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재자
2023년 5월 28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8:13-17
(8:13)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 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8:14) 우리가 어찌 가만히 앉았으랴 모일지어다 우리가 견고한 성읍들로나 들어가서 거기서 멸망하자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멸하시며 우리에게 독한 물을 마시우심이니라
(8:15) 우리가 평강을 바라나 좋은 것이 없으며 고치심을 입을 때를 바라나 놀라움뿐이로다
(8:16) 그 말의 부르짖음이 단에서부터 들리고 그 준마들의 우는 소리에 온 땅이 진동하며 그들이 이르러 이 땅과 그 소유와 성읍과 그 중의 거민을 삼켰도다
(8:17)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술법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뱀과 독사를 너희 중에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를 물리라 하시도다
모든 있다는 것들은 사그리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 땅을 살던 사람들 마저 멸망당합니다. 선지자는 말합니다. 범죄했기에 당연한 조치가 내려진 것으로 받아들여라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들이 사라지면서 비로소 등장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뱀이요 독사입니다. 사람이 살던 지역에 독사가 등장해서 거주민을 대신합니다.
물론 이 독사는 유다나라를 침공한 바벨론 군대를 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독사’로 표현하십니다. 즉 사람이 제거되어야 비로소 뱀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동안 뱀이 인간을 앞장 세우고 자신을 뒤로 숨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런 뱀을 조정하시고 관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상대하시지 않고 뱀과 상대하는지에 유념해야 합니다. 창세기 3:15에 보면, 하나님께서 제시한 약속 전개에 있어 인간은 빠져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즉 뱀으로부터 피해를 입는 분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남자계통의 인물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얻어맞아 패배하는 것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악마입니다. 악마가 누구로부터 얻어맞아 패배감을 지니게 된다? 우리 인간들 행함의 차원에서는 성사될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은 인간을 빼고 일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있어 인간 존재가 방해된다면 가차없이 없애고 일을 추진하신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없어지라고 만들어진 나라입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 바닥에 뱀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그 정체를 폭로시킬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이스라엘이 깔고 앉아있는 뱀은 이스라엘이 상대해서 이길 대상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비록 애굽나라에게 빠져나왔다고 하지만 이것은 역사의 겉 모습에 불과합니다. 실은 애굽 나라의 일부로 떼어져나온 겁니다, 이 하나님의 조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만 직접 뱀을 다룰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시기 위함입니다.
민수기 21:5-6에 보면,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호도 애굽에서 떨어져 나와 살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살아도 죽어도 애굽이라는 세상 품에서 마감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그리워하는 애굽은 실은 뱀이 직접적으로 통치하는 나라인 것을 알려주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품성 또는 애굽의 품성의 이어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애굽나라는 사막에서 그 어떠한 대책이 없음을 자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뱀의 세계가 형편이 그러하다는 겁니다. 이 불뱀 이야기가 신약 요한복음 3장에서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뱀에 물려 죽으라고 하나님께서 동행하신 나라일까요? 아닙니다.
창세기 28:10-12에 보면,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원조가 되는 야곱은 하늘차원과 땅차원을 중재하는 중재자로서 등장되는 인물입니다. 즉 순전히 하늘의 일만을 하는 자도 아니요 순전히 땅을 일만 하는 자가 아니라 야곱 안에는 사다리가 있어 그 사다리로 말미암아 하늘차원과 땅 차원의 차이와 연속성이 어떤 식으로 연결되는지를 보이게 됩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는 예수님과 대화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3:12에 보면,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되어 있습니다. 즉 뱀의 존재가 없으면 ‘여자의 후손’도 등장할 리가 없다는 겁니다. 하늘의 일과 땅의 일이 예수님을 통해서 다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땅에는 뱀이 지배합니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볼 때에 그 세계의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장과 3장에서 ‘어둡다’는 겁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그동안 인간세계는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세상에서 살면서도 세상이 깜깜하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나름대로 세상살이에 불편없는 정도로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알아보고 산다는 겁니다. 그러하기에 정작 빛이 왔을 때, 어두움은 빛을 알아보지 못할 지경으로 어두웠던 겁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지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 볼 수가 없다고 예수님께서 단언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니고데모가 제시한 아이디어가 이러합니다. 엄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면 되느냐는 겁니다. 여기서 성인이 엄마 뱃속에 다시 들어가는 것도 산채로 들어가고 다시 나올 때도 그 살아있었던 그 나가 다시 산채로 나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미 인간은 뱀의 지배아래서 그 어떤 식으로 살 가치없습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이러합니다. 목자도 죽고 양도 죽는 방식입니다. 모양은 인간 모습으로 하고 있지만 실은 인간의 내부는 뱀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빛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빛을 알아보지 못하기에 어두움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0: 14-15에서는 양이 목자를 알아 본다고 나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즉 목자가 와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 어두움에서 낯선 죽음으로 자기 양을 불러들이는 목자가 참된 목자인 겁니다.
이것이 이 땅에 나타난 하늘의 일입니다. 성도는 이로서 땅의 차원과 하늘의 차원, 둘 다를 말할 수 있는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이미 악마의 머리를 부셔서 주도권을 빼앗버린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3강-예레미야 8장 13~17절(중재자)230528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8장 13~17절입니다. 구약성경 1064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우리가 어찌 가만히 앉았으랴 모일찌어다 우리가 견고한 성읍들로나 the defenced cities 들어가서 거기서 멸망하자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멸하시며 우리에게 독한 물을 마시우심이니라, 우리가 평강을 바라나 좋은 것이 없으며 고치심을 입을 때를 바라나 놀라움 뿐이로다, 그 말의 부르짖음이 단에서부터 들리고 그 준마들의 우는 소리에 온 땅이 진동하며 그들이 이르러 이 땅과 그 소유와 성읍과 그 중의 거민을 삼켰도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술법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뱀과 독사를 너희 중에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를 물리라 하시도다”
바벨론 나라가 쳐들어 와서 이스라엘, 특히 이스라엘 나라 이미 망했고 유다, 유다 나라가 소위 있다는 것을 다 없애는 그 일을 일으키신다고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전달하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대해서 여기 오늘 말씀처럼 ‘그래, 멸망하자. 그리고 그 사항을 받아들이자. 받아들이긴 하는데 이것 하나는 놓치지 말자. 도대체 이유가 뭔지를’
우리 인생이 아무리 수십억, 수백억대의 재산을 가져도 마음은 지옥입니다. 물론 그 돈이 없어서 아직까지 그런 체험은 안 됩니다만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이 자체가 어떤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어떻게 하면 멸망 안 당합니까?’라는 것이 아니라 왜 멸망을 확정시켜 놓았느냐는 그 사실, 왜 우리는 멸망 당해야 마땅하냐는 그쪽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관심사를 유도해 나가십니다.
고3 수험생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해요. 성경뿐만이 아니고 모든 학문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내가 멸망해야 할 이유를 화학이나 수학, 물리에서 찾는 거예요. 영어에서도 토플에서도 찾는 거예요. 취직해서도 찾고 군에 가서도 찾아야 해요. 왜 내가 멸망해야 하는가. 군대라는 코스를 통해서 멸망의 이유를 밝혀내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어떤 점에서 좋으냐 하면 부러워할 만한 타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나는 내 코스로 멸망하고 너는 너의 코스로 멸망하면 되지, ‘아이고, 부러워라. 너는 잘 되어서 좋겠다’라는 그런 대상은 이미 확정된 멸망에서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유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왜 우리는 멸망으로 확정되어 있는가?’ 이것은 오늘 본문 17절에 나오는 것처럼 뱀과 독사의 존재에 눈을 뜨고 보라는 겁니다. 뱀과 독사의 존재.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죠. 주님이 우리에게 뭘 하셨느냐는 이것보다 먼저 악마가 우리에게 무슨 일을 벌이느냐를 먼저 봐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이미 악마 쪽이기 때문에. 악마랑 친하거든요. 악마 생각이 우리 생각이고 우리 생각이 악마 생각이에요. 헤어질 생각을 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생각 안 하고 주의 일 받고 자꾸 얻고자 한다면 나는 괜찮은데 주님 생각까지 알았으니까 그거 플러스해서 더 괜찮은 존재로 발전하고 성숙했다고 착각을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 같은 경우는 여기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받았고, 율법 준 대로 이스라엘은 열심히 그 율법의 정신에 가까이 가도록, 합치되도록, 그 간격을 줄이도록 노력했는데 예레미야를 통해서 들은 말씀이 뭐냐 하면 ‘너희들 이미 망했어. 너희들 이미 멸망이야’라는 거죠. 노력했는데 결과가, 결국 너희들은 멸망될 거라는 겁니다. 주께서 뱀과 독사를 준비해 두었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이야기는 간단하죠. 그동안 뱀과 독사가 왜 우리보다 먼저 터전에 자리 잡았는가를 그동안은 내 생각에만 몰두하다 보니까 마귀와 함께 산다는 것을 그 함께 사는 마귀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그냥 이렇게 합니다. ‘나만 열심히 살면 되지. 나만 착실하고 바르게 살면 되잖아’라는 거죠. 그러나 주님은 우리 인간과 상대를 안 합니다. 우리와는 상종을 안 해요.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그러니까 신약에 와서 주께서 주신 기쁜 소식이 뭐냐 하면 뱀의 머리가 작살났다는 거예요. 사람이 머리 부분 작살나면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실성했다’라고 합니다.
정신 나간 거예요. 뱀이 실성해서 자기를 주체못해요. 이 말은 뱀과 붙을 가치도 없이 되어버린 거예요. 왜? 뱀이 머리를 한 방 맞고 그로기(groggy)상태가 되었어요. 비틀비틀 거리 거든요. 싸워도 정상인 상대랑 싸워야지 비틀거리는 상대랑은 싸울 가치가 없죠. 이미 뱀은 벌써 한 방 맞고 어쩔 줄 모르고 있습니다. 다만 남아있는 것은 주님에게 얻어맞은 뱀, 뱀은 결정타를 맞았는데, 우리 자신이 결정타를 안 맞았다는 겁니다.
둘 다 실성하기는 마찬가지지만 뱀은 결정타를 맞았는데 우리는 아직도 뭔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정신 바짝 차리면 괜찮은 것이 안에서 나올 거라고 그런 오해를 품고 있습니다. ‘바르게 살면 되잖아요’라고. 주께서는 ‘네 안에 뱀 있다. 뱀 좀 보여줘’라고 하는데 우리는 ‘저 뱀 아니거든요. 저 인간입니다’라고 하니까 ‘비켜, 비켜. 너 저리 치우고 뱀 좀 보자. 뱀’
뱀이 그동안 너를 어떤 식으로 회유했고 갖고 놀았는지 뱀을 한번 보자는 겁니다. 왜 주님께서 뱀을 집어넣었는가. 민수기 21장 6절에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라고 나옵니다. 창세기도 그렇고 민수기 21장도 그렇고, 오늘 본문도 그렇고, 인간들 세계에 뱀이라는 거, 또는 독사라는 것을 이렇게 짐승을 집어넣음으로써 현재 인간과의 협의나 의논은 주께서는 안 받습니다.
인간 대 인간, 하나님과 인간의 그런 대화는 주께서 거부하십니다. 나는 너의 배후에 있는 뱀과 이야기하겠다. 그러면 간단히 이야기해서 뱀은 그동안 무슨 일을 했는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불을 껐거든요. 불을 끈다는 것은 소등하는 거고, 불을 끈다는 겁니다. 어린아이가 설쳐대고 까불고 해도 아이를 잠잠하게 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불을 끄면 됩니다.
인간은 불을 끄는 순간 방향감각을 잃어버려요. 인간이 왜 설치느냐 하면 자기가 하는 행동을 자기가 관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내 행동을 왜 관찰하느냐 하면 남들 보여주려고 행동하거든요. 부모의 맘을 흡족하게 해서 얻을 것을 얻겠다는 심보. 그런 것들이 있어요. 그것을 제3 자로 관찰할 수 있는 것들 중에 하나가 꿈속입니다. 꿈에서 내가 행동하는 것을 내가 보고 있어요.
보게 되면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타인의식이에요. 남을 의식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세계에다 뱀을 집어넣는 이유는 불을 끄는 거예요. 불이 꺼져버린 이 세상에, 그걸 요한복음 1장에서는 어두움의 세상이라고 합니다. 어두움의 세상에서는 인간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가 하나도 정리가 안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올 것은 인간의 본능밖에 없습니다. 욕구와 욕망밖에 없습니다.
뱀의 역할은 뭐냐. 인간의 욕구, 욕망에다가 뱀이 만들어낸 불을 켜는 거예요. 마귀가 켠 불 켜서 이미 어두워 버린 이 세상이 마냥 어둡지만은 않다는 티를 내면서 그럭저럭 우리 살아가자고 우리를 설득하고 우리를 납득시키는 일을 뱀이 합니다. 더 간단히 해서 뱀은 뭐냐 하면 ‘이왕 태어난 거 그냥 살아. 골치 아프게 그러지 말고, 태어났으면 그냥 살면 돼. 살면 살 수 있어. 열심히. 괜히 따지지 말고. 사는 것이 남는 거야. 세상이 어떻고 하나님이 어떻고 그런 거 따지지 마. 그냥 열심히 일하고 맛있는 거 먹고 재미나게 그냥 살아’라는 그거뿐이에요.
‘바깥으로 나갈 생각하지 말고 이 안에 이성의 빛, 지성의 빛이 어느 정도는 비치니까, 온전하지는 않지만, 그냥 그 속에서 그럭저럭 살면 그게 인생 사는 거야. 더 큰 의미는 없어’라고 악마가 그렇게 우리를 설득해 왔었습니다. 그것을 ‘문명’이라고 합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모든 것은 악마가 사주하는 대로 인류의 문명을 보다 편리함에 이르기 위해서, 아픈 것도 덜 아프고, 그렇게 더 풍족함을 이루기 위해서 마귀가 시키는 대로 살아온 거예요.
이방 나라가 그렇게 왔거든요.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겠다고 하시며 바깥에 있는 뱀, 독사인 바벨론을 통해 유다 나라를 점령하게 했습니다. 점령하게 하니까 홀라당 다 빼앗겼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그동안 뱀의 앞잡이가 되어서 살아왔던 그것을 하나님께서 뱀에게 시켜서 뱀의 껍질을 홀라당 벗겨버린 겁니다. 벗기니까 그 자리에 뭐가 남느냐 하면 뱀의 날 것,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 거예요.
인간들은 옷을 입고, 양말을 신잖아요. 양말에 만약 뻥뻥 구멍이 나면 속에 있는 살갗이 다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인간, 인생의 문명이라는 것이, ‘나’라는 인생은 뱀에 살짝 껍질 덮어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안에는 뱀 들어있고 바깥에는 껍질이 있는 거예요. 옛날에 80년도에 ‘V’라는 외국 드라마가 있었어요. 거기서 파충류외계인이 왔는데 너무너무 잘생겼어요.
나중에 세상과 전투하다가 나중에 벗겨지니까 파충류 도마뱀껍질이 나왔어요. 드라마 보던 사람들이 그걸 보고 기겁을 했죠.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의미 있는 전쟁을 일으켜요. 이스라엘에게 전쟁을 일으켜요. 전쟁을 일으킬 때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전쟁으로 그렇게 전쟁을 계속해왔습니다. 이스라엘은 오해했죠.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전쟁을 일으켰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러나 신명기 끝에 보면 모세가 예언한 바는 그것이 아닙니다. 진짜 마귀는 이방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진짜 마귀는 이스라엘 자체가 마귀 집단이라는 겁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마귀 아니면 상대를 안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상대했다는 것은 직통 마귀와 직접 상대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니고 애굽 덩어리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확장되어서 직접 여호와 하나님과 맞닥뜨리는 그러한 경우를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통해서 보여준 겁니다. 이게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입니다.
시간 관계상 다 하지는 못하지만, 그러면 이스라엘과 마귀가 만나서 하나님께서 얻고자 하시는 것이 뭐냐. 하나님께서 무슨 취지가 있기 때문에 직접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마귀 집단과 만나게 하셨을 것이다. 그러면 취지가 무엇인가 하면 이스라엘이 망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주님의 취지가 드러나는 겁니다. 이사야 44장 6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여기서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라고만 하신 것이 아니고 앞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라고 나와요. 그러면 성경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사람이 어떤 일을 했는지를 보면 단박에 나오죠. 제가 지금 설명한 것은 하나님은 직접 마귀와 뱀과 마주하고 전쟁한다고 창세기 3장 15절에서 분명히 언급했기 때문에 제가 분명히 말씀드린 겁니다.
그런데 중간에 이야기가 왜 복잡하게 나오고, 이스라엘이 왜 나오느냐. 창세기 28장에 보면 사다리가 하나 나와요. 꿈속에. 사다리가 나오는데 10~12절에 보면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라고 나와요.
또 13절에 보면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라고 나와요. 이게 뭐냐 하면 원래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하늘과 땅에 중재자 역할을 해요. 중재자(agent). 여러분도 에이전트 아시잖아요. 공인중개사. 사기꾼인지 아닌지 모호한 공인중개사. 중재자입니다.
어떤 중재자이냐면 차원을 바꿀 수 있는 중재자예요. 육으로 갔다가 영이 되고 영으로 갔다가 육이 되는 그 중간 지점에 트랜스(transformer)하는 공인중개사, 자기 집도 아니면서 사고팔고 하는 에이전트 역할을 이스라엘이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그런 역할을 하는데 그 이스라엘이 파탄 나서 제대로 작동 못 하잖아요. 그래서 이사야 45장 7절에 보면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라고 나옵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씀이 나와요. 그거는 어두움이 창조되었다는 거예요.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그러니까 예수님이 예수님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사탄을 창조하신 거예요. 사탄이 없는 예수님은 의미가 없습니다. 머리를 때려 부술 대상자가 만들어져야 해요. 뱀을 만들어서 머리를 치고 뱀은 악착같이 예수님의 발목을 물어야 해요.
발목을 문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멸망이고 머리를 친다는 것은 주께서 “너, 물었지? 물었지?”라고 하시면서 쳐버리는 거예요. 미끼 던지고 물었다는 것을 보고 쳐버리시는 겁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이미 신약이니까 뱀의 머리를 이미 쳤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우리로 하여금 뱀에게 물리도록 미끼로 우리를 사용하는 겁니다. 미끼가 기분 나쁘면 공인중개사. 이게 더 기분 나쁘면 중매자(agent), 증인으로 사용한 거예요.
그래서 주님은 인간 상대 안 해요. 인간은 상대 안 하지만 우리 안에는 두 차원, 뱀의 차원과 하늘의 차원 또는 빛의 차원과 어둠의 차원이 우리 안을 통과하고 교류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오르락내리락하는 거죠. 우리 성도 안은 바빠요. 분주합니다.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것처럼 성도 안에는 두 개의 상반된 차원이 오르락내리락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남은 일은 간단해졌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 안에 빛의 차원은 뭐고, 우리 안에 작용하는 어둠의 차원은 뭡니까? 이걸 꼭 아셔야 해요. 이 두 차원이 교류하고 있으니까, 교류하는 조건이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거죠, 교류하고 있으니까 어느 것이 빛의 차원이고 하늘의 차원인지, 어느 것이 어둠의 차원이고 땅의 차원인지 알아야 하잖아요.
요한복음 3장 12절에 보면 그 내용이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야기하면서 나옵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라고 되어있어요. 인간은 땅의 일밖에 모르게 되어있어요. 땅은 어두움이고 인간은 어두움밖에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영으로 난 사람, 성령으로 어떻게 보느냐 하면 성령이 오게 되면 땅의 일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어요.
땅의 일, 어두움의 일은 우리가 알고 있죠. 다시 말씀드릴까요? 어두움의 일은 뭐냐, ‘태어난 거 그냥 살자’라는 이게 어두움의 일이에요. 며칠 전에 우리나라에서 누리호 로켓트 올라갔잖아요. 그걸 보고 제가 느낀 점이 많이 있어요. 그거 아니라도 많은 걸 느낍니다만. 그게 뭐냐 하면 우리는 이왕 올라갔어요. 이왕 발사된 사람입니다. 이미 우리는 이 세상 태어났어요.
이미 출생이 시작된 거예요. 마치 누리호가 벌써 쏘아 올려진 것처럼. 우리 신세와 똑같은 신세예요. 그래서 우리는 땅의 일은 이미 알고 있어요. 땅의 일은 연구할 필요 없습니다. 그냥 세상 살아가면 그 자체가 땅의 일이고 마귀 일이에요. 마귀 일에 대해서 굉장히 친근하죠. 성경 이야기하다 보면 몇 분도 아니고 30초나 40초 이렇게 지속하지만 세상 사는 이야기하라고 하면 3시간 4시간 훌쩍 지나서 설교시간 다 됐는데 끝나질 않아요.
멈출 줄 몰라요. 땅의 일이니까. 그렇다면 이 땅의 일에서 주님께서는 땅도 포함하고 하늘도 포함한 일을 어디에다 담았느냐 하면 지팡이에 담았어요. 요한복음 3장에 14절에 보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뱀이 없는 지팡이는 없습니다. 지팡이가 의미 있으려면 반드시 뱀이 있어 줘야 해요. 아까 민수기 21장에서처럼.
독사에서 물린 사람들이 모세가 지팡이를 드니까 그걸 쳐다보는 사람은 다 나았어요. 여기서 해답이 나왔습니다. 성도가 뭐냐. 이미 나아버린 거예요. 이미 깨끗하게 치료가 되고 이미 영생을 얻은 사람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세상일이 뭔지를 깔끔하게 다 알아버렸어요. 세상일을. 뱀의 일이 어떤 일인지를 다 알아버렸어요. 신나죠. 그래서 요한복음 10장 14~15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를 그대로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과 양 사이에 그대로 판박이처럼 박아넣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죄의 몸으로 오셨거든요. 그 죄의 몸이 지금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죄의 몸이 이 몸이에요. 잘 들어보세요.
내 몸이 몸이 아니고, 죄의 몸이에요. 이 몸이 뱀이 다스리는 몸입니다. 이걸 알았다는 것은 이미 영생을 얻은 사람에게 해당되는 거예요. 그다음에 보면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끝났지요. 자, 하늘의 일이 뭐냐 하면 하늘에서 낚시하는 줄이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이 죄의 몸으로 오신 주님이 이 땅에서 죽어버리는 거, 이게 하늘의 일이에요.
니고데모가 이것에 대해서 몰랐던 거예요. “어떻게 내가 엄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습니까?”(요 10:4) 니고데모는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본인이 죽는다는 사실을 자꾸 거부합니다. ‘내가 엄마 몸에 갔다가 다시 태어난다’ 엄마 뱃속에 갈 때도 살아있고 태어날 때도 살아있죠. 나는 살아있는 상태에서 하늘의 일을 어떻게 받아줍니까? 이런 식으로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야, 내가 땅의 일을 했잖아” 다시 말해서 “니고데모야, 불뱀에 매어서 죽어버려, 인간아” 이런 뜻이에요.
이 땅에 설치된 뱀에 물려서, 퉁퉁 부어서 죽어버려. 그 뱀에 의해서 죽게 될 때, 그때 네가 알아서 산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이미 뱀의 머리를 쳐버렸다는 사실과 연계해서 예수님의 빛을 보는 거예요. 세상의 빛을 꺼버리고 이 세상이 어둡다는 것을 밝혀주는 밝은 빛이 이 땅에 올 때, 예수님은 죽었습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서 양과 목자가 서로 안다는 것은 아버지와 예수님이 죽음을 통해서 아들이 아들답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양이 감히 그것을 파악하게 된 거예요.
나 대신 죽으신 분이 목자다. 목자가 나 대신 죽은 것이 목자가 아니고 죽으신 분이 목자예요. 목자가 와서 나 대신 죽은 것이 아니고. 목자가 와서 나 대신 죽어버리면 나는 또 이 귀한 몸을 붙들라고 해요. 이건 그냥 뱀의 몸인데. 우리 가운데 뱀띠 있잖아요. 뱀에서 태어난 거예요. 뱀띠.
뱀띠지만 저는 알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바로 빛으로 오신 분이 죽고 빛을 빛으로 우리 안에서 드러내서 우리 안이 뭘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어둠과 뱀과 그리고 주님이 서로 두 개의 차원이 어떤 식으로 활동하고 있었는가를 창세기 3장 15절에 그 약속이 우리 안에서 구현된다는 그것이 바로 오늘날 빛의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 이스라엘을 택한 일, 인간이 몰랐던 인간의 근원, 뱀과 전쟁하기 위함을 이제는 깨닫고 그 뱀을 이미 주께서 부활로 승리한 그 승리의 기쁨이 저희 안에 최종기쁨으로 지배되고 움직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