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애굽을 잊음(겔23;25-27)이근호131211

아빠와 함께 2013. 12. 11. 21:42

애굽을 잊음(에스겔 23: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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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12-11 21:24 
애굽을 잊음

2013년 12월 11일                           본문 말씀: 에스겔 23:25-27

(23:25) 내가 너를 향하여 질투하리니 그들이 분내어 네 코와 귀를 깎아 버리고 남은 자를 칼로 엎드러뜨리며 네 자녀를 빼앗고 그 남은 자를 불에 사르며

(23:26) 또 네 옷을 벗기며 네 장식품을 빼앗을지라

(23:27) 이와 같이 내가 네 음란과 애굽 땅에서부터 행음하던 것을 그치게 하여 너로 그들을 향하여 눈을 들지도 못하게 하며 다시는 애굽을 기억하지도 못하게 하리라

국가체를 두고 음탕한 창기로 묘사하게 되면 여기서는 그 국가가 그동안 성과를 낸 모든 역사적 문화나 문명이 삭제된 듯한 허전함을 느낄 것입니다. 마치 딱딱한 조각품 자체에서는 그 어떤 시간성이나 역사성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생물체는 잠시도 가만 있지 않고 자신을 변동시킵니다.

하지만 딱딱한 조각품 같은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같은 자태를 보입니다. 따라서 변화와 변동을 나타내며 늘 쉬지 않고 움직이는 국가를 놓고서 한정된 특징을 지닌 고정성 있는 인물로 단정 짓는 것이 표현상 무리인 듯이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런 표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전하고자 하시는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짜 실체란 시간과 역사성을 쪽 빼야 드러난다는 겁니다. 마치 한약을 달이듯이 물기는 밑으로 빠져 탕약이 되고 야무지게 쥐어 짠 헝겊 안에서 약재 덩어리만 남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서 역사성을 쪽 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창녀로서 사는 것이 참된 너희의 진 모습이었다”는 겁니다. 

전에도 창녀였고 지금에 와서는 노골적으로 그 모습이 다 드러났다는 겁니다. 창녀는 음탕한 짓을 노골적으로, 전문직처럼 생각해서 살아갑니다. 생활 전반에 있어 목적하는 바가 바로 음란한 짓입니다. 하나님 시선에서 이스라엘이 이런 식으로 평받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애굽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애굽에 있을 때에도 히브리인들은 창녀였지만 이스라엘은 그 사실이 알 길이 없었습니다. 출-애굽 되었을 때에, 그들은 오해하기를 자신들은 이제 거룩한 백성이다 는 겁니다. 즉 그들은 애굽에서의 탈출에 성공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전혀 구원된 적이 없습니다. 애굽에서 빠져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출-애굽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애굽에서 빠져나와 구원받는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구원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이 오해가 참으로 오해였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애굽의 맞은편에 앗수르나 바벨론 나라를 배치해놓았습니다.

애굽에서 분명히 빠져나와 자신들은 이제 특별한 성품을 지닌 민족이다고 자부했던 그들이 앗수르나 바벨론을 만나고 나서부터 어떻게 하든지 그 나라와 동일한 나라이기를 고대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즉 도저히 억누르거나 감출 수 없는 본성이 그런 강대국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폭발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애굽에 있을 때, 애굽에서 나올 때나 전혀 변함이 없는 본색이었고 실체였습니다. 전혀 달라질 게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출-애굽의 취지를 달리 봐야 합니다. 즉 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애굽에서 구원하시면서 왜 창기 같은 이스라엘을 꼭 데리고 나와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처음부터 인간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구원이었습니다. 바로 이 사실을 분명히 알리기 위해 이스라엘이라는 인간 무리를 데리고 나오는데 실은 이들에게는 하나님도 없고 구원도 없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동행해서 데리고 나오므로서 그들 이스라엘의 오해가 시작됩니다.

이 ‘오해’가 중요합니다. 이 오해가 바탕 역할을 지속적으로 해나가므로서 이 어두운 세상의 본색을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적으로 규정하실 수가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동행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대적하고 싶어하는 세력과 일치된 마음이고 싶어하는 충동을 계속 노출되어야 합니다.

애굽 나라에서 하나님은 ‘죽은 어린양’의 양상으로 드러나야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께서 죽어서 세상을 빠져나왔다’는 취지가 계속 살아나는 환경은 늘 조성되어야 합니다. 이 작업 중심에 이스라엘이 놓여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자 아이들이 ‘인형 옷 입히기 놀이’ 하듯이 주변의 강대국의 마음에 흡족하도록 자신을 꾸미고 또 꾸몄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를 위한 종교 놀이’라는 점에서 주변 이방나라과 일치됩니다. 여기서 갈라디아서 1:9-10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이 본문을 받아드는 자는 누구나 다음과 같이 오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기에 그들이 기쁘고 즐겁고 알기 쉽게 받아들이는 식으로 참된 복음을 준비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10절의 말씀은 이런 논리에 정면으로 쥐 박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말입니다.

즉 저주받지 않을 유일한 복음은 절대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요소가 들어있지 않다는 겁니다. 한 명이 구원받던 두 명이 구원받던 상관없이 참된 복음은 그런데 개의치 않고 복음 그 자체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내용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서 오해를 제거된 상태라는 것은 인간들의 자기 구원을 위해 복음이나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성령님이 계신 것이 아님을 알아채는 겁니다.

즉 구원은 나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이스라엘이 창기인채 출-애굽 해야만 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자신들이 품고 있는 그 오해성을 충분히 다 드러나야 하는 민족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있다고 오해하므로 말미암아 그들은 자연스럽게 주변 나라에 대해서 그 어떤 거부감을 갖게 되지 않습니다.

동일한 의식으로 서로 통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종교적 위장들을 하나둘씩 벗겨냅니다. 벗겨낸다는 것은 안 맞는 장식들을 떼 내고 분리하므로서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어떤 존재로 보고 계셨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이스라엘도 같이 친동감토록 하겠다는 겁니다. 극상의 거룩함은 곧 극상의 추잡함이 되는 근거는 오로지 ‘자기를 위한 신’만 인간들이 참 신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본성은 본성 그대로 노출시키는 방식으로, 출-애굽은 결코 인간 구원을 위함이 아니라 어린양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한 조치였음을 알려줍니다. 앗수르 제곡의 벽에 튕기고 바벨론 제국의 벽에 에 튕길 때, 이스라엘은 차라리 애굽의 힘을 의존하는 창기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바로 그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린양의 죽음을 생각토록 하십니다. 원래 창녀인 그들에게 둘러싸여서 하나님은 주님으로 찬양받고자 하시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이름에 관심 두지 않는 상태에서 주의 이름으로 부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