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말씀과 맞교환

아빠와 함께 2023. 6. 18. 17:22

서울강의20230615a 요한일서 2장 2절(말씀과 맞교환)-이 근호 목사


요한일서 2장 1절에서 6절까지 제가 읽겠습니다. “(2:1)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3)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을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저 안에 거한다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찌니라”

지금 1절부터 6절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이걸 아시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전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인간을 인정하지 않느냐 하면 [죄라는 것은 인간이 인간임을 자각하는 것]이 바로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죄라는 것을 여러분이 모른다 치고 인간이 인간을 자각하게 되면 여기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인간은 자기 행위의 돌려막기]를 시도하게 돼요. 자기 행위. 내가 누구냐를 알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하고 그 행동을 함으로써 내가 나를 찾아가는 여정, 내가 누구냐를 확인해보고자 하는 여정, 인간은 이걸 행하는 거예요.

A에서 B, B에서 C, C에서 D, D에서 A, (A→B→C→D→A) 원래 출발했던 그것을 그대로 되돌아오는 겁니다. 인간의 돌려막기입니다. 평생을 다 가도록 이 일만 인간은 하게 되어있죠. 자기라는 그 폐쇄구조에서 벗어날 생각이 전혀 없고 벗어날 방법도 모릅니다. 방법에 대해서 아는 게 전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일체, 인간이라는 것을 전적으로 인정하지 않아요. [인간은 지움, 삭제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여기 요한일서에 나오는 모든 인간은 자기가 인간이라고 여긴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니에요. 인간보고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자기가 인간이라고 여기면 1절부터 6절까지 한 마디 한 마디 무슨 말인지를 전혀 못 알아듣게 되어 있어요.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예를 들면 “나의 자녀들아” 이것은 이미 성인이 된 사람들에게 내가 누구의 자녀라는 것은 어울리지 않겠죠.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할 때 죄라는 것에 대해서 인간은 아는 게 전혀 없습니다. 인간은 죄를 몰라요. 죄를 모르니까 2절에 화목제물도 모르는 거예요. 죄를 위한 화목제물도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온 세상이 죄라는 것도 몰라요. 온 세상이 다 죄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 못합니다. 이 세상에는 죄도 있지만 선한 것도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 인간은, 여기 인간이라는 것은 그냥 인간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세상 안에 있는 나를 가리켜서 인간이라 하는 거예요. 세상이 몽땅 죄라면 거기서 태어난 나가 자동적으로 뭐가 돼요? 죄가 되죠. 그걸 우리는 용납 안하죠. 단박에 거부하죠. ‘세상이 죄라는 것을 알고 있는 나만큼은 죄 아니라고 빼주세요.’ 이렇게 돼요, 인간은.

네가 하는 것이 나쁘다 하면 B로 교체하면 되고요. B 그것도 네가 문제 있다 하면 C로 또 바꾸면 되잖아요. 인간은 행위의 돌려막기, 돌려치기 아닙니다, 돌려막기. 자기 행위의 돌려막기를 해요.

이 카드사에 빚졌으면 다른 카드사로 돌려막기 하듯이 계속 돌려막기하는 겁니다. 지키고 싶은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이라는 자기 자신을 지키고 싶어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이 죄라고 할 때, ‘인정할 테니까 나는 거기서 빼주세요.’라는 마음이 절로 일어나게 되죠.

죄 모르니까 화목제물 모르죠. 화목제물 모르니까 세상이 전부 죄라는 것을 인정 못하죠. 그걸 못하면 뭘 모르냐? 계명이라는 것을 모르죠. 계명을 모르게 되면 무엇을 모르냐? 거짓말이 뭔지를 몰라요, 4절에. 거짓말이 뭔지를 모르죠. 거짓말이 뭔지를 모르면 진리가 뭔지를 모르죠. 진리 모르면 그다음에 사랑이라는 것도 모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요한일서 2장에 들어오려면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을 중지하고 달리 출발해야 됩니다. [인간과 말씀을 맞교환]해야 됩니다. 인간과 말씀 사이에 치환(置換, replacement, transposition)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치환이라 하는 것은 어떤 두 개의 대상 가운데 하나를 다른 걸로 바꿔서 표기하는 것을 치환이라 합니다. 예를 들어 철수, 영희, 영철이가 있다면 이걸 치환할 때는 뭐냐? 철수를 A라 하고 영희를 B라 하고 영철이를 C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이걸 기호로 바꾸는 것을 치환이라 하잖아요. 이런 걸 어려운 말로 기표(記標, signifiant)라 하는데 이렇게 하면 더 어려워지고…

하나의 문자 A, B, C로 해도 되고 더 치환을 확실히 하는 것은 숫자로 하는 거예요. 철수를 ①로 하고 영희를 ②로 하고 영철을 ③으로 한다면 여기서는 철수, 영희, 영철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세 사람이 있어요. 세 사람이 여기 있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제 불만이 철수의 개인적인 자존감 같은 건 찾을 수 없죠. 영희의 자존감, 영철이의 자존감은 여기선 거부당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말씀을 치환하라는 겁니다. 치환해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인간의 구조는 말씀의 구조로 치환]되죠. 말씀의 구조로 치환되는 겁니다. 인간의 구조가 뭐가 이렇게 말썽이고 문제가 되느냐? 인간의 구조가 유지되어버리면 여기서 사적인 분류를 시도해요. 사적인 분류. 분류 또는 분간. 내가 내 주변에 있는 상황들에 대해 분류를 시도한다니까요. 너는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너는 나한테 이익인 사람, 나한테 손해인 사람, 나한테 필요한 사람, 나한테 쓸데없는 사람. 자꾸 인간이 사적인 분류를 해버리는 거예요.

사적인 분류를 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기한테는 이 분류가 옳다는 겁니다. 이런 사적인 분류가 나한테는, 방금 뭐라고 했어요? 옳다고 했죠. 올바르다. 자기한테는 올바른 거예요. ‘저건 나한테 해코지할 사람, 나가. 이 사람은 도와주는 자야, 이리 와.’ 분류했잖아요. 분류가 자기의 선택과 결정은 올바르다는 거예요.

문제는 이게 진리입니까? 이게 진리냐 이 말입니다. 진리가 아니죠. 그러면 이걸 뭐로 분류해야 돼요? 분류를 하되 사적인 분류를 금지시켜야 되죠. 금지해야 되죠. 사적인 분류를 금지하는 것. 사적인 분류는 이게 사적이니까 개인적인 가치를 유지하잖아요. 그 개인적인 가치가, ‘너는 왜 분류해?’ ‘나는 사람이니까 분류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 라고 하겠죠.

인간이 인간임을 자각하는 그게 뭐라고요?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네가 뭔데? 이렇게 되죠. 네가 뭔데. ‘나 요한일서 볼 거야.’ 보지 마! 네가 왜 그걸 봐? 너 볼 자격 없어. 나 마태복음 읽을 거야. 그거 읽지 마! 넌 읽을 자격 없어. 왜? 보면 그걸 분류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는 것은… 이 인간세계, 인간세계라 했는데 제가 오늘 표현하기로는 인간구조라 했죠, 인간구조로 바꾸면 인간구조에서 하나님께서 제시한 것은 [없는 계명의 출현]이에요. 없는 계명의 출현, 이걸 주께서는 골로새서(1:26-27, 2:2, 4:3-4)나 에베소서(1:9, 3:3-6, 3:9, 5:32, 6:19)에서 고린도전서(2:7, 4:1, 14:2, 15:51)에서 ‘비밀’이라 해요. 비밀.

그래서 성경을 보는 사람들의 근원적인 문제가 뭐냐 하면, 나는 내가 사람이라는 이 인식 자체가 이게 죄고 문제 있다는 생각을 안 가지고 나는 요한계시록 백독을 했니 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벌써 열독을 뗐니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제가 표현하기에 이건 뭡니까? 자기의 성경 보는 행위의 뭐 막기? 돌려막기. 계속 돌려막기하는 거예요. 돌려치기 아닙니다, 돌려막기입니다.

뻔히 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성경 보면 나중에 결론은 뭡니까? 나온 해석이 뭡니까? 뻔히 아는 것. 결국 뻔한 것이 시도해서 나오는 것은 뻔한 것. 뻔뻔이에요. 뻔뻔. 뻔한 것에서 출발해서 뻔한 것. ‘나 천국 가고 싶어요.’ 성경 읽어서 결론은? ‘역시 나는 천국 갔다.’ 이게 뭐에요?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일반 사람들이 교회 가서 “목사님, 저 교회 나왔으니까 천국 보내주세요.” 목사님께서 “성경말씀 이렇게 있는데 성경말씀 여기서 믿습니까?” “믿습니다.” “천국 갔네요. 안녕히 가세요. 다음에 또 봅시다.” 이게 뭡니까, 이게. 인간구조에 갇혀있는 거예요. 인간굴레에 갇혀있는 거예요. 처음부터 뭔가, 뭔가 처음부터 잘못되어 있다는 인식을 우리가 갖고 있어야 돼요.

마태복음 4장 봅시다. 4장 19절 보면 이런 말씀 있습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한다. 자, 베드로가 다른 사람을 낚을 때 뭐로 낚느냐 하는 겁니다. 말씀으로 낚는다? 아니죠. 말씀의 구조로 낚는다. 말씀의 구조로.

저는 이걸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말씀의 방사망]. 말씀에서 뻗어 나와서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는 촘촘한 망. 낚시가 아니라 그물. 그럼 그물은 촘촘하게 씨줄 날줄이 교차되어 있죠. 이걸 뭐라고 합니까? 그물 고(罟)죠, 그물코. 이걸 영어로 하면 knot. 이 코와 나를 1대 1로 치환하고 맞교환을 해버리는 거예요.

나는 나다, 가 아니라 어떤 말씀이 나를 생산하고 구성하느냐를 보는 거예요. 성경을 대하는 태도가. 어느 말씀이 나로 하여금 지금의 나로 표출되게 했는가? 어떤 말씀이 나를 하나의 인간존재로서 생산하게 만들었는가? 왜 그러느냐 하면 말씀은 운동력이 있으니까. 활동력이 있거든요.

말씀을 익혀서 말씀을 배워서 내가 구원받겠다는 것은 아까 이야기한 돌려막기에요. 자기 속이는 거죠. A에서 B, B에서 C, C에서 D, D에서 A. 평생을 교회 다니면서 말씀 연구해봐야 그것은 자기구조죠. 말씀의 구조가 아니고 자기구조입니다.

내가 나를 자각하기 위해서 말씀을 수단으로 도용한 거예요. 수단과 목적도 구분 못합니다. 평생을 가도 수단과 목적을 구분 못하죠. 인간이 수단이 되어야 될 텐데, 말씀이 수단이 되고 자기가 목적이 돼버린 거예요. 뭐에요, 그게? 장난친 거죠. 말씀 가지고 장난친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우리가 말씀 돌려막기를 한다는데 좀 하면 어떻습니까? 마음의 위로만 된다면 그거 좀 하면 어떻습니까?’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거에요. 예수님의 죽으심이 장난입니까? 죽기 위해서 말씀 보면 제가 이해하겠어요. 그게 아니고 살기 위해서 말씀 보니까 문제가 된 거예요.

예수님은 죽기위해서 말씀을 봤잖아요.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시켰잖아요. 예수님과 달라도 너~~~무 다른 거예요. 너무. 가는 방향도 다르고. 그걸 가지고 갈 길이 달랐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갈 길이 다른 거예요, 갈 길이. 방향이 서로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성경공부해주고 성경 봐주는 것이 뭐 아주 큰 유세에요, 유세. 큰 행세를 하고 있는 줄 알아요.

문제가 뭐냐 하면, 무슨 수로 우리가 자신의 구조에서 말씀구조로 빠져나갈 수 있느냐? 이게 제일 큰 난관이죠. 성경에선 그걸 뭐라고 했습니까? 없는 계명의 출현, 이게 비밀이란 말이죠. 말씀의 방사망은 비밀이에요.

그 누구도 말씀에 대해서 아는 바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독단적인 성취에 의해서 깔아놓은 방사망이기 때문에 촘촘한 말씀의 그물망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몰랐어요.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다른 세계로 비밀로 남아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라인(line)으로 표현합니다. [주님은 어디 계신가? 라인 뒤에 계신다.] 라인은 누가 만들었는가? 인간이 만들었죠. 예수님을 추방했으니까요. 핍박하고 추방했으니까. 저리 가, 하고 밀어냈으니까. 인간이 밀어내서 형성된 그 경계선, 그 너머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걸 베드로전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해요. “건축자들의 버린 돌” (벧전 2:7). 건축자들이 버려버린 돌. 건축자들은 인간들에게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행위를 보여주는 거예요. 여기 건축자들의 건축행위에 대해서 다른 인간들은 동조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동조함으로써 건축자들의 행위는 인간들에게 인정받았어요. 인간들에게 인정받는 범주, 범위, 그 라인 뒤에 버린 돌로 누가 계시다? 예수님이 계시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비밀이 어디 있는지 가고 싶습니다.’ 하는 말은 거짓말이에요. 자기가 추방해놓고 뭘 이제 와서 딴 소리, 헛소리하고 있어요. 뭘 보고 싶어요? 네가 보고 싶으면 쫓아냈겠어요? 우리 가정에서 우리 교회에서 우리 직장에서 나의 생활공간에서 우리는 걸핏하면 예수님을 나의 라인 밖으로 추방시켜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돌려막기, 인간이 자기가 자기를 자각하는 데에 방해되는 것을 인간은 모조리 처단하기 때문에 그래요.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죠.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자기가 시도하는 그 앞길을 막아서면 공격하거나 죽이거나 파괴시키는 거예요.

심지어 두 살 먹은 아이도 아빠, 엄마가 눈에 뵈지를 않습니다. 자기가 노리고 손에 쥔 초콜릿을 먹는데 그걸 저지한다? 앙, 하고 물어버리죠. 엄마 손인지 아빠 손인지 그걸 구분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 일을 방해하는 존재, 거기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공격 성향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애들을 키우면서 한 열댓 번 물려봐야, 아~ 자식 키웠다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럴 때 엄마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손이 두 개가 있어요. 물린 손 말고 다른 한쪽 손이 애 등짝을 때려버리죠. 이게 인간세계 구조에 남아있는 훈육방법이에요. 이걸 교육이라고 하는 거예요. 너는 어디까지나 인간세계의 사람으로 남아야 돼. 그러려면 기존의 인간구조에 네가 편입되어야 되고 거기에 충실해야 되고 종속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런 표현에 대해서 요한복음 19장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끝까지 인간을 얼마나 놀리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을 결정적으로 놀리는 방법은 요한복음 19장 21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패에 이 글자가 쓰였어요. 요한복음 19장 21절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여 있어요. 유대인들이 앞에 뭘 하나 더 붙여야 된다고 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자칭’입니다. 21절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자칭.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으로 그냥 갔어요. 그냥 가자, 유대인의 왕으로.

자, 유대인들, 인간들 구조는 자칭이라 합니다, 자칭. 자칭을 더 어려운 말로 하면 참칭(僭稱, 분수에 넘치는 칭호를 스스로 이름)이라 하는 거예요. 참칭이라 하는 것은 거짓되면서 진실인 것처럼 위장하는 걸 참칭한다 하죠. 쉽게 말해서 이건 도용(盜用)한다는 말이죠, 도용.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말은 메시아를 뜻해요. 그러면 지금 기존 유대인이라는 나라의 인간구조에서는 메시아의 올 자리가 비어있거든요. 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그럼 예수님의 주장은 ‘기다릴 필요 없이 여기 내가 왔다’ 가 돼요. 왔다.

내가 왔다 함으로써 이 유대인의 인간구조 안에 있는 이 중에서 IQ가 190이고 인격이 훌륭하고 성격 좋고 아침에 일어나서 남의 집 앞까지 쓸어주는 그러한, 성실하고 자비하고 인자가 많고 동정심이 많은, 인격적으로 훌륭한 이 자체 모두가 부정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자체가. 이런 것들이.

유대인들이 혹(인간구조의 실선에 추가적으로 붙어있는 점선으로 된)처럼 메시아를 기다리잖아요. 제 말 한번 잘 들어보세요. 메시아를 기다린다고요. 그럼 그들은 눈에 보이는 실선과 눈에 보이지 않는 메시아와 그들 마음속으로 결합이 되어 있어요. 결합이 되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메시아의 자리에 유대인의 왕으로 왔잖아요. 오니까 메시아를 떨쳐낸 거예요. 자칭, 어디 참칭해서 메시아도 아니면서 메시아인척 해?

쫓아냈다는 말은 메시아만 받겠다는 말이 아니고 메시아와 연결된 이 전체가 전부다 가짜란 뜻이에요. 누구 보기에? 예수님보기에 가짜가 되는 거예요, 이거는. 아무리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훌륭해도 이건 소용없는 거예요. 구조상 이 인간구조 전체가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말씀의 구조에서 대립관계에 있는 겁니다.

제가 글을 쓸 테니까 이게 무슨 뜻인지 보세요. 두 개의 글을 한번 비교해보겠습니다. 첫째,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말씀이죠.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 먹을 것 입을 것 말이죠,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게 첫 번째 문장입니다. 두 번째는, 7남매 가운데 제가 둘째 딸입니다. 자, 두 문장의 차이점은?

두 번째 문장이 그렇게 어려워요, 이 문장이? 이게 편하죠? 저 7남매 가운데 둘째 딸입니다. 이게 막 분노를 유발해요, 이게? 화를 막 돋우게 만듭니까? 뭐? 7남매 중 둘째 딸이라고? 당장 하옥하라! 이렇게 되는 겁니까? 아니죠. 왜 이 말에 격노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는 겁니까? 왜 분노하지 않아요?

인간구조 안에 들어 있잖아요, 인간구조 안에. 건축자들이 버릴 돌이 아니라고요, 이거는. 우리는 남들과 소통이 편하게 유지될 수 있는 그런 말들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져 있어요. 친근하게 녹아져 있다고요. 이런 2번 말을 하면서 분노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가 지금 편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럼 친구가 듣고 있다가 너 둘째 딸 아니고 셋째 딸인데? 아~ 맞다. 잘못됐다, 잘못됐다. 내가 나이 많아서 착각했나봐. 수정, 내가 셋째 딸입니다. 나이 들면 다 그러네요. 셋째 딸로 수정했어요. 이게 뭡니까? 아까 인간은 자기 행위를 무슨 막기? 돌려막기가 가능해요, 돌려막기가. 그 사람은 자기가 셋째 딸인데 둘째 딸로 잠시 착각했다. 그럼 이거는 반성이고 회개가 되는 거예요. 반성하지 뭐. 회개하면 되죠.

그런데 첫 번째는? 첫 번째는 인간 2번에서 보면 이건 도박이에요! 이거 도박입니다. 그 나라 의를 구했는데 먹을 거 입을 거 안 주면 누구만 손해 보기 때문에? 나만 손해 보죠. 나만. 아니, 내기할 걸 내기해야지. 이 터무니없는 걸 어떻게 내기해요?

그러니까 제 말은 뭐냐? 1번이 2번에 섞인다, 아니면 추방됐다? 몇 번입니까? 추방되죠. 말씀의 구조는 인간구조에 의해 추방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은 ‘없는 계명의 세계’ 또는 생산. 없는 계명의 생산입니다. 인간세계에는 있어도 추방하니까 없는 게 되는 겁니다. 인간세계에는 말씀은 없는 거예요.

그러면 1번이 2번에 들어오려면 어떻게 하면 되죠? 지금 우리가 공부해야 될 것은, 2번이 1번으로 들어가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2번이 1번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고 2번에 1번을 집어넣으려고 하는 거예요. 2번에 1번을 집어넣으려면 2번은 어떻게 하느냐? 그 나라 의를 구하면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주더라 하는 이러한 사례들을 돌려막기 해야 되겠죠. 이제 여기서 구라가 시작됩니다. 간증집회가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7남매 둘째 딸이 아주 넉넉하게 살아가요.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게 집에 넘쳐가지고 처리 곤란해요.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 그 나라 의를 구하면 먹는 것, 입는 것을 주신다 하면 이게 막 땡깁니까? 아, 그런 수가 있네. 그렇게 먹고 사는 방식도 있네, 하고 막 땡깁니까, 아니면 귀찮습니까? 아휴, 알았어요. 알았어요. 집에 지금 있는 것도 천지여서 다 먹지도 못하는데… 알았어요. 먹는 거 입는 거 지금 홈쇼핑해서 원피스 이만큼 쌓여가지고 그것도 지금 다 못 입고 누구 나눠줄 판인데… 집이 세 채나 되가지고 돌려막기로 자려고 해도 관리비가 막 나간다. 지금 돈 많은 사람한테는 전혀 먹히질 않는 거예요.

그럼 이건 어떨 때 먹히느냐 하면 거지들, 빌어먹고 있는 인간들. 그것도 관심사가 그 나라 의가 아니에요. 일단 먹는 것, 입는 것 챙겨주신다면 뭔들 못하리. Love is 뭔들. 먹을 것 준다면 뭔들 못하리, 이래가지고 찾아온 사람들이에요. 내 병만 고쳐준다면 예수가 아니고 뭐라도 다 찾죠. 자기 병만 고쳐준다면. 이런 식이에요.

중요한 것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 할 때 그 낚는 게 뭐냐 하면 말씀의 구조로 낚아요. 말씀의 그물망입니다. 말씀의 그물망은 인간구조와 이렇게 연결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했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는다. (마 9:17) 이게 세트가 돼서 와야 돼요. 포도주만 있으면 담을 수 있는 게 아니고 새 포도주는 거기에 합한 새 부대까지 만들어야 새 포도주가 빛이 나게 되어 있어요. 가치가 윤곽이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말씀이 우리에게 찾아오려면 말씀이 우리에게 찾아온다면 우리의 인간구조는 존재하면 안 되겠죠. 그럼 우리가 말씀구조의 일부가 되어야겠죠. 말씀구조의 일부. 글쎄, 그걸 어떻게 하느냐 이 말입니다. 말은 쉬운데. 우리가 인간구조 포기하고 말씀구조의 일부로 그물코, kont, 말씀구조의 일부로 어떻게 그게 되느냐 이 말입니다, 그게. 비밀인데요. 그게 될 수가 없는데요. 말씀과 나를 교체하면 참 좋겠죠. 교체가 안 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 교체하는 방법, 있습니다. 오늘 강의 여기서 끝낼까.

[유한과 무한의 만남], 다시 말해서 말씀세계 무한에는 유한한 것, 제한된 것, 한계 있는 것, 자기폐쇄구조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그 유한성, 그 유한성과 접속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연결고리가 마련되어 있어요. 이걸 두 자로 언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언약.

주께서 언약가지고 유한한 우리 자기백성을 연결하게 되면 연결된 지 안 된지를 확인해야 될 게 아니겠습니까. 연결되고 싶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에요. 진짜 연결됐구나를 어떻게 아느냐? [성도는 새로운 규칙에 눈을 뜨게 된다.]

바로 이 점입니다. 새로운 규칙에 눈을 뜨면 돼요.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방식 말고 다른 규칙 안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돼요.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그런 건 몰라도 괜찮아요. 하여튼 새로운 규칙을 발견하고… 이제 한번 정리해봅시다.

성도가 됐으면 [1번, 새로운 규칙에 눈을 뜨게 되고 2번, 그 새로운 규칙이 왜 인간으로부터 저항당했느냐. 거부당했느냐.] 왜 인간으로부터 거부당했는지. 이 두 개의 사실에 눈을 뜨게 되면 그 사람은 새로운 규칙에 들어온 이미 합류된 성도이고 천국백성입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규칙도 중요하지만 그 규칙이 인간으로부터 왜 저항과 거부를 당했는지, 이유가 있어야 되겠죠. 그 이유가 뭐냐? 바로 인간의 기대와 의지 때문에. 인간의 기대와 의지로 인하여 새로운 규칙이 공격을 받았어요.

인간의 기대와 의지라 하는 것은 인간이 자기를 자각하고자 하는 본능에서 나왔습니다. 나는 나이고 싶다. 나는 인간이고 싶다. 그게 그냥 ‘인간이고 싶다’로 끝나는 게 아니고 나는 인간, 내가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뭘 하면 되지? 라고 뭔가 시도를 한 거예요. 시도, 기대, 의지.

이것을 종교적으로 한 자들이 바로 유대 지도자에요. 유대지도자와 유대나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기 의와 기대와 의지를 거기다가 뿜어넣는 거예요. 이 뿜어넣은 결과가 뭐냐 하면 새로운 규칙을 거부하게 만들고 저항하게 만들었던 겁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도 그렇지만 여기 누가 포함되느냐 하면 열두 제자들도 여기에 포함이 돼요. 열두 제자에 성령이 오니까 어떻게 되었어요? 눈을 떴죠.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난 뒤에 눈을 뜬 거예요. 눈을 떠보니까 본인이 하는 짓거리가 비로소 파악이 된 거예요. 주님 중심이어야 될 이 새로운 규칙과 새로운 세계에 겁도 없이 내가 주인공처럼 설쳐댔다는 그 회한, 후회가 막 밀려오는 거예요. 그럴 때, 나는 인간도 아니다. 정말 하나님이 만들었다 하는 자체가 부끄럽다. 나는 인간도 아니다.

그러니까 새 부대가 뭐냐 하면 옛 부대에서 새 부대로 바뀌었는데 그 바뀐 게 옛 부대에 주님께서 피해 본, 인간으로부터 맞아죽었죠, 얻어맞아 죽었죠, 그 십자가 죽음사건이 여기 옛 부대에 묻히게 되면 그 사람은 새 부대가 되는 겁니다. 참 쉽죠? 굉장히 쉬워요. 뭐 돈을 교회에 갖다 바치란 말이 아니고 선교하란 말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피가 의미 있게 나한테 묻히면 되는 거예요.

문둥병자가 치료되었을 때 그 제물이 뭐냐 하면 날갯죽지에 죽어버린 동료 새의 피가 창공을 향해 날아가는 자유를 만끽하는 새에 그 피가 묻어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새가 날아가면서 ‘나는 살았다’가 아니에요. 피가 산 거예요. 언약이 살아있는 거죠.

예수님의 죽음이 한번 사건으로 종결된 게 아니고 그 죽음이 무한의 연결망을 자기 새로운 새 피조물을 통해서 확장되는 겁니다. 피 묻히고 네 마음껏 돌아다니란 말이죠, 피 묻히고. 다 이루었다는, 그 다 이루었음의 흔적을 지니고 너 하고 싶은 멋대로 하라. 너 하고 싶은 멋대로. 네 행위에 구애받지 말고. 냉면을 먹든지 물만두를 먹든지. 체해서 활명수를 잡숫든지. 하여튼. 그냥 멋대로 해. 피 묻히고 멋대로 해.

이제 서서히 요한일서 2장이 감 오십니까? 유한과 무한이 어떻게 만나느냐. 무한을 어떻게 만나는가. 방금 제 이야기가 뭐냐 하면, 여기 피가 묻어있죠. 이게 유한의 끝, 유한의 마감, 유한의 경계선에서 주님은 주님 피로써 우리를 마중 나오시는 겁니다. 피로써. 새 언약이죠. 내 살과 내 피로써 마중 나오는 겁니다.

하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레위기에 17장에 보면 피채 먹지 말라 했어요. 피가 묻은 채로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이 율법에 있어요. 레위기 17장 10절, 뭐든지 먹을 때 피채 먹지 말라. 그런데 요한복음 6장에서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보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내 살과 내 피를 먹으라 했어요. 이것은 노골적으로 레위기 17장 10절을, 율법을 위반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 인물 못났다고 미워하는 게 아니에요. 귀담아 들어요. 저 사람이 율법대로 하나님의 거룩한, 모세가 단독적으로 하나님께 받은 율법대로 사는 사람이라면 메시아 될 후보감으로 내가 넣어줄게, 라는 만발의 마음 준비가 되어 있어요. 말씀대로 한다면 왜 당신을 내칠까요? 그렇지 않고 합력하여 그 나라 의를 위해서 노력할 가능성이 그러한 마음자세가 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위반한 정도가 아니고 도발한 정도에요. 이거는 인간이 생각하는 율법체제 전체에 대해서 발라버리는 겁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먹으라고? 그러면 영생이 있다고?

그러니까 무한이 유한을 찾아와서 무슨 이야기했어요? 피 이야기했죠. 피 이야기하니까 그 많던 제자들이 다 떠나가고 단 한명도 남아있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오병이어 몇 명 먹었어요? 남자만 삼천 명이지만 삼천 명 다 따라온 건 아니고 한 백 명 따라왔다 합시다. 예수님이 백 명보고 이야기하고 글자 쓴 거예요. 뒤에 있는 줄 알고. “여러분, 내 살과 내 피를 마시고…” 뒤돌아보니까 아무도 없어요. 다 갔어요. 뭐에요?

뒤에 보니까 열두 제자만 있는 거예요. 열두 제자만 남았다는 말은 다 갔다는 뜻이에요. 이 사람들은 안 간 이유가 예수님 피 이야기 들으려고 온 게 아니고 예수님이 선택해서 들러붙어있는 거예요.

열두 제자는 남아있는 인간의 유한의 한계점을 보여야 될 임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옛 부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해서 예수님 증거해야 될 그 사람들이에요. 그렇게 해서 열두 제자는 없는 계명 생산에 대해서 증언할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인간세계에서 철수해갔습니다. 아예 없습니다. 계명 없으니까 지킬 것도 없습니다.

인간이 지킬 게 있는 것은 뭐냐? 자기가 한 자기 행위를 거두는 걸 가지고 인간들은 그걸 말씀 지켰다고 우겨대는 그 세계, 인간구조만 남아있어요. 전부다 소용없는 짓거리만 하는 거예요. 전체가 다. 인간세계 전체 다. 아무짝도 소용없는 것. 50년, 60년 신앙생활해도 아무 소용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 쪽에서 철수해나갔습니다. 철수했죠. 철수하면 그걸로 바이바이 끝났네요. 피 이야기하니까 삐쳐가지고 제자들 다 가버렸어요. 열두 제자도 가버리고 따라온 제자들도 가버렸어요. 따라온 사람들을 제자들이라 했거든요.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돌아보니 다 갔어요.

그럼 남아있는 사람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이죠. 그럼 예수님이라도 이뤄야죠. 예수님 본인이 아버지의 계명을 이뤄야죠. 그럼 이 계명은 단독으로 성취시킨 계명이 되는 겁니다. 단독. 이 새 계명의 특징은 둘을 용납하지 않는 특징을 갖고 있어요. 저도 지켰습니다, 가 용납 안 되는 계명. 오직 예수님만 지켰고 우리는 그냥 들러리입니다. 주의 증인이라는 뜻이죠. 우리는 그냥 들러리로 갖다 붙어있습니다, 그런 의미를 뿜어내는 계명. 그 계명만 생산된 거예요.

가라 가라 다 가라. 하지만 아버지의 뜻은 너희들 없어도 나 혼자 달성할 수 있고 아버지를 기쁘게 할 수 있다. 그런 주님의 자신감과 실효성. 성취. 그래서 주님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써 드디어 누리호 성공했습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데에 1단계, 2단계 다 성공했어요. 자, 그 성공의 결과가 뭐냐? 그것은 10분 후에.

 

 

서울강의20230615b 요한일서 2장 2절(말씀과 맞교환)-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의 끝지점에서 우리가 도달한 것은, 유한과 무한의 만남에서 무한 쪽에서 제시한 것은 이미 확정적이에요. 내 살과 내 피. 인간이 예수님을 추방했던 그 방식을 주님께서는 도리어 구원의 연결고리로 사용해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할 때 그게 그물망의 코를 형성해요. knot, 그물망의 코를 형성하게 됩니다. 주님의 무한의 말씀의 고리.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이야기하면 나라는 인간, 인격을 고리와 맞교환해야 돼요. 바꿔치기. 그냥 전에는 내가 중심이고 내가 중심이기 때문에 방사망으로 분류를 하는 거예요. 저 사람은 나한테 필요한 사람, 못난 사람. 저 사람은 이익 되는 사람, 분류를 했어요. 중심은 내 중심으로 그대로 있는 거예요. 이 방사망에 누구까지 걸려들었어요? 예수님, 하나님까지 막 걸려든 거예요. 자기는 중심에 버젓이 있으면서. 말씀 지키고 온갖 거 다 하고 선교, 전도, 회개, 봉사 다 하고 하는데 여전히 자기가 중심이잖아요, 이거는. 이거는 사기죠.

그런데 말씀에서는 인간은 필요치 않습니다. 말씀과 말씀의 연결고리가 되어야 돼요. 왜 그렇게 되는가? 바로 이 방사망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예수님이 단독 성취시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 이 지점에 왔던 A라는 사람, B라는 사람이 걸려들면 이 사람들은 마지막에 뭐로 연결되는가? 예수님의 단독 성취로 한쪽에 모아지는 겁니다. 이걸 에베소서 1장 10절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함이라.

그럼 이 현장에서 일어나는 사태는 어떤 사태냐 하면 [인간의 모든 행위가 말씀에 의해 저지당하는 사태]가 일어나죠.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어떤 행위도 그것이 저지당하는 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무엇을 할까요?’라는 기도를 했다면 응답은 ‘주께서 저를 어떤 식으로 저지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내 행동과 계획을, 내 의도와 계획을 저지하겠습니까?’라고 이렇게 나와요.

Input, 입력을 ‘내가 무엇을 할까요? 어떻게 살까요?’라고 기도했는데 Output, 출구에서 나오는 응답은, 주께서 우리를 어떤 식으로 저지해주신다는 거예요. 이게 기도의 응답인 겁니다. 내 뜻대로 안되게 해주는 게 기도의 응답이에요.

내 뜻대로 안 되는 기도의 응답을 위해서는 내 뜻대로 밀어붙여야 돼요. 내 뜻대로 밀어붙여야 망가진 게 생기죠. 하지도 않는데 무슨 망가짐이 있겠어요? 그렇게 해서 말씀의 완성과 성취성과 현재 나라는 존재와 맞교환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우리가 말씀의 구조 속에 놓여있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태, 이러한 사건에 대해서 예수님은 팔짱끼고 구경만 하시는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8장 20절에 보면,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 있으면 기도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저 머리 둘 곳 없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를 하는 사람 있습니까? 없죠.

그러니까 인간 속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몽땅 주께서 미리 다 뽑아냈다 보시면 돼요. 그래야 저지가 정당화되니까요. 네가 하는 일은 무조건 네가 못하는 일로만 내가 너를 인도해서 네가 갈 수 없는 그 길로 가게 하겠다. 그래야 이게 비밀이 되죠. 라인 뒤로 갈 수가 있는 거예요.

주님의 복음이 있는 라인 뒤, 비밀로 못 가는 것은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서 시도를 안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시도할 때 우리의 시도 속에 우리의 기대와 의지가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뭔가 얻고자 하는 결과에 대해 우리가 포기를 안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내가 원하는 내가 되고자 시도했던 거예요. 그거는 자기 세계지, 주님의 나라 천국은 아니잖아요.

이런 이야기가 지금 오늘 본문 요한일서에서, 예수님의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의 그 많은 이야기가 오늘 요한일서에서는 짧게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게 화목제물이에요. 제물이 아니고 무슨 제물이요? 화목제물.

우리는 지금 아주 성질나 있는데 하나님은 화목하대요. 한쪽은 지금 부루퉁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거 봐, 화목하지 그치? 이러고 있단 말이죠. 어디서 우리가 기뻐해야 됩니까? 어느 구석을 보고 우리가 웃어야 돼요? 웃을 건덕지가 없는데. 내 뜻대로 안되고 저지되었는데 뭐가 기뻐요?

화목하다는 것은 서로 서로 화해되었다, 드디어 이제 불만 없게 되었다, 이런 뜻이잖아요. 제대로 관계가 유지되었다. 정상적인 관계로 돌입했다. 화목제물의 뜻이요. 그런데 우리는 화목제물로 인하여 우리의 뜻과 의지가 계속 좌절되고 있는데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걸 화목제물이라고 하나님은 빙그레 지금 만족스럽게 웃고 있단 말이죠. 웃으시는 겁니다.

이 점을 이제부터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어떻게 해서 화목제물이 우리의 뜻을 저지하는 용도로 나타나는가, 현실상. 실제상. 크게 우리가 분류한다면 이겁니다. [말씀과 실제의 관계는?] 말씀이 작용하고 있다고 할 때 말씀이 눈에 안 보이잖아요. 그러면 말씀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의 확실한 실제적 증거는 무엇이냐? 증거를 제가 쓰겠습니다. [살인사건의 연속성]이에요. 예수님에게 일어난 살인사건의 연속성, 반복성 이게 실제입니다. 이게 화목제물이에요.

이 땅에서 인간들의 구미를 끄는, 주님의 살인사건보다 더 심각하고 중요한 일을 주께서는 허용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살인사건보다 십자가 사건보다 더 귀중하고 다급한 일이 없는 쪽으로 주께서는 세상을 움직여나가죠.

살인사건의 연속성이라는 것은 인간의 모든 시도가 실패가 되는 구조를 작동시키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시도가 실패가 되는, 실패로 끝나는 그런 구조를 주께서는 작동합니다. ‘너희들이 나를 죽여놓고 너희들이 배부르기를 원했어?’ 취지가. 네가 하나님을 죽여놓고 네가 여유롭게 살 생각이나 마음을 먹었다 이 말이지, 과연? 너 그건 환타지야. 실제 사건은 하나님이 죽었다는 그것만 실제 사건이고 나머지는 다 환타지에요. 다 환상에 불과하고 망상에 불과한 겁니다.

예를 들어서 지난 달에 우리 딸이 결혼했다. No! 그건 사실이 아니야. 그건 사실이 아니라는 거예요. 뭐가 사실이 아니야? 지난 달에 부조 다 내놓고. 신랑 신부 사랑하십니까, 다 했는데. 일어난 일을 사실이 아니라고 왜 그렇게 억지를 부리느냐? 이야기한다면, 내 딸과 사위가 결혼식한 이것이 말씀의 고리에서 살인사건과 관련된 사건으로 편입되는 거예요.

갑자기 논리가 붕 떠버렸죠. 내 딸이 결혼식 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관련성이 있다고요? 이건 루팡 사설탐정 한 200명 동원해야 돼요. 이게 어떻게 연관이 되는가? 이 연관성, 강도사 시험 논문으로 내볼까? 딸 결혼식과 십자가의 연관성을 논하라, 이런 거. 이 중간과정에 뭐가 들어오면 되겠어요? 바로 말씀이 되겠죠. 말씀.

그게 골로새서 2장에 나옵니다. 2장 2절과 3절. 그러니까 성도가 되어가지고 바로 이걸 찾는 즐거움이 있어요. 나에게 일어난 어떤 것도, 그러니까 안경이 잘 안 맞아서 안경집에서 안경 바꾼 것과 십자가의 연관성을 논하라, 이런 거요. 그런 즐거움이 있어요. 일어났던 모든 일, KBS 수신료를 분리해서 징수한 것과 십자가의 연관성을 논하라, 이런 거요.

여기 보면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2절과 딸이 결혼했다는 사실이 어떻게 연관되느냐 하면, 예를 들어 마음의 위안을 받는데 처음에는 결혼식해서 애 낳고 다복한 행복한 가정이 되자고 하면서 위안을 받았는데 주께서는 아까 어떻게 했어요? 인간이 하는 의도를 전부다 저지하죠. 그걸 통제라 합니다.

위에서 주님의 십자가로 통제를 하는 거예요. 통제하면서 세상적인 위안이 점점 더 삭감되면서 여기서 왜 내 뜻에 대해서 주님 쪽에서 내 뜻이 그쪽 방향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왜 주느냔 말이죠. 나는 애 키우고 당신은 돈 벌어와서 우리 행복한 단란한 가정을 만들자고 꿈을 꿨는데 이것은 나의 기대와 의지잖아요. 내 기대와 의지가 이상하게 막혀버리는 겁니다.

막히는 것을 조사해보니까 그 막히는 원인이 어떤 비밀과 관련되어 있어요. 라인 밖에 설치되어 있는, 인간구조 바깥에 작동하고 있는 그 비밀이, 무한한 비밀이 유한한 세계를 갖고 노는 겁니다. 내게 속한 나의 세계, 나의 가정을 갖고 노는 거예요.

갖고 노니까 그게 비밀이고 그 비밀의 목적은 뭐냐? 그리스도를 깨닫는 겁니다. 아, 이게 그동안 내 행복위주로 나갔구나. 행복위주. 행복위주로 나가면서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지식으로 우리는 돌려막기를 했는데 더 이상 주께서는 이걸 용납하지 않고 더 깊이 있는, 그 안에 있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감추어진 보화와 터치, 접촉할 수 있도록 나로 하여금 다른 세계에 눈을 뜨게 하는 작용이 그 능력이 어디서 나왔다? 십자가 능력에서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딸이고 사위라면 대빵이죠. 그거는 정말… 인간구조에서 말씀구조로 이미 들어와 있는 사람이죠. 참, 꿈같은 이야기다. 꿈같은 희망사항입니다, 그건.

거기에 대해서 장인, 장모나 시아버지, 시어머니는 어떻게 기도하겠습니까? 결혼식 때 축복하기를, 그저 내 딸, 내 사위가 자기 하는 족족 다 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할 용기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요. 없죠.

그러니까 그들은 뭐를 생각하느냐 하면 애 낳고 남편 돈 잘 벌어오고 단란한 가정. 그런데 문제는 그 구조가 성경의 그물망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인간구조에는 있어요. 남들 다 그렇게 사니까.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그게 하나의 유행이 되고 그게 앞사람을 뒤따라가는 삶이니까, 젊은 쪽에서는. 앞에서 양육하는 대로 훈육하는 대로 교육시킨 대로 그게 사람 사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세뇌받았잖아요.

가는데 주께서 강제로 빼돌린 거예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지, 하면서 강제로 빼돌리는 겁니다. 넓은 길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넓은 길로 잘 가고 있는데, 그것도 박자 잘 맞춰가지고 딴따라 딴딴 딴 행진곡 맞춰서 무탈하게 잘 가고 있는데 강제로 빼돌려서 좁은 길로 가게 하는 거예요. 생명이 있는 길로.

방향 틀 때 난리도 아니죠. 난리도 아니에요. 하나님 없어. 예수는 존재하지 않는 거야. 아주 발악을 해요, 발악을. 어릴 때부터 주일학교 다니고 나는 모태솔로는 아니고 모태신앙이고 유아세례 다 받았는데 소용없어, 소용없어. 다 헛거였어.

구약에서 우상숭배를 언급한 것은 너의 숭배가 헛것임을 알려주는 겁니다. 이게 구약 언약의 효과에요. 예를 들어서 사무엘상 7장 3절 같은 경우에는,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이렇게 되어 있죠.

이 말은 이방신과 아스다롯 섬기는 것을 중단하고 여호와만 섬겨버리면 그동안 블레셋의 압제에서 네가 벗어난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거래인지 한번 보세요. 블레셋을 압제하도록 누가 조치했습니까? 여호와가 조치했잖아요.

그러면 여호와께서 그냥 블레셋에서 풀어주고 일단 풀어주고 난 뒤에, 선혜택 후조치 해주시면 되잖아요. 그렇잖아요. 블레셋에서 풀어주고 그다음에 내가 블레셋에서 풀어줬다. 잘 섬길래? 예. 이게 더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이상하게 나만 그런가요? 이거 뭐 도발하는 것도 아니고요. 내기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뭡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상대로. 그것도 약하디 약한 인간을 상대로.

문제는 그들이 우상을 버리고 아스다롯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왔잖아요. 그래서 블레셋에서 해방되었죠. 문제는 어느 쪽이 문제냐 하면 여호와가 변했어요. 여호와 쪽에서 약속 위반해버린 거예요. 여호와 쪽에서.

“자, 제가 우상 버렸습니다. 하나님, 블레셋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제 우리가 여호와 섬기면 되죠?” 그럼 여호와 쪽에서 “그때 알던 여호와가 아닌데?” 이렇게 나와요. 이제 와서. 왜냐하면 여호와는 마지막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로 갈 때까지 멈출 수가 없어요. 그 행진을.

그런데 인간은 말씀 돌려막기해가지고… 자기가 보조를 맞춰서 그 십자가 가까이까지 인간이 가야 백성이 되는 거예요.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되는데 따라가다가 멈추는 거예요. 나 안 갈래. 아, 진짜 이거 가다가 망하는 수가 있겠네.

제가 설교시간에 언급한 거예요. [짙은 어두움은 새벽의 언저리다.] 짙은 어두움은 바로 다 왔어요. 다 온 거예요. 말씀의 구조에서는 인간과 말씀을 맞교환시키는 방법이 짙은 어두움이에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밤에 달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인격이 훌륭한 사람, 아이큐가 높은 사람, 돈을 많이 버는 사람, 가난한 사람, 부자 관계없어요. 밤에는 누가 지배자냐? 달이 지배자에요.

주님께서 환난도 만드시고 빛도 만드셨습니다. 자기 백성을 건지는 방법은… 그들이 어두움에게도 지배받을 수 있어야 빛에도 지배받을 수 있는 거예요. 지옥에서 지옥 삶을 할 수 있어야, 지옥 같은 더러운 이 삶, 지저분한 삶이 나한테 마땅함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천국에서 빛의 세계에 살 수가 있는 겁니다. 양쪽 다 말씀의 지배이기 때문에.

이것은 흥정 대상이 안돼요. ‘한번 하나님 하시는 거 보고, 믿고 안 믿고는 그때 가서 제가 판단하겠습니다.’ 이것은 아직도 인간이 자기 자각을 하는 겁니다. 이것은 죄라 했죠. 인간은 자기가 죄인 것을 모르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구약에서, 우상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 할 때 이미 거기서 블레셋이라는 수갑을 채워놓고 네가 돌이키면 수갑 풀어줄게, 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나와서 회개하고 여호와 섬긴다 해도 여호와께는 블레셋 수갑이 마지막 수갑이 아니었어요. 또 다른 수갑이 있어요. 바벨론, 앗수르… 뒤에 보면 하나님의 형사한테 수갑이 한 두 개가 아니에요. 작년에 그만큼 당했으면 올해는 편하겠지. 아니요. 올해 수갑 또 있어요. 내년 좀 낫겠지. 없어요. 내년 수갑은 또 더 큰 수갑이 기다리고 있어요.

인자는 이 땅에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 머리 둘 곳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자꾸 머리 둘라 해요. 좀 쉬었다 갑시다. 좀 쉬었다 가면 안 되겠습니까? 너무 다그치면 내가 자빠지니까 머리 좀 두고 갑시다. 베개 확 빼버릴라. 이유가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했어요. 예수님의 살인사건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살인사건에 가장 대항마로서 주님의 살인사건에 대해서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내세우는 사건이 뭐냐? 나 천당 갑니까, 지옥 갑니까? 하는 자기 구원문제를 십자가에 최후의 카드로 정면에 내세워요. 그래서 인간들이 자기 구원문제, 이 구원문제를 확정해주면 그다음부터 하나님 잘 믿겠다 하고 장땡을 내놓으니까 하나님 쪽에서 광땡 내놔요. 어디서 수작질이야, 이게? 이 세계에서 네 구원문제가 왜 나와? 네 구원문제가? 평소에 그걸 노렸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마태복음 19장, 안 볼 수가 없습니다. 제가 자꾸 요한일서 안하고 마태복음 돌아다니느냐. 요한일서 2장은 압축되어 있어요, 화목제물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내용이 화목제물 하나로 압축되어 있어요. 압축파일을 지금 푸는 겁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사도잖아요. 예수님의 사도가 예수님과 겪었던 모든 것이 화목제물로 다 압축이 되어 있어요. 새삼스럽게 사도 요한이 다시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거 설명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 결과로서 생긴 효과가 마태복음 19장 28절인데 27절부터 보면,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질문하는 꼬라지하고는… 정말. 이래가지고 예수님 배신한 거예요. 그런데 이게 베드로 개인적인 질문이 아닙니다. 자기가 반장이니까 대신 이야기한 거예요. 우리 의견은 이렇게 일치되었습니다. 주님 뭐 해줄 거요?

지금 이 베드로의 질문 속에는 예수님의 살인사건은 전혀 들어있지 않습니다. 다른 데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했잖아요.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 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2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죠. 예수님도 말씀하시면서 중간에 뭘 하나 뺐죠. 뭐를 뺐습니까? 십자가 사건, 살인사건을 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면 듣는 베드로는 단절성 없이 그냥 내가 원하는 지금의 원함이 나중에 천국 가서도 나의 원함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옛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 뒤에 봅시다. 29절,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이거 뭐 약을 올리는 건지… 어떻게 된 거예요, 갑자기? 버리면 줄게, 이런 뜻이거든요. 버리면 줄게.

지금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요.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 전토 이 항목을 다 한 바구니에 담으면 뭐가 되겠어요? 이게 바로 나를 형성시키고 자아를 형성시켰던 구조입니다, 구조. 나는 이 속에서 자아가 형성되었어요.

그래서 우리 자아라 하는 것은 내 주변에서 나를 나 되게 한 것을 잊을 수가 없고 그 관계를 내 마음대로 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눈치보고 저 눈치보고 자꾸 눈치를 봐야 돼요. 그래서, 인간은 내 마음대로 한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고, 남의 시선 주시 하에 내 마음대로 하죠. 타인이 나한테 시선을 주는 그 범주 안에서는 그 범주에 부응하고 호응하도록 내 마음대로 내 결정을 하는 거예요.

문제는 타인이 출제하고 답은 내가 푸는 거예요. 그게 뭐 내 마음대로 하는 게 되는 겁니까. 문제 자체가 나를 종속시키는데요. 문제 자체가 나를 얽매어버리는데…. 이미 ‘너는 이 범주 안에서 행동해!’ 라고 결정된 상황에서 우리가 행위를 함으로써 그걸 누구한테 검사 받아요? 문제를 던진 자에게 숙제검사를 받는 식으로 우리는 평생을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뭐 어른들 다 돌아가셨는데… 자식은 타인 아닙니까? 나 엄마한테 실망했어, 이렇게 나오면… 부모가 ‘나 너한테 실망했어.’ 그 소리보다 더 가슴 아픈 소리는 뭐냐? ‘나 엄마한테 실망했어. 앞으로 내 인생 망치거든 다 엄마 책임인 줄 알아.’ 이렇게 나오면요. 말은 안하지만 행동 자체에서 그게 막 뿜어져 나오는데요. 그걸 간파하고 있는 이상 어떻게 하겠어요. ‘그래, 그래. 앞으로 잘해줄게. 대출받는데 얼마 필요하노? 2억? 큰 거 2장? 알았어. 내가 어떻게 해볼게.’ ‘참, 엄마 훌륭한 엄마라고 생각해.’

우리는 스스로 우리를 나쁜 엄마라는 생각으로 방향 짓지를 않아요. 평가를 남들이 하기 때문에. 남들이 나를 평가해주기 때문에. 교회 목사가 나를 평가하고 집사, 장로가 나를 평가하는 거예요. 저 집사는 제대로 됐는가? 십자가 지지도 않는 인간들이 나를 평가하도록 그걸 왜 용납합니까? 왜 그걸 용납합니까.

그들의 공통점이 뭐냐? 너도 살아있고 나도 살아있기 때문에. 주님은 여기다 뭘 집어넣습니까? “나는 죽었는데? 나는 살인사건 때 죽었는데?” 인간들로 인해 죽은 분의 평가를 들어야지, 멀쩡하게 살아있는 자의 평가에 주눅 들어서 주님 살인사건은 완전히 배제할 때, 주님의 저지가 작동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너도 살아있고 나도 살아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너도 잘 살아있는지를 내가 감시할거야, 이 뜻이거든요. 이것이 누적되면 ‘내가, 내가 제대로 잘 사는지, 내가 감시할거야.’ 이렇게 돼요. 타인의 감시에 너무 길들여지다 보니까 우리는 타인이 감시하기 전에 내가 먼저 일차적으로 내가 나를 감시하는 체제 속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이 무서운 게 아니고 가까운 내가 나한테 진짜 무섭죠. 그런 인간을 주께서는 어떻게 조치하시는가? 이런 인간, 도저히 천국에 갈수도 없는 인간을 주께서는 어떻게 만드는가? 이렇게 만들어요. point, 점. 위치. 하나의 지점으로 만들죠. 점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어떤 점? 십자가 사건이 터져버린 분화구로 만들어요, 분화구. 이게 말씀이 운동력 있어 살아있는 결과입니다.

모든 말씀은 자기 백성을 방치하지 않고 다가와서 살인사건을 반복시킴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분화구, 내가 나 잘난 척하고 있는데 밑에서 빵! 하고 터트리는 주님의 십자가 능력으로 나는 뻥! 하고 해체되고 남아있는 것은 내가 해체되었다는 빈 구멍만 남아있는 거예요.

이 빈 구멍의 테두리, 이것이 바로 거듭난 성도의 자아입니다. 주께서 십자가 사건을 터트리고 남아있는 그 테두리 있잖아요. 블랙홀 안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블랙홀과 그 근처에 있는 경계선이 바로 자아를 형성하는 겁니다.

그러면 지난번 설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은 결론적으로 뭐냐?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언급함으로써 내게 어떤 아무것도 없기에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전혀 남아있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려요.

이 사건이 터져버리면 빈 테두리가 되죠. 그럼 성도가 있고 또 이쪽 성도가 있다면, 성도가 그렇게 흔한 게 아닌데, 성도가 이렇게 네 명 있다고 합시다. 네 명 사이에 말씀으로 고리가 연결되어 하나의 말씀구조가 형성되겠죠. 이걸 교회라고 이야기합니다. 아이고, 교회이야기, 벌써 몇 분 지났어요? 교회가 이제 나와요. 이걸 오늘 본문에서 “나의 자녀들아”라고 하는 겁니다.

공통점이 있다면 성도 안이 십자가사건이 터진 분화구죠. 화목제물이죠. 이것도 화목제물. 내가 너하고 화목했다, 가 아니라 화목제물 자체가 여기에 담겨있는 거예요. 이 화목제물은 우리하고 거래한 게 아니고 일방적인 화목제물이에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나 너 받아주기로 결정했어. 천국에서 너 받아주기로 결정했어. 일방적으로 한 거예요. 우리하고는 의논하면 안 되죠.

이 살인사건은 예수님의 단독사건이기 때문에. 단독사건에서 이뤄진 거예요. 예수님의 단독사건은 하나님 아버지와 짝을 이뤄서 둘 사이에 단독사건이에요. 이것이 최초의 언약인 동시에 최후의 언약이었습니다. 아버지여, 내 살과 내 피를 받으시고 화목케 하옵소서.

예수님이 이 안에 들어와 계시고 우리는 예수님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흔적으로서 증상으로서의 테두리로 있으니까 이 모임에서 예수님의 화목제물만 여기서 교류가 일어나는 거예요. stream, 흐름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럼 성도의 대화는 어떻습니까? 이 테두리와 이 안을 이야기하면 되죠. 이 테두리는 뭐냐? 나 오늘도 또 깨졌어. 오늘도 또 깨졌어. “나 원래 월급이 한 달에 250인데 이번 달에 750들어왔어. 나 시험들 뻔했어.” 이거 뭐 자랑하는 건지 뭔지 하여튼 나 시험들 뻔했어. 이쪽은 “아휴, 당신 큰일날 뻔했구나. 부자가 천국 못 가는데 당신은 자칫하면 지옥갈 수도 있겠네. 큰일날 뻔했어. 나 이번에 그보다 더 큰 시험받았어.” “왜?” “그냥 노는 땅에 던져놨더니 열두 배 올랐어. 어떻게 할지… 지금 보상금 5억 2천 나오는데 이거 어디에 쓸지 모르겠어. 나 큰 시험 들었어. 이 고민거리 어떻게 하면 좋아, 형제님.”

둘 다 좀 미쳐 보이죠. 정신이 이상해보이죠, 이 세상에서. 다른 쪽은 “우리 애가 이번에 3차 변호사시험 합격했어. 나 어쩌면 좋아. 어쩌면 좋아. 걔가 그냥 로스쿨 있을 때는 아무 여자하고나 결혼할 건데 이제 변호사 됐으니까 선자리가 막 들어오는데 귀찮아죽겠어. 어쩌면 좋아.” 이러고 있다고요. 또 다른 한쪽은 “팔 저리고 했는데 계단 올라가보니 멀쩡해. 나 어쩌면 좋아. 큰 시험 들겠어. 난 빨리 죽어서 천국 가야되는데 세상에 더 살고 싶은 생각이 막 들어. 이거 어쩌면 좋아.” 이러고 있단 말이죠.

두 명만 미친 줄 알았는데 네 명 다 미쳤네, 이제는. 교회는 이런 미친갱이들의 집합이어야 돼요. 미친갱이들의 집합. 주께서 내 뜻대로 안되게 하는 것만 골라서 이야기하는 곳. 내 뜻이 저지되는 것만 골라서 이야기하는 곳. 나는 중국집에서 잡채밥 먹고 싶었는데 주방장이 안 된다 해서 짜장면을 먹었는데 짜장면이 왜 그리 맛있는지. 왜 주께서는 내 뜻을 자꾸 좌절시키는지 모르겠어, 이런 거요.

그것을 사도 바울은 어떤 일에도 범사에 감사하라고 한 거예요. 모든 일에.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라. 왜? 내 것이 없으니까. 내 것이 생기면 생길수록 딱딱 좌절시켜주니까.

아까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치료란 하나님께서 성도 되게 했다는 말은, 새로운 규칙에 눈을 뜨는 것이고 그 새로운 규칙에 눈을 뜨는 순간, 왜 나는 그 새로운 규칙에 그토록 반항했던가. 나는 무엇을 노리고 그렇게 그걸 싫어했던가, 도 같이 동반해서 눈이 뜨여지는 거예요.

다 이루었다는, 그냥 값없이 영생을 주는 이 귀한 가치를 내가 몰라보고 그동안 뭐 내 자존심, 교회 자존감 챙긴다고 그토록 부질없는 짓거리를, 봉사네 뭐네 해가면서 전도, 선교, 십일조 그 쓸데없는 짓을 왜 그렇게 많이 했는지. 그것을 매일같이 접하는 거예요. 왜 그렇게 했는지…

그 이유를 알아요. 내가 이걸 하게 되면 내가 아쉬운 것, 내 가정이 아쉬운 것, 가정의 행복이라든지 망가진 내 과거 인생이 회복돼서 충분히 보상받았다는 느낌을 받도록 내가 간사스럽게 하나님을 상대로 거래한 거죠. 본의 아니게. 이거 해줄 테니까 내가 원하는 것 주시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거래해온 거죠. 그걸 하나님께서는 좌절시켜버리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그걸 좀더 구체적으로 해보겠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구체적인데 왜 또 구체적으로 하느냐? 아까 유한과 무한의 만남이라 했죠. 유한은 폐쇄적입니다. 무한은 아까 비밀의 깊이죠. 비밀의 높이와 넓이가 엄청난, 하나님께 감사할 거리와 기뻐할 거리가 무한대로, 저장고가 무한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심으로서 주어졌던 그 무한한 것.

그 중에 하나만 이야기한다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천국을 상속받게 해줘요. 천국은 예수님이 혼자 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천국을 상속받아야 되는데 이것을 우리의 상속으로 같이 합류시켜주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우리를 같이 해같이 빛나는 영광스러운 자녀로 만드는 거예요. 땅에 있는 허접스러운 형상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해보다 더 밝게 빛나는 영광으로 보장해주는 겁니다. 이게 무한한 영광이죠.

그러면 이 폐쇄적인 유한에서 벗어나서 이렇게 무한과 만나게 될 때, 우리의 모든 기대와 의지는 항상 폐쇄적인 거예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중에서 플러스 알파를 우리는 요구하고 있었던 겁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 일종의 소꿉놀이하는 거예요, 그냥. 애들 소꿉놀이하는 거예요. 큰 세계를 보지 못하고 작은 것 그것, 나한테 행복이 되는 그걸 자꾸 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요구하는 걸 주지 않고 무한과 유한의 만남에서 뭘 발생시키시느냐? 우연을 발생시키죠, 우연을. 우연이란 뜻은 내 쪽에서 기대하는 것을 좌절시키고 해프닝이라 하죠, 사건이라 하는 겁니다. 이벤트, 예상 못한 돌발적인 것을 우리에게 훅 들어오게 만들어버릴 때 이게 친히 무한의 난입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내 집은 내가 내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 사수하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개방되어 있는,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대로 쓰실 수밖에 없는 개방된 공간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19장 다시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8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것이다 할 때, 29절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영생이 상속되죠.

그러면 29절 말씀대로 한다면 십자가 전의 말씀은, 내 희생을 각오하고 내 쪽에서 먼저 결심을 해야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리겠다고 마음 각오를 해야 그 다음에 뭘 준다? 그 반대급부로 영생을 주는 쪽으로 되어 있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무한에 대해서 유한한 인간이 넘볼 수 없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말씀하는 거예요.

‘누구든지 오른 손으로 범죄하거든 찍어버리라’ 이 말은 어느 누구도 자기 살을 찍어버려서 영생 얻을 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얘기에요. 오른팔이 잘못했다고 찍어버리면 나중에 찍고 난 뒤에 후회막심입니다.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오른팔 찍는다고 해서 나머지는 죄 안 짓겠어요? 왼팔도 죄 안 짓겠어요? 왼팔 찍어버리면? 사지 절단나도 인간의 죄는 남아있어요. 사지 절단해도.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이 이야기하는 건 그겁니다. 요한일서에서 주어지는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무한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한번 나열해봅시다. 죄, 유한입니까 무한입니까? 무한이죠. 무한에서 나온 죄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죄를 무한으로 보지 않고 유한으로 봐요. 내가 죄 지을 때만 죄고 착한 일하면 죄 아니라고 우기는 거예요. 참 그러니 신학이 얼마나 복음을 가리는지 아시겠죠.

화목제물. 화목제물은 예수님의 단독행위죠. 세상에서는 뭡니까? 하나님이 나를 설득시켰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니에요! 설득시킨 게 아닙니다. 설득시키면 화목제물을 내가 유지할 수 있어요. 화목제물은 주님이 유지하지, 내가 유지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그냥 빈자리만 제공할 뿐이에요. 주께서 마음대로 노니는 장소로서 주님이 마당놀이하시도록 장소만 제공될 뿐이지, 우리가 그 화목제물을 붙잡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붙잡을 수 있는 팔 다리는 절단 다 됐어요. 내 마음대로 주를 붙들고 내 마음대로 떠나고 그런 분 아니에요, 주님은. 다 거덜내버렸는데. 붙잡을 손이 없는데 어떻게 붙잡습니까.

그 다음 영생. 인간들은 영생을 오래 사는 거라고 생각해요. 주님은 영생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생은 인간들이 상상 못해요. 언어로 표현될 수 없습니다. 영생은 인간의 무한한 저주와 죽음의 반대개념이기 때문에 그래요. 오래 사는 게 아니고, 저주에서 벗어나는 게 영생이에요. 이게 무한 개념이에요.

그래서 이 무한 개념에 대해서 유한한 자가 무한 개념을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알 수 없는데 알 수 있어요. 어떤 경우에만? 우연한 경우. 다시 말해서 이게 사건화되는 경우에만 그래요.

그런데 사건은 돌아서면 잊어버린다는 거예요. 돌아서도 잊어버리고 안돌아서도 잊어버려요. 사건은 그냥 잊어버리게 되어 있어요. 사건을 잊어버리면 사건이 날아가버리죠. 날아가버리면 잊어버리면 우리는 다시 어디로 갑니까? 다시 유한으로 가는 거예요. 다시 유한으로. 또 사건을 일으키면 무한을 접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돌아서면 또 유한이에요. 그러니까 이 무한한 분이 우리를 갖고 노는 거예요. 계속 갖고 노는 거예요.

‘이만큼 알았으면 성경 다 알았겠지.’ 아니에요, 그건. 그거는 유한한 자가 유한 안에서 가지는 개념밖에 안돼요. 그러니까 무슨 지식을 얻겠다, 뭔가 노력을 하겠다, 봉사를 하겠다 이런 것이 십자가 사건, 살인사건 앞에서 이게 다 의미 없는 짓이라는 거예요. 봉사하고 섬기고 남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성경에 나온대로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다 의미없는 거예요.

뭐만 남아요? 주님의 화목제물, 살인사건만 남아요. ‘피로 다 이루었다’만 남는 겁니다. 그리고 그 외에는 몽땅 다 죄가 된다는 사실이에요. 그래서 이제 요한일서 돌아올 때가 됐죠. 끝날 때 다 돼가니까 요한일서 와야죠. 실컷 남의 동네 돌아다녔으니까.

요한일서 2장 3절 봅시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자, 없는 계명인데 주께서 이 계명을 앞장세워줘요. 왜 계명이 없는가? 우리가 만들지 않는 계명이고 주께서 단독으로 만든 계명이기 때문에.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뭘 알아요? 화목제물이니까 완료되었잖아요. 2절 봅시다.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죠. 그러면 화목제물이 발생되어야 그다음에 뭐를 압니까? 죄를 알아요. 어떤 죄? 무한한 죄. 우리가 지키면 없어지는 죄가 아니고 영원히 함께 있는 죄가 화목제물의 등장으로 같이 동반해서 등장하는 겁니다.

아, 인간은 뭘 해도 죄가 되는 것이 우리에게 기쁨이구나. 이게 감사거리가 되는구나. 조금 뭐 하나 했다고 착한 일했으니까 상 주세요, 이렇게 나와요. 주님의 살인사건도 잊어버리고 어디서 또 자기 잘난 척하려고….

뭘 해도 죄가 되기 때문에 뭘 해도 의가 되는 거예요. 동반해서 있기 때문에. 동반해서. 그러면 나는 뭘 해도 죄가 되고 난 뭘 해도 의가 된다면 그럼 나는 뭐냐? 너는 말씀과 교체했잖아요. 맞교환해버렸다고요. 네가 있는 자리는 말씀의 완성된 자리지. 그럼 나는요? 그 말씀의 완성이 품고 있는 하나의 빈 테두리가 너야. 네 안에 말씀완성이 들어있다고요. 그럼 나는 뭡니까? 너는 증인이지. 말씀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성령을 받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이제 끝으로 한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이 세상은 이미 접수됐어요. 십자가 살인사건으로 접수했습니다. 그다음에 하나님의 계명에 눈 뜬 사람은 천국으로 데려가고 나머지는 그냥 방치하는 거예요. 방치하는 게 가장 큰 저주입니다. 교회를 40년, 50년 다녔는데 아직도 복음이 믿기질 않아요. 누가 뭐랬어? 처음부터 너는 믿기질 않았어. 성경 지식이 포함됐다고 해서 좀더 나아지고자 하는 것은 죄의 무한함을 네가 너무 가볍게 여긴 거예요.

죄를 우리가 다룰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의를 우리가 다룰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화목제물을 다룰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룰 수 있지 않게 됨을 감사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분명히 예수님이 주요, 심판주요, 창조자인데 마치 우리가 주요, 심판주요, 우리가 창조자인 것처럼 행세했던 이것이 십자가 사건을 유발한 원인인 것을 깨달아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십자가 앞에서 다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 것을 눈 뜰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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