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2-25 20:45:28 | 조회 : 13 | |
가마 비유 131225 | 이름 : 이근호 | |
| ||
이근호 | 13-12-25 21:38 | |
“제 구년 시월 십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날짜 곧 오늘날을 기록하라 바벨론 왕이 오늘날 예루살렘에 핍근하였느니라 너는 이 패역한 족속에게 비유를 베풀어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한 가마를 걸라 건 후에 물을 붓고 양떼에서 고른 것을 가지고 각을 뜨고 그 넓적다리와 어깨고기의 모든 좋은 덩이를 그 가운데 모아 넣으며 고른 뼈를 가득히 담고 그 뼈를 위하여 가마 밑에 나무를 쌓아 넣고 잘 삶되 가마 속의 뼈가 무르도록 삶을찌어다.” 가마솥을 걸어놓고 거기에 양고기를 집어넣고 푹 고아지도록 삶으라는 이 에스겔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지시는 그 뒤에 해석이 나와 있습니다. 13절에 “너의 더러운 중에 음란이 하나이라 내가 너를 정하게 하나 네가 정하여지지 아니하니 내가 네게 향한 분노를 풀기 전에는 네 더러움이 다시 정하여지지 아니하리라.”라고 하나님의 해석이 나옵니다. 그 해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가마솥을 걸어놓고 고기를 푹 삶는 것은 거기에 들어갔던 그 양고기만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걸었던 가마솥에 끼어 있는 녹이 있는데 그 녹까지 다 떼 내어지는 지경까지 유다나라를 몰아넣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6절에 나와 있습니다. “녹슨 가마 곧 그 속의 녹을 없이 하지 아니한 가마여 화 있을찐저.” 가마솥 자체에 대한 하나님의 불 지핌, 이것은 하나님께서 노를 풀기 전까지는 절대로 이 일을 멈추지 않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분노를 묘사하는데 있어서 적절하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가마솥에 집어넣는 방식으로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분노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유다나라는 말려들고 유인당한 겁니다. 일종의 저인망이라고나 할까, 고기를 잡는데 그 그물 속에 들어가면 자기는 안전하다고 여기고 거기에 몰려든 거예요.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기대하신 겁니다. “한꺼번에 모여라. 내가 하나님의 저주의 극단을 보여주리라.”라고 되는 거예요. 1절에 “제 구년 시월 십일에.” 에스겔이 그발 강가, 지금의 이란 지역에 포로 잡혀 간지가 제 구년 시월 십일인데 이것을 계산하면 BC588년 1월 15일이 됩니다. 이날에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졌는데 그 계시가 뭐냐,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을 완전히 포위하는 거예요. 포위하고 이제는 지시만 기다립니다. 왕의 지시가 떨어지면 가마솥에 불을 지르는 것처럼 완전히 갇혀 있는 상태를 만들어놓고 거기에 불을 질러버리면 그 안에 있는 유다백성들이 발악하는 그 모습이 되는 겁니다. 이 모습은 마치 가마솥에 살아 있는 생물을 집어넣고 불을 질러버릴 때 뚜겅 아래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점점 더 뜨거운 열기 안에서 최후의 비명을 지르면서 살기 위해서 발악하는 그 극단적인 모습이 그 안에서 다 묘사되겠지요. 3절에 “한 가마를 걸라 건 후에 물을 붓고 양떼에서 고른 것을 가지고 각을 뜨고 그 넓적다리와 어깨고기의 모든 좋은 덩이를 그 가운데.” 여기서 좋은 덩이라 하는 것은 양고기가운데서 좋은 것이니까 이것은 그 당시 유다나라의 특권층, 귀족층을 두고 말하는 겁니다. 상류층을 이야기하는 거지요. 재주 있고 능력 있는 사람들입니다. 유다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소위 출세하고 성공했다는 사람들이 자기 딴에는 똑똑하고 지혜롭게 한다는 것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집결한 겁니다. 그 집결한 것이 막다른 골목, 막장으로 자진해서 집결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 못했지요. 왜냐,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입장에서 마지막 걸 수 있는 희망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이 성전에 모일 때 이 현상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반전을 일으키는 마지막 이벤트를 했다는 말이지요. 유다나라가 이렇게 유인당하고 자기해석에 스스로 말려들어간 잘못된 가장 큰 원인은 뭐냐, 하나님부터 생각한 것이 아니고 자기구원부터 생각한 거예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누굴 믿어야 되느냐, 이렇게 자기구원부터 시작한 겁니다. 그런데 이 가마솥을 걸라는 이 해석에 하나님의 결론부분, 14절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였은즉 그 일이 이룰찌라 내가 돌이키지도 아니하며 아끼지도 아니하며 뉘우치지도 아니하고 행하리니 그들이 네 모든 행위대로 너를 심문하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유다나라를 이런 식으로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으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갖고 있는 분노하시는 속성, 본질은 ‘죄에 대한 봐주기 없기’에요. 돌이킬 수 없는 저주를 하나님께서 보여주기 위해서 유다나라를 사용한다는 그 점을 유다 본인들은 몰랐던 겁니다. 자기 구원이 우선이었지 우리의 존재,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함이고 그 목적을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야 했고 유다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했다는 것은 추호도 생각 못한 겁니다. 자기생존, 자기축복이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본문을 볼 때 다음과 같은 의문점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면 왜 하나님은 존재하느냐, 그 문제를 이 본문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야 됩니다. 나 좋으라고, 날 사랑하기 위해서, 날 구원하기 위해서, 날 천국보내기 위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한 그것이 처음부터 잘못된 시작이라면 옳은 시작은 우리 쪽에서 어떻게 출발하는 것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이게 상당히 어려운 문제거든요. 내 몸이 여기 있다. 이 몸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뭘 해야 되지? 믿어야 한다. 신앙해야 한다. 그러면 내 몸에서 출발한 신앙이 하나님께 도달될 수 있느냐는 그 문제에 대해서 ‘그것은 잘못’이라는 거예요. 내 몸이 여기 있고 이 몸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신앙으로 나아가겠다는 것은 내 몸에서 출발했고 내 몸에서 나온 것이기에 오늘 본문에 의하면 거절당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쉽게 ‘하나님 잘 섬기면 하나님은 구원해주신다.’는, 어떤 의미에서 너무 안일했고 모든 자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그 출발부터 문제를 삼아야 하겠지요.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이런 말이 있어요.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겸손이야기를 하는 거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고개를 숙여버려요. 왜, 자기가 푹 익은 벼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이런 행세를 저지할 수 있는 방법이 우리에게 있느냐 하는 겁니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우리는 스스로 푹 익은 벼라는 행세를 하고 싶은 이 본능, 이 충동을 무슨 수로 찢어버립니까? 이걸 거부할 수 있는 방법이 우리한테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듣는 순간 거기에 일치되고 맞추기 위해서 ‘내가 바로 너무나도 익은 벼라서 늘 이렇게 고개 숙이고 삽니다.’ 라고 일방적으로 해버려요. 그런데 그렇게 겸손이 뭐라고 들은 순간 나는 당연히 겸손할 것이라고 마중 나가는 이 기본속성을 무슨 수로 포기하과 저지할 수 있느냐는 말이지요.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하는 순간에 ‘제가 믿겠습니다.’하고 나서는 이 성급함을 무슨 수로 내가 스스로 말릴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 여기 있습니다.”하고 나서는 이 성급함을 우리가 말릴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 유대인들도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고 외치는 그 외침에 대해서 같은 인간으로서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하고 말릴 수 있는 입장이 못 되거든요. 그래서 제가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쳐놓은 저인망에 유인 당했다.”고 한 거예요. 그렇게 해서 ‘누가 뭐래도 우린 구원 될거야.’하는 사람들을 예루살렘성전에 모아놓았는데 모아놓고 마지막 하나님의 저주를 퍼부을 시점이 되니까 그때 “에스겔아, 너 이리와. 너 가마솥 걸어. 잘 걸렸어. 얘들 제대로 걸린 거야. 가마솥 뚜껑 닫아버리고 밑에다 불 질러버려라.” ‘날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 믿고 예수 믿겠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믿겠습니다.’ 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극단적인 저주를 유발하는 요인인 것을 에스겔을 통해서 알려줍니다. 왜, 내 믿음이 결국 내 살기 위한 나의 일상적조치의 일환인 것을 우리가 스스로 회수할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기에 그렇습니다. 오늘 크리스마스라고 KBS에서 평소에 하지 않던 짓을 했어요. 12시 10분쯤인가 한 경직 목사님에 대해서 나왔어요. 보통 크리스마스에는 개신교 이야기는 잘 안합니다. 지금까지 죽 보게 되면 천주교 이야기를 많이 했죠. 크리스마스 특집 했다 하면 천주교인데 오늘은 특별히 개신교 이야기를 했어요. 아마도 정의구현사제단하고 관계가 있지 싶어요. 어쨌든 한 경직 목사님에 대해서 약 50분간을 이야기하는데 “평양에서 내려와서 고아들 위해서 고아원세우고 기독교 신자요 목사로서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할 수 있나 생각하다 인재양성을 위해서 보성학교를 세우고 피난민들 요청으로 영락교회를 세워서 후임자 박 조준 목사 불러놓고 자기는 떠나면서 세계월드비전, 세계선교를 위해서 힘을 썼고 죽을 때는 유언하기를, ‘나는 이 땅에 나그네이기에 단 한 푼도 미련가질 재산은 없다. 소유가 이렇게 악함을 평생 살면서 알았다. 이런 말을 하면서 돌아가셨다. 그래서 신앙의 귀감이 되었다.” 하는 방송을 했습니다. 문제는 한 경직 목사님과 정반대되는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를 생각해 보세요. 한 경직 목사님이 가는 그 길이 하나의 경우라면 하나님 믿고 가는 다른 경우를 생각해 보게 되면 교인들 모아서 교회 부흥시키고 교인들이 말하기를 “주의 종이니 잘 섬겨야 한다.” 해서 고급차 사주고 많은 재산과 빌딩을 소유하는 목사들이 많이 있는데 거기에 비해서 한 경직 목사님은 아주 겸손하게 모든 것을 다 사회에 던져주고 자기는 템플 상 받은 상금까지도 다 북한선교를 위해서 쓰고 자기는 빈 몸으로, 영락교회 사직하고 난 뒤에는 저 먼 구석지에 가서 전혀 후임목사에게 부담주지 않도록 한 그 겸손의 모습, 평생 이웃을 위해서 살아간 그 모습, 그 두 가지 길에서 어느 쪽으로 가야 그게 하나님을 만나는 길일까요? 정답은 에스겔 24장의 오늘 본문이 말해줍니다. 어느 쪽이 나는 저주받아야 마땅한 길임을 보여줄 수 있는가? 어느 쪽이 나의 육적인 본성, 내가 평생 살아왔던 이 몸, 이 육체를 주께서 유인해서 결국 우리로 하여금 갇힌 가마솥에 넣어놓고 불 질러 버리는 하나님의 전략에 꼼짝없이 말려드는 코스로 가서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는가.’가 아니라 ‘나의 존재함으로 하나님의 분노가 어떤 식으로 보여줄 수 있는가.’가 어느 쪽이냐 할 때 둘 다 아닙니다. 둘 다 아니에요. 왜, 둘 다 사람이 노력하고 애쓰면 갈 수 있는 길이에요. 진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만나는 길은 그 둘 다가 아니라 제 삼의 길로 가야 합니다. 서로 대치되고 정 반대가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둘 다 아니에요. 그러면 제 삼의 길이 뭐냐, 아무리 인간이 애써도 하나님과 만날 수 없음이 확인되는 그 길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애쓰고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고 가도 가 보니 그 자리가 하나님께서 나와 만나주지 않는 그 자리로 확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확인이 될 수 없고 반대로 ‘이렇게 하면 하나님 만날 수 있다.’는 쪽으로 가버리면 그것은 어떤 길이든 가짜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장소에는 반드시 자신의 구원이 지워지지 않고 여전히 자신의 구원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곳이기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끄는 그 장소는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와 있는 만나는 그 장소를 두 곳을 찾아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시편 102편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저 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냉과리 같이 탔나이다 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음으로 내 마음이 풀 같이 쇠잔하였사오며 나의 탄식 소리를 인하여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왜 이 땅에 살아가는지를 내가 있는 자리에서는 뽑아낼 수가 없고 규정할 수가 없을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자꾸만 드러난다.’는 겁니다. 내 몸을 통해서 뭔가 주께 영광을 돌리고 주께 봉사한다는 그것, 그런 쪽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시편에서 하나님이 이끄는 것을 보니까 있으나 마나한 존재, 없어도 그만인 존재, 그런 존재로 전락하고 만 거예요. 이게 뭐냐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영광은커녕 내가 이런 식으로 살아서 ‘하나님 저를 구원해주세요.’라고 요청할 수 있는 자격 자체가 없다는 사실이 파악되는 그 자리. 또 한 말씀 더 드리면 이것이 정답인데요, 이사야 53장 7절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도살할 양이 나옵니다. 5절에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는데 여기서 우리란 누굴 말하는가 하면, 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 버린 양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양은 성질대로 갔는데 그 간 양에게 뭔가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나간 그 양들에 대한 징벌을 대신 담당하는 자리에서만 하나님께서는 만나주십니다.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여호와의 종은 오늘 본문 에스겔 24장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저주, 심판의 마지막 모습을 온 몸으로 발산하고 보여주는 그 몸으로 이 땅에 나타나신 거예요.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보면, 인간 쪽에서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 접근하는 모든 시도들, 흔히 말하는 세속에 물든 목사가 한 경직 목사 같은 쪽이나 어떤 쪽도 성경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거예요. KBS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대로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예수 그리스도는 국가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요. 이것은 짐승의 나라고 악마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한 경직 목사는 ‘나라를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한 경직 목사가 그렇게 했다고 KBS는 보고 있습니다. 한 경직 목사가 그렇게 했다는 것은 본인이 어떤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KBS가 볼 때 이것은 공중파로서 나라생각하면서 “기독인들이여, 나라가 있어야 교회가 있습니다.” 하는 것을 전파하기 위해서 그 목사님을 옹호하는 그것은 그쪽에서나 하는 생각이죠. 한 경직 목사님이 어떤 생각을 실제로 했는지는 상관없이 나라를 위해서는 그런 점이 유리하다고 본 거예요. 한 경직 목사가 그런 소리를 했어요. “나는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템플 상 시상식에서 한 경직 목사가 하는 말이 “내가 신사참배를 했기에 죄인인데 이 상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했어요. 신사참배를 했기에 죄인인 게 아닙니다. 신사참배 한 그것이 죄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거지요. 정말 하나님 쪽으로 구원받을 사람이 가는 길은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사람들로부터 두 번 다시 그 사람에 대해서 언급을 하기 싫을 정도로 외면하는 대상이 돼요. 오늘 본문 에스겔 같은 경우에 이스라엘이 멸망합니다. 자기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이스라엘 사람이 스스로 자랑거리로 여길 수 있는 이스라엘이라면 그 사람이야말로 정말 구원의 길로 들어선 사람입니다.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가 나에게 합당합니다, 라는 것을 증명하고 증거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그 사람이야말로 자기가 구원받고자 함이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렇게도 무섭게 저주하고 극단적으로 심판하는 하나님이 속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증인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성도의 참된 삶이란 것은 매 순간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은 너무나 합당한 조치가 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이의를 걸거나 불평하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수모와 어려움을 당해도 우리는 할 이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인생, 사람, 그것이 바로 에스겔에서 요구하는 하나님의 참된 길이 되는 거예요. “도살할 양”같이 모든 사람들에게 수모를 당하고 외면하고 다 제갈 길로 가고 돌아보지 않더라도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여, 저 사람들이 날 떠났습니다.” 하고 불평할 수 없는 사람, 그것을 하나님의 당연한 조치로 여길 사람,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가마솥에 집어넣는 것은 어떤 인간도 이 가마솥에 들어가지 않을 인간이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가마솥에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참 잘하셨습니다. 그런 식으로라도 하나님께서 화를 푸신다면 만족하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이 저주와 심판의 속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참된 성도의 진짜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자진해서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몸은 자기 살기 위해서 움직이게 되어 있고 그 움직임의 모든 끝은 저인망처럼 에스겔 24장의 말씀에 걸려들어서 결국 하나님 앞에 저주받을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걸로 이야기가 끝나버려요. 그 다음에 그 몸에서 다시 신앙이 피어나는 그 노선은 이미 우리의 손에서 떠났습니다.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이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화를 돋우는 짓이다. 따라서 ‘구원받고자 해도 저주요 구원 안 받고자 해도 저주요, 이래도 저주요 저래도 저주요, 이래도 죄요 저래도 죄요,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어.’라는 그 지점에 와버리면 ‘내가 심판을 자진해서 당하겠다고 한다면 행여 하나님께서 그 마음 가상히 여겨서 나를 구원해주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바로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소리를 듣고 난 뒤에 그대로 흉내 내는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수작에 지나지 않고 일종의 꼼수를 쓰는 겁니다. 아무리 자기를 낮추고 십자가를 져도 십자가 뒤에 나오는 그 모습까지 자기 스스로 연장시켜버리면 이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척 하면서 그것을 통해서 자기가 자기를 살려내는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 밖에는 안돼요. 이것은 또 다시 나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겁니다. 결국 내가 살고자하는 것밖에 안 남아요. ‘하나님이 좋다. 왜? 나를 살려주기에.’ 그것은 하나님이 좋은 것이 아니라 내가 더 좋기 때문에 내가 나 좋아하는 그 일에 하나님을 이용할 수 있을까, 해서 머리를 쓰는 것이지 자기를 자기 자리에서 제대로 부인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문제가 이거예요. 내가 믿는지 안 믿는지를 확정할 수 있는 방법을 내가 어떻게 가지는가, 그 문제입니다. 내가 믿는지, 안 믿으면서도 믿는다고 생각하는지, 내가 진짜 안 믿는 것인지, ‘정말 누가 뭐래도 나는 예수를 안 믿어.’라고 자부심을 가져도 내가 안 믿는다는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나에게는 없다는 거예요. 성경말씀은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다.’고 나와 있어도, 분명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로마서 10장 13절에 나와 있어도 문제는 그 말씀에 일치될 수 있는 방법을 우리 스스로 확정지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내가 믿습니다.”라고 말은 할 수 있지만 그 말씀이 진실로 성경말씀 그대로인지를 내가 인정할 수 있는 증거를 내 쪽에서 만들어낼 수 없다는 거예요. 기껏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자기 스스로 자기최면 거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 나는 믿는 거야. 누가 뭐래도 나는 믿는 거야. 성령으로 선물 줬기에 나는 믿는 거야. 이것은 내가 믿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열매로서 믿는 것이지. 이것은 믿게 하신 믿음이고 선물로서의 믿음이야.”라고 날마다 성경말씀에 부합되고 신학에 부합되도록 자기 자신을 독려하고 최면을 걸어도 그 순간이 지나면 다시 나오는 것은 ‘그렇게 한다고 해서 하나님도 인정한다는 보장은 어디 있지?’ 그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없어요. 지금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할 때에 ‘나는 죽어도 안 숙여.’ 라고 하는 사람이나 ‘그래, 숙이는 것이 겸손한 것이다.’라는 그 이야기나 자기가 자기를 조작하는 일상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루돌프 사슴 코가 왜 빨간색인가?” 정답은 “추워서 빨갛다.”입니다. “왜 추우면 코가 빨개지는가?” “모세혈관이 코에 많이 모여 있어서 빨갛다.”하는 거예요. 루돌프 사슴 코의 코가 왜 빨간가, 하고 하는 그 질문 자체가 아무 상관없는 인간들의 일방적인 궁금증입니다. 따라서 성경말씀의 수많은 구절들,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구절이 아무리 있더라도 우리는 항상 나를 조작하는 속성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는 구원이 안돼요. 내가 믿는지 안 믿는지를 내가 확정지을 수 있는 어떤 사실도 나에게서는 나올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문제의 해답을 말씀드리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내 몸에서 나오는 신앙가지고 하나님을 만나려고 시도합니다. “하나님,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믿으라면 믿겠습니다. 그러니 저를 구원해주세요.”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하나님의 유인책에 걸려든 거예요. 그것이 바로 네가 극단적인 저주를 받아 싸다, 하는 인간의 모델이에요.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가? “너는 그런 몸을 가지고 있기에 나에게 저주받아도 싸.”라고 하는 그 말씀이 내 속에 들어오면 그 말씀이 합당한 조치인 것이 믿어지게 되면 그 때부터 나의 구원이 아니고 나에 대한 모든 조치는 그 말씀을 주신 주님에 의해서 조치가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난 뒤에 나를 살리는 그 혜택은 이미 내 손에서 떠나버렸어요. 살고 죽는 것은 누구 손에 달렸는가? 그 다음부터는 예수님의 손에 달렸어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대로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양 같아서 우리밖에 모르는데 하나님께서는 자기밖에 모르는 그 양을 위해서 대신 채찍에 맞으신 그 분에게 모든 권한을 다 줘버렸거든요. 따라서 진짜 성도는 뭐라고 고백하느냐 하면, “나는 이런 식으로 살았기 때문에 구원받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성도가 아니라 “나는 날마다 내가 스스로 구원받으려고 그렇게도 애를 썼지만 정작 구원하시는 분은 나의 어떤 시도와 노력과 상관없이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저를 구원해버렸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항상 성도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내가 하는 것과 주님이 하신 것을 항상 둘 다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둘 다를 그냥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쇠해야 하고 주님은 흥해야 된다.”는 세례요한의 고백처럼, 이것은 겸손이 아니고 실제가 ‘내가 하는 짓은 죄밖에 안 된다.’는 것을 늘 인정함으로써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나를 살렸습니다.”를 보여주는 거예요.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있습니다. 이 부부가 헌금 때문에 한날에 다 죽었어요.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은 교회라 하는 것은 살리는 데가 아니라 사람을 제대로 죽이는 데에요. 아니니아와 삽비라가 지옥 갔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냐, 성경에 보면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전 5:5)라는 것이 나오기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지옥 갔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교회가 무엇이냐, 사람을 살리는 곳이 아니고 죽이되 제대로 죽이는 거예요. 헌금 잘못했다고 죽일 때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이 계시거든요. 그러니까 날마다 사도바울의 소원이 뭐냐 하면, 날마다 내가 죽는 거예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그리고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날마다 나를 죽음에 넘겨서 살려내는 식으로 살린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소원이 죽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의 소원이 죽는 것이었어요. ‘내 몸이 나라를 위해서 어떻게 쓰일까?’ 아닙니다. 그냥 날마다 죽는 것이에요. 뭘 해도 죄인 되기 때문에. 그냥 죽지 말고 주님은 이처럼 무서운 분이라는 것, 주님의 속성, 주님이 무섭다는 것을 보여줄 때 그 무서움과 같이 있는 것이 뭐냐,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렇게 죽어도 마땅한 인간, 이렇게 큰 사랑으로 살려내니 오직 주님만 구원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살려달라고 해서 살려주는 것이 아니고 살려달라고 하나 안하나 상관없이 구원은 오직 주님이 소관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에스겔에게 전했던, 가마솥 걸고 양 고기 집어넣고 불 질러서 모든 사람들이 마지막 통곡과 발악을 하면서 ‘이런 하나님인줄 몰랐다.’고 외치게 한 전략, 주여, 이 땅에 살아가면서 매일같이 겪습니다. 하나님 찾으면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하루하루 사는 것이 왜 이렇게 팍팍하고 힘든지, 하루하루 사는 것이 아니고 죽어가고 있는 이런 느낌, 주께서 주시는 느낌인줄 알고 죄인에게 합당한 조치인 것을 믿어서 이런 인간이 구원되는 것은 오직 주님의 십자가 피 밖에 없음을, 피의 능력으로만 구원됨을 증거 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수요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암몬 저주(겔25;1-3)이근호140108 (0) | 2014.01.16 |
---|---|
선지자 아내의 죽음(겔2;15-21)이근호140101 (0) | 2014.01.02 |
간음죄(겔23;45-49)이근호131218 (0) | 2013.12.19 |
애굽을 잊음(겔23;25-27)이근호131211 (0) | 2013.12.11 |
아우의 부패(겔23;11-17)이근호131204 (0) | 2013.1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