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강-에스겔 25장 1-3(암몬저주)140108-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25장 1절에서 3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89페이지입니다.
에스겔 25:1-3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암몬 족속을 향하여 그들을 쳐서 예언하라 너는 암몬 족속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성소를 더럽힐 때에 네가 그것을 대하여, 이스라엘 땅이 황무할 때에 네가 그것을 대하여, 유다 족속이 사로잡힐 때에 네가 그들을 대하여 이르기를 아하 좋다 하였도다.”
신앙생활을 할 때 모델로 등장하는 것이 그 사람의 개인적인 성품이 달라졌다, 인품이 고매하다, 술 담배를 금했다, 이런 것들입니다. 이런 것을 신앙의 모델로 삼아서 잘하고 있다고 보통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에스겔 25장 본문에 보면 암몬족속이 나옵니다. 암몬족속하고 우리 성품이 고상해지는 것과 무슨 관련성이 있습니까? 아무 관련성이 없어 보이지요. 없어 보인다는 말은 우리가 인간성이 좋고 성품이 온화해졌다는 그것은 신앙생활이 모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암몬족속을 쳐서 예언하라. 그들은 나중에 멸망한다.” 이것과 우리 성질이 온순해지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무슨 연결점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생활의 모델은 내가 온유하고 화평하고 착실하고 훌륭하고 성질이 고쳐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의 이름의 승리하심을 자랑하는데 있어요. 주님의 승리하심, 승리라는 말은 전쟁가운데 있다는 말이고 거기서 승리했다는 말은 적을 패배시켰다는 말인데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려면 “주님의 원수가 오늘날 누굽니까?” 이렇게 질문이 나와야 돼요.
내가 교인들이나 목사 앞에서 예수 얼마나 잘 믿어서 성품이 온화해졌나, 이건 자기자랑이지 주의 이름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주의 이름이라는 것은 구약성경을 보게 되면 전쟁을 치렀던 주님이시고 그 주님의 전쟁에서 패배했던 민족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의 암몬족속입니다. 암몬족속을 언급할 때 우리 마음이 온유하다든지 그런 것과 연결을 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아, 내가 그리워하고 고대했던 것들, 예수 믿고 인간성이 이렇게 좋아졌구나.’라는 것은 신앙의 목표나 도착지점도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훌륭한 인격을 갖추는가, 그것은 신앙하고 관계없습니다.
사람이 착한 것이 신앙생활이라면 날 때부터 성품이 고운 사람이 있어요. 아빠 엄마의 유전자가 착해서 그렇게 태어난 사람들이 있어요. 그 사람은 교회 나올 필요도 없고 성경 필요도 없네요? 그 사람에게 물어 보세요. “암몬 족속이 누구지요?” 그 사람은 “그걸 왜 저에게 묻습니까?” “암몬족속을 아셔야 당신이 살아가는 인생의 모든 방향이 주의 이름만을 높일 수 있는 제대로 된 신앙인데 실례지만 암몬족속을 아십니까? (다음시간에는 모압이 나오는데) 그러면 모압은 누군지를 아십니까? 모압과 당신이 어떻게 엮이는지 설명 좀 해주세요.” 그 사람이 뭐라고 할까요? 아무 답할 것이 없지요.
평소에 자기자랑하면서 자랑거리를 만드는 목적으로 교회를 다녔고 자기자랑거리가 이미 충분하다면 교회를 안다니든지 그런 사람이겠지요. 이것은 구약뿐만이 신약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다른 곳에는 ‘주의 이름만 자랑하리라.’고 되어 있어요. 신약에 나오는 주의 이름이 구원받았기에 자랑하거든요. 구원의 개념이란 구약에서 구원에 실패한 이스라엘을 염두에 두고 구원을 언급하는 겁니다. 이스라엘나라가 구원에 실패했거든요.
실패한 이유가 주위에 암몬, 모압, 블레셋, 바벨론, 앗수르, 아람, 그런 나라들이 포진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나라는 하나님 보기에 원수였어요. 하나님의 원수라고 선지자들이 일러줬습니다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원수라는 말은 귓전에 들어오지도 않고 나에게 무엇이 이익이고 무엇이 나의 욕망을 채울 수 있는지에 치중하다 보니 이스라엘은 구원에 실패했습니다. 주변나라의 기세에 눌려서 숨도 못 쉬었어요. 모압이나 암몬같은 주변 나라의 기세에 눌려서. 그 이스라엘이 실패한 구원을 신약에서는 주의 이름으로 제공하겠다는 거지요.
주의 이름에서 우리가 주의 구원을 안다는 것은 ‘왜 구약의 이스라엘은 실패했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돼요. 그들이 온유하지 않았거나 인품이 거칠어서 실패한줄 알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흔히 신앙이라고 하면 “인간이 되어야지, 인격이 되어야지.” 하는데 그러면 인간성가지고 유대인들, 바리새인들하고 한 번 붙어볼까요? 그 고매한 인품과 인격 앞에서 예수님의 성질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성질은 유대인, 바리새인, 사두개인의 인격을 못 따라갔어요. “독사의 새끼들아!” 하고 욕이 나오는데 그것이 인품입니까?
채찍을 휘두르면서 “하나님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드는구나.” 하고 채찍으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냈는데 그게 인품이고 인격입니까? 세례요한은 어떻습니까? 세례요한이 장가를 안가서 천만 다행이지 왜 나서서 남의 왕 결혼문제에 나섰다가 목이나 잘리고 쟁반에 담기는 수모를 당하느냐는 말이지요.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 말을 해도 그렇게 험하게 막 내지르는듯한 느낌이 들어요. 절제를 하고 가려서 말을 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말을 막 내질렀어요. “타작마당이 있는데 가라지는 무서운 진노의 불에 다 싸질러진다.”
온화한 마음으로 사람을 설득하고 포섭할 생각은 하지 않고 내질러 버리니 세례요한은 자기 성질대로 목 잘려 죽고 예수님도 사형당하고, 거기에 교회에서 말하는 고매한 인품이 어디 있습니까? 이스라엘 나라가 주변 나라와의 차이점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를 않았습니다. 이 문제가 너무 난해하기 때문에 쉽게 결론부터 먼저 언급해드리겠습니다. 세상 모든 종교는 ‘내 몸이 어떻게 되는가?’ 그거예요. ‘지금 썩어가는 내 몸이 나중에는 괜찮은 몸으로 바뀌는가?’ 이것이 세상 모든 인간에게서 나온 아이디어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신약은 내 몸은 죽고 주의 몸으로 다시 사는 것, 그것이 신약의 부활입니다. 내 몸을 잊어야 돼요. 내 몸이 괜찮아지는 것을 잊어야 해요. 이것을 염두에 두면 안 됩니다.
나의 자존심, 나의 행함, 나의 고생, 내가 애쓴 것, 이것이 내 몸에 다 담기게 돼요. 그러나 내 몸을 버려야 돼요. 내 몸을 버리고 주의 몸으로 바뀌면 내가 얼마나 고생했고 내가 얼마나 수고했느냐가 아니라 주님의 이 몸이 얼마나 수고했고 주님의 몸에 창 자국이 있고 가시면류관 쓰시고 피 흘리고 손에는 못이 박히고, 그것을 찬미하는 것이 천국이고 주의 이름만 높이는 영역입니다. 이스라엘이 구원에 실패한 이유가 뭐냐, 자기 몸만 생각하는 것, 자기 몸을 사수하고 보존하려고 하는데 다른 민족도 자기 몸만 지키니까 힘으로 겨뤄서 이스라엘이 패배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주변에 모압, 암몬, 블레셋등의 여러 나라를 주변에 깔아둔 것은 하나님이 개입하셨다는 현실과 그냥 인간들이 신을 찾는 종교적인 현실 중에서 어느 현실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이고 어느 현실이 하나님의 참 백성이 되는 것인가를 구분하라고 주변에 블레셋이나 암몬과 모압같은 나라들을 깔아 둔 거예요. 교회 다니면 인품이 좋아진다고요? 그 인품 좋다 하는 몸이 누구 몸인데요? 여전히 자기 몸이잖아요. 그러면 그것은 암몬이고 모압이라는 말이지요. 구약의 암몬, 모압, 블레셋, 애굽을 깔아 둔 것은 주의 몸으로 부활되는 것을 모르고 여전히 자기 몸을 사수하고 내 민족과 국가만 지키겠다는 이기주의적인 본성의 나라들이 이스라엘과 차이나고 그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의해서 그들도 된 통으로 터지고 당한다는 겁니다.
에스겔 25장에서 암몬을 보게 되면 유다나라가 BC586년에 멸망하고 난 뒤에 그걸 아주 고소하게 느꼈습니다. 본문 3절에 보면,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성소를 더럽힐 때에 네가 그것을 대하여, 이스라엘 땅이 황무할 때에 네가 그것을 대하여, 유다 족속이 사로잡힐 때에 네가 그들을 대하여 이르기를 아하 좋다.” 꼴좋다, 잘 됐다, 잘 망했다, 라고 그들은 고소해 했습니다. 우리의 상식은 이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사라져버리면 여호와도 사라진다고 짐작합니다. 만약에 조물주가 삼국시대나 고려나 조선시대의 모든 민중들의 조물주라면 우리나라가 사라지면 조물주도 같이 사라지는 거지요.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 조물주가 몽골이나 일본이나 필리핀까지 작용한다는 생각을 못하지요. 신은 우리와 함께 있기에.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상해요.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에 자기 민족과 함께 잠잠하든지 혹은 부끄러워하든지, ‘나라는 신도 참 내 민족하나 못 지키는구나. 다른 나라 신에게 졌다.’ 하고 자숙하든지 해야 되는데 자기 나라를 멸망시켜놓고 자기나라를 멸망시킨 그 하나님이 이제는 암몬이나 모압같은 다른 나라까지 간섭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25장 7절에 보면 “그런즉 내가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를 다른 민족에게 붙여 노략을 당하게 하며 너를 만민 중에 끊어 버리며 너를 열국 중에서 패망케 하여 멸하리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네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는 이 문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장인줄로 우리가 알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자기백성은 처박아놓고 여호와 찾지도 않는 다른 민족한테 가서 내가 바로 여호와라고 언급하는 이유가 뭐냐 하는 겁니다. 애굽에서 여호와를 끄집어낼 때 자기민족만 끄집어내면 되지 애굽나라 바로에게 “내가 여호와다.” 하면서, 열 번씩이나 재앙으로 때리시면서 그렇게 하는 그 이유가 뭐냐는 겁니다. 이게 상당히 어려워요. 그것은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적절한 체류기간을 사용합니다. 적합한 체류기간, 이 체류기간이란 머물러 있는 시간을 말합니다. “독일, 한국, 스위스에서 얼마나 체류합니까?” 할 때 체류기간이라고 하지요. 이 세상 모든 민족은 신명기에 의하면 각자 체류기간이 따로 있습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고 그 허용된 기간만큼은 이 땅에서 체류하게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모압과 암몬등 이 모든 나라는 다 여호와 하나님의 승리를 드러내기 위해서, 각자 자기의 맡은 역할을 하기 위해서 잠시 체류기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유다가 망하고 난 뒤에도 약간 더 버티고 있는 모압이나 암몬같은 나라의 의미는 뭐냐 하면, 이스라엘의 부재함을 대신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지금 사라졌거든요. 부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도 사라졌으니 여호와도 사라져야 된다는 이 상식을 깨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사라진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때리고 심판하는데 있어서 그 대상이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멸망할 수밖에 없던 그 죄, 암몬이나 모압이나 블레셋이나 애굽이나 바벨론이 이제는 이스라엘이 얻어맞은 똑같은 죄목으로 얻어맞게 됨으로써 여호와는 여전히 여호와로서 이 세상에 군림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고소해 했어요. “꼴좋다, 잘됐다, 하나님 믿다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구나. 그래, 너희 하나님이 뭔가 너희를 구원하고 보장해줄만한 힘을 가진 하나님이 아니지.”라고 고소해하는 그 모습, 그 모습을 통해서 그것과 대비되는 홀로 남은 여호와 하나님과 대결상태로 맞닥뜨리게 하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잘 이해된다 싶은데 이제부터 어려운 것이 뭐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심판할 때 우리는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자기민족을 쳤다고 했지만 아무리 하나님이 자기민족을 쳐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징벌할 때 징벌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징벌했다는 영수증이 있어요. 마트에서 현금영수증 드릴까요, 하잖아요. 하나님께서 징벌할 때 이런 이유로 인해서 징벌 받아야 마땅하다는 그 영수증, 그 자리가 남아요. 그 자리가 발생하게 되면 이번에는 그 자리에 암몬을 집어넣어서 그 자리에 따라서 암몬을 심판하고 암몬을 심판하고 난 뒤에는 모압을 집어넣고 치고 그 다음에 블레셋 쳐버리고, 애굽 쳐버리고, 바벨론 쳐버리고, 이방나라들인 한국과 필리핀과 인도와 일본과 북한까지를 다 쳐버리는 거예요.
이스라엘도 하나의 체류기간을 갖고 있는데 이스라엘이 잠깐 있다가 사라지면서 무엇을 남기는가, 어떤 자리를 남기는데 하나님은 언약에 의해서 저주하고 언약에 의해서 구원한다는 증표로서 구실을 할 수 있는 자리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확보하신 거예요. 이스라엘을 가지고 복사기에 복사를 해버립니다. 이스라엘은 사라져도 그동안 이스라엘을 어떤 입장에서 다루었는지를 보여주는 그 영수증이 있어요. 그 영수증 가지고 세상 모든 나라를 본격적으로 심판하는 일에 나서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본인들은 이 사실을 몰랐어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기 하나님인줄 알았습니다. 오늘날 교회 교인들처럼. 우리는 하나의 체류기간, 잠시 이용당할 뿐이라는 사실을 상상도 못했어요. 지금 권사님, 장로님과 저도 마찬가지인데 주님에게 이용당한 겁니다. 무엇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다녀간 그 자리에 주께서 이런 식으로 구원했고, 이런 식으로 이 사람은 천국 보냈다고 할 수 있는 그 기준 되는 영수증을 남기기 위해서 우리를 잠시 이 땅에 남겼다가 사라지게 만드는 거예요.
디모데전서 1장에 보면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주님 만나기 전에는 몰랐는데 주님 만나고 난 뒤에 알게 된 것은 ‘나는 죄인 중에 괴수’였다. 하지만 주님은 창세전부터 나를 택정해서 은혜로 구원하셨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도바울은 사라졌고 지금 주님과 함께 거합니다. 하나님은 사도바울을 이용한 거예요. 하나님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언약으로 구원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언약을 오해해서 자기가 원하는 내 나라, 내 욕망에 맞는 자기삶을 꾸리는데 하나님의 언약이 보탬이 된다고 여겼던 거예요.
하나님께 기도하면 우리교회가 발전하고 부흥되고 우리 형편이 나아지고 가정이 화목해지고, 전부다 내가 기대하는 내 자리를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끌어당기면 되는 줄로 아는 거예요. 성질 더러운 인간은 교회 나가서 성질이 온순해지고 술 담배 하는 인간이 술 담배도 끊고 착실해지고 그래서 교회 나와서 인간되었다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도 좋고 점점 훌륭한 인격자가 된다는 식의 것들을 노리면서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거예요. 그런 사람한테 물어보세요. “실례지만 암몬을 아십니까?”
암몬하고 내 인격이 고상해지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 관련성을 모르지요. 이스라엘의 체류기간이 끝나면 이스라엘이 사라지지 않느냐? 이스라엘이나 암몬이나 모압이나 다 같은 신세네, 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좀 어려운데 요나 1장 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도망칩니다. 도망치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알았어요. “네가 땅 끝까지 가봐라. 내가 모를 줄 아나. 네가 하늘 끝까지 가봐라.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요나가 도망을 쳤지요. 도망을 치다가 파도가 따라와서 타고 있던 배가 침몰할 지경에 있습니다.
그 내막은 잘 모르지만 그 배에 탄 선원들과 선장이 요나를 불러 세워놓고는 “네가 믿는 신에게 뭔가 잘못한 게 있지? 이실직고해라.” 하니까 요나가 하는 말이 “나 때문에 당신들까지 함께 죽게 되었습니다.” 하지요. 뱃사람들이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할 때 요나가 하는 말이 “나를 바다에 집어넣으세요.” 꼭 심청이 같아요. “나를 바다에 집어넣으면 나는 죽고 당신은 살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존재는 단순히 자기를 살리기 위한 여호와를 믿는 관계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죽고 난 뒤에 다른 민족이 사는, 장차오실 예수님의 기능을 미리 함유하고 등장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다른 신 말고 오직 용서를 제시하는 신 앞에서 용서받지 아니하면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존재, 용서받지 못한 자가 제일 불쌍한 존재라는 거예요. 용서라는 것을 ‘누가 용서해줬으면 좋겠다.’고 우리는 그냥 편하게만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용서라는 것이 종교가 아니고 하나의 현실임을, 용서가 실제로 베풀어지는 현상이 실제상황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실제로 이 세상에서 망하게 하시는 시나리오 속에 밀어 넣어버렸어요.
용서, 그 용서 하나 때문에 거대한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해버립니다. 이스라엘이 용서, 용서, 말을 그렇게 해도 실제로 용서의 의미를 제대로 알 때까지는 그들은 멸망당하는 스토리가 필요했던 거예요. 실제로 멸망당해봐야 ‘야, 이 세상에서 내 나라 잘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용서받는 것이구나.’ 용서라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하나님의 무서움 앞에서, 하나님의 저주 앞에 설 때만 용서보다 더 귀한 것은 없음을 깨닫게 돼요.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목사가 구원받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목회 실패하는 길밖에 없어요. 농사꾼이 구원받는 길은 농사 실패하는 것이고 교사가 구원받는 것은 교사 실패하는 것이고 가정주부가 구원받는 것은 주부인생살이가 실패하는 것,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이 실패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실패하지 않으면 주님의 용서가 그다지 좋아보이지를 않고 그다지 고귀하게 다가오지를 않아요. ‘용서보다 돈이나 있었으면 좋겠다. 용서보다 고급 차가 타고 다니고 고급 집에서 살고 싶다.’ 사람이 노숙자 된다고 용서 안하는 것은 아니고요. 주일 낮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마귀가 항상 ‘너 잘된다. 네가 잘된다.’ 그런 식으로 했을 때에 메시아가 주로서 역할을 하려면 그냥 죽는 것 밖에 없어요.
죽을 때 자살하면 안 되고, 그냥 사람한테 죽으면 안 되고,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해서 아버지로부터 죽임을 당해야 돼요. 우리가 사람한테 죽으면 안 되고 예수님의 아버지 그 하나님으로부터 죽임을 당할 때 비로소 우리는 생명이라는 것, 영생이 얼마나 고귀하고 천국이 얼마나 고귀한가를 비로소 그 시점에서 알게 되는 거예요. 이것은 그다지 적절한 예는 아닌 줄 압니다만, 남녀 간에 프로포즈를 할 때 별난 이벤트를 벌이는 것이 뭐냐 하면, 남자 쪽에서 “아이스크림 사줄까?” 합니다.
아이스크림을 먹는데 아, 하고 이빨사이에 부딪히는 것이 있어요. 보니까 다이아반지가 들어 있어요. 제가 지금 되도 않는 예를 든다고 미리 이야기했지요? 뭔가 부서져야 돼요. 부서져야 다이아반지라도 나오잖아요. 진리라는 것은 부서져야 되는 것입니다. 파쇄, 깨져야 돼요.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몸이 너무 귀하기에 자기 몸을 풍선처럼 부풀려서 천국에 접촉시키려고 시도합니다. 그런 시도한 나라가 암몬이고 모압이에요. 그들은 이스라엘이 하나의 희생타로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우리나라는 이렇게 든든한데 이스라엘, 꼬락서니 하고는! 지질이도 못살지. 우리는 이렇게도 승리하고 살아남았는데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에게 폭삭 망했구나. 꼴 좋다! 아하, 잘 됐다.”라고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했다는 말이지요.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블레셋, 암몬, 모압은 전부 다 살아가는 것이 자기 힘자랑, 자기존재자랑, 그것만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도 그랬었던 나라인데 이스라엘의 좋은 점은 그랬었던 그 나라가 자기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약속과 맞지 않는다고 멸망을 당한 그것이 바로 종교가 아니고, 종교라는 취미생활이 아니고 현실 그 자체라는 거예요. 다른 나라에서는 나라가 현실이고 종교는 부록이고 취미지만 이스라엘은 그 나라자체가 실제로 뭉개지면서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이 그 역사 속에 실제로 나타남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 매개가 이런 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는 장으로서 이스라엘이 다루어지고 있었던 겁니다.
만약에 하나의 예를 들어서 암몬족속 가운데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나중에 천국에 갔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이렇게 해석해야 되는 거지요. 암몬의 신이 두 가지가 있어요. 몰렉이 있고 밀곰이 있습니다. 사사기 10장 6절에 암몬 신들이 나오고 열왕기상에 보면 여러 곳에 밀곰이라는 신을 섬겼다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들이 신을 섬긴 것은 그들의 나라를 위해서 신이 필요했지요. 나라 있음이 현실이고 종교라는 것은 그 현실을 받쳐주기 위해서 인간들이 상상력을 동원한 종교생활을 한 것이 그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도 그런 식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했거든요. 그냥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여호와 하나님인줄 알았는데, 그냥 종교분야인줄 알았는데 실제로 현실을 구성하는 진짜 살아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에게만 나타나고 다른 나라에는 나타나지 않았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에 그 이스라엘 자리에 하나님께서는 모압도 암몬도 다 칩니다. 다 쳐서 하나님의 언약, 언약의 하나님은 내 자랑하라고 있는 신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위해서 있는 신이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은 오직 언약을 위해서 있는 겁니다.
정답을 다시 말씀드릴게요. 신약에 보면 내 몸이 부활되는 것이 아니고 이 몸이 주의 몸으로 달라지는 그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 몸은 왜 안 되는가? 내 몸은 아주 깊숙한 수직갱도라고 보면 돼요. 수직갱도 안에 뭐가 들어 있는가 하면, 모압이 들어 있고 암몬이 들어 있고 바벨론이 들어 있고 블레셋이 들어 있어요. 거기서 나오는 모든 것은 다 “이 몸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 믿읍시다.”라는 겁니다. 내 몸 고상하고 내 몸의 자질이 대단하고 내 자랑거리를 얻고, 이런 것들만 튀어나오는 암몬과 모압의 후손들이 우리들, 배고픈 이 내 몸이 현실이고 종교는 취미인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먼저 이스라엘을 침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의 몸은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주의 원수가 돼요. 주의 원수로 인정받고 주의 원수로서 당했을 때 비로소 그 자리가 불쌍히 여겨서 용서하는 용서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깨지는 자리, 하나님한테 벌 받는 그 자리가 비로소 눈이 활짝 열리면서 “주님의 용서가 있다면 이 땅에 거지 나사로가 되어도 괜찮아요.” 하는 고백이 터져 나오는 그 자리, 주께서 만들어놓은 언약의 자리, 그 자리가 우리를 찍어내는 X레이 사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단층 촬영하는 자리가 되고 수면내시경을 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더러운 자리가, “더럽기 때문에 용서해줄게.”라는 십자가 피 언약, 새 언약이 들어오는 만남의 장소가 될 때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자리고 그 죽은 자리에서 이스라엘을 만들어내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시나리오가 그렇게 펼쳐지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용서보다 더 귀한 것이 없는데 우리는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는지, 내 영광, 내 자랑, 내 자만심, 내 교만, 그걸로 허송세월 다 보내고 있지는 않은지. 주여, 날마다 죽어 마땅하나 날마다 살려내시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새 언약, 예수님의 피 때문에 그 자비로 살았다는 사실을 증거 하라는 것인 줄로 아오니 주님의 용서만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