님의 저주가 어느 쪽에 떨어지는지에 따라서, 저주가 떨어지지 않는 쪽이 하나님께서 설립하려는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파악하는 방법은 하나님 언약의 저주 대상이 어느 쪽인가를 파악하시면 되는 거예요.
모세가 애굽에서 나갈 때 열 가지 재앙이 내렸잖아요. 그런데 네 번째 재앙부터는 히브리인들이 사는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을 하나님께서 구분해서 저주를 내립니다. 애굽 지역에 저주가 왔는데 그 시각에 히브리인들 사는 동네는 저주가 안 왔어요. “그 날에 내가 내 백성의 거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곳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나는 세상 중의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에 구별을 두리니 내일 이 표징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 (출8:22~23)
구약 전체가 평면적이기 때문이죠. 평면이라 하는 것은 이쪽과 저쪽을 지도 펴놓고 볼 수 있는 것이 평면적이에요. 그러면 이쪽과 저쪽이 뭐냐 하면, 거기는 재앙이 떨어지는데 여기는 안 떨어지죠. 거기와 여기의 차이가 신약에 오게 되면 평면적이 아니고 수직적으로 바뀝니다. 위에 거기는 평온하고 아래 여기는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죠. 재앙이 오고, 온난화가 오고, 태풍이 오고, 기온이 40도 올라가고, 가뭄과 어디는 홍수가 오고, 아래 이쪽은 난리도 아니에요.
그런데 위에 저쪽은 편히 안식하고 있습니다. 구약 때, 이쪽과 저쪽의 차이가 신약 때도 마찬가지예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층을 두 층으로 나눠서 제가 팬케이크(pancake)라고 강의에서 했는데, 팬케이크처럼 두 개의 세계가 두 개의 케이크처럼 동그랗게 위아래로 나뉘어 있어요. 아래쪽은 마귀가 왕이고 저쪽 위는 여자의 후손이 왕이 되는 세계, 이미 완성된 세계가 있는 겁니다.
지금 예레미야 때는 구약이기 때문에 온전하게 수직적으로 다 구분되지 않고 평면적으로 이스라엘 역사 속에 다 같이 섞여 있는 겁니다. 선지가 느끼는 이스라엘과 선지자 외에 타락한 선지자와 일반 백성들이 느끼는 이쪽과 저쪽이, 선지자가 느끼는 것을 저쪽은 못 느끼고 있어요. 그렇다면 에스겔에서는 선지자가 어떻게 자기 유대 나라를 보았는가.
그게 에스겔 9장 6절에 나옵니다. 저주를 통해서 축복을 파악하는 방법이에요. 부정성을 통해서 긍정을 뽑아내는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양말이나 장갑을 한 쪽을 읽어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쪽은 못 쓰죠. 짝이 있어야 하니까. 이렇게 천국과 지옥은 짝으로 주어지게 되어있고, 언약도 자체적으로 짝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에스겔 9장 6절에 보면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찌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여기 보면 예루살렘 성이 바벨론에 의해서 심판받는 그 광경이 있는데요, 하나님의 부르짖음이 주어지게 되면 어느 정도로 심판이 험악하고 심했느냐 하면 그게 예레미야애가에 나옵니다.
어린아이를 잡아먹어요. 어린아이가 엄마 품에서 죽고 그래요. 예레미야애가 2장 12절에 나옵니다. “저희가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혼미하여 그 어미의 품에서 혼이 떠날 때에 어미에게 이르기를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뇨 하도다” 이 모습을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대로 봅니다. 보면서 “슬프다”라고 자꾸 슬프다고 반복해요.
예레미야 1장에도 “슬프다”, 2장에도 “슬프다”, 그래서 예레미야 애가가 슬픈 노래예요. 눈물을 흘려요. 그래서 예레미야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이야기하는데 예레미야애가 1장 2절에 보면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 중에 위로하는 자가 없고”라고 시작해서 계속 5장 끝까지 슬픈 이야기, 이스라엘 백성이 망하는 슬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먹을 것이 없으면 자기 애를 삶아 먹겠습니까. 이 말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아는 것은 이런 겁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뭐냐. 아까 설교 끝나고 어떤 분이 물었어요. ‘열두 지파가 왜 망해야 하고, 망하는 이유에 열두 지파가 무슨 관련성이 있습니까?’라고 제대로 된 질문을 했어요. 질문의 답은 이렇습니다.
처음에 이스라엘은 율법에 의해서 레위 지파 중심이었어요. 레위 지파 중심이었는데 그 중심되는 레위 지파가 죄를 범해요. 그러니까 나라가 둘로 바뀝니다. 요셉 지파와 유다 지파. 요셉 지파는 요셉 지파의 죄로 인하여 망하고 유다 지파는 아시다시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다 지파는 유다 지파의 죄로 죽어요. 그럴 때마다 이 레위 지파 중심에서, 요셉 중심에서, 다윗 중심에서, 레위 지파는 왕이 필요 없다 예요.
왕은 하나님이니까 왕은 필요 없다가 되고, 레위 지파의 제사 중심으로 이스라엘 되면 된다고 하는데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를 본받아서, 우리에게도 왕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거예요. 우리에게 왕이 있어야 한다고 함으로써 레위 지파는 시마이(끝남) 했고,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 왕이 되어버려요. 레위 지파와 하나님 사이에 그 중간에 인간이 왕이 필요하다는 그 왕 의식이, 이방 나라 의식이 거기 중간에 가로막고 들어간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는 이방 나라처럼 왕국을 만들려고 한 거예요. 저도, 여러분도 꼭 아셔야 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있어요, 국가라는 것은 없습니다. 국가가 없는 대신 역사를 통해서 보면 눈에 가시적인 거, 눈에 보이는 왕에게 초월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왕 중심으로 국가를 만들어가는 것이 인간의 국가 만들기입니다.
왕이 있는 곳이 국가예요. 왕이 강화도로 가면 국가는 강화도로 가는 겁니다. 엣날에는 강화도 섬으로 가면 몽골족은 바다에서 싸움 못 하니까 강화도로 피신했는데 그렇게 해서 실패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죠. 이스라엘 우상숭배를 시작한 것은 바로 이웃 나라에 눈에 보이는 강력한 권력자의 등장에 그것을 연모하고 흠모한 거예요.
하나님은 보이지 않죠.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확실하게 권력을 몽땅 갖고 있는 하나의 중심체가 되는 인물이 있으면 너나 할 거 없이 모두 그 인물 중심으로 결집이 잘 되게 되어있어요. 인간의 본성상. 인간은 같은 인간의 어떤 권력을 갖고 있는 인물, 그걸 영웅이라고 하는데, 영웅이 등장하게 되면, 거기에 와락 사람들이 쏠리게 되어있어요. 임영웅이도 영웅, 포항의 유진, 김호중, 방탄 소년단, 비틀스(The Beatles).
왜 사람들은 자기의 고달프고 피곤한 인생을 어떤 위대한 스타의 등장으로 위로를 풀려고 하는 겁니까? 자기 속에 공백이 있는데 내 모든 알 수 없는 욕구와 딱 들어맞는, 실재하는 인물의 등장으로 사람은 피곤한 인생에 힘을 부여하게 되는 겁니다. 옛날 가정에서 엄마가 아이들 모아놓고 아이가 ‘엄마, 먹을 것이 없어. 밥 해줘’라고 하면 엄마가 ‘야들아, 조금만 기다려라. 너희 아버지 돈 벌어서 온단다’
아버지가 부재하든, 바람이 나서 밖에서 뭘 하든, 어쨌든 간에 아버지가 부재하고 없어도, 여전히 이 가정의 주인공은 아버지예요. ‘아버지. 아버지 돈 많~~이 벌어온단다’,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는 날 기르시네’ 어머니는 늘 보조예요. 시다바리 이고. 아무것도 기른 적 없는 아버지도, 아버지가 거기에 중심이 되는 거예요. 정신적 지주가 되는 겁니다.
에스겔 대목을 제가 읽어드린 이유는 벌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뭐가 잘못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방식으로 주께서 벌칙을 주신 거예요. 이 벌칙이 어떤 벌칙이냐 하면 왜 어떤 영웅적인 왕이 있어야 하고, 그 왕을 믿는 방식으로 너희들은 하나님과 관계하려고 하느냐. 눈에 보이는 사람을 믿는 방식으로 왜 하나님을 믿고자 하느냐.
그리고 그러한 나무람이 그냥 잔소리 정도가 아니고, 완전히 이스라엘 나라를 황폐화시키는, 처참하게 저주해버리는, 자기 아이를 삶아 먹을 정도로 그렇게 가혹하게 오는 것은, 하나님이 그만큼 그것을 진지하게 극단적으로 생각한다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사람을 의지하는 것을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고, 도발이고, 하나님을 안 믿겠다는 그런 강한 악마의 본성인 것을 주님께서는 메시지를 그런 식으로 구성해내는 겁니다.
찬송가 344장에 보면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라고 하잖아요. 이건 뭐 세상 종교에서 할 수 있어요. 문제는 그 믿음의 내용이 뭐냐는 겁니다. 믿음의 내용.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믿음 없었습니까? 다 믿는다고 했는데 자기들이 믿음으로 망한 거예요. 그것도 처참하게 저주받고 망한 겁니다. 도대체 뭘 믿느냐는 겁니다.
그들은 언약을 믿었어야 했어요. 어떤 언약이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인간 왕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그 약속의 내용을 믿어야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왕을 찾는 이유는 왕을 믿어서가 아니라, 왕을 의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믿음은 누구냐. 본인이 본인을 믿는 거예요. 본인이 잘 되기 위해서 나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영웅을 믿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흔히들 이야기하잖아요. 나라 없는 서러움이 얼마나 독한지요. 나라 없는 서러움. 그러면 나라는 어떻게 얻는가. 왕이 있어야 나라를 만들어요. 그러면 왕이 세워졌으면 모든 인간은 자연스럽게 보수주의가 되는 겁니다. 왕이 어지간히 나쁘지 않은 한, 그냥 찍자. 몰표 나오든지 어떻든지 그냥 찍자. 나라가 안정된 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 인물, 저 인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라가 힘을 합해서 안정되어야 한다.
지금 나라 걱정합니까? 자기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표를 몰아준다는 것은 밀어준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당신을 밀어줄 테니까, 당신은 나를 지켜달라는 거예요. 그냥 주고받는 거래이고 흥정이라고요. ‘느그 아버지 돈 벌어온다’라는 것은 아버지 사랑하지 않아요. 힘센, 돈 벌어오는 아버지가 있어야, 나와 내 새끼가 산다는 거예요.
옛날 여자분들 다 그렇게 살았어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 이렇게 알죠. 여자가 직업 가지려고 하면 ‘어데, 지금 가장이 있는데 여자가 밖으로 싸돌아다니면서 돈을 벌어? 너 지금 나 무시하나? 너는 아이나 잘 키워. 돈은 내가 벌어줄게’ 이게 무슨 객기입니까. 허세, 허풍. 그래놓고 지가 일 벌여 놓으면 도와달라고는 또 왜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합니다. 주님이 왕이 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 그대로입니다. 주님이 왕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발걸음을 인도한다. 어디로? 나 구원? 아니요, 주님이 세우신, 주가 되시는 나라로 이끌어주시는 겁니다. 그게 오늘 본문 이야기예요. 그 과정에서 뭐가 떨어져 나가는가. 내 속에서 원하는 나를 위한 왕이 여기서 작살나야 하는 겁니다.
나를 지켜주는 왕, 작살나야 하죠. 예레미야조차도 그것이 흔들리면서 갭(gap)이 생긴 거예요. 그러나 예레미야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23절에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라고 하면서 여호와께서 우리를 이방 나라 말고 여호와가 왕이 되시는, 친히 왕이 되는 그 나라로 주께서 한 걸음, 두 걸음, 인도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이방 나라와의 차이점, 이방 나라는 뭐냐. 눈에 보이는 어떤 구체적인 인물이 호령하고 지시하는 그런 세계 말고 다른 세계, 여호와가 직접 왕이 되는 세계가 오겠죠? 그게 바로 요한복음 18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받을 때, 빌라도가 먼저 운을 뗍니다.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냐” 성경은 ‘너 구원받았나’라는 걸 묻는 게 아니고 ‘너의 왕이 누구냐’를 묻습니다.
그 말은 네가 원하는, 너의 구색에 맞는, 네가 마음에 원하는 왕이 하나님이냐, 아니면 나(주님)에게 좋은 왕을 네가 찾고 있느냐를 묻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앞에 빌라도는 뭐냐. 자신은 지금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는데, 빌라도는 지금 총독으로 와 있어요. 그래서 임시적으로 유대 나라 왕이 누구냐. 왕의 역할을 하는 것은 본디오빌라도입니다.
그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묻는 겁니다.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냐” 상당히 위험한 질문을 한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2장에서 이 세상 사람들이 구축하는 나라와 주님의 나라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21절에 보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 당시 가이사가 왕이었거든요.
가이사라는 왕과 하나님의 왕 되심을 예수님이 완전히 구분했습니다. 이걸 본디오빌라도가 이미 알고 있는 거죠. 그렇게 하니까 예수님이 답변합니다. “내가 왕이다” 그러니까 본디오빌라도가 말하는 거죠. 그렇다면 당신은 내가 당신 죽여도 할 말 없다고. 왜? 이미 이 세상에 유대인의 왕이 있으니까. 그걸 예수님께서 아시고 요한복음 18장 36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 믿는 것은 바로, 이 내용을 믿어야 해요. 이 약속을 믿어야 해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라고 하면서 우리는 현재 이 세상에 속해져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통과했던 경로를 우리가 그대로 밟아가는 거예요. 우리는 늘 세상으로부터 질문받습니다. ‘너, 누구 찍었노?’ 제가 한두 번 들을 소리가 아닙니다. ‘목사님, 누구 찍었어요? 이재명? 윤석렬?’
누구 찍었어요? 다음 차기에 누구 찍을 겁니까? 인간은 그저 질문만 하다가 사라져요. 질문만 하다가 죽어요. 답변도 없어요. 갈 데까지 가 보는 거예요. 그러나 성도는 이미 답변이 있어요. 뭡니까? 이 세상에 어떤 나라도 내 나라 아니다. 그게 바로 자유 아닙니까? 죽어도 살고 살아서도 죽지 않는 나라. 내 나라. 그것은 바로 우리의 책임자가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발걸음을 어디로, 어느 쪽으로 인도하는지 깨닫게 하옵소서.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이 발걸음 인도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속한 나라와 눈에 보이는 나라가 차이나고 차별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쪽으로 저희를 인도해 주심을 매일같이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