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으로서의 성도
2023년 6월 4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8:18-22
(8:18)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나의 중심이 번뇌하도다
(8:19)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 왕이 그 중에 계시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이르기를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르시기를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케 하였는고 하시니
(8:20)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
(8:21)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8:22)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찜인고
치료가 되지 않는 이스라엘 상황을 보고 선지자는 탄식입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 왕이 그 중에 계시지 아니한가” 우리는 선지자의 의식이 어디까지나 구약의 한계에 머물러 있음을 생각해봅시다. 즉 구약적 상황에서의 치료와 신약적 상황에서의 치료가 다르다는 점을 선지자는 모르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평면적 구조로 세상을 봅니다. 여호와께서는 시온에 계시지만 그 외 다른 지역에서 계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신약의 입장에서 과연 그러한가요? 마태복음 18:18-20에 보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내 이름’이 도대체 어떤 기능을 하기에 평면적 구조에서 입체적 구조로 바뀌는 것일까요?
일단 인간은 자기 치료에 대해서 관여하거나 개입될 자격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기대하는 정답은 정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점을 모릅니다. 알 길이 없습니다. 인간은 정답 자체를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인간들이 고대하는 문제 해결은 기껏 입체적 세계가 아니라 평면적 세계의 인식에 머물고 맙니다.
예를 들면, 아파트 입주를 끝내놓고 다시 3년 전, 아직 아파트 짓기 전의 홍보 광고지를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광고지를 보면서 환상에 잠겨 있던 자기 자기를 보세요. 그때 꿈꾸었던 현실과 지금 아파트 들어와서 경험하는 현실이 딴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아파트 회사만의 잘못일까요? 아닙니다.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환상을 거두어드릴 줄을 모릅니다. 평면적 세계관에서 신약의 입체적 세계관의 전환에서 하나님에게 ‘치료’라는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즉 “너는 고침을 받고 나음을 입지 아니하면 그냥 전에 네가 꿈꾸는 환상 안에 머물러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쪽에서 먼저 ‘답’을 성경을 통해서 제시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에게 무엇이 문제 인줄 모르고 그냥 그 답이라는 것을 자기 것으로 삼아 자기 치료에 나섭니다. 과연 인간은 치료가 될까요? 평면적 의식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마태복음 8:21-22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즉 예수님께서는 장례를 치르고자 하는 자식을 죽은 아버지와 더불어 ‘죽은 자’로 분류하고 묶습니다. 이것이 신약에 와서 알려지는 입체적 의식구조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발언은 누가 감히 제대로 알아 들을 수 있습니까? 즉 신약에 와서 과연 입체적 구조가 형성되었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제대로 하나님의 치료가 가미된 상황이라고 한다면 실제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할 겁니다. 어떤 변화가 발생되는 겁니까?
우선 하나님께서 약속된 자기 백성을 치료하는 방법부터 보겠습니다. 시편 94:11-13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여호와여 주의 징벌을 당하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에 벗어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시 94:11-13)
즉 인간은 허무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이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은 허무한 시도일 뿐입니다. 그 이유는 평소에 본인이 본인을 정립해 왔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파악한 자아상은 진정한 자아상이 아닙니다. 타인이 알려준 자아상도 진정한 자아상이 아닙니다.
남들이 아무리 진정성 있게 알려주어도 인간 내부에서 나름대로 그 타인의 평가에 대해서 편집하게 마련입니다. 그저 내가 원하는 자아상을 인간은 포기하지 않고 써먹습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 자체가 허망한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복이 들어갑니다. 그런 인간은 징벌하십니다. 법으로 교훈하십니다.
이게 바로 복받은 겁니다. 문제는 이 징벌과 교훈은 본인 자체에 대해서 무지함을 말씀하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의 치료에 있어 인간이 끼어들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채찍에 맞아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되어 있지만 우리 자신을 실감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우리와 주님 사이에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의사소통을 막을까요? 고린도전서 7:22-23에 보면,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 7:22-23)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 우리 자신이 그들의 종으로 여전히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성경에서는 우리가 치료가 되었다는데 실제 생활에서는 여전히 세상 사람의 종으로 살고 그들을 의식하며 삽니다. 그래서 여기서 좀더 분명하게 세상의 생리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13을 보겠습니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딤후 3:13) 즉 이 세상은 정답을 모릅니다. 소통되는 것들이 모두 속임수들입니다. ‘치료된 성도라는 ’답‘이 이미 세상에 등장했음을 모릅니다. 성도는 벌써 주님과 더불어 입체적 세계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3:17-19에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7-19)
이 입체 속에서 우리 성도는 또다시 정답을 찾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치료성이 담겨 있는 존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4강-예레미야 8장 18~22절(정답으로서 성도)230604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8장 13~22절입니다. 구약성경 1064페이지입니다.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나의 중심이 번뇌하도다, 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 왕이 그 중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르시기를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케 하였는고 하시니,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찜인고”
여기 본문에 보게 되면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라는 말이 나옵니다. 평면적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 지구상에 많은 곳이 있지만, 특정 지점에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있는 모습. 이 말은 시온, 예루살렘이라는 곳에 여호와 계시면 다른 나라에는 여호와가 계시지 않는 구조, 이게 입체구조가 아니고 평면구조입니다.
평면구조라는 것은 여름방학 끝나고 학교에서 옛날 국민학교 아동들에게 방학 숙제를 낼 때 곤충채집을 하게 하죠. 그러면 어떤 정직한 아이들은 산으로 들로 다니면서 매미나 잠자리 잡아서 침으로 꽂아서 잘 정돈된 그렇게 성의를 다한 그런 방학 숙제를 여러분들도 국민학교 때 다들 그렇게 했을 거예요. 다~~들. 그런데 어떤 아이들은 문방구에 가서 돈 주고 사죠.
하늘에 날아다니는 매미나 곤충을 평면적, 수평적으로 눈에 보이도록 곽 안에 갇히게 만드는 이런 의식, 그게 바로 인간이 처한 구조가 평면적 구조이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아동들에게 그런 숙제를 낸 거예요. ‘네 눈에 보이게 해라. 곤충들의 생태가 어떠하고, 곤충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를 이 땅에 수평적으로 살아가는, 평면적으로 살아가는 우리 눈에 자연물들이 어떠한지 보이게 해라’라는 이게 내 중심이죠.
내가 뭔가를 관찰해서 어떤 원칙을 뽑아내려는 이 말이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시하고 문제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입체적으로 본다는 생각을 구약에 있는 선지자들도 아직 몰랐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19절에 “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 땅에 포로 잡혀갔어요. 그런데 거기에는 뭐가 없다?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한 곳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한 곳이 성립될까? 마태복음에는 그렇게 되어있질 않아요. 마태복음 18장 20절에는 그렇게 되어있질 않아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나와 있거든요. 19절에도 보면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이건 인간들이 인식하고 있는 평면구조에서는 용납 안 됩니다. 용납될 수가 없죠.
그럼 이 말은 주께서 일하실 때 인간이 납득될 수 있는 구조에 주께서 동의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걸 피해 가는 방식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은 자기 뜻을 펼쳐냈다는 그런 뜻이에요. 포착할 수 없는 방식으로 주께서는 말씀을 주신 거예요. 포착할 수 없는 방식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방식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네가(너) 문제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파악하고자 하는 내 자체부터 이 구조가 기존구조로 버티고 있으니까 그러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구약을 지나고 신약을 오면서 하나님의 조치는 이겁니다. 치료. 너 병들었으니까 내가 낫게 해줘야 한다. 네가 나아야 비로소 이 하늘나라 계시가 네가 이해 간다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가 어떤 점에서 병들었는지를 신약적 안목에서 구체적으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어느 인간 할 거 없이 모든 인간 이 상식적으로 편하게 인식하고 있는 이 세상 구조를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한 제자의 입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21~22절에 보면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소통 안 되지요. 대화 안 됩니다. 예수님이 갖고 있는 말씀의 구조와 흔하고 흔한 인간들이 놓여 있는 구조와 전혀 대화 안 됩니다. 될 수가 없죠. 어떻게 자식이 되어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는 것을 가지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아버지는 죽었지만, 자식은 살아있잖아요. 살아있는 자가 죽은 자의 장례를 치르는 것이 상식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살아있다고 여기는 자를 어디에다 한 묶음으로 하느냐 하면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그러니까 아주 유명한 사람 장례식 치를 때 장례식장에 꽃들(화환) 쫙 놓여 있잖아요. 특히 유명한 사람들, 국회의원들은 꽃이 많이 있잖아요. 꽃에 보면 ‘창일기업’ 이런 식으로 회사 이름 나오는데 거기에다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조문한다’라고 죽은 자로 쓰란 말이죠.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조문객들 오면 ‘아이고, 아이고~(웃으면서)’라고 할 때 받는 상주도 죽은 자고, 죽은 자가 죽은 자 모셔놓고, 죽은 자가 넙죽 절하고, 죽은 자가 국화 놓고 절하면서 봉투 상자에 집어넣고 국밥 한 그릇 먹고 집에 가죠. 죽은 자들의 죽음 잔치.
이런 식으로 할 때 주님께서 언급하시는 것은 “그게 바로 네가 나음을 입어야 할 이유다”라는 겁니다. 인간들이 아는 상식은 평면적인데 주님께서는 중첩되어 계신단 말이죠. 다른 세계가 엎드러져 있어요. 포개져 있는 거죠. 포개져 있는데 폴짝폴짝 뛴다고 그 나라를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죠. 그래서 주님의 방식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인간이 어떤 질문을 해봐야 주께서는 안 듣습니다.
우리가 어떤 기도를 해도 주님은 고맙게도 우리 기도를 일체 듣지 않습니다. 참 감사하죠. 왜냐 하면 우리의 기도는 나의 노동이 그 안에 포함되어있기 때문에 안 받아요. 그러면 주기도문은 왜 하라고 하느냐. 주기도문은 제자들이나 우리들이 성취하는 것이 아니에요. 주기도문의 내용인 “하늘에 계시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부터 마지막까지는 예수님 자기의 노동이에요. 본인만이 해내시는 겁니다.
더 극단적으로 해서 하나님이 주신 그 “나음을 입었다”라는 그 결과, 이 사람은 나음을 입을 대상인데 과연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치료가 되었다는 그 이후의 상태가 어떤 상태이냐. 신약에 있는 내용을 쉽게 함축해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오직 단 한 사람만이 조용필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조용팔도 있고, 조영필도 있어요. 전부 다 조용필이 흉내 내는 가수들 아닙니까? 조용팔도 조영필도 모두 유사 조용필입니다.
조용팔과 조영필은 결코 치료된 게 아닙니다. 치료란 예수님 빼놓고서는 가짜임을 일상 속에서 확인하는 삶을 두고 말합니다. 낮에도 이야기했지만 사람은 자꾸 유사성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은 예수님밖에 없는데 본인이 예수님을 따라잡고 흉내 낼 수 있다고 시도하는 이것이 병든 거예요. 치료대상이에요. 이건 그냥 미친 거죠. 될 수도 없는데 이건 그냥 미친 인간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평면적 구조에 사는 이 구약, 예레미야도 그렇고 이스라엘을 주께서는 입체적 구조로 바꾸는 작업을 하시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로 하여금 평면적 구조는 주께서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그들이 먼저 분명히 느껴야 해요.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아이가 있는데 자기는 아버지를 닮았다고 자부했어요. 거울을 보면서 그렇게 자부했어요.
그런데 지나가는 아주머니께서 ‘아이고, 자는 엄마를 쏙 빼닮았네’라고 이야기하거든요. 왜 내가 보는 나는 정답이 아닌가. 인간이 거울로 자기를 보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한 번도 자기를 본 적이 없어요. 왜냐 하면 거울을 보면 오른쪽 왼쪽 반대로 바뀌기 때문에 내 모습 아니에요. 거울 보면서 평생 속는 거예요. 그냥 유사성이죠. 그걸 거울 단계라고 합니다.
인간은 내 모습도 모르면서 유사성으로 그게 자아라고 굳히기 들어가는 거예요. 거울 단계를 상상계라고 하는데 인간은 자꾸 자기에 대해서 다른 자기를 상상하는데 그 상상에 대해서 그다음부터는 수집에 들어가죠. 남들이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모으는데 그것도 온전치 않아요. 왜냐 하면 내 쪽에서 편집 들어갑니다. 바른 소리 해도 듣지 않아요. 나에게 기분 좋은 소리만 딱딱 들어서 그걸 나라고 우기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치료방법은 순서가 어떻게 되느냐. 치료방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답을 내려요. 답을 내리면 사람들은 그걸 답이라고 좋다고 넙죽 받습니다. ‘하여튼, 성경 말씀은 너무너무 좋아. 내가 궁금했던 것에 대한 답이 있어’라고 그 답을 자기에게 해당한다고 손대면 주님께서 “그 손 떼라. 네가 그걸 답이라고 할 그런 입장이 안 돼. 너는 너 자신도 모르면서 무슨 그것을 답이라고 보느냐?”라고 하시죠.
또 하나의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아파트 계약하고 입주하고 난 뒤에, 입주하기까지 3년 정도 걸린다고 치고, 입주하고 난 뒤에 3년 전에 구입할 때 보던 아파트 광고지 한 번 보세요. 그게 같은지 다른지. 완전 다르죠. 2층이라고 했는데 반지하로 되어있고, 조감도 그림은 심지어 석양에 비친 유리창까지 사진으로 나오면서 ‘세상에 이런 멋진 세계가 다 있다니, 과연 저 아파트가 내 아파트란 말인가?’라고 스스로 감동해서 들어가 보는데 정말...
수요 말씀에서 이야기한 거 또 한 번 언급하면 그 광고에서 주변에 축사 있다는 것을 빼고 나온 거예요. 역세권인지 알았더니 똥세권이었던 거죠. 거기에 대해 입주한 사람이 뭐라 말하면 안 돼요. 왜냐 하면 본인이 일방적으로 정답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께서 주신 정답은 그 출발점이 유일한 인간인 예수님부터 출발했던 거예요. 예수님이 자기 맹세에, 자기 정답을, 자기가 회수하는 경로가 성경책입니다.
거기에 우리가 왜 낍니까? 성경에 정답 없습니다. 우리가 낫는다고요? 주님이 왜 우리를 치료해야 해요? 말도 안 됩니다. 지금 예레미야가 말하기를 오늘 본문 19절에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라고 하는데 여호와께서 시온에만 계시면 안 돼요. 이건 구원이 안 돼요. 그런데 지금 예레미야는 걱정하고 있다고요. 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지금 이건 일시적으로 입체적이 아니고 지평적인, 그냥 평면적인 구조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인간이 문제 있음을 유일하게 아는 그 망해버린 이스라엘 민족을, 유일한 질문이 시작되는 개시지점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치료해줄게”라고 하시면 ‘나는 아픈 데가 없는데’라고 하면 “아니야, 무조건 치료해줄게”라고 하시죠.
‘도대체 어디를 치료한다는 거지?’ 그 치료방법을 인간은 모릅니다. 알 수가 없어요. 왜? 주께서 우리 자리에 들어오셔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자꾸 ‘입체적, 입체적’이라고 하는데 그 입체적인 마지막 모습을 미리 에베소서 3장 18~19절에서 제가 미리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여기 네 가지 들어가죠. 넓이, 길이, 높이, 깊이, 이 네 가지를 합쳐버리면 뭐가 되느냐 하면 입체적인 공간이 됩니다. 그 입체적인 공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요. 이것과 오늘 본문 예레미야 8장 19절에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 왕이 그 중에 계시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왜 내 딸은 남의 나라에서 고생하느냔 말이죠.
지금 예레미야는 구약이기 때문에 얕아도 너무 얕아요. 심지어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은 마지막 선지자라고 이야기하면서 하늘나라에 와서는 천국의 어린아이라도 세례요한보다 낫다고 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수평에서 입체로 보는 거예요. 그렇다면 입체적으로 주님이 만든 공간 안에, 일종의 캡슐이죠, 거대한 돔인 캡슐 안에서 맘껏 자유를 누리는 그 상태가 치료된 상태예요. 입체 안에서 치료된 상태예요.
그러면 이 수평에서 입체까지 어떤 경로가 주입되었기에 이것이 치료될 수 있는가. 인간들은 그걸 요청한 적이 없죠. 인간은 자기 자신도 모르면서 무슨 치료가 되겠습니까. 알 수 없죠. 그 경로가 어떤 경로로 실시되는지, 그 경로에 대해서 말라기에 나오는데 그 전에 먼저 말씀드릴 것은 네덜란드에서 척추에 이상이 생겨 걷지도 못하는 사람을 네덜란드 의학자가 뇌와 척추와 통신을 연결해서 앉은뱅이가 일어났어요.
사도행전 3장에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과 같아요. 그런데 주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고 인공지능으로 발달한 의학 기구로 일어난 거예요. 제가 왜 그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이건 치료가 아닙니다. 입체적인 치료가 아니기 때문에, 입체적으로 공간 자체가, 새로운 공간을 발견하는 것이 치료인데 이건 자기가 불편하다가 자신이 건강하게 된 것이 치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치료하기 전에 어떻게 먼저 해야 하는가. 시편 94편 11~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여호와여 주의 징벌을 당하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주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징벌대상이 되고 망하는 대상으로 이것을 잡았을 때, 너희들은 이미 복 받은 줄 알라는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네가 허무하다는 사실을 알려줄 때 너는 새로운 입체적 공간에 들어갈 대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생각이 허무하고, 교훈을 받아 마땅하고, 징벌받아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말라기 4장 2~3절에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모든 악한 인간들을 징벌할 거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면 이스라엘도 악하고, 세상 나라도 악하고, 모조리 다 악하니까 주께서 모조리 다 짓밟아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치료 과정 속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이사야 53장 5절에 보면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나오는데 의사가 직접 환자가 되어서 뛰어들게 되어있어요. 5절에 다시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되어있어요. 이건 너무나 유명한 말씀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너무 유명해서 식상이 될 수 있습니다. ‘주께서 그렇게 한 것을 제가 믿습니다. 그런데 뭐 어쩌라고요?’라는 식으로 나오죠. ‘예, 십자가를 내가 모를 리가 있습니까. 압니다. 그분의 찔림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죠’ 그런데 정작 나음을 입었다는 어떤 변화가 나에게 일어나야 하는데 주님 쪽에서 소식이 오기를 네가 나음을 입었다고 하고 나는 나음이 뭔지를 모르고 있고 이건 통신이 두절 되었거나 뭔가 잘못되었잖아요.
그러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고린도전서 7장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바로 이 대목입니다.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이게 성도라는 자에게 주어지는 충격적인 변화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에, 그것도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옵니까? “네가 수평적인 이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기죽을 필요 없이, 마음 놓고 너의 사는 공간에서 지내게 되었다”라는 이것이 치료입니다.
그러면 치료된 모습의 전형적인 모델이 뭐냐. 바로 예수님이 곧 자유자 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관계인 입체적 공간 속에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보시기에 인간들이 까부는 것이 얼마나 같잖겠습니까. 참, 놀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바르게 산다고 우쭐대는 거 보면 참 한심스럽죠. 베드로가 “예수님, 죽으면 안 됩니다”라고 하면 “베드로야, 내가 죽어서 다시 살아나야 해”
사람의 종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내가 답변에서 산출되고 생산된 답 자체로, 주님의 답변으로 이 땅에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되고 싶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 던진 질문을 주님이 만든 그 답이 ‘바로 여기 있네’라는 그 대상이 바로 우리 자신이어야 해요. 너는 주님께서 생산한 하나의 정답으로 이 땅에 남겨두신 거예요. 그러니까 아까 말씀드린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만든 그 충만한 속에서, 주님의 그 충만함 속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거예요. 구애받지 않고 그 충만함을 온몸으로 만끽하면서.
이걸 여러분이 아신다고 치고, 여러분이 집에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분명히 오후 2시에 설교 들었는 데 가는 도중에 다 잊어버렸어요. ‘가만히 있어 봐. 나 성도 맞아? 성도는 어떻게 사는데?’라고 했을 때 그 방법을 또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남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인간이 인간의 종으로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디모데전서 3장 13절에 보면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이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은 총체적으로 속아가는 거예요. 총체적으로 속아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한다’ 이거 거짓말이에요. ‘중국은 대만을 삼키려고 자기 영토라고 한다’ 이거 거짓말입니다. ‘독도는 한국 땅이다’ 아니에요. 거짓말입니다.
전부 다 사기예요. 왜? 정답도 모르는 아파트 업자들의 광고지이기 때문에 그래요. 서로 속기 위해서 전쟁하고 서로 속기 위해서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하는 거예요. 아르헨티나와 나이지리아가 축구 하는데 생뚱 맞는 결과가 나왔어요. 나이지리아가 아르헨티나를 예상 밖으로 이겼거든요. 이기고 나서 카메라가 비추는데 한 선수가 상체를 벗자 안에 “JEJUS LOVES US”라고 쓰여있어요. 여러분은 그런 글 안 보이죠? 저는 그런 것만 보여요.
‘예수는 우리를 사랑한다’라고 나이지리아 선수 하나가 상체에 미리 계획적으로 해놓은 거예요. 이기면 이거 벗고 카메라 왔을 때 보여주려고 한 거예요. 그 선수를 좋게 생각하면 입체적이에요. 지금 우리가 아르헨티나를 이기거나 또는 진다고 할지라도 이기고 지고는 정답을 모르는 인간들이 벌이고 있고 나불대고 있는 사기입니다. 그게 속이는 거예요.
왜 축구에 속고 속습니까? 왜 속아요. 다음 경기가 언제더라. 정말 궁금하네요. 누가 4강에 올라갈지. 그런데 바로 그거 궁금할 때 그게 바로 정답을 훼손하는 게 되는 겁니다. 정답은 입체적이에요. 예수님처럼 구애받지 않고 살아가는 거. 이게 정답입니다. 이미 치료가 된 상태예요. 이 치료는 우리가 지금 설교하고 듣고 있을 때는 기분 좋아하지만, 다시 집에 돌아가면 또 마찬가지고 제발 누가 좀 속여달라고 환장한 자가 우리들이거든요.
나 좀 기쁘게 해달라고. 우리나라 4강 올라가야 하는데. 이게 뭐냐 하면 그 속임수가 있어 줘야 우리는 징벌을 받고, 왜 주님께서는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그 채찍이 왜 중요한지를 앞으로 살아가는 우리 인생 가운데서 매일같이 되풀이해서 반복적으로 기뻐하시고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거짓이 아닌 세상일이 없고, 세상 자체가 정답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행복해지려고, 기뻐 보려고 노력하는 그 세계 속에서 십자가를 알아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그 십자가 속에서, 다 이루심이 뭔가를 아는 상태에서 주님의 주신 은혜를 만끽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