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새로운 전체

아빠와 함께 2023. 3. 18. 15:18

서울강의20230316a 베드로후서 3장 12절(새로운 전체)-이 근호 목사

베드로후서 3장 12-13절,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런데 그때 불에 타서 풀어지는 게 뭐냐는 거죠. 불에 타서 풀어지는 것. 전체입니다. 불에 타서 풀어지는 대상, 이것이 전체입니다. 그러면 그 전체에 우리가 포함됐습니까, 안 되었습니까? 전체에 우리가 포함됐습니까? 포함되어 있죠. 그러면 우리도 불에 타서 풀어지잖아요. 뭘 기다립니까? 기다릴 대상이, 기다릴 주체가 없는데요. 같이 불타버렸는데 뭘 기다려요.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라고 되어있는데 여기 ‘그’도 전체에 포함이 되어 있잖아요. 지구 자체가 전부다 불타는데 거기서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 인간들도 지구인이고 지구 불탈 때 그들도 같이 불타버리는데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릴 당사자가 없어지잖아요. 다 없어요. 다 없다고요.

다 없는 상태에서 14절에,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흠이고 티고 간에 본인 자체가 없는데 뭐. 우리 자신이 있어줘야 아, 흠 없이 점도 없이 깨끗하게 살아야지, 뭐 이게 되는데 내 자체가 공중 분해돼서 불에 타 없어지는데 어떻게 구원이라는 것이 성사되느냐 이 말이죠. 성사가 안 되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걸 아셔야 돼요. 이 본문은 다음 두 가지를 구분해야 됩니다. ‘내가 구원에 실패하면 어떡하지?’ 이게 아니고, ‘내가 구원에 성공하면 어떡하지?’ 이거에요. 지금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 구원에 성공했다니까 이것은 어떤 절차를 거치느냐 하면 지구에 있는 모든 것이 불에 타버린다는 절차를 거치게 되거든요. 구원에 성공했는데 불에 타버렸다. 그거 성공입니까, 실패입니까? 실패죠. 그래서 ‘구원에 실패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보다도 구원에 막상 성공을 했는데 이 구원이 뭐냐? 구원은 불에 다 태움, 이게 구원이잖아요. 이 지구상에 사는 사람에게 구원은 불에 다 태움.

결혼을 하는데 ‘결혼에 실패하면 어떡하지?’가 아니라 ‘결혼에 성공해서 신혼집에 살면 어떡하지?’가 걱정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그 신혼집이 울산 산불 났을 때 그 한복판에 있을 때에요. 경북 울산 산골짜기 한복판에 신혼집 지어놓고 이제 결혼에 성공하게 되면 거기서 행복하게 백년해로하겠다고 했는데 어떤 지나가는 도사가 미리 말하기를, 결혼하고 그 다음날 울산에 산불 난다고 했을 때 그다음부터 어떤 걱정이 생깁니까? 결혼 못하면 어떡하나,가 아니라 결혼을 했는데 백년해로고 간에 결혼하고 돌아서서 대출내서 집 산 것 홀라당 다 태워먹으면 대출금 누가 갚아요? 걱정이 되겠죠.

그래서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구원에 실패하면 어떡하지?’할 때 이 ‘내’가 가짜라는 거예요. 이게 가짜인 거예요. 구원되고자 하는 ‘내’가 그걸 진짜라고 간주했을 때 성경에 나오는 구원에 관한 모든 절차를 여러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감당 못합니다. 할 수가 없어요.

어차피 어려운 것, 계속 어려운 거 해보겠습니다. 언제든지 담배 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담배 끊는 것을 방해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금연할 수 있다는 그 착한 의도를 본인이 갖고 있기 때문에 자기는 자신만만하게 계속 흡연하고 있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되십니까?

“나 언제든지 금연할 수 있어. 그런 의지 있어.”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지금 담배 피우고 있다는 말입니까, 끊었다는 말입니까? 피우고 있다는 거예요. 자기가 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 사람은 담배는 끊을 수 있는 가능성 있다고 우길 수 있어도 자기 자신을 못 끊어요.

자기 자신이 나는 담배를 끊을 수 없는 나라는 생각을 못 갖고 있습니다. “아, 담배 그까짓 거 나 끊을 수 있어.” 그 자체가 가짜에요. “아유, 구원 뭐 좋은 이야기지.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그걸 내가 왜 마다해? 그걸 왜 싫어해?” 이러니까 구원이 안 되는 거예요.

나는 지금 살아있다고 자기가 느끼기 때문에 내가 죽는다는 어떤 선택도 내가 하질 못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구원은, 네가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네가 가짜라는 생각을 해본 적 있느냐는 거예요. 그게 엉터리라는 생각을 해본 적 있느냐는 거예요.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내가 계속 살아있기 때문에 ‘언제 늙어 죽을 때 난 교회 간다. 걱정하지 마. 지금은 내가 살아서 바빠. 굉장히 바쁜데 내가 헥헥 숨도 못 쉬고 요양병원에 갔을 때, 그때 다 됐구나. 내가 더 이상 못 살겠네. 그럼 빨리 대비책 세워야지. 죽기 전에 숨 끊어지기 전에 빨리 세례 받고 예수 믿습니다 해야지.’ 그런 생각 갖고 있는 것이 구원될 수 없는 자아를 갖고 있는 거예요, 아직. 구원이 안 되는 자아를 계속 구원될 수 있다고 고집하는 그 엉터리 같은 생각을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방금 제가 몇 가지 예를 들었는데 이 몇 가지 예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구원은 말씀에서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디서 사람이 사달 나고 엉터리냐 하면 나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구원을.

나 구원받고 싶다. 뭘 하면 되지?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구나. 그러면 내가 그것을 믿을 가능성은 언제든지 나한테 있다. 한번 적어볼게요. 머리가 안 나쁘지만 일단은 머리 좋다는 나를 가짜로 여기시고요. 뭘 듣더라도 이해 못한다는 그 내가 진짜라고 여기시고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구원은 반드시 말씀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말씀으로 시작해요. 그런데 나로부터 시작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부터 시작해서 그다음에 말씀을 대합니다. 말씀을 대하면서 뭐를 찾느냐 하면 가능성 있는 것, 내가 믿을 가능성 있는 걸 뽑아내요. 그리고 또 목사들도 이런 걸 해줘요, 또. 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이거 해줍니다. 이렇게 하시면 구원받습니다, 또 해줘요.

그러니까 이 바윗돌 같은 나는 꿈쩍도 안 해요. 꿈쩍도 안 하고 성경말씀 정복에 나섭니다. 제자훈련이고 뭐고 온갖 희한한 것들 다 동원해가지고 성경말씀을 내가 정복하면 성경말씀에 의해서 나는 구원될 수 있는 나가 되는 거예요.

나→ 말씀(을 경유해서)→ 말씀을 아는 나, 이게 바로 구원될 수 없는 가짜에요. 이게 바로 가짜가 되는 거예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베드로후서 3장 12절에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땅)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하늘과 땅 불에 다 탄다 했잖아요. 그럼 불에 타는 그 가운데 우리 자신은 어디에 속하냐 이 말이죠. 거기에 당연히 속해있죠. 그럼 불에 타버리죠. 불에 탈 때 불에 같이 다 타버리는데 그의 약속하신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릴 당사자가 어디 있습니까? 없는데. 없잖아요.

마지막 때에 지구 전체가 다 타버린다. 그럼 전체 안에 내가 빠져 있느냐, 속했느냐 그 문제를 제가 여러분께 말씀 드립니다. 내가 그 전체 안에 빠져있습니까, 속해 있습니까? 속해 있잖아요. 전체가 불타버리는데.

그럼 불타가면서 믿습니다, 하면 구원해줍니까? 불에 타. 그냥 불에 타세요. 타서 재가 되세요, 이렇게 해버리는데 기다리긴 뭘 기다립니까. 흠도 티도 없이 뭘 정결하게 해요. 정결하면 불에 안 탑니까? 정결해도 불타는데요. 깨끗하고 거룩한 행실해도 불타는데. 경건해도 불타는데요.

불탄다는 말은, 내가 모든 걸 불태우는데 아, 너는 경건하구나. 지나가 지나가 지나가. 저 사람은 태우지 말고 그냥 지나가. 나머지는 까만 재가 되는데 경건한 자는 반짝반짝 빛이 나면서 지가 천사도 아니고 거기에 그렇게 서있는 거예요? 불탔구나. 나만 통과했네. 지금 뭐 그걸 즐기고자 하는 거예요? 아니죠.

아까도 얘기했지만 내가 계속 살아있고 살 수 있다는 생각에서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죽음 너머의 일을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내 구원에 방해가 돼요.

언제든지 담배 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담배 끊는 것을 방해하듯이. 끊을 수 있는 가능성을 내가 지니고 있으니까 나는 계속 흡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리 앞에서 “나 담배 끊는다. 마음만 먹으면 삼일 만에 끊을게.” 하면서 담배 피우고 있어요. 본인을 본인이 못 끊어요. 본인이 본인을 못 끊어요. 담배도 못 끊으면서 본인이 뭘 받아요? 구원을 받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있네요.

내가 나를 끊을 수 없는데 무슨 구원이 돼요? 구원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불태우고 모든 것을 불태운다는 그 약속을 네가 흔쾌히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불태우는 대상 안에 누가 들어있다? 네가 들어있다는 것을 네가 받아들일 수 있냐고 묻는 거예요, 이 본문이.

또 한 가지 예를 들게요. 이게 보통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두 가지 문장의 차이점을 알아보세요. ①아내는 남편이 아프지 않을까 걱정한다. 이 문장이에요. ②아내는 남편이 아프지 않을까 걱정한다. 문장이 똑같죠? 똑같은 문장이죠. 강조점을 위에 문장은 ①아내는 남편이 “아프지” 않을까 걱정하는 거예요. 밑에는 ②아내는 남편이 아프지 “않을까” 걱정하는 거예요. 반대 뜻이에요.

‘저 인간 건강하면 안 되는데...’ 이게 밑에 문장이에요. ‘아, 저거 아파야 되는데. 아파서 빨리 죽어야 되는데. 저거 언제 아프지?’ 이건 아래 문장이고, 위에는 ‘당신이 아프면 내가 힘들어. 아프면 내 쇼핑 돈이 어디서 나오지? 당신 돌보는데 짜증나서 귀찮아서 내가 안 돼. 당신이 건강해야 내가 마음대로 놀 수 있어.’ 이런 걱정하는 거고.

위에는 남편이 아프지 않을까 걱정하는 거예요. 밑에는 남편이 안 아플까봐 걱정하는 거예요. 완전히 다르죠. 베드로후서 3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이 차이를 의미하는 거예요.

시작을 말씀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아무리 성경에서 말씀으로 시작해도 인간은 그걸 나부터 출발해놓고 그 말씀을 중간에다가 집어넣는 식으로 해석한다는 거예요. 아무리 성경에서 말씀으로 시작해도.

그 예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15절에 나옵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절에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알기 어려운 것이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어디에 이른다? “멸망에” 이르죠. 멸망에.

그러니까 지금 베드로가 이야기하는 것은 성경은 우리에게 무슨 가능성을 준다? 멸망에 이를 가능성을 준다는 거예요. 어떤 자에게? 성경 왜 봅니까? 성경 구원 받으려고 봐요, 안 받으려고 봐요? 구원 받으려고 보잖아요. 구원 받으려고 보는 자를 어디로 인도하는 게 성경이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게 성경이다 이 말이죠. 멸망으로 인도하는 게.

이렇게 어렵게 할 게 아니고 이걸 아주 쉽게 간단히 하면 이렇습니다. [나를 위한 통합성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나를 위한 것이 무너지는 것, 이게 바로 흠과 티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지구 자체를 멸망할 때, “참 잘 하셨습니다. 합당합니다.” 나 빼놓고는 말하지 말고 나를 집어넣어서 “이것은 나를 집어넣어서 참 잘한 조치입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요. 그리고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이야기를 성경을 통해서 했다는 거예요. 너도 포함해서 망한다는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러면 나는 망하지만 망한다는 말씀이 내 속에 담기죠. 그러면 시작을 뭐부터 시작하겠어요? 나부터 출발하니까 나는 이미 말씀에 의해서 망하도록 되어있죠. 그럼 출발은 내가 되는 겁니까, 말씀이 되는 겁니까? 말씀이 되는 거죠. 그렇게 말씀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해야 말씀이 되는 거예요.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에. 그래야 이 말씀이 되는 거예요. 약속대로 지구가 불탄다. 잘하셨습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내가 내 꼬라지 봐도 이건 마땅히 그래야 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빨간 걸로 해볼게요. 이 말씀을 다시 써보겠습니다. [모든 윤리적 결과를 나에게로 돌리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환경] 지구가 멸망한다니까 살고 싶어가지고 멸망하는데 어떻게 멸망에서 내가 빠져나와서 살 수 있습니까? 흠과 티가 없이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점도 없고 흠이 없이. 옳다구나. 그럼 앞으로 내가 해야 할 것은 윤리적 도덕적으로 흠과 티가 없으면 세상이 몽땅 재가 된다 할지라도 3차 대전 일어나 재가 된다할지라도 지구가 불바다 된다 할지라도 나는 살아남겠네, 라는 아이디어가 번뜩이겠죠.

그렇게 되면 내가 하는 윤리 도덕은 결국 어디로 귀소돼요? 어디로 귀속됩니까? 나에게로 돌아오죠. 나를 위한 것으로 되돌아오죠. 그렇죠? 내가 하는 행동은 누굴 위함이다? 나를 위함이 되는 거예요.

아까 나를 위한 통합성은 여지없이 무너지죠. 구약에서는 이 ‘나를 위한’ 것을 우상이라 합니다. 하나님을 믿되 나를 위해서 믿는 것은 모조리 우상이에요. 그래서 예수님도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오라 했잖아요. 부인 정도가 아니고 아예 너 자신을 미워하라고 되어있죠. 이건 인간으로서는 해낼 수 없는 능력이에요.

나를 위한 통합성은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처럼 모든 윤리적 결과를 나에게 돌리려는 그런 환경을 허락한 적이 없다. 그럼 앞으로 주어질 환경은 나를 위해서 윤리 도덕으로 하는 사람을 절대 일체 구원하지 않는 환경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그런 환경이.

자, 그렇다면 진짜 그렇게 세상이 온다면 그럼 어떤 사람이 구원되느냐? 다시 원래 질문으로 되돌아와요. 어떤 사람이 구원되느냐? 처음의 자리로 가서 말씀이 이끄는 대로 살 수밖에 없어요. 처음 자리로 가야돼요. 처음 자리. 그 처음 자리에 가면 악마가 인간을 어떻게 속였느냐 그 사건이 터진 현장입니다.

인간의 처음 자리는 인간과 하나님이 처음 만난 자리가 아니고 인간과 하나님과 그 가운데 마귀가 끼어든 그 자리가 처음 자리에요. 오늘날에 우리들이 인간이라고 규정하는 처음 자리가 악마가 중간에 끼어든 결과물로 오늘날 우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죽어요.

In the long term, we are all dead. 길게 보면 모든 인간은 다 죽는다. 길게 보면 모든 인간은 다 죽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어리석게 보는 것이 짧게 보는 것이라는 뜻이에요. 인생을 짧게 짧게 보게 되면 다 죽는다는 사실을 매일 삶 속에서 살림살이하면서 자꾸 이걸 놓쳐버려요.

어차피 다 죽는다는 사실을 놓치고 마치 천년 만년 계속 내가 내일도 살고 모레도 또 살고 계속 사는 것처럼 그렇게 short time, 짧게 보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성해요. 참... 이게 나쁜 거예요.

이게 정말 나쁜 겁니다. 내가 가만히 있지를 못해요. 가만 있질 못하고 내가 마음에 드는 자아상을 매일 새롭게 구성해요. 매일같이 구성을 하는 거예요. 누가 이걸 시키느냐 하면 인간을 미치게 만든 악마가 우리한테 매일같이 이걸 시키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매일 구성하면서 짜증내고 스트레스 받고 암 걸리고 그렇죠. 내가 내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내가. 남들은 저런데 나는 이때껏 뭐했나, 하고 자기 자책에다가 자기 모멸에다가... 여기서 더 열심히 해야 되느냐.

더 열심히 하는 것, 이걸 accelerationism, 가속주의(加速主義). 엑셀레이터 밟는 거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 절망을 느낄 때마다 더욱더 가속페달을 밟는 겁니다. 내가 내 마음에 안들 때 미흡함이 생겨버리면 그냥 가속페달을 밟아서 더욱 매몰차게 나를 후려치는 거예요. 내가 나를 후려치는 거예요. 더 열심히 하란 말이야. 더 열심히 해야지.

그럼 더 열심히 하면 남는 결과가 뭐냐? 결과가 이거에요. 오늘 이 이야기하려고 지금까지 뜸을 이만큼 들였습니다. [나의 동일성]. 동일성. 어제와 오늘, 내일의 내가 똑같은 내가 되는 거예요. 어제, 처음 자리에 악마와 함께 있던 그 나, 그 나를 우리는 기어이 천국 보내려고 가속페달을 밟는 거예요. 처음 악마와 함께 있는 그 자리에서.

그러나 주님은 이 동일성과 반대로 가요. 뭐냐 하면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너로부터 시작한 것 말고 말씀부터 시작하는 그 차이에서 나오는 새로운 너, 새로운 인간, 이게 바로 구원받는 인간입니다. 이게 구원받는 인간이에요.

처음 출발은 나로부터 출발한다 했죠. 이게 문제 있다 했죠.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나는 어떤 말씀을 어떻게 지켜야 되고 그 말씀대로 얼마나 순수해야 되고 순결해야 되고 흠도 티도 없어야 된다. 성경에 나오잖아. 나 성경말씀대로 그렇게 할 거야. 베드로후서는 “그게 멸망인데? 그게 네 멸망 길로 가는 거야, 그게!”

시작을 말씀부터 해야 되는데 말씀부터 시작을 할 재간이 없어요. 능력이 없어요. 마귀가 놔주질 않으니까. 마귀가 뭘 안 놔줍니까? 지금의 너와 다른 네가 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아, 이거 마귀가 한고집해요.

여러분 고집 센 사람 찾으려면 남자가 70이상 나이 먹으면 그 고집 한번 보세요. 남자가 70이상 넘어가면 이건 뭐 아내고 자식이고 손자가 와도 못 말려요. 그 고집은 고집 다음에 나오는 말이 있어요. 고집소통이 아니고 반대말 고집불통이 돼요. 고집불통. 뻣대죠. 도로 어린애가 되듯이. 최씨 고집이에요. 또 가만 있는 최씨가 1패를 당했는데. 최씨 왕고집.

이게 왜 그러느냐? 가속주의 때문에 그래요. 살아온 이력이 멈추질 못해요. 지금껏 살아온 게 자기 몸에 맞고 편하거든요. 상황이 맞은 게 아니고 상황 속에서 자기를 구성하는 거예요. 이게 사달 난 거예요. 나는 이러해야 돼. 자기가 자기를 그렇게 조립해버렸어요. 이게 문제인 거예요.

날마다 나는 어제까지의 나는 무너지고 말씀으로 새로운 내가 되어야 돼, 이게 되지를 않아요. 이게 안 되는 거예요. 그럼 말씀 왜 있습니까? 말씀은 나의 동일성을 깨뜨리기 위해서 말씀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말씀이 깨뜨리는 게 아니고 말씀이 꼭 화투장 같아. 이마에다 턱하니 붙이고 그냥 말씀을 종이에다 써서 풀로 자기 육체에 붙이면 자기 부적이 돼가지고 자기 천당 보내줄 줄로 생각해요. 턱 붙였는데 그중에 뭐가 있느냐 하면 사도 바울의 편지도 떡 갖다 붙여놨어요. 이 편지는 멸망에 이르는데요?

여기 멸망이란 말이 있죠. 17절에 보면 “미혹”이라는 말이 있어요. 그러니까 베드로후서에서 베드로가 말하기를 성경은 너희를 멸망에 이르게 하고 미혹에 이끌리게 한다. 미혹에 떨어진다. 뭐가? 성경이 너를 그렇게 만든다는 거예요.

그러면 나의 고집, 나의 왕고집, 동일성이 있는데 동일성에다 성경말씀이 나로 하여금 멸망케 하고 미혹케 하게 되면 그 말씀을 기피해야 될까요, 받아들여야 될까요? 마땅히 받아들여야죠. 그래서 나로 하여금 멸망에 이르고 미혹케 되면,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처음 자리로 가봐야 돼요. 거기에는 나만 혼자 있었던 게 아니에요. 악마가 있었던 겁니다.

놀랍게도 악마가 말씀을 가지고 이용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 잊으면 안돼요. 예수님이 시험받을 때 악마가 예수님 시험할 때 악마가 말씀가지고 시험했어요. “아이고, 그 말씀 나는 모르는 건데~” 이렇게 하지 않았어요. “안다, 안다, 그 말씀. 메시아가 말씀대로 오는 것 내가 다 안다. 그러니까 말씀대로 한번 해볼까, 우리? 높은 데서 뛰어내려라.” 시편 91편인가 나오죠. “뛰어내려라. 말씀대로 해봐라. 해봐. 해봐! 해보라고! 너 쫄았어? 쫄았어?” 악마가 예수님보고 “너 쫄았지?”

예수님이 말씀대로 했을 경우에는 성전에서 뛰어내려 박살나는 그게 완성이 아니고 십자가에 죽는 게 말씀대로 완성이에요. 똑같은 죽음이라도 새로운 전체를 구비한 가운데 죽어야 돼요. 기존 전체의 일부로서 죽는 게 아니고 그 전체 말고 숨겨진 다른 전체가 있어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성도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들어가는 것은...... 성도가 기존의 전체에 속한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성도의 육신이에요. 육체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전체가 준비되어 있어요. 그것은 새 하늘 새 땅과 통하는데 거기 있는 전체는 말씀에 의해서 시작된 자의 전체가 들어있어요.

그래서 베드로가 사도 바울을 언급했는데요. 사도 바울의 말을 우리가 볼 필요가 있겠죠. 갈라디아서 5장 17절. 베드로가 말하기를 함부로 풀 수 없다는 사도 바울의 편지를 우리가 지금 인용하고 있습니다. 함부로 풀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한번 봅시다.

여기 보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렇게 되어있죠. 자, 성도가 이렇게 있는데 성도를 사도 바울은 육체라고 보는 겁니다, 육체.

사도 바울은 어떻게 보느냐 하면 나로부터 출발하지 않아요. 말씀으로부터 출발하거든요. 말씀은 예수님이 완성시켜 놨잖아요.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된 전체에 있어서, 하면 벌써 시작은 뭐부터 합니까? 말씀부터 시작하죠. 말씀으로 시작하는 데에 있어서 죄인인 인간은 어떤 활용도가 있느냐를 보는 거예요. 어떤 활용도!

말씀을 말씀 되게 드러내는 데 있어서 성도의 육체는 불필요하다, 가 아니라 어떤 활용도를 가지느냐 하는 거예요. 말씀 완성 앞에서 성도하고 대결상태에 놓여있는 여기에 다른 어떤 분이 계십니다. 이걸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서는 이걸 누구라 했어요? 5장 17절에서는 이걸 누구라 했습니까? 성령이죠.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밀당을 하면서 밀고 당기고 하면서 그 열매로 나온 것은 뭐냐? 말씀이 다 이루었다, 가 나오는 거예요. 말씀으로 시작해서 죄 많은 인간을 활용해서 말씀에서 시작해서 끝은 어디로 끝나죠? 말씀은 결국 주님의 십자가로 다 이루었구나, 가 되는 겁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갈라디아서 5장 24절이에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그 십자가의 현상성, 현재성,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말씀이 현재에 계속 두드러지게 드러나기 위해서는 누가 꼭 필요하다는 말이에요? 자기밖에 모르는 이 모든 인간의 기본적인 죄성, 육체성이 꼭 필요한 거예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은 말씀으로 시작해서 십자가로 이루었다는 그 완성에 있어서 인간은 중간에 끼어드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나로부터 시작해서 내가 처음 있었다는 거예요. 내가 처음 있었던 게 아니죠. 나는 거기 누가 있었다 하면 대결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악마와 한통속이죠.

대결하지도 않았어요, 그때. 악마와 한번 싸우지도 않았어요. 악마와 그냥 같은 패가 되었어요. 악마와 같은 패가 돼서 나는 앞장세우고 악마는 뒤에 숨어버리고. 비겁한 악마. 나를 하수인으로 만들어놓고 악마 본래의 자기 목적을 달성하는 거예요.

악마의 목적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행하심을 부정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행하심. 예수님의 다 이루심을 부정하는 거예요. 교회 목사들이나 교회 와서 설교할 때 뭐 40분 50분 하더라도 딱 하나만 들으면 돼요. “그래서? 그래서 우리 할 게 남아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그거 딱 하나만 끄집어내요.

악마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러니까 우리 나름대로 뭘 해야 된다고 가르치면 이거는 백퍼입니다, 백퍼. 기분 좋아서 이거 한잔 마시고. 백퍼센트입니다. 백퍼센트 악마에요.

인간의 위상이 위치가 이미 정해져 있잖아요. 그런데 성령하고 싸우는 입장이란 말이죠. 성령은 다 이루었다는데 우리의 육신은 뭡니까? 내가 흠과 티가 없어야 되지 않습니까? 베드로후서의 말씀처럼 내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을 누가 측정하고 누가 판단하는데요? 본인이~ 본인이 판단하죠, 본인이. 손자한테 맨날 욕 얻어먹는 전두환. 본인이 판단해요.

판단하기 위해서 판단자인 나는 변해야 돼요, 변하지 말아야 돼요? 요지부동 최씨 고집. 나는 옳으니라. 그럼 그렇게 고집부리는 그 70넘은 장로님한테 물어보세요. 성령님 어디 계십니까? 내가 필요할 때마다 부르면 되는 거야. 누가 쫄병인지 누가 주인인지 구분도 안 돼.

부르면 오는 게 아니고 싸운다니까요! 참... 싸운다는 말은 서로가 양보 없다 이 뜻이거든요. 성령님은 우리에게 양보를 할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어느 정도로 우리를 개무시하느냐 하면 로마서 8장에 보면 너는 기도할 줄도 몰라, 인간아. 너는 기도할 줄도 몰라. 너 아버지 하나님 뜻을 알아? 모르잖아. 모르면서 무슨 기도를 해? 뜻도 모르면서 기도해놓고 이번 기도는 참 은혜롭다고 자기가 자기 혼자 판정내리고 뭐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자꾸 이 육체의 소욕은 자기의 동일성을 포기 안하고 있어요. 마귀한테 길들여지기를 그렇게 길들여져 가지고 주님 욕 얻어먹는 것은 전~혀 이것은 가슴 아프지 않고요. 내가 욕 얻어먹는 것은 그렇게 직접 욕 얻어먹은 것도 아니고 우회적으로 둘러서 이야기하는데 눈치는 빨라가지고 그걸 어떻게 알고 또 그것 때문에 삐쳐가지고 3년 동안 이야기안하고요.

남편이 “당신이 그런 이야기하는 거 보니까 시집오기 전에 친정에서 잘 배웠네.” 이 한마디 했다고 다음 5년 동안 말도 안하고. “잘 배웠잖아, 그래.” “잘 배웠다는 말이 왜 꼬는 것처럼 느껴지냐?” “그건 니 생각이지.” 보세요. 예수 믿지 말라 해서 5년 동안 말 안하는 것 봤습니까, 부부 사이에? “너 예수 믿지 마.” “나 이야기 안 해.” 그런 부부 봤습니까? 친정 씹는다고 5년 동안 이야기 안하는 부부는 있지만 시가집 씹는다고 3년 동안 이야기 안하는 부부는 있지만, 예수님 씹는다고 이야기 안하고 그런 부부 있습니까?

얼마나 나 위주입니까. 70살 먹은 고집이 뭐 50, 60때는 없다가 70되면 갑자기 생기는 겁니까? 아니죠. 그게 바로 성화된 거예요. 성숙된 거예요. 딴 게 성숙되고 성화된 게 아니고 고집이 성화된 거예요, 고집이. 황소고집이 성화된 거예요. 죽어도 내 이 믿음은 못 버린다. 그게 바로 마귀생각이에요. 좀 버리란 말이에요, 네 믿음을. 좀 매일같이 믿음 바꿔야 돼요!

흠과 티가 없다는 말은 매일같이 새롭다는 말입니다. 매일같이 새롭다는 말이에요! 어제 나보다 오늘이 새롭다는 게 흠과 티가 없는 거예요. 원래 창조가 흠과 티가 없어요. 구닥다리 고쳐 쓰고 아껴 쓰고 그거 백날 해봐야 다 흠집이 나요. 고물 아무리 깨끗하게 해봐야 흠난다고요. 늘 매일같이 죽고 매일같이 사는 새로움이 주께서 언제 오시든지 흠과 티가 없는 겁니다.

과거를 버리는 방법은 제가 알려드렸습니다. 육체에서 성령한테 지고 성령 안에서 다시 시작하면 되죠. 다 이루었다 부터 시작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 안에는 누가 있느냐?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십자가가 들어있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시작하면 그게 바로 새로운 거예요.

새로운 내가 가게 되면 이 세상에는 뭐가 기다리고 있습니까? 불타야 될 이유들이 있죠. 그 불타야 될 이유가 우리의 육신과 또 같이 결탁이 돼요. 짝짜꿍이 된다고요. 나는 새 사람 되었다, 새 사람 되었다. 새 사람 되었다고 서너 번 하면 벌써 헌 사람 돼버려요. 뭐가 새 사람인데? 새 사람 되었다. 몇 분 전에? 5분 전에. 그럼 아니네. 그건 5분 전이잖아. 지금 아니잖아. 5분 전이잖아.

부흥회 때 회개하라고 부흥사가 얘기하면 이미 작년 부흥회 때 다 회개해서 청산했는데 회개하라 하니까 시간은 자꾸 가고 할 말 없으니까 작년에 한 것 또 끄집어내서 또 한다고요. 왜 그런 현상이 있느냐 하면 나는 옳다, 이렇게 돼버리니까 말씀이 말씀과 티격태격이 안 되는 거예요.

성령이 없으니까 성령으로부터 지적을 받는 요소가 있어야 새로움의 가능성이 있는데 내가 말씀을 지켜버리고 내가 말씀을 해석해버리니까 결국 남는 것은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결국 어디로 돌아와요? 모든 통합성과 윤리 도덕은 어디로 옵니까? 나의 멋짐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나의 멀쩡함으로 돌아오는 거죠. 나의 대단함으로. 나의 우수함으로. 나의 훌륭함으로 되돌아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까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언제든지 담배 끊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오늘도 담배 피우잖아요. 그거 뭐 끊으면 되지, 이러면서 계속 담배 피우는 거예요. 새로운 것, 흠과 티가 없는 것? 내가 지금 마음만 먹으면 열심히 할 수 있어. 그러니까 그게 가짜인 거예요, 그 인간이.

여러분 이 정도까지는 알았으니까 계속 진도 나가보겠습니다. 일본에서 어떤 청년이 외국 사람을 무참하게 살인하고 그다음부터 숨어 다녔어요. 무려 6년 동안이나 숨어 다녔습니다. 일본에서는 전국에 수배를 내렸고 전국을 샅샅이 뒤져서 그 수배된 살인범을 찾았습니다. 못 찾았었는데 결국은 체포했어요. 그동안 그 사람을 왜 못 찾았는가? 사진도 있고 했는데... self-성형을 했습니다. 자기가 자기 얼굴을 성형했어요. 이게 오늘날 교회에서 하는 짓거리에요.

새로운 전체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에서 불타고 난 뒤에 나타난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거기에 이미 성령 받고 소속된 성령 받은 사람은 이 땅에서 결코 수배당할 이유 없습니다. 수배당할 대상 아닙니다.

그런데 새 하늘과 새 땅을 전혀 모르고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같은 교회나 주위에서, 너 그래가지고 구원 받겠냐? 흠과 티가 그렇게 많아가지고 여기 베드로후서 3장에 보니까 흠과 티가 없어야 천당 간다는데 천당 가겠냐? 이런 소리가 타인의 시선으로 따갑게 들릴까봐 겁이 나가지고 자가 성형에 들어가요. 어제도 나 금식했거든? 매일같이 내가 잘 때 기도한다고. 매일같이 기도해.

오늘 안양강의에도 잘 때 하는 기도, 안양강의 때 제가 언급해드렸죠? 참고로 미리 또 말씀드리면 시편 41편, 아까 몇 시간 전에 들은 것 해도 괜찮겠죠. 아, 141편이다. 나도 5분 지나면 바로 잊어버려요. 그렇게 지적해주니 내가 새 사람 됐잖아요. 이게 바로 응용문제 아닙니까? 새 사람 됐잖아요. 지적을 받아야 된다니까요.

141편 2절에 보니까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날마다 저녁에 내가 제물 되는 거예요. 오늘로써 내 생애는 끝입니다. 밤에 잘 때. 오늘로써 내 생애는 끝입니다.

내일 혹시, 혹시입니다, 혹시 허락한다면 새 날을 허락하시겠죠. 새 날을 주시겠죠. 새 날을 주신다면 이것은 누구 솜씨냐? 성령이 또 나한테 꾸지람하려고 만든 대상으로써 육체에 속한 나를 또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제하고 나는 차이가 나는 거예요. 동일성이 아니고 차이가 나는 거예요. 내가 셀프 성형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남들이 나보고 궁시렁 궁시렁 거리면서 저거 뭐 집사답지도 않네, 뭐 장로, 목사 행동이 어떻네 그런 소리를 들을 때 그들로부터 수배당할 이유 없습니다. 숨을 필요 있어요?

그걸 가지고 이렇게 합니다. [매일같이 나를 거세한다] 거세란 할례죠. 내 마음의 할례. 성령이 매일같이 나를 거세하는 거예요. 거세하고 나를 어디다 숨기는가? 기존 전체에 숨기는 게 아니고 불에 탈 이 세상에 숨기는 게 아니고, 불에 타지 않을 전체에 속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당당하고 그다음에 제가 좋아하는 말, 의젓하게. 걸을 때 구부정하게 걷지 말고 당당하게. 숙여 걷지 말라는 말은 내가 많이 듣던 소리네요.

어깨 펴고 당당하게.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 중 괴수입니다. 사도 바울이 당당한 것처럼 당당할 수 있는 것은 남이, 십자가와 관계없는, 다 이루었다와 관계없는 남들이 나한테 지적할 하등의 권한도 권리도 없습니다.

형제가 누굴 충고할 때는, 충고할 수도 있어요, 충고할 때는 나도 이 말씀에 죄인이니까 너도 혹시 죄인일 수 있다 하는, 전하는 자가 더 성형을 잘한 차원이 아니고 성형을 포기한 차원에서 이야기할 때, 나 말씀으로 포장 안 할래, 그런 자유함으로 언급할 때는 주께서 하는 이야기로 받아들이시면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는 일체 누구한테도 최고집이나 왕고집한테도 여러분 구애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서울강의20230316b 베드로후서 3장 12절(새로운 전체)-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16절에 보면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했어요.

멸망 가는 길을 자력으로 벗어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어디 있다? 성경 자체에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사람이 성경을 보는 이유는 구원받기 위해서 성경 보는 거죠. 멸망에 이르려고 성경 보지는 않잖아요.

사도 베드로가 16절 같은 이런 말씀을 빼든지 해야지, 괜히 이런 걸 딱 놓으니까 그다음부터는 사람들이 성경 볼 때 조심해서 성경을 풀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요. 조심해서 푸는 것은 셀프 성형입니다.

조심해서 푼다는 말은 평소에 구원받는 것도 자기가 조심스러운 성격에 입각해서 구원에 접근해왔다는 그 본색이 고만 들통나버린 거예요. 조오심 조오심 멸망에 이르지 않게 조오심 조오심 천로역정 가는 것처럼. 천국 가는 길에 앞뒤 살펴가면서. 어디 뭐 한문철 변호사 이야기입니까? 교통신호 주의해서 벌금 적게 내고 이런 거예요, 천국 가는 길이?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의 편지 속에 육체의 소욕이 어디서부터 육체의 소욕이 나오냐 그걸 한번 우리가 생각해봐야 돼요. 육체의 소욕이 인간의 육체가 마귀와 더불어 있다, 제가 아까 그렇게 했잖아요. 이걸 좀더 알기 쉽게 말하면 인간이 있는데 악마가 붙어있는 이런 식이 아니고 악마가 전체를 덮고 있습니다.

이걸 돔(dome)이라 하죠, 돔. 장충체육관 같은 데, 지금도 장충체육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나의 지붕으로 다 덮는 그 세계의 신이 누구냐? 이 세상 신이 사도 바울의 편지에 의하면 악마입니다. 악마를 이 세상 신이라 했어요. 돔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내가 바르게 살아야지, 아무리 애를 쓴들 육체는 이미 무엇의 성질에 푹 젖어 있느냐 하면... 김장 김치 배추할 때 소금에 절인다는 말이 있죠. 인간들의 육체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악마에 푹 젖어 나옵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내가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 했는데 그 죄가 뭐냐? 그 죄가 바로 창세기 3장의 하나님 지시와 반대된 것인데 그게 살고자 하는 거예요. 어떤 이유로든지 살고자 하는 것. 내가 하는 행위와 태도와 그리고 말과 말씨와 모든 행동을 통해서 이게 어디로 모아진다? 내가 하루하루 보다 더 나를 살게 하는 용도로 이것을 발산할 때, 그걸 죄라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규정할 때, 아까 했죠, 넓게 보면 we are all dead. 우린 다 죽도록 되어있어요.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의 후손들이 아무리 오래 길게 살았다 할지라도 사는 기간보다 죽고 난 뒤의 기간이 더 긴데 뭘 어떻게 합니까? 아무리 900살 가까이 살아도 태어나서 애 낳고 죽었다. 태어나서 애 낳고 죽었다. 죽었다의 반복으로 연속되는 겁니다.

이 창세기 5장의 말은 인간이 달라도 죽음은 하나다 이 말이에요. 아무리 인간이 남녀가 구분되고 뭐가 성격이 다르고 DNA 다르다 할지라도 죽음의 DNA는 한결같다 이 말입니다. 거기서 인간은 못 빠져나온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거예요.

이 세계, 돔의 세계는 바로 죽음의 세계입니다. 죽음의 세계에서 살고자 하니까 여기서 나오는 것은 뭐냐 하면 반발과 반항기. 반항과 반발기.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께서 징벌을 내리니까 징벌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더 하나님께 욕설을 퍼붓는 대목이 나와요. 회개하는 게 아니고 욕설을 퍼붓는 거예요. 그냥 곱게 살면 안 됩니까? 이런 거예요.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멘트 있죠. 그냥 우리 사랑하게 해주세요. 너희들 배다른 남맨데? 남매든 뭐든 간에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세요. 가자, 인도네시아로. 옛날 드라마에 그런 게 있어요. 가란 말이야. 돈이면 다야? 그런 대사 나오는 거 있어요. 제발 좀 우리 둘이 사랑하게 그냥 내버려둬요, 좀. 간섭하지 말고. 뭐 이런 거요.

그런데 그게 더 발전하면 그냥 나 조용하게 살 테니까 나를 좀 괴롭히지 말고 나를 힘들게 하지 말고 그냥 사는 것처럼 가만 놔두면 안 됩니까? 이것은 하나의 반발이고 반항이죠. 세상은 왜 모질게 우리를 못 잡아먹어서 난리냐. 왜 우리를 못 잡아먹어서 난리야. 그렇게 해놓고는 이유에 대해서는 몰라요.

그래서 제가 이유를 네 가지 적어왔습니다. 왜 이렇게 우리가 반발하고 반항하고 세상 살면 살수록 하나님께 대들고 원망할 수밖에 없는 그 이유가 뭐냐? 자체적으로 하나님께서 네 가지 적대감을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셨어요.

첫째는 모든 가치를 돈으로 측정한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말씀이죠. 모든 가치를 돈으로 측정함으로써 여기서 인간의 품위, 고요한 품위가 나중에 커가면서 따뜻한 어머니의 정, 형제간에 우애, 클 때는 그래요, 남매간에 서로 돕고 하는 이것. 그런데 둘다 새로운 식구들이 오게 되죠. 여자는 남편, 아들에게는 며느리 들어오면서 모든 가치가 남매간 형제간의 우애 그런 것 다 날아갑니다. 얼마면 돼? 전부다 부모와 자식 간에 돈으로 다 되죠.

너한테 그 돈 주고 나면 나이 70넘은 우리 늙은 부부는 뭐 먹고 살라고? 그렇게 나이 40,50때까지 도와주면 됐지 이 나이까지 또 너를 뒷바라지해야 되나? 이 늙은 우리가. 너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아? 지금 나무라는 거 아닙니다. 그럼 자식들이, 어머님 섭섭합니다. 어머님은 그런 어머니인지 몰랐습니다. 다시는 내가 찾아오는가 보세요. 여보, 가자. 어머니 생신이고 뭐고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거 좀 자식이 클라고 할 때 약간만, 한 2억 5천 약간만 도와주면 될 걸. 3억 정도 약간만 도와주면 될 걸 가지고 자식 망하는 게 그리 좋습니까? 악담을 늘어놓죠. 아유, 더러운 세상. 이러면서. 자기가 더러우면서 무슨.

두 번째가 역시 다 적대감이라 어쩔 수 없어요. 하나님께서 어쩔 수 없도록 만들어놨어요. 자연과의 적대감. 자연훼손. 그놈의 태풍, 가뭄, 지진은 왜 허락도 없이... 산불, 계속되는 고온현상, 싸이클론, 태풍 이런 건 왜 자꾸 와가지고 공들여놓은 내 농토와 이런 걸 다 망치는지. 자연훼손. 자연과 인간의 적대감.

세 번째는 뭐냐? 아까는 인간을 돈으로 보죠. 세 번째는 인간형의 변질. 어떻게 변질되는가? 돈이 문제가 아니고 인간 자체가 이게 기계인지 인간인지 구분이 안돼요. 기계로 변해요. 인간은 기계로 변해요.

특히 21세기 들어와서 인간은 기계같이 돼요. 긴 답변도 싫어요. 딱 인공지능처럼 답변하기를 원해요. 따뜻한 우리의 회사 분위기 그런 거 없어요. 기계처럼 매뉴얼대로 딱 하고 정식 칼퇴근 끝나. 회식도 없어. 전부다 10년, 20년 처음 왔을 때 정 나눴던 것이 나중에는 상투적인 기계와 기계의 마찰로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게 되어버린 겁니다.

네 번째는 비슷한 얘기인데 거주환경이 단절된 구조. 아파트화 되어서 가구 수도 삼대가 다 모여 사는데 전부다 쪼가리내가지고 손자는 손자끼리, 그 손자들도 따로 손자, 아들은 아들끼리. 아들도 나중엔 전부다 각방 쓰고. 그것도 안 되면 집 두 개해서 별장엔 아버지 살고 자기는 서울에 와있고.

전부다 개체화. 극단적인 개체화. 가구 수가 늘어나죠.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통해서 내가 요구하는 데에 대해서 부응해주는 타인이 점점 더 희소해져요. 점점 사라져요. 따뜻하게 깊이 있게 정 나눌 대상들이, 말벗, 말을 나눌 수 있는, 말을 섞을 사람들이 점점 더 없어져가요.

그래서 이런 현상은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으로 언급하신 거예요. 처음부터 인간은 없음입니다. 성경대로 하면. 없는데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적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돼요.

현재 지금 이 네 가지 적대감은 출발점이 없음이 아니고 있음부터 출발해가지고 있음을 계속 있음으로 또 있음으로 이어나가다가 나중에 나 있음으로 마감되잖아요. 나 있음. 남이 있든 말든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되지. 나 있음으로 나온다고요. 이 있음은 나에게 떨어지지를 않아요. 왜 있는지 물어보면 이유를 몰라요. 내가 왜 있는지. 아무도 이야기하는 사람도 없고 이야기해줄 사람도 없고 그런 능력 있는 사람도 없고.

있음이 있음으로 있으니까 사회는 이래요. 사회는 적대감이 늘어나는데 인간은 있으니까 자꾸 있음으로 가면서 여기서 뭘 찾느냐 하면 여기서 꿈과 희망을 원하고 있습니다.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거예요.

현실은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만 나이 열 몇 살, 스물 몇 살까지는 아직 가족 정이 남아있어요. 그런데 사회 나가면 사회가 가족 정을 나눌 시간 틈을 주지 않습니다. 가족 시간하다가는 회사에서 잘려버리는데요 뭐. 잘리면 경력단절 돼서 다시 재취업하기 힘들어요. 회사는 기곈데요. 기계 속에서 사람 구실하려고 하다 보니까 기계가 용납 안하죠. 생산성 약하다는 이유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이해하는 현실은 바로 이 네 가지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꿈과 희망이죠. 그러니까 현실은 이 네 가지인데 왜 나는 동떨어져서 현실을 현실로 안 받아들이고 되지도 않는 꿈과 희망을 추구하느냐 이 말이죠.

그래서 이 현실세계에서 보면 이렇게 돼요. [꿈과 희망은 집착이며 곤경을 기피하려는 이론으로 무장한 비겁함이다] 꿈과 희망은 비겁함이에요. 현실은 이 네 가지인데 우리는 위로랍시고 하는 게, 힘내. 뭔가 나중엔 좋은 날 있을 거야.

그렇다면 제대로 현실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쪽은 어느 쪽입니까? 하나님 쪽이죠.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만들어준 현실은 이겁니다. 모든 세상은 불바다 된다, 이겁니다.

따라서 인간이 끄집어낼 수 있는 희망이 사라지는 것이 성도의 희망이에요. 이걸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절망을 기다리는 용기] 절망을 기다릴 줄 아는 용기, 이게 자유입니다. 그게 의의 약속한 바에요.

이것은 악마로 구성된 돔 있잖아요. 이걸 아까 전체라 했죠, 전체. 이 전체가 사라지면서 나타나는 뒤에 준비된 전체,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래서 왜 성경 풀다가 멸망합니까? 나를 여기 절망 속에 넣으면 되는데...... 기어이 내가 있음에서 없음으로 가는 것을 고대하면 되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것이 어제 수요일에 했듯이 스데반 집사 아닙니까. 스데반 집사는 그날을 기다렸어요. 자기가 죽는 날을. 세상에 속한 내가 주님께 속한 나라의 전체 중 일부로서 드러날 그날을 기다린 겁니다.

그런데 다른 외부인 3자가 볼 때는 스데반 집사는 절망을 절망적인 사태를 자기가 의도적으로 시도한 바가 되죠. 입 다물고 있으면 될 걸 괜히 말해가지고 돌멩이란 돌멩이는 죄다 다 던져가지고 그 동네 돌멩이가 없이 깨끗했어요. 자기는 돌멩이 무덤 속에 있고. 그런데 그 돌멩이 무덤에 누가 서 있느냐? 사울이란 사람이 서 있죠. 그 광경을 사울이 주도했고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전체가 이 땅이 멸망해야 그다음 비로소 나타나는 게 숨어있는 다 이루었다의 세계, 새 하늘과 새 땅이냐? 그건 아닙니다. 그건 아니고 꿈과 희망을 원하지만 주어진 것은 말씀이 주어지거든요. [준비된 전체는 매순간 새롭게 창조된다] 이 새로움. 새로움의 현장이 뭐냐? 성도가 있는, 이 세상에 사는 자리입니다.

성도는 밥 먹고 살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새로움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직도 주님은 우리 목숨을 데려가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곧 계시니까. 성도의 삶이 곧 계시이니까요. 그게 흠과 티가 없는 거예요. 완벽한 거예요. 왜? 새로우니까.

옛날 못한 걸 수리한 게 아니고 아이고, 옛날에 뭐 술을 많이 마시고 담배를 못 끊었는데 담배 끊어야지, 이게 아니라 술, 담배에 속한 그 옛날보다 전혀 다른 그것과 단절되어 있는 연속적이지 않은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어설프기 짝이 없고 허접스러운 우리를 통해서 새로운 말씀으로 그 자유함을 드러내니까 이것보다 더 새로운 게 어디 있어요.

“아이고, 연세 많은 사람 이제 연세 다 되가지고 낙이 없죠?” “내가 연세 늙어가는 게 낙이다, 야.” “아니, 그거는 뭐 처음 듣는 말인데.” “그래, 너는 처음 듣는 말이지. 네가 따라오려고 하면 네 멸망에 빠져. 따라하지 마. 미혹에 빠진다고.” 있음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고 말씀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말씀에서 출발하게 되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말씀드릴 것은 그 전체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성경에 어떻게 드러나 있는가? 그것을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걸로 지우라 했으니까 이걸로 지우겠습니다. 잘 안 지워지네. 다른 지우개로 처음부터 지우고 싶어도 이걸로 지우라는 것이 새로움으로 다가오니까 새로움을 써먹는 거예요. 자기를 부인하면.

이스터 섬(Easter Island)이라고 있어요. 뉴질랜드와 페루가 있는 남태평양 거기에 석상이 있습니다. 모아이(Moai) 석상이죠. 모아이 석상이 있는데 석상의 특징이 얼굴에 귀, 코 있는데 석상 몸뚱이는 지면에 나와 있고 밑에 발은 땅에 묻혀있어요. 묻혀있다고요. 세상에 모아이 석상까지 일본에서 이걸 그대로 베껴가지고 자기 나라에도 만들어놨어요. 홋카이도 가면 이런 게 있답니다. 톡파원 특파원보면 이게 나와요.

모아이 석상이 있는데 위에는 나와 있고 아래는 묻혀있어요. 성경에서는 장차 올 이 밑바닥을 불에 탈 이 세상으로 밑에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에는, 실제로는 이게 위에 있는데 인간세상은 아래 있으니까 위가 전혀 안 보이는 거예요. 이게 전체 석상이에요. 그게 성경에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지를 몇 구절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창세기 9장 14절에 보면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그다음에 “내” 뭐라고 되어 있어요? “내 언약”이죠. 말이 아니라 실제 이 세상을 그대로 묘사하는 표현이 언약인 거예요. 언약.

보통 노아 언약은 방주잖아요. 그런데 방주는 이미 노아 식구를 태워서 날라가버리고 노아 언약의 연속성, 노아 언약이 지속될 때에 노아 언약에 의해서 이렇게 구성이 돼요, 세상이. 저 위에는 뭐가 있다? 무지개. 아래쪽은 뭐냐? 아래쪽은 심판이 잠재되어 있는 세계로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제가 방금 이야기한 옛날에는 물로써 망했지만 앞으로는 불로써 망한다는 그 대목과 연관시켜서 생각하시면 쉽게 됩니다.

무지개가 뭐냐 하면 무지개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의 대상으로 본다, 이게 무지개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 대상으로 봤다. 어떤 조건 하에? 언약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언약 완성을 위해서 이 세상은 일시적으로 심판의 대상으로 연명하면서 현재 하나님이 그냥 잠시 쥐고 있는 상태에 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전에는 물로 멸망했지만 마지막에는 불로 멸망받기 때문에.

무지개라는 것이 뭔가 비가 왔다는 증거거든요. 비가 왔는데 하나님께서 물 심판 그만하는 조건 하에 무지개가 뜬 겁니다. 그래서 노아 방주가 뭐로 전환되었다? 무지개로 전환되어서 전체 이 세상 끝날까지 그 원칙을 그대로 밀어붙이는 그런 표증으로써 rainbow, 이 무지개가 떠있는 거예요.

그다음에 에스겔 1장 28절 봅시다.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아까 모아이 석상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2층 구조로 되어 있어요. 아래쪽에는 무서운 숯불이 있어요, 에스겔 1장 13절에. 아래쪽에는 무서운 숯불이 있고 층이 2층으로 되어 있어서 아래쪽으로는 무서운 숯불이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천사가 그 기능을 담당해요. 천사가 심판의 기능을 한다고요. 불로 싸질러버리는 기능을 하고 있고 아래쪽은 굉장히 요란스럽고 시끄러워요, 심판한다고. 위쪽에는 조용해요. 조용하고 굉장히 평화로워요. 무지개가 떠있는 거예요.

무지개는 심판했는데 일시적으로 마감되었다. 이제는 평화롭다. 이게 노아 언약에도 노아 홍수 위에 평화의 모습으로 무지개 떠 있잖아요. 심판하고 난 뒤에 평화로운 그러한 상태에 돌입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무지개가 있는 것처럼, 일단은 심판이 있었다.

그때 심판할 때 심판하는 이유가 너무나 단순해요. 뭐냐 하면 노아를 통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그들은 신뢰하지 않았다는 단지 그 이유에요. 아브라함 시대에 심판받는 이유는 아비멜렉 추장이 심판받는 이유는 아브라함의 아내를, 그것도 건드리지도 않았어요, 건드릴 뻔해서 그 집안의 모든 여자가 임신을 못했습니다. (창 20:18)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단독성을 강조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린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특정성, 특정 인물을 등장시키는 거예요.

노아 방주에 들어오면 사는데 거기에 안 들어왔기 때문에 그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무슨 짓을 해도 그건 전부다 찰랑찰랑하는 물에 잠겨버려요. 완전히 물에 다 잠겨버렸어요. 여기서 나온 노래가 유명한 찰랑찰랑이에요. 찰랑찰랑~

안에 다 들어있다니까요, 이 안에. 인품 좋고 성격 좋고 뭐 우리 서로 사랑하게 해달라 그런 소리 하는 사람도 있고 하지만 문제는 그걸 묻는 게 아니에요. 특정성이에요, 특정성. 주님이 일방적으로 딱 꼬집어서 하는 거기에 대해서 관심 없을 때, 저주에요.

이 말은 뭐냐? 이왕 저주된 거예요. 벌써 저주된 거예요. 그래서 저주 안 받는 게 이상한 일이에요. 멸망 안 당하는 게 이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그게 희한한 일이고 어찌 그럴 리가. 멸망해야 되는데 지옥 가야 되는데 왜 지옥을 안 가지? 그걸 의아해해야 합니다. 적어도 성령 받은 사람이라면.

주여, 이럴 수는 없습니다. 기분 좋아하면서, 이럴 수는 없습니다. 반항 아닌 기쁨의 반항을 해볼 줄 알아야 돼요. 주여, 제가 뭘 했다고 구원 받습니까? 이럴 수는 없습니다. 전하~~~ 통촉 많이 해주세요, 전하. 이럴 수는 없습니다, 정녕. 뭐 싫어? 아닙니다. 너무 좋아서 했습니다.

이게 바로 모아이 석상, 양쪽 다... 어떻게 눈에 보이는 네 가지의 적대감으로 혼란에 빠진 이 세상만 보이는 게 아니라 다른 전체가, 가리워진 윗부분이 어떻게 보이냐는 거예요, 윗부분이. 언약이 왜 보이냔 말이에요, 무지개 언약이. 맹렬한데. 그 맹렬한 심판 뒤에 위에 평화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맹렬한 이것이 전부라고 알고 있겠죠.

특히 그 아는 데에 기여한 학문이 뭐냐 하면 양자물리학 아닙니까. 양자물리학.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한 생물학, 화학. 노벨물리학상 뭐 그런 상. 노벨상. 모든 인간의 지혜는 결국은 망할 수밖에 없는 이 지구호를 살려라, 이거잖아요. 지구호를 살리는 데에 기여한 사람은 상 줄게. 50만 달러의 상금을 걸고. 그게 노벨상이다 이 말이죠.

성도가 보기에는 그냥 웃죠. 뭐하냐, 너? 뭐하니? 질소가 어떻고 산소가 어떻고 원자, 전자, 양자. 양자를 논하고 파동방정식을 논하고 그렇게 해서 정확하게 정확하게 우주의 역사는 137억년, 인류의 역사는 52억년 어떻고 저떻고 47억년 뭐 이렇게 하는데. 크로마뇽인이 있기 전에는 네안데르탈인이 구부정하게 걸었다가 오스트랄로 피테쿠스가 바로 서고.

성도가 있다면 뭐하니 너, 지금? 출발점이 뭐야? 말씀이야, 아니면 어디야? 네가 하는 이야기는 있음에서 있음의 요소를 끄집어내서 다음 있음을 구성한 거예요, 그게. 있음에서 있음으로. 그러니까 그들의 주장은 뭡니까? 이러면 우린 다 망한다, 가 없어요. 살 수 있다는 겁니다. 꿈과 희망에 대한 집착이고 이것은 비겁함의 신호다.

터널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터널 안을 헤매고 있었어요. 꿈과 희망을 찾아서 터널 끝에는 뭔가 거기 햇빛이 비치는 곳이 나오겠지. 보는데 빛이 보여요. 가만 보니까 점점 더 빛이 밝아져요. 보니까 자기 자신이 서 있는 곳으로 박치기하기 위해서 거기서 나를 향하여 치려고 달려드는 기차의 헤드라이트였습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마주치는 절망과 대충돌하는 일만 남아있습니다.

인간의 양자물리학, 인간 천재들, 우주 역사가 어떻니 지구 역사가 어떻니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 결국 그 사람들이 그거 연구하다가 나이 80되고 90되면 죽죠. 자기가 평생 동안 연구해도 죽는 이유를 몰라요. 바보 아닙니까.

인간은 왜 죽습니까? 처음부터 죽게 되어 있어요. 이 돔에서, 악마가 있는 이 돔 안의 모든 인간은 죽음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어요. 왜 그걸 모르냐 이 말이에요, 그걸. 영어 한번 더 배워야 되겠다. 그걸 몰라요.

그래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이 공통적으로 똑같이 외친 게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었다가 살아났다. 이게 복음이다. 죽었다가 살아났다. 하나의 독특성이에요.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받고, 독특성이죠. 노아의 방주에 들어오지 않는 자는 물에 찰랑찰랑 다 죽는다. 오늘날은 뭡니까?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남을 부정하는 자는 지옥이다.

뭐 우리 가운데 학식 있는 자도 없고. 학식 없어도 괜찮아요. 이겁니다. 성령이 와서 가르쳐 주는 것은 나를 포함해서 죽어 마땅함이에요. 나를 포함해서. 첫째 시간부터 제가 강조한 겁니다. 나 빼놓고, 가 아니라 나를 포함해서 죽어 마땅함이에요.

내 안에 하나님의 다 이루신 말씀의 완성이 성령이 올 때 비로소 우리는 성령이 있음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먹고 마시고 그거 하나 안 하나 아무 상관없어요. 교회 헌금 얼마 했는가 그거 아무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의 행하심이지, 내가 뭘 했는가는 아예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그런 거는.

자, 그다음에 요한계시록 4장 3절 봅시다. 2층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요. 이 에스겔의 이야기가 계시록에서는 어떻게 완성되는가 보겠습니다. 4장 3절 보기 전에요. 요한계시록 10장 1절, 2절 보겠습니다. 그게 더 확실해요.

10장 1절과 2절, 이 모아이 석상을 그대로 빼다 박았어요.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 뭐가 있죠? 무지개가 있는데 위에는 평화로운 “무지개가 있고”. 그러니까 밑에 물로 심판하고 그 위에 무지개가 뜬 것처럼 이 땅에는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그 손에 펴 놓인 작은 책을 들고 그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3절에 “사자의 부르짖는 것같이 큰소리로 외치니 외칠 때에 일곱 우뢰가 그 소리를 발하더라”

이제 땅은 죽었어, 너희들. 완성했기 때문에 제발 꺼져줄래? 라는 이야기에요. 이미 완성한 나라가 있기 때문에 좀 꺼져달라는 거예요. 너희들의 양자물리학, 생물학, 과학, 철학 좀 꺼져라 이 말이죠.

이 세상에서 그런 양자물리학이나 학문은요, 자본을 재생산하기 위해서 필요한 지식들이에요. 어떤 지식도 돈이 되지 않는 지식은 통하지 않습니다. 반도체가 되었든 전기 자동차가 되었든 새로운 돈을 창출할 수 있어야 돼요.

아까 적대감의 첫 번째가 뭐였습니까? 모든 가치를 뭐로 측정한다? 가정의 화목 깨어지고 돈으로 측정한다. 네 큰 아들 어느 회사 다니는데? 둘째 아들 어느 회산데? 어느 회사인지가 왜 궁금합니까? 큰 아들 대기업, 둘째 아들 중소기업, 셋째 아들 농사짓고.

소 키우는데 전염병 돌고. 염소 키워놨더니 염소 병들어서 다 팔고. 과수 농사하니까 태풍불어서 다 날리고. 농협에 대출은 있어서 이자는 나가고. 힘은 힘대로 들고. 외국 노동자 안 들어와가지고 하루 품삯 10만원인데 15만원 주고. 농사짓는 거. 힘든 거. 아침에 한번만 게으르면 잡초가 우르르 쏟아져 있고. 회사 다니는 사람은 하루 회사 출근 안하면 회사 시멘트 바닥에 잡초 일어납니까? 안 일어나죠. 뽑을 필요가 없죠. 아줌마가 청소하면 끝나는 문제잖아요. 농사는 그거 다 뽑아야 되죠. 모기 파리 다 달려들죠. 거미까지 달려들죠.

이게 다 내가 못 배운 탓이다, 또 이러고 자책한다고요. 내가 못났다. 네 어미가 못 배워가지고 너희들 하나 잘 배우게 할라고 내가 애썼는데 너는 내 머리 닮아가지고 공부를 그리 못하니. 또 내 탓이요 나오는 거예요. 내 탓이요 하니까 천주교 생각나는데.

인간 탓 아닙니다. 특정 인물을 주께서 특정 인물답게 내세워서 문제에요. 문제는 예수님이 오셨다는 게 문제에요, 그게. 그게 큰 사건입니다. 큰 사건이고 그게 유일한 사건입니다. 유일한 사건. 모든 인간은 이걸 쳐다봐야 돼요.

왜 유일한 사건이냐? 언약을 유일하게 달성했기 때문에. 그 달성한 이름이 주의 이름이에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자는, 다시 말해서 누구든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내 이름 대신 주의 이름을 불러야지, 내 이름도 부르고 주의 이름 부르고 이런 거 없어요. 내 이름이 힘없고 내 이름은 저주받을 이름인 것을 인정한 가운데 내 이름 대신 주의 이름이에요. 주님이 나를 대신해 죽었기 때문에.

그래서 내 이름으로 살아가는 이 세월은 일찍 끝나면 좋고 또 일찍 안 끝나도 또 새로움이 새록새록 매일같이 나오니까 그래도 좋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어차피 내 팔자 아니니까요. 무지개 팔자거든요. 위에서 무지개가 작동하는 대로 나는 이 땅에서 증인 노릇하면 되니까. 그것도 매일 삶이 멸망되는 세상, 쓰레기 같은 세상을 쳐다보는 그 즐거움으로.

다시 말해서 꿈과 희망이 집착에 불과하며 꿈과 희망은 다 헛것이라는 것, 이미 모든 것은 베드로후서 3장에 의해서 이미 결정 났음을 매일같이 확인해보는 그 즐거움이 편안함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이게 새로운 전체에 소속된 소속원들의 하루 일과입니다.

오늘은 맑았다. 오늘도 맑았네? 이런 식으로. 또 세상에 나갔다. 세상에 나가니까 네 가지의 적대감으로 난리도 아니다. 그런데 그들은 해결책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 또 한번 감사했습니다. 오늘밤 나의 기도는 저녁 제사 되게 하옵소서. 시편 141편. 그렇게 하고 주무시면 되는 겁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자, 18절 보겠습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이게 뭐냐 하면 only you, 오직, 유독, 유일성이에요, 유일성. 예수 그리스도에 감히 비교할 게 더는 없는 거예요. 우리 자신도 그리스도와 비교할 필요 없어요.

우리가 죄인 되었다는 고백마저도 주께서 그걸 유발시킬 때 죄인이지, 우리가 아는 죄인은 내가 측정해서 아는 죄인은 주님 앞에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새로움을 위해서 매일같이 우리 육신이 갖고 있는, 내가 모르는 죄 개발에 나서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개발팀이에요.

내 죄가 어느 정도로 묵은 누룽지인가를 캐내는, 우리 어미가 우리 부모님이 나에게 남겨준 죄가 얼마나 굳은살로 나한테 배겨져 있고 또한 내가 속해있는 이 세상, 돈벌이를 위해 속해있는 이 세상이 나에게 전달해주는 그 죄들이 어떤 성격의 죄들인지, 나에게 어떤 성격의 죄들이 날라오는지를 주께서는 친히 경험케 하면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지식이 날로 더욱더 많아지고 풍성해지는 세월을 보내게 하십니다.

이 말씀과 관련해서 또 우리가 억지로 풀면 안 된다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우리가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3장 19절, 사도가 기도하는 기도 내용이 여기 적혀있습니다. 사도가 어떻게 기도하는지 상당히 궁금하신 분들이 있거든 사도가 17절에서 21절의 기도를 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17절부터 봅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너희의 마음 가운데 주님의 사랑이 박혀있죠. 이 사랑은 우리가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사랑은 안 받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우리 사랑을 받으면요, 우리는 우리 바칠 사랑 만든다고 신경질 나요. 되게 고민하게 돼요.

인간은 원래 자기 사랑이 우선이기 때문에 자기 사랑밖에 없기 때문에 타인 사랑은 제한적입니다.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 사랑이 늘어난 거예요. 이건 반칙이죠.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사랑한다는 말과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사랑해 당신을~ 그런 나를 사랑해~ 이런 뜻이거든요.

인간은 사랑이 없습니다. 자기 사랑에 미쳐있기 때문에 crazy love에요. 자기한테 미쳐있기 때문에 사랑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이 박혀버리죠. 박혀서 새로움을 줘요. 그 새로움이 풍선처럼 늘어납니다.

그 풍선이 19절에 나옵니다. “그 넓이와 (그) 길이와 (그) 높이와 깊이가” 자, 여기서 설명이 좀 필요하겠죠. 어떻게 이렇게 풍선처럼 늘어나느냐? 이 세상 돔, 악마의 돔에 예수님이 다녀갔고 예수님을 핍박했던 그 성깔들이 그대로 고스란히 살아있는 세상이에요. 예수님을 죽도록 미워했던 그 미움이 그대로 살아있는 곳에 성도를 여기다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주님께서. 성령을 주셔서.

그러면 예수님이 경험했던 그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그와 동일한 마음을 갖겠습니까? 고맙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했던 그 세력이 우리에게 아주 압박감으로 찾아오죠, 압박감으로.

제가 그 예를 수요 예배 때 설명했었습니다. 덴노헤이까 반자이. 일제시대 때 예배드리고 있는데 일본 순사가 딱 여기 입회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일본 천황에게 만세 삼창하는지 안 하는지 여부를 보면서 네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예배 드리든 말든 그건 나중 문제고 맨 먼저 일본 천황한테 고개 숙이고 하는지를 순사가 지켜보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순사는 어디서 온 거예요? 아까 그 네 가지 적대감으로 본다면 그 순사는 일본제국에서 왔죠. 일본제국은 힘이 무엇의 힘입니까? 무엇의 힘이죠? 자본의 힘이잖아요, 자본의 힘.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돈 힘으로, 돈이 많기 때문에 조선을 이긴 거예요. 그리고 조선은 일본에 의해서 자본 시장과 근대화에 눈뜬 거예요. 그래서 일본이 한국 근대화에 도움 줬다고 일본이 떵떵거리고, 그 떵떵거리는 수상하고 오늘 회담하고.

일본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거예요, 한국이.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거예요. 일본 아가씨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 돈 벌다 잠시 회사 그만두고 배낭 매고 북유럽 놀러가니까 20년 후에 한국 아가씨들이 결혼할 나이에 결혼 안하고 전부다 북유럽 가서 거기서 아주 낭만적인, 우연히 만난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가지고 돌아다니면서 하잖아요. 톡파원 돌아다니면서. 거기 가면 쭉 한국 아가씨들 많이 와있어요, 거기 가보면. 거기 가야 또 자기들끼리 대화가 돼요. 의사소통이 돼요. 파리 가봤나? 뭐 이렇게 되가지고. 그게 일본이 이미 했던 거거든요. 이게 돈 힘이잖아요, 돈 힘.

그러니까 너희들에게 이 선진문물을 내가 부여하는 이 자비하심에 너희들은 군소리하지 말고 따라다니란 말이죠. 일본이 하나님 믿어서 예수 믿어서 이렇게 잘된 거 아니잖아요.

이스라엘 역사에서 주변 나라가 어떤 나라였어요? 다 이스라엘보다 잘 먹고 잘 사는 나라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포진케 한 겁니다. 이스라엘은 뭐냐? 새로운 언약의 나라죠. 다른 나라는 뭐가 없습니까? 돈도 있고 인간 있고 다 있어요. 뭐가 없습니까?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 십자가가 없는 거예요. 주님의 이름이 없는 거예요. 결국 그들은 나중에 이스라엘도 망하고 둘다 다 망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냥 천국 오지 말고 예수님이 얼마나 시련과 아픔을 견뎠는지, 얼마나 이 세상 살면서 네가 뭐 괴롭습니다, 아픕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보면 나와요. 네가 백날 아파봐라. 나만큼 아파봤어? 네가 고생했다고 해도 나만큼 고생해봤어? 네가 기도 해봐도 나만큼 이렇게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해봤어? 안했으면 말을 하지 마 그냥. 잠시 네가 흉내 내게는 내가 해줄게.

왜 그렇게 하시는가? 가짜를 치밀하게 걸러내요. 가짜를.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일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 충성, 봉사 소용없어요. 성령 없으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 아니고 예수의 사람이 아니면 그것은 천국 백성 아닙니다. 그대로 갈라지는 거예요.

갈라내면서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 제가 한 게 전부 다 죄였습니다. 그들과 대화하고 맞서 싸운다고 순교한다고 까불거리는 그 조차도 주님의 행하심과 견줄 수가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주님 다 하셨지, 내 착함이 보태져서 구원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실제 삶을 통해서 그 깊이와 높이가, 처음에는 “주님이 진짜 고맙습니다.” 하다가 “정말 주께서 혼자 다 하신 것, 이것은 정말 놀랍습니다. 이것은 정말 생각도 못했습니다.”가 점점 그게 가득 차기를. 풍선 속에 헬륨 가스만 차지 마시고.

풍선 속에 십자가의 그 사랑, 터 박힌 사랑만 계속 커져 나가는 거예요. 커져 나오니까 다른 사람 보기에는 예수님이 커진 게 아니고 그 교인이 점점 사랑으로 가득한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본인은 갈수록 죄인 중의 괴수가 되어가는 거예요. “아이고, 성도님 성화 많이 되었네요. 어떻게 교회 봉사를 다 합니까?” “내가 뭘 봉사한다고. 이것도 죄인데 뭘 봉사라고 해요.” “아이고, 또 거기다 겸손하기까지 하네.”

네 마음대로 해석해, 네 마음대로. 하여튼 나는 주께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고 내가 감사한 것은 내가 어떤 짓을 해도 죄 뿐인데 이걸 이미 다 용서로 끝냈다는 것. 그리고 목숨 주셔서 봉사하게 하셨는데 봉사가 내일로 끝날 수도 있고 그것은 내 소관 아니라는 사실. 그 자유함을 여러분이 만끽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새로운 전체가 있기에 사도 베드로가 마음 놓고 이 세상의 멸망을 주저 없이 외쳤습니다. 이로써 사도가 얼마나 욕 얻어먹었으리라는 것을 예상한바 저희들도 발설될 이 말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수모로 다가올지 어떤 일이 있을지라도 그것조차 주의 사랑의 크기로 가늠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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