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아우의 부패(겔23;11-17)이근호131204

아빠와 함께 2013. 12. 4. 21:08

아우의 부패(에스겔 2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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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12-04 21:10 
아우의 부패

2013년 12월 4일                  본문 말씀: 에스겔 23:11-17


(23:11) 그 아우 오홀리바가 이것을 보고도 그의 형보다 음욕을 더하며 그의 형의 간음함보다 그 간음이 더 심하므로 그의 형보다 더 부패하여졌느니라

(23:12) 그가 그의 이웃 앗수르 사람을 연애하였나니 그들은 화려한 의복을 입은 고관과 감독이요 말 타는 자들과 준수한 청년이었느니라

(23:13) 그 두 여인이 한 길로 행하므로 그도 더러워졌음을 내가 보았노라

(23:14) 그가 음행을 더하였음은 붉은 색으로 벽에 그린 사람의 형상 곧 갈대아 사람의 형상을 보았음이니

(23:15) 그 형상은 허리를 띠로 동이고 머리를 긴 수건으로 쌌으며 그의 용모는 다 준수한 자 곧 그의 고향 갈대아 바벨론 사람 같은 것이라

(23:16) 그가 보고 곧 사랑하게 되어 사절을 갈대아 그들에게로 보내매

(23:17) 바벨론 사람이 나아와 연애하는 침상에 올라 음행으로 그를 더럽히매 그가 더럽힘을 입은 후에 그들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겼느니라

이스라엘을 창기로 간주하시는 말씀은 에스겔 16장에 미리 나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스라엘의 남자 밝힘이 극심하여 돈을 받고 몸을 파는 보통의 창기와 같지 아니하고 도리어 돈을 줘가면서 창기짓을 자발적으로 하는 그런 창기짓을 행하고 있다는 하나님께서는 지적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이나 유다 나라 여인들이 모두 실제적으로 창녀짓을 한다든지 아니면 창녀의 기질을 갖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방민족의 신을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워하고 있다는 점을 비유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다른 이방민족들이 듣게 되면 의아해 할 점이 한 두 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창녀라면, 이방민족 자기네들이야말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더 지독한 창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이방민족에게는 그런 식으로 혹독하게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유독 자기 백성에게는 부끄러울 정도의 표현을 써가면서 ‘창녀’라고 몰아붙이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연유가 무엇일까요?

왜 자기 백성에게 과하게 질책하시는 걸까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즉 언약이 없는 나라와 언약이 있는 나라를 구분지어서 다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쉽게 말해서 신약에서 와서 오직 복음으로만 구원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구원받지 말아야 될 자들에게는 절대로 이해되지 않게 하는 능력과 내용으로 복음으로 갖추어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언약의 백성을 음란한 창기로 비유하는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두 가지를 알아야겠습니다. 하나는, 왜 이스라엘이 창녀인가 이고 다른 하나는, 왜 남쪽 아우 나라가 북쪽 언니 나라보다 더 음란하다는 판정을 받아야 하느냐 하는 겁니다.

신약 야고보서 4:4-5에 보면,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에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봐도 세상을 좋아하는 여자를 두고서 하나님께서는 ‘간음하는 여인’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에스겔 본문이나 야고보서 4장의 말씀이나 모두 ‘누가 언약을 아는 참 내 백성이냐’를 가려내는 취지로 주신 말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하여 세상의 그 어떤 사람과도 가리지 않고 사귀고, 웃고, 대화하고, 마음을 나누는 것이 현대 생활에서 불가피하게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자들까지라도 “너희들은 하나님과 원수 된 간음한 자들이다”고 매도할 수 있을까요? 만약 이들을 용납하면서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교제’라고 편들어주면 오늘 에스겔 본문 말씀이나 야고보서 4장의 말씀을 무용지물로 간주하는 것이 됩니다. 사람들을 편들어주려고 있는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언약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자는 게 취지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을 어겨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그는 이미 천국에서 예수님과 같이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태복음 17장에 나오는 변화산 광경에서 나타나 있습니다. 즉 말씀을 위반하는 사례를 통해서 언약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혹독하게 다루어진다는 바로 그 점이 그들이 다른 민족과는 다른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특히 죄의 근원에 근접할수록 죄에서 올라오는 징벌을 혹독한데 이 혹독함 그 한 가운데 비로소 생명이 있고 구원의 능력이 나옵니다. 죄없는 곳에는 구원도 없습니다.

창녀라는 지적을 받지 않는 곳에는 구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아우인 남쪽 유다나라가 더 음란하다고 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유다나라에 성전이 있음으로 인하여  죄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더 근접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는 이 성전파괴와 관련 있습니다. 성전이란 하나님과 교류하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이지요.

바로 이 장소에서 죄의 전모가 밝혀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기 백성을 음란한 창기로 보시는 이유는, 죄 값 때문입니다. 이스겔 16: 34에 보면, “너의 음란함이 다른 여인과 같지 아니함은 행음하려고 너를 따르는 자가 없음이며 또 네가 값을 받지 아니하고 도리어 줌이라 그런즉 다른 여인과 같지 아니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죄는 ‘값’을 달고 이 땅에 나타나 적용된다는 겁니다. 민수기 5:7에 보면, “ 지은 죄를 자복하고 그 죄 값을 온전히 갚되 오분지 일을 더하여 그가 죄를 얻었던 그 본주에게 돌려 줄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묻데 그냥 물어시는 것이 아니라 ‘좌+값’을 가지고 바기 백성에서 다가서는 것은 죄용서 해주시는 그 제사의 취지가 성전 밖으로 전달될 때는, ‘죄+값’의 형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죄에게 값이 붙게 된다는 말은, 값을 치르게 되면 그 무서운 죄도 탕감된다는 사실을 말해서 ‘죄에서의 구원’이 가능함을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고린도전서 6:20에 보면,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7:23에 보면,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값 없이 구원되지 않기에 값없이 구원시켜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유다 나라 아하스왕이 북 이스라엘과 아람나라 연합군의 침공을 받고서 앗수르 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러한 외교적 방안은 아하스 왕이 아니라 누가 그 자리에 앉더라도 취하게 되는 최후의 정치적 선택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음행하는 창기짓이라고 규정하시는 이유는, 언약을 받은 이스라엘 나라이기에 ‘죄값’이 얼마나 혹독한가를 자기네 역사를 통해서 다 보이도록 조치하시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에서 일상화되어 있는 ‘값 치르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죄가 사라지는 구원을 ‘값 치르기’ 방식으로 알려주시려는 겁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창기이기에, 달리 말해서 누구보다도 죄의 심연 속에 들어있기에 구원의 능력을 체험케 하시는 겁니다.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일들이 성도 본인을 창기로 몰아세우는 하나님의 구원의 절차 중에 일어나는 사랑의 몸짓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리와 칭기가 율법사보다 먼저 천국 간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늘 새기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12-05 17:03 
68강-에스겔 23장 11-17(아우의 부패)131204-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23장 11절에서 1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85페이지입니다.


에스겔 23:11-17


“그 아우 오홀리바가 이것을 보고도 그 형보다 음욕을 더하며 그 형의 간음함보다 그 간음이 더 심하므로 그 형보다 더 부패하여졌느니라 그가 그 이웃 앗수르 사람을 연애하였나니 그들은 화려한 의복을 입은 방백과 감독이요 말 타는 자들과 준수한 소년이었느니라 그 두 여인이 한길로 행하므로 그도 더러워졌음을 내가 보았노라 그가 음행을 더하였음은 붉은 것으로 벽에 그린 사람의 형상 곧 갈대아 사람의 형상을 보았음이니 그 형상은 허리를 띠로 동이고 머리를 긴 수건으로 쌌으며 용모는 다 존귀한 자 곧 그 고토 갈대아 바벨론 사람 같은 것이라그가 보고 곧 연애하여 사자를 갈대아 그들에게로 보내매 바벨론 사람이 나아와 연애하는 침상에 올라 음란으로 그를 더럽히매 그가 더럽힘을 입은 후에 그들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겼느니라.”


국가의 외교적인 교류를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간통하는 현장, 또는 창녀촌의 창녀와 돈 주고 관계하는 것, 누가 생각해도 지저분하게 느껴지는 것에다가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기에 이런 비유를 사람이 했다면 오버하지 말라고 욕이라도 하겠는데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혹은 외교적인 전략을 두고 음란한 여인이 벌이는 간통행위로 하나님께서 묘사한 것에 대해서는 인간입장에서는 당황스럽기까지 합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세상 좋아하는 것은 간음한 여인이다, 이것은 야고보서에 나옵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약 4:4) 그 대목이 야고보서에도 있고 에스겔에 이렇게 나왔을 경우에 설교하는 자로서 또는 성도로서 세상에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아침에 눈떠서 직장에 가는 사람들, 이 사람들을 통틀어서 ‘간음한자, 음행한자.’라고 매도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들은 가족들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세상에 나가는데 그것도 모르고 집에서 아무 할 일 없이 성경만 뒤적이다 에스겔 23장 찾아서 “세상 좋아하는 너희들은 간음한 여인이다. 이것은 내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니까 무조건 받아라.”라고 윽박지를 수 있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들이 세상에 나와서 서로 좋은 얼굴로, 웃는 얼굴 하면서 한 푼이라도 벌려고 하는 그것을 두고 더러운 창녀가 죄를 짓는 일과 동등시 한다면 오늘날 성도가 뭘 해먹고 살라는 말입니까? 생활을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반대로 “너희들이 세상에서 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소명이며 하나님의 주신 달란트니 그것으로 열심히 돈 벌어라. 세상과 좋은 관계를 맺어라.”라고 한다면 에스겔 23장이나 야고보서의 말씀,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라는 그 말씀을 잠시 접어야 되는 것인지, 아예 안들은 것으로 여겨야 하는지, 과연 명백하고 분명한 해석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세상에 나가서 돈 번다고 세상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그것이 나쁜 짓인지, 아니면 어쩔 수 없고 정당화 될 수 있는 일인지? 그러면 둘 다, 세상에서 돈도 벌고 야고보서나 에스겔의 말씀처럼 세상과 짝하지 않고 하나님과 원수도 안 되는 방법은 없겠는가? 그러면 세상에 나가서 직업을 갖고 사람을 만날 때 신자 아닌 사람은 일체 만나지 않고 또 신자라고 우겨도 조사를 해야 돼요. 신천지 빼야 되고 박 태선 종파의 사람들이나 여호와의 증인들 다 빼야 되고 통일교 교인들도 다 빼야 되고. 장로교신자라면 성결교 빼야 되고 침례교 빼야 되고 감리교나 천주교도 다 빼야 되죠.


그러면 할 것은 목사밖에 없네요. 그러면 목사 사모가 돈 벌러 나가는 것은 뭡니까? 하나님의 원수 됨을 빙자해서 자신은 앵벌이밖에 더 됩니까? “너는 하나님의 원수 짓해라. 나는 네 덕분에 하나님과 더불어 살겠다.” 그것밖에 안 되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이나 앗수르와 교류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비유를 하는 것처럼, 또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비유했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음행하고 싶어서, 음욕에 불타서 남자나 찾아다니는 아무 실속 없는 짓을 하는 것이 아니고 주변의 큰 나라와 외교적인 성과를 이루어야 정치적으로나 외교적으로 안정을 취할 수가 있어요.


화해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 우리가 어떤 나라의 침공을 받을 때 도움을 받을 수가 있는 겁니다. 열왕기하 16장, 17장 죽 보게 되면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이스라엘이 북과 남으로 나눠집니다. 북이 이스라엘이고 남이 유다나라거든요. 그 북쪽 이스라엘 베가왕이 아람나라와 연합군을 만들어서 남쪽 예루살렘을 침공합니다. 그때 남쪽 왕이 아하스 왕입니다. 이스라엘과 아람의 연합군이 엄청난 군대를 몰고 발달된 무기를 가지고 침공했을 때에 아하스 왕이나 누가 왕 자리에 있다 해도 나라를 구해야 되거든요.


구하는 방법은 북쪽나라 연합군을 대적할 만한 큰 나라에 의지를 해야 되는 겁니다. 그 의지한 나라가 앗수르라는 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현재 우리나라가 풍전등화의 상황이나 와서 도와주세요.”라고 부탁을 했어요. 아하스 왕이 앗수르한테 굴복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나라도 자기 나라를 팔아먹으려고 하는 왕은 없어요. 지금 북쪽 이스라엘에서 먼저 쳐들어왔기 때문에 이 엄연한 현실 앞에서 왕이 되어서 우선 나라를 살려야 되지 않습니까? 집에 불이 났다면 옆 집 가서 “물 좀 빌려 주세요. 빌려간 물만큼 나중에 갚겠습니다.” 한다면 이게 무슨 음행이고 이게 무슨 간음입니까?


아무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하스왕이 앗수르에게 굴복하면서 이런 부탁할 일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북쪽나라 이스라엘과 아람연합군이 쳐들어오게 했습니다. 했는데 무슨 무기나 군대가 있어야 싸우지요. 그냥 잡아먹힐까요? 그래서 그런 거예요. 왜냐하면 남쪽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신장소가 있어요. 이 세상에 유일하신 하나님,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교류가 가능하다고 하나님께서 친히 설치해놓은 무전기, 교신의 장소가 있어요. 그 성전 지키라고 유다나라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묻지 말고……, 목적이 정당하면 수단도 정당한 법이거든요. 성전을 어떻게든 지키겠다고 했는데 북쪽에서 아람나라가 쳐들어왔으니까 다른 대안 같은 것이 없지요. 그래서 큰 나라 앗수르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과연 그 나라가 와서 도와줬습니다. 그리고 열왕기하 16장 8절, 9절을 보니까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취하여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내었더니 앗수르 왕이 그 청을 듣고 곧 올라와서 다메섹을 쳐서 취하여 그 백성을 사로잡아 길로 옮기고 또 르신을 죽였더라.”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이 유지되게 되었습니다. 자, 사태를 일부러 만든 게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위기상황이 분명히 일어났고 거기에 대해서 나라를 지키겠다는 왕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아하스 왕이 앗수르 왕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것은 아하스왕 아니라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겁니다. 국제정치질서 상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이 미국 의지하면 그것도 음행이거든요. 음행이죠. 그런데 왜 한국이 미국 의지하는 것은 음행이 안 됩니까? 바로 이런 점에서 에스겔 23장 해석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해석할 때 이런 점을 감안해야 돼요. 오늘 본문 11절, “그 아우 오홀리바가 이것을 보고도 그 형보다 음욕을 더하며.”라는 이 본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복잡하게 안하고 두 가지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동생이라고 지칭한,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의 유다나라가 언니인 북쪽 이스라엘보다 음욕을 더 했다고 판정을 내리는 그것이 무슨 뜻이냐 하는 것. 두 번째, 그것이 왜 음욕이냐 하는 겁니다. 나라를 구하겠다는 투철한 사명감이 왜 하나님보시기에 음욕으로 평가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 두 가지의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초점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북쪽과 남쪽의 자매가 둘 다 옛날에 이스라엘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은 유일하게 언약에 의해서 조성된 나라입니다.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했을 때 노아만 알지 주변 이웃들은 방주가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방주가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을 유일하게 아는 가족이 노아가족이에요. 마찬가지로 인간이라고 해서 다 언약을 납득하고 수긍하고 동의하지 않습니다. 언약을 이해한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이에요.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신 것은 내가 준 언약, 다시 말해서 약속이죠, 그 약속을 이해하는 자만이 구원받습니다. 복음을 모르면 구원 못 받습니다. 교회 다닌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교회에 크게 기여하고 봉사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50년, 60년 봉사하고 목사나 장로직분 받았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목사니까 구원받는다, 성경에는 이런 공식은 없어요. 성경에서는 복음 모르면 구원 못 받고 복음 알면 구원받습니다. 이걸 구약 적으로 설명하면 언약 알면 구원받고 언약 모르면 구원 못 받습니다. 언약을 지키면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에요. 언약을 못 지켜도 언약이 무엇임을 아는 사람만 구원받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서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갔습니다.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못 밟았어요. 하지만 마태복음 17장 변화 산에 모세가 천국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세당시에 모세는 약속의 땅에는 못 갔지만 구원은 받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이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 모세는 자신의 행동 속에서, 자신의 실수와 오류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의 진수를 알아챈 겁니다. 말씀을 못 지킴으로 말미암아 말씀이 뭔가를 알게 된 거예요. 말씀대로 지켜서 말씀을 아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위반하면서 비로소 아하,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이 뭐라는 것을 알아챈 겁니다. 회개한 거지요. 회개해서 구원받은 겁니다. 회개했다는 말은, 우리가 생각한 언약은 오해였고 진짜 언약은 장차 오실 메시아에 의해서 완성된 그것이 언약의 완성인 것을 모세도 알았고 엘리야도 알았고 아브라함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모세와 엘리야가 변화 산에서 “예수님은 언제 돌아가십니까? 예수님이 빨리 돌아가셔야 완성됩니다.”라는 그 별세를 언급했지요.


오늘 본문 에스겔 23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다른 나라와 정치적인 외교술을 두고 음란이다, 음욕이다, 라고 하는 것은 다른 민족에는 해당사항 없습니다. 한국이 미국 의지한다고 그것이 음욕이 아닙니다. 간음 아닙니다. 음욕이나 간음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언약으로 만들어진 나라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에요. 이스라엘이나 유다나 아가씨들이 전부 다 창녀처럼 생활했기에 음녀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북쪽 언니보다 남쪽 여동생이 더 음욕을 품었다는 그 말은 유다 쪽이 하나님의 음란이라는 그 죄의 취지에 더 가까이 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왜? 성전에 거기 있기 때문에. 죄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있는 자가 가장 구원에 가까이 있는 자에요. 죄가 무엇인가를 더 깊이 알려준다는 말은 달리 말해서 구원의 비밀에 근접했다는 뜻이에요. 예수님도 말하기를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 바리새인보다 하늘나라 먼저 간다고 했습니다. 나라 어렵다고 해서 다른 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는 그것이 무슨 간음이고 음욕인가? 다른 나라한테는 납득이 안 되는 이야기를 왜 이스라엘한테 했는가? 에스겔 16장에 보면 중요한 단어가 나와요. 에스겔 16장 33절에 보면 “사람들은 모든 창기에게 선물을 주거늘 오직 너는 네 모든 정든 자에게 선물을 주며 값을 주어서 사방에서 와서 너와 행음하게 하니 너의 음란함이 다른 여인과 같지 아니함은 행음하려고 너를 따르는 자가 없음이며 또 네가 값을 받지 아니하고 도리어 줌이라.”


이것은 유다나라가 그 바벨론을 사모해서 어떻게든 바벨론 같은 나라를 흉내 내서 그런 나라가 되어보려고 애쓴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유다나라를 창녀가 자진해서 몸 팔려고 하는 짓과 동일하게 본 겁니다. 보통 창녀는 몸값을 받는 법인데 이스라엘은 도리어 창기이면서 값을 주면서까지 남자와 관계를 하려고 애쓰는 그런 창녀와 비교된다고 책망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값을 준다.”는 거예요. 16장 33절이지요. 여기서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창기로 비유하는가? 그것은 언약의 나라가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장차오실 예수님께서 구원할 때 값을 주고 우리를 구원한다는 그 값을 설명하기 위해서 미리 당겨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미리 우리에게 보여준 겁니다.


고린도전서 6장 20절에 보면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 23절에도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라고 되어 있어요. 값으로 샀다, “값으로 산 것이기에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원하려고 엄청난 생명의 값으로 줬는데 너는 왜 너에게 값을 치르지도 못할 인간들에게 굽실거리느냐? 값을 치른 예수님 말씀을 들어야지 값을 치를 자격도 없고 값을 치른 적도 없고 값을 치를 수도 없는, 너를 구원하지도 못할 존재자들에게 왜 간 빼주고 쓸개 빼주고 굽실거리고 벌벌 떨고 아부하려고 애쓰느냐? 너는 천사도 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데 왜 그 성도의 값 주고 산 가치를 성도본인이 모멸하고 무시하고 모독하고 하찮게 보느냐?”라고 나무라는 대목이거든요.


왜 하나님께서 구원할 때 값이라는 개념을 동원시키는지 민수기 5장 7절에 보면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민수기 5장 7절에 “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 그 죄 값을 온전히 갚되 오분지 일을 더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옛날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줄 때 죄라는 것을 설명하면서 이런 것이 죄다, 라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죄에는 세상적인 가치를 결합을 시켜요. 그냥 죄가 아니고 죄 + 값이에요. 죄+값, 그냥 죄만 나와 버리면 우리는 죄를 일방적으로 짓기만 하는 대상으로만 끝나버려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신 이스라엘백성들은 구원코자 하거든요. 구원하고자 하면 낚시 바늘이라도 걸어서 당기려고 들면 뭔가를 걸어야 되지 않습니까? 인간을 거는 그 접촉되는 개념을 가지고 값으로 이야기한 거예요. 시장에 가서 물건 살 때 물건 그냥 달라고 하면 안주거든요. 물건 살 때 물건 값 주셔야 물건 준다고 할 때 “여기 물건 값 있습니다.” 하고 물건+값으로 하게 되면 주인이 “여기 물건 있습니다.” 하고 고객에게 물건을 내 줍니다. 죄에 지배하당하고 그냥 덮쳐진 상태에서 죄를 우리 쪽에서 처리할 수 있는 손잡이나 이런 것이 전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값으로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겁니다. 무슨 소리냐, 죄가 있는데 그 죄에서 값을 치르면 네가 죄 없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모세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미리 알려줬다는 말이지요. 하나님 쪽에서 딱 걸어서 당기는데, 물론 다른 백성은 안 되고 언약백성에게만 (죄+값)으로 딱 걸어서 이 값을 떼 내어서 지워버리면 죄가 사라질 수 있도록 하는 손잡이 같은 개념을 붙여놓은 거예요. 언약에서만 그렇습니다.


값을 치르면 그 엄청난 죄도 싹, 하고 없어질 수가 있다는 아이디어가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 속에 포함이 되어 있는 거예요. 이제 하나님께서 모세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뭘 가르쳐야 되느냐 하면, 어떤 식으로 죄 값을 치르는가 하는 그 제도를 제사법이라 합니다. 제사법을 통해서 죄가 어떻게 날라 가는가를 보여주고 그 제사법이 그 제사 드리는 장소를 떠나서 일반 모든 백성들의 생활 속에서 죄의 값으로 연결되도록 조치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민수기 5장 6, 7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나 사람들이 범하는 죄를 범하여 여호와께 패역하여 그 몸에 죄를 얻거든 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 그 죄 값을 온전히 갚되 오분지 일을 더하여 그가 죄를 얻었던 그 본주에게 돌려 줄 것이요.”


평소에 우리가 상거래 할 때나 혹은 남의 물건을 망가뜨렸을 때에 “미안합니다.” 하고 입 싹 닦을 수가 없지요. 만일에 TV를 망가뜨렸다면 “TV를 망가뜨려서 미안합니다.” 하고 그냥 가면 안돼요. “아저씨, 그냥 가면 어떻게 합니까? 미안하다고 하면 다 됩니까?” “그러면 어쩌라고요?” “값을 치러야 될 것이 아닙니까?” “참 이양반도! 하나님도 그냥 용서했는데 당신이 뭔데 이깟 TV 한 대가지고 그럽니까? 그냥 당신 돈으로 사면되지요. 내가 실수 했다고 하잖아요. 실수해서 TV 깼으면 하나님이 그렇게 깬 거니까 당신이 나보고 물어내라 하지 말고 하나님한테 하든지 하세요.”라는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TV 100만 원짜리 깼으면 그 돈 100만원만 값아 주면 안 되고 거기서 오분의 일을 더한 120만원을 값아 줘야 됩니다. “아저씨 , 20만원은 뭡니까?” “이것은 당신의 TV를 깨뜨린 내 죄의 값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죄의 값이 100만원(TV)+20만원이 죄의 값이 되는 거예요. 넉넉하게 갚아주는 겁니다. 주인이 맘이 상한 정신적인 보상까지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이것이 이스라엘 사회에서 일상적인 상거래, 일상의 사회법으로 모세 법에 있어요.


이것이 들어 있다는 말은 일반적인 사회법과 지금 성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그 어린양의 죽는 제사의 죄 용서를 연결시키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언약이 없는 나라, 바벨론이나 앗수르나 애굽, 오늘 본문 끝에 보면 그들이 바벨론과 관계했는데 나중에는 그들을 싫어한바가 되었다고 되어 있어요. 에스겔 23장 17절에 보면 “바벨론 사람이 나아와 연애하는 침상에 올라 음란으로 그를 더럽히매 그가 더럽힘을 입은 후에 그들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겼느니라.”


싫어하는 마음 생겼는데 이제는 애굽으로 마음을 돌려버립니다. 그것이 그대로 역사가 되어서 처음에는 바벨론 좋아했는데 시드기야 같은 경우에 애굽으로 돌아서거든요. 그래서 바벨론한테 오히려 된통 얻어터지는 경우를 실제 역사로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음욕과 간음의 역사가 그들의 역사가 된 거예요. 그러면 왜 이스라엘이나 유다백성들은 그런 수모를 당해야 되고 다른 민족에 있지 않는 어려움을 당해야 되는가? 하나님께서는 민수기에 나오는 죄 값이라는 그것을 이스라엘 역사전체에 완전히 카펫처럼 깔려고 하시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나라는 본인들이 구원받는 목적이 아니고 구원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특수한 민족으로 이 세상에 등장했습니다. 다른 민족한테는 없는 것이 있어야 돼요. 그게 뭐냐, 자기는 죄 값을 치러야 된다는 거예요. 죄 값을 치르려면 인간들이 보는 것 말고 하나님 보시기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어떤 죄에 해당되는지를,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간통죄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언약백성이 시범조교로 먼저 받아야 되는 거예요. 거기서 발생되는 것이 뭐냐, 값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창녀로 간주하는 것은 창녀는 일반적인 성관계가 아니고 성관계를 하면서 돈이 오고가거든요. 값이 오고간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은 멀쩡하고 정숙한 여인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창녀를 구원하시는 거예요. 이것이 호세아에 나옵니다. 호세아목사님의 부인은 창녀에요. 창녀라서 툭하면 가출합니다. 가출해서 다른 남자와 살림 차리면 호세아 선지자가 찾아가서 값을 치르고 그 창기 같은 자기 본부인을 다시 데려오면서 하는 말이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은 창녀가 되어야 하고 오늘날 성도는 창녀가 되어야 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신약의 고린도전서 6장에서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의미는 예수님이 값을 치르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복음을 알아야 구원받는다는 말은 “하나님 나 여기 있으니 나 구원해 봐라.” 그런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 솜씨가 좋으니 나 같은 인간도 구원할 재주 있으니 재주껏 날 구원해 보세요.” 그것이 아니고 진짜 구원 받을 사람은 자신이 세상에 푹 젖어 사는, 무슨 일만 있으면 세상 적으로 해결하고, 뭔 일만 생기면 세상 적으로 기대고 의지하고, 그저 하나님 보다는 세상이 부럽고 세상의 힘을 요청하고,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간음한 여인이라는 것을 혹독하게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사람, 성도입니다. 그 사람들이 성도에요. 십자가의 피가 값이라는 것을 유일하게 고마운 줄 아는 사람들.


내가 멀쩡하니 이 멀쩡한 사람 좀 하늘나라 데려가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왜 우리는 간음한 여인일 뿐이고 왜 세리와 창기가 천당 가는지를 우리가 몸소 살아가면서 아는 거예요. 우리 딴에 자식하나 먹여 살리기 위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 그것이 바로 애굽에서 배운 거예요. 오늘 본문 23장 15절에 “그 고토 갈대아 바벨론 사람 같은 것이라.”라고 했는데 이 고토라는 말은 옛날 아브라함이 살았던 지방이 갈대아 우르지방입니다. 거기서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어서 조상 아브라함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데려 왔어요.


나중에 어디 가는가? 천국 갑니다. 그 후손들도 마찬가지에요. 천국 가야 돼요. 그런데 그들은 옛날 아브라함이 살았던 그 갈대아 우르를 더 좋아하는 거예요. 어디로 가야 되는데, 떠나야 되는데 떠나기는커녕 도로 그 갈대아 우르지방, 조상 아브라함이 떠나온 그 원고토를 더 좋아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사마리아(북)와 예루살렘(남)이 그대로 창녀본색을 다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데 남쪽에서는 그걸 보면서도 더욱더 음욕을 품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보다 유다를 통해서 가장 죄의 깊이에 근접하게 하고 죄의 깊이에 근접했다는 말은 바로 그 한가운데서 구원이 쏟아진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예루살렘에 있는 갈보리언덕,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가장 더럽다고 지칭한 그 장소에서 가장 고귀한 분이 구원자로 등장하는 겁니다. 우리가 가장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그 순간 그것이 가장 은혜 받는 순간이고 십자가가 통째로 우리 가슴을 통해서 나오는 순간이란 바로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는 진실한 고백, 체험된 고백이 나올 때이며 그때만이 십자가만 자랑으로 쏟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모릅니다. 언약의 백성이기에 나오는 고백입니다. 지금도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 이 에스겔 23장을 모르는 사람들은 무슨 소리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언약을 아는 사람들, 십자가를 아는 사람들은 나보고 창녀라고 하는 이 자체가 오히려 사랑인 것을 받아들일수가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값을 주고 샀다는 의미가 더 이상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사람이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천하보다 더 고귀하고 그 값나가는 십자가 피를 받았는데 우리 자신들이 그것을 귀히 여길 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날마다 저희들의 죄를 깨달아서 안에 들어있는 십자가의 용서가 밖으로 발산될 수 있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