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들추어냄
2023년 9월 24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1:14-17
(11:14) 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곤액을 인하여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을 듣지 아니하리라
(11:15) 나의 사랑하는 자가 많이 행음하였으므로 거룩한 제육이 그에게서 떠났거늘 나의 집에서 무엇을 하는고 그가 악을 행하며 기뻐하도다
(11:16) 나 여호와가 그 이름을 일컬어 좋은 행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라 하였었으나 큰 소동 중에 그 위에 불을 피웠고 그 가지는 꺾였도다
(11:17) 바알에게 분향함으로 나의 노를 격동한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의 악을 인하여 그를 심은 만군의 여호와 내가 그에게 재앙을 선언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드리는 기도를 듣지 않겠답니다.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점에 대해서 성도는 도리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것은 인간 본인이 어느 정도로 저질하고 악독한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꾸만 자신의 가치를 보호하려고 합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자신의 그렇게 악하지 않음을 자부하고 싶어합니다.
자신에 대해서 긍정을 해야 타인에게 다가설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여깁니다. 타인에게 유익이 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런 자세로 하나님에게 다가오는 것을 하나님쪽에서 거부하십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자신에 대해서 몰라서 너무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자꾸만 좋게만 이해하고 포장하려고 합니다.
이게 바로 사기(詐欺)입니다. 인간들의 무심코 본능대로 움직여도 주님 보시기에는 사기입니다. 그것은 인간 속에 ‘자기 의’가 담겨있는 그 ‘자기 의’를 사수하는 식으로 본심들이 움직여 나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자신의 의 타인에게 다가갈 때도 유용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들의 생각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선지자 미가 7:5에 보면,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타인을 만나는 것을 자신의 가치를 지켜보려는 의도 때문입니다. 즉 사람이란 숨이 붙어있다고 해서 ‘산다’가 볼 수 없습니다.
나의 가치를 알아주는 자들에 의해서 세상 사는 보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 당신은 나름대로 참 노력했고, 훌륭했고, 성실하게 맡은 자리를 감당했어. 그러니 너는 너 자신에게 자부심을 가져도 마땅해”라는 소리를 듣게 되면 비로소 인간은 주위 사람들에 의해서 존재감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 사는 재미가 이런 데서 돋아납니다. 혹시나 주위 사람들이 다 떠나도 집안 가족이라도 있으면 얼마든지 내가 살 이유를 챙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것까지도 차단시킵니다.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로다”(미 7:6)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 살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겁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대표로 보여주시고자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사람은 여호와를 섬기지 않고 바알을 섬겼다고 선지자를 통해서 규정하십니다. 여호와와 바알이 차이가 뭐길래 사람들은 여호와를 버립니까?
바알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이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계시가 없는 겁니다. 그것도 인간의 죄를 먼저 들추어내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이 없는 신은 인간이 바치고 정성을 드리면 그것에 대해서 보답하는 식으로 상부상조하는 신입니다. 이렇게되면 바알에 있어 인간 가치는 훼손되지 않고 고스란히 살아있게 됩니다.
인간을 격려해주는 선지자를 사람들은 선호하고 환영합니다. 이런 것을 봤을 때, 모든 인간 내부에는 ‘자기 의’가 들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자기 의’는 자력으로 끊어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이 ‘자기 의’를 유지하고 지켜나는 것을 사명이요 운명으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바로 이런 자세로 하나님께서 기도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기도를 듣지 않을뿐더러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인간 전체를 망하도록 밀어붙이시겠다는 뜻을 지니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인간들을 몰고 가시면서 하나님께서 얻고자 하시는 바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인류 최후의 날을 미리 공고하십니다.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 같은 것이 자고 이래로 없었고 이후 세세에 없으리로다”(욜 2:1-2)
즉 하나님의 날을 캄캄한 날입니다. 심판의 날입니다. 이는 모든 인간들이 이런 대우를 받아만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이점에 인간들은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여전히 인간들의 자신의 의와 가치를 사수하려고 할 겁니다. 따라서 마지막 때는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리 주님께서 죄를 들추어내는 작업을 수행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께서는 인간 세계의 극한까지 몰아붙이십니다. 즉 언약이란 인간들이 그 언약을 지켜주실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왜 인간들이 언약을 지킬 수 없는지 밝혀나가시는 일을 주님이 해나가시는 겁니다. 이것이 신약에 들어와서 본격으로 실시됩니다. 즉 인간의 의는 그 어떤 경우라도 버티고 있음을 들추어내십니다.
예를 들면, 디모데후서 3:1-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여기서 사람들은 어떻게 해든지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돈을 사랑하지 않으려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마저 자기 의를 지키려는 사기인 것으로 들추어냅니다. 왜 그런가 하며는 하나님의 최종 뜻은, 인간의 이름을 지키고 주의 이름으로 대체하시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를 들추어내는 있어 대자연이 협조합니다. 이것은 대자연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저희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욜 2:18)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대자연이 쏠리게 되어 있습니다. 결코 인간들의 이름의 가치를 위하여 대자연이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대자연의 작용으로 이 세상은 최후의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실내에 모든 조명들이 다 꺼진 상태인 것처럼 그 어떤 것도 고유의 빛을 낼만한 가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모든 빛은 오로지 주님의 이름에서 나오는 빛만 인정해야 합니다. 이런 결과를 위해 주님은 철저하게 인간의 죄를 들추어주니 이런 언약 실시에 대자연과 함께 성도도 참여된 것을 감사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는 자신을 속여서 자기 의로움을 유지하려는 부담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0강-예레미야 11장 14~17절(죄를 들추어내심)230924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1장 14~17절입니다. 구약성경 1068페이지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곤액을 인하여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을 듣지 아니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많이 행음하였으므로 거룩한 제육이 그에게서 떠났거늘 나의 집에서 무엇을 하는고 그가 악을 행하며 기뻐하도다, 나 여호와가 그 이름을 일컬어 좋은 행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라 하였었으나 큰 소동 중에 그 위에 불을 피웠고 그 가지는 꺾였도다, 바알에게 분향함으로 나의 노를 격동한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의 악을 인하여 그를 심은 만군의 여호와 내가 그에게 재앙을 선언하였느니라”
“너는 이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 저주받도록 내버려 두어라” 저주도 하나님의 친히 살아계심을 증거 하는 훌륭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지옥은 있어요. 어차피. 그리고 어차피 이 세상은 그냥 지나가는 겁니다. 최종 도착지점은 천국이냐, 지옥이냐입니다. 따라서 천국 가는 사람이나 지옥 가는 사람도 둘 다,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주셨느냐는 것을 미리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에 천국 가는 사람이라면 오늘 본문을 보고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소용없어”라고 할 때, 천국 가는 사람은 무척이나 기뻐합니다. 왜냐 하면 내가 미처 모르는 내 죄를 주님께서 친절하게 진노를 곁들여서 그걸 깨우쳐 주시니까 이게 얼마나 감사합니까. 내 자신에 대해서 내가 모르고 있었는데 “나는 너의 기도를 안 듣는다”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 ‘아,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듣지 않는 분이구나. 그 정도로 나는 엉망이었구나’라는 것을 알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으니까 이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참 기쁜 일이죠.
그런데 이상하게 지옥 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나는 너와 상대 안 해”라고 할 때 이상하게 분노하고 화를 내요. ‘내가 하나님 앞에 한 게 얼만데. 얼마나 많이 헌금하고, 얼마나 봉사했는데. 주님 그렇게 나오면 참 섭섭하죠’라는 이런 마음. 물론 하나님에게는 이럴 수 없어요. 선지자 보고 시비 걸고, 선지자 보고 화를 퍼붓지요.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지시합니다. “이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마. 망하도록 그냥 내버려 둬”라는 하나님의 마음이 진심이기를 우리는 바랍니다. 진심이어야 해요. 미가 7장 5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찌어다” 이웃을 믿지 말라는 거예요. 그리고 친구를 의지하지 말라는 겁니다.
심지어 내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 사람을 믿지 말라는 겁니다. 아직은 아멘을 멀었습니다. 좀 더 나가야 해요. 6절을 보면 “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사람이리로다” 이제 더 확장됩니다. 집안 식구도 믿지 마라. 이 말을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너는 너 자신을 믿지 마라”
왜냐 하면 인간은 자기 의를 지키는 재미로 살아가요.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잘난 맛에 살다 보면, 아침에도 언급했지만, 인간의 말하는 입과 행동, 모든 것이 사기(詐欺) 치는 거예요. 거짓말 내뿜는 것 외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재주는 없습니다. 부부간에도 자식 간에도 전부 다 거짓말 담요로 둘둘 감아서, 누구를 만나도 거짓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비 언약이라고 이야기해요. 살다 보면 아까 미가 7장에서도 언급했지만, 사람이 산다는 것이 뭐냐 하면 혼자는 살 수가 없어요. 사람이 목숨이 안 끊어져도 죽음을 경험하는 순간이 뭐냐 하면, 내 말을 들어주지 않고, 내가 말을 건넬 수 없는 상태, 남이 없을 때 인간은 죽음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이게 참 어려운 건데요, 인간이 나 여기 있다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에요.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옆에 있을 때 비로소 살만한 희망과 재미와 즐거움을 갖습니다. ‘나 어때? 나 어때?’ ‘괜찮았어’ ‘그렇지? 나 더 살아야 하지? 그치?’ ‘그럼~그럼’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데 어떻게 이웃이 없고, 친구 사귀지 말고, 그렇게 할 수가 있어요. 친구 있어야 하죠. 특히 친구, 이웃 버리더라도, 가족은 절대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분명히 인생을 살면서 이점을 알아야 해요. 인간은 역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전설을 원한다는 거. 내가 전설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겁니다. 비록 남들은 알아주지도 않지만.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나에게 전설이며, 이걸 혼자서 알고 있으면 이건 죽음이에요. 그걸, 내가 이렇게 잘나고 전설적인 존재인 것을 주변에 누가 알아줘야 하는데, 나이 들면 다 떠나지만, 가족만큼은 ‘그래, 당신 잘했다고 해줄게’라고 하면 그것만 해도 입이 벌어집니다.
‘그렇지? 나 잘살았지? 그치? 고생한 거 맞지?’라고 하면 ‘잘했어~당신 수고했어. 이제 됐냐?’ ‘그래~그것만도 됐어’라고 이렇게 주고받는 사기 안에서 웃음 꽃은 피죠. 저쪽도 사기고 이쪽도 사기고 다 사기 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거짓인 거예요. 인간 사는 것 자체가 사기꾼으로 산다는 그것을 알 때까지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선지자를 보내서 구약을 통해서 얼마나 인간 속을 파헤치는지요. 끝까지.
어떤 인간도 믿을 만한 자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그 이유가 뭐냐? 네가 너를 믿을 만한 자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네가 매일같이 너에게 사기 쳤잖아. 그걸 이상 자아라고 해요. 내가 생각하는 나를 딱하니 설정해놓고, 실제 나와 내가 꿈꾸는 나와, 그중에서 내가 꿈꾸는 내가 아마 진짜 나일 거라고 내가 나에게 사기를 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단도리를 해놓죠.
옛날 팝송 중에 ‘Paper Roses’(by Anita Bryant)라는 곡이 있는데, ‘종이 장미’라는 노래죠.
I realize the way your eyes deceived me
With tender looks that I mistook for love
So take away the flowers that you gave me
And send the kindness that you remind me of
Paper roses, paper roses
Oh, how real those roses seemed to be
But they're only Imitation
Like your imitation love for me
I thought that you would be a perfect lover
You seemed so full of sweetness at the start
But like a big red rose thats made of paper
There isn't any sweetness in your heart
Paper roses, paper roses
Oh, how real those roses seemed to be
But they're only imitation
Like your imitation love for me
이 ‘종이 장미’라는 노래에 어떤 단어가 나오느냐 하면 ‘imitation(모방)’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건 imitation이야. 그건 모방이라고. 어디서 사기를 쳐. 장미를 가져왔다고. 이건 나에게 종이 장미일 뿐이야. 마음이, 진심이 담기지 않은 종이 장미야. 나 그거 안 받아’라고 여자가 냉정하게 차버리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 대목을, 모든 것이 모방이고 사기고 거짓이고 조작이고 위선일 뿐인 이 세계를 하나님께서 끝까지 인간에게 그러한 죄성을 다 까발려주시는 그런 하나님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왜냐 하면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노리시고 원하시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지금 우리가 예레미야 구약이잖아요, 계속 신약까지 갑니다.
“기도하지 마. 기도해도 안 들어줄 거야. 기도해도 소용없을 거야. 너는 인생, 계속 사기 치면서 살아”라고 끝까지 끝까지 밀어붙이십니다. 끝까지 밀어붙일 때 신약에 와서 하나님께서 제시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네 이름 말고, 사기꾼인 너의 이름 말고, 야곱 말고, 아브라함 말고, 주의 이름” 주의 이름의 특징이 이름이 없어요. 아담에 속한 이름이 없어요.
예수라는 이름은 그 당시 흔한 이름이에요. 유일한 독특한 이름을 자신에게 불리도록 하지 않았어요. 독특한 이름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인자’. 사람의 아들이에요.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은 사람인데 이름이 없어요. 이 말은 이 사기꾼 세상과 떨어진 관계, 사기꾼 세상 출신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뭐냐 하면, 이제 내 이름으로 사는 것을 그만 산다는 뜻이에요.
나는 사기를 쳐도 자꾸 치니까, 칠 수 있는 밑천 거리도 떨어지고, 남을 자꾸 속이려고 하니까 아무 내용 없는 빈 내용, 빈 수레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데 그냥 말만 할 뿐이에요. 그래서 목사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영발인가, 말발인가. 사람들에게는 영발은 먹히지 않고, 말발이 먹힙니다. 왜 영발은 먹히지 않느냐면 영발은 십자가를 경유 해서 성령이 나오게 되어있어요.
그렇다면 인간은 새삼스럽게 ‘하나님 기도합니다. 뭐 합니다. 뭐 봉사합니다’라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왜냐 하면 그것 자체가 십자가 앞에서 전부 다 사기꾼이라는 것이 완전히 발각되었기 때문이에요. 우리의 이름은 남에게 사기 치기 위한 용도로 있는 이름이 내 이름이에요. 그래서 보통 서류할 때 사인하잖아요. 그게 자기 이름이라고요. 무슨 집 계약하면서 ‘예수’라고 사인하는 게 어디 있어요.
인간이 이렇게 사기꾼이 된 것은 인류 자체 역사가 그 내용에 그런 성격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역사가 나를 만들고 내가 또 역사의 일부가 됩니다. 누구를 욕하다가 그 욕한 역사의 일부가 바로 본인 자신이 되는 거예요. 이런 모든 문제, 끝까지 우리로 하여금 엉터리가 될 수밖에 없는, 모든 것이 사기가 되는 이런 상태, 이런 상태에서 주님께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바로, 이름을 교체시키는 작업을 신약에서 하게 됩니다. 인간은 왜 사기를 치는가. 그것은 자기 안에 자기 의가 있어서, 자기 의를 지키려고 인간은 사기를 치는 거예요. 나는 잘났으니까, 나에 대해서 존경심을 품고, 나에 대해서 함부로 하지 말라는 거죠. 그런 결과를 듣기 위해서 남에게 대화하고 의논하고 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이 사기 치고, 인간이 자기 의를 지키기 위해서 말들을 하는 그 말 속에 주님께서 친히 들어오시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의 한계를 드러내죠. 그 한계가 산상설교에 보면 나옵니다. 그들은 금식하고 구제하고 기도하고. 오늘 본문에 나오잖아요. “기도하지 말라” 산상설교에서도 기도와 관련해서 나온 겁니다. 그리고 덧붙이면 찬양도 했어요.
찬양 이야기가 나오니까 제가 생각나는 것이 어릴 때부터 찬양했던 사람들이 있어요. 그 집안이 다 찬양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목사님이고 부인은 사모님이고 아이들은 그 목사의 가정에 있는 아이 세 명. 그들이 미국 조지아주의 애틀란타에 살고 있었는데, 그 세 명이 그리스도의 군인라는 조직을 조성해서 여자아이 하나 꼬셔서 몸무게 32킬로 만들어서 굶겨 죽였잖아요.
그러면 그들이 나이 스무 살 중반이 될 때까지 얼마나 그 가정에서 찬양을 많이 했겠습니까. ‘죄 짐 맡은 우리 구주’라는 찬송이 일본말로 나올 수도 있고요. 그렇게 했을 건데, 그 찬양 자체가 자기를 사기 치는, 자기 의를 지키는 사기용으로 찬양을 한 거예요. 사기용으로. 자기 의를 스스로 뽑아낼 그런 의지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고. 인간에게 제일 싫은 것은 ‘너는 의가 전혀 없어. 너는 잘난 것이 없어’라는 그것이 인간은 가장 듣기 싫은 거예요.
신약에 나온 말씀에서 예를 하나 들면, 디모데후서 3장 1~3절에 보면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라고 되어있어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한다는 말씀이 나올 때, 사람들은 어떻게 사기를 치느냐 하면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고 예수님만 사랑하고, 나는 돈을 사랑하지 않고 주님만 사랑한다’라는 이런 식의 반응이 하나의 사기술로 필히 나오도록 말씀이 그렇게 유도한다는 것이 신약성경에서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아까 누가 참 좋은 질문을 하나 하셨어요. 그게 요엘에 나오는 질문인데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아직도, 마지막 종말의 때가 남아 있지 않겠느냐고 질문을 하셨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의도적으로 주님께서 성질이 급해서 빨리 모조리 다 종말인 것을 다 들춰내는 작업을 하신 거예요. 기다리면 종말이 오는 것이 아니고 미리 종말을 끄집어내 준 사람을 행운이라고 보시기 바랍니다.
그걸 굉장히 고맙게 여기고 이건 웬 횡재인지, 정말 횡재한 거예요. 내가 더 인생을 끌지 않더라도 이미 나는 맛이 갔다는 사실, 늘 우리는 평소에 하는 것이 전부 다 깐족대는 일밖에 없는데 자기가 마치 역사를 이루는 사람처럼, 자기가 전설의 주인공이잖아요. 이 땅에서. 자기 잘난 맛에 살잖아요. 누가 그렇게 했겠습니까? 고맙게도 나의 기도는 받지 않는다는 주님께서 친히 그렇게 해주신 거예요.
이게 얼마나 고맙습니까. 안 들키려고 가만히 있었는데 주님께서 친절하게 오셔서 내가 얼마나 사기꾼인 것을 들춰내니 세상에 이런 고마울 때가 어디 있어요. 고마워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에요. 정말. 깐족대지 말라는 것은 주님은 나를 다 안다는 겁니다. 왜 자꾸 네가 네 자신에게 희망을 걸어. 아닌데. 처음부터 아닌데. 처음부터 아니었고, 우리는 무식해서 몰랐지요. 뭔가 착한 일을 할 줄 알았죠. 아니었어요.
그게 십자가 앞에서 다 들통나는 겁니다. 그래서 요엘 2장에 보면 마지막 때가 이렇게 묘사되어있어요.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니” 쉽게 말해서 예수님 재림의 날이죠. “예수님 재림의 날이 이르리니”라고 하면 사람들이 흰옷 입고, 갑자기 한복이 막 팔리면서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하면서 갑자기 손에 종려나무 가지 들고 맞이할 준비 하잖아요. 실제로 예수님 나귀 타고 오실 때 그렇게 했고요.
그런데 요엘 2장에 2절에 보면 여호와의 날이 어떤 날이어야 하는지 이미 확정되어 있어요. 그날은 뭐냐 하면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이라” 해나 달이나 모든 것이 다 무너지는 날이에요. 압사당하는 날, 우주가 주저앉는 날이에요. 뭘 손에 들고 설쳐요. 그런 거 없어요. 해도 달도 꺼져서 조명시설도 다 꺼졌는데.
그러니까 호세아나 요엘 같은 선지서에서 이스라엘 멸망하고 난 뒤에 나오는 모든 구절은 우리가 나쁜 짓 해서, 우리가 탄소를 많이 배출하고, 환경 오염시키면서 플라스틱을 바다에 빠뜨려서 그런 것이 아니고요. 주께서 즉각적으로 이 세상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즉각 나서서 이렇게 희망 없는 세상을 만들어주시는 그것이 그렇게 고마워야 해요. 지구 온도 한 5도 높아져도 마땅하지요. 태풍이 열 몇 개 찾아와도 그렇고요.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이건 어려운 건데요. 호세아 2장 18절에 보면 “그 날에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며” 하나님의 언약을 인간에게는 이것을 세울 필요가 없어요. 사기꾼들이니까. 그러면 누구와 언약을 세우느냐. 자연과 언약을 세워서 적절할 때 무너지게 만들었어요. 하나님은 자연과 더불어 언약을 맺었다고 되어있어요.
22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하리라”라고 되어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면 오늘 본문에 감람나무가 나와요. 예레미야 11장 16절에 보면 “나 여호와가 그 이름을 일컬어 좋은 행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라 하였었으나”라고 나와요. 그런데 지금은 그 푸른 감람나무가 거기서 뭘 섬기느냐 하면 바알을 섬겨서 감람나무라고 할 수가 없어요. 저주받는 때이기 때문에.
끝으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어떻게 자기 의가 바뀌는지를 말씀드리기 위해서 오늘 본문 17절에 나온 것처럼 왜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알을 섬기는지, 그 점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해요. 왜 바알을 섬기느냐. 바알을 섬기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알 신은 언약이 없어요. 그러니까 예수 믿고 하나님 믿고 해도 언약이 빠지면 모조리 다 바알이에요. 불교입니다.
그러면 언약을 포함해서 믿으면 되지 않느냐. 그들은 그게 싫은 거예요. 왜냐 하면 언약은 우리가 왜 사기꾼인지를 들춰내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내가 잘난 맛에 살고 싶은데, 나는 이렇게 살아도 살만한 가치가 있음을 계속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데, 언약이 와버리면 “너는 애초부터 사기꾼이야, 살 가치도 없어”라고 윽박지르면서 오니까.
우리는 나의 의를 인정해 주고 나에게 희망과 나를 격려하고 ‘너는 훌륭한 사람이야. 너는 잘 될 거야. 하나님이 너를 도와줄 거야’라는 언약이 빠져버린, 복음이 빠져버린, 십자가 빠져버린, 그 이야기만 우리가 선호해요. 그것만 듣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덕분에 이런 좋은 가정이 되었다고 하나님에 대해서 적절한 찬양을 하고 싶은 거예요. 그 자체가 사기죠.
그러면 주의 말씀은 “친구 믿지 마라. 친구 의지하지 마라. 가족도 널 배신한다” 그러면 이건 무슨 말씀이냐고 하면, 그건 언약이니까 다 빼겠다는 거예요. 부정적인 것은 다 빼겠다는 거예요. ‘네가 나를 죽였다’라는 것도 빼겠다는 거예요. 이렇게 우리는 철저하게 바알 숭배자,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나 숭배자인 것을 철저하게 만들어주시는 것에 대해서 성도는 그것을 고맙게 여긴다는 점에서 불신자와 차이납니다.
‘그래, 나는 하나님께 감사해. 사랑해’라는 것이 아니고 ‘더 캐 주세요. 아직도 내가 숨기고 있는 사기술을 더 캐 주세요’ 철저하게 의로 위장된 그 악을 캐 주시기를 바라는 겁니다. 왜 그것을 감사하느냐 하면, 나는 이미 버린 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이름으로 사는 것은 이미 버린 몸이고, 나는 나를 못 버리는 데 고맙게도 주의 이름이 오셔서 이름을 교체하면서 “이제는 너의 이름 필요 없지? 너의 이름 쥐고 있을 필요 없잖아. 이제 내 이름으로 살아야지”라고 하시죠.
주님이 와서 교체작업 하는 가운데서 나의 죄란 죄는 몽땅 다 들춰내는 그 작업을 위해서 우리는 아직도 이 긴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내일 치의 남아있는 사기가 있어요. 내년에도 또 있어요. 어떤 사태가 일어나면 감췄던 사기가 또 드러나요. 그럴 때마다 이건 내 솜씨가 아니고 주님의 주신 솜씨여서 감사해야 해요. 내가 엉터리인 것을 알고, 내가 까불고 깐족대는 것을 안다면, 누굴 만나도 우리는 주께서 나의 죄를 지적하기 위해서 만나게 해주신 고마운 사람이라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하나 예를 들게요. 어떤 사람이 차 엔진 오일이 얼마나 미끄러운지를 실험한 사람이 있어요. 아주 과학적으로 엔진 오일이 인체에 어느 정도로 미끄러운가를 실험했어요. 1층에서 2층으로 내려오는 계단에 엔진 오일을 다 발라놨어요. 2층에서 내려오는 아주머니가 밟자마자 넘어져서 ‘아이고, 허리야’, 다른 한 남자가 고꾸라져서 한 바퀴 돌아서 미끄러졌어요.
그때, 과학은 말합니다. ‘역시, 엔진 오일은 미끄럽다’ 이게 바로 과학의 한계입니다. 뭐가 문제냐 하면, 내가 찾고 싶은 진리를 찾기 위해서 그것만 집중하는 거예요. 이게 진짜로 중국에서 있었던 일인데 위층 사람들이 너무 시끄럽게 하니까 보복하려고 계단에 기름을 발라놓은 겁니다. 그런데 이게 과학적 사고와 다른 점이 뭡니까? 왜 그렇게 하느냐? 내가 의롭기 때문에.
나는 진리를 찾고 있기 때문에. 내가 나에게 원하는 것을 내가 풀어버리면 나는 그만큼 우수한 존재가 되기 때문에, 그리고 가치 있기 때문에. 그걸로 끝이에요. 이게 바로 인간이 자기 이름으로 살아가면서 자동으로 나오는 인간의 본능입니다. 우리는 그 본능 다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주께서 그걸 다 들춰내죠. “너는 아직도 너의 가치를 그렇게 지키고 싶어? 그게 바로 네가 엉터리인 거야”라고 지적해주시는 그 성령의 지적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기도하지 말라. 기도 듣지 않겠다는 이 말씀이 이제는 고맙고 감사한 말씀,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