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해석자

아빠와 함께 2023. 6. 25. 20:09

해석자 

2023년 6월 25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9:7-9


(9:7)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내 딸 백성을 어떻게 처치할꼬 그들을 녹이고 연단하리라
(9:8) 그들의 혀는 죽이는 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중심에는 해를 도모하는도다
(9:9) 내가 이 일들을 인하여 그들에게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수하지 않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조치와 처리는 그 자체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대한 해석입니다. 이는 인간이 말씀에 대해서 해석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구원될 수없고 자신의 죄가 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성경 해석으로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이스라엘 필히 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 신세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그 모든 피조물 속에서 모든 피조물이 필히 망해야만 하는 속성을 담아서 창조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천지창조에 예수님의 개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능력 속에 죄사함의 능력도 담겨 있고 심판하시는 능력도 내재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알게 되는 이 사실을 이스라엘은 미리 알 리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궁금증만 계속 내부적으로 올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즉 하나님 말씀을 지킬 때에 과연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것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니면 그저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말씀이 어떻게 분간하느냐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겁니다.

신명기 18:21-2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하나님 말씀과 관련해서 인간에게는 그 어떤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이래도 저래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스스로 해석를 내리고 성취하시는 식으로 자기 백성에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이런 취지에 신명기 13:1-3의 말씀에게 적용이 됩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신 13:1-3)

즉 하나님 말씀에 관해서 말씀에 중심에 놓여 있는 당사자조차 말씀 해석과 그 성취성에 대해서 미리 아는 바 없습니다. 예를 들면, 어린 요셉을 애굽에 팔아먹은 요셉의 형들이 나쁠까요 아니면 요셉을 이용한 애굽 사람들이 나쁠까요? 둘 다 요셉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아는 바 없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 늘 마음 준비가 되었다는 바로 이점이 구원의 장애요소가 됩니다. 올바른 해석자를 찾지만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올바른 해석자를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들이 바른 선택을 할 용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른 선택에 대해 집요함으로 야기된 예가 로마서 10:6-7에 나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인간들은 자신을 진리 해석자로 자처해서 자기 미래에 대해 결정을 내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내린 모든 결정은 항상 자신을 지옥으로 데려가게 됩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에서, 부자는 지옥가서는 어떤 결정을 아직 죽지 않고 있는 동생 5명에게 제시할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천국에 가있는 거지 나사로를 동생이 사는 세상을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옳은 결정을 할 수 있는 항목을 추가시키고 싶어 했습니다.

이는 곧 부자가 평소에 얼마나 반복해서 올바른 선택을 시도해 왔는지를 말해줍니다. 즉 인간은 자신이 내린 바른 선택으로 자신의 미래가 확정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구원은 그런 식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하나님 홀로 이루어나가면서 구원이 성립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마치 요셉의 임무 달성은 요셉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해서가 아닙니다. 말씀 스스로 요셉을 이용해서 성취하신 겁니다.

로마서 10장에서 천국에서 지옥이 존재는 그리스도를 하늘에게 지상에 끌어내리고, 그리스도를 지옥에서 지상으로 끌어올린다고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마음 속에서 말씀이 들어오므로서 비로소 구원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8-9)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선지자들은 복음 전파의 방해자로 등장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 어느 선지자도 예수님 홀로 죽으셔야 될 그 죽음을 대신할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세례요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 11:2-6)

즉 어떤 누구도 자신을 멀쩡한 자로 여기면 안된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자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므로서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죄사함의 능력에서만 제공됨을 드러냅니다. 마태복음 7:15에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복음의 가치에 자신의 가치를 곁들이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에 의해서 가짜로 들통납니다. “도무지 나는 너희들을 모르겠다”(마 7:23)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그 복음 앞에서 죄인임을 아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있는 창조와 죄사함의 능력이 예수님으로부터 왔음을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7강-예레미야 9장 7~9절(해석자)230625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9장 7~9절입니다. 구약성경 1064페이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내 딸 백성을 어떻게 처치할꼬 그들을 녹이고 연단하리라, 그들의 혀는 죽이는 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중심에는 해를 도모하는 도다, 내가 이 일들을 인하여 그들에게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수하지 않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지고 왜 율법이 인간세계에 하나의 단절하는 막으로 오셨는가를 확인하고 증명하시려고 합니다. 율법을 줬다는 것은 막혀있다는 것이죠. 하나님 쪽에서 인간에게 오는 것은 안 막혀있는데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막혀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추가적인 율법을 통해서 분명히 하십니다.

그럴 때 인간 쪽에서 불만이 뭐냐 하면 우리가 어떤 점에서 못나서 그것을 율법을 가지고 지켜서 구원받으려는 것이 완전히 차단되어 있느냐고 말하겠죠. 요즘 같으면 우리가 왜 성경공부 해서 구원 못 받느냐는 것과 같죠. 말씀 자체가 차단되어 있다는 것이 하나님 쪽에서 우리 인간을 굉장히 무시하는 태도에 대해서 우리가 화를 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이유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뜻은 이거예요. ‘화내지 말라. 왜? 죄 속에 길이 있기 때문에’ 죄가 무르익었다는 말은 그만큼 그 속에 진리도 같이, 구원의 길도 같이 무르익은 거예요. 하나님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들은 선악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악을 떨어내면 그 선함과 의가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나쁜 짓을 줄이고 나쁜 짓을 안 하게 되면 그만한 구원 받는데, 도움 되는 것이 오롯이 남아있고, 그 남아있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받아주시지 않겠는가 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생각을 우리도 갖고 있고 유대인도 갖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전체를 통해서, 미리 시범 조로 그들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한계가 뭐냐 하면 성경 말씀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한계입니다. 성경 말씀을 잘 몰라요. 그것은 신명기 18장에 보면 벌써 하나님에 의해 예언되어 있습니다. 21~22절 말씀을 보면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이렇게 나오는데 그 뒤쪽에 22절 말씀 모른다 치고요, 이 질문 자체가 이렇습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니면 사람 말인지 어떻게 그걸 분간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너희가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하나님께서 친절해요. 우리가 뭘 묻고 싶은지까지도 먼저 하나님께서 그것을 제시해주시는 이 친절함, 그럼에도 우리는 성경을 잘 안 보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질문을 해놓고 답변까지 친절하게 딱 붙여주십니다.

22절에 보면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찌니라”라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아, 인간이 어떤 말을 해도 어차피 그건 두려워할 말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왜? 엉터리니까.

인간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강의나, 어떤 설교를 해도, 그 사람이 말했다면 그건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통해서 이야기하는데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은 그 말씀까지 깡그리 무시해도 된다는 것인가. 신약에 오게 되면 그 점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 보면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아무리 정확하게 바르게 복음대로 이야기해도 네 마음속에 그 말씀이 들어오지 않거든, 그 말하는 자를 일체 두려워하지 말고, 겁낼 필요도 없고, 의식할 필요도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복음을 전할 때 인간을 포장지로 생각하고 사탕 알맹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알맹이로 우리에게 주신다는 뜻이에요. 얄밉죠. 사탕 알갱이만 쏙 빼먹고 껍데기는 가라는 말이에요.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누가 가리고 있느냐 하면 소위 말씀을 전한다는 권위자가 말씀을 가리는 식으로 하게 되면 결국 오늘 본문 말씀인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내 딸 백성을 어떻게 처치할꼬, 결국 내가 망하게 할 거야”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처럼 아주 철저하게 잘라내는 이유가 뭐냐. 그게 로마서 10장에 보면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참 어렵기도 하지만, 설명 들으면 참 쉬운 거예요. 로마서 10장 6~7절에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이게 무슨 말이에요. 도대체 이게. 우리가 뭘 어쨌다고. 언제 이런 질문을 했다고 답변이 먼저 우리에게 등장합니까? 이것은 예수그리스도를 인간들이, 그것도 현장에서 예수님을 본 인간들이 내린 결론이 있어요. 직접 만났는데 ‘죽이자! 없애자!’였습니다. 그 당시 인간뿐만이 아니고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봤는데 내린 결론은, 심사숙고하고 내린 결론은 ‘없애자!’였습니다.

이 점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요셉을 봐야 해요. 요셉을 팔아먹은 요셉의 형이 나쁩니까? 애굽 사람이 나쁩니까? 정답은 둘 다, 요셉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니까 자기를 우대하라고 한다면 그건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에요. 왜냐 하면 하나님의 방식은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있는 요셉에 대해서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아주 깡그리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해석에 대해서 인간 쪽에서 접근하는, 율법에 대해서 인간 쪽에서 접근하는 해석은 하나님께서 율법 자체가, 말씀 자체가 차단한다는 원리입니다. 이걸 자꾸 놓쳐버리면 안 돼요. ‘인격적으로 잘생기고 품위 있게 보이고 인자하게 생긴 분이 설교하신다. 은혜 되겠네’ 은혜가 되지요. 그런데 그게 뭐냐. 적그리스도죠.

마지막으로 적그리스도가 양의 탈을 쓰고 온다는 것을 여러분이 아셔야 해요. 그 탈을 인간이 벗기지 않습니다. 왜? 벗기기 싫어서. ‘저거, 저거, 저 속에 이리 들었다’라고 하고 싶지 않아요. 인간들은. 그들은 속에 이리가 들었든 뭐가 들었든 간에 겉이 좀 번지르르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신뢰할 만한 그런 사람이면 좋겠어요.

그래서 신명기 18장에서 어떤 말씀이 올 때 말씀이 이루어지나 안 이루어지나를 볼 때, 신명기 18장 이전에 13장 1~3절에 보면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찌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라고 나와 있어요.

오늘 제가 선지자를 계속 언급하는 이유가, 오늘 예레미야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필히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성경해석을 그들이 전혀 해내지를 못했습니다. 그 이유를 찾는데 신명기에서 이미 예언된 거예요.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찌라도” 따르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게 신명기 13장입니다.

신명기 18장에서는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인간의 말인지 구분하는 방법은 그것이 어떤 증험이 있고, 어떤 성취함이 있으면 말씀한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말씀한 것이 아니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 18장에 있는 말씀은 말씀대로 되거든 믿으라는 이야기이고, 13장은 이적과 기사가 말 그대로 이루어져도, 다른 신을 섬기며 그것을 따라가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조건이 뭐냐 하면 말씀은 말씀대로 이루어지되 그렇게 그것들이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여호와를 섬기자고 나오면 그 사람의 해석은 옳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이야기를 누가 받아들이냐 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유대인들이 몽땅 다 받아들였어요. 그게 인간의 한계지요. 주께서는 말씀을 가지고 갈 때까지, 가 보자는 겁니다. 어디까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맞아 죽을 때까지 가 보자는 겁니다.

그동안 인간들의 해석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성경 말씀이나 하나님의 예언에 대해서 그들은 어떤 해석을 내리고 있는지, 그들이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서 얼마나 철저하게 말씀탐구에 몰입하고 있는지를 그들의 한계성까지 다 들춰보자는 겁니다. 들춰보고 내린 결론은 뭐냐, ‘예수 당신은 맞아 죽어야 한다’라는 겁니다. 그게 그들이 내린 결론입니다. 이게 그 당시 유대인보고 한 것이 아니고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죠.

벌써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우리 쪽에서 하나님께 가는 길은 없습니다.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하고 해석해도, 아무리 철저하게 복음을 많이 이해해도, 그것 가지고는 갈 수가 없습니다. 다시 로마서 10장으로 돌아와 봅시다. 로마서 10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네가 ‘천국이 보고 싶어요. 지옥이 보고 싶어요’라고 말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 천국 보고 싶으면 천국에 계신 분이 이 땅에 와야 해요. 지옥을 보고 싶으면 지옥에 있는 사람을 모셔 와야 해요.

네가 뭔데 누구에게 오라하고 가라 하느냐는 겁니다. 네가 뭔데? 너를 구원하라고 하늘에 계신 분을 모셔오고, 지옥에 간 사람을 모셔오고 할 수는 없지 아니하냐는 겁니다. 좀 더 내용을 포함 시키면 누가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거지 나사로 비유가 나오잖아요. 부자가 하는 이야기가 나는 이왕 지옥 온 거, 빼도박도 못 하지만 동생이 다섯 명 있다는 겁니다.

동생을 많이 낳기도 했어요. 다섯 명이 전부 다 ‘우리 형은 지옥 갔다’라고 믿는 자가 없어요. 형이니까 지금 마음은 굴뚝같아요. 지옥 간수에게 ‘미안하지만, 휴가 3일만 내주세요’라고 하고 싶어요. 왜? ‘내가 지옥 갔다는 것을 동생들에게 좀 알리고 3일 뒤에 필히 다시 지옥으로 복귀하겠습니다’라고 해도 안 돼요. 그 자체가 용납이 안 된다고요.

형은 그저 동생들이 걱정된 거예요. 자기가 철딱서니 없는 것처럼 자기도 똑같이 철이 없이 세상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는 겁니다. 부자의 불행은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니고요, 평소에 지상에 살아있을 때 한시도 쉬지 않고 선택, 선택, 선택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의 선택, 선택, 선택이 집결된 것이 뭐냐? 지옥행이었습니다. 그 선택할 때 얼마나 철저하게 선택했겠어요.

비트코인을 하느냐 마느냐를 얼마나 선택했고, 어떤 주식을 사야 하느냐를 얼마나 선택했겠습니까? 우리 아이에게 과외를 시킬 것이냐? 시키면 누구에게 시킬 것이냐? 이런 것들을 얼마나 선택했겠어요. 우리 딸 신랑감으로 적당한지 적당하지 않은지, 우리 아들 신붓감으로 어떤 사람이 적당한지를 얼마나 심사숙고했습니까. 그 심사숙고한 것을 플러스(+), 플러스(+)하다가 이콜(=)은 지옥이죠.

그러니까 부자는 살아있으면서 어떤 선택을 하면서도 이 선택이 지옥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한 번도 고려해 본 적이 없어요. 이 땅의 어떤 증험, 효과, 내가 선택한 것의 어떤 기적, 이런 것들을 원했던 거예요. 그게 인간 해석의 한계입니다. 이왕 한 거 좀 더 어렵게 하겠습니다. 뭘 어렵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했지요.

그런데 창조를 어떻게 했느냐. 아무도 몰라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했다만 나와요. 정답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창조할 때 그 능력은 예수님의 십자가 지시는 능력과 동일한 능력이에요. 왜냐 하면 말씀으로 창조했기 때문에. 그 말씀 하나하나에 십자가 희생의 능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창조할 때 어떤 능력이 그 안에 담겨있는가를 그걸 풀어내는 거예요.

실타래 풀 듯이 풀어내니까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가 되는 겁니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성에, 하나님의 창조성에 십자가의 취지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인간은 모르고 살았어요. 부자도 모르고 살았어요. 십자가가 구원한다는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는 오른쪽과 왼쪽을 구분하는, 그러니까 하나의 십자가가 세 개의 십자가로 확장된다는 말뜻에서 제가 십자가를 언급한 겁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임하면 구원된다는 것이 아니라, 가운데 있는 십자가가 양쪽을 영원히 벌어지게 만든, 영원히 갈라서게 만든 능력이 발휘돼요. 한쪽은 지옥, 한쪽은 천국. 그러니까 창조의 능력이 심판의 능력이고 달리 말해서 심판하는 능력이 창조의 능력에 이미 삽입되어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겉껍데기가 오늘날 우리입니다. 그러니까 ‘너는 너를 증거 할래, 아니면 창조능력, 다시 말해서 십자가 능력, 구원의 능력을 증거 할래?’ 이거죠.

그런데 그걸 누가 막는가. 나의 존재성이 막아버려요. ‘일단 살고 보자. 사는 게 최고다. 나는 살았다’ 이런 거 증거 하는데 평생을 다 투자하고 생각을 거기에 다 집어넣었어요. ‘나 살아있다’ 앞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 ‘잘살아있다’ 형용사가 명사보다 더 강조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초여름에 광주 간다’ 사람들은 ‘초여름에 나는 광주에 간다’라고 이해가 되죠.

그런데 ‘아니야, 광주에 초여름이 간다’라고 하면 누가 이해하겠어요? 형용사, 부사가 왜 강조되느냐는 겁니다. 우리 집에는 아내가 없어요. 왜냐 하면 ‘예쁜’ 아내만 있기 때문에. 갑자기 오그라들고 막 그러죠. 그 입을 당장 쳐라. 강조점 때문에, 강조점이 빠진 것은 나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겁니다. 항상 나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살아있다고 하지만 거짓말 하고 있는 거예요. 앞에 뭐가 붙느냐 하면 ‘잘’ 살아있는 거예요.

‘잘’을 우리가 자꾸 일부러 감추죠. 그 감추는 것이 주님의 십자가를 가리는 해석자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부자에게 그것은 안 된다고 하니까 그다음에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천국 가 있는 나사로를 보내 달라고 하죠. 자기는 이미 지옥이니까. 자기는 이미 벌 받는 중이고 차단되어 있으니까. 천국에 간 자는 차단되지 않고 휴가가 되지 않겠느냐는 거죠.

천국도 역시 차단되어 있어요. 해석 자체가 인간에게 차단되어 있어요. 왜냐 하면 그 천국과 지옥이라는 내용은 말씀 안에 들어있고, 말씀 자체가 차단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 가는 길은 없습니다. 방법은 뭐냐. 성경을 주신 분이 본인은 해석자가 되어야 해요. 성경도 주시고 스스로 해석자도 되시는 분. 그러면 그 해석자의 모습이 뭐냐. 인간들에게 거부당하는 모습으로 오신 거예요.

분명히 예수님의 삶 자체가, 내 살과 내 피 자체가 해석인데, 우리는 그 해석 자체에 대해서 상당히 거부감을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세례요한까지도 실수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3절에 옥에 갇힌 세례요한이 다짜고짜 예수님에게 제자들을 보내서 묻는 말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내가 예수님을 해석한 해석과 다릅니다. 당장 불 심판 떨어지는 것이 내 해석인데 다릅니다’라는 뜻이에요.

그럴 때 예수님의 해석이 정말 놀랍습니다. ‘당신이 메시아입니까?’라고 하면 예수님께서 ‘내가 앞으로 이런이런 일을 해야 할 것이다’라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주께서 내가 메시아가 맞다는 행위를 나타내는 그 행위가 뭐냐 하면 5절에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그러니까 이 말이 뭐냐 하면 문둥병자가 먼저며, 소경이 먼저며, 귀머거리가 먼저며, 죽은 자가 먼저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게 누구냐 하면 예수님 본인의 가시는 길이 해석이에요. 예수님 가신 그 길이 좁은 길이고, 생명의 길이고, 해석입니다. 그럼 주께서 왜 이런 해석으로 완성하느냐. ‘선지자, 선지자, 다 필요 없다. 내가 마지막 선지자다’라는 이런 뜻인데, 왜 그런 해석을 하셔야 하는가.

마태복음 7장의 내용에서 예수님이 미리 이야기하셨습니다. 15절에 보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인간들의 요구사항이 뭐냐 하면, 우리 쪽에서 우리를 하늘나라로 보내 달라는 겁니다. 뭐 보람상조도 아니고, 왜 보내줘야 합니까? 나를 천국에 실어서 보내 달라는 겁니다.

보내주기 위해서 미리 계약을 써야 해요. ‘죽어도 좋다. 사망해도 좋다. ~좋다. ~좋다...’라고 5명이 계약서 쓰고 잠수정 탔는데, 물에 빠져 다 죽었어요. 죽어도 좋다는 계약서 쓰고 다 죽었어요. 살기 위해서 누구를 의지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인데 그 자체가 죄라고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목회자가 이거 들으면 미칠 지경이에요.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내 말을 들으면 당신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이게 거짓 선지자들의 상투적인 멘트입니다. 인간은 구원될 수 없는데 왜 본인이 구원을 해줘요. 말이 안 되죠. 그 사람들이 마태복음 7장에 보면 22절에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라고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누구세요?”라고 하면 끝나는 겁니다.

정답은 이겁니다. 십자가 지신 분이 누구냐입니다. 말씀 전한 자는 십자가 진 자가 아닙니다. 자기 십자가 말씀에 집어넣으면 안 돼요. 자기 고난과 희생을 집어넣으면 안 됩니다. 십자가 전하니까 대우받겠다는 생각 집어넣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안 집어넣으면 되느냐? 안 집어넣을 목회자가 없어요.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내가 설교하는 것도 죄입니다. 이러면 간단한 거예요.

자, 누가 하늘에서 내려왔으며, 누가 지옥에서 올라왔는가. 그런 인간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에 어떤 누구도 하나님께서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이게 성경해석이에요. 성경해석은 어떤 인간도 우리를 천국에 집어넣지 못한다는 것이 성경해석의 기본입니다. 그러면 로마서 10장에서 8~9절 보면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이게 뭐냐 하면 누가 어떻게 했다는 것을 믿지 말고, 말씀이 네 입에 가까이 있다는 거예요. 그 말씀을 마음으로 믿어버리면 그 안에 주가 살아있는데 그것을 믿어버리면 너는 구원을 얻는다는 겁니다. 말씀을 가지고 전하는 자가 아니라, 그 말씀 자체가 우리에게 살아서 우리 속에 들어와야 한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는 자도 방해물로 여기라는 거죠.

아침에 그것을 적치물이라고 했는데 치워버려야 해요. 방해물이니까 치워버려야 해요. 그러면 마지막 질문은 이거죠. ‘그럼 우리가 복음 전하지 말까요?’라는 질문에 대해서 주께서 우리에게 복음 전하게 하는 이유는 우리가 얼마나 우리 자신에 대해서 평소에 방해자로 살아있다는 것을 타인의 만남을 통해서 새삼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 복음을 전파하는 겁니다.

복음 전하는 내가 복음을 방해하고 있다는 그런 존재로 아직도 이 세상을 버티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니까 죽도록 복음 전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해석, 창조의 능력, 죄사함의 능력 아니면 어떤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기에 평소에 우리가 얼마나 방해자로 살아왔는지를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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