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구멍 난 하나님

아빠와 함께 2023. 8. 13. 19:40

구멍 난 하나님 

2023년 8월 13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0:6-10

(10:6) 여호와여 주와 같은 자 없나이다 주는 크시니 주의 이름이 그 권능으로 인하여 크시니이다
(10:7) 열방의 왕이시여 주를 경외치 아니할 자가 누구리이까 이는 주께 당연한 일이라 열방의 지혜로운 자들과 왕족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음이니이다
(10:8) 그들은 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니 우상의 도는 나무뿐이라
(10:9) 다시스에서 가져온 은박과 우바스에서 가져온 금으로 꾸미되 공장과 장색의 손으로 만들었고 청색 자색 감으로 그 옷을 삼았나니 이는 공교한 사람의 만든 것이어니와
(10:10)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분노하심을 열방이 능히 당치 못하느니라

신과 신을 비교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 같습니다. 왜냐하면 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총체성의 표현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신을 묘사하는 재료가 뭐가 되었던 신의 개념을 재료로서 마감하는 방식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너희 이스라엘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신을 믿는구나 우리는 그저 나무나 돌만 믿어” 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재료가 뭐가 되었든, 그리고 재료가 있던 상관없이 그들은 자신들의 인생길에 도움이 되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인간의 행함은 자기에게 보탬이 되지 않는 한 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여타의 이방민족의 하나님과 다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 을 인간들은 흔쾌히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진노하신다는 것은 하나님 쪽으로 익히 인간에 대해서 알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은 이 대자연의 풀기 위해서 신을 섬기기에 일부로 진노를 더 보탤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겁니다. 바로 이게 인간쪽의 문제점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누군지를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신을 찾습니다. 진짜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감잡지 못한 채, 그냥 자신의 평온과 행복한 삶을 위해 신을 찾습니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과연 인간이 신을 찾을 권한이 있는지를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이방민족의 신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에, 이방민족의 신은 그냥 사물체에 불과합니다. 영험한 신의 효력이 나올 리가 없는데 그것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금속체나 나무나 돌’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신을 만들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이방민족이 신을 섬긴다는 것은 곧 돌이나 나무나 금속체에 자신의 마음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왜 신을 섬기는가 하면, 그것은 “내 마음이다” 고 답변할 것입니다. 즉 내 마음이 신을 찾기에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열 명이 믿는 신은 열 가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인간들의 마음이 하나로 합쳐서 믿는 신이 아니기에 한결같이 오직 하나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십니다. 곧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이스라엘의 왕’ 으로서의 하나님입니다. 즉 친히 백성을 모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일체 인간이 기대하는 신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예가 사무엘상 8:6-8에 나옵니다.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친히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겠다고 사무엘에게 요구합니다. 여기에 대해 하나님께서도 친히 개입하십니다. 즉 인간들에 의해서 세우겠다는 왕은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이스라엘의 왕 개념’ 과 합치될 수 없다는 겁니다. 도리어 하나님 왕되심을 거부하는 태도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통해서 이스라엘 왕으로서의 하나님은 백성들을 따로 형성시켜 나가시는 분이라는 점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의해서 제시된 이스라엘의 왕을 통해서 제대로 하나님이 왕되심을 드러내신다는 계획입니다. 그 왕이 어떤 왕이며 누구일까요? 과연 이스라엘 백성이 그분을 왕으로 받아들일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왕되심을 반영하는 왕은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취지에 따라 그분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즉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리어 버림받으셨습니다. 이런 점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인정하는 여호와에게서 나오는 진노하심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는 유대교 사회나 그들이 믿는 여호와 인식에는 가운데 결함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인간들 생각에 온전한 하나님이야말로 참으로 참된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타락하고 난 뒤에 선악체계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온전한 선으로만 가득차 있는 것이 곧 온전한 신이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 온전한 신으로부터 주어진 율법과 말씀을 가지고 자신들도 하자 없는 온전한 자되기를 시도했습니다. 즉 악을 버리고 선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염원하는 선한 하나님과 합치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들에게 나타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리어 버림받은 분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선악체계 한 가운데 구멍을 내시려는 겁니다. 선이든 악이든 그 한 가운데서 구멍을 마저 메울 수 없는 체제를 갖추게 하는 겁니다. 곧 선악체계의 작동이 고장나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 방법 중의 하나가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문둥병자를 고쳐주시는 대목입니다.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마 8:2-4)

선악체계 한 가운데 저주의 자리를 마련하는 겁니다. 그 누구도 그 자리에 들어오지 않으려고 할 겁니다. 저주받은 문둥병자는 예수님에 의해서 그 저주의 자리에서 만나게 됩니다. 선악체계가 전혀 무관한 사랑의 체계를 만나게 됩니다. 그 원리는 이러합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7)

저주를 대신 담당하시므로서 비로소 인간들이 미처 생각 못한 사랑과 은혜와 생명이 주어지게 됩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새로운 백성들의 왕이 등장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그 자리가 미움의 자리가 아니라 사랑의 자리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4강-예레미야 10장 6~10절(구멍 난 하나님)230813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0장 6~10절입니다. 구약성경 1067페이지입니다.

“여호와여 주와 같은 자 없나이다 주는 크시니 주의 이름이 그 권능으로 인하여 크시니이다, 열방의 왕이시여 주를 경외치 아니할 자가 누구리이까 이는 주께 당연한 일이라 열방의 지혜로운 자들과 왕족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음이니이다, 그들은 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니 우상의 도는 나무뿐이라, 다시스에서 가져온 은박과 우바스에서 가져온 금으로 꾸미되 공장과 장색의 손으로 만들었고 청색 자색 감으로 그 옷을 삼았나니 이는 공교한 사람의 만든 것이어니와,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분노하심을 열방이 능히 당치 못하느니라”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이 예레미야 선지자가 둘을 비교하는데, 우리 인간이 듣는 입장에서는 비교할 수 없는 것끼리 비교하는 그런 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방인들의 신은 나무나 금속으로 만들었고 장색(장인)들의 손에 의해서 공교하게 만든 것이라고 나오죠. 우상의 신은.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사람이 만들 수도 없고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고 이 둘을 비교하는 겁니다.

이 비교가 얼른 납득이 가지 않고 수용이 되지 않는 이유는 이방인들에게 이러한 구분을 이방인들에게 물어보고 이렇게 정의를 했느냐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여호와 말고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나무만 섬기고 금속만 섬긴다고 그렇게 이야기했을 때, ‘그래. 우리는 지금 나무만 섬기는 거야. 돌만 섬기는 거야. 우리는 철이나 구리만 섬기는 거야. 우리가 만든 신은 실은 사람 손으로 만든 거야. 우리가 인정할게’ 라고 그들이 이렇게 나오느냐는 겁니다.

절에 가는 저 사람보고 갓바위에서 비니까 ‘너희들은 돌보고 비는 거야’ 라고 갓바위 사람에게 이야기하면, 그 갓바위에 사람들이 ‘우리는 돌에게 비는 것이 아니고 부처에게 빈다’ 라고 이야기하잖아요. 너희들이 여호와 하나님에게 비는 것과 우리가 부처에게 비는 것과 똑같은 심정이라고 말할 겁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한 거예요.

선지자가 우상에게 공격할 때, 우상이 그 공격에 대해서 반발하는 거, ‘그거 아니야. 그건 너희의 너무 경솔한 평가야. 우리는 나무에게 절하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절하는 거야’ 라는 그러한 반발을 다시 우리 것으로 가지고 오라는 겁니다. 갖고 왔을 때, 우리가 여호와 섬기는 것이 과연 살아계신 하나님 섬기는 것과 맞느냐는 겁니다.

만약에 여호와 섬기는 쪽에서 보이지 않는 여호와를 섬긴다고 한다면, 그건 이방 종교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러면 여기서는 아무런 차이가 생기질 않아요. 여호와 믿는 거나 돌이라는 것은 하나의 상징(symbol)이거든요.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보이지 않는 맘속에 흠모하는 초월적인 세상 전체를 좌지우지하시고 전체를 만드신 신에게 빈다고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호와 비는 것과 그들이 신에게 비는 것과 차이점이 있습니까?

차이점이 없잖아요. 그런 신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정합적(整合的) 총체성이라고 합니다.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논리가 딱딱 들어맞으면서 전체에 전체를 아우르는 그러한 대상, 그게 바로 인간들이 바라는 신이라는 겁니다. 전체를 무조건 끌어모은 것이 아니고 그 안에 논리를 집어넣어서, 이렇게,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신다는 딱 맞춤이 가능한, 그러면서 범위는 전체까지 다 범위가 덮어지는 그러한 대상, 이 정합적인 총체성이라고 불리는 신인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예레미야나 선지자들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런 신을 네가 믿는단 말이지? 오케이. 우리는 그런 신을 믿어. 여호와도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고 진정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이렇게 여호와를 소개할 때, 예레미야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신이 거짓된 신인 것을 지적해냅니다. 그렇게 지적하는데, 오늘 본문 10절에서는 두 가지 요소를 집어넣죠.

하나는, 그 신이 이스라엘의 왕이냐 하는 겁니다. 또 하나는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진노하시는 하나님이냐 를 묻는 거예요. 어느 인간이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일 그런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나는 믿어’ 라는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은 그런 신을 안 믿어요. 이래도 사랑, 저래도 사랑, 이래도 덮어주고, 저래도 덮어주고, 이래도 도와주고, 저래도 도와주는 그런 신을 우리는 진짜 이 우주를 만든 신이라고 그렇게 인정합니다.

문제는 그게 근거가 없다는 거예요. 아주 결정적인 거예요. 그런 근거가 없어요. 나에게 잘해주고, 나에게 베풀어주고, 모든 것을 도와주고, 이렇게 하는 신이 진짜 하나님이다. 근거는? 근거가 없어요. 그런 신을 믿고 싶어요. 그런 신이 있기를 원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그 근거가 있느냐. 없어요. 그리고 뭐라고 하느냐.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다’

결국 인간은 자기 마음을 신격화해서 믿는 거예요. 그래서 10명이 있으면 10명의 신이 다 달라요. 10명 다 마음이 다르기 때문에. 그걸 통합하는 거, 인간이 어떤 마음과 있느냐를 구애받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나타난다는 것을 그걸 증명하는 그런 하나님이 바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십니다. 이게 어려워요. 왜 어렵냐 하면, 인간이 신과 내 마음과 통한다는 것을 하나님 쪽에서 가위로 잘라버려요.

하나님 쪽에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너의 그 마음 안 받는다. 인간의 마음을 받지 않은 채로 인간에게 나타날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근거는 바로 진노하실 때 나타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화를 낼 때,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화를 내고 있습니다. 화를 내고 있는데, 인간은 하나님이 화를 내시는 이유도 모르고 ‘그럴 리 없어. 화를 안 내실 거야’ 라고 생각하면서 크림 들어있는 조그만 크래커, 그거 주면서 ‘하나 드세요’ ‘안 먹어!’ ‘한 번 잡숴보세요’ ‘안 먹어!’

여자아이 동원하고, 남자아이 동원하고, 뭘 해도 안 먹습니다. 그 크래커를 왜 주려고 하는데? 이거 제 마음입니다. 네 마음이기 때문에 안 받는 거예요. 진노의 대상에게 뭘 받습니까? 뭐 그거 받고 진노 좀 누그러뜨리라고요?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 이예요. 이스라엘에 왕이라는 것은 너희들이 이 왕과 백성 사이에 괴리 현상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자기 백성 삼은 거예요.

왕인데, 너희들이 생각한 왕과, 하나님이 왕으로 나타난 왕 자체가 다르다는 겁니다. 이제 다시 한번 정리해봅시다. 참된,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예요. 그리고 왕이신 하나님 이예요.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이스라엘과 하나님 왕 사이에는 뭐만 연락되는가. 오직 피밖에 연락 안 돼요. 피를 흘렸다는 것은 관계가 정상적이 아니라는 거죠.

서로 원수지간 이죠. 원수지간 인데 원수지간 을 떠안기 위해서 내린 하나님의 중간 매체가 바로 어린양의 피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나타나신 것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진노로 나타나시고 진노의 하나님이신 것을 알려주기 위한 백성을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그 하나님의 진노를 중간에서 누그러뜨리는 요소를 하나님 쪽에서 따로 또 추가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는 거, 그러한 구조, 보내시는 하나님보냄을 받는 하나님, 두 분의 구조로써 구성될 때, 그때 발생 되는 것이 내 백성이라는 것이 발생 됩니다. 복잡해요.

그런데 우상은 어떠하냐 하면, ‘우상은 나무 섬기고 돌멩이 섬기지?’ 라고 그러면 그 다음 나오는 그들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미쳤다고 돌멩이를 섬기고 나무를 섬기냐? 그 돌멩이 아무것도 아니고 나무도 아무것도 아니잖아. 우리가 정성스럽게 다듬은 이유는 우리 마음이다. 우리 정성스러운 마음을 신께서 받아줄 거야. 우리 마음을’

우리 마음을 받아주는 신이 마귀입니다. 왜 그게 마귀냐면 마귀는 이미 선악과로써 인간과 마귀가 한통속이 되어있거든요. 그러면 인간은 마귀와 통하고 마귀는 인간과 통할 때 방법이 뭐냐. 바르게 살고 악하지 않은 거, 그겁니다. 바르게 사는 게 뭐냐? 네 속에 양심이라는 율법 있잖아. 그 양심이라는 율법 가지고 네가 최선을 다해보라는 거죠.

미쳐서 칼 들고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왜 그런 과도한 행동을 하느냐면, 자기가 정상적으로 살아서 남들 이야기하는 평범하고 선한 인간이 될 수도 있었는데 그럴 수 없었다는 울분을 의도적으로 악을 저질러서 그걸 바깥으로 표출하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나쁜 놈이다. 그래, 나쁜 놈 칼맛 한 번 볼래?’ 이게 뭐냐 하면 마약에 미친 것이 아니고 정신적으로 미친 것이 아니라, 선악 체제에 미친 거예요.

선과 악 사이에 완전히 몸과 마음이 구겨졌어요. 선과 악 사이에 구겨졌다고요. 오토바이 타고 가다가 사고 나서 길바닥에 오토바이가 구겨져 버려져 있었어요. 지금은 치웠지만. 오토바이가 왜 구겨졌는가. 사고현장에 페인트 표시 보니까 나무에 부딪혔던 거예요. 내가 나가는데 앞에 뭔가 부딪히니까 이게 구겨진 겁니다. 착하게 살면 여유 있게 인간 사는 것처럼 사는 줄 알았는데, 착하게 살아도 세상이 나를 뜻대로 살게 안 할 때는 자기의 분노를 터뜨릴 수밖에 없습니다.

다 남 탓이에요. 나는 착하고 싶은 대, 지금도 착한 것이 소원인 대, 네가 나를 사람 대우 안 했잖아. 그러니까 복수할 거야. 이 착한 인간들아. 그런데 그 인간은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하다는 것은 돈이 말해준다는 것을 잘 몰라서 그래요. 돈 있는 사람은 무조건 착한 사람이에요. 돈 없는데 착하고 그런 사람 없습니다. 돈 있을 때 자동 적으로 착한 사람이에요.

남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돈 있을 때나 필요하지, 돈 떨어지면 친구고 뭐고 없습니다. 뭐, 돈보다 친구가 좋다고 하는데, 얼마나 세상이 답답했으면 그런 노래를 다 지어냈겠어요.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그렇게라도 위로하고 싶어서. ‘친구 사이에 술 한잔하자’ 그럼 술값은 누가 내는데. 이게 문제예요. 결국, 마지막에는 돈 문제입니다. 착하면 돈 많은 부자 되고, 가난한 자는 악하다는 뜻으로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열방 나라의 우상이라는 것은 자기 맘속에 있는 마음을 바깥으로 표출한 것이 바로 자비하고 전능하신 신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상밖에 없는 신에게 어떤 식으로 참된 신을 드러내는가. 그 완전한 신, 온전한 신에게 중간에 구멍을 뚫어버립니다. 이게 하나님의 아이디어예요.

사람은 태풍이 움직인다고 할 때, 구름이 움직인다고 되어있죠. 진짜 태풍은 구름이 아니고 구름 속에 있는 빈공간이 움직일 때 태풍이 움직이는 거예요. 없는 데서 에너지가 나와요. 빈 공간인데. 이걸 더 어렵게 하면 없는 데서 에너지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있는 것들이 에너지를 없는 것으로 모아 놓고 그 없음을 중심으로 휙휙 감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의 모든 원리가.

인간들은 죄밖에 몰라요. 하나님은 몰라요. 내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 신이에요. 그 신들 다 오라 해. 신들 다 와. 신들에 둘러싸일 때, 그 가운데 뭐가 있느냐 하면 진짜 메시아가 신들에 의해서 희생물로 메시아가 그 자리에 있습니다. 구멍 뚫린 하나님이에요. 초라하게 오셔서, 결국 인간들이 믿는 신들, 심지어 유대교에서는 여호와죠, 여호와를 믿는 여호와에 의해서 이단 취급받고, 귀신들린 소리 들으면서 소실 되어야 할 그 하나님, 가짜 여호와 하나님이 진짜 여호와 하나님을 죽여버리는 그 현장에서 주께서 남긴 것은 빈자리만 딱 남겼어요.

이것은, 진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 하나님과 똑같이 내 안에 빈공간이 있음을 받아드리는 사람이에요. 나 허한 사람이야. 그 빈공간은 어떻게 발생 되고 어느 배경에서 만들어지는가. 선악 체제 자체에 주께서 십자가 복음이 들어오면, 예수님의 피가 들어오면, 거기서 선악 체계 자체가 적용될 수 없는 빈공간이 생겨요. 선이냐, 악이냐를 물을 수 없는 빈공간이 생깁니다.

그 빈공간을 주께서 알려주기 위해서 그 유대인 사회에서 천하에 저주받은 사람은 다 긁어모으죠. 죄인, 세리, 문둥병자, 절뚝발이, 소경 된 자, 죽은 자, 벙어리 된 자, 이런 사람들이 장애자라서 끌어 모은 것이 아니고, 그 시대에 율법 체제에 의한 선악 체제에 의해서, 문둥병자 같은 경우에,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이 살아있고 하나님이 저주하는 사람이 바로 저기 간다고 지목되는 자들이 문둥병자예요.

그 문둥병자와 주님이 매치함으로써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비로소 그런 식으로 표현합니다. 이걸 수련회 때도 말씀드렸는데, 마태복음 8장 2~3절에 나온 말씀인데요,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이렇게 저주받은 문둥병자가 말했어요. 그러니까 주께서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라고 했어요.

자, 저주받은 자가 깨끗함을 받았어요. 이사야 53장4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제가 저번에 말씀했다시피 마태복음 8장 17절에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 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 이더라” 라고 되어있어요. 메시아가 해야 할 일은 선악 체제 안에 구멍을 뚫는 겁니다. 선악 체제에 구멍을 뚫으면 본인의 애씀과 노력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요구할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요구하나 안 하나 이래도 저주받고 저래도 저주받기는 마찬가지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할 이유가 없습니다. 저주받을 자에게 주께서 요구할 게 뭐가 있는데요. 그냥 구멍 뚫는 거예요. 그냥. 우리 안에. 구멍 뚫는 것의 진수가 십자가죠. 요한복음 19장 19~21절에 보면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그냥 십자가가 아닌 머리 위쪽으로 명패가 하나 붙어있어요.

패에 뭐라고 쓰였느냐 하면 19절에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라고 나왔어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이럴 때 유대인들이, 그 바리새인들이 로마 당국자에게 철거해주기를 요구했어요. 쓰려거든 ‘자칭 유대인의 왕’ 이라고 써야지 그건 옳지 않다고 반발했어요. 다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이 예수님 말고 따로 와야 한다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납득이 가는 식으로. 그러면 예수님은 일찍 온 유대인의 왕 메시아예요. 그 메시아가 왔는데 유대인들은 납득이 가질 않는 거예요. 받아 줄 수가 없었어요. 그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하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 십자가 사건이 오늘날 성령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에게 십자가 사건이 쳐들어오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기를 원하거든요. 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온전하듯이, 그 온전한 신을 믿는 우리도 온전하기를 원하는데, 주께서는 그런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구멍을 뚫어버려요. 너의 내부가 뻥 뚫렸다는 겁니다. 그 방법이 뭐냐? 십자가가 우리에게 쳐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든, 무엇을 하든지 간에, 아무리 완벽해도 우리는 뻥 뚫린 존재예요.

결함 있는 존재, 하자 있는 존재입니다. 내 것으로 내 중심을 채울 수 없는 거. 그야말로 문둥병자예요. 아예, 애초부터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저주를 온몸으로 지니면서 살아온 것이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문둥병자가 주님과 만난 동시에, 예수님은 문둥병자가 낫게 되었을 때의 제물을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했으니까, 아예 우리를 제물이 들어오는 방식으로 우리를 낫게 하신 거예요.

‘내가 지옥 안 가고 천당 가려면 뭘 하면 되지? 옳지. 예수님 어린양이 오는구나’라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주님의 어린양 되심이 우리에게 옴으로 말미암아, 내가 하지도 않은 이질적인 요소. 이질적이라고 하니까 생각나는데 코에다가 뭘 집어넣으면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요. 왜? 이물질이 들어오니까 싫어하는 거예요.

그 이물질, 오롯이 내 것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하심의 증거가 이물질처럼 나에게 같이 들어오게 될 때, 우리는 내가 스스로 선악 체계로 온전 하려는 모든 시도는 이제는 끝났습니다. 실패입니다.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내 안에 있는 주님의 어린양으로 증명이 돼요. 주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오셨다는 말은 ‘네가 너에게 손대지 마라. 손댄다고 더 나은 인간 되는 거 아니야. 넌 이제 구멍 뚫린 거야’ 하지만 그 구멍에서 너로 천국가게 하는 에너지가 그 구멍에서만 나와요.

십자가에서만 나와요.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세계를 떠났습니다. 리얼리티(reality) 세계를 떠났어요. 예수님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구멍은 남아있습니다. 이게 바로 맹점(盲點)이라는 거예요. 십자가는 몰라요. 십자가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십자가 전과 십자가 후가 나타났는데, 그 가운데 정작 십자가는 보이지 않는 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십자가 믿는 사람을 비난하고 바보라고 욕하겠습니까.

영광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너희들은 너희가 아는 온전한 것을 제시하지? 우리는 보이지 않고 우리는 내 안에 손에 잡히지 않는 그것만을 우리가 자랑한다’라는 이게 바로 십자가를 자랑하는 온전한 천국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가짜 신, 내 마음 받아주는 신, 내가 가짜니까 신도 가짜인 것을 왜 진작 몰랐습니까? 이제는 도리어 내가 가짜인 것을 고발하는 그래서 대신 죄사함을 치렀던 그 제물 중심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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