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눈물통

아빠와 함께 2023. 6. 11. 17:55

눈물통

2023년 6월 1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9:1-2

(9:1)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륙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
(9:2) 어찌하면 내가 광야에서 나그네의 유할 곳을 얻을꼬 그렇게 되면 내 백성을 떠나 가리니 그들은 다 행음하는 자요 패역한 자의 무리가 됨이로다

NIV

1.  Oh, that my head were a spring of water and my eyes a fountain of tears! I would weep day and night for the slain of my people.
2.  Oh, that I had in the desert a lodging place for travelers, so that I might leave my people and go away from them; for they are all adulterers, a crowd of unfaithful people.

KJV

1.  Oh that my head were waters, and mine eyes a fountain of tears, that I might weep day and night for the slain of the daughter of my people!
2.  Oh that I had in the wilderness a lodging place of wayfaring men; that I might leave my people, and go from them! for they be all adulterers, an assembly of treacherous men.

NASB

1.  Oh, that my head were waters, And my eyes a fountain of tears, That I might weep day and night For the slain of the daughter of my people!
2.  O that I had in the desert A wayfarers' lodging place; That I might leave my people, And go from them! For all of them are adulterers, An assembly of treacherous men.


예레미야가 눈물을 흘립니다. 세상에서는 당연히 ‘사람’이 눈물을 흘립니다. ‘눈물’이 사람을 통해서 나온다는 의식은 이 인간 세상에서 용납되지 못합니다. 사람이 주도권을 쥐게 되면 흘린 눈물은 타인의 눈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자신을 위하여 흘린 눈물을 자신이 되가져오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선지자의 눈물은 이런 세상 사람들의 눈물과 다릅니다. 선지자는 사람의 요소가 천상의 요소를 겸해져 있습니다. 따라서 예레미야의 눈물은 인간적인 면에서 흘린 눈물, 곧 백성들을 보고 섭섭해서 흘린 눈물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를 통해서 흘러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려고 하지 않는 것이 속상해서 흘린 눈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지만 선지자의 눈물은 그게 다가 아닙니다. 선지자가 그냥 일반인이라면 이런 인간적인 눈물에 불과할 겁니다. 하지만 장차 메시야께서 흘리신 완성된 눈물로 유도되는 눈물을 예레미야가 미리 흘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인간의 그 어떤 감정과 정서라도 다른 신체에게 전달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타인의 행동이나 표현을 통해서 잠재적되어 있는 자기 감정을 동원시켜 흉내내지는 모방할 수는 있습니다. 흔히 ‘공감한다’ 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방적 주장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자아는 “나는 네가 아니야” 라는 식으로 자신을 표현하기에 아무리 상대방 앞에서 눈물을 흘려도 “내가 흘리는 눈물은 네가 흘리는 눈물과 같지 않아” 를 보여주는 눈물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눈물을 그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치 예레미야의 말씀은 그 당시 사람들이 이해못하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선지자의 눈물 흘림’  은 메시야적인 특수한 눈물에 해당되어 타인들이 가담 될 수 있는 성질의 눈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줄곧 그런 식으로 메시야를 사람들이 이해못하게 되는 걸까요? 아닙니다.

에베소서 1:22-23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시고,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모든 것을 넘치도록 채우시는 분이 계신 곳입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신체에 붙어있어야 될 머리가 여러명 집단으로 구성되는 전체 교회에 달라붙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성립되는 걸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눈물’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즉 사람이 우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의 눈물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 눈물로 이끄시는 겁니다. 즉 예레미야의 경우, 자신이 우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자기 자신이 눈물통이 되어버리도록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신 겁니다. 눈물이 나오고, 또 나오고, 또 나오도록 말입니다. 끊임없이 눈물이 나오도록 사용하는 용기통입니다.

바로 이 예레미야의 방식에 메시야께서 찾아드십니다. 이점을 보다 분명하기 알기 위해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린 그 장면을 찾아가 봅시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2-35)

이 대목에서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의 눈물과 마주 대합니다. 결국 이 인간들의 한 맺힌 눈물이 도리어 예수님을 눈물 흘리게 했습니다.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가족은 끔찍히도 예수님을 섬겼던 가족들입니다. 즉 자신의 정성과 노고가 예수님에게 먹혀 들어갔을 거라고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결과는 그 봉사자의 대표격인 오빠 나사로의 죽음이었습니다.

신체적으로 근거를 두고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죽음은 곧 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사실이 너무나도 절망적이라서 주변의 아는 자들은 모두 울었던 겁니다. 하지만 이 울음이 안타깝고 한심스러워서 예수님께서는 통분이 여겨 우셨습니다. 두 종류의 울음이 그 현장에서 발생되었습니다.

눈물의 원천이 된 나사로를 예수님께서 다시 살려 내십니다. 이로서 인간들의 눈물과 예수님의 눈물이 상이한 원천을 지니고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인간들의 불신앙으로 상처받은 피해자로서 의 흘린 눈물입니다. 반면에 인간들의 눈물은 자기 소유성이 훼손되었음에 분통을 일으키면서 흘린 눈물입니다.

누가복음 7:37-38에 보면, 한 여인이 예수님 앞에서 웁니다.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이 여인은 자기의 의와 잘남을 위하여 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같은 죄인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기 위해 예수님의 감당하심에 감사하면서 웁니다. 이것은 곧 인간에게 자리잡은 모든 의미가 탈-의미가 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무-의미가 아니라 자신에게 달라붙은 의미가 본래의 주인을 찾아 가는 겁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도로 살려냄으로서 인간 세계의 불신앙성을 그들의 눈물과 예수님의 눈물이 섞이는 식으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성도에게 남은 눈물은 평생을 다 가도록 예수님의 용서하심에 울고 또 울고, 또 우는 사명감 뿐입니다. 당연히 고맙고 감사해서 흘려지는 눈물입니다.
이러한 고마운 눈물은 성도에게 들이닥치는 모든 세상의 협박과 위협과 근심, 걱정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줍니다.

빌립보서 4:4-5에 보면, “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환란 중에서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3-4) 이런 식으로 성도는 예수님께서 눈물흘리신 그 방향으로 늘 몸을 틀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머리가 예수님에게 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머리와 지체의 관계 안에서 예수님의 슬픔과 기쁨까지 공유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성경 해석은 일단 바닥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성도는 그 안에 주님이 계시기에 섭섭하고 실망스러운 일이 생기더라도 결국에는 예수님의 용서하심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나의 눈물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드러난 ‘주님의 눈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평생해도 다 모자라는 기쁨의 할 일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5강-예레미야 9장 1~2절 (눈물 통) 230611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9장 1~2절입니다. 구약성경 1064페이지입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륙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 어찌하면 내가 광야에서 나그네의 유할 곳을 얻을꼬 그렇게 되면 내 백성을 떠나가리니 그들은 다 행음하는 자요 패역한 자의 무리가 됨이로다”

여기에서 선지자의 눈물이 나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예수님의 뜻이 전달되는데 오늘 본문의 뜻은 이거예요. 눈물이 우선인가, 아니면 인간이 우선인가? 인간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고 눈물이 인간을 통해서 나타나는 그러한 존재가 될 때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있고 말씀을 통과하는 사람이라는 점이 드러납니다.

이 눈물이 여기 예레미야에서는 ‘눈물 흘린다’라고 되어있지 않고 눈물의 근원, 그러니까 눈물의 물탱크죠. 본인이 장차 메시아가 흘린 눈물의 물탱크로 미리 당겨서 주께서 사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는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라고 나오는데 예레미야의 고백에 의하면 의미있는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원천으로써 하나님께서 본인을 사용하여 주신 것에 대해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알 수 없는 눈물.

인간들이 흘리는 눈물은 나를 지키기 위한 눈물이고, 고집스러운 눈물이고, 버티기 위한 눈물이죠. 애걸복걸하면서 살려달라고 할 때 나오는 그 눈물, 이거는 인간들이 하나님과 연관된 통하는 눈물이 아니고 본인을 사수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사투를 벌이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은 자기 눈물 외에는 흘릴 줄 모른다는 겁니다. 자기 슬픔 외에는 알 수가 없어요. 인간은 자기 신체가 있기 때문에 신체는 다른 신체와 결합 될 수 없다는 한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보면 이 구조의 틀이 깨져버립니다. 신약성경 에베소서 1장 22~23절에 나오는데 인간의 지혜와 노력으로는 도저히 알고자 해도 알 수가 없는 엄청난 범위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만물에다가 ‘머리’라는 인간의 신체 일부를 만물에 집어넣을 수 있느냐는 겁니다. 세상에는 사람 머리만 있는 것이 아니고 원숭이 머리, 토끼 머리가 있거든요. 물론 나무가 바위틈에서 자라기는 하지만 바위는 바위이고 나무는 나무예요. 토끼는 토끼이고 사슴은 사슴입니다. ‘내가 누구냐’를 달리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네가 아니다’라는 말로 우리 자신이 ‘나는 나다’라고 그렇게 표현이 가능합니다.

이 말은 내 머리는 네 머리가 아니고, 내 팔은 네 팔이 아니고, 내 다리는 네 다리가 아니다. 나는 철저하게 ‘나’라는 한계를 사수하고 지킨다.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내가 흘리는 눈물은 전혀 너에게 전달이 불가능하고 또 전달될 수도 없는 일이죠. 그래서 여기 에베소서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머리가 어떻게 교회 머리가 되느냐. 교회라는 것은 성도의 그룹을 교회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우리는 우리인데, 어떻게 우리 머리가 오늘날 우리 머리가 멀쩡하게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머리가 예수님의 머리 안에 통합이 될 수 있는 세상에 그런 일이 다 있느냐는 거죠.

예수님의 신체 따로 있고 우리 신체 따로 있는데. 이런 말씀을 할 때마다 다시 한번 성경 말씀을 항상 바닥부터 시작해야 해요. 바닥부터 시작하는 쉬운 예는 ‘이순신 장군 신체와 내 신체와 같으냐’라고 이렇게 묻는 거예요. 이순신은 이순신이고 나는 나인데 어떻게 내 머리에 이순신 장군 머리가 앉아 있느냐. 이건 말이 안 되죠. 성경에 나오니까 일단 믿어야 하니까, 한번 믿어 볼까? 이건 거짓말이고 억지죠.

믿음 아닌 것을 어떻게 믿는 것으로 위장하려고 하지 마세요. 예레미야가 눈물을 흘렸다. 예레미야의 눈물의 효과로 백성들이 산다? 어머님 기도 못 잊어 우리가 산다? 물론 찬송가에 나옵니다만 어머니가 메시아입니까? 아들자식이 아무리 못되어도 어머니가 기도만 하면 자식이 잘된다? 그걸 사자성어로 ‘중보기도’라고 합니다. 어디 이런 거짓말이 있습니까. 우리가 메시아 일을 왜 우리가 빼앗아 가요. 있을 수 없죠.

메시아가 예수님 메시아 따로 있고, 나 따로 있으면 메시아가 몇 명이에요? 두 명. 두 명 되잖아요. 그러면 식구 네 명이 다 교회 간다면 그 집에 메시아가 네 명이에요. 이런 유명한 노래가 있어요. 내가 원래 설교시간에 노래를 잘 안 부르는데 오늘 특별히 불러야겠어요. ‘뱀 세 마리가~ 한집에 있어~아빠 뱀, 엄마 뱀 새끼 뱀~’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뱀의 자식이에요.

식구 세 명 있다. ‘뱀 세 마리가~ 한집에 있어~아빠 뱀, 엄마 뱀 새끼 뱀~’ 어떤 집은 지금 두 식구가 있는 집안도 있고, 네 식구가 있는 집안도 있어요. 뱀 네 마리가 있는데 네가 운다고 해서 그 울음을 내가 납득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엄마가 운다고 해서 남편이나 자식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것으로부터 나와서 자기에게로 거둬지는 것이 해석이기 때문에 남의 심정, 남의 사정을 인간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몸만 따로가 아니라 마음도 따로예요. 그러면 예레미야가 운다는 것은 공연한 울음이죠. 사실 여기 예레미야 9장 2절에 보면 “어찌하면 내가 광야에서 나그네의 유할 곳을 얻을꼬 그렇게 되면 내 백성을 떠나가리니 그들은 다 행음하는 자요 패역한 자의 무리가 됨이로다”라고 나옵니다. 나그네가 유하는 곳, 농막이라고 하죠. 그 농막같은 빈집이라도 있으면 나는 저들과 관계 끊겠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행음하는 자요, 패역한 자의 무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원래 따로따로인데 거기에 대해서 예레미야가 울고불고할 이유가 없죠.

너는 너 따로, 나는 나 따로인데 왜 우느냔 말이죠. 예레미야도 그 당시에 하나의 메시아같은 역할 하는데 메시아 역할이 뭐냐 하면 “다 이루었다”라는 역할은 예수님만 하시고요, 예레미야는 결핍이 있는 메시아 역할을 해요. 메시아 역할이라는 것은 한쪽은 백성 입장에 있고 또 한 쪽은 하나님 입장에 있는 거예요. 그 두 쪽이 하나가 되어서 여기서 눈물이 삐져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출발점이 뭐냐 하면 ‘이 백성은 다 하나님을 버렸다’라는 것에서 나오는 눈물이죠. 그 눈물이 결국 마지막에 눈물이 기쁨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눈물이 눈물로 가야 해요. 두 종류의 눈물이 있습니다. 하나의 눈물은 속이 터져서 우는 눈물. 예레미야가 그렇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전해도 듣지를 않죠. 안 듣습니다. 들을 생각이 전혀 없어요. 이유가 뭐냐 하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저희끼리 아주 신이 났죠. ‘잘~ 될 거야’라고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예레미야가 갖고 있는 예레미야의 속에 담겨있는 장차 오실 십자가에 죽으시는 아픔을 지닌 메시아의 모습을 그들은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레미야 말씀을 해석 못 하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 성경 말씀을 해석 못 하는 이유는 말씀 속에서 예수님의 눈물에 접하질 못하기 때문에 해석 안 된다는 이런 평가를 받는 거예요.

그러면 그런 눈물로 시작해서 왜 끝에 우느냐. 그것은 주님의 사랑이 표준이 되고 기준으로 확정된 세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평생을 다하여 울고, 울고, 또 울어도 시간이 모자라요. 너무 좋아서, 너무 고마워서 우는 눈물. 단순히 기쁨의 눈물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아요. 너무 고마워서, 내 한평생 남은 사명은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그건 우는 일만 남아있어요. 너무 고마워서.

평소에 아버지 없이 자식을 혼자 키우면서 그렇게 부족하게 하는데 늘 엄마는 마음속에 미안해하죠. 여느 가정처럼 너에게 뒷바라지 못 했는데. 그 자식이 철이 났었는지 자기가 알아서 공부해서 지금은 사법고시 폐지되었지만, 그 당시 한 번에 1차, 2차, 3차, 그리고 면접까지 합격해서 검사가 될 때, 엄마는 그 자식의 손을 꼬~옥 잡습니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저 울고, 울고, 또 울고, 이 못난 어미 용서하라고 하죠. 무슨 죄를 지었는데 말이죠. ‘이 못난 어미 용서해라. 너 하나 돌보지도 못하고 방치하듯이 내버려 두고, 나는 그저 한 끼 밥 먹는데 급급해하며 그렇게 살았는데 네가 그렇게 의젓하게 잘 되어주니 내가 보일 수 있는 것은 내 눈물밖에 없다’라고 자식의 손을 잡고 울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성도도 마찬가지예요. 주님 앞에서 차마 발을 붙들지는 못하지만, 누구처럼 집에 있는 향수병 가져와서 발에 팍 깨고 나서 자기 머리털을 가지고 그 먼지 잔뜩 묻은 발을 골고루 닦으면서 울고 울고 또 우는 거예요. ‘제가 한 것도 없는데, 정말 한 것도 없는데, 왜 저의 죄를 몽땅 다 사해주십니까. 제가 한 것도 없는데’ 물론 향수는 다 깨버렸기 때문에 더이상 향수는 없지만, 그다음에 또 주님 만나면 또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예수님이 무덤에 가니까 무덤까지 찾아가서 우리 주님 시체 잘 있는가 확인하는 것처럼, 이미 평생을 울었다는 말은 내 마음이 어떻게 되든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내 마음은 주님께서 다 가져가 버렸어요. 내 마음은 주님께서 다 가져가 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어려운 용어로 뭐라고 하느냐. 무의미라고 하지 않고 탈 의미라고 하는 겁니다.

빼앗겨 버린 의미. 전에는 나에게 있었던 의미가 주께서 십자가에 대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의미 있다고 여긴 것이 이제는 탈 의미, 나에게는 빈자리만 생기고 그 의미는 주님에게 가버렸죠. 그 전에 우리 자신들은 어떠했는가. 우리 자신만을 죽도록 사랑했죠. 그 죽도록 사랑했던 나에 대한 사랑이 떨어져 나가서 주님에게 갔습니다. 날개 달고 주님 쪽으로 가버렸죠.

나에게 나만 있다고 여긴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내가 있다고 한 그 자리에 내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주님의 사랑이 일찍부터 거기에 있었던 거예요. 그 사랑이 나를 떠나서 본래 자리, 주님 쪽으로 가는 겁니다. 가니까 그제야 ‘아, 저게 사랑이었었구나. 지금껏 내가 살아왔던 우여곡절, 모든 것이 주의 사랑이었구나’라는 사실을 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계속 우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면 ‘방향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행동을 어떻게 똑바로 하느냐, 어떻게 개차반처럼 하느냐는 그런 것들은 묻지도 않아요. 네가 얼마나 많이 알고 똑똑하느냐는 그런 것도 안 묻습니다. 네가 얼마나 업적이나 실적을 많이 쌓느냐는 그런 것도 묻지 않아요. 네가 지금 어디를 바라보느냐.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 못 간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어린아이는 자기 쪽을 안 바라봐요.

‘나는 아빠, 엄마 없어도 살아’라는 것은 이미 어린아이가 아니죠. 어린아이는 항상 부모 쪽을 볼 때 비로소 어린아이라는 대접을 받아요. 자기는 자기를 안 봐요. 자기가 있는 줄도 몰라요. 맨날 엄마 아빠만 쳐다봐요. 방향성입니다. 관계성, 방향성. 방향성이 구원의 능력이에요. 구원의 힘입니다. 탕자가 아버지 유산 가져갈 때는 자기만 쳐다봤죠.

다 떨어지고 난 뒤에 탕자가 한 것은 방향성이었어요. 우리 아버지 집이 있잖아. 그쪽 방향으로 고개를 돌릴 수 있는 거. 자기 사랑을 포기하고 오히려 반대로 자기를 죽도록 미워하죠. 미워해야 할 대상을 그동안 사랑했다는 것에 대한 애증의 관계, 내가 참 쓸데없었던 거짓된 짓거리, 헛짓거리를 평생 동안 해왔다는 회한의 눈물. 그런 눈물을 흘리게 하신 사랑에 대한 고마움의 눈물. 이 눈물이 두 개가 겹치게 하는 겁니다.

비록 신체가 달라도 주님의 눈물은 우리를 예수님의 한 몸으로 만들어내죠. 조성해냅니다. 주의 흘린 눈물이. 우리의 눈물은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없지만, 주님의 눈물은 우리의 머리 부분에 주님의 머리가 떡하니 결합 가능하도록 하는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내렸습니다. 그러면 예레미야의 눈물완성인 주님의 눈물이 어디 있는지 한 번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1장 32~35절에 나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을 그대로 응용하겠습니다. 인간의 신체는 결합 되지 않는다. ‘나는 당신이 아닙니다’라는 원칙을 고수하면서 인간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그 세 식구, 뱀 세 마리가 한집에 사는 그 세 식구도 똑같았습니다. 비록 주님과 마음이 하나 되기 위해서 예수님께 이 식구가 얼마나 봉사를 많이 했는지요.

마르다는 큰딸이 되어서 요리를 잘해요. 예수님 맛있는 거 해드린다고 잡채, 탕수육, 만두, 김밥, 라면, 이런 거 해드리면서 예수님 대접하고 그 여동생은 일단 싸가지가 없어요. 지는 언니 준비하는데, 가뜩이나 잡채가 손도 많이 가는데, 자기는 주님 턱밑에 딱 앉아서 일렬(첫줄)에 앉아서 관람하며 주님 말씀 듣는 거예요. 그 가정은 주님 사랑한다고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오빠가 죽었다고. 인간의 눈물이었죠. 예수님 눈물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보다도 나에게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나에게 와서 나에게 의미가 되어야 한다는 거죠. 이걸 무의미로 만들려고 해도 그건 종교 행위밖에 안 됩니다. ‘부족합니다~부족합니다~겸손합니다’라는 그거는 전부 다 가짜예요. 이제 이 의미가 빼앗겨서 탈 의미로 바뀌어야 해요.

마리아가 이야기합니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종교적으로 어떤 환타지(환상))를 갖고 있어요. 주님의 능력이 임하니까 우리는 혜택을 본다. 주님의 존재가 우리 존재를 살린다. 이런 것들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겁니다.

인간이 성경 말씀 가지고 조립이 가능한 거예요. 그러나 그게 아니에요. 잃어버려야 해요. 내 귀한 거 잃어버려야 해요. 오빠를 잃어버려야 해요. 인간이 해석의 수풀에서 내가 해내는 해석에서 내가 빠져 나와야 해요. 이건 인간으로서 가장 어려운 과업인데, 어려운 과업이지만 해야 해요. 무능한 것은 알지만 무능함이 불가능을 통과해서 예수님의 제물과 피로 말미암아 이것이 연결되어야 합니다.

계속 말씀 보면, 마리아가 눈물 훔쳐가면서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민망이라는 것은 주님의 모든 성경 해석이 너의 성경 해석에 막혀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이건 말해도 못 알아듣는다는 것을 익히 아시지만, 새삼 그것을 주께서 체험하시는 겁니다. 왜 예수님께서 예레미야거든요. 그들의 심정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예수님과 성도는 한 몸이 될 수 없습니다. 한 몸에는 같은 사랑과 같은 슬픔과 같은 기쁨을 공유하고 있어요. 같이 흐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다음부터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사람들 비키라고 하고 주님이 무덤을 향해 죽은 자보고 이야기하죠.

산자나 죽은 자나 모두 죽은 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사로가 살았을 때도 죽은 자이고 죽었을 때도 죽은 자이니까 인간이 죽었다고 하는 것은 주님에게는 난관이나 애로사항이 아니에요. 살아있을 때도 못 알아들으면 죽어서도 못 알아듣거든요. 여기서 흘린 눈물을 염두에 두시고 그다음 누가복음에 있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6장 25~26절에 보면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이게 예레미야의 심정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 아무도 없고, 모두 간음한 자고, 모두 세상 쪽으로 다 가버렸어요.

그 아픔에서 예레미야는 눈물을 흘렸고 예레미야는 말합니다. 내가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고 나를 아예 눈물 통, 눈물 탱크로 삼기 위해서 주변에 그러한 거짓 선지자들, 그러한 말 안 듣는 백성들로 배치했다는 사실을 예레미야가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 예레미야의 자리가 예수님이 찾아들 자리예요. 그리고 오늘날 우리 성도에게 찾아들 자리입니다.

그러면 끝으로 성도는 어떤 눈물을 흘려야 하는가. 로마서 5장 3~4절에 나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환란 중에서 즐거워해요. 빌립보서 4장도 같은 말씀이에요. 4~5절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세상에 대해서는 기뻐하고 주님을 향해서는 고마움의 눈물을 이 평생 다하도록 울고 또 울 때 그때 악마가 꼬시는 어떤 세상적인 유혹도 다~~~탈 의미가 돼요. 그것이 아무 의미도 없는 무의미가 되는 동시에 탈 의미, ‘내가 옛날에 너와 많이 놀았잖아. 이제 고만 해라~마귀야. 많이 먹었다’라는 탈 의미. ‘너 그러면 죽는다. 대를 이어서 저주받는다. 너 인생 실패한다. 굶어 죽는 수가 있어. 너 남에게 욕 얻어먹으면 좋으냐?’라고 협박하면 ‘그래그래~좋아 좋아~ 내가 욕 얻어먹을게’ 라는 이게 자유잖아요. 눈물로 얻어진 자유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눈물만 기억하고 주의 눈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세상 신이 가렸기 때문인 줄 압니다. 이제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기쁨의 눈물밖에 없는 것을 도리어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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