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강-에스겔 23장 45-49(간음죄)131218-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23장 45절에서 49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87페이지입니다.
에스겔 23:45-49
“의인이 음부를 심문함 같이 심문하며 피를 흘린 여인을 심문함 같이 심문하리니 그들은 음부요 또 피가 그 손에 묻었음이니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치게 하여 그들로 학대와 약탈을 당하게 하리니 그 군대가 그들을 돌로 치며 칼로 죽이고 그 자녀도 죽이며 그 집들을 불사르리라 이와 같이 내가 이 땅에서 음란을 그치게 한즉 모든 여인이 경성하여 너희 음행을 본받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너희 음란으로 너희에게 보응한즉 너희가 모든 우상을 위하던 죄를 담당할찌라 너희가 나를 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시니라.”
우상을 숭배했던 이스라엘, 나중에 이스라엘이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로 나눠집니다. 그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할 때 에스겔 본문에서는 음부, 음란한 여인으로 호칭하고 그들이 선망의 남자로 여겼던 바벨론인데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바벨론에게 오히려 저주와 징벌과 심판을 받는 예언을 언급한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길 때 왜 다르게도 묘사할 수 있는데 굳이 음녀, 여인으로 묘사를 하고 있는가, 그 이유가 창세기부터 여인은 빈자리를 갖고 있습니다. 남자는 남자 자체로서 목적이 돼요. 여인은 옆에 남성을 염두에 둔 상태에서의 여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인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자신을 여인이라고 불러주고 신부라고 불러줘야 할 어떤 상대를 유발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 바로 여자를 처음 하나님께서 만든 목적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바벨론 앗수르 등 이 주변 나라의 우상을 섬기니까 자기 백성의 죄가 하나님이 만든 창세기 틀에 의해서 어떤 식으로 지적받는지를 표현할 때 “너는 자기의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찾은 음녀”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인인데 음탕한 여인, 음탕한 여인인데 자기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편 찾아가는 음탕한 여인이라고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무슨 여지를 남겨두는가 하면, 네가 찾고자 하는 그 남자의 자리를 바꿀 필요가 있음을 암시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에스겔,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음녀라, 음탕한 여인이라고 호칭하는 것에 대해서 현대를 사는 우리로서는 전혀 이해가 안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현대는 독자적입니다. 결정을 해도 내가 하지 누굴 쳐다보지를 않아요. 당신 없으면 못살겠어요, 라는 것이 현대인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나한테 필요하기에 너를 선택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나는 나 혼자서도 살 수 있는데 사는 일에 좀 더 유익하고 편할까 싶어서 그 다음에 내가 너를 선택해서 왔기에 나중에 내 맘에 안 들면 추방되어도 나는 그 자체로 완결적인 상태가 유지되는 겁니다.
그러니 현대인은 항상 처음도 자신이고 중간도 자신이 주체가 되고 마지막에도 믿을 존재는 자신밖에 없어요. 우리는 그런 식으로 교육받았고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런 식으로 교육받아 왔습니다. 이걸 가지고 근대주체사상이라고 하는데요. 신은 하늘로 돌려보내고 지상에 있는 모든 역사는 내가 어떻게 노동하고 일하기에 따라서 자기 역사가 개척되고 다듬어지고 만들어지는 거예요. 무슨 빈자리가 필요합니까? 내가 채워 가면 되죠. 오늘날의 인간들 입장에서는 여인이 간음했다는 이야기에 대해서 상당히 낯설어 하는 겁니다. 처음부터 성경해석 자체가 차단되어 있어요. 해석자체가 현대인의 사고방식에서는 불가능한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간음이니 음부니, 이렇게 나오니까 ‘아, 이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바람피우면 하나님이 싫어하는구나.’라는 정도로 생각하는데 결혼을 안 한 여자가 간음죄가 성립됩니까? 평생 처녀나 총각으로 사는 사람이 간음죄가 성립되느냐 그 말입니다. 안되지요. 혼자 사는데요. 일단 결혼을 해야 간통이 되는데 한 번도 결혼을 한 적이 없는데 간음이나 간통이 되겠어요? 혼자 사는 독신녀나 독신 남에게 십계명의 제 7계명은 빼야 되는 겁니다. “간음하지 말라.” 그러면 뭐라고 합니까? “결혼도 못했는데 무슨 간음이 성립됩니까? 난 결혼도 못했어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 성경말씀, 간음하지 말라는 이 말씀이 모든 일반사람들에게 다 적용이 되는 보편타당한 것이 되려면 결혼했느냐 안했느냐의 여부를 떠나서 다 적용이 돼야 합니다. 더 심하게 예를 들까요? 네 살 먹은 애가 간음죄가 성립됩니까? 이런 것을 생각해 봐야 된다니까요? 날 때부터 고아가 되면서 태어난 사람이 있다 합시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 십계명에 나오거든요. 태어날 때부터 고아가 되어버린 사람에게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면 양자로 들어가야 할까요? 양자로 들어갈 경우도 아니라면 평생이 다 가도록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은 다 지켰습니다. 지킬 수가 없지요.
그렇다면 이 성경말씀이 보편타당성이 떨어져버려요. 애들은 십계명 안 지켜도 된다, 그렇게 돼버려요. 애들은 십계명 지킬 때 5계명은 빼놓고 지켜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애들은 손에 칼을 쥘 수 있는 힘도 없어서 살인하지 말라는 것도 안돼요. 그러면 6계명도 빼야지요. 5계명도 빼고 6계명도 빼고 간음도 안 되니까 7계명도 빼버리고. 10계명에 보면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고 했는데 네 살 먹은 애가 무슨 이웃의 아내를 탐낼 일이 있습니까? 그것도 안 되니 빼버리고 안식일 지키는 것도 두 살 먹은 애가 무슨 안식일을 지킵니까?
전에 제가 예를 든 적이 있듯이 36개월 된 애를 보고 “얘야, 너는 밥 먹을 때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기도해라.”라고 가르친다고 해서 그 애가 죄를 알겠습니까? 갓 태어났다가 죽은 그 애를 두고 십계명 못 지켰다고 할 때 누가 그걸 동의하겠습니까?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죠. 십계명이라 하는 것은 글자도 알고 어떤 인식이 있어서 적어도 네 살이나 다섯 살, 그것도 모자라죠, 열 몇 살이 되고 십계명이 눈에 들어왔을 때 “십계명을 안 지키면 죄다.”라고 해야 되는 것이고 그 전에 어기면 “그런 법이 있었어? 몰랐잖아.”
그렇게 몰랐다면 그 애는 죄가 없습니까? 성경 로마서 6장에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죄를 지었기에 그 삯으로 죽는 거예요. 목사가 죽든 장로가 죽든 관계없어요. 죽는다는 사실은 무조건 죄인이기에 죽이는 겁니다.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난 예수님도 죄가 있어요. 죄 지어서 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백성의 죄를 짊어졌기에 죄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마저, 어떤 인간, 모든 인간이 다 죽습니다. 다 죄가 있습니다. 죄가 있기 때문에 그 죄가 죄 되기 위해서 십계명은 가동되고 작렬하는 겁니다.
제가 아까 던진 질문 다시 해볼게요. 인간에게 간음죄라는 것이 과연 성립이 되느냐는 말입니다. 인간에게 성경에서 말한 간음죄를 이해한다는 것은 도저히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내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 그래서 나는 그 여자와 내 남편을 간통죄로 집어넣었다. 그걸 간음이라고 하는 걸까요? 그게 간음입니까? 인간은 간음이라는 의미자체를 모르고 있습니다. 왜 모르고 있느냐 하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 아닙니까, 성경에서 말씀하는 십계명의 간음하지 말라는 그 이야기가 발전을 해요.
발전이라는 말은 좀 잘못된 말인데 바른 말로 하면 간음이라는 그 의미가 더 깊이를 가집니다. 이게 정답이에요. 간음이라는 의미가 표면적 간음이 아니라 깊이를 가져요. 십계명에서 “간음하지 말라.”라고 하는 그 의미가 창세기 1장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죠. 창세는 그냥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 뒤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지적하죠. 창세기 6장에 보면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라는 말씀이 있어요.
성경에서도 난해구절로 유명한 구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고 사람의 딸들은 누구를 이야기하는가? 이것에 관해서 수십 가지 주석이 나오고 구구절절 해석이 다 달라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이 결혼을 했다? 하나님의 아들은 천사고 사람의 딸은 그냥 육체를 가진 아담의 족속인데 DNA가 적용이 되는 겁니까? 천사한테 무슨DNA가 있겠어요? 그런데 임신을 했다는 거예요. 이것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신과 인간이 관계 맺는 식이거든요. 이 말은 천사와 인간의 관계가 가능하다는 말이 되고 그러면 이야기가 복잡해져요.
반지의 제왕 같은 식의 이야기가 되고 요정들의 이야기가 돼서 문제가 커져버리는 겁니다. 여기서 핵심은 6장 3절에 있어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하는 이 대목에 있습니다. 인간들이 신을 부를 때 신이 우리와 함께 있다고 자부합니다. 지금 교회도 그렇고 옛날부터 기독교나 불교나 이슬람교나 힌두교에 관계없이 제일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은 인간이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 쪽에서 하나님이든 신이든 찾아가려고 시도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과 도저히 함께 있을 수가 없는 육체, 죄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설교를 해도 “근본적으로 당신 설교는 이해를 못하겠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도 많은 사람들이 “당신 설교를 이해 못하겠다.”고 나와요. 이해를 못하는 이유가 “당신은 구원받을 수도 없고 구원받을 필요도 없어.”라는 거기서부터 출발을 해줘야 제 말이 이해가 되는데 ‘내가 성경말씀을 본다.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받을까?’라고 시도하는 것 자체를 이미 성경에서 거부하는 거예요. 정리하면 성경자체가 인간이 구원받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성경을 준 겁니다. 제가 그런 취지로 설교하고 그런 취지로 강의하면 다 듣고 난 뒤에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 하는 거예요.
그들은 다른 것을 기다렸어요. “내가 지금 구원받고자 한다. 복도 받고자 한다. 당신이 목사니까 이런 것 저런 것을 시키면서 ‘이런 것을 지키면 구원된다.’는 아이템, 정보를 제공해 달라.” 그런 입장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제가 하는 이야기는 “그래서 당신은 구원을 못 받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걸 기대하니까 구원을 못 받는 거예요. 이 세상에 간음죄라는 것을 아무도 몰라요. 바람피우는 그것은 간음죄도 아니고 간음죄라는 것을 아무도 몰라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십계명의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주는 순간 이제부터 간음죄가 만들어지기 위해서 우리가 간음죄 짓는 사람으로 새롭게 만들어지는 겁니다.
내가 간음죄 짓기 위해서 만들어진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을 믿을 때 구원받는 거예요. “나라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는 것이 아니고 여기 있는데 이 있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자기는 그냥 멀쩡하다는 거예요.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회개할 것은 회개할테니 어쨌든 이 몸은 그냥 구원해달라는 거예요. 하나님 쪽은 그게 아니고 “네 몸이라고 했나?” “예, 내 몸입니다.” “네 몸 자체를 바꾸겠다.”는 겁니다. “내 몸을 왜 바꿉니까?” “간음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네 몸을 간음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몸으로 바꾸어서 너를 구원하겠다.”는 겁니다.
간음죄 짓게 해서 구원시키겠다는 거예요. 왜? 우리 몸으로 짓는 간음죄는 간음죄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간통하고 고소해서 유치장가고 벌금내고 합의하고, 이런 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간통이고 성경에서 말하는 간음죄는 그런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제 말을 못 알아듣는 거예요. 제가 흥분한다고 해서 이해될 문제는 아니지만. 역대상 5장 25절에 보면 “저희가 그 열조의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멸하신 그 땅 백성의 신들을 간음하듯 섬긴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십계명, “간음하지 말라.”에 대해서 처음에 표면적으로는 ‘아, 이웃집 아내를 탐내지 말라. 서로 간통하지 말라는 뜻이구나.’ 했는데 이것이 점점 깊이를 더하면서 이스라엘집단 자체가 약속의 땅에 들어갑니다. 들어갈 때 자기들만 있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 간음죄라는 말씀도 같이 들어간 거예요. 간음죄는 어떤 인간도 뭔지 모릅니다. 그저 사회생활에서 알고 있는 간음이란 뜻으로 오해하면서 그 정도가 맞지 않겠나 하는 거예요. 하지만 약속의 땅에 들어갔는데 이것은 전혀 간음과는 상관이 없어요.
주변 이방민족들이 신을 섬겼어요. 신을 섬기는 그 의도가 뭐냐 하면, 전부 다 ‘자기를 위해서’ 신을 섬기는 거예요. 참 이 대목에서 저는 피를 토하고 싶어요. 교회 오는 사람들이 전부 다 자기를 위해서 교회 와요. “하나님이여, 내가 영생 얻게 하옵소서.” 영생 얻게 하옵소서, 이것은 기독교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 모든 종교가 다 그렇게 기도해요. 진짜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는 그것과 관계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욕심이고 욕망이에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추방을 했으면 “주여, 추방 잘 했습니다.” 이렇게 나와야지 영생 얻게 해 달라는 그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추방한 그 조치는 잘못된 조치입니다.”라고 반항하는 것밖에 안돼요.
반항을 하게 되면 인간은 육체가 되어버리고 육체가 되면 하나님의 신이 함께 있지 않아요.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인간들은 신 쪽으로 다가가지만 인간이 자기가 육체인지를 모르는 이상은 하나님이 함께 있지를 않는다니까요. 그런데 자기가 육체인 것을 모르고 그저 자기의 욕망이 뭐냐, 이 땅에서 고생 좀 했으니 죽어서는 편하게 살아야 한다는 자기 비전, 꿈, 바람, 이런 것을 기대하고 예수이름으로 구원받고자 나온 거예요.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간음죄를 통과해야 구원받습니다. 간음죄가 뭐냐, 우리는 그냥 태어난 그 자체가 간음죄를 위해서 태어난 존재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간음죄인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태어나면서부터 자동적으로 자기를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살게 되어 있는데 이스라엘의약속의 땅에 가보니까 주변나라들인 바벨론이나 모압이나 암몬이나 블레셋등의 모든 나라들이 신을 섬길 때 전부 다 자기를 위해서 신을 섬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도 자기를 위해서 신을 섬기면 그것이 여호와 섬기는 것인 줄 알고 자기를 위해서 신을 섬긴 거예요. 그런데 그걸 가지고 ‘음란한 여인’이라고 했다는 말이지요. 비로소 치고 들어와서 개입되는 것이 뭐냐, 간음죄가 성립되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겁니까?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합니다. 매사가, 모든 일이, 세상 어떻게 돌아가도 괜찮아요. 내 중심으로 나한테 유리하면 좋은 세상이고 불리하면 이것은 더러운 세상 되어버려요. 이게 간음죄에요.
“목사님, 왜 그게 간음죄입니까?”라고 물으신다면, 간음죄가 성립되려면 인간자체가 여자로 표현되어야 해요.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여자는 독자적으로 ‘자기를 위해서’라는 것이 성립이 안돼요. ‘낭군을 위해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자의 특징은 ‘여자는 그렇다?’ 반드시 자기의 빈자리, 자기가 의지하고 기댈만한 것을 요청하는 식으로 살 속성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여자입니다. 여자는 홀로 완전하지를 못하고 자기가 갈구하는 어떤 배후자가 있음으로 그 배후자에 붙어서 자기존재를 파악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남자는 간음죄에서 제외됩니까?”라고 할 수 있는데 모든 인간에게 간음죄를 성립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여자로 만들어버렸어요. 모든 인간을 여자로 만든다면 간음죄 없는 여자는 어떤 여자인가? 당연히 주 예수님을 찾아야지요. 창조주를 남편으로 봐야지요. 창조주를 남편으로 보고 ‘내가 존재하는 것은 창조주남편이 있기에 비로소 내가 존재하고 그래서 남편을 위하여 내가 죽어도 되고 살아도 된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목적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어떻습니까? 나는 독자적으로 있고 지금 내가 필요한 것을 선택하는 거예요. ‘나중에 천당 가고 영생 얻고 싶은데 이 일에 예수님이 전문가니까 예수 믿자.’ 해서 영생 얻고, 그 다음에 ‘영생 얻는 것은 되었으니 복을 얻으려면 옳지, 기도해야지.’ 기도해서 복 얻고, 이 자체가 어떤 비어있는 자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독자적으로 자기의 것을 계속 쌓기 위해서, 나 잘되기 위해서 예수, 십자가, 언약, 성경, 창세기, 온갖 것을 다 선택해서 독자적으로 나만 살면 그만이라는 이런 모습,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없는 이 육체의 모습, 이걸 볼 때 이스라엘에게 ‘이 간음한 여인’이라고 함으로써 ‘너는 너 독자적으로 살 수 없고 너의 빈자리가 있음을 왜 인식하지 못하는가?’라고 하는 겁니다.
성경의 간음죄하고 바람피우는 것은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사야 62장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 자체를 ‘쁄라’라고 합니다. 뿔라란 ‘결혼한 여자’라, 이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라고 불러도 되고 ‘내 색시’라고 불러도 되는 겁니다.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 인간들은 심정이 이래요. “내가 나한테 좋으라고 결혼하지 하나님 당신 좋다고 해서 내가 신부가 덜렁 되어버리고. 왜 나한테 의견을 안 물어봅니까? 저에게 하나님의 신부가 되고 싶으냐고 물으면 신부가 되고 싶다는 의견을 들어서 결혼합니다. 나한테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나를 신부로 간주하면 섭섭합니다. 나의 독자적인 인생계획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게 바로 이방민족들이 자기를 위해서 신을 섬기는 간음한 여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이방민족에게는 음부니 간음이니 뭐라고 하지 않아요. 왜, 내놓은 자식이기 때문에. 그런데 “이 간음한 여인아! 왜 너밖에 모르는가? 신랑이 옆에 있는데 신랑은 안중에도 없고 너만 잘되면 그만이지?”라고 할 때는 이미 구원이 시작된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간음을 모르는 자기백성에게 간음죄를 지은 간통한 음부라고 지칭하는 것 자체가 이미 구원의 개시입니다. “주여, 내 맘대로 살았군요.” 우리는 이방민족들이 부채도사 믿는다고 욕하고 절에 간다, 천주교간다고 욕했지만 사실은 교회 온 우리가 왜 왔느냐는 말이지요.
질문 간단해요. “교회 왜 왔습니까?” “내가 오고 싶어 오지요.” “그러면 오기 싫다면?” “그러면 안 오지요.” 그러니까 간음죄인거예요. 왜냐하면 이미 남편이 확정되어 있으면 신부는 남편이 결정하지 신부가 남편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게 성령을 통해서 믿어지는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믿어지면 내가 신부답게 한다고 해서 주님과 결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신랑이 이미 신랑으로 확정되었으면 신랑에 적합한 신부가 되도록 알아서 만들어 가실 거예요. 결혼하기 전에 옷 사 입으라고 돈도 몇 백만 원 주고, 이렇게 신랑 쪽에서 다 하실 거예요. 신혼여행을 어디로 갈 건지도 다 정하고.
우리 의사는 물어보지 않습니다. 구원이라 하는 것은 내가 구원받고 싶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의사와 관계없이 그냥 예수님의 신부가 되고 말았어요. 이게 믿어져야 성령이 온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 사실이 성경에 나와 있는데 우리의 일상적인 마음은 ‘에이 씨, 나도 내 맘대로 해보자.’ 이런 간음한 여인의 속성,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사니까 나도 그렇게 산다는 식으로 그저 편하게 산다고 하는데 그렇게 살면 성경 에스겔에 의하면 그게 다 간음죄가 되는 거예요. “네가 그 일 하는데 남편한테 물어봤나?” “남편? 무슨 남편이요?” “주님남편” “내가 주님남편 맘속에 들어가 보지도 않았는데 그 맘을 어떻게 압니까?” “그러면 주님 남편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하는데?” “그냥 나 좋은 대로 하지요.” “그게 간음죄라니까.”
그냥 나 좋을 대로 사니까 예수 안 믿고 절에 가는 사람들과 조금도 의견차이가 없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특징은 신랑 때문에, 신랑의 기쁨이 되라고 이스라엘 된 겁니다. 신랑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는 내 소유”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신랑이 나의 소유가 되면 그 다음부터는 내 소유라는 것이 애초부터 성립이 안 됩니다. 로마서 14장 7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그걸 알고 그걸 믿는 성도는 어떻게 살까요? 그냥 네 식대로 살면 돼요. “아니 주를 위해서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주를 위해서 사는 그것도 주의 소관이에요. 아, 이 대목이 헷갈리지요? 주를 위해서 사는 것은 주의 소관이고 우리가 주를 위해서 살 수가 없어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삽니까? 평소 살던 대로, 간음한 여인대로 그냥 살면 돼요. 그러면 그 간음한 여인으로 살면 주님께서 화를 내시면서 “간음한 여인아. 너는 천국에서 못산다. 지옥이나 가라.”하고 내쫓아 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하고 걱정한다면 그것은 그만큼 신랑의 실력을 못 믿어서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내 맘대로, 내 멋대로, 내 식대로, 내 느낌대로 그냥 살아가는 그것이 성경에 있는 간음죄를 보여주기 위해서 신랑이 그 역할 하라고 신부에게 시킨 거예요. “무슨 신랑이 신부한테 바람피우는 것을 시키는 되도 않는 신랑이 있느냐? 성경해석 똑바로 해라. 무슨 무리한 해석을 하느냐?”라고 나오시겠지만 이스라엘역사가 이미 우리보다 앞선 선배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피해서 구원받는 그런 법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남의 역사가 아니에요. 우리 역사에요. 이스라엘이 그렇게 살았다면 우리가 지금 그렇게 간음하면서, 세상 좋다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랑이 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신랑이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신랑의 희생, 신랑의 피, 그것만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신랑의 가치, 신랑의 존귀함이 점점 더 높아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지옥 가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지옥 가는 사람도 자기를 위해서 삽니다. 천당 가는 사람도 자기를 위해서 살고 지옥 가는 사람도 자기를 위해서 살아요. 그런데 지옥 가는 사람은 뭐가 없는가? 신랑이 없어요. 신랑이 없기에 매사 살아가면서 나오는 것이 뭐냐, 변명이 나옵니다. “나는 지금까지 바람피운 적이 없었습니다.”라고 하거든요.
그러면 제가 묻지요. “혹시 마음속으로도 간음 안했습니까?” “저는 마음속으로도 간음 안했습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평소에도 간음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요?” “내가 간음한 적이 없기 때문에 십계명 지켰기에 구원받습니다.” 이게 바로 지옥 가는 사람입니다. 지옥 가는 사람은 항상 자기행동에 대해서 좋은 쪽으로 변명하고 핑계로 일관합니다. 그런데 천국 가는 사람, 진짜 예수님의 신부는 아무리 희생하고 선교하고 모든 것을 기부해도 그것도 결국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한테 들키고 마는, 그냥 주의 은혜로 성령이 충만해서 자기를 낮추면서 “주의 영광만을 위해서 했습니다.”라고 하는 그 순간 그것이 나의 명예와 나의 자긍심으로 돌아오고 나의 자만심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이 육신을 가진 인간임을 고백하는, “내가 바로 간음한 여인입니다.” 밥을 퍼주는 사랑이든 어떤 사랑을 해도, 남을 위해서 그야말로 간이고 신장이고 다 떼 줘도 내가 남에게 이걸 해 줬다는 것을 잊을 수가 없어요.
오른손, 왼손이 어디서 나옵니까? 두뇌에서 나오거든요. 오른 뇌는 왼손으로 가고 왼 뇌는 오른손으로 가잖아요. 오른 뇌 왼 뇌가 한꺼번에 들어있는데 서로 모를 리가 있습니까? 그 자만심이라는 것, 그 자만심이 인간이 육체로 되어 있는 이상 한순간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아니면, 우리 남편 피 아니면 용서받을 길이 없습니다.” 하는 자가 지금 천국가고 있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고 “내가 예수 믿고 이 정도 착했으니까 이제는 나보고 간음이니 뭐니 그런 소리 하지 말라. 나는 간음한 적이 없다.”라고 자기 의로 나왔을 때 이게 바로 이방민족이고 이방민족 식으로 믿는 예수, 가짜 예수, 자기를 위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는 이것이 내놓은 자식이고 지옥 갈 자식이고 하나님의 신부가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는 여인은 예수님 발 앞에서 자기가 혼수준비로 해놓은 향유옥합을 예수님 발 앞에 깨뜨리면서, 울면서, “예수님 아니면 난 구원 못 받을 여인입니다.”라고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그 여인, 주께서 하신 말씀은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 바로 그것이 신랑과 신부의 유일한 사랑입니다. 결혼 안 해도 간음합니다. 뭐든지, 결혼을 해도 자기를 위해서, 이혼을 해도 자기를 위해서, 뭐든지 자기를 위해서 사는 인간, 우리는 이런 육체가 있는 한 그 속성을 죽을 때까지 버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간음죄라는 것을 신랑을 통해서, 신랑의 십자가 피를 통해서 다시 한 번 깨달을 때 그것이 이미 예수님과 혼인관계에 들어간 깨끗하고 거룩한 신부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이 못된 버릇이 수십 년 예수 믿어도, 직분 높아져도 아무 상관없이 발휘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시고 날이면 날마다 더욱더 신랑 되시는 예수님의 피가, 십자가 죽으심이 더욱더 깊이 알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