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생명의 향수병

아빠와 함께 2023. 4. 15. 22:39

 

서울강의20230413a 요한일서 1장 1절(생명의 향수병)-이 근호 목사

요한일서 하겠습니다. 1장 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여기서 그림 하나 그리겠습니다. 첫 번째 그림(그림1)은 두 개의 원을 그려놓고 하나님과 인간이 같이 공유했던 것(두 원이 겹쳐진 공통부분)이 뭐냐 하면 선악과와 생명나무였습니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두 번째 그림(그림2)이 되면 하나님 쪽 원은 공통부분이 빠져 초승달처럼 되고 인간 쪽 원은 공통부분 중 일부를 가져와 원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것이 여기서 결핍을 갖게 되었고 인간 쪽에서는 여분(공통부분)을 갖게 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는 일단 챙겼습니다. 공통부분이었던 생명나무는 하나님 쪽으로 일단 챙겼고, 선악은 인간 쪽에, 악마 쪽에 빼앗겼습니다. 빼앗겨버렸거든요.

그런데 생명나무는 짝이 있어야 돼요. ‘생명나무는 먹어도 된다’와 ‘선악은 먹어선 안 된다’와 짝이 있어줘야 하나님과 인간이 영원토록 결합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인간이 이렇게 (선악을) 가져간 겁니다.

그럼 인간이 가져갔으니까 인간 쪽에 자신이 가져갔다는 티를 내는 겁니다. 그 티를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쓰면 여러분들이 무슨 뜻인지 아실 거예요. [천사의 노래를 하는 악마]. 천사의 노래를 하는 악마. 사람들은 다 속아 넘어가겠죠.

헨델의 할렐루야. 천사의 노래를 하는데 그 천사의 노래를 악마가 부르는 거예요.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의 것을 떼어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을 자체적으로 조달했기 때문에 인간은 굳이 하나님 쪽으로 다가설 이유가 전혀 없죠. 천사의 노래를 악마가 마련하면 되니까요.

천사의 노래를 하는 악마, 이것은 ‘자체적으로 구원에 필요한 모든 조건은 구비된다.’라고 볼 수 있어요. 선악을 따먹었기 때문에 인간 쪽에서 신의 경지 또는 신의 차원으로 넘어갈 수 있는 아이디어는 인간이 일단 포로로 자기가 획득했잖아요. 악마가 천사놀이 한다니까요, 이게. 악마가 천사놀이 하니까, 악마도 물론 천사지만, 거룩하고 성스럽고 대단한 것을 마귀 쪽에서 조달해주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결함이 있는 신에게 결핍이 있는 신에게 다가갈 필요 없어요. 자체적으로 신을 만들어내면 되니까. 여분의 것,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는 것들 다 나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말고 인간이 신비로워하는 것 다 가져와. 그럼 다 가지고 나와서 뭐하면 됩니까? 자체적으로 구원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거기서 구비하면 되니까요.

그럼 이렇게 될 경우에는 무슨 논리에 들어가느냐 하면 선과 악의 지식을 가지고 자체적으로 생명이라는 것을 뽑아내고 만들어내면 되겠죠.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모든 인간들이 찬성하고 있다는 거예요. 모든 인간들이 이 점에 대해서 찬성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들도 충분하고, 충분한데다 신의 요소까지 추가했으니까 인간으로서는 충분하고 여기에 덧붙여져서 신의 요소까지 있으니까 더는 뭐 모자람이 없겠죠. 소프트 아이스크림이 있다고 봅시다. 이게 아이스크림 정량이에요. 그런데 여기에 한번 더 눌러줘요. 그럼 아이스크림 하나 덧붙인 거예요. (그림3)

보세요. 인간의 요소+신의 요소가 하등의 하자 없이, 거리낌 없이 결합이 가능한 아이디어가 나오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아이스크림에 하나 더 붙여도 아무 문제없이 밥 하나 추가하는 것처럼 아무 문제가 없는 거예요. 이걸 사람들이 납득하고 이게 이해가 되는 거예요, 이게. 이게 이해가 되는 거예요.

자, 이렇게 추가가 되니까……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그린 이유가 있어요. 아이스크림을 담고 있는 콘이 뭐냐 하면 자아입니다. 나입니다. 신이 내린 걸 추가한다 할지라도 내가 멀쩡하죠. 여기 뭐 내가 다치고 이런 거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이스크림 얼마나 한다고 하중을 느끼겠어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충분히 감내할 수 있고 감당할 수 있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신의 것이 직접 나한테 압박을 가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으로 성취했던 그 성과, 성과에다가 신비 요소가 하나 더 추가되는데 이 신비 요소가 전에 있던 밑의 것을 허문다, 안 허문다? 안 허물죠. 허물지를 않죠. 머리만 좋은 줄 알았더니 복음까지 알았다, 뭐 이렇게 되는 거예요. 복음 아는 것이 머리 좋은 것을 허물질 않아요.

이 그림, 동그라미 두 개. 공유했는데 하나님 쪽에서 분리를 선언했습니다. 분리를 선언해서 생명나무는 못 따먹게 가져갔지만, 못 따먹으면 생명나무 있던 그 여분은 선악 지식으로 생명이라는 그것을 여기서 만들어내면 되죠 뭐. 만들어낸 게 뭐라 했습니까? 천사의 노래를 하는 악마.

여러분, 성가대 잘 한번 보세요. 가운은 입었다마는,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한다마는, 바리톤 한다마는, 얼마든지 악마가 가스펠송 작사, 작곡 다 하고 찬송가 만들어내고 다 합니다. 아니 악마가 해내요, 악마가.

만약에 찬송가를 불렀는데 모든 인간이 그 찬송가에 대해서 역겹다, 도저히 못 들어주겠다, 뭐 가락이야 관계없고요, 가사가. 가사가 역겹다, 못 들어주겠다 하게 되면 자체적으로 검열이 있죠. 아이스크림 위에 그 찬송가는 실릴까요, 안 실릴까요? 안 실리죠. 왜냐하면 위에 있는 하중이 밑에 있는 콘에 영향을 주면 안돼요. 이게 지금 건전하거든요. 건전함의 극치가 될 때 여기에 신적 요소가 덮여지는 거예요. 신적 요소가 덮이는 거예요.

따라서 어떤 찬송을 했는데 아래쪽에 있는 콘을 불쾌하게 만든다. 땡, 탈락이죠. 대번 땡, 탈락이에요. 탈락이 되는 겁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눈 감고 아무데나 펴볼게요. ‘갈보리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찬송했습니다. 그거 교회에서 용납합니까, 용납 안합니까? 충분히 용납하죠. 충분히 용납해요. 왜냐하면 거기에 나오는 갈보리 십자가 개념이 아래쪽에 있는 인간의 언어활동에 전혀 역겨운 것이 아니고 초월할 수 있는 그러한 비법을 하나 더 추가해서 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추가해서.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주님께서 생명 자체로 오는 거예요. 인간에게서 만들어진 생명이 아니고 주님이 생명 자체가 되어서 이 아이스크림 위에 얹어버리면 아래쪽 저 자아까지 어떻게 됩니까? 와르르 다 무너지죠. 다 무너져버립니다.

예수님이 작곡, 작사한 무슨 노래 있습니까? 그럼 예수님이 제사법을 만든 적이 있습니까? 없죠. 예수님이 헌금을 이렇게 하라 한 적 있습니까? 없어요. 십일조 말고 의(義)와 인(仁)과 신(信)으로 했다 했어요. (마 23:23) 사도행전 5장에서는 헌금 내다가 죽은 사람 있잖아요. 아나니아와 삽비라. 헌금 내다 죽은 사람도 있어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지금 이 쪼개진 원 그림(그림2)이 있어줘야 성경의 모든 말씀이 이해가 돼요, 이 그림 하나로. 모든 말씀이 납득이 돼요, 이 그림 하나로. 거기에 아이스크림 그림 하나 더 추가하시고요. 그리고 천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악마, 여분이라 했는데 다른 말로 하면 여유 또는 여유분. 천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여유분까지 악마가 해냅니다. 악마가 해내요.

악마는 아이스크림 밑에 있는 인간의 자아 이런 걸 안 다치게 하려해요. 빨간 걸로 할게요. ‘위로’죠, 인간에 대한. 산다고 고생 꽤나 많지? 내가 위로해줄게. 너에게 희망 줄게. 안 다치는 거예요. 희망과 위로를 주는 찬송가가 그걸 거역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십자가란 얘기도 이쪽에서 자기 것 안 다치고 수용이 가능한 십자가. 내 것 안 다치고 수용 가능한 그런 십자가, 찬송가.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옛날 찬송가책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찬송가 전부다 그렇죠. 우리 옛날 찬송가 405장. 유명한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있죠. 야, 405장 맞구나. 나를 살렸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비좁게 있던 허접스럽고 더러운 내 인생 위에다 아이스크림 위에다 위로와 희망을 하나 더 얹어주는 거예요. 그러면 기존의 것에다가 하나님의 이런 찬송가 부르면서 은혜 듬뿍 얹어가지고 이제 천국 가는 날만 있습니다.

이걸 일거에 주께서는 다 쳐버립니다. 어떻게? 뜯어냅니다. 뜯어내버려요. 허름한 빌라에, 특히 어떤 할머니가 한 30년 살다가 돌아가시고 자식들이 그 빌라를 내놨을 때. 거기에 30대 초반의 신혼부부가 그 집에 들어왔다. 그럼 그 집을 가만히 놔두겠습니까, 뜯어내겠습니까? 당연히 뜯어내죠. 할머니 냄새난다고. 니스 칠하고 그것도 수성 말고 유성 페인트칠해서 한 달째 냄새 계속 나게 만들고 철저하게 도배하고 다 뜯어내요.

뜯어내는 그 이유는…… 주님의 선악체계가 율법이거든요. ‘하지마라’, 율법이에요. 율법의 완성된 것으로 이 결핍을 채우시는 방식을 사용하셔요. 인간에게 빼앗긴 것을 하나님이 도로 찾아오는데 그냥 찾아오는 게 아니고 율법의 완성으로 도로 찾아오는 거예요. 두 원이 겹쳐진 그림에서(그림1).

그리고 찾아오면서 누굴 잡아당기느냐 하면 인간 쪽에서 죄인 된 자기 백성을 하나님 쪽에 결합시켜버립니다. 그림2에서 결핍된 부분을 채워서 그림1의 하나님 쪽 원으로 만들어버리죠.

그러면 이걸 뜯어내는 거예요. 뜯어낼 때 어떻게 뜯어내는가? 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뜯어냅니다. 거머리처럼. 아이스크림에 덧붙이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는 생명으로 오셨는데 그 생명이 거북스러운 생명으로 와버리죠. 거북스러운 생명으로. 인간 쪽에서 죽으라고 해서 진짜 죽여버렸고 그렇게 한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열왕기상 17장 21절에 보면,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엘리야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사르밧 과부 집에 가요. 그 사르밧 과부 집에 어떤 여인하고 아들하고 있는데 여인하고 아들이 아주 가물어서 마지막 최후의 음식을 먹고 죽으려 했습니다.

최후의 음식을 먹고 죽으려 할 때 그걸 잽싸게 엘리야가 낚아챘어요. 뜯어먹는 거죠. 달라붙습니다. 달라붙어서 뜯어먹는 거죠. 뜯어 먹혀서 졸지에 마지막 음식까지 빼앗긴 셈이죠. 그런데 뜯어먹었으니까 하나님의 선악체제를 율법으로 완성해서 뜯어먹었으니까 뜯어 먹히고 난 뒤에 인간 쪽에서 뭐가 생겼습니까? 빈 자리 생기겠죠. 이번에는 자기백성 쪽에 결함, 결핍이 생긴 거예요.

결핍이 생겨서 엘리야가 그 결핍을 뭐로 바꿔주느냐? 그 통에서 가뭄 내내 기름과 밀가루를 계속해서 나오도록 한 거예요. 16절에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그게 얼만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하다가, 그런데.

여기까지는 이해하시죠? 두 원그림의 원칙에 그냥 적용시키면 돼요, 이 원칙에다. 그런데 아들이 죽어버렸어요. 아들이 죽으니까 당연히 엄마가 화가 나가지고 “당신이 와서 내 아들 죽었다.”라고 할 때 여자는 결함을 느낍니다. 내가 양식 없는 것도 결함이지만 왜 양식은 주고 더 큰 결함, 내가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느냐. 이 큰 결함을 줬죠.

그러면 결함이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했습니까? 양식에서 사람 생명가지고 생명을 다루는 결함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사르밧 과부는 오실 메시아가 어떤 식으로 오는가 그때 그 사람은 감을 못 잡아요. 이때까지는 감을 못 잡습니다. 아들이 죽었어요.

그래서 엘리야가 어떻게 하느냐 하면 21절에, 이게 참 신기해요.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몇 번 하느냐 하면 세 번해요.

그러니까 엘리야가 애한테 엎드려서 자기 몸을 결합시키니까 이것은 몸과 몸의 결합이 되겠죠. 몸과 몸의 결합이 되면서 잡아당기는 거예요. 온전한 것이 결함 있는 것을 잡아당기는 겁니다.

그러면 결함으로 말미암아 아들은 죽었으니까 모르고 사르밧 과부는 그 모습을 보고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엘리야, 당신 저리 가.” 엘리야는 가고 내 아들은 자체적으로 살아나는 것을 사르밧 과부는 그것을 살았다 또는 생명이라고 이해하잖아요. 하나님은 그렇게 사르밧 과부에게 하지 않고 타인의 몸이 죽은 아들에게 덮임으로써 그 타인의 몸의 생명에 편입되는 식으로 생명을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왜 인간의 모든 종교를 거부했을까요? 인간의 모든 종교가 어디서 만들어진 겁니까? 자체 내에서 생산된 거잖아요. 자체 내에서. 찬송가, 헌금하기, 교회 다니기, 성경공부하기, 전도하기. 자체 내에서 하는 거예요.

아까 자체 내에서 했을 경우에 오류가 뭐라 했습니까? 아이스크림에 현재 나가 있고 여기 종교를 얹잖아요. 종교가 아니고 먼저 나 위에 ‘바르게 살기’죠. 건전하고 바르게 살기. 착하게 살기. 착하게 살기에다가 선한 종교까지 얹는데 이 아이스크림이 3개 다 통해요. 신성함이 우리의 것을 무너뜨리는 게 아니고 잘 조화롭게 친하게 서로 아무 탈 없이 무탈하게 잘 결합이 되고 있습니다.

이게 뭐라 했습니까? 천사의 노래를 부르는 악마에요. 악마가 천사의 노래를 불러주고 그다음에 무슨 재주 부려줄까? 하여튼 너희들이 납득되고 선호하는 것 다 해줄게. 천사 노래 불러서 위로해주고 소망 갖게 하고 천국 가게 만들고 원하는 대로 다 해줄게.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그 아들을 죽였습니다. 죽여서 엄마가 어떻게 나옵니까? 아들 죽고 난 뒤에 18절에,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어떻게 말투가 굉장히 공손해보입니까, 분노하고 있습니까? 분노하죠.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뭐냐 하면 “네. 난 죄인 맞아요.” 그다음에 “그래서 내가 죄지었다 해서 그렇게 독하게 내 아들까지 죽입니까? 내가 죄지은 것 인정하겠는데… 내 아들 죽입니까. 아, 진짜……” 이 말은 뭐냐? 내 쪽에서 뭔가 손을 쓸 수 없는 그런 조치를 왜 저한테 주십니까.

아이스크림 밑에 있는 나, 건전하고 착한 나, 훌륭하고 바르게 사는 나가 구원받기 위해서 나도 어느 정도 얼추 기여를 하고 싶은 거예요, 기여를. 착한 게 어디 가겠어요? 기여를 하고 싶은데 이 사르밧 과부한테는 어떤 기회조차 안 줍니까? 내가 내 구원에 협조할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해버리죠. 협조할 기회조차 박탈해버려요.

오히려 박탈당할 때.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내 구원에 대해서 선하게 할 수 있는 데에서 박탈했으니까 여자가 내놓을 수 있는 것은 분노입니다. 나 죄인 맞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이제 여러분 이 정도 알았으니까 진도 나갑니다. 더 깊은 것 말씀드립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달라붙을 때 뭐를 끄집어내려고 하셨을까요? 뭐를 끄집어내려고 하셨을까요, 인간에게 달라붙을 때? 그냥 아들? 그냥 밀가루? 기름? 아닙니다. 노래하는 악마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인간에게서. 잘 걸렸다. 천사의 노래를 하는 악마를 끄집어내요. 인간은 악마의 작품입니다.

자, 하나님의 이런 방법에 대해서 악마가 알까요, 모를까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알고 있으니까 제가 다음과 같은 하나의 문장을 쓸 텐데 이 문장이 무슨 뜻인지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보세요.

[옆집에서 물 내리는 소리. 내 집에서 물 내리는 소리.] 자, 묻습니다. 같은 소리입니까, 다른 소리입니까? 소리가 데시벨이 같아요. 같은데 위치가 다르죠. 소리는 똑같은데 이걸 감을 딱 잡으니까 아, 우리 집은 아니야.

악마는 철저하게 우리 집을 보호해줍니다. 왜? 그래야 계속해서 나의 여분을 내가 즐길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악마가 뺏어서 인간에게 넘겨준 여분 있잖아요, 신적인 여분. 고상한 여분, 신을 향한 열망, 구원에 대한 희망. 이것은 누가 소유해야 돼요? 내가 소유해야죠. 그래야 내가 신성함으로 내가 신이 되는 거예요. 내가 계속 신이라는 점을 누릴 수 있는 어떤 토대나 재료를 내가 소유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옆집에서 물소리 내리면 내가 이렇게 됩니다. ‘나도 여유 있으면, 저런 은혜도 나중에 시간 있으면 나도 받을게.’ 이렇게 해요. 그렇게 되면 내 집과 옆집을 철저하게 구분하겠죠.

그런데 그 옆집에 사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라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옆집과 우리 집을 주님은 구분 안합니다. 왜? 우리는 도둑놈이기 때문에. 하나님 것을 빼앗아갔기 때문에. ‘내 다리 내놔라’ 하는 식으로 쳐들어오죠. 그럴 때 우리한테 와서 우리 것을 빼앗아갑니다.

사도행전 9장 17절, 18절,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되어 있죠.

제가 묻는 겁니다. 사울이 본인에게 비늘 있음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몰랐죠. 사울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니까 뭐가 보였습니까? 천사의 노래를 하는 악마가 보인 거예요. 아, 이게 악마 집에 내가 살고 있구나.

그런데 옆집에서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라’ 뭘 해도 악마가 용납을 안 해요. ‘저건 옆집이야, 옆집. 너는 너만 건사하면 돼. 네가 관여할 필요 없어. 네가 찬송 부를 거 있으면 네가 가서 배워서 하면 돼. 수입하면 돼.’ 어쨌든 저쨌든 간에 내 집은 건사해야 되니까. 다치지 말아야 되니까. 그런데 거기에 비늘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죠.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이건 아셨으니까 옆집, 내 집은 이제 그만두고요. 이렇게 아시면 돼요. 갑자기 범위를 확 넓혀봅니다. [인류의 모든 역사가 생명을 방해해왔다.] 여기에는 무슨 역사가 포함되느냐 하면 이스라엘 역사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구약이죠. 유대 역사. 인류의 모든 역사가 뭐를 방해해요? 생명을 방해한 거죠.

그래서 이와 똑같은 말인데 이렇게 하면 돼요. ‘생명을 누가 방해하고 있느냐?’ 물으면 정답은 ‘나’죠. 정답은 나에요. 인류의 역사가 마지막 때까지 충분히 그 죄가 무르익어야 돼요.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죠. 태초에 말씀이 계시다는 말을 왜 그 태초에 이야기 안하고 이제 와서 이야기하죠? 죄가 충분히 무르익어야 말씀이 육신으로 올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아직 엘리야 시대까지도 죄가 무르익지 않았어요.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 그 국한된 좁은 범위 내에서 한 거예요. 전 인류를 상대로 해서 주님께서 결함을 채우면서 천국을 이루는 그 시기는 아직 오지 않았어요.

하나의 빵에 건포도 톡톡 뿌려두죠. 그처럼 이스라엘에 군데군데 하나님의 사건을 통해서 언약 사건을 통해서 장차 오실 세상에는 주님께서 어떻게 관여한다는 걸 보여줬어요. 들러붙어서 빼앗아버리고 그 빼앗긴 것에 자기 것을 채우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천국을 이루는 이 방법이죠.

들러붙어서 빼앗아버리고. 일종의 파스 같은 거죠. 강한 파스는 들러붙으면 살갗 확 뜯기죠. 들러붙어서 뜯어내면 속살이 나오죠. 속살. 악마의 면면이 확 드러나죠. 그걸 주님께서 다시 와서 대신 처리하고 자기 사람으로 데려가는 방식. 그게 창세기에 선악과 따먹었던 사건 때문에 하나님의 일은 그런 식으로 복잡하게 일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뜯긴다는 것을 인간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모독으로 여기죠. 찬송가 불렀는데 찬송가 부름으로써 사는 형편이 낫고 행운이 찾아올 줄 알았는데 찬송가 부르고 난 뒤에 완전히 자기 집안이 거덜 났다. 그러면 다시는 그 찬송은 재수 없다고 안 부르죠. 왜? 내 것을 뜯어냈으니까. 인간은 안 뜯기려고 아등바등 아주 발악을 하고 있잖아요. 안 뜯기려고. 그런데 그게 바보 같은 짓인데 왜냐하면 그게 생명을 방해하는 짓이기 때문이에요. 물론 배후에서 마귀가 그렇게 하게 했죠. 방해하는 짓이다 이 말이에요.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와 오늘 우리가 지금 하고자 하는 요한일서 1장 1절에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렇게 되어 있죠. 그렇게 되어 있죠. 차이점이 뭐냐?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그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강의 가운데 첫 번째로 어려운 대목에 우리가 도달해있습니다. 찬찬히 하겠습니다. 요한복음부터 먼저 하면 요한복음 1장에서는 말씀이 뭐가 됐다? 말씀이 육신이 된 거죠. 이것은 말도 안돼요. 언어가 어떻게 육신이 돼요? 이건 말이 안 되거든요.

어쨌든 간에 그다음에 요한일서 1장 1절에서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육신을 설명하면서 뭐라고 덧붙이는가?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요’ 여기서 제가 어렵다고 말씀드린 이유는 뭐냐 하면 ‘이 육신으로 뭘 할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말씀이 육신이 된 건 좋은데 이 육신으로 뭘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라는 말은 뭐가 어려우냐?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는 이 육신에 대해서 인간들이 저 육신가지고 이렇게(말씀대로) 할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전혀 감을 잡지 못한다는 점이 어렵다 이 말이죠.

눈으로 봤다. 손으로 만졌다. 어느 눈인데? 예수님 눈으로 봤단 말입니까, 우리 눈으로 봤다는 말입니까? 우리 눈으로 본 거예요. 어느 손으로 만졌어요? 우리 손으로 만졌잖아요. 그래서? 그래서 뭐? 그게 뭔데? 그게 어떤 결과를 낳았는데? 기껏 결과 낳은 게 뭡니까? 눈으로 봤다, 손으로 만졌다.

영생 됩니까? 영생이 되는 게 아니고 영생이 안 되게 만들어버리죠. 왜냐하면 예수님만 눈으로 보이는 게 아니고 예수님만 손으로 만진 게 아니잖아요. 기껏 예수님에 대해서 했다는 게 손으로 만진 바요 눈으로 본 바요. 그런데 우리가 영생을 얻었다. 세상에, 이런 비약이 어디 있습니까? 이건 말도 안 되는 비약이에요.

제가 비약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눈으로 봤기 때문에 손으로 만져봤기 때문에 더욱더 우리가 믿기 난감하다 이 말이에요, 제 말은. 그 점이 어렵다 이 말이죠. 차라리 눈으로 안 보고 손으로 안 만졌으면 예배당에 가서 열심히 손바닥 치면, 손바닥에 신경세포가 있잖아요, 그러면 자기가 스스로 열불난다고요.

한번 보세요. 둘로 나눕시다. 인간 육체와 예수님 육신인데. 요한일서는 예수님 육신이잖아요. 그럼 인간 육체를 인간 육신으로 봅시다. 이러면 좀 쉽죠. 인간 육신으로 뭘 할 수 있습니까? 뭘 할 수 있죠? 쭉 나열해볼까요? 일단은 손뼉 치면서 찬양할 수 있죠. 헌금할 수 있죠. 두 손 모으고 기도할 수 있죠. 해외 전도할 수 있죠. 경배하죠.

인간 육신으로 신성한 것에 대해서 못할 게 없습니다, 인간 육신으로. 안되는 게 어딨어? 하죠. ‘안되는 게 어딨어. 다 되지.’하는 옛날 개그처럼 우리 육신으로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다 되죠. 그런데 예수님 육신으로는 얼마나 안 되었으면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졌다. 끝! 끝이에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그거밖에 없어요.

자, 한번 보세요. 선악과 생명나무를, 생명나무도 아담이 봤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는 본 정도가 아니고 손으로 만졌죠. 손으로 만졌습니다. 인간의 육신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만진 선악과를 따먹는 거예요. 자기 남편주고 따먹는 그거 했어요.

그럴 때 하나님은 뭐했습니까? 하나님은 육신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그때는 하나님 육신이 없었잖아요. 그냥 따먹지 말라는 말씀만 있었죠. 그러니까 말씀이라는 게 얼마나 무능력하고 무기력해요.

따먹을 때 “스탑! 누구야, 너?” 뭐 이런 식으로 스피커 두 세 개 엠프에 달아가지고 “따먹기만 해봐라!” 이랬으면 쫄아서라도 안 따먹을 건데 인간의 육신은 해내요.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따먹을 때 아무것도 못했습니다. 그걸 그대로 인간에게 되돌려줍니다.

인간은 육신으로 못할 게 없어요. 자기 능력으로 다 합니다. 다 하기 때문에 영생 없습니다. 자체적으로 다 하는데 무슨 영생을 얻어요. 지가 알아서 잘 하는데.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말씀이 육신이 된 것도 어렵지만 그 육신가지고 인간이 기대하는 어떤 것도 주님의 육신으로서는 솜씨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여기 오세요.’ 해도 어떤 솜씨를 부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삭개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오늘 너희 집에 유하리라 했거든요. (눅 19:5) 그래서 예수님은 삭개오 집에 유했습니다. 거기에 거했어요. 행동은 어느 쪽에서 나왔습니까? 예수님이 행동 나왔습니까, 어느 쪽에서 나와요? ‘내가 사배나 갚겠나이다’ (눅 19:8) 하는 것은 어느 쪽입니까? 삭개오 쪽에서 나왔죠.

그 연관성. 그 연관성이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방식을 모방하거나 흉내 내는 것을 차단시킵니다. 삭개오처럼 해도 이게 삭개오 같은 똑같은 결과가 안 나옵니다. 인간은 모방할 뿐이죠. 저도 예수님 믿고 난 뒤에 네 배나 갚겠습니다. 이렇게 나오죠. 그거 하나님이 인정합니까, 인정 안합니까? 인정 안하죠. 왜냐하면 예수님이 유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 아이디어로 끄집어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예수님이 삭개오 집에 유하는 것은, 삭개오가 ‘네 배나 갚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을 우리 집에 초청하게 되면 내가 네 배나 갚아야지.’라는 삭개오 인간적인 개인의 계획을 완전히 주께서는 차단시켰다는 고백이에요, 그게. ‘이것은 내가 뭘 하는 게 아닙니다.’라고 하면서 내놓은 결과가 뭐냐? ‘네 배나 갚겠습니다.’에요. 네 배나.

그 비슷한 예가 12년 동안 피 흘린 여인이 가만히 와서 예수님의 옷 가를 만졌잖아요. (막 5:25-34) 전에 강남강의에서 했죠. 옷 가를 만졌죠. 그때 예수님께서 아주 생뚱맞은 이야기를 했어요. “누가 나의 옷을 만졌느냐?” 하니까 제자들이 하는 말이 “여기 다 만졌는데요.” 여기 있는 사람, 군중들이 다 만졌어요. 예수님이, “아니 아니야. 그거 말고. 만진 것은 인정하는데 나에게서 능력 나간 사람 누구야?”

그런데 그 질문 자체가 질문이 안돼요. 왜냐하면 능력 나간 것은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능력을 보내신 것이지, 이것 만지면 능력 나온다고 그 여자가 미리 계산한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육신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의 육신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있는 곳마다 전부다 잘라버리는 일, 그 일을 예수님 육신이 한 거예요. 마지막에는 어떻게 합니까? 십자가에서 죽어버리죠.

그러면 사람들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버린 겁니다. ‘아이고, 속 시원하다. 잘 보내버렸다. 다시는 우리 인간 세계에 오기만 해봐라.’ 하는 식으로 쫓아내버린 거예요.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졌거든요. 눈으로 봤기 때문에 쫓아냈고 손으로 만졌기 때문에 쫓아낸 거예요. 눈으로 봤고 손으로 만졌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신한 겁니다.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건너갈 수 있는 것은 없으니까요.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빼앗겨야 되죠? 예수님의 육신에 의해서 무엇이 빼앗겨야 됩니까? 이거는 여러분들이 머리 좋은 사람은 아실 거예요. 예수님이 육신으로 왔을 때 노림수가 뭡니까? 무엇을 빼앗기 위해서 오셨습니까?

(육신.) 그렇지요! 우리의 육신을 빼앗아 가버린 거예요. 우리의 육신을. 우리는 육신으로 근사하고 신성하고 괜찮은 것을 생산해낼 자신감을 마귀로부터 우리는 훈련받았고 수련 받아왔기 때문에. 교회를 통해서 수련 받았거든요. 이렇게 박수치면 은혜 받습니다, 이런 거 수련 받잖아요. 십일조하면 복 받습니다, 수련 받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성령이 와서 비늘 떨어지듯 성령이 와서 예수님 복음을 듣는 순간, 내가 붙들고 있는 이 육신을 강제조치로 주님 앞에 홀라당 파스 붙여서 떼내듯이 이게 빼앗겨버린 거예요. 빼앗겨버렸습니다. 빼앗기고 난 뒤에 삭개오가 딱 집에 보니까 현찰이 막 들어있거든요. 네 배나 갚겠나이다.

빼앗김, 그것이 많은 돈을 쌓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이유가 돈은 내 육신으로 해서 벌어놓은 거지만 주님의 영생은 내 육신으로서 얻을 수 없는 게 영생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죠.

결국 오늘 첫째 강의를 요약하면 주께서 해낼 수 있는 것은 주시는 게 아니고 현재 멀쩡하게 씩씩하게 대단하게 으스대는 이 육신을 강탈한 일을 주께서는 하신 겁니다. 빼앗기면서.

신성으로 한다. 아이스크림 콘 있고 아이스크림 있고 그 위에 또 하나 얹을 때, 신성 같으면 이 안에 있는, 내가 내 힘으로 건사했던 내 인생 있잖아요, 이거 안 다치고 신성함을 여기다 얹어버릴 수 있어요. 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 같은 경우에는 요한일서 1장 1절의 말씀에 의하면 이 신성함으로 인하여 내가 평생 동안 이만한 인생을 다 거두었고 이만큼 노력했고 자식 잘 키웠고 이만한 아파트 사고 내가 이렇게 노력했다, 이것보다도 ‘나는 그분을 만졌고 보았을 뿐입니다’ 이것으로 내가 평생 이루었던 모든 성과를 대체해버리는 겁니다.

주님이 옆집에 오신 것이 아니고 놀랍게도 주님이 우리 집에 오셨다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 집에서 물 내리고 화장실 가시고 샤워하고. 우리 집에 오신 거예요. 생명이.

그래서 내가 내 육신으로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오히려 주님 육신으로 하는 일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여러분 비늘 떨어지신 겁니다. 비늘 떨어진다 하니까 또 비듬 떨어지지 말고. 비늘 떨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육신을 여러분들이 지니고 있어야 돼요, 버려야 돼요? 죽을 때까지 육신을 지니고 있어야 돼요. 죽을 때까지. 그래야 손으로 만진 바요 눈으로 본 바라는 사도 요한의 예수님의 육신의 확실성이, 예수님 육신 앞에서 나의 육신은 환상에 불과하고 이것은 안개 같은 존재인 것을 기쁨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 기쁨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요한일서 1장 4절에 나옵니다. 다 같이 한번 볼까요? 요한일서 1장 4절,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그다음에 뭡니까? 충만하죠.

이것은 정량적으로 양을 측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이게 뭐냐 하면 기쁨은 우발성이라는 거예요. 기뻐해야지. 뭐 몇 분 동안 기뻐할까? 이렇게 정량적으로 계산 못하고 그냥 돌발적으로 나온 게 기쁨이에요. 뭐가 없어지니까? 내가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자각하니까. 내가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자각하니까요.

그걸 제가 오늘 낮에 안양 강의할 때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 ‘우리는 공짜’니까. 우리는 공짜인데 좋은 의미의 공짜가 아니고 나쁜 짓하라고 준 공짜. 어쨌든 공짜. 공짜로 얻은 인생이니까 나한테 미련 둘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문제는 공짜인데 그동안 악마에 갇혀서 처리할 수가 없어요. 할 수 있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있으니까 뭐 거의 울며 겨자먹기로 신앙생활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울며 겨자먹기.

이걸 제가 지난 부산강의에서 신앙이 아니고 ‘어거지’라 했어요. 신앙인이 되어야 되는데 신앙이 없으니까 뭐로 때웁니까? 어거지로 때우는 거예요. 쌍시옷 들어가서 믿씁니다. 그냥 믿씁니다. 고조 고조 그냥 믿씁니다. 어거지에요.

멀쩡한 나 위에다가 ‘믿씁니다’의 모자를 씌우는 거예요. 계속 ‘믿씁니다, 믿씁니다’ 하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제발 내 인생 안 다쳤으면 좋겠습니다.’라는 그런 뜻이에요. 10분 쉽시다.

 

 

 

서울강의20230413b 요한일서 1장 1절(생명의 향수병)-이 근호 목사

하늘나라의 신비로움을 인간 쪽에서 벗겨내려는 시도를 구약 역사가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까 우리 재원형제가 참 좋은 질문했는데요. 사울 왕이 있고 다윗이 아니고 소년 다윗이 있는데 사울에게 악신이 들렸다. 그런데 다윗이 비파, 요새 말하면 기타죠, 기타치고 노래하니까 악신이 떠났다. 다윗도 육신이고 사울도 육신인데, 여기에 나오는 그 노래가사 같은 것은 시편에 나오겠죠.

그러니까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말은 이 육신에게는 해야 될 일이 있는 거예요. 뭐냐 하면 인간 육신을 제치고 오늘날 우리 육신을 제치고 말씀이 친히 육신이 됨으로써 모든 말씀을 다 이 육신이 이루는 거예요. 뭐를 제키고? 우리 육신을 제켜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인간들이, 아까도 말했지만, 어떤 신비에 대한 경향성이 있어요, 없어요? 있죠. 이게 뭐냐 하면 인간들이 만들어낸 창안한 종교입니다. 이 종교는 말씀이 있으면 필히 여기 뭐가 들어가느냐? 인간의 육신이 들어가요.

물론 그들은 말합니다. 이게 절제된 육신이겠죠. 절제된 육신. 욕심을 뺄 때로 쫙쫙 빼버리는 거예요. 욕심이라는 기름기 다 쏙 빼버린 것. 수도원과 수녀원 같은 경우에 그 절정이잖아요. 기름기를 쏙 뺀 것. 순수, 순결, 순정함. 모든 정을 피하는 것, 피정. 피정을 하는 집을 무슨 집? 피정의 집. 순수, 순결, 모든 정욕을 없애는 그걸 뺀 육신으로 뭘 추구하느냐? 신성함을 추구하는 거예요. 제가 방금 천주교에서 이렇게 한다고 했는데 천주교고 불교고 간에 일반인도 다 평소에 이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말씀은 어디서 나오는가? 선악 지식에서 나왔고 선악 지식을 육신으로 해서 신성한 선을 추구하는 이 모양새. 이 모양새인데 사울도 이런 거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인간이니까 당연히 하죠. 하는데 여기 뭐가 임했습니까? 악신이 임했죠. 그러면 사울이 평소에 왕으로서의 자기 품위와 체신을 지킨다고 애썼던 모든 것이 악신이 와버리니까 아무 소용없죠.

그럼 소년 다윗이 했습니까? 아니죠. 다윗도 육신이라니까요. 다윗 속에 있는 그리스도 영이 (사울에게 임한) 악신을 추방하면서 생긴 결과가 뭐냐? 바로 시편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시편을 제작하는 겁니다. 시편 제작.

이 시편이 된 내용이 바로 메시아가 이 땅에 수행해야 될 시나리오가 되는 겁니다. 시나리오가 된다는 말은 ‘악신 들린 자를 성신 입은 자가 추방한다’ 이것을 예수님은 반복시키는 그러한 토대로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그렇다면 사울의 육신, 다윗의 육신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사울이라면 예수님은 뭐로 오셨습니까?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셨다, 육신으로. 그런데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오셨기 때문에 다 이루었기 때문에 충분히 우리로 하여금 악신을 뽑아내서 제거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악신을 제거하고 데려갑니다. 나의 결핍된 것을 채울 수 있는 보충병으로.

왜 이 보충병이 될 수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손댔기 때문에 그래요. 내 공로로 너를 건졌다는 요소 있잖아요. 그거 외에는 우리는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천국 왔습니다. 그것만 영원토록 기쁨으로 찬양하면 되는 겁니다. 이러나 저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 그다음 두 번째 시간에 본격적으로 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이 신비를 요한일서 2절에서 쭉 이야기하는 것은 이런 취지에요. 인간 쪽에서 신비를 벗겨내느냐, 아니면 하나님께서 신비를 벗겨내는가? 어떻게 해서 진실을 드러내는가? 진실은 드러내고 감추어졌던 것이 폭로되는 것은 인간 쪽에서 신비를 벗겨내서 그런가, 아니면 하나님 쪽에서 신비를 벗겨내는가? 그걸 언급하는 거예요.

신비를 벗겨내는 것은 어느 쪽이죠? 역시 하나님 쪽이겠죠. 그러면 인간 쪽에서는 뭐냐? 인간 쪽에서는 가짜 신비를 추가적으로 계속 덧붙임으로써 배후에 악마가 있으니까 계속 가짜처럼 함으로써 진짜 신비를 벗기시는 하나님 일을 방해하겠죠. 그럼 그 역사가 뭐냐? 구원을 방해하는 이스라엘 역사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역사.

이스라엘 역사는 종교 역사입니다. 종교 역사.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었습니다. 율법을 줬거든요. 율법을 줬는데 이 율법에 대해서 인간들이 율법 속에 있는 그 신비로움을 인간 쪽에서 자기가 그것을 구현하려고 애썼어요. 법을 줬으니까.

인간의 방법은 뭐냐? 율법 안에서 무엇을 추구하느냐? 아까도 말했지만 신성한 것을 끄집어내는 그 작업을 인간들이 해왔던 겁니다. 이런 주장을 자신만만하게 할 수 있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요한복음 1장에서 마지막 21장까지 예수님께서 뭐를 통과하느냐 하면 인간이 만든 종교 속을 통과합니다. 인간이 만든 종교의 밀림 있잖아요. 숲속이 있는데 그 안에 길을 내면 어떻게 됩니까? 그 숲 속에 갇힌 형국이 되겠죠. 그 안을 예수님이 그냥 통과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고요. 쭉 통과하면서 계속해서 압박을 느끼겠죠. 압력을 느끼겠죠. 통과하고 통과하면서 예수님 자신이 어디 이르게 하느냐 하면 자신이 죽음에 이르는 데까지 계속해서 통과합니다.

그런데 통과하는 건 통과하는데 여기서 아까 이야기한 걸 그대로 적용시키면 인간 쪽에서는 신비로움을 인간 쪽에서 찾아내려 해요. 어떻게? 손으로 만진 바요 눈으로 본 바요. 그걸 그대로 적용시키면서 인간 쪽에서 신비를 찾아내려고 애를 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교회에서 누가 은혜 받았다, 은혜 받았다 하면 사람들이 일단은 “아이고 축하해요, 집사님.” “은혜 받았어요. 이번에 금식하고 기도 바짝 했더니만 은혜 받았어요.” “아이고, 좋겠습니다.”라는 말로 그렇게 스톱이 되는 게 아니고 그다음 게 있어요. “은혜 받았으면 그럼 애들 이제 공부 잘하고 남편 수입이 좀 늘어나겠네요. 땅 사놨는데 땅값 좀 오르겠네요.”

반드시 이 땅의 실적 같은 것으로 환원되어서 설명해야 인간에게 납득이 돼요, 은혜 받은 게. “아이고, 기도를 많이 했더니만 은혜 받았어요. 얼마나 은혜 받았는지 우리 애가 차 사고로 죽었습니다.” 이런 거. 그건 안 돼요. 은혜 받았으면 부러워할 만한 그런 건덕지가 계속해서 생산되어야 돼요. 은혜 받았으면. 집안이 화목하니 뭐 그런 게 있어줘야 돼요.

예수님께서 통과할 때 예수님의 방향은 뭐냐? 말씀을 이루었는데 그 결과는 뭐냐? 사람에게 맞아 죽는 거예요. 맞아 죽는 겁니다. 그런데 초장부터 악마가 거기에 대해서 강하게 밀어붙이고 저항합니다.

네가 하나님 아들 같으면 돌이라도 떡 되게 하고 그리고 네가 메시아로서 목회하려면 많은 대중들을 몰고 너의 기적에 탄복해야 되고 기적을 통해서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은 걸 통해서 ‘맞다. 당신은 메시아 맞다.’고 확인 되어야 되고 그리고 세상에 모든 정세와 권세가 당신 수하에 놓여 있을 때 당신은 소기의 목적, 원래 원했던 목적을 이루는 성공적인 메시아가 된다, 라고 악마가 예수님에게 속삭였죠. 끊임없이.

어디 뭐 예수님한테만 속삭였겠습니까? 오늘날 우리한테도 뭐 마찬가지죠. 우리한테도 속삭이죠. 모든 인간 다 넘어갔습니다. 은혜 받았다 하는 것을 아까 세 가지의 실적으로 증명해줘야 돼요.

인간의 그 노림수. 노림수가 실제로 현실적으로 나타나줘야 돼요. 그래서 아까 안양강의 때도 했지만 [현실은 현실적으로 증명되어야 된다.] 요한일서 후딱 뛰어가지고 5장 한번 봅시다. 5장 5절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여기서 물과 피라 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면서 죽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는… 물이 흐르고 피가 흘렀거든요. 예수님이 실제로, 죽은 척한 게 아니고 죽은 시늉을 한 게 아니라, 실제로 죽어버린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실제로 죽어버리니까 제자 입장에서는 무엇이 날라가버린 거예요? 신성한 신비로움이 날라가버렸죠. 그게 신비입니다. 요한일서에서. 그게 신비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 어렵다 정도가 아니고 대략 난감이에요. 요한일서 이 말씀을 이해한다는 게 난감하기 짝이 없어요. 예수님이 증거하는 것이 육체로 오셨다, 이러면 우리는 인정하죠. 손으로 만진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아, 나도 예수님 당시에 있었으면 나도 예수님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봤으니까 나도 영생 얻었다, 라고 할 수 있죠. 손으로 만진 바요 눈으로 본 그들이 결국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남기고자 한 그 증거, 물과 피와 성령 앞에서 그들은 아무것도 믿은 게 없었음이 들통 났습니다.

여기 요한일서 1장 4절에서는 우리가 기쁨으로 충만하잖아요. 그러나 요한복음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 떠날 때 기쁨으로 충만한 게 아니고 반대였습니다. 슬픔과 두려움으로 충만했어요. 슬픔과 두려움.

다시 이야기합니다. 영생을 방해하는 자가 누구죠? 우리의 육신이죠. 내가 여기 육신이 있다는 내가 방해꾼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방해꾼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도 바울처럼 이미 비늘이 떨어진 사람이에요. 여러분도 자기 비늘 떨어졌나 한번 주워보세요. 비늘이 떨어진 사람이에요.

내가 방해꾼이라는 것을 흔쾌히 기뻐하는 사람은 내 힘으로 내가 구원받았다는 소리를 두 번 다시 안하죠. 거기서 오는 자유가 있습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무슨 행동을 해도 내 구원하고 내 영생 받는 것하고 무관한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는 거예요.

예수 믿는 것도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지만 내가 무슨 행동을 해도 내 천국 가는 것에 방해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난감해요. 남들에게 설명하기 곤란해요. 난감한 일이에요. ‘너 어디서 배웠어, 너?’ 이렇게 나오든 말든 할 수 없어요. 할 수 없어요.

요한일서 전체가 다 그러니까. 나중에 5장까지 보겠지만 5장 끝까지 하면 이것을 일관성 있게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미리 한번 보게 되면 이렇습니다. 요한일서 2장 27절. 그러니까 요한일서를 설명하면 설명할수록 어떤 가능성 같은 것이 자꾸 없어져요. 2장 27절,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이건 진짜 한번 적어봐야 돼요.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죠. 지금 이게 말씀이 육신 된 결과물입니다. 주님의 결과물이에요. 그럼 이 결과물에 대해서 우리는 내 육신으로 한 것과 내가 원하는 목표로 한 것과 주님의 목표가 끊어져야 되죠. 끊어짐이 있어줘야 우리가 구원 받은 사람이에요. 그게 비늘이 떨어진 사람이에요. 내 쪽에서 끊어짐이 있어야 돼요.

그럼 우리는 평소에 뭐하느냐? ‘가르쳐주세요.’라고 나오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죠. 가르쳐주세요. 사실은 가르침을 받는 게 아닙니다. 참고로 들을 뿐이죠. 어쨌든 간에 그건 나만 알고 있고 여러분 자신만 딱 챙기고 있고. ‘가르쳐주세요.’로 시작해서 뭐로 이어져야 돼요? 결과는 뭡니까? ‘아무도 우리를 가르칠 필요 없고.’

‘목사님, 가르쳐주세요.’라고 시작해가지고 나중에 끝나면 ‘목사 너는 나한테 가르쳐준 것이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당신이 나빠서가 아니라 기대한 내가 나빠서 그런 거예요. 누구한테 가르침 받아서 배워서 구원받겠다는 내 의도, 이 자체가 주님 앞에 배격당해야 될 것을 내 쪽에서 시발점으로 착수 심리로서 먼저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육신이, 내 육신이 꼭 필요한 거예요.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를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내 속에 무슨 작용을 하는가를 위해서 우리의 모든 시작은 어설프기 짝이 없는 모방밖에 못하는 내 육신이 필수 조건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요한일서 하면서 내내 뭐가 반복되겠어요? 우리는 못했지만 주께서 하셨다. 우리는 못했지만 주께서 하셨다. 요한일서 공부하면서 계속 그것이 되풀이되면서 기쁨과 감사가 나오도록 주께서 그렇게 조치하시는 겁니다.

요한일서 2장 27절을 다시 보면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이것은 성경에 안 나왔지만 제가 만약에 추임새를 넣는다면 “얼씨구” 들어가야 돼요. 얼씨구. 그다음에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여기 한번 또 쉬고 들어가야 돼요. “절씨구” 그다음에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이때는 뭐 한식보다도 복음적으로 “아멘”.

우리가 뭘 지켰습니까? 뭐 지킨 게 있습니까? 우리는 내 더러운 육신만 제공했을 뿐이에요. 말씀이 육신 되신 그분이 이런 결과를 낳은 거예요. 따라서 이스라엘 역사가 그동안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 될 때까지 끊임없이 인류 역사를 가렸잖아요. 따라서 우리가 복음을 알 때까지 그 이후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는 기성 교회에서 충실하게 살아왔어야 했던 겁니다. 기성 교회에서.

그들이 하는 수법, 바리새인인지 뭐 분간도 안 되는 교회 있잖아요. 바리새인인지 사두개인인지 구분도 못해,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사두개인 바리새인 전부다 다 갖고 있어요. 사두개인은 예배당 중심. 바리새인은 말씀 지켜서 복 받자. 그러니까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게 만든 요소를 교회가 빠짐없이 다 갖춰놨어요.

거기다 열심당원까지 보태면 뭐가 되느냐? 예수만 믿으면 안 되지. 사회변혁을 시켜야지, 뭐 이런 거 하나. 그거 나오면 열심당원까지. 그다음에 에센파. 세상은 더럽다. 우리는 깨끗하잖아, 이것까지 포함되면 에센파. 그렇게 되는 겁니다.

새벽기도 나가면 제일 앞자리에서 기도하는 권사님들. 적어도 칠십 이상 된 권사님들, 에센파입니다. 자기 기도로 교회가 건사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에요. 우리 기도의 불이 꺼지면 진도 7.0의 지진에 의해서 이 예배당이 무너진다. 기도로 버텨야 북한의 지하교회가 유지된다는 거예요. 나는 북한의 지하교회를 일체 안 믿는 사람이에요. 난 지하교회를 안 믿습니다. 난 거짓말로 봐요. 김정은이 보통 마귀가 아닌데 지하교회를 가만 두겠어요.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이해해야 되는가? 왜 교회가 필요한지. 한번 적을게요. 이것은 어렵지 않아요. 첫 번째, 왜 교회조직이 필요한지. 두 번째, 왜 모이는 것이 중요한지. 그냥 아무거나 하는 거예요. 세 번째, 왜 헌금생활을 생활화 일상화하는 것이 중요한지. 네 번째, 왜 선교가 중요한지. 다섯 번째, 왜 찬양이 중요한지. 교회조직이라 하는 것은 교회계급 조직표. 위에 당회장부터 해서 있는 거요.

이거 여러분들 다 아셔야 됩니다. 아셔야죠. 이게 바로 이스라엘 역사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를 함축적으로 짧은 인생 가운데서 교회생활을 통해 다 배우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첫 번째, 우리 교회조직이 왜 필요하냐. 거기에 대해서 나오는 모든 생각들을 우리가 모를 필요가 없어요. 다 알 필요가 있어요.

성경구절 막 뽑죠. 교회 내에서 여자는 머리에 수건 하나 뒤집어쓰고 조용히 해라, 있잖아요.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고 혼란의 하나님이 아니다. 그런 구절가지고 교회조직이 꼭 필요하다는 말을 우리는 귀담아 들어야 되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요한일서 보면서, 나 예수님만 믿을래. 안돼요! 교회 복음을 방해했던 모든 요소를 우리가 다 알고 있어야 돼요. 짧은 인생동안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의 취지나 그들의 주장이나 논리를 우리가 모르면 안돼요. 다 알아야 돼요. 왜? 이게 감추어놓은 나의 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꼬깃꼬깃 안 들키고 있던 나의 의란 말이죠.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왜 교회 헌금을 꼭 해야 되느냐. ‘목사님, 왜 교회 헌금을 해야 됩니까? 복음만 있으면 구원받는데 왜 교회 헌금을 해야 됩니까?’ 라고 한다면 당회장 목사나 재정 보는 장로가 뭐라고 하겠어요? ‘당신이 헌금을 해봐야 돈 귀한 줄 알고. 헌금을 해봐야 당신 앉은 자리 옆에 뭐 있나? 에어컨 있지. 에어컨 전기세 누가 내는데? 이거 뭐 공짜로 구원 받으니까 에어컨도 공짠 줄 아나?’

거기에 대해서 소위 요한일서 공부해서 나 이제 복음 믿는다는 사람들 입에서 어떻게 됩니까? 입이 또 근질근질… 유행가 나오면 안 되는데. 할 말을 잊었지만~ 할 말이 없죠. 맞는 이야기만 하니까 할 말이 없는 거예요.

목사님 설교하는데 춥다고 슬리퍼 신고 그러는데 그게 어디 공짜로 하늘에서 떨어졌어요? 헌금해야 추워가지고 벌벌 떨면 설교도 못하는데 딱 신겨줘야 되고. 그 신겨주려고 하면 아무나 와서 신으세요, 이렇게 하면 돼요? 헌금을 재정부에 맡기면 재정부 장로가 회의를 거쳐서 슬리퍼가 와야 되잖아요. 그러면 재정 집사, 재정 부장이라는 직책, 조직이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있어야 되잖아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할 말을 잊었지만~ 할 말을 잊었지만.

어떤 집사가 교회 나오는데 멀리 촌에 있던 노쇠한 어머니가 ‘야야, 마지막 때 너희 집에 살려고 한다. 그런데 교회는 너희 다니는 교회 갈게.’ 했는데 보니까 어머니가 노쇠했다. 그런데 교회에서 돈을 내서 차를 사가지고 ‘아이고 촌에 있는 권사님. 고생 많았죠. 차타고 갑시다.’ 차타고 가면 얼마나… ‘야야, 너희 교회는 너무 좋다. 내가 교회도 못가고 쓰러질 뻔했는데 차가 와서 딱 대줘가지고 또 노인네라고 밥도 따뜻한 밥으로 제일 먼저 나오고 난 이제 죽을 때까지 너희 교회 다닐래.’ 했을 때 그 밥하고 차 기름값 어디서 나오는데? 그거는 돈을 내야 될 것 아니에요. 뭐 복음 알아서 구원 받는다고? 돈을 내야지. 세 번째입니다. 할 말을 잊었지만~ 할 말을 잊었어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체제 이루는 거, 쓸데없이 이루어진 내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이 사람들이 골머리 앓으면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서 말씀을 사람들에게 생활화, 실천화시키기 위해서 애쓰고 그걸 집대성했어요. 그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이었어요. 서기관들이었고. 그들이 말씀을 보존하지 않았다면 말씀 올 수도 없었어요. 할 말을 잊었다는 말 고만합니다. 자꾸 하면 식상해서 안 돼요.

그런데 요한일서는 그걸 죄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죄는 숨겨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숲을 뚫고 지나가잖아요. 그것을 뚫고 지나가면서 그 진공상태에서 뭐가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느냐 하면 인간들이 거룩을 표방해서 하나님을 신성하게 섬긴다는 명목의 죄들이 예수님이 통과하는 그 지점에 계속해서 나오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복음을 알고 복음으로 구원 받는다면 주께서 묻습니다. “네 죄는 뭔데?” “죄 용서했는데 뭐 이미 용서했는데 죄까지 자꾸 기억할 필요 없지 않습니까?” “아니야. 그게 아니야.”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몰랐던 우리의 죄를 평생토록 다 일구어냅니다. 일구어내는데 재밌는 것은 바로 그 죄가 굉장히 고상하고 성스럽고 건전한 모양새를 띈다는 거예요. 그 선배가 뭡니까? 1번, 2번, 3번, 4번 이거에요.

이 1번, 2번, 3번, 4번 교회에서 추진하는 이 법 제도에 사람들은 그냥 이야기하게 되면 융통성을 부리겠죠. 모든 사도 바울의 편지나 성경 마태복음, 성경구절 가지고 여기 전부다 근거를 대요. 근거를 대서 이것을 한 꽃다발로 만들었습니다. 그게 신앙고백서에요. 신앙고백서를 만드는 거예요. 신앙고백서가 우리 교단의 교리가 되는 거예요. 침례교, 성결교, 각 교단의 교리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목사는 선언합니다. 이 교리를 위헌하면 이단이다. 주님께서는 이단 소리 듣고 돌아가셨어요.

보세요. 인간들이 얼마나 성실합니까. 착실합니까. 노력하고 있습니까. 인간들이 인간들의 이러한 아이디어에 대해서 그들은, 한번 더 해야 되겠다, 할 말이 없어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어요. 역시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의 머리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뿐이구나. 오직, sola. sola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추구하는 사람들의 그 순결한 머리에서 나오는 법이니까 우리같이 어설프고 시원찮은 아마추어가 따라줌으로써 교회가 혼란스럽지 않고 교회가 더욱 확장되고 부흥되는 데에 우리가 기여하는 것이 마땅한 우리 평신도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라고 어느 집사가 이야기하면, 안할라 했는데 또 해야 되겠다, 우리가 할 말이 없죠.

할 말이 없다 하지 말고 그런 이야기를 들으세요. 그리고 내가 평소에 그런 이야기 듣기 전에는 몰랐는데 듣고 보니까 고개가 끄덕여지면서 ‘내가 너무 경솔했구나. 내가 너무 복음만 추구했구나. 역시 이것은 하나님의 선한 손길이 아니면 오늘날 이런 교회가 있을 수 없어.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 그러니까 남 교회 비판하지 말고 비판하려면 절에 가는 사람 비판해야지. 우리 교회는 전부다 한 편이야.’ 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죠.

드디어 우리의 죄가 비로소 복음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들통 난 거예요. 그 역할을 누가 하느냐? 요한일서에서 하고 있습니다. 오직 증거는 예수님의 죽음이죠. 물과 피와 그리고 그 죽었다는 사실을 자기 백성에게만 할당, 분배해주는 배급해주는 분, 누구입니까? 성령. 이 세 분만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거하고 그 외의 다른 증거는 일체 죄가 돼버립니다.

요한일서가 그냥 쉽다고 생각하면 쉬운데 정말 쉬운 가운데서도 복잡한 것이 우리에게 제공되고 있습니다. 쉬운 가운데서도 복잡한 것이 제공되고 있죠.

자, 이제 2절 봅시다. 이제 2절이에요.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그건 됐고 그다음에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이거 이제 설명해야 될 차례입니다.

할 수 없습니다. 어렵게 갈 수밖에 없어요. 우리 인간에게는 어머니밖에 없습니다. 어머니밖에 없어요, 인간에게는. 왜냐하면 아버지는 자식과 어머니에 대해서 타자에요. 바깥에 계시는 분이에요. 바깥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동등하게 놓을 수 없습니다. 누구 입장에서? 아들이나 딸, 자식 입장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동등하지 않아요.

어머니는 지상에 투입된 존재고요. 우리가 있는 인간 바깥에 있는 존재가 아버지에요. 그래서 어머니는 성령인데 어머니 성령의 역할은 바로 창세기 1장에 나오죠. 품어주는 거예요. 품어주는 것. 성신 또는 성령은 뭐냐? 어머니 역할이에요. 품어주는 거예요. 성신이 우리를 구원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근거는 아버지가 구원하지, 우리가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물론 예수님은 아버지와 같이 있다고 보면 되고. 그 이야기를 요한일서에서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하나님의 복음을 방해한다 했잖아요. 말씀이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보호할 때 율법은 아버지의 법으로 쳐들어온 거예요.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출애굽기 4장에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라. 출애굽기 4장 22절,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했어요.

그렇게 하면서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아요.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것은 율법과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이 나타나죠. 그런 게 어려워요. 항상 아버지의 이름이 나타나고 아버지와 이스라엘의 관계가 있고 하늘나라는 비어있다는 말이 아니고 아버지는 항상 하늘나라를 차지하고 있어요.

차지하고 있고 이름이라는 것은 중개자를 말해요, 중개자. 중개 역할을 하는 하나님이에요. 이게 시편에서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시 110:1). 여러 번 했어요. 다윗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다윗에게 졸지에 하나님이 두 분 됐어요. 이게 신약에 오면 “주께서 내 주에게” 이렇게 돼요. 베드로 설교에서는 (행 2:34). 

왜 두 분이 필요하냐 이 말이에요. 왜 두 분이 필요하냐? 한쪽은 주의 이름은 이스라엘과 역사 속에서 동행하는 거예요. 왜? 보호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에게 준 하나님의 언약을 보호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어머니의 특징은, 여자의 후손으로 나타나신 어머니의 특징은 생산입니다. 없는 데서 있게 하는 거예요.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양육하고 키우는 거예요. 어머니 역할은. 그걸 주의 이름이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율법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아버지의 법으로 왔을 때 이스라엘이 아버지의 법 앞에서 자기 자신이 언약대로 잘 처신해왔는지를 검토해야 돼요. 왜 성신은 돌보는 거고 율법은 왜 이렇게 공격하는 거냐 하면 율법에서는 지키면 복을 받고도 있지만 안 지켰을 때는 가차 없는 저주가 주어지는 거예요. 아주 냉혹한 아버지의 법이에요. 가차 없는 저주가 주어지는 겁니다. 물론 저주에서 복으로 바꾸는 중개적인 역할을 언약이 또 해내요. 율법 내에 또 그렇게 해냅니다.

그러면 아버지+어머니가 주어지는데 아버지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어떤 인간도 법 지켜서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어요. 없다면 어머니 역할이 중요해요. 어머니 역할은 아버지께로 갈 수 있도록 여기서 새로운 생산, 새로운 자녀를 낳아야 돼요. 새로운 자녀를.

율법으로는 못 지키잖아요. 마치 아브라함의 자식 이스마엘처럼. 그 부인 이름이 뭐에요? 하갈. 그리고 아브라함의 본처 이름은 사라. 이게 두 개 언약의 원천이 돼요. 갈라디아 4장의 두 언약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식이 나와요.

자식을 낳는데 하갈의 자식은 낳아봐야 소용없어요. 그거는 왜냐하면 율법 아래 난 자식이기 때문에. 율법 아래 났다는 말은 지키면 될 것 아니냐, 이게 아니고 못 지킨다는 사실, 저주받아야 될 것을 하기 위해서 엄한 아버지 엄한 율법이 작용합니다.

그러면 사라 쪽은? 사라의 자식은? 사라는 자식이 없어요. 애를 못 낳아요. 잉태치 못합니다. 사라는 아기를 못 낳아요. 90세까지 아기를 못 낳습니다. 아기를 계속 못 낳아야 돼요. 그래서 아기를 못 낳으니까 자식이 없어요. 자식이 없으니까 율법의 저주를 받을 대상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작전이 멋집니다. 없어요. 이 말은 이 세상에 없는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1장 2절에 아버지와 함께 있는 그 분이 유일한 아들이 되는 거예요. 율법에 신경 쓸 필요 있다, 없다? 없다는 거예요.

잉태치 못한 자. 잉태치 못한 자가 드디어 하늘의 어머니에 의해서 잉태케 되어버리면 이것은 약속으로 낳은 자잖아요, 약속. 약속으로 낳는다는 것은 뭐냐? 모든 율법이 완성되었다는 내용으로 꽉 차 있는 자식이 태어나요.

모든 율법을 다 이루었으니까 죄인이 아니고 뭐가 됩니까? 의인 되죠. 의 덩어리를 생산해버리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라 했어요. 그리고 뒤에, 이것이 성령으로 난 자라. 성령으로 난 자라. (갈 4:22-29)

그럼 성령으로 난 자를 어떻게 아느냐? 봐라. 저 사람은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가는지 한번 보란 말이죠. 세상 사람들. 선악 지식에다 율법에다가 바리새인 사두개인. 아까 1번부터 4번까지 다 봤죠. 교회가 있어야 될 이유, 헌금해야 될, 찬양해야 될 이유. 진짜 고개 끄덕여지며 납득이 되죠.

문제는 그런 식으로 율법의 저주를 피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에요. 이유가 뭐냐? 본인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본인이 있다고. 혈통으로 났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예요. 혈통으로 난 것을 주께서는 아들로 보질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자는 아들이 아닙니다. 말장난 같지만 중요해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아들이 아니에요. 그래서 여기 요한일서 1장 2절에서 하나님께서 새삼스럽게 아들을 보내신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분을 보낸 거예요.

그리고 3절에 봅시다. 함께 보냈는데 그 결과가 있어요. “너희와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이라” 이게 갈라디아서에서 이야기하는 바로 잉태치 못한 자가 약속으로 잉태하는데 그 약속이 뭐냐? 예수님이시고 그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지음 받은 자만이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라는 말을 사도 요한은 아주 그냥 편하게 쉽게 이야기해요.

마치 아동들 앞에서 선생님이 2+3은 얼마? 5. 참 잘했어요. 예.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는 누구? 성도. 참 잘했어요. 여러분 다 그런 사람 되죠? 아주 편하게 이야기해요. 편하게.

성령 받았으니까 안 편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 너무 힘들게 살아가지 말아주세요. 제발입니다. 힘들게 살아가지 말아주세요. 왜 편하게 살 수 있는데 이것저것 다 챙긴다고 자기 스스로 힘들게 살아갑니까. 이것저것 챙길 필요가 없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서 내가 몰랐던 죄를 주께서 발굴해주십니다. 발굴할 때마다 족족 4절의 말씀처럼 기쁨으로 기쁨으로 계속 이것이 향기를 드러내게 되어있어요. 기쁨으로 향기를.

끝으로 고린도후서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2장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에 의해서 얼마나 냉정하게 다루어지는가 한번 보세요. 15절에,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라고 되어 있죠. 이 짧은 문장 가운데서 내가 염려할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쉬운 예로 이렇게 보시면 돼요. 에어컨 있는 집에서 가장 더운 장소가 어딥니까? 실외기 근처죠. 안쪽에 있는 더운 것은 실외기 근처에 다 모여서 열이 막 올라가잖아요. 얼마나 하나님께서 냉정하게 성도를 다루는지 성도 하나 있으면 가장 악마적인 것은 성도 옆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이 사람들은 망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이걸 보는 즐거움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친하게 지낼 필요 없어요. 나쁘게 지낼 필요도 없지만. 그냥 웃으면서 바라볼 수 있는 이유가 이쪽은 망하는 자라는 것이 언제 드러나느냐 하면 성도가 복음으로 기뻐할 때 자동해서 같이 등장해요.

에어컨 켜면 실외기 근처에 자동적으로 온도 높아지는 것처럼 안에 있는 더러운 열기, 뜨거운 열기가 바깥으로 모이는 것처럼 성도 하나 복음 알면 그 주변이 졸지에 성도 눈에 뭐로 보입니까? 망하는 자식들로 다 보여요, 망하는 자식들로.

그런데 성도는 뭐 했습니까? 성도는 하나님의 향수병이에요. 향수병에서 뚜껑만 딱 열어놨는데 향수가 팍 퍼지는 거예요. 문제는 향수가 되는 내용이 어떤 거냐? 고린도후서 1장 20절, “하나님의 약속은” 약속 나옵니다. 우린 약속의 자녀라 했잖아요.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뭐가 된다? “예가 되니”

19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그러니까 합력하여 뭐를 이룬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니, 그다음에 아까 봤던 2장. 우리는 그렇게 해서 생산된 결과물이니까 우리 자체가 예수님의 ‘예’가 되는 거예요. 예. 김 예, 최 예, 박 예가 되는 거예요. 이름 짓기 쉽죠. 예스가 되는 거예요. 예스가.

그러니까 예스가 되는 인생은 ‘아니오’라고 할 일이 일어납니까, 안 일어납니까? 일체 일어나지 않게 되어 있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복음의 향기가 계속 나오려면 우리에게는 ‘주여, 이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하는 일이 일어나지를 않아요.

우리 쪽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향수 관리는 주님 쪽에서 향수 관리를 하시기 때문에요. 막 쉰 내나고 이런 것은… 천사보고 “빨리 갈아 넣어라. 쉰 내 나기 전에 빨리 향수 갈아 넣어.”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예’라는 생각을 늘 갖게 만듦으로서 우리 근처에 망하는 자들이 꼬물꼬물 형성되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16절에 보면,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이게 얼마나 잔인합니까.

이게 뭐 남 같으면 김정은 같으면 우리는 신나는데 문제는 우리 딸자식이고 아들이고 가족이고 이럴 때는요. 16절 이 말씀 하나가 잔인해도 너무 잔인하잖아요. 그동안 정들었던 게 있는데 정이고 뭐고 뭐 소용없어요. 냉정하게 다뤄요. 내 향수가 아니고 주님의 그리스도의 향수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그러니까 주변에 있는 사람, 사망에 이르는 사람은 “아휴, 복음 그게 뭐가 향기로워? 내가 보기엔 악취인데.” 하고 막 코를 막는 거예요. “저리 가. 저리 가. 악취 나. 저리 가.” 했을 때 그것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그리스도께서 “예”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좋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주님만 냉정한 게 아니에요. 오늘날 성도도 성도 본인이 냉정하라는 말이 아니고 성도의 위치가 너무나 예상 밖에 감당 못할 정도로 너무 냉정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던 일이 아니고 내 인생도 내가 원한 인생이 아닌 것을 이제는 기쁨과 감사로 향기를 내뿜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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