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선지자 아내의 죽음(겔2;15-21)이근호140101

아빠와 함께 2014. 1. 2. 02:45

2014-01-01 20:42:18 조회 : 12         
   선지자 아내의 죽음 140101 이름 : 이근호   

선지자 아내의 죽음(에스겔 24:15-21)

음성            동영상1     동영상2

 이근호 14-01-01 21:21 

 

 

선지자 아내의 죽음

2014년 1월 1일                     본문 말씀: 에스겔 24:15-21

(24:15)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24:16)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24:17)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종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우지 말고 사람의 부의하는 식물을 먹지 말라 하신지라

(24:18)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고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기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

(24:19) 백성이 내게 이르되 네가 행하는 이 일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되는지 너는 우리에게 고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므로

(24:20)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24:21)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성소는 너희 세력의 영광이요 너희 눈의 기쁨이요 너희 마음에 아낌이 되거니와 내가 더럽힐 것이며 너희의 버려둔 자녀를 칼에 엎드러지게 할지라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속마음도 모르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행세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가차없는 무서운 저주와 진노가 주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관권은 하나님의 진심을 어떤 식으로 알아채느냐 있습니다. 그 마음은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의 아내 죽임으로 드러나셨습니다.

선지자의 아내 죽음은 순전히 하나님의 일방적으로 단행된 조치입니다. 죽는 당사자인 에스겔 아내나 남편과 사전에 협의하거나 의견 조율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에스겔이 자기 아내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래서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아내와 이혼하고 헤어지고 싶어 환장한 게 아닙니다. 아내는 선지자에게 기쁨의 상대자로 같이 살아왔습니다. 따라서 이런 아내를 하나님께서 빼앗으므로서 그 뒤에 나오는 말씀, 즉 ‘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를 성사시키려 하십니다. 참으로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릴만한 상황을 하나님께서 유발시켜놓으시고는 하시는 말씀이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성경 말씀을 대하면서 우선은 자신의 삶을 도모하고자 하는 의도로 다가서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동안 지탱해온 삶을 더욱 지탱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들을 야무지게 소지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아내와 함께 산다는 것은 아내를 ‘나의 아내’로 늘 꼭 소유하므로서 기쁨이 행복이 유발되는 원천으로 삼고 있은 것입니다.

이러한 일반적인 인간의 삶에 대해서 사람들은 익숙해져 있습니다. 매사가 자기 살리기 일환입니다. 자기 사는 것과 무관한 일은 배척하고자 싶어합니다. 그 어느 누구도, 심지어 선지자라 할지라도 자기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아내가 마땅 죽어주어야 하나님의 일이 된다고 여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도리어 사랑하는 여인을 나의 아내로 소유케 한 하나님에 대해서 감사할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 여기저기에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라는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를 소유하고 사랑하는 것에 무슨 문제가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입장은 그러게 아닙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본심을 모른다면 천국 백성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본심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지금 자신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 일이 곧 하나님의 본심과 통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즉 지금 내가 아내를 사랑한다면 더욱 더 사랑해서 아내의 존재 자체가 기쁨의 원천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스겔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인자야!”라고 부르십니다. 인자란 장차 오실 메시아의 자기 호칭입니다. 즉 에스겔이 “인자야!”라고 부름의 대상이 된다면 에스겔은 자기 인생을 통해서 예수님의 면면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식적인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상식적인 삶이란 ‘소유로서 즐거워하는 삶’입니다. 즉 봉사가 아닙니다. 선지자는 그 시대의 메시아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을 보여주어야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 본심이란 곧 사람들이 귀하다고 여기는 것이 결코 귀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진정한 귀함을 훼방하고 파손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데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가진 것들을 사수하고 위해서 신의 본심을 거론합니다. 하지만 그런 모습들이 도리어 하나님의 본심을 가리게 되고 왜곡시킵니다. 바로 이 방침을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의 아내를 뺏아갑니다. 당연히 울어야 마땅하지만 선지자보고 공개적으로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곧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고발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즉 너희들이 그토록 귀히 여기는 것들이 빼앗기더라도 결코 울 입장이나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뭐든 소유화해서 즐거워하려는 이유는 자기 자신이 당연히 산 존재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오늘날이다 금방 죽을 수도 있는 처지인 것을 평소에 생각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이사야 38:5-8에 보면,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이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는 너를 위한 징조이니 곧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그가 이루신다는 증거이니라 보라 아하스의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 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더니 이에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십 도를 물러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해 그림자가 뒤로 물러가는 능력은 히스기야를 겨냥한 하나님에게서 실시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해 그림자의 뒤쳐짐 현상은 평소의 사람의 모든 생명은 이처럼 대자연의 운행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목표에서 비롯된 활동들입니다. 히스기야를 15년 생명을 연장하는데 해까지 뒤로 물러가야 한다는 것은 사람의 생명이란 모두 하나님 손에 달린 문제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모든 존재의 바닥은 이런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능히 죽을 수도 있는 자를 연장시켜주는 식으로 살려내시고 계시는 겁니다. 이것은 사람은 생명을 자기 것으로 여겨서 소지하는 식으로 부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심을 보여주기 위해 봉사하는 생명임을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죽은 목숨도 살리시고, 산 목숨도 죽이시는 그 과정을 통해서 모두 ‘메시아를 증거케’ 하기 위해 소모품이요 실험실의 시료약 같은 존재라는 말입니다. 선지자의 아내의 바닥에서 평소에 죽음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적절하게도 유대 나라가 망해서 싸다는 사실을 알려주는데 있어 적절하게 자기 역할을 해내면서 죽어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울지 않고 버티면서 증언해야 하는 바로 선지자 에스겔이요 장차 오실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귀한 독생자를 아낌없이 버리는 하나님의 본심r화 연결되지 위해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고백이 같이 체험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린도후서 12“10)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소유하는 인생이 되지 말고 봉사하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에스겔 24:15-22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종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우지 말고 사람의 부의하는 식물을 먹지 말라 하신지라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고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기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 백성이 내게 이르되 네가 행하는 이 일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되는지 너는 우리에게 고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므로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성소는 너희 세력의 영광이요 너희 눈의 기쁨이요 너희 마음에 아낌이 되거니와 내가 더럽힐 것이며 너희의 버려 둔 자녀를 칼에 엎드러지게 할찌라 너희가 에스겔의 행한 바와 같이 행하여 입술을 가리우지 아니하며 사람의 식물을 먹지 아니하며.”

 

오늘 내용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에스겔이 하나님의 지시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자기 아내가 죽고 맙니다. 자기 아내가 죽으리라, 하는 그 사실에 대해서 에스겔도 예측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미리 이야기한 것은 아내가 죽는다는 것이 아니었고 16절에 보면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에스겔의 눈이 정말 기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18절에 보니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고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기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침에 자기가 하나님의 지시대로 “여러분,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내가 기뻐하는 것을 빼앗는다고 하셨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저녁이 되었는데 자기 아내가 죽어버렸어요. 그래서 그 다음날 아침에 하나님에게서 받은 그 계시와 내 아내가 죽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관련되어 있다는 그 사실을 연결시키면 에스겔이 기뻐하고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 그것은 바로 아내였고 그 기뻐하고 좋아하고 즐거워한 그것을 하나님께서 빼앗아 감으로써 에스겔이 보통 사람이라면, 16절 말씀,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번 쳐서 빼앗으리니.”라고 한 대로 했을 때 슬퍼하면서 울고 눈물을 흘려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미리 아내 빼앗을 것을 미리 아시면서 하는 말이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금 에스겔은 포로 잡혀 와 있거든요. 이스라엘에서 지금의 이란지역으로 포로 잡혀 온지 11년이 되었습니다. 그발강가에 포로 잡혀 와서 에스겔이 아내와 살고 있는데 예루살렘과의 거리가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에요.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을 알려주기 위해서 포로 잡혀 있는 채로 같이 살고 있는 자기아내가 졸지에 죽고 말았어요. 이것은 선지자가 그냥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고 선지자의 삶 속에 이스라엘이 앞으로 당해야 될 모든 일을 앞당겨서 선지자속에 터뜨려버리는 겁니다. 선지자에게 아내란 존재는 귀찮고 곧 이혼하고 싶고 금방이라도 내쫓고 싶은 존재가 아니고 정말 눈에 기뻐하는 사랑하는 아내였습니다.

 

그 사랑하는 아내,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이 싫어하는 아내를 건드린 것이 아니고 에스겔이 너무나 사랑하는, 에스겔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는 그 아내를 주께서는 빼앗아 감으로 말미암아 인간이라면 누구나 탄식하면서 울고 통곡할 수밖에 없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거나 슬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슬퍼하지 말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에스겔이나 이스라엘은 사적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적으로 하나님께 도움 얻어서 행복하게 사는 것, 이게 선지자의 인생이고 이스라엘의 존재가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속성과 본질을 보여주기 위해서 들러리처럼 늘 주변에 어떤 역할로 있다가 하나님의 때가 되매 아내를 빼앗아 가면 의당 울어야 되는데 “울지 마!” 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선지자와 백성들이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 산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을 조금이라도 미리 앞당겨서 체험하고 있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인 겁니다.

 

에스겔이 아내를 상당히 사랑했던 모양입니다.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고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기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 그렇게 했을 때 같이 포로 잡혀 갔던 사람들이 말하기를 “당신 아내가 죽고 당신이 당연히 울어야 하는데 울지도 않고 멀쩡하게 있는 그 일이 우리 이스라엘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라고 에스겔에 물으러 오는 겁니다. 그 질문이 일어났을 때 에스겔이 설명을 해 줍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모른다.” 하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예요.

 

사람이 세상 보는 범위가 좁아버리면 오직 자기만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만 생각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자기 눈앞에 보이는 것을 소유하려는 본능이 강하게 돼요. 아브라함의 아들이 이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삭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아브라함아, 네 사랑하는 아들을 내게 번제로 바쳐라.” 이것은 뭐냐, 사적으로 하면, 범위를 좁게 보게 되면 “이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 이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겠습니다.” 이것만 해도 하나님 잘 믿는 것처럼 여겨지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백성에게 소유를 허락하지 않아요. 소유하라고 한 것이 아니고 봉사하라고 한 겁니다. 이 범위를 넓히고 넓히면 내가 뭔가 소유해야겠다는 그 자체가 봉사를 가로막는 일이 되는 거예요. 올해 성경말씀 가지고 교회 표어를 정하라고 한다면, “어떤 것이 적당하겠습니까?”라고 물을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묻는다고 치고 말씀드리면 고린도후서 12장 10절이 적당하다고 봐요.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해지고 능욕 받고 핍박 받고 가난하게 될 때 도리어 내가 기뻐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를 봉사시키는데 어떻게 봉사시키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의 그 낮아진 그 모습을 재현하도록 하는 그 역할로 봉사하게 했다는 그 점에 대해서 내가 황공무지로소이다. 어떻게 주의 길을 저로 하여금 이렇게 재현케 하십니까? 정말 너무 감사합니다. 내가 날이 가면 갈수록 약해지고 또 약해져서 약한데서 오직 주님만 강한 것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달라는 그것을 사도바울은 고백하고 있어요.

 

간단히 말해서 내가 강해버리면 우리는 강한 것을 내가 소유해서 강한 힘에 의지해서 내가 스스로 살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약하고 의지할 힘이 아무것도 없으면 그럴수록 점점 더 주님만 의지하지 더 이상 가지고 있는 소유한 것들을 의지하지 않게 돼요. 그러면 자기는 소유하지 않고 주님만 소유하니까 주님만 더욱더 많이 더 증거 되면서 드러나게 되고 주님만 믿고 사랑하고 주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모습이 성도의 모습이라고 고린도후서에서 사도바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014년이 되었는데 올해 우리교회도 작은데서 범위를 넓혀봐야 돼요. 넓히면 넓힐수록 소유욕, 또는 소유하겠다는 것이 주님 앞에 전혀 용납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사는 것이 미지의 누구를 위한 봉사로서 살아가는 겁니다. 내 것이 없는 거예요. 에스겔에게 아내가 있었다. 에스겔은 생각했지요. ‘아내가 있는 이유는 아내와 더불어 즐겁게 지내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주신 소박한 마지막 행복이다.’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리고 아내와 행복하게 사는 것에 대해서 그걸 옹호해주고 정당화하는 성경구절이 많이 있어요. 에스겔이 그것을 알 것 아닙니까?

 

‘그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이렇게 힘든데 그나마도 아내를 주셔서 행복하게 지내라고 했구나.’ 다 그렇게 생각들을 했지요. 작게라도 주어진 보너스같은 것으로 여기고 감사했는데 그런 여지마저 하나님께서 삭둑 잘라버렸어요. 그 아내마저 네 소유가 될 수 없고 아내마저 봉사하는데 아내의 죽음이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로서는 기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죽는 아내는 무슨 죄가 있습니까? 친정 부모가 딸 에스겔에게 바리바리 싸서 시집보낼 때 얼마나 간절한 기도를 했겠습니까? 훌륭한 종의 사모가 되게 해달라고 얼마나 기도했겠어요?

 

그런데 아무 예고도 없이 그냥……. 지금 에스겔이 잘못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에스겔의 아내를 죽임으로써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느냐 하면, “예루살렘에 있는 너희들 백성들은 죽어도 아깝다고 울 자격도 없어. 그 정도로 너희는 더러운 인간이야.”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멀쩡한 에스겔 가정에 아내가 죽어도 울지 말라는 사태를 먼저 일으켜 버린 거예요. 범위를 좁혀서 작게 보게 되면 이게 무슨 난리입니까? 이래가지고 성경 무서워서 보겠습니까? “주여, 말씀대로 지키겠습니다. 말씀대로 살겠나이다.”라고 해놓고 성경 들췄는데 에스겔 24장 18절이 나왔다. 아내가 죽어도 울지 말라, 라는 그 말씀을 듣는 순간에 ‘나도 내 아내가 죽으면 안 울어야지.’ 이렇게 되겠습니까?

 

집의 강아지가 죽어도 그렇게 우는데 멀쩡한 자기 아내가 죽었는데 울지 말라는 지시를 의도적으로 받았다는 것은 개인적인 자존심이나 체면이나 위신같은 것이 선지자에게는 전혀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이런 엄청난 사태를 일으켰는가? 이렇게 아내가 죽을 것 같으면 결혼은 뭐하려고 했습니까? 아내는 선지자의 선지자 됨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재료로만 소모되기 위해서 결혼한 것밖에 더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아내를 죽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는 밑에 죽음이 깔려 있다는 겁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이 대할 때 ‘이 말씀 가지고 내가 살아야지.’ 한다면 그것은 애초부터 성경말씀 잘못 해석한 겁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그 말씀을 듣고 아내가 살아 있다고 생각했던 그것이 차후 적으로 보니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것이지요. 아내가 살아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죽음의 발판 위에 서 있다, 라고 해석을 하는 이것이 바른 하나님의 선지자다운 이해라는 것을 아내가 죽고 난 뒤에 아는 겁니다. 아내가 살아 있다, 그러니까 다른 집 아내도 다 살아 있는 거잖아요.

 

‘다른 집 아내가 살아 있듯이 내 아내도 살아 있다. 따라서 내 아내가 죽는다면 나는 아낌없이 울 거야.’ 왜, 살아 있어야 하는데 왜 죽느냐고, 죽으면 안 된다고, 죽으면 내가 아프다고 에스겔도 생각을 해 왔을 거예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아내를 죽이기 전에 먼저 죽더라도 울지 말라고 했으니까. 에스겔도 보통사람하고 똑같아요. 그냥 아내 죽으면 울고 싶어요. 그걸 하나님이 미리 아시기에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울지 말라고 한 거예요. 아내는 항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왜 못했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범위를 넓혀서 단출하게 정답을 내린다면 이겁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내 백성이 아니다, 그것이 정답이에요.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에이, 에스겔정도 되면 하나님 뜻을 알겠지.’ 아닙니다. 에스겔정도라도 하나님 뜻을 몰라요. 에스겔의 아내가 죽고 “에스겔아, 아내가 죽더라도 울지 마.”라고 할 때 에스겔은 하나님의 뜻을 추가적으로 하나 더 알게 된 거예요. 에스겔이 하나님의 뜻을 추가적으로 알게 되었다는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단인 것과 이단 아닌 것,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에스겔을 통해서 확인하고 골라내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라고 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에스겔만큼 하나님을 안다면 어느 정도 알아야 되느냐 하면, 아내가 죽더라도 울지 않을 정도가 돼야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고 그 정도 돼야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걸 오늘 본문은 이야기해 주고 있는 거예요. 지금까지 설교한 것을 요약해 보면, 모든 말씀 밑에는 죽음이 깔려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말씀 밑에 죽음이 깔려 있기에 우리의 존재, 우리의 일상 밑에는 다 죽음이 깔려 있어요.

 

우리는 그걸 밟고 안 나타나기를 간절히 애써서 그렇지 사실은 늘 죽음이 밑에 깔려 있어서 언제 죽을지를 몰라요. 언제 죽더라도 우리가 슬퍼하거나 노하거나 좌절하거나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거예요. 만약에 내가 죽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운다면 그 다른 사람이 평소에 나에 대해서 안다고 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유해서 날 안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상식에 의해서 나를 알았기 때문에 그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 멸망당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멸망시키는 이유는 뭐냐? 합당한 하나님이 아니고 다른 하나님, 상상한 하나님, 엉뚱한 하나님을 믿고 있기에 진짜 하나님을 알려주기 위해서 선지자의 멀쩡한 아내를 죽이시고 죽일 뿐만 아니라 아내 죽은 것에 대해서 울지 말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선지자가 잘못했다는 말이 아니고 백성들이 누가 죽었다고 슬퍼하겠다는 그 심보자체가 아직까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과 말씀이 자기가 가진 아내나 자식보다 덜 중요하다고 여기는 죄를 범했다고 하는 겁니다.

 

내가 가진 아내나 자식보다도 주의 말씀이 더 중요하다고 평소에 생각을 안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에스겔은 이리 나와. 내가 너에게 말씀 전할게.” “예, 말씀 하옵소서.” “네가 아주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이 있을 거야.” “제가 주의 종인데 따로 좋아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제 아내 말고는 따로 좋아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 알았다. 내가 너의 기뻐하는 것을 빼앗아갈 테니까 너는 그렇게 될 때 내 말을 기억하고 절대 울거나 슬퍼하면 안 돼.” 여기 17절에 보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종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우지 말고 사람의 부의하는 식물을 먹지 말라 하신지라.”

 

사람 죽었다고 위로삼아 건네는 음식도 먹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너희들을 죽일 때 너희 가족과 너희 자신들을 파멸시킬 때, ‘아, 아깝다.’라고 여기는 그 심보자체를 하나님은 더러워서 못 보겠다는 거예요. 그 심보자체가 괘씸하다는 거예요. 학교 선생님이 애를 매 때리는데, 또는 부모가 자식을 때리는데 때릴 때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가만히 맞으면 때리는 사람도 기분 좋은데 아프다는 이유로 “어머니,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나온다면 지금 그 애는 자기 아픈 것만 신경 썼지 왜 선생님이나 부모가 회초리를 들고 때리는지 그 진심은 안 알아주니 그게 더 화가 나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 볼 때 범위를 좁게 보게 되면 모든 것이 소유로 결론이 나요. 이것은 내 것, 여기까지는 너의 소유, 소유로서 모든 인생을 착하고 아담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게 뭐가 문제인가 하면, 그것이 인간들 보기에는 상식적이고 보편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뭐가 하나님 보시기에 문제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십자가를 모른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죽인다는 그 하나님의 마음과 전혀 연결되는 마음씨가 아니에요.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말 뿐이고 실제는 십자가 안 믿고 그냥 십자가라는 것이 있구나 하는 거지요.

 

실제로 십자가가 우리 삶에 체험이 되려면 하나님이 가장 아끼는 아들이 죽은 그 아픔만큼이나 우리가 가장 아끼는 것을 빼앗길 때의 아픔과 연결 지어져야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빼앗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설픈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가장 소중한 아들일 잃었다는 그 감정과 소통이 되고 연결이 되고 포함이 되게 되어 있다고요. 하나님 입장에서 저 인간을 건지기 위해서는 그 인간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을 앗아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이것 가져가면 정말 싫어요.”라고 탄식하고 외칠 때에 하나님은 그 다음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내가 그것 빼앗아 가니까 그것가지고 그렇게 닦달을 내느냐?” “예, 너무나 아픕니다.” “너는 너 아픈 것만 생각했지 너 같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한 이 아버지의 심정은 안중에도 없구나. 그래서 어떻게 네가 천국에 가고 네가 어떻게 제대로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느냐?” 이걸 하나님이 따지고 싶은 거예요. 이사야 38장 8절에 보면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 참 희한한 일이 있어요. “보라 아하스의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더니 이에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십도를 물러가니라.”

 

히스기야 왕이 병들어 죽게 되자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이여, 저를 죽이시겠다는데 좀 더 살게 하소서. 제가 한 선한 일을 봐서라도 좀 살게 해주세요.”라고 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히스기야를 15년 동안 더 살게 해주겠다고 하시면서 앞으로 더 살게 되는 증거로써 왕궁 해시계(막대기를 세워서 그림자가 옮겨지는 것을 통해서 시간을 알 수 있는)가 해의 이동에 따라서 그림자가 앞으로 이동을 해야 되는데 그 그림자가 15도만큼 거꾸로 이동하게 했어요.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히스기야를 죽일 수도 있고 15년 더 살릴수 있다는 하나님의 권한이 넓은 범위에서 보면 모든 우주, 모든 인생사에 속속 다 개입이 되어 있는 거예요.

 

더 알기 쉽게 하면, 오늘 하루, 2014년 1월 1일 오늘을 살았는데 우리는 어제 살았으니 오늘도 산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히스기야가 15년 동안 더 살게 하셨던 그 주님의 동일한 손길에 의해서 어제 죽을 수도 있는 나를 지금 하나님께서 하루 더 살게 하신 그 손길이 이 우주의 원리고 원칙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그 원리원칙의 혜택을 입고 있는 거예요. 이 히스기야의 이야기를 가지고 오늘 본문 24장 18절을 봅시다. 에스겔에게 아내가 있었습니다. 아내가 있었고 그 아내가 죽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아내가 지금까지 잘 살았는데 아내가 그날 저녁에 죽지요.

 

죽을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네가 아끼고 기뻐하는 것을 빼앗겨도 절대로 슬퍼하거나 울지 말라.”고 한 거예요. 이 말은 에스겔로 하여금 “우리 가정에 아내 있다.”라는 낮은 자리에서 모든 생명은 이 우주를 지배하는 하나님께서 살려줘야 산다는 그 자리에까지 에스겔을 합류시키게 되면 아내가 살아 있을 때도 아내는 죽은 자고 아내가 죽더라도 하나님에 의해서 죽었기에 그 아내는 하나님의 손 안에서 살아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에스겔 본인은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하는 로마서 14장의 말씀과 같이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지려고 얼마나 애를 쓰고 온갖 일을 다 동원시키는 거예요. 세상 일어나는 모든 일이 전부 다 어떻게 하면 자기 백성을 살려볼까, 하는 그 일에 신경을 다 쓰는데 그 일 중에 하나가 마누라 죽이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는 이것은 사무엘상 2장에도 나오잖아요. 성경에 다 있더라도 사람들은 그런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좁게 보게 되면 세상사는 것이 하루하루 자기 노력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수준이 다 같은 수준인데 에스겔로 하여금 하나님만 아는 그 수준에 에스겔을 집어넣는데 그 과정에서 “에스겔아, 아내가 죽더라도 절대로 통곡하거나 슬퍼하면 안 돼. 부조도 받으면 안 돼. 사람들이 와서 묻더라도 사적인 답변 하지 말고 ‘앞으로 너희 자녀들도 우상 섬겨서 죽게 되는데 죽더라도 울 자격도 없다.’라는 조로 예언해야 한다.”라고 그 일을 시키는 것은 그 일을 통해서 에스겔로 하여금 보통 인간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리에 가게 하는 겁니다.

 

왜냐, 에스겔의 이름이 ‘인자’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인자라고 했어요. 에스겔은 에스겔이라는 자기 이름이 있더라도 그 이름이 아니고 인자입니다. 이 말은 이름대로 팔자가 나와요. 그 이름의 운명과 팔자는 에스겔이 아니고 장차 오실 예수님을 미리 보여줍니다. 살았지만 죽은 자요 죽었지만 산자요, 남들 보기에는 죽은 자로 보여도 사흘 만에 부활했고 남들 보기에 살았다고 여기나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실상은 죽은 자요, 살고 죽는 것은 주님의 손에 있고 지금도 우리는 히스기야왕이 15년 더 산 것처럼 15년이 아니라 하루하루 연장되고 있다는 이 사실, 그만한 권한자인 하나님에 의해서 살려진다는 사실을 모르게 된다면 그 사람은 이단입니다.

 

성경 왜 있습니까? 성경 우리가 왜 봅니까? 하나님께서는 성경 왜 전하게 하는 겁니까? 가짜와 진짜를 가려내기 위함입니다. 모든 말씀의 바탕에는 죽음이 깔려 있고 우리 존재 밑에 죽음이 깔려 있습니다. 그 사실을 이미 아는 사람은 죽어도 이미 산자가 되는 겁니다. 그 정도 수준 될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언급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참 이스라엘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이런 하나님 말고 다른 신을 섬겨야 되겠느냐? 그런 면에서 너희는 나에게 맞아도 싸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때리시는 이유는 때려서라도 진짜 하나님은 너희들이 아는 그런 수준, ‘내 아내 내건데 죽으면 안 되는데.’라고 발발 떠는 수준의 하나님이 아니고, 그런 좁은 범위, 그저 ‘내 것, 내 것, 내 것 지켜주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는 수준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 정도 하나님 같으면 그것은 옳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끝으로 마태복음 10장 34절부터 보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예수님이 온 것은 전부 다 산산조각 내는 거예요. 한 식구라도 산산조각 내고 예수님을 경유해서, 십자가를 경유해서 다시 결합할 때 이것이 그냥 가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 소속된 진짜 식구, 천국까지 가서 같이 살 수 있는 영원한 식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날마다 죽노라, 했듯이 우리가 자기 소유만 생각하지 말고 날마다 주님의 소유로서 ‘오늘도 죽어야 되는데 또 살려주셨구나.’ 15년 동안 하루하루 연장되는 것처럼 주께서 지금도 우리를 살려내고 있는 그 손길을 아신다면 우리가 세상 보는 것이 소유가 아니고 봉사라는 입장에서 살아가야 합당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선지자 아내마저 죽음으로 떠나보냈습니다. 당연히 울고불고 가슴아파하고 가슴을 쥐어뜯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들 보고 하는 이야기인줄 압니다. 살았다고 하나 죽은 자요 죽었다고 여길 때 그것이 산자인 것을 저희들이 이제는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72강-에스겔 24장 15-21(선지자아내의 죽음)140101-이 근호목사.hwp (28.5K), Down: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