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비나이다

아빠와 함께 2023. 8. 20. 18:06

비나이다 

2023년 8월 20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0:11-16

(10:11) 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 하라
(10:12) 여호와께서 그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 명철로 하늘들을 펴셨으며
(10:13) 그가 목소리를 발하신즉 하늘에 많은 물이 생기나니 그는 땅 끝에서 구름이 오르게 하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하게 하시며 그 곳간에서 바람을 내시거늘
(10:14) 사람마다 우준하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10:15) 그것들은 헛 것이요 망령되이 만든 것인즉 징벌하실 때에 멸망할 것이나
(10:16) 야곱의 분깃은 이같지 아니하시니 그는 만물의 조성자요 이스라엘은 그 산업의 지파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라

하나님에게는 엄연한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 외에 다른 신’에 대해서는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 외의 하나님이나 그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는 사정 봐주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 징벌과 심판에 대해 대자연체가 다 동원됩니다. 대자연이 공연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가차없이 공격합니다. 공격 목표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것은 우상과 그 신봉자입니다. 그렇다면 우상 아닌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야곱의 분깃’ 으로 나옵니다. 야곱에게 준 것이 있었다는 겁니다. 야곱에게 준 것은 마치 연필의 심처럼 핵심되는 겁니다.

그것만이 우상 아닌 겁니다. 창세기 28:11-13에 보면, “한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창 28:11-13)

즉 많은 천사들이 야곱 본인에게 쏟아지는 것을 보고 야곱은 오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뭘 주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목적으로 뭘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야곱의 자리’ 에다 퍼부어 주시는 겁니다. 그 야곱의 자리가 유일하게 우상이 아니신 분인 예수님이십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우상 척결에 나서시는 이유는, 인간이 범죄한 후에 자기 중심적으로 신을 찾고 만들기에 나서기 때문입니다. 소위 “비나이다”를 인간들은 멈추지 않습니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하다가 ‘부처님께 비나이다’ 하다가 ‘하나님께 비나이다’ 하다가 요즘은 과학자나 자본가에게 비나이다 합니다.

이 ‘비나이나’에 나서는 자들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일절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라오스의 어느 힌두교 신전에 가면 제단에 돌도 놓여 있고 작대기도 놓여 있습니다. 그 신전에 지붕이 없는 이유는, 신이 하늘에서 내려다보는데 수월하기 위해서랍니다. 그러니까 신전 내부 인테리아조차 인간에게 먼저 납득이 되는 조건을 갖추게 되는 겁니다.

즉 인간이 신전을 만드는 이유는 아무 데서 신을 만나지 않고 인간쪽에서 정성껏 꾸며놓은 영험한 장소가 신을 만날 확률이 높을 것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이것 역시 인간쪽에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인정못하는 경우입니다. 힌두교 신전에 돌을 갖다 놓는 이유는, 기도 후에 참으로 신이 자기 기도에 응답했는지 여부를 제단에 놓여 있는 돌을 드는데 성공했는지 여부로 측정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작대기가 놓여 있는 이유는, 기도 응답 위에 자기 팔이 길어졌는지 여부를 작대기로 측정해보라는 취지에서 거기 놔둔 겁니다. 요즘 세대에서 보면, 비웃음거리 밖에 안 되겠지만 그 신전을 찾는 힌두교 신자들에게 마음이 한없이 평온해 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기대한 그런 식의 신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은 자기 마음에 문제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도 요청에 응답할 줄 아는 그런 신이 참으로 살아있는 신이라고 믿고 싶어합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우상이 아닌 이스라엘에 알려준 하나님의 안목으로 봤을 때, 인간은 어떤 점에서 문제가 큰 겁니까? 그것은 범죄한 이후의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인 겁니다.

즉 이 세상에는 천사와 짐승, 그 사이에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의 자리는 그대로 비어있습니다. 이 비어있는 인간의 자리에 예수님께서 참된 인간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디모데전서 2:5에 보면, 참으로 깔끔한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이 대목에서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의 뜻은 예수님의 본질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겁니다. 그렇게 해서 소위 인간들이라는 작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제대로 인정받을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여 ‘비나이다’라고 할 수 있는 자격 자체가 못됩니다. 그들이 찾는 것들은 모조리 우상인 이유는, 우상이 아닌 참된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죽었다’는 말은 ‘없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은 ‘없는 하나님’ 모습으로 살아계시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들은 거짓된 예수님에 향하여 기도하고 있었던 겁니다.

자신의 아쉬운 것과 자신이 필요한 것, 자신이 원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꼭 들어주셔야 한다고 고집부리게 됩니다. 인간의 자리에 들어설 자격도 못되는 자들이 예수님에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달라는 식으로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시는 언약의 말씀은, 그 언약 받은 자로 하여금 자신의 자리가 없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십니다. 

즉 자신의 자리들은 빈 자리가 되는 식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활동을 해오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어집니다. 에베소서 2:20-22에 보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세상에서 핍박을 많이 받았지만 성령님께서는 핍박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 보시기에 건축 자재에 불과합니다. 누가 불러 주지 아니하면 그 자체로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었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첫 번째 돌이라는 겁니다.

바로 이 돌과 동일하게 이 세상에서 버림받는 자들이 성전의 건축 자재가 되어 하나님께 친히 거하는 성전을 이룹니다. 사람들이 신을 붙잡기 위해 만든 건물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사람을 붙잡아 두는 성전이 되기 위해 성령에 의해서 부름받은 바로 그들이 유일하게 우상숭배자가 아닌 겁니다. 왜냐하면 이들만이 십자가를 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으로 인해 매사에 십자가를 가리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5강-예레미야 10장 11~16절(비나이다)230820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0장 11~16절입니다. 구약성경 1067페이지입니다.

“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 하라, 여호와께서 그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 명철로 하늘들을 펴셨으며, 그가 목소리를 발하신즉 하늘에 많은 물이 생기나니 그는 땅 끝에서 구름이 오르게 하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하게 하시며 그 곳간에서 바람을 내시거늘, 사람마다 우준하고 무식하도다 금 장색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그것들은 헛 것이요 망령되이 만든 것인즉 징벌하실 때에 멸망할 것이나, 야곱의 분깃은 이같지 아니하시니 그는 만물의 조성자요 이스라엘은 그 산업의 지파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라”

차이와 구분을 매기시는데, 그 방법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시는데 야곱을 통해서 드러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야곱을 통해서 전달되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아니하는 자는 필히 우상 숭배자가 될 수밖에 없는 그런 구조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야곱의 분깃이라는 것은 야곱에게 대대로 상속분으로 내려오는 그 무엇, 영원한 거죠, 그것이 연필에 보면 심이 들어있잖아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 연필이 우주라고 하면 이 우주의 심이 되는 그 요소를 이스라엘에게 이미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 연필심 안에 들어올 때 그게 우상이 아니고, 나머지는 다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우상에 대해서 어떤 계획을 하고 어떻게 처리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여기 본문에 보면,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지요, 명철로 하늘들을 펴셨지요, 목소리로 하늘에 많은 물이 생기나게 하셨지요, 비가 오고 번개 치게 하셨지요, 이런 것은 우상에 대한 아낌없는 심판을 행사하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도 이미 그 뜻을 전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지런히 말씀을 해주셨어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출 20:3) 이것은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하나의 길이 된다는 겁니다. 하나의 매개가 되고, 하나의 중보자가 되신다는 겁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에 보면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상당히 깔끔해요.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리스도 이분은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표현한 겁니다. 본질이 사람이 아닌데, 사람으로 오니까 사람들이 헷갈린 거예요.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하나님은 보이지 않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우상을 섬길 수밖에 없는데, 야곱의 언약에 완성체로 하나님이 주신 연필심에 해당되는 그 약속의 구현체, 그 약속을 이 땅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또는 사람으로 이 땅에 나타나신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바로 중보자이신 예수그리스도라는 겁니다.

얼마나 이게 간결하고 깔끔합니까. 이것을 여러분들은, 그리고 또 세상에 있는 많은 교회 다니는 분들은 안다고 우기는데, 뭘 놓치고 있느냐 하면 이것 외에 다른 모든 것은 심판받는 사실을 자꾸 잊어먹고 있어요.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다 심판받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이 우주의 하늘과 번개 치고, 구름이 모이고, 천둥 치고, 산불 나고, 난리도 아니죠. 이게 심판용인 거예요.

이런 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평화라고 하는 겁니다. 깔끔하니까 평화인 거예요. 깔끔하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의 간결함, 깔끔함, 이것 외에는 다 제거된다는 이 단출하고 명쾌하고 명확한 이 사실은 모르고 거기에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나는요? 나는 어떻게 됩니까?’라고 자기 자신을 자꾸 곁들여 붙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이 우상에 대해서 예레미야가 연속적으로 이야기했는데, 우상의 시작은 어디서부터냐 하면 ‘비나이다’부터 시작합니다. 두 손을 비비며 ‘비나이다~비나이다’라고 하죠. 보통 옛날 조선 시대 같으면, ‘비나이다~비나이다~천지신명께 비나이다~’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천지신명 자리를 그걸 한번 바꿔보는 거죠.

불교에서는 거기에다 ‘비나이다~비나이다~부처님께 비나이다~’라고 하고, 거기 부처 자리에다 하나님, 예수님을 집어넣어 보세요. ‘비나이다~비나이다~하나님께 비나이다~예수님께 비나이다~’ 그래서 우상이 되는 거예요. 이 ‘비나이다’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을 모르고, 자기는 그냥, 자기가 어떻게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을 안 하고, 자기는 그냥 멀쩡하게 ‘비나이다’ 하고 있으면서 그냥 앞에 종교 이념만 바꾸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 교회 안 나가고 절에 가는 사람은 어디에 비는가. 그들은 ‘비나이다~비나이다~과학에게 비나이다~’라고 하고, 이게 약간 발전하면 ‘비나이다~비나이다~자본주의에 비나이다~’라고 돈에 비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를 안 나와요. 자식들이. 젊은 사람들이. 돈에 비느라고. 과학에 빌기 위해서. 그러니까 옛날에 천지신명께 비는 거나, 오늘날 과학과 자본주의에 비는 거나, 달라질 것은 없고, 자기는 꿈쩍도 안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시대에 우상은 뭔가 형체를 만드는 우상이었어요. 형체 만들기 우상은 이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지금은 형체를 안 만들잖아. 누가 뭐 부처보고 부처를 믿나? 불교 신자도 그렇게 안 믿겠다’라고 하죠. 불교도 바뀌었어요. 부처를 믿지 않고 제2의 부처가 나오는데 그게 보살이에요. 불교 교리에 대해서 우리가 신경 쓸 필요는 없는데, 부처가 신이 된 것이 보살이에요. 미륵보살.

부처 가지고 ‘나를 본받아라. 도 닦으면 해탈한다’라고 하면 먹혔던 것이 이게 인기가 없어졌던 거예요. 역시 불교도 신을 도입해야 인기가 있어요. ‘비나이다’에 대상이 없으면 종교 자체가 형성이 안 되는 것을 불교가 간파한 거예요. 그래서 추상적인 부처가 미륵보살이 되는 겁니다. 미륵보살이 뭐냐 하면 이미 해탈된 사람이 아직 해탈되지 않은 사람들, 자기 욕심에 빠진 사람들을 구제한다고 다시 세상에 온다는 겁니다.

자기나 잘하지 무슨 남까지 걱정하고 있어요. 한마디로 본인이 본인을 사기를 치고, 사기 친 본인을 또 사기를 치고, 사기의 끝은 어디인가죠. 이별의 끝은 어디인가. 사기의 끝은 어디인가. 본인도 몰라요. 내가 어디에서 어디까지 사기 치는지. 라오스(Laos)라는 곳에 가면 힌두교 신전이 있는데, 그 힌두교 신전에 다니는 신도들이 신전에 들어가요.

들어가면 그 신전에는 지붕이 없습니다. 힌두교 신전에 지붕이 없는 이유가 하늘에서 내려다보기에 좋게 하려고 지붕이 없어요. 잘 보이라고. 그러니까 신전을 짓든, 뭘 하든, 인간 자기에게 납득이 되는 신이에요. 신과 나 사이에 소통이 잘 되는 신을 본인이 믿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제가 이런 이야기 했지요. 인간은 자기가 믿을 만한 것을 본인이 제조해내는 거예요.

‘너는 불신자야’라는 소리 듣기 싫어서 내가 믿을 만한 내용을 본인이 구성해요. 자기가 소설가처럼 구성한다고요. 그러면 힌두교에서 왜 신전을 짓느냐. 신을 붙잡아두기 위해서입니다. 도망가면 안 되니까요. 특정 장소에 신에게 만남의 장소를 만드는 거예요. 요새 말하면 카페죠. 다른 카페로 가면 안 돼요. 그 신전은 뭐냐 하면 인간 보기에 굉장히 성스럽고, 아름답고, 품위 있는 그런 내부 인테리어를 해요.

그게 뭐냐 하면 보통일반 사람들의 살림집과 달리 아주 고상하고, 거룩하게 만들어요. 그러면 신이 와서 ‘이것은 진짜 내부의 품격이 나의 품격을 살리는구나’라고 해야, 신이 마음이 흡족해서 그 집에 들락거릴 것이 아닙니까. 그 집에 와 있으면, 이제 만남의 장소가 되니까 정기적으로 시간 정해서, 그 집에 가서 만나면 하나님도 만나고, 본인도 만나고, ‘뭘 원하느냐?’라고 하면 ‘이걸 비나이다’라고 하는 이게 되는 거예요.

지금 현대인들이 배웠던 사고방식이야말로 아이들 소꿉놀이하는 거예요. 이 종교라는 것이 아이들 소꿉놀이라고요. 뭡니까, 이게? 신 만나서 ‘비나이다’나 하고 집에 가고, 다시 신 만나러 교회 오고, 예배당에 찾아오고, 이게 뭡니까? 그러면 ‘이게 무슨 작당질이냐?’라고 하면 비는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다는 겁니다.

그걸 보고 우리는 생각하죠. ‘하여튼 수준 따라서 간다니까, 수준 따라’라고. 하여튼 신이 인간 수준 따라서 가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여러분들이 초보인데 바둑 18급 둘 때, 아무것도 모를 때, 목사가 그것을 유도하니까, 전문가니까 그러는가 싶어서 얼마나 그것을 따라 했습니까. 그러면 지금 수준 높아요? ‘예배당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라고 하면 ‘그래도 내 마음이 불편해서 안 되겠어’라고 자기 마음이 불편하대요.

도대체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 손에 놀아납니까. 인간의 이러한 이상한 심보는요, 드라마 보면서 나타나요. 드라마 보면서, 보는 사람들이 아주 간절히 비는 것이 있어요. ‘제발 주인공 좀 고생 덜 시키고 주인공은 죽지 않게 해주옵소서’라고 하고 있다고요. 주인공은 안 죽어요. 드라마 끝날 때까지 안 죽습니다. 이 세상의 주인공이 누구십니까.

이 세상의 주인공 되시는 분이, 주인공도 아닌 이런 인간들이 자꾸 잘못된 주인공을 ‘신’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내니까, 하나님께서 ‘진짜 주인공을 한번 보여줘?’라고 하시면서 죽어버렸어요. 신이 와서 이 땅에서 죽어버렸어요. 인간의 내면에서는 죽음이라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신은 없는 거예요. 굳이 하나님께서 ‘신이 없다는 것을 보여줘야 너희들이 정신을 차리지? 그지?’라고 하시면서 십자가에 죽으신 거예요.

이제 내막이 서서히 파악되십니까? 실상을 감 잡으시겠어요? 하도 신이 있으니까, 인간은 거기에 대고 ‘비나이다’를 하고 있는 거예요. 신전 세우고. 자기들은 그게 우상인지를 모르고 있어요. 항상 우상이 아닌 것이 뭐냐. 죽은 신이 우상이 아닌 거예요. 유대인은 그것도 모르고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 이러고 있다고요. 하나님이 자기들 손에 죽은 것도 모르고.

그 여호와가 자기 손에 죽은 것도 모르고. ‘여호와 하나님’을 아직도 찾고 있어요. 유대인만 그렇겠어요? 교인은 안 그러겠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고, 성당들도 마찬가지죠. 특히 성당 같은 경우에는 사람들을 끌어모아서, 아까 제가 힌두교 신전 이야기한 것처럼, 성당은 역사와 전통을 들이밀고 그것을 체계화시키고 교육해요. 향로 연기 피우며 흔들어 대고, 유니폼 복장도 띄면서 아이들 보는 일본 만화영화에 나오는 그런 식으로 고상하고 거룩한 분위기를 내고, 머리는 쓰는 관은 또 어떻고요, 도대체 뭐 하는지.

그러니까 교황이나 신부가 관 쓰는 거나, 중이 자기 머리 깎는 거나 똑같은 차원이에요. 그런데 그런 낮은 레벨을 원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왜? 그래야 마음이 편하다는 거예요. 제가 수요 설교에서 이런 이야기 드렸는데, 인간은 결점이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아예 버림받은 거예요. 직장 다니다가 정년 퇴임할 때 그 느낌이 뭐냐 하면 버림받은 느낌이에요.

‘선배님 수고 참 많이 하셨어요. 우리 회사는 더 이상 선배님이 필요 없어요. 쓸데없습니다. 잘 가세요’라고 하게 되면, 회사 사무실에서 문방구에서 산 상자에다가 자기 물건 주섬주섬 담아서 대기업빌딩 정문을 등지고 나오는 거죠. 저는 해보지는 않았습니다만 드라마에서 봤지요. 잘려서 나오는 거. 그게 바로 ‘당신은 버림받았어’라는 거예요. 까이기 전에 깐다고요? 마찬가지예요.

저리 까이나 이리 까이나, 이 세상은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그걸 죽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신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종교를 찾는 거예요. /비록 사람에게 버림받지만, 신에게는 인정받으려 하고, 신에게 버림받지 않으려면 제가 뭘 하면 되는지 묻는 거죠. 뭘 하긴 뭘 해요. ‘하지 마’이지. 하면 안 되죠. 뭘 해도 소용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나님의 야곱에 상속된 기업 된 말씀에 의하면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은 없고 짐승뿐이에요. 쉽게 말해서 천사와 짐승 사이에 비어있어요. 천사와 짐승 사이에 비어있습니다. 야곱의 천사가 꿈속에서 사다리 타고 내려왔잖아요. 천사가 내려옴으로써 야곱은 본인이 있다고 여겼는데, 나중에 천사를 만나서 내가 없다가 돼요.

야곱은 빈자리가 되는 겁니다. 빈자리가 마련되어야, 이 빈자리에 채워질 언약의 주인공이 깔끔한 중보자가, 바로 내가 전에 내 자리라고 우겼던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2장 20~22절에 보면 이런 내용이 성경에 다 담겨있는데, 그걸 알아야 해요. 물론 성령이 와야 알게 되겠지만, 알아야 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여기에 ‘나’가 어디 있어요? 나는 없어요. 지금 하나님이 찾는 것은 건물 구조예요. 전체 건물이고 성전이에요.

건축 자재는 건설 공사할 때는 널브러져 있지요. 서서히 준공되는 순간, 건축 자재로의 나는 소멸하고 사라져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처소, 성전이죠, 하나님의 성전이 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건물 자재가 필요한데, 그 자재는 감리사에서 와서 ‘아, 이건 함량이 미달이네’라고 하면서 건물을 짓지 못할 자재는 갖다가 버립니다. 그러면 어떤 인간도 하나님 보시기에 갖다 버릴, 버림받을 그런 요소라고 인정할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퉁이 돌이 된 거예요. 모퉁이 돌이 되시고 유일하게 가치 있는 첫 번째 인간이에요. 진짜 인간이에요. 인간에게는 없는 인간입니다. 그분에게서 성령이 나옵니다. 그분에게서 성령이 나오면 성령이 예수님처럼 가치 있는 인간이 되도록 성령이 여기저기서 건축자재용으로 우리 죄인을 거기에 끌어모아서 하나님의 성전이 이루어진다고 이렇게 에베소서 2장 20~22절까지 이야기한 겁니다.

여기에 내가 구원받은 것이 어디 나옵니까? 자기 구원받은 거 안 나와요. 그러면 성령께서 그런 일을 하실 때 얼마나 핍박을 받겠어요. 예수님도 핍박받았는데. 나 좀 넣어달라고 떼쓰고, 내가 신학교 나온 목사인데 나를 넣어줘야지 누구를 넣어주냐고, 이런 식으로 얼마나 압력을 가하겠어요. 성령은 절대로 그런 압박이나 압력을, 그리고 신앙 연조(年祚), 직분, 이런 것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너 몇 개월 다녔어? 교회 온 지 몇 년 됐어?’ 이런 거 묻지 않습니다. 건강하고, 악하고, 병든 거, 그런 거 일체 고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뭐만 고려하느냐. ‘너 모퉁이 돌, 십자가, 방해할래? 안 할래?’라는 것만 물어요. 어떤 분이 수요일에 우리 집에 오셔서 늦게까지 계셨는데, 이야기하고 수다 떨다가 시간 후딱 갔는데 나중에 자기 휴대폰 들어있는 가방을 잃어버렸어요.

오용익 목사님의 사모님이 가방을 잃어버려서 찾았는데 아무리 찾아도 못 찾았어요. ‘식당에 놔두고 왔나? 교회에 놔두고 왔나?’ 여기저기 다 찾아봤는데 못 찾았어요. 이게 얼마나 은혜로운지요. 내가 없어요. ‘나’라는 자체가 인간은 없는 거예요. 나중에 보니까, 의자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 뒤에 숨겨져 있었어요. 주께서 원하는 자는 제발 십자가를 가리지 않는 자를 찾습니다.

왜? 십자가만 찾기 때문에. 십자가 그분만 모퉁이 돌이기 때문에. 그런데 자꾸 인간들이 거기서 얼쩡거리는 거예요. 이 땅에 우리 자체가 십자가 훼방물로 태어난 거예요. 방해물이에요. 성령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가만 안 계시죠. 왜 자꾸 버티냔 말이죠. 저리 좀 치우고 나는 십자가 보고 싶은데, ‘주여, 제가 오늘 성경 열심히 읽었습니다’라고 하니까, ‘좀 비켜줄래?’ 주님은 십자가 보고 싶은데 자꾸 자기가 열심히 한 것을 내세우는 거예요.

‘저들과 같지 아니하며’라고. 뭐 같지 아니해요. 똑같은데. 하나님이 찾는 공통점은 뭐냐.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제가 퀴즈를 낼 테니까 여러분이 한번 속으로 맞춰보세요. 강의시간이면 손들고 하겠는데 설교시간이니까 속으로만 맞추세요. 폐어(폐(肺)로 숨 쉬는 물고기)와 연어와 소, 이 셋 중에서 어느 것이 서로 가까운 사이입니까?

정답은 폐어와 소가 둘 다 폐로 숨쉬기 때문에 하나의 분류법으로 분기(分岐)된다는 겁니다. 이 내용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물고기는 없다’라는 책에 나옵니다. 물고기 자체가 어류과학자들의 분기에 보면 물고기 자체가 없어요. 소와 물속에 사는 물고기와 전혀 상관없는 거 같은데 오히려 그 둘이 상관있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사람들이 세상을 볼 때 분류해서 보거든요. 그걸 수련회에서 언급한 계열체라고 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자기가 ‘비나이다~비나이다~’에 흡족하도록, 내가 가치 있다고, 나는 존재할 이유 있다고, 그것을 전제로 해서 본인이 우상으로 존재해서 자꾸 하늘나라의 변화와 산불 나고 태풍 불고하는 그것에 대해 ‘비 그만 오게 해주세요. 너무 가물어서 비 오게 해주세요’라고 자꾸 비는데, 그것과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무슨 관련성이 있어요. 없어요.

그런데 왜 자꾸 자기를 위해서 빕니까? 나를 통해서 십자가가 전달되라고 빌지 않고. 왜 본인을 위해서 빌어요. 그러니까 자꾸 가방을 찾는 거예요. 내가 어디 있는지. 우리는 이미 잃어버려야 해요. 짐승 아니면 천사입니다. 짐승을 천사로 바꾸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가. 끝으로 히브리서 11장 2~3절 읽고 마치겠습니다. 너무 어려워서 그냥 읽기만 해도 어려워요.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과학자들은 이런 말 들으면 미칩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과학자들은 보이는 것만 측정해요. 측정하고 양을 재고 그래요. 그게 바로 오늘도 과학에게 ‘비나이다~비나이다~’ 하는 거예요. 모르면 과학자에게 무조건, 의사에게 무조건 달려가요. 법을 모르면 변호사에게 ‘비나이다~비나이다~’

우상 섬기는 그 짓이 오늘날에 우상의 무당들이 누구냐. 과학자들이고 법 다루는 사람이고 그것을 찾고 있는 자들이 우리라면 우리에게 다시 한번 성령이 오셔서,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가리는 짓인 것을 발견하고,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감사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상의 사라진 세대가 아니라 우상이 만천하에 보편화 되고 덮쳐있는 그런 세대인 것을 왜 우리가 몰랐습니까. 십자가 가리는데, 온 권력과 모든 사람이 총동원되었다는 사실을 이제는 우리가 눈을 뜨고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가 비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우리를 위해 빌고 있음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일오후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정한 왕  (1) 2023.09.03
상처  (0) 2023.08.27
구멍 난 하나님  (0) 2023.08.13
죽음처리  (0) 2023.08.06
마음의 할례 완성  (0) 2023.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