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저주 붙은 몸

아빠와 함께 2023. 6. 18. 17:24

저주붙은 몸  

2023년 6월 18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9:3-6

(9:3)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이 활을 당김 같이 그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며 그들이 이 땅에서 강성하나 진실하지 아니하고 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또 나를 알지 아니하느니라
(9:4) 너희는 각기 이웃을 삼가며 아무 형제든지 믿지 말라 형제마다 온전히 속이며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함이니라
(9:5)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 혀로 거짓말 하기를 가르치며 악을 행하기에 수고하거늘
(9:6) 네 처소는 궤휼 가운데 있도다 그들은 궤휼로 인하여 나 알기를 싫어하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선지자의 특권은 사람들과 협의할 필요없을 정도로 하나님 말씀 그대로 전한다는데 있습니다. 이는 비록 선지자라고 할지라도 사람들을 설득해서 천국보낼 능력이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천국은 철저하게 막혀 있습니다. 아무리 이 지상에 경건한 자들이 있다할지라도 그들의 능력으로 타인을 천국으로 보낼 수 없습니다.

여기서 인간과 신약 때 오실 메시야와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예레미야 및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면서 “너희들이 거짓말을 한다”고 했지 무엇이 거짓인지 아닌지를 기름하는 기준을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은 그저 말씀만 전달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 전달된 말씀이 알아서 성취를 달성합니다.

이와 비슷한 예가 에스겔 선지자에게도 나옵니다. “만일 의인이 그 의를 떠나 죄악을 행하고 인하여 죽으면 그 행한 죄악으로 인하여 죽는 것이요 만일 악인이 그 행한 악을 떠나 법과 의를 행하면 그 영혼을 보전하리라 그가 스스로 헤아리고 그 행한 모든 죄악에서 돌이켜 떠났으니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겔 18:26-28)

여기에 ‘죄악’이 나오고 ‘의’가 나옵니다. 그런데 무엇을 근거로 죄악이 되고 의가 되지요?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당신은 의인에서 악이 되었습니다”라든지 “당신은 죄인이었는데 이제는 의인되었습니다”로 규정할 수 있는가 말입니다. 아무런 기준은 없고 그저 결과만 보여줍니다. 즉 “너희는 죽는다!”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자체가 멸망당한 입장에서 ‘의인은 하나도 없었다’가 성립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신 것은 이스라엘이 ’구원될 가능성이 있다‘가 아니라 반대로 ‘구원될 가능성이 없음’으로 확정났기 때문입니다. 왜 멸망될 수밖에 없었냐를 분명히 하기 위해 선지자들을 보내신 겁니다.

따라서 멸망당하는 이스라엘 입장에서 선지자에게 “네가 뭔데 감히…”라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선지자가 나서서 사람을 구원할 처지가 아님을 선지자가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해주는 겁니까? 구원자는 찾는 것 자체가 이 세상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음입니다.

이 세상은 구원을 거론할 처지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 전부가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자를 반박합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고전 15:35) 즉 사도 바울은 지금있을 수 없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즉 거짓이냐 아니냐의 차원이 소소한 인간들의 이익 수준이 아니라 이 세상을 통으로 규정하는 차원에서 논쟁합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예수님의 빈 무덤으로 인해 이 세상을 전부 하나의 무덤에 모두 갇혀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만 빠져 나온 것으로 인해 어느 누구도 이 거짓된 죽음의 무덤 세계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저주 하나로 굳어진 세계로 갇혀 있음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 인간 세계는 철저하게 봉인된 세계입니다.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계 5:1-3)

흔히 사람들은 아주 고가의 다이아몬드에 저주가 붙어서 소유하는 자만이 불의의 사망을 당한다는 신기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곤 합니다. 그런데 저주가 그런 비싼 보석에만 붙어 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의 몸 자체가 저주가 달라붙어 있기에 거짓과 거짓으로만 발산될 뿐입니다. 이것은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입니다.

이 깜깜한 세상에서 거짓과 거짓 아닌 것을 따로 구분하는데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학교 운동회하면서 먼저 선수들이 나가서 선서를 합니다. “선서! 우리는 반칙하지 않겠습니다” 인간들이 이 지옥의 세계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반칙이요 거짓입니다. 그 이유는 거짓과 거짓 아닌 것을 여전히 따로 구분지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즉 통으로 세계를 볼 줄 아는 안목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은 이 세계 자체가 진리이신 예수님을 비난하고 내쫓을 수밖에 없는 성질을 감출 수가 없음을 나타내는 표준입니다. 기준이냐 아니냐는 예수님에 의해서 확정납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을 언급하면서 전혀 다른 안목을 말해줍니다.

“어떻게 죽음을 끝이라고 여기는가?”라고 말입니다.(고전 15:36-38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즉 부활의 입장에서 세상을 봐야 한다는 겁니다. 타이타닉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 배 끝머리에 올려놓고 눈을 감아라고 하면서 두 팔을 벌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Open your eyes”(너의 눈을 떠세요) 그러자 여자 주인공이 말합니다. “I am flying”(나는 지금 날고 있어요)

신약 시대에서 죽음을 이긴 부활의 영이 활동하는 시대입니다. 지옥의 그 어떤 법칙에 얶매이지 않고 저주를 능력이 발휘되고 발산됩니다. 새로운 눈이 열린 겁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 설고 있는게 아니라 날고 있는 겁니다.  무엇이 거짓일까요? 자신이 몸이 저주가 달라붙어있는 것을 모르는 것이 저주입니다.

값비싼 다이몬드에게만 저주가 붙어 있는게 아니라 다이아몬드보다 더 아끼는 자신의 몸이 이미 거짓과 죄악이 달라붙어 있는 겁니다. 따라서 얼굴이 뭉개지만 죽어 마땅한 겁니다. 평생을 거짓과 반칙으로 일관하면서 살아오고 있는 겁니다. 스스로 죽어 마땅함을 반겨야 합니다. 분투노력해야 망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가 된 것을 목회자로 망하라는 뜻입니다. 결코 사람이 사람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부활하신 분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 현장에서 목회자는 자신이 마땅히 실패자로 드러나는 것을 더할 나위없는 영광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통으로 세상을 보게 하옵소서. 나를 내가 평가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6강-예레미야 9장 3~6절(저주붙은 몸)230618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9장 3~6절입니다. 구약성경 1064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이 활을 당김 같이 그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며 그들이 이 땅에서 강성하나 진실하지 아니하고 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또 나를 알지 아니하느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을 삼가며 아무 형제든지 믿지 말라 형제마다 온전히 속이며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함이니라,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 혀로 거짓말하기를 가르치며 악을 행하기에 수고하거늘, 네 처소는 궤휼 가운데 있도다 그들은 궤휼로 인하여 나 알기를 싫어하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실컷 예레미야가 자기 말해놓고 마지막에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말하는 것과 여호와의 말씀 하시는 것과 무슨 차이가 나야 할 겁니다. 인간이 말하는 것은 남에 대한 평가에 지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너를 천국 보내줄게. 네가 내 말 잘 들으면 너 구원시켜 줄게’라는 이거 100% 인간의 말입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경우에도 인간의 말이냐. ‘내가 당신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것은 주님의 말입니다’라고 말할 때, 100% 인간의 말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해요. 인간에 의해서 데리고 오는 인간은 하늘나라에 전적으로 막혀있다는 사실이에요. 구약을 보면서 하나님이 철두철미하게 그 어떤 인간도 천국으로 기어 올라오는 것을 주께서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막아버립니다.

어떤 수완과 어떤 다양한 방법으로든 구원방법은 없는 겁니다. 사람들이 예레미야가 이런 이야기 하면 그 당시 예레미야보고 ‘네가 뭔데?’라고 이렇게 나올 것이 분명하거든요. 여기서 예레미야는 어떤 좌절을 맛봐야 해요. ‘나는 선지자인데 당신들을 구원하겠습니다’라고 할 때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좋게 보지를 않아요. 그런데 그렇게 좋게 보지 아니한 것도 주의 뜻인데요.

왜냐 하면 선지자의 말을 듣고 구원받는다는 이것과 장차 오실 예수님의 말을 듣고 구원받는다는 둘 사이에 분명하고 확연한 차이를 두려고 하는 거예요. 여기서 선지자가 ‘너희는 거짓을 이야기한다’라고 하면, 예레미야가 여기 강대 앞에 서서 ‘너희들은 거짓을 이야기한다’라고 한다면, 그리고 제가 여기 앞줄에 앉아 있다면 이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예레미야 선지자님,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세요’라고 할 거예요. 만약에 선지자가 근거를 제시하면 그건 선지자 아니죠. 근거가 없어요. 그냥 하나님 말씀에 너희들이 거짓말쟁이라고 하니까 거짓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알아들었다면 ‘어떤 것이 거짓말이고 어떤 것이 진실인지 그것을 구분해 주시면 제가 말하는 데 참고로 하겠습니다’라고 이렇게 말하면 선지자는 말하기를 ‘다~전부 다~ 거짓말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오히려 이게 편해요. 모든 말이 거짓말이 되니까 참으로 편합니다. 지금 선지자는 유다 나라 이스라엘이 멸망한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시킵니다. 기정사실화 시키기 때문에 멸망할 이유가 있어야 하죠. 그 멸망한 이유는 너희들이 입만 떼면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걸 듣고 거짓인지 거짓이 아닌지 뭔가 기준을 제시해 줘야 우리가 분명하게 앞으로 거짓말하지 않을 수 있지 아니한가.

‘그러면 선지자 당신의 말은 그냥 거짓으로 밀어붙이는 식밖에 안 되고,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어떤 기준으로 해서 앞으로 그러지 말라고 해주는 게 옳지 않습니까?’라는 반발이 나올 수 있죠. 이 비슷한 이야기가 에스겔에 나와요. 에스겔 18장 26~28절에 보면 “만일 의인이 그 의를 떠나 죄악을 행하고 인하여 죽으면 그 행한 죄악으로 인하여 죽는 것이요, 만일 악인이 그 행한 악을 떠나 법과 의를 행하면 그 영혼을 보전하리라, 그가 스스로 헤아리고 그 행한 모든 죄악에서 돌이켜 떠났으니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되어있어요.

에스겔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하면 의인이 의를 떠나서 죄악을 행하면 비록 의인이라도 죽고, 악인이라도 네가 악을 떠나 법과 의를 행하면 그 영혼은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이 에스겔 말에 무엇이 의고 무엇이 죄라는 기준을 전혀 제시하지 않았어요. 그냥 그대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말은 바로 여호와께서 이 기준에 의해서 모든 인간이 죽게 되면 아예 그들은 의가 없고 거짓말만 하면서 살았다는 것을 너희 자신에게 분명히 똑똑히 인정하라는 이야기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개선의 여지를 주는 희망을 주는 말씀이 아니고 이미 확정된 사실을 통보하는 식으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지금 예레미야의 경우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결별 과정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예레미야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언급했던 ‘왜 모든 인간의 말은 거짓말인가?’라는 것에 대한 근거를 주께서 마련해 주셨습니다.

언제? 신약 때 준비해주셨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서 우리는 신약성경과 연관 지으면서 뭐를 털어내야 하느냐 하면 ‘내가 구약에서 주신 선지자의 말씀대로 이것을 지켜서 하나님의 구약적 차원에서 내가 구원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라는 그 희망 자체를 털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보면 속이 시원해요. 뭐, 이게 구원되리라는 희망을 품는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구원되리라는 희망을 품는 것은 마귀의 사람들만 할 거예요. ‘아마’라는 말도 빼고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냥 그렇습니다. 마귀만 사람들에게 구원과 천국 가는 희망을 제시합니다. 그냥 단념하면 돼요. 그냥 포기하면 돼요.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문을 철저하게 닫아버렸어요. 닫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제시합니다. 이걸 요한계시록 5장에서는 그걸 “봉인되었다”라고 나옵니다.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계1:1)

이 봉인되었다는 요한계시록 이야기했는데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걸 구체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모든 인간세계를 무덤에 가두도록 만들었다고 나옵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이 이 세상을 거대한 하나의 무덤으로 전환 시켜버렸습니다. 유일하게 탈출하시면서 아무도 탈출 못 했던 곳에서 너희들이 열심히 부지런히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깜깜한 어둠인 무덤 속에서 ‘주님, 바르게 살겠습니다’라는 것은 지금 뭘 놓치고 있느냐 하면 내가 지금 어느 공간에 놓여있는가를 모르고 있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나이를 가늠할 때, 저 사람이 나이가 많은지, 안 많은지 어떻게 가늠하느냐 하면 얼굴의 윤곽이 뭉개지면 나이 들은 거고, 약간 뚜렷하다 싶으면 아직까지 늙지 않은 거예요. 코, 입, 눈 부분이 흐릿하지 않고 윤곽이 있으면 아직 뭉개질 정도는 아니거든요. 눈, 코, 입이 뭉개졌다는 말은 그동안 이 부위들이 참 수고가 많았다는 뜻이에요.

이제는 눈이냐, 코냐, 입술이냐, 그런 거 구분하지 마라. 뭐든지 다 거짓으로 확정된 상태에서 눈으로 거짓하고, 귀로 거짓하고, 입으로 거짓하고, 거짓 했다는 이런 통일된 원칙 앞에서 구색 맞춰서 눈, 코, 입 달고 있는 것이 아무 소용없는 것을 달고 있는 거예요. 전부다. 뭘 달아도 거짓만 나오기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하면 너무 허무하게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걸 허무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고요, 얼굴 없이 살아도 죄인치고는 지금 잘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 점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죄는 죄대로, 거짓은 거짓대로 입만 떼면, 눈에 보이기만 하면 거짓만 나오면서도 살기는 마치 의인처럼 살고 있잖아요. 이거 횡재한 거 아니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딱 하나예요. 거짓을 이야기했다는데 도대체 거짓이 뭐냐는 겁니다. 도대체 예레미야가 뭘 가지고 거짓말했다고, 너희들 거짓말했다고, 자꾸 말하는데 거짓말했다는 기준이 뭐냐는 것을 아셔야 해요.

어제 운동회 이야기를 또 하자면 운동회 초반에 가관인 것이 나왔어요. 그게 뭐냐면 선수 두 사람이 나와서 “선서!”라고 외치며 선서를 해요. “일, 나는 반칙하지 않는다”라고 하는데 제가 웃을 뻔했습니다. 저 아이들이 인생을 알기는 알아? 반칙 안 하고 살 수가 있나? “우리는 반칙하지 않겠습니다” 그다음에 선생님들 나와서 “선서!” “일, 우리는 반칙하게 하지 않겠으며, 일,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하겠습니다”

최선을 향하는 것이 반칙이고요, 반칙하지 않겠다는 것이 반칙이에요. 그것도 선서, 맹세까지 하는 것이 반칙이에요. 그런 관점에서 신약성경의 산상설교를 다시 읽어야 해요. 다시 봐야 해요. 너희들은 반칙하며 살아왔고, 그 결과로 거짓이 계속 쏟아지고 있어요. 그리고 고린도전서 15장 3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사느냐고 따지는 거예요. 사도바울에게. ‘죽었으면 게임 끝났는데 어떻게 죽은 자가 다시 사느냐? 왜 너는 부활을 언급하느냐?’라는 그런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거짓이냐, 이 세상 사람들이 거짓이냐는 것은 어떤 관점이냐 하면 너희들이 무덤 안에 있기 때문에 무덤 안에서는 다시 부활하는 것이 없다는 거예요. 부활이 없다는 입장에서 그들은 나름대로 거짓과 옳음의 기준을 정한 것이 그 자체가 거짓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부활의 관점으로 보게 되면 무엇이 거짓이냐 하면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할 때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산다는 내용이 포함되지 않으면 모조리 그것은 비복음적이고 그것을 거짓이라고 하나님이 규정하시는 거예요. 죽었다가 다시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야기할 때 부활 이야기를 막 집어넣고 해야 하느냐. 아니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타이타닉(Titanic)이라는 영화에 보면 여자배우 윈슬렛과 남자배우 디카프리오가 나옵니다. 지금은 늙었지만, 영화 찍을 땐 젊었죠. 이런 대사가 나와요. 남자가 이렇게 말해요. “Open your eyes~” 그리고 여자의 대꾸가 기가 찹니다. “I’m flying~” “나는 날고 있습니다” 지금 뱃머리 꼭대기에서 여자에게 눈을 감게 하고 남자가 뒤에서 딱 붙들어 주면서 끝에 오니까 “눈 떠봐”라고 한 거죠. 눈을 떠보니까 배에서 제일 높은 뱃머리에서 확 트인 바다를 보면서 자기가 표현을 하기를 미끄러진다는 것이 아니라 “I’m flying~” 나는 날고 있는 중이라고 이야기해요.

여기서 디카프리오가 영화 속에서 삼류인간이에요. 제일 비참하고 밑바닥 인생이거든요. 거기에 비해서 윈슬렛은 공주같은 상류층 여자예요. 둘이 눈이 맞아서 그들은 배 위에서 지내는 상류층 파티 말고 배의 제일 아래층에 아주 지저분한 파티에 참석하면서 둘이 사귀는 대목인데 거기서 “Open your eyes~” 당신의 눈을 떠보세요. 당신의 거짓된 눈을 한번 떠보세요.

당신이 지금껏 성장하며 공주로 살아오면서 귀족층에서 들었던 모든 이야기, 그 이야기에서 당신은 스스로 양성 받았고, 양육 받았고, 그것 자체가 갇혀버렸다는 겁니다. 이런 삶도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겁니다. 이게 영화의 주제예요. 왜 허례허식(虛禮虛飾)에 굴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세계가 있는데 왜 그 세계에 살아야만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그러한 폐쇄된 안목을 가지고 살아왔습니까?

이런 삶도 있습니다. 제가 당신의 삶에서 건져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차고 있는 화려한 거, 그것이 당신을 죽였습니다. 전체에 흐르는 맥락이 그렇거든요. 이게 신약성경에서 사도바울이 외치는 거예요. ‘너의 눈을 떠봐’ 물론 성령이 와야 뜨지, 그냥 떠보는 것은 맨 마찬가지죠. “I’m flying~” 나는 지금 하늘나라에서 날고 있는 거예요. 이것만이 거짓이 아닌 겁니다.

이걸 지금 사도바울이 전하고 있는 거예요. 네가 지금 세상이라는 무덤에서 빠져 나와야 무엇이 거짓인지 비로소 알 거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레미야가 이야기하는 수준과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수준이 엄청 차이가 나요. 엄청 달라요. 사도바울은 안타까워합니다. 왜 사람들은 이 지옥같은 세상을 살면서 날아다니는 방식으로 삶을 살지 않는가.

도대체 누가 너희들에게 ‘거짓말하지 말라, 규칙을 지켜라, 반칙하지 말라, 바르게 살아라’라고 누구 그렇게 계속해서 무덤 안에, 죽음 안에, 저주 안에 갇히게 만들었냐는 말이죠. 누구입니까? 우리 있을 때 기존에 있었던 기성세대이고 타인이죠. 그리고 또 하나는 그 기성세대로부터 철저하게 세뇌받았던 우리 자신이죠. 우리 자신이 그렇게 우리를 힘들게 만들어요. 우리 자신이.

옳고 그름이라는 선악과 따먹은 티를 숨기지 못해요. 옳고 그름을 계속 논하면서 내가 자신에게 옳게 살았는지 바르게 살았는지 계속 점검해 나갑니다. 성경에서는 바로 그런 삶이 이미 봉인된 삶이에요. 요한계시록 5장 1절에 보면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봉인된 거예요. 이 세상은 일곱으로 철저하게, 그러니까 일곱이라 하는 것은 완전히 막혀있는 겁니다.

우리는 완전히 막혀있는 세상에 태어났어요. 완전히 막혀있는 경우의 예를 또 한 번 들겠습니다. 18세기 중엽에 인도의 농부가 반짝이는 거대한 암석을 하나 주웠는데 다이아몬드예요. 이 세상에 그보다 더 큰 다이아몬드는 없습니다. 115캐럿인가 하는 엄청난 크기의 아직 가공되지 않은 다이아몬드를 주웠는데 그것을 총독이 빼앗아서 프랑스 왕실에 팔아넘겼어요.

그 총독도 죽고 그 농부도 죽고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그걸 샀는데 루이 14세도 천연두로 죽었고 루이 16세는 일 년 뒤에 단두대에 목이 잘려 죽었고, 프랑스에서 다이아몬드 가공한 사람이 들개에 물려 죽었고, 나중에 영국 런던에 한 은행가에게 다이아몬드가 팔렸는데 그 은행가가 말 타다 죽었고, 그다음 미국의 한 상속녀에게 다이아몬드가 갔는데 상속녀 자녀들은 교통사고로 죽었고 남편은 정신병자로 죽었고 여자는 폐렴으로 죽었고 결국 그것을 우편 배달부가 박물관에 가져갔는데 배달부가 자기 집에서 사고로 죽었고 자기 집은 불타버렸어요. 그게 바로 저주가 붙은 다이아몬드라는 거예요.

이 이야기처럼 다이아몬드에만 저주가 붙어있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결코 다이아몬드에만 저주가 붙은 것이 아니에요. 우리 몸 자체에도 저주가 붙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얼굴이 뭉개지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저주가 붙어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우리가 바로 거짓말쟁이예요. 우리는 날마다 저주가 안 붙어있는 존재라고 여기는 그 자체가 거짓말쟁이예요.

우리는 날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최선의 노력을 하려고 해요. 사도바울이 말하는 예수님의 무덤, 이미 죽은 데서 빠져 나왔다는 그 기쁨과 바르게 살아서 남에게 칭찬받는 그 기쁨을 견주어서 우리는 어느 쪽을 하느냐 하면 나라는 이 다이아몬드가 빛나기를 그쪽을 선택해 버려요. 이렇게 어리석은 존재가 다 있습니까? 복음을 이야기해도 복음대로 바르게 살 생각하지 복음대로 “I’m flying~”, 이 저주 속에서 날면서 살 생각을 안 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해당이 안 되고요, 성령 안 받은 사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목회자가 되었다. 그러면 이건 목회자로서 실패하기 위해서 목회자 되었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그 사람은 더이상 거짓말을 할 수 없어요. 왜냐? 설교나 모든 행동에서 나는 전력투구해서 실패하기 위해 목회하고 있다는 것이 말과 행동에서 나오는데 그게 어떻게 거짓이 되겠어요. 진실이죠.

설교를 끝내면서 분명히 여러분께 당부하고 싶습니다. 분투하며 노력하지 않으면 망하지 않습니다. 기쁘지 않습니까? 분투하며 노력해야 해요. 그리고 모든 자리에 내가 망하고 실패임을 확인시켜주는 자리를 마련해야 해요. 이게 제가 아까 기도할 때처럼 복음으로 사람을 만나는 겁니다. 복음으로 사람 꼬드겨서 교회 데려오는 거 말고, 어디를 가더라도 내가 망했음을 신나게 확인할 수 있는 자리가 어디냐.

그건 중(스님)을 만나든지, 이슬람교도를 만나든지, 대통령을 만나든지, 어떤 만남의 자리도 그게 복음으로 만나는 자유로운 현장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거짓되게 살지 않겠다는 것이 거짓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내가 바른 인간 되는 그런 의도가 곧 거짓말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게 현실인 것을 이게 지옥인 것을 왜 우리는 미처 몰랐습니까. 이제 마음껏 부활의 영 안에서, 성령 안에서, 이 세상에서 날면서 사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일오후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실수하는 인생  (0) 2023.07.02
해석자  (0) 2023.06.25
눈물통  (2) 2023.06.11
정답으로서의 성도  (0) 2023.06.04
중재자  (0) 2023.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