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하는 인생
2023년 7월 2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9:10-11
(9:10) 내가 산들을 위하여 곡하며 부르짖으며 광야 목장을 위하여 슬퍼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불에 탔으므로 지나는 자가 없으며 거기서 가축의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며 공중의 새도 짐승도 다 도망하여 없어졌음이니라
(9:11) 내가 예루살렘으로 무더기를 만들며 시랑의 굴혈이 되게 하겠고 유다 성읍들로 황폐케 하여 거민이 없게 하리라
하나님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친히 ‘슬퍼하신다’고 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슬퍼하시는 일을 행하시는 겁니까? 슬픔과 무너뜨림 조차도 하나님의 예언 성취의 필연적 조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무너짐의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들은 도리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온 것입니다. 왜 인간들은 하나님의 일에 방해할까요? 그것을 세상을 보면서 슬퍼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보면서 슬픔의 대상인데 인간들은 이런 감이 없는 겁니다. 마치 인간들은 이 세상을 안 슬퍼하며 살 권리라도 있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습니다.
세상 안에서 살면서 안 슬퍼하는 자는 주님의 안목과 불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하 불일치는 인간들이 행복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을 위한 전진을 인간들은 멈출 의도가 없습니다. 즉 그동안 자기 행복을 위해 세상을 관찰하고 이해해왔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자기에게 ‘문제 있음’이 발견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꽃병이 보인다’는 것은 ‘꽃병’이 거기에 있어서가 아닙니다. 도리어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빛이 꽃병이 닿아서 그 빛이 우리 눈에 도달했기에 꽃병이 거기 있음을 압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두고 ‘내가 꽃병을 관찰하고 보고 있기에 꽃병이 보인다’가 되어 버리면, 꽃병을 보는 나는 문제없는 존재가 됩니다.
‘나’보다, ‘꽃병’보다 빛이 우선입니다. 빛이 꽃병과 나를 연결시켜 준 겁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당해야 하는 이유는, 여호와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안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중심’으로 본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슬픔으로서 세상을 본다는 뜻입니다.
망해가고 황폐한 세상을 보고 ‘신난다’고 할 것이 아니라 ‘슬픈 눈으로 보시는 그 현장’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경우도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신약적으로 표현해서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곧 ‘기쁜 소식’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기쁜 소식’은 인간들으로 너무나도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나타납니다.
따라서 아무리 이스라엘이 망해도 하나님의 예언과 말씀은 무효와 되는 경우는 아닙니다. 성도라면 지극히 슬픈 현장에서 비로소 기쁜 소식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기쁨은 하나님의 슬픔과 더불어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인간적으로 가장 슬픈 순간이 하나님의 복음이 가장 뚜렷히 나타나는 순간입니다.
이 세상은 인간들이 행복을 추구하는 장입니다. 경쟁적으로 시도합니다. 바로 이러한 환경이 복음이 등장하는 적절한 조건이 됩니다. 누가복음 6:24-26에 보면,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주님은 인간들이 추구하는 것과 반대로 나가시는 겁니까? 그것은 복음이 품고 있는 기쁨과 영광은 이 세상의 그 어느 것과도 족히 비교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면 자신의 하자가 감추어진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주님은 인간이 감추고 있는 것을 도리어 뒤집어 보이려고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의 기쁨’부터 출발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슬픔’으로부터 복음을 시작하시려고 합니다. 이는 성도로 하여금 자기 만족에서 멈출게 아니라 십자가가 보이는 곳까지 기어이 데리고 가시려는 겁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존재하므로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는 겁니다.
따라서 십자가라는 예수님의 슬픔을 통해서 그동안 거짓 선지자들이 인간들을 정반대로 가르쳐왔다는 들추어내시려는 겁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기 사람들을 통해서 제자의 역할을 다하게 하십니다. 제자된 자는 어떤 마음 가짐을 가지고 세상에서 나서야 하는 겁니까?
그것은 이것입니다. “이 세상은 실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그 결과로 실패 중이다”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성도는 단호함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실패로 보고 있는 눈과 동일한 눈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출발된 빛은 성도를 거쳐서 다시 예수님에게 귀환됩니다.
이 빛의 경로, 곧 슬픔의 경로는 세상이 추구하는 기쁨과 행복의 염원과 대조를 이룹니다. 이러다 보니 예수님의 빛을 품은 성도들은 세상으로부터 심한 미움을 받을 밖에 없습니다. 기까이는 가족 내에서도 미움받고 범위를 넓혀서 세상 어디가도 복음으로 인해 미움받는 자로 낙인찍힙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는 이 정황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뱀이 우글거리는 세계를 조성하시는 이유는, 예수님의 단호한 안목과 동일한 단호함으로 무장하고 있는 자들이 곧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 성도들은 주저없이 외칩니다. “당신네들 실수하고 지금 실패중이다. 그쪽 방향이 지옥이다”고 말입니다. 이 단호함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요?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19-20) 즉 성도 안에 계신 분이 성도를 통해서 대시 말씀해주신다는 겁니다. 세상이 한참 실패 중이라고 말입니다.
실패하는 세상을 부러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전혀 누구에게도 주눅들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황폐하고 초라해도 그 현장에는 영광스러운 복음이 강렬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복음이 방해받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8강-예레미야 9장 10~11절(실수하는 인생)230702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9장 10~11절입니다. 구약성경 1064페이지입니다.
“내가 산들을 위하여 곡하며 부르짖으며 광야 목장을 위하여 슬퍼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불에 탔으므로 지나는 자가 없으며 거기서 가축의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며 공중의 새도 짐승도 다 도망하여 없어졌음이니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무더기를 만들며 시랑의 굴혈이 되게 하겠고 유다 성읍들로 황폐케 하여 거민이 없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주어가 되셔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하나님이 세우신 시온, 예루살렘을 주께서 멸망시키겠다는 예언입니다. 이 예언은 그냥 말로 끝난 것이 아니고 실제로 신약시대에 와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빠뜨리면 안 되는 중요한 사실은 말씀이 성취되는 현장에 반드시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실패가 과연 실패인가, 아니면 그 실패현장에서 주께서 보내신 분을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그런 계기, 기회가 되느냐가 중요하겠지요. 모든 것은 분명히 인간적으로 실패했는데, 그 실패의 현장에 주님이 계시더라. 이건 뭐, 대성공한 거죠.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생 실수하지 않았다. 실패하지 않았다’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성경에서, 특히 신약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 제자들이 기본 취지가 뭐냐 하면 복음을 전파하는데,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열두 제자가 복음을 전파합니다. 그 전파하는 제자들의 심정을 우리가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여러 고을에 다니면서,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복음을 전파하는데 근본 취지는 이겁니다. ‘당신 인생 실수하지 마세요. 당신 인생 그렇게 가면 당신은 실패하는 겁니다. 그거 엉뚱한 길이에요. 그거 멸망의 길입니다’라는 것을 아주 자신만만하게, 심각하고 진지하게 이야기했다는 겁니다.
‘믿을 거면 믿고 말려면 말고’라는 이런 것이 아니라, ‘참 안됐다. 참 서글프다. 내가 당신같은 입장이면 난 벌써 자살했어’라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왜냐 하면 ‘복음’이라는 말 자체가 기쁜 소식이거든요. 이 기쁜 소식을 안 받는 것보다 더 슬픈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기쁜 소식이 가는 곳은 필시 슬픈 소식을 유발하게 되어있고 슬픈 소식이라고 여겼는데 그 현장에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면 이건 결과적으로 기쁜 소식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시는 이유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입니다. 참, 복음 전파하는데 하루 종일 살림만 살고, 손자만 보고, ‘목사님, 이건 무슨 이런 복음전파가 다 있습니까? 제가 무슨 복음을 전파했습니까?’라고 여러분들이 자책할 수도 있는 문제인데, 어쨌든 누구를 만나잖아요. 만날 때, 입을 하나도 안 떼도 이미 복음전파가 되도록 이미 하나님께서 조정을 해주셨습니다.
‘나, 내 인생 신났거든. 네 인생은 조졌거든’ 이런 겁니다. 내 인생이 신난다는 말은 내가 과거에 너처럼 살았거든. 그런데 정말 큰일 날 뻔했어. 그게 꼭 말로 남을 약 올리는 것이 아니고, 표정 자체가 그게 흘러나오게 되어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서 사도바울은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이야기했느냐 하면 ‘향기’라고 이야기했어요. 향기.
제주도 가서 수국을 봤는데 수국이 별로 안 좋다는 거예요. 누구 말에 의하면. 왜? 향기가 없다는 겁니다. 가까운 지인의 말인데 향기가 없어서 싫다는 거예요. 그 말을 들으면서 천국을 생각해봤습니다. 도대체 천국은 어떤 세상이냐. 향기가 진동하는 세계입니다. 향수가 아니고 향기가. 향기 자체가 온 세상을 덮는 세계가 바로 천국입니다.
그걸 미리 맛보기로 보여주는 곳이 솔로몬의 아가서입니다. 아가서의 두 남녀가 원없이 연애를 하는데, 온 동네에 망둥이처럼 뛰어다니는 들판 곳곳이 향기를 따라서 같이 손잡고 뛰어다닙니다. 향기가 나는 곳에. 너는 나에게 향기가 나고 나는 너에게 향기가 나고, 그리고 우리 주변에 있는 꽃들과 온 산천에서 꿀송이 꽃송이 향기가 넘쳐나는구나.
환경도 향기롭고, 너의 몸과 나의 몸도 향기가 나고, 악취는 어디에도 없는 곳, 그곳에 살고 싶지 않습니까? 정말 그곳에 산다면 인생 실패 안 했다고 장담할 수 있죠. 하나님께서는 천국을 이미 마련해두셨습니다. 누가 거기를 들여보내느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님의 결정에 달렸습니다. 그럼 손들면서 ‘저 지옥 안 가고 천국 가겠습니다’라고 하면 주님이 바로 이야기하시죠. “손 내려~내리세요~네 맘대로 가는 게 아닙니다”
그럼 우리는 이야기하죠. ‘누가 가죠? 어떻게 갑니까?’ 교회를 오십 년 다녀도 또 묻고 싶고 또 묻고 싶은 이야기. 어떻게 갑니까? 뭘 하면 갈 수 있습니까? 수천 번 이야기해도 이상하게 그건 자주 잊어버려요. 그래서 오늘 이 시간 그 답변을 다시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어떻게 그 향기 나는 천국에 갑니까? 어떤 식으로 가면 됩니까? 제가 뭘 하면 됩니까?’라고 하신다면 그건 바로 주님의 슬픈 표정을 발견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그 슬픈 표정을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하여튼 천국은 포기하기 싫어서 그런 질문이 나올 수 있겠죠. 어디서 그런 슬픈 표정을 찾을 수 있느냐면 오늘 본문에도 물론 나옵니다. “내가 산들을 위하여 곡하며 부르짖으며 광야 목장을 위하여 슬퍼하나니”라고 성경 말씀은 나오거든요. 그러나 아무리 성경에 코를 박아봐야 여기서 슬픈 게 안 나와요.
물론 이 슬픔이 향기가 되는데, 그렇다면 이 슬픔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느냐. 이 슬픔을 찾기 전에 약간은 난해한 이야기를 먼저 드리겠습니다. 꽃병이 있다고 치면 만약 꽃병이 눈에 들어온다면 그건 물리적으로 잘못된 거예요. 꽃병이 눈에 들어온 것이 아니고 빛이 먼저 그 꽃병에 닿아야 해요. 만약 전구 다 끄고, 햇빛, 달빛, 이런 거 하나도 없으면 꽃병이 있는지 뭐가 있는지 잘 몰라요.
어떤 존재가 확인된다는 것은, 그리고 누가 뭔가를 본다는 것은, 먼저 무엇이 있느냐 하면 빛이 먼저 있고, 그 빛이 꽃병에 닿아야 해요. 그러면 빛이 꽃병에 닿기만 하면 우리 눈에 보이느냐? 아닙니다. 꽃병에 닿은 그 빛이 꽃병을 반사해서 나오는 그 내용물을 빛이 우리 눈까지 전달해야 해요. 빛으로 와서 빛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와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그렇게 온 빛을 보면 내가 꽃병을 보는 겁니까? 아닙니다. 하나 남았습니다. 내 눈에 들어온 그 빛이 꽃병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그 빛이 어디까지 와야 하느냐 하면 우리 뇌 안까지 빛이 작용하고 우리 안구(눈)에 힘을 줘야 해요. 그러면 꽃병이 있는 것이 아니고 뭐가 있느냐 하면 빛이 있는 거예요.
실제로 빛으로 시작해서, 빛으로 말미암아, 빛이 들어와서 우리가 ‘꽃병이 있네, 뭐가 있네’라고 하지만 그 말을 정확하게 하면 ‘빛이 빛 되게 하기 위한 것들이 있네’라고 되는 겁니다. 제가 말을 일부러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는 것”(롬 11:36) 이것은 성경 말씀이 아니고 실재도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복잡하게 하지 말고 그냥 ‘꽃병 있네’라고 하면 끝날 문제가 아니냐. ‘꽃병 있네’라고 하게 되면 여기서 뭐가 날아가느냐 하면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내가 꽃병을 본 것이 되어버려요. 그렇게 되면 뭐가 빠지느냐 하면 내가 꽃병을 봤으니까, 내가 진리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내가 그 꽃병이라는 환상을 보고, 꽃병도 아닌 것을 꽃병이라고 왜곡시키는 것을 평가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누락시켜버려요.
우리는 빛이 아니거든요. 저 꽃병도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도 빛에 대한 대상이 되는 겁니다. 심판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성경에서 슬프다 하는 것은 하나님이 슬픈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그런데 지금 우리는 하나도 안 슬퍼요. 즐겁고 재미있어요. 그러니까 이 사이가, 간격이 벌어진 거예요. 성경에서 준비한 그 기쁜 소식이 우리에게 턱없이 전달이 안 되는 겁니다.
우리는 나 잘난 맛에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 본문의 내용은 뭐냐. 주께서 새로이 이스라엘에게 시작점이 여호와라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시킵니다. 이스라엘을 부수는 것은 적들이 아니고 나(주님)였다는 겁니다. 내가 너를 부술 때 내 나라가 부서진다고 화낼 것이 아니라 왜 부수는지 그 감정을 너희들이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왜 너희를 부수느냐. 그건 슬퍼서 부순다는 겁니다. 슬픔이라는 것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의 출발이 슬픔에서 출발했으면 우리에게 도달해서 지금의 나는 안 슬픈데 슬픔이 와서 그 슬픔이 나로 주님께 이끌어가게 되면 향기 나는 천국의 나라에 살 수가 있습니다. 논리는 쉬운데, 슬프지도 않은데 무슨 수로 슬프냐는 그 문제가 등장하는 겁니다. 그 문제가 남아있죠.
그때는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슬퍼하는데 우리는 왜 안 슬퍼하느냐. 도대체 하나님의 슬픔을 가로막는 장애요소가 어떤 것이 있느냐를 살펴보시면 되는 겁니다. 좀 복잡해요. 하도 우리가 말썽쟁이라서 좀 복잡해요. 그것은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의 출발이 “난 네가 참 슬프다. 너는 내 피 아니면 지금 지옥이야”라는 그런 슬픈 안목을 가지고 우리를 보시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우리는 욕심이 많아서 그런지 이건 누가 나보고 뭐라 하기 전에는 무조건 행복을 향해 전진, 무조건 행복의 나라로, 계속 행복으로 일보, 일보 전진해나가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행복을 주시옵소서’라고 새벽기도하고, 기도하고, 난리도 아니죠. 우리 주님께서 가만 계실 주님이 아니죠. 네가 행복을 추구할 쨉이 되느냐고 누가복음 6장 24~26절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라는 말씀은 우리교회와 전혀 상관없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기뻐합니다. 누가 칭찬하는 사람 있던가요?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안심이 좀 됩니다만, 그 앞에 꺼, 행복을 추구하고, 기쁨을 추구하고, 부유함을 추구한다는 그 점에서는 딱 예외 없이 주어집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시비 거는 것처럼 우리가 행복한 거, 우리가 웃는 거, 우리가 기뻐하는 거, 부유한 거, 우리가 남에게 칭찬받는 거, 왜 여기에 대해서 시기하시고, 질투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다른 칭찬이 준비되어있고, 다른 기쁨이 준비되어있고, 다른 부유함이 준비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엉뚱한 것이 최종적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지금의 만족함에서 멈추면 안 된다는 겁니다. 멈추지 말고 어디로 가느냐. 십자가 보이는 것까지, “아버지여,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그 음성이 들리고 그 모습이 보일 때까지 우리 목자 되신 주님이 우리를 강제로 질질 끌어가는 중입니다.
끌려가는 도중에 잠깐 졸 수도 있고, 꾸벅거릴 수도 있겠지만 주님의 강제로 이끄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또 궁금한 것이 있어요. 강제로 이끌어 갈 때, 진짜 강제로 이끌어가고 있는지, 아니면 주께서 ‘너, 안돼~’라고 내팽개쳐버렸는지, 어떻게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구분되느냐 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주께서 복음을 전파할 때 어떤 낯선 환경을 맞이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복음과 무관한 사람이면 언제든지 슬퍼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해놓고 거기서 대조적으로 복음과 이 슬픈 환경을 대비시키게 만들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6절에 보면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니까 직장 다니는 사람같으면 이런 것을 실습하기 참 좋은 거예요. 아침에 출근해서 김 과장, 이 과장, 최 과장 만나면 김 이리, 최 이리, 전부 다 나를 보내는 것이 이리들 가운데 보내는 거예요.
그때는 ‘하하하’ 웃고, 행복하고, 돈 자랑하고, 뭐 다른 자랑질 할 때, 속으로 ‘화가 있을지어다’라고 성경 말씀 적용하기 딱이죠. 그 환경을 누가 조성시켜서 취직시켰는가. 주께서 취직시켰습니다. 이리 가운데 취직하라. 또 장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오는 사람마다 이리예요. ‘어서 오세요~’라고 이리를 맞이하죠. 전부 다 이리들 오는 거예요. 전부 다 그 사람들은 멈추지 않는 행복의 행진을 향하여 오는 사람들이에요. 슬프죠.
갑자기 주님의 슬픔이 와닿게 하기 위해서 특별히 주께서 성도들에게 특별히 이리떼가 보이는 환경을 준 거예요. 그러면 그들이 이리라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주님의 빛이 이리의 말씀이 그들에게 빛으로 도달해서 이리로 돌아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얼마나 위험한 동네에 우리가 사는 겁니까. 슬퍼하려면 얼마든지 슬퍼할 수밖에 없어요. 왜? 그들에게 대처할 힘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에.
하지만 너희들은 도리어 기뻐하라. 어떻게 기뻐하느냐. 마태복음 10장 17~20절에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누가복음 11장에 이런 말씀 있지요. 너희들이 뭘 자꾸 달라고 하지 말라고. 주께서 주시는 것은 성령이라고. 기쁨의 성령을 주시는 거예요. 어디에서? 슬픔의 환경 속에서. 성령 없이는 슬퍼할 수밖에 없고, 낙담할 수밖에 없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가운데서 주님은 “내가 그런 환경을 만들었다. 왜? 그게 싫어?” “좋아요” “그렇지~”라고 되어야죠.
‘과장 때문에 못 살겠어요. 사표 내고 싶어요’라고 하지 마세요. 이리가 없으면 내가 이리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없는 게 좋으면 산속에서 살아야 해요. 산속에 사는 것은 내 기쁨을 내가 챙기는 겁니다. 복음의 기쁨으로 사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편하려고 사는 거예요. 이거는 주님의 슬픔이 와닿는 것이 아니고 내 슬픔이 나를 산속으로 밀어 넣은 거예요. 도피하듯이.
어떤 환경도 뱀이 우글거리는 소굴입니다. 괜한 기대를 안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심지어 우리 가정도 마찬가지예요. 자식들에게, 특히 손자 손녀에게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본성이 점점더 드러나요. 전에 노래 불렀잖아요. ‘뱀 세 마리가~ 한 집에 있어~아빠 뱀~엄마 뱀~아기뱀~’ 세상은 주님이 다녀가면서 이 세상은 어느 하나 마음 둘 곳 없음이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슬픔의 공간입니다. 하지만 아까 처음에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슬픔의 공간이라고 마냥 낙담할 것이 아니고, 그 현장에 누가 계시는가, 복음이 있어요. 복음은 그때 보이는 겁니다. 세상 것에 잔뜩 기대걸 때, 행복을 만끽할 때, 절대로 복음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끝으로, 그렇다면 왜 슬퍼야 구원되느냐. 왜 의도적으로 슬픈 인식으로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시편 45편 7절에 보면 나옵니다. 조금 어렵습니다.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 여기 보면 동류보다 우열하게, 뛰어나게, 격차나게, 차원이 다르게, 세상이 감히 넘어오지 못하는 다른 공간을 우리 주님이 형성시킨 거예요.
복음이라는 것이 말이 아니라, 어떤 특정 공간, 없던 공간이 새로 발견되는 것이 복음의 세계입니다. 하늘나라가 네 안에 있다는 겁니다. 네 안에 하늘나라가 있다. 마치 캡슐처럼. 남은 느끼지 못 하지만 성도는 느낍니다. 왜? 캡술 바깥의 세계가 주님 보시기에, 그리고 주님의 복음의 빛을 받는 우리 보기에 슬퍼도 너무 슬프고, 실수를 해도 너무 큰 실수들을 하면서, 세상을 질주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무 큰 실수들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건 하나의 팁인데요. 사람 만날 때 남에게 기죽지 않는 방법은 ‘너 실수하고 있는 거야’라고 하시면 됩니다. 속으로만 하세요. ‘너, 인생 완전히 버렸어’라는 그런 단호함으로 누구든지 대하시 기 바랍니다. 대통령을 만나든지, 김정은을 만나도. 프리고진을 만나거나 푸틴을 만나도 그건 뭐, 아무것도 아닙니다.
부자를 만나도, ‘너 아무 큰 실수 하고 있는 거야’라고 하시면 됩니다. 앞으로 재벌을 만나거든 액자 하나 해주세요. ‘너, 실수하고 있는 거야’라고 써서. ‘너 인생 실패야. 그쪽 아니야’ 돈이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 돈은 내가 가는 방향이 아님을 그들을 통해서 교훈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슬퍼했던 이 세상에 우리가 그대로 복음의 계승자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슬퍼하고 있는지, 무엇이 문제였던지, 이제는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