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규칙 그 자체

아빠와 함께 2023. 2. 25. 21:12

안양20230216a말1장10절(규칙 그 자체)-이 근호 목사

말라기1장6절부터 보겠습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7절에 보게 되면,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신기한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을 건넸다는 것이 신기해요. 말을 건넸다는 그 자체가 신기해요. 책망이 들어있던, 꾸중이 들어있던, 나무람이 들어있던,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쪽에서는 하나님을 발견할 길이 없어요. 발견할 길이 없는데, 그 하나님이 자기 존재를 존재성을 찾을 수 없는 분이 먼저 연락을 취해왔다는 거예요. 이건 충격이지요. 인간의 눈에는 사람밖에 안보이지요. 대자연, 자연, 사람, 그게 전부에요. 아침에 눈만 뜨면 만나는 것이 대자연과 그 속에 움직이고 있는 인간들. 식물, 동물들, 동네 개들, 이런 것만 보는데. 누구로부터 우리가 기대하지 않은 쪽에서 연락이 왔다는 것은 우리만 살아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만.

인간은 뭘 할 때 근거가 “나는 여기 살아있다.” 나는 여기 살아 있다가 되거든요. 그러면 살아 있다, 를 확인하는 쪽에서 인간은 외부에다가 시선을 보냅니다. 시선을 보내서 시선을 보낸 것을 도로 가져와요. 그렇게 되면 나는 여기 살아 있다가 굳히게 되는 겁니다. 살아있는 거 맞네! 오래간만에 친구 만나면 뭐라고 합니까? “살아있네!” 살아있다. 반갑다! 이런 뜻이지요. 부산 말로. 살아있네! 나는 내가 여기 살아있다. 그래서 인간은 모든 행동은 본인이 늘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인간은 행동하게 되어있어요. 깊은 산속에 있다가도 가끔 산에서 내려오면 자기가 살아있음을 감을 잡는 겁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증명하는 흔적들이 자기한테 시선을 보내는데 난데없이 뒤통수치듯이 여기서 연락이 온 거예요. 누구한테? 하나님한테 연락이 온 거예요. 연락이 와버리면 내가 여기 살아있다 보다 더 월등히 살아있음. 내가 살아있는 것은 제대로 살아있는 게 아님을 들추어내는 더 큰 살아있음.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지요.

내가 살아있다는 그 수집에 내 증거를 수집하는 여기에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았던 거예요. 내가 눈에 보이는 것만 주워 모아가지고 "나 살아있는 거 맞잖아." 라고 하고 싶었는데 뒤통수치듯이 내가 수집하지 않은 다른 쪽에서 어떤 증거가 와버리면 하나님의 살아있음이 내 속에 과연 내 살아있음을 확인해 줄 수 있느냐, 장담 못하지요.

내가 수집한 증거는 내가 살아있음을 확정하는 증거가 되는데, 내가 원치 않는 게 왔을 때, 원치 않는 연락이 와버리면 내가 제대로 살아있는 것이 흔들리기 마련이다 말이지요. 하나의 쉬운 예를 들면 아주 쉬운 예니까요. 자기 남편과 아내가 행복하게 잘 살고 있고 애들 둘 하고 네 식구가 잘 살고 있는데, 어느 날 딩동~ 해가지고 애 하나가 딱 들어온 거예요. “니 누구고?” 이렇게 하니까 “울 아버지 집인데요.” “니 아버지 이름이 뭐고?” 하니까 이름 대는데 보니 자기 남편 이름 댄다 말이죠. 자기 남편의 혼외자식이 되는 거예요. SK 재벌 그 이야기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

그럴 때 그 아내가 비참함을 느끼는 겁니다. 나는 그 애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연락이 오기 전까지는 나는 행복한데, 나는 살아있는데, 자기가 행복하게 살아있다고 확정했는데, 자기가 감당하지 못할 새로운 증거가 투입되니까 나 꽉 죽어버릴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갑자기 자기가 살아 있다, 를 자폭, 포기하고 싶은 거예요.

“내 인생 가짜였어.” 내 인생 가짜였어. 추가로 내가 다듬을 수 없는 다른 요소가 왜 다듬어 놓은 내 안에 왜 끼어드느냐 이 말이지요. 그럼 이건 뭐냐, 내 행복한 자아는 균열이 일어나지요. 균열. 내 살아 있다, 의 균열이 일어나는 겁니다. 쪼개지는 거지요. 그래서 주님이 보낸 연락책은 주님이 보낸 그것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은 파편의 집합체 이걸 증명하는 겁니다. 쪼가리들을 억지 모아놓은 것. 본드로 붙여봐야 본드도 소용없는 거예요.

뭔가 외부에서 탁 쳤을 때 다 깨지는 거예요. 양성자가 중성자를 탁 쳐버리면 중성자가 깨지면서 숨어있던 여분의 물질이 에너지로 변화는 거 이게 원자폭탄입니다. 잘 결합이 되어서 단단하다고 자부했는데 외부에서 와버리면 이게 깨어지는 겁니다. 균열되지요. 뭐가? 나의 인생, 내가 살아있는 게 허구였다. 나는 내 살아있다는 것을 너무나 철딱서니 없는 내가 어린아이같이 내 눈앞에 있는 것만 주워놓고 살아있다고 그것도 일방적으로 자부했구나! 자기에 관한 자기 착각. 평생을 자기 착각 속에 빠졌다.

그런 의미에서 선지자의 존재, 이스라엘에게 선지자가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은 감사해야 되고 행복해야 되는 겁니다. 다른 민족은 이런 게 없어요. 왜냐하면 언약의 상대자가 아니기 때문에. 언약의 상대자에게 계속 연락이 오는 거예요. 공식 하나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의 생산물입니다.’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조립하면 안돼요. 하나님의 언약, 모세율법 다 포함되는 겁니다. 특히 오늘은 제사법을 이야기할 텐데.

제사법에 의해서 제사법이 살아있는 단체가 될 때 이스라엘이에요. 만약에 제사법에 제대로 살아있지 않으면 그러면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늦게 오셨기 때문에 다시 해야 될 타이밍이지요. 다시 합시다. 다시해도 새롭게 들어가요.

말라기 할 때 말라기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연락을 줬다는 게 평소에 우리가 내가 원하는 것만 수집해서 나라고 우겼던 그것을 파탄시켜 버리지요. 그 내용이 어떤 것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들어오는 말씀에 의해서 완전히 파편처럼 산산조각 나버리지요. 그럼 산산조각 나버리고 그 나버린 그 현장에 미사일이 와서 아파트를 공격할 때, 우크라이나 아파트를 공격할 때 그 현장에 남아있는 게 뭐냐 하면 미사일 잔해잖아요. 그게 말씀이 남아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연락이 올 때 말씀으로 연락을 주고, 그 말씀은 우리가 나 위주로 살았던 내 인생이 허구라는 것을 완전히 들추어내면서 파탄시켜 버립니다. 나를 산산조각 내버리지요. 내 허구 버리고 그 안에 뒤통수치듯이 날아왔던 그 말씀이 그 현장에 서게 되고 그 현장 그 쏟아진 말씀이 스스로 자체적으로 하나의 조립이 되어버리면 그게 하나의 이스라엘 되는 거예요.

I'll be back! 다시 돌아온다! 터미네이터. 거기에 보면 터미네이터3에 보면 강력한 무기를 쓰지요. 적들이 터미네이터를 죽이겠다고 쏘면 뻥하고 구멍이 뚫립니다. 그런데 이게 액체 물질이 돼가지고 구멍이 뚫려가지고 허물어졌는데 뭐 10초도 안되어 가지고 자체적인 조립을 해가지고 공격 맞기 전에 그 인물로 다시 멀쩡하게 재현해요. 섬뜩함을 느끼는 거예요. 죽으라고 쏘았는데 안 죽고 멀쩡하다 말이지요. 섬뜩함이지요.

인간이 하나님께 폭탄을 쐈습니다. 하나님이 죽겠어요? 안 죽겠어요? 죽지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죽습니다. 죽는데 그 죽음 가운데 사흘만에 멀쩡하게 살아난다면 이건 섬뜩함이지요. 이 섬뜩함이 나의 자리에는 없어요. 그러면 내 자리를 누구한테 내줘야 되는가, 죽었다 살아나신 그 분의 자리로 양보해야 돼요. 내놔야 돼요. 그 섬뜩함을 위해서, 그 분을 내놔야 된다고요.

그리고 그 죽었던 하나님은 섬뜩함의 더 섬뜩함으로서 창자국과 못자국을 보여주게 됩니다. “니가 나를 죽였잖아.” 그게 유명한 말이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내 다리 내놔라!” 하는 이야기지요. “니가 나를 죽였잖아.” 이 땅에 진정 살아있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만 살기 위해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자를 죽였을 때 그 인간의 죽임을 당한 자만이 진정 영원토록 살아계신 영생이 된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등장은 그렇게 나타나는 거예요.

인간이 찾는 하나님은 우상이지요. 어제 수요일 설교에 의하면 전부 우상입니다. 그거 말고 꼭 인간이 하나님을 죽여야 돼요. 죽이는 방법은 지금 내가 구축한 내 자리에는 나의 의미와 나의 가치만 고스란히 남아있어야 되고 그 외부 것은 끼어들면 안돼요. 왜? 인간은 자기가 파괴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에. 평생 내가 건사하려고 살아오지 파괴당하려고 살지는 않잖아요.


지난 강남강의에서 했지요. 주께서 저는 자, 눈 먼 자, 소경, 병신, 아픈 자 초청한다 해가지고 자기가 자기 눈을 찌를 수는 없잖아요. 찔러가면서 주께 오지를 않는 거예요. 파괴되는 척하면서 파괴 안 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천국에 합류하려는 이 심보, 주님 앞에서 그거 주님 앞에 들통 나야 되는 거예요. 자기를 부인하라 하면, “부인합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척하면서 어디를 다리를 슬슬 끼어들라고.

옛날 어릴 때, 형제간이 많을 때, 남자 형제들 한 방에 다 집어넣고, 여자 자매들 다 한 방에 집어넣잖아요. 부모는 이불 한 장만 툭 던져놓고 알아서 추운 밤을 지새라 이렇게 하잖아요. 그러면 거기에 형발이지요. 형들은 동생들 차버리고 지 혼자 이불 둘둘 말아서 세바퀴 반 돌면 동생들 한데 다 놓는데. 그런데 새벽2시 되어서 추워서 발을 하나 쓱 넣으면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 깨는지 발가지고 들어오지 말라고 발길로 차버립니다. 참, 옛날이야기에요. 6.25까지는 안가지만 그 10년 정도 그 때.

주님 나라 좋다고 쓱 끼면 안돼요. 차 버려요. 제가 지난 화요일날 장례식을 갔는데 장례식을 가면서 죽음이 좋은 걸 한 가지 발견했어요. 죽음이 좋은 이유. 발인에 운구도 하는데. 죽음이 좋은 이유 딱 한가지였어요. 리무진 탄다는 거. 보람상조에서 제공한 리무진 탄다는 거. 딱 그거 외에 아무것도 없어요. 화장터로 가면서 리무진으로 가는 걸 봤어요. 문제는 죽어야 탄다는 거예요. 산채로 한 번 타고 싶은데 산채로 탄다면 검은 색 리무진 타지 않겠지요.

인간은 계속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 고집하는 것은 나는 여기 살아 있다를 유지하려 하는 겁니다. 따라서 살아있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는 내가 살아있는 것에 부합되는 증거만 찾아요. 그걸 모으지요. 그런데 그게 뭐냐 파편이에요. 인간은 자기 위주로 만든 파편만 조각, 조각들의 집합체, 어설픈 집합체, 하나님의 말씀을 딱 던지게 되면 그건 완전히 당구공이 다 흩어지는 것처럼 하나치면 당구공이 전부다 저 구석까지 다 들어가 버렸어요. 다 깨지고 다 와해되어버려요.

그래서 어제 수요설교 때 뭐라고 했느냐 하면, 캠퍼스 위에 그린 그림이라 했지요. 평생 그림을 그렸는데 이게 천이 낡아서 그럼 그 위 있던 그림도 찢어진 천과 함께 조각, 조각 균열이 일어나지요. 나라고 했던 초상화에 균열이 일어나지요. 다 조각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해서 굉장히 고맙게 여겨야 돼요. 왜냐하면 말라기 6장7절에서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므로, 라는 말씀을 주셨잖아요.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 말씀이 왔다는 것은 지금 하나님께서 뭘 원하고 있다는 거예요? 깨끗한 떡을 원하고 있다는 뜻이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다. 하면 안돼요.

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언약의 상대자, 자기 백성에게 뭘 원한다? 하나님이 잡술만한 떡을 원한다, 라는 것이 분명하잖아요. 분명. 그러니 기쁨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뜻이 모호하지 않고, 분명하다는 그 점.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면 하나님이 누군가도 분명해지겠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누군지 모르겠다고 여기면서 흔들리는 우리의 자아도 흔들릴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뭘 원하는 줄 모르겠어...” 이렇게 중얼거린다는 것은 내 인생을 아무리 오래 산다 할지라도 불안정하다는 뜻이에요.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거예요. 확정된 주의 뜻을 모르는 이상은 인간의 마음은 그 방황 자체입니다. 방황이 심하면 공황이 되지요. 언제까지 방황할 거예요. 방황하면 안 되지요.

여기서 바로 하나님의 기쁜 소식이 바로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한테 주었다. 그게 왜 기쁜 소식이냐, 하나님께서 인간이 더러운 떡을 나에게 줬다. 하나님의 식탁을 너희가 경멸히 여긴다. 라는 말씀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준비된 그 다음 절차가 있다는 거예요.

뭐냐하면 제대로 떡을 줄 사람을 여기다가 니 자리 말고 니 비키고 거기다가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누군가가 심겠다는 뜻이에요. 기쁜 소식이에요. 반가운 소식입니다.

내 자리에 전에는 말씀만 왔는데, “떡 제대로 드려! 더러운 떡 주지 마!”라고 했는데 이제는 말라기가 마지막 선지자잖아요. 그 다음에는 아예 누군가 와서 깨끗한 하나님의 받을만한 제대로 된 떡을 바로 어느 자리에서 드린다? 내가 있던 내 자리에서 하나님께 드릴 분이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게 뭐냐 메시아는 모든 예언의 완성이라는 뜻이에요. 말라기가 예언이잖아요. 그럼 예언은 그냥 줬다. 누군가 예언을 흡수하고 통합한다.

누군가 이 예언을 인간이 못해서 버려놓은 예언을 주께서는 본인이 가져가서 그걸 대신 완성하시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준 거예요. 우리를 거쳐서 “니 못하지? 내가 할게.” 요 절차를 말라기가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그 분이 오셔서, 그 분이 오시게 되면 떡을 제대로 못 드리는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첫 번째, 나는 떡을 제대로 못 드린다. 두 번째, 어떤 분이 내 자리에 오신다. 오셔서 하는 것은 뭡니까. 내가 이루지 못한 말씀을 대신 다 이루었다. 다 이룬다. 세 번째 중요합니다. 나는 떡이다.

처음에 나는 떡을 드릴 사람이라고 되었는데, 그 다음에는 나는 떡이 되는 거예요. 나는 떡이 되려면 두 번째 분이 나에게 뭘 줘야 돼요? 아버지가 받으시는 떡을 나에게 공급하면 돼요. 나에게 제공하면 되겠지요.

마태복음26장26절 한 번 봅시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다. 말라기에서는 하나님이 “떡 다오! 떡을 다오. 너희들이 떡을 나한테 줘.” 이리 되잖아요. 그런데 마태복음26장26절에 보면 거기에 모든 말라기 말씀을 어떤 식으로 이룬다고요?

떡에 관해서 떡이 관련된 채 이루어지는 모든 말씀은 우리가 떡을 제공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중간에 있는 중보자가 우리에게 아버지가 받을 떡을 우리에게 그저 주시는 거예요. 옛날 우리나라 조선시대 전통 예식 할 때 족두리 쓰고 예식 할 때에 그 때 신랑, 신부 마주 절하고 술 나누고 대추하고 밤 할 때 준비 어디서 합니까? 신부가 다 합니까? 신부가 하는 게 아니지요. 혼주 측에서 준비하지요. 예식을 예식답게 하기 위해서 누군가 제공해놓고 폼만 내지요. 폼만. 신부 새신랑한테 술 한 잔 드려야지. 이거 누가 해요. 지가 집에서 밀주 담가서 합니까? 그저 다 해잖아요.

하나님이 말씀대로 받을 만한 떡은 내 떡을, 너희들은 더러운 떡을 나한테 줬다는 말은 하나님이 떡 받는 것을 포기하겠다는 뜻이 아니고 제대로 가자는 뜻이에요. 제대로. 제대로 가려는 필요한 그 떡은 우리가 준비하는 게 아니고 우리 자리에 오신 다른 우리 대신 두 번째 아담 되시는 마지막 아담 되시는 주님이 우리 자리에 오셔가지고 첫 번째 아담이 실패한 그것을 두 번째 아담이 완성시켜서 뭘 줍니까? 우리에게 떡을 주시는 거예요.

우리에게 떡을 주게 되면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세 번째 되는 내가 곧 내 안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떡이 있는, 내가 곧 떡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 바칠만한 떡이 되는 겁니다. 떡이 되어버리면 첫 번째에서는 나는 떡을 더러워서 제대로 못 주니까 나의 주체, 나의 자아는 어떻게 됩니까? 자기 한계성이 드러났지요. 그야말로 파편의 집합체에 불과하구나. 하다가 이렇게 주님께서 와서 뭐가 되느냐 이건 뭐냐 하면 내가 떡이다. 이 말은 내 안에 다른 주체 곧 진짜 주체. 하나님이 인정하는 진짜 주체가 내 안에 나를 잠식했고 나를 점령하신 거예요.

그럼 이건 뭐냐 하면 주체 바꿔치기가 성사된 겁니다. 내가 떡이다. 라는 누가 했느냐 하면 요한복음6장에서 예수님이 하셨거든요. 내가 생명의 떡이다. 내가 생명의 떡이다 할 때, 그 당시 요한복음6장에서 사람들은 좋겠네. 본인은 떡이라서. 그럼 우리는 뭐냐? 떡 아니지요. 제자들은 떡 아닌 거예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은 떡이다 하는 자체가 이게 말씀이 되어버리면 나중에 말씀의 완성이 되어버리면 말씀 완성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 속에 집어넣으면 앙꼬처럼 붕어빵 속에 앙꼬처럼 그냥 들어오는 거예요. 들어오면 나의 주체는 이제는 주님의 주체로 바꿔치기를 당하게 되는 겁니다.

그럼 주님은 떡이다가 뭐가 돼요? 나는 떡이다가 돼요. 왜냐 하면 내 안에 나만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떡을 왜 그리 좋아하느냐. 떡이라는 것은 레위기에 보면 양식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왜 떡을 좋아하느냐, 7절에 보니까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을 경멸히 여겼다. 여기 식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떡을 나눈다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떡을 나눴잖아요. 남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남이 아니다. 가족이다. 식구다. 이제는 니가 내 세계 속에 구성원이다. 그럴 때 내 세계를 형성하는 요소가 공통적인 요소가 너 안에도 공유되어야 된다. 동일한 동질성을 가진 본질이 네 속까지 삽입되어야 돼요. 들어오는 거예요.

마치 아담이 지은 죄가 아담의 후손에 샅샅이 침투되어서 아담만 죽은 것이 아니고 대대후손, 대대자손, 낳고서 살다가 죽고, 창세기5장 말씀, 아담이 몇 년동안 살다가 죽고 나오지요. 죽음을 계속 대대로 전달, 전달하는 전달체로서 기존 아담이 있다면, 새로운 아담은 아버지께서 흡족하게 받아서 율법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건 복이 돼요.

복의 전달체로 주님이 작용해서 우리에게 같은 복을 받는 거예요. 식탁을 하나 같이 하게 되면 요한복음17장에서 이걸 하나다. 아버지와 내와 그리고 너희와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바로 우리라는 것에 우리 속에 주께서 가담시켜 주는 거예요. 우리. 우리 속에.

자, 그러면 난데없이 떡 달라고 하시는 이유가 앞서 그 앞에 절차가 먼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희생 제사가 드려지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떡 먹자가 되거든요. 희생 제사. 희생 제사는 먹고 마시는 게 아니에요. 이건 다 태우는 겁니다. 희생 제사는 살벌해요. 하나 남김없이 홀라당 다 태워버리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모든 있음을 뭐로 바꾸느냐, 없음으로 바꾸는 겁니다. 어디 위에서? 제단 위에서. 제단은 역할이 뭐냐 하면 모든 있는 것을 없애는 거예요.

자, 모든 있는 것을 없앤다면 죽는 것을 없애면서 여기서 추가적으로 등장하는 게 있어요. 있음을 없음으로 하면서 추가로 등장하는 것. 원자폭탄이 터지면서 나오는 게 뭐지요? 에너지가 나오지요.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심판이 나옵니다. 심판. 하나님께서 이걸 얻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의 법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는데 그 심판을 솎아내고 싶은 겁니다. 심판을.

제단은 심판을 위한 거예요. 흡족한 심판을 발취해내기 위해서 제단이라는 이 기계를 설치한 거예요. 밭에서 고추를 땄습니다. 그런데 김치할 때나 음식에 넣을 때 고추가 필요한 거예요? 고춧가루가 필요한 거예요. 고춧가루가 필요하지요. 고추는 어떻게 됩니까? 고추를 들고 방앗간에 가가지고 방앗간 구멍있잖아요. 블랙홀. 거기다가 집어넣으면 덜덜덜하지요. 매워서 코막고 하잖아요. 고춧가루가 떨어지지요. 원하는 게 나온다고요. 원하는 게.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율법을 다 지킨 후에는 영생 또는 복, 율법을 못 지키면 뭐가 됩니까? 저주가 되는 거예요. 그래야 율법이 하나님의 법이 영이 살아요. 빈 말이 아니고 영이 산다고요. 하나님의 권위가 산다고요. 그래서 저주를 필히 생산해야 돼요. 저주를 생산한 현장에만 영생이 생성돼요. 저주 없이 영생 오는 거 없습니다. 같이 나와야 돼요. 같이. 당구 하나를 치면 둘로 쪼개져야 되지, 둘 다 쪼개지듯이, 이 때 율법이 완성이 되는 거예요. 모세 율법, 모세 언약. 완성이 된다고요.

자, 다시 묻습니다.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서 뭐가 필요하다 했습니까? 제단이 필요하지요. 제단을 집을 지어놓은 것을 성전이라 해요. 성전. 여기 말라기1장10절을 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너희 중에서 그 다음 나온 단어가 뭐지요? 성전의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이번 1월달에 우리교회 첫 설교의 핵심은 올해 우리교회 목표는 성전 문을 닫는 거예요. 경상도 말로 “그만 치워부리자 고마!” “고마 하자 그동안 많이 묵었다. 그동안에.” 치워버리고 두세 사람도 내 이름으로 모이는 진짜 성전. 진짜 그리스도. 성전 문 좀 닫아버려라. 가짜들아!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럼 절차가 어떻게 돼요. 하나님의 말씀 말라기 자체가 율법이고 예언이잖아요. 출발은 율법부터 시작합니다. 유식하게 말해서 말라기는 어디에 속한다? 다윗 언약에 속합니다. 다윗 언약에 속한다. 다윗 언약의 내용입니다. 다윗 언약이 다윗으로부터 해서 계속해서 중첩이 되고 추가가 되는 거예요. 내용이.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역사와 더불어서 숨겨진 다윗 언약이 계속해서 확산되고 확대되게 되어있어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노아언약 다음에는 아브라함 언약, 그 다음 이삭 언약, 그 다음 야곱언약, 그 다음에 모세언약이 나오지요. 야곱언약에서 국가단위가 되고, 국가단위의 언약이 모세언약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개인이에요. 개인의 가정이고 개인 문제에요. 개인 문제의 요소가 국가 요소로서 합류되면서 개인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원리가 국가형태로 등장한 게 이스라엘입니다.

왜냐하면 12지파의 집합체. 열두 지파고. 열두 지파는 야곱의 자식의 숫자가 12이기 때문에. 그러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죽 가면서 이스라엘 처음 할 때 뭐가 필요 없습니까? 말씀이 언약이 작용하기 때문에. 인간 세상에서 국가라는 형태에 있을 때 꼭 필요하다는 그 왕. 왕이 필요 없지요. 왕이 필요 없는데 이스라엘이 그만 그 다음부터 뭘 원합니까? 우리도 왕 주시옵소서. 하지요.

왕을 달라할 때 이스라엘은 이미 물 건너갔어요. “왕 줄게.” 왕 주는데 왕 달라할 때 저주받는 왕을 줘요. 항상 율법의 완성은 저주를 경유해서 영생 갑니다. 바로 영생 가는 법은 없어요. 절차가. 부정을 통해서 긍정이 나오기 때문에 이 저주 받는 왕 사울. 그 사울을 처음부터 깡패고 못난이고 이리 등장하는 게 아닙니다. 굉장히 겸손하고, “난 왕 안 해!” 임무를 줘도 왕 안 한다고 숨어있는 걸 하나님이 간택해서 숨어있는 걸 뽑아냈어요. 로또처럼 뽑아낸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사울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이스라엘을 한 번 해보겠다고 했는데 그게 화근이었던 거예요.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야기했다고요. “당신이 왕이지만, 왕이라는 당신 지위보다 우선하는 게 있다. 그건 뭐냐, 모세 율법이다. 당신이 만약에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당신이든, 백성이든 다 망한다. 당신은 율법대로 백성을 다스릴 책임이 있다.” 사울은 그걸 OK. 그렇게 하겠습니다. 선지자님. 받아들이지요.

그런데 그게 자기 마음대로 됩니까? 왜 안 되는가, 사울은 메시아가 아니거든요. 사울이 메시아가 아니라서 율법이 주어졌을 때 율법의 영생 노선이 아니고 율법이 원치 않는 저주 노선을 보여주는 대변자로서 사울이 등장하게 된 겁니다. 그건 왜 그러느냐 하면 사울의 그 자리. 사울의 자리가 빈자리가 돼요. 공백. 빈자리가 되고 그 빈자리에 다윗이 등장하는데 교체되는 방법이 바로 다윗언약의 내용입니다.

뭐냐 하면 사울이 누구를 핍박해야 돼요. 누구를 핍박하느냐, 다윗을 핍박해야 됩니다. 나중에 다윗의 자리가 예수님의 자리로 바뀌잖아요. 그 때 다윗은 누굴 핍박해야 돼요. 우리아 장군을 핍박해야 돼요. 그럼 핍박하는 이유를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내가 내 자신이 살아있기를 원하는 그 자체가 내가 구성하는 요소에 원치 않는 것을 강하게 밀치는 것 때문에 우리는 핍박을 하게 되어있지요. 그 내부에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 다음에 이스라엘,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많이 어려워요. 이스라엘 되면서 왕은 둬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왕은 둬서는 안 된다. 그런데 다윗이 등장하잖아요. 다윗은 뭡니까? 왕이지요. 왜 왕은 둬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왕을 사울이 죽고 난 뒤에 아무도 왕의 자리를 허락을 안 하면 우리 인간 생각은 그렇잖아요. 왕 자리가 없어야 한다면 처음부터 왕 자리가 도로 비워놓으면 될 텐데 거기 다윗을 왜 집어넣는가.

그것은 다윗은 무엇과 관련되어있는가 하면, 성전건립과 관련되어있습니다. 성전 건립. 다윗은 무슨 심부름꾼이냐 하면 하나님이 왕이 되기 위해서 심부름하는 심부름꾼으로 왕 일하는 거예요. “나는 왕 아니요. 진짜 오실 왕은 이렇게 성전 형식으로 오십니다.” 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다윗이 존재하는 겁니다.

지금 사울왕 때에 백성들이 사울왕을 우리에게 왕이 있어야 한다고 한 것은 주변에 외세들이 많잖아요. 외세들 많지요. 많은데, 선지자가 그동안 사무엘이 좀 간간이 이기게 해줬어요. 이기게 해주니까 백성들이 이 사무엘 선지자가 늙어 죽으면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 그 다음 대책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사무엘의 아들을 봤습니다. 아들을 보니까 세습 당회장 아들을 보니까 아예 감이 아니에요. 왕을 달라는 말은 뭐냐 하면 한 혈통으로서 계속 세습해 내려오면서도 우리를 지키고 보호할 수 있는 그게 왕이에요. 세습제니까.

혈통 하나가 계속 죽죽 가면서 아버지가 지키면 그 아들이 지키고, 손자가 지키고, 계속 그렇게 될 때에 왕 계열이 되는 거예요. 왜? 다른 나라도 다 그렇게 하니까. 특수한 혈통을 달라는 거예요. 특수한 혈통을. 어렵다 어렵다 하는데 뭐가 어려운가 하면.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으라고 허락할 때에 집을 허락한 게 아니에요. 특수한 혈통 자체를 허락한 거예요. 특수한 혈통을. 혈통이 세습하는 혈통이 될 때에 그게 왕다운 왕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백성들 입장에서는 신났지요. 아~ 사울은 아니구나! 그러면 다윗은? 자꾸 외세로부터 공격받을 때 나라를 지켜줘야 되잖아요. 그런데 다윗의 특징이 뭐냐, 가는 곳마다 이겨요. 다윗이 가는 곳마다 승리한다는 말은 다윗의 아들도 가는 곳마다 승리할 거고, 그 다윗의 아들의 아들도 가는 곳마다 승리할 거고, 그럼 무슨 걱정이 날아가 버립니까?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의 상대자의 택한 이 나라는 왕의 혈통 하나가 꽂아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보호받는다는 것이 성립이 되는 겁니다. 이런 횡재가 어디 있겠어요. 이런 횡재가.

인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내부적인 갈등도 힘들지만, 특히 수시로 찾아오는 외부의 공세. 누가 사기를 친다든지, 누가 험담을 한다든지, 우리 가정을 못살게 한다든지, 하여튼 외부적인 적들을 이렇게 영원히 적들이 없으면 좋겠지요. 솔로몬이 적들을 없애는 방법이 뭐냐 하면 혼인정책을 해서 없앴어요. 주변에 있는 나라들의 공주를 수입해서 자기 아내로 삼았어요. 그런데 공주가 혼수 감으로 들어온 게 뭐냐 하면 자기 고향에서 믿었던 몰렉이라든지, 말감이라든지 온갖 이런 신들까지 다 들어온 거예요. 남편 하나로서는 인생이 즐겁지 않으니까. 종교나 섬기면서 살겠다고 하니까.

솔로몬이 공주를 자기 왕비된 공주를 학대하면 주변에서 화내가지고 전쟁하러 오잖아요. 이길 수는 있겠지만 전쟁한다는 자체가 불편한 일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컨트롤하면 되잖아요. “왕비야 뭘 원하느냐” “종교를 원합니다.” “무슨 종교?” “신천지” “아이구, 신천지해라.” 신천지 지어줘. 지어줘. 나라가 중요하니까. 종교는 별로인 거예요.

그러니 벌써 인간의 혈통 자체가 하자가 있다는 것을 드디어 밝혀진 겁니다. 다윗에게 또 솔로몬에게 성전을 약속했어요. 성전을 약속한 그 대목이 열왕기상8장에 나오는데 그것까지 다 읽지는 않겠습니다만, 이렇습니다.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죄를 사해주겠다. 죄를 사해주겠다. 이리했어요. 조건이 있어요. 성전 위주여야 돼요. 성전 위주. 그럼 성전은 무엇을 대체한다? 전체 이스라엘을 대체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길거리에 호떡 만들 때 불판에다가 기름 넣고 밀가루 반죽 동글 동글해가지고 그냥 팍 던지지요. 그러면 불판에 동그란 밀가루반죽 있잖아요. 그럴 때 동원되는 도구 하나 있어요. 꽉 찍어버리지요. 꽉 찍어버리면 납작하게 되면서 끝에 있는 밀가루 반죽 어떻게 됩니까? 퍼져 나오겠지요. 요 꽉 찍은 자리가 성전 자리고 삐져나온 게 이게 바로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위주가 아닙니다. 낙인 찍혀야 돼요. 하나님이 여기에 성전 세웠다는 낙인찍어야 됩니다. 성전 세울 때에 그 성전은 건물은 폼이고요, 그 안에 뭐냐 하면 다윗의 혈통으로 삼겠다고 찍은 거예요. 그걸 역대상, 역대하, 열왕기상, 하, 그걸 다윗의 등불이라 하는 거예요. 다윗의 등불.

자, 아까 이야기한 거 결합해 봅시다. 여기서 좀 복잡하다 했지요. 제단은 뭐라고 했어요? 제단은 심판을 생산하는 겁니다. 심판 생산은 어느 취지에서 나왔는가, 율법 자체 안에서 저주도 있고, 축복도 있으니까, 축복만 끄집어낼 수 없어요. 저주, 축복 둘 다 끄집어내는 현장일 때 율법은 완성이 된다 이 말이지요.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죽임을 당한 거예요. 저주 받으신 거예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자, 이런 거 생각해 보세요. 첫 번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끄집어낼 때, 살아있는 양을 천사가 지나가는 그 길목에 내놓으면 그 집이 살겠어요? 죽겠어요? 살아있는 양. 안되지요. 하나님의 취지는 심판에 있어요. 아담 자체가 심판 대상이기 때문에. 니 주제 파악하라는 이야기에요. 니는 심판 대상이야. 구원 대상 아니야.

구원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소원이지. 니 소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나의 소원은 우상이고요. 주님의 소원인데. 주님의 소원이 주의 어떤 지시로서 그게 실제적으로 이게 발현이 돼요. 이게 역사 속에. 그게 놀라운 사실이에요. 실제로 나타난다고요. 양을 그냥 바치면 안돼요. 죽여서 바쳐야 돼요. 그 양의 피를 발라야 돼요. 피를.

그리고 안에서는 뭐냐, 앞에 양의 피 바르고, 지는 돼지고기 먹고 이리 하지 말고, 그 죽은 양의 고기를 먹어야 돼요. 양과 떡을 하나로 나누어서 떡이 된 우리가 죽어 마땅합니다, 라는 표시를 양의 피로서 발라가면서 그걸 표시해내는 거예요. “우리 이미 죽었어요.” 오지 마세요. 이미 죽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어린 양이 죽었다는 말은 곧 어린양이 죽으리라, 약속이 살아있다는 말이에요. 나는 죽었는데, 나는 죽음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고 지나간다는 말씀은 살아버리고. 나는 죽고 말씀은 살고. 이 언약의 원칙에 자기 백성을 도입시킨 겁니다. 이용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를 이용한 거예요. 어떻게 감사 안할 수가 있어요. 감사하지요.

그래서 여기에 성전 문 닫아라, 이 말은 문 닫아야 되겠다. 이 뜻이거든요. 성전을 문 닫는다는 말은 새로운 성전을 짓는다는 뜻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성전 자체가 혈통을 이야기하니까요. 내가 너희들 말고 다른 이스라엘을 준비했다. 그래서 준비한 게 열 두 제자에요. 열 두 제자의 면면을 보게 되면 하나같이 이건 전과자도 아니고 인간 같은 인간 하나도 없어요. 열 두 제자 전부 다.

카우보이들 복수하려고 열두 명 모은 거와 똑같은 거죠. 그런데 그 카우보이들에게 전부 다 권총 하나 새 권총 하나 차주니까 전부 다 놀라운 총사수가 되어버리죠. 성령을 주신다는 열 두 지파 새로운 이스라엘에게 그 다음에 나온 게 오순절, 성령이 임하지요. 그게 바로 성전입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스데반 집사 사도행전7장에 이걸 가지고 광야 교회라고 했어요. 교회.

자, 이거 설명하고 첫째시간 마칩시다. 교회라 하는 것은 세례를 받아야 돼요. 그 세례가 고린도전서10장에 보면 뭐냐, 10장 1절에 보면 그들은 한꺼번에 세례 받은 걸로 여기지요. 그 한꺼번에 세례 받은 것이 그들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올 때, 그냥 건너왔어요. 물 찍어 바르고 이런 거 없었어요.

그냥 건너기만 했는데 이미 세례 받은 걸로 여겼어요. 인간이 하는 교회에서 하는 세례 아니지요. 주님이 하는 세례가 그런 겁니다. 세례 받았다는 사실을 낙인 찍어버린다고요. 우리가 어떻게 세례 받으려고 시도한 게 아니고 뭔가 통과했는데 세례 되게 만든 그것이 바로 오순절 성령입니다. 10분 쉽시다.

 

 

안양20230216b말1장10절(규칙 그 자체)-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내 자리에서 이동” 하는 거 써놨지요. 어떤 사람이 가로등 밑에서 뭘 찾고 있어요. 어떤 사람이. 예를 들면. 지나가던 사람이 도와주려고 뭘 찾습니까? 하니까 “아이고, 내가 열쇠를 잃어버렸습니다.” “같이 찾읍시다.” 열쇠가 없어요. “어디서 잃어버렸는데요? 열쇠가 없는 거 같은데요. 이곳은 아니고 다른 데서 잃어버린 거 아닙니까?” 이렇게 하니까 딴 곳은 어둡기 때문에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밝은 데서 잃어버렸기 때문에 밝은 데서 찾아야 된다는 거예요.

이 사람이 지금 뭘 모르고 있느냐 하면, 그 사람은 자기가 잃어버린 곳을 자기가 모르고 있다는 뜻이에요. 우리 자신이 누구냐를 알면 우리가 잃어버린 곳까지 이동이 되어야 돼요. 현재 이 자리는 나를 찾는 자리지 내가 잃어버린 자리가 아니잖아요. 그러면 잃어버린 곳이 어디냐, 그건 우리는 몰라요. 예수님이 대신해서 우리를 보여주는 겁니다. 말씀으로. 인간은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들은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잃어버린 자리도 몰라요. 아버지를 유일하게 아시는 예수님께서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 인간이 어디서 잃어버렸는가를 예수님이 친절을 다하여 소개시켜 줍니다. 그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인간은 자기 자리를 잃어버렸어요.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지를 못한 겁니다.

말라기는 마지막 선지자에요. 이스라엘 멸망의 정당성. 이스라엘은 왜 굳이 멸망해야 되는가를 최선을 다하여 그 근거를 제시하는 게 말라기입니다. 13절 봅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런 것들은 그전에 이미 레위기할 때 레위기22장에서 이거 뭐 찾을 필요 없어요.

여러분들이 레위기 보면 다 알 거예요. ‘아, 제물은 깨끗해야겠구나! 멀쩡한 거 드려야지 더러운 거 드리면 안 되겠구나!’ 여러분들은 그런 거는 상식적으로 아는 거죠. 레위기22장 18절부터 해서 32절까지 죽 나와요. 아까 같은 거 반복하는 거예요. 더러운 거, 흠 있는 거, 눈 먼 거, 상한 것, 레위기22장22절. 상한 거 이런 거 좀 드리지 말라. 이건 흔히 조상 제사 지내는 사람도 상식적으로 아는 거 아니겠습니까. 제사 드리면서 어떤 사람은 작년에 문어 끄집어내서 또 제사 지내는 사람 있긴 있다만. 워낙 비싸니까요. 어차피 제사는 장난이니까.

병든 것, 더러운 것, 이런 것을 드린다는 말은 “하나님 나는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라는 뜻이거든요. “제사 드리는 거 그거 제가 알아서 잘 하겠습니다.” 그만한 역량을 우리가 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말라기1장12절에 보면 너희가 내 이름을 더럽혔다는 거예요. 내 이름을. 내 이름을 더럽혔다. 자, 성전이라 하는 것은 성전은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만나기는 만나는데 그냥 만나는 게 아니에요.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과 합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가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는 게 아니에요. 이것은 인간들이 2.0 대 2.0 서로 봤을 때 그렇고, 하나님 이름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성전이 있다고 칩시다. 이게 성전이다. 앞에 성전 기둥이 있고 성전 안에 내부 안에 지성소, 성소 있다 합시다. 앞에 제단 있다 합시다. 제단에 관광객들이 와가지고 제단에 사진 찍고 관광할 때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이 발견됩니까? 안 됩니까? 사진 찰칵 찍었는데 주의 이름이 나타나고 이런 거 있습니까? 없지요.

이건 이스라엘 사람들도 마찬가지에요. 성전이 있는데 제사장이 굉장히 들락, 달락은 하는데 제사는 정기적으로 드리는데 주의 이름이 있다고 하는데 주의 이름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어요. 성전의 있음의 흔적을. 들락달락하는 제사장만 보이지 담당 제사장 불러가지고, “뭐했습니까?” “제사 드렸습니다.” “주의 이름 봤습니까?” “못 봤습니다.” “못 봤는데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있습니까?” “있다니까 일단 믿어야지요. 뭐.” 이런 식이에요. 그게 말이 되냐 말이지요.

그 당시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제사장을 통해서 보여주는 게 아닙니다. 선지자를 통해 보여준 거예요. 선지자들을. 그래서 선지자들의 입장이 굉장히 난처해졌어요. 자기 말이 먹히지 않는 이유가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인정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선지자는 보여줄 수가 없어요. 보여줄 수가 없고 그냥 자기 입에 담는 말씀만 전하는데 말씀만 전하니까 제가 지난 낮 오후설교처럼 말씀만 전하니까 그들은 뭐냐 하면 니 왜 자꾸 욕하느냐, 자꾸 욕한데. 욕하고 저주하고 그러니까 그쪽에서 오히려 부화만 돋우는 거예요. 부화만. 화만 더 돋우는 거예요.

그런데 그 스가랴 선지자도 마찬가지에요. 스가랴 선지자도 그렇고, 예레미야도 마찬가지고. 이사야에도 나오듯이 선지자는 자꾸 뭐라고 전해야 되느냐 하면 “너희들이 우상을 섬기므로 나의 분노를 촉발했다.” 이리 되어있어요. 너희들이 우상 섬기니까 내가 화가 난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그 이야기를 들은 백성들은 뭘 요구합니까? 그 화난다는 하나님의 인상 좀 보여줘! 이리 나올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선지자를 통해서, 선지자는 양쪽 다 분노를 받아요. “아이, 좀 우상 좀 섬기자. 왜 우상 섬기는 걸 못 섬기게 해?” 하고 분노하고, 하나님은 또 우상 섬긴다고 분노하고. 선지자의 자리가 분노의 자리가 되어버렸어요.

제사장들은 그 제단에서 제물을 태울 때 홀라당 다 태우는 겁니다. 다 태우면서 거기서 특수한 의미를 발췌해야 돼요. “이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심판하는 겁니다.” 라는 것을 발췌해야 돼요. 제사장들이. 그 발췌하는데 그 제사장들이 실패했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히브리서에 나와요. 그것은 제사장이 그 이유가 아주 명쾌해요. 제사장이 인간이라서 그렇다는 거예요. 유한한 인간이라서 그렇다는 겁니다. 제사장이 나쁜 짓을 한 게 아니고, 그 자체의 유한성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계속 인간의 유한성을 히브리서 2장에서 주장하는 것은 율법 담당자가 인간이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강조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이 지켜야 되지 주제넘게 지 주제파악도 안되는 게 니가 왜 말씀을 지키느냐 말이지요. 니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 말씀을 누가 지킵니까? 인간은 못 지켜요.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죄다. 누가 지켜요? 못 지킵니다. 마음에 형제를 미워한 것도 무슨 죄? 살인죄. 오른손이 범죄 하거든 찍어버려라. 이거 누가 지켜요? 못 지킵니다. 주님만 지켰지요. 성령에 의해서 온몸이 다 죽음으로 주님의 제단에 바쳐지잖아요. 그러니까 이 말라기가 복음을 경유하게 되면 십자가를 경유하면 이게 기쁜 소식이 돼요. 참담한 소식이 아니고 기쁜 소식이에요.

이 참담한 소식을 느끼는 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 이스라엘을 못 놓는 인간들에게만 참담한 거예요. 나의 주체됨을 쥐고 있으려니까 이 성경 말씀이 참담함이 돼요. “내 인생이 어떤 식인데. 내 팔자가 얼마나 고귀한데 이걸 지금 여기 와서 포기해?” 이런 인간들만 이 말씀은 참담하게 되고 복음은 화딱지 나는 복음이 되는 거예요. 기쁜 소식이 아니고 분노의 소식이 되는 겁니다.

12절에서 너희가 주의 이름을 더럽혔다. 할 때는 그걸 말을 달리하면, “니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다.” 그런 뜻으로 받아들이면 이게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아, 이래서 내 주제를 아는구나! 이런 이야기구나!’ 10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나의 제단 위에서 그 다음에 단어 부사는 뭐지요? 불사르기 앞에 무슨 단어입니까? 헛되이. 너희들이 헛짓했다는 거예요.

이 말라기 보고 사람들은 “야, 말라기 시대에 제사장 참 나쁘다.” “이거 누가 할 거지요?” “내가 할게요.” “왜?” “느낌 아니까.” “아이구, 제사장 다 나가. 내가 지킬게.” 이러면 이건 전혀 지금 말라기를 이해 못한 겁니다. 이 말라기 제사장들이 못 지키는 것은 우리를 대신해서 못 지키는 거예요.

첫 번째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이걸 ‘주체 갈아타기’ 주체를 갈아타기 해야 돼요. 주체를 갈아타기 하는데 왜 그렇게 성전주고, 하나님 말씀 줘도 왜 못 지키는가, ‘나는 내 속에 타자 또는 타인 남이지요. 남. 남에 의해 구성된다.’ 이것 때문에 그래요. 이스라엘 속에 주의 이름을 대적하는 요소가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내내 그것이 이미 주체 노릇을 해왔어요. 인간의 나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사주 받은 거예요. 내가 주체다. 내가 인생의 주인공이다. 하는 것은 내 안에 괴물을 숨기면서 그 숨겨진 괴물이 나한테 사주해서 그런 발언을 하도록 한 겁니다.

어디에 가도 나라는 것은 껍질에 불과하고 원래 주인은 마귀가 되던지, 주님이 되던지, 따로 있어요. 주님의 말씀은 그걸 끄집어내는 거예요. “너 나와!” “저 말입니까?” “너 말고. 니 속에 나와! 너 말고 니 속에 있는 거. 주의 이름에 공격하는 원수 나와!” 그렇게 되는 겁니다.

1장 14절에 보면, “짐승 떼 가운데에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속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지금 여기 이방민족이라는 말을 했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지금 어설프기 짝이 없습니다. 곧 멸망 직전이에요. 사실은 이스라엘은 그 당시 나라 자체도 아니고 그냥 선지자 중심으로 모인 단체에 불과하니까요. 제사장도 있지만 형식이고, 관행이고, 관습이고, 그냥 형식적으로 해왔던 거예요.

그러면 원래 이스라엘은 이방나라 중에 돋보여야 이스라엘다운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이 이스라엘다운 이스라엘이 원칙을 주님께서는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 여기 주체 갈아타기거든요. 주체 갈아타기.

주체 갈아타기를 주께서는 오늘 신약시대에서는 어떻게 하느냐, 우리 성도를 규칙 그 자체가 되게 하십니다. 내가 규칙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고 규칙 그 자체가 되게 해요. 왜냐하면 우리가 나쁜 짓을 한 게 아니고 우리 자체가 오류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 안에 타인이 있거든요. 내 안에 타인은 악 그 자체에요.

제가 언젠가 순수 악이라 했어요. 순수 악은 나쁜 짓하기 전부터 이미 악 자체가 순수 악이라 해요. 내가 나쁜 짓을 해서 악이 아니고 나쁜 짓하기 이전에 바탕 되는 그 순수와 그걸 이게 뭐냐 하면, 다윗 속의 언약. 다윗 속의 언약이니까 이걸 합쳐버리면 무슨 언약됩니까? 다윗언약. 다윗언약은 말라기에서도 여전했던 거예요. 어디 안에서? 말라기 선지자 안에서.

선지자는 주체 갈아타기가 성공했거든요. 그건 온전한 건 아니지만. 신약에 와야 온전하게 돼요. 성령이 오시기 때문에 온전히 갈아타기 하거든요. 구약에서는 선지자를 통해서 주체 갈아타기에 어떤 시범요소가 잠기다 보니까 난감하기 짝이 없어요. 내 인생인데 내 맘대로 되지를 않는 거예요.

그 흔적 중에 하나가 삼손이잖아요. 이스라엘을 구원해야 될 선지자가 누구를 쫓아다녀요? 블레셋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만 쫓아다니는 거예요. 아버지가 말렸잖아요. 왜 할례 받지 않은 여자를 좋아하느냐, 그냥 성경에서는 내가 좋아하니까. 이렇게 되어있지만, 사실은 정확히 말해서 이쁘니까.

전에 오후예배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것도 갖고, 이스라엘도 구원하고 이 두 개가 삼손에게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힘이 있으니까. 그러나 힘에서 힘으로 구원하지를 못합니다. 삼손이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은 차라리 이스라엘의 힘이 이스라엘을 방해했지요. 이스라엘의 구원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언약에 의한, 규칙에 의한, 구원을 방해했기 때문에 삼손은 거기에 언약에 의해서 약속대로 희생되어야 됩니다.

좀 더 상세히 말씀드릴까요. 삼손이 눈 뽑히고 묶여있을 때 머리카락이 자라난다 했잖아요. 그렇죠. 자라나지요. 머리카락 자라난 거 이왕이면 좀 더 머리카락이 길게 자랐으면 힘 더 쓸 건데, 그런 발상을 하면 안돼요. 삼손이. 왜냐하면 힘으로 구원해왔던 것은 눈 뽑히기 전에 소경되기 전에 이미 다 했어요. 자기가 힘만 자라서, 이스라엘을 블레셋에 건지는 힘만 자라난 게 아닙니다. 자기가 이쁜 여자 좋아하는 것도 같이 자라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통해서 이미 통과시켰어요. 경험했어요.

내가 힘이 세다는 것은 내 안에 괴물도 같이 커간다는 사실을 삼손이 보여준 겁니다. 결국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오늘 말라기 제사장이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그들이 죽으면 돼요. 그게 주체 갈아치기입니다. 하나님의 원칙, 규칙에 의해서 규칙은 제물을 드리는 게 아니고, 내가 규칙 앞에 누워있는 다 태워야 될, 심판받아야 될, 제물로 드러날 때, 우리는 제물 그 자체가 되는 겁니다.

전에 있던 악마는 우리보고 “죽지 마라. 죽지 마라” 이렇게 했는데, 지금 주님은 뭐라고 하느냐, 죽어라, 죽어라, 하지는 않아요. 왜? 이건 우리 보고 지시한다고, “우리가 죽을게요.” 하는 것은 죽는 척하기 때문에 안 돼요. 이미 죽었다고 이야기하지요. 이미 죽었다.

그러니까 이게 교회라는 게 성전의 완성이 교회 아닙니까. 성전완성 교회 이게 굉장히 어려운 테마가 돼요. 주제가 돼요. 개념이 돼요. 어려운 것을 두 번째 시간에 합시다. 왜 우리가 그 규칙 자체인지를. “우리가 교회를 열심히 섬기자.” 가 아니라 ‘교회의 그 자체’ 인 것을. 왜 그런가.

마태복음16장18절 보겠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 앞에 뭐가 하나 붙지요. 중요한 거 붙습니다. 뭐가 붙습니까? 내 교회를 세우겠다. 누가 세운다고요? 베드로야 세워라. 아니에요. 그건 천주교 돼요. 베드로보고 세우라는 말이 아니고 세우겠다. 내 교회를 내가 세운다. 누가? 주님이 세우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세운 교회의 특징이 뭐냐, 죽음의 권세, 악마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내가 세우겠다. 이 말은 교회 세우는데 인간한테 아무것도 맡기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럼 맡기지 않으면 우리는 구경만 하느냐 그렇지는 않아요. 죽어줘야 돼요. 죽는다는 말은 숨이 끊어진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주체 갈아타기, 주체가 바뀌는 거예요.

그 전에 타인이 바꾸어지는 거예요. 타인이. 요번 요한복음 할 때 제목이 ‘타인의 마을’이거든요.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라는 타인, 타인으로부터 만들어낸 마을이 천국입니다. 왜 예수님을 타인이라고 하느냐, 인간은 나의 나됨을 한시도 꿈에라도 잠을 깨든, 낮이든, 밤이든, 포기한 적이 없어요. 나의 나됨을. 이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본성이기 때문에 율법은 항상 그걸 지적하고 들어갔어요. 항상 지직했다고요. 좀 번거롭지만 난해하기 때문에 하나 하나, 차근 차근 봅시다. 예레미야7장4절 봅시다. 교회와 관련해서 보셔야 돼요. 자, 성경해석은 어떻게 하느냐 이렇게 합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무엇을 믿지 말라? 거짓말을 믿지 말라. 하지요. 이런 말이 어려워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전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하나님이 성전을 건물로 지어놓고, 또 기존의 성전이 있잖아요. 그럼 성전이 졸지에 한 개가 아니고 두 개가 되지요.

두 개 되어놓고, 둘 중에 어느 것이 성전이야. 라고 한다면 가만히 있어 봅시다. 어느 것이 마음에 와닿지? 이 성전이네. 이렇게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지만, 성전은 지금 하나밖에 없어요. 그것도 예루살렘에 성전이 하나밖에 없다고요. 하나밖에 없는데, 하나님은 어디서 만난다? 성전에서 만나지요. 주의 이름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름과 자기 백성과 더불어서 한 팀을 이루어서 누구를 만난다? 하나님을 만나는 거예요. 나중에 그 한 팀이 아들이 되지요.

아들이 자기의 형제들과 한 팀이 되어서 아버지를 만나는 거예요. 성전이 지금 둘이 있는 게 아니에요. 하나밖에 없는데 이것이 성전이 아니라면 그러면 졸지에 하나님의 말씀은 중간에 하나님 말씀 자체가 스스로 포기하고 중지시키고, “아이고, 인간들 때문에 안 되겠네. 포기한다.” 이런 경우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잖아요. 말씀은 반드시 말씀대로 완성되는데 이것이 성전 아니라면 그런 다른 대안적인 성전이 있느냐 말이에요. 없어요.

여기서 이곳이 성전이 아니니까 문 닫아라, 이 말 아닙니까. 선지자 예레미야가 이야기하기를. 그러면 그 이야기를 듣던 그 당시 사람들이 예레미야에게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럼 진짜 성전은 어디 있는데? 라고 이야기할 겁니다. “진짜 하나님은 어디서 만나는데?” 할 거다 말이죠.

그러면 그 정답은 뭡니까? 성전이 아니고 성전이 깨어진 그 현장이 진짜 성전이 세워지는 곳이지요. 그러면 어떤 식으로 세워지는데? 또 궁금해 하겠지요. 이 말은 그럼 어떤 식으로 우리 성전이 부서지는데? 같은 말이에요. 있는 성전을 부수는 절차가 없던 성전이 만들어내는 절차와 일치됩니다. 같아요.

마태복음 16장17절 봅시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이 말은 뭐냐, 아버지가 너를 찍었어! 이런 뜻이에요. 베드로 이름이 시몬이잖아요. 베드로는 자기를 뭐로 부릅니까? 시몬이라고 부른다고요. 이건 누가 불러 준 거예요? 시몬의 혈육, 아버지가 아들 되는 시몬보고 시몬아! 하고 이름 지어서 시몬을 부른 거예요. 시몬아! 하고 불러 준 거예요. 그러나 그건 그 계통은 혈육적인 계통이라는 말이지요.

혈육적인 계통에서 베드로 속에 누가 들어 있느냐, 아버지가 들어있겠지요. 자기 이름을 아버지가 지어줬기 때문에. 그래서 아버지 이름으로 살잖아요. 아들은. 죽은 아버지를 의식하면서 죽은 아버지 보라는 듯이 살아가는 거예요. 그리고 아버지는 내 안에 살아있다, 이런 식으로 하지요. 노골적으로 마귀가 살아있다 하면 되는데 아버지가 살아있다 같은 말이에요. 아버지가 살아있다.

엄마가 아직도 젊은데, 아들이 죽으면, 나는 땅에 못 묻는다. 나는 내 가슴에 묻는다. 이러고 있잖아요. 세월호 하든지, 세월호 제2탄 이태원에 가서 하든지. 뭐 하나 세워놓고 거기서 내 아들 찾는다고. 바깥에는 아들을. 이거 참 설명을 해야 돼요. 엄마 파마했습니다. 엄마가 이리 있는데, 월남치마 입고 있는데. 여기 아들이 있잖아요. 분명히 아들은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지요. 애가 학교가도 어디가도 엄마는 항상 애하고 관련성을 짓습니다. 자기 안에 아들이 있어요. 아들과 자식들이 자기 안에 있다고요.

그런데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 말이죠. 죽었을 때, 교통사고는 아들을 육체를 데려가지 아들에 대한 기억은 데려가지를 못해요. 그래서 이 기억이 더욱 더 강화돼요. 내 아들과 비슷한 애가 있으면 내 아들인가 하고. 아, 참 내 아들 죽었지. 하고 점점 미쳐가는 거예요. 이걸 뽑아낼 수가 없는 겁니다. 아들 안에 뭐가 들어있다? 엄마가 아들 키웠으니까 엄마가 있겠지요. 엄마가 있으니까 아들과 엄마 사이가 언어가 대화가 통하는 거예요. “니 뭐라고 부르나?” “엄마” “옳지. 내 자식, 아들!” 부르지요. 대화가 통한다는 말은 둘 다 공통요소가 같이 통하는 동일한 요소가 들어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들이 죽어버리면 뭐도 죽은 거예요? 아들 안에 있는 엄마 자화상도 같이 죽어버린 거예요. 자식 없이는 못살겠다는 말이 이 말이에요. 자식은 죽었지만 내 안에 있는 자식은 살려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 누구하고 이야기하느냐, 맨날 자기하고 대화하는 거죠. 심지어 꿈속에서도 대화하는 거예요. 주위에서 말려도 안 됩니다. 내 속에 있는 타자는 내 욕망에 원천이기 때문에 인간이 욕망이 없으면 죽은 존재잖아요. 내가 사는 이유, 보람, 의미, 내 속에 있는 욕망의 대상이 나로 하여금 사는 원기, 힘을 붙들어주지요. 내가 잃어버리지 못한 그것이 나한테 흑염소가 되는 거예요. 보약이 돼요.

내가 살게 하는 이유는 너가 있기 때문이라. 김종환의 존재의 이유. 너 사진 붙여놓고 잠을 자도 중국집 배달하며 살아도 달려갈 거야. 조금만 기다려. 너한테 달려갈 거야. 그 노래가 남자들 심금을 울릴 수밖에 없지요. 내가 사는 것은 너 때문이야. 니가 내 존재의 의미야. 제목이 <존재의 의미>아닙니까.

인간은 나를 지탱하는 거기에 어떤 듬직한 바위덩어리 같은 게 있어요. 바위덩어리. 그걸 교체하는 거예요. 이걸 교체하는 거예요. 이거 인간 힘으로 뽑아낼 수 없어요. 하나님께서 연락와가지고 어디를 공격하느냐, 그걸 폭파해버립니다. 이게 우크라이나에요. 이게. 러시아 미사일이 와서 여기를 폭파해버려요. 아니면 여기 터키 지진현장으로 만들어버려요. 완전히. 320고리를 완전히 종이를 찢어놨어요. 올리브농장이 완전히 협곡이 되고 말았어요. 주께서 찢어가지고. 완전히 명태포 찢은 것처럼 찢어놔 버렸어요. 쫙 찢어놓잖아요. 이럴 때 무슨 현상이 일어나는가, “누구요?” 라는 질문이에요.

“누굽니까?” 그러니까 말씀을 지키고, 안 지키고, 아니에요. 인간이 자기가 내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게 있으면 말씀을 지켜서라도, 말씀을 위해서 지키는 게 아니에요. 주님을 지키는 게 아니고, 내 귀한 걸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지키기 위해서 말씀 지켜서 혹시나 복이 올까 지켜주는데. 그 자체를 예수님보다, 십자가보다 더 소중한 게 없다는 것을 미사일 내용에 실어가지고 드론 공격해가지고 이걸 폭파한다고요.

“너를 공격하는 그 분보다 더 소중한 건 없어.” 이게 말씀의 기쁨입니다. “시몬아!” “예” “이름 바꾸자.” “너그 아버지가 너를 만든 게 아니고 내가 니 만들어줄게. 내가. 니 안에 너가 나에게 드리는 떡이 되고 제물이 되게 할게.하나님의 거룩한 제물에 베드로는 떡으로 섞여서 하나님께 기쁘게 받을 만한 인간 내가 만들어줄게.” 그 때 베드로는 이게, 아! 내가 착실해야 되는 줄 알고 그렇게 오해했어요.

그런데 그 착실한 것. 마태복음16장 그 뒤에 나오지요. 21절부터 보면,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뭘 몰랐느냐 하면 내가 살아있는 나를 하나님께서 교회로 반석으로 만들어 줄줄 알았어요. 왜냐하면 내 안에는 내가 원하는 게 살아있기 때문에. 그런데 주님의 죽으심이 시몬 안에 들어오면 시몬은 베드로가 돼요. 그게 반석이 돼요. 교회의 반석이 된다고요.

베드로의 이름은 시몬의 이름이 아닙니다. 야곱의 이름은 이삭이 지어줬지만, 이스라엘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이에요. 주의 이름이 베드로 속에 들어온 거예요. 그게 베드로에요. 그러니까 껍데기 되는 베드로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여, 그러지 마옵소서. 그게 주께 미치지 않겠습니다.” 하는 순간 드디어 베드로가 끄집어내준 시몬이 끄집어내지 못한 정체가 툭 튀어나왔어요. 사탄아! 악마야! 니가 그동안 베드로 주인 노릇한다고 많이 힘들었지. 그러니까 혈통 자체를 악마가 완전 장악하고 있으니까 어느 누구도 자기로부터 자기를 해방할 수 없어요. 자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를 부정하라. 마태복음16장 23절,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거 예수님 따른 사람 아무도 없었습니다. 베드로 3번 부인했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베드로 하여금 예수님의 제자 되게 하는 게 베드로에게는 없어요. 베드로 자체가 교회의 규칙이 되게 하기 때문에 그래요. 베드로가 교회를 지키는 자가 아니라 베드로에 있었던 베드로의 실패 있었잖아요. 베드로 안에 사탄이 들었던 그 자체를 규칙의 요소로서 베드로를 집어넣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다가 베드로를 거기다가 집어넣는 거예요. 재료로.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할 것도 없이 그냥 쓱 들어온 것뿐이에요. 그러면 전에는 바깥에는 내가 주인공이고, 안에 또 다른 타인이 있었지만, 주님이 바깥의 주인공이고 내가 주님의 타인으로서 주님의 요소를 구성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의 주되심은 베드로로 인하여 구성된다. 이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를 통해서 주님이 주되심을 구성하고 있는 거예요.

자, 교회가 이렇게 이루어지는데 이게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못하고 내 교회는 내가 일으킨다고 하는데 이게 바로 사무엘하7장13,14절 봅시다.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그렇게 되어있지요. 16절,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이게 여호와의 집이 여호와가 집이라 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어디에 들어오시는가, 나는 너의 아버지가 되고, 그러니까 아버지가 등장해서 친히 아들을 만들면 그 아들 속이 아버지가 계시는 성전이 되는 방식. 그리고 그 규칙에 그 자체로서 나중에 성도가 이 규칙 자체가 돼요.

그러면 인간은 못하는데, 인간은 못하는데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사도행전 한 번 봅시다. 사도행전2장1,2절 봅시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이렇게 되어있지요. 고린도전서10장1,2절에서(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이스라엘 전체가 홍해를 건너왔는데 집단세례를 받은 걸로 간주하고 있어요. 집단세례.

그들은 그냥 이미 바다 위 갈라진 길을 건너왔을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단체로 세례 받은 걸로 간주해 버려요. 개개인이 물을 찍은 게 아니에요. 개인은 없어요. 이제 개인은 없어요. 신약에는 모든 인간은 다 죽어 마땅하기 때문에 개인의 가치, 개인의 의미는 없습니다. 그냥 전체 자체가 망해야 마땅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주께서 어떻게 조치하느냐에 따라서 이제 누가 선택받고 누구는 버림받고, 이제 그 문제만 남아있어요. 선택받은 사람은 신나는 거예요. 신나. 신나라. 신나라. 아주 신나는 거예요.

물 위를 통과해야 되는데 오순절날 뭐냐, 하늘에서 5층 아파트 위에서 물을 확 부어버리면 갑자기 목 내놓다가 하늘에서 불벼락이 떨어진 거예요. 보통 갑자기 부자 된 걸 뭐라고 합니까? 벼락부자지요. 벼락부자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벼락거지에요. 벼락거지. 갑자기 거지되는 거예요.

오순절 성령으로 말미암아 세례 받는데 무슨 세례를 받느냐, 집단적으로 성령세례를 갑자기 받아버려요. 성령세례. 물세례 받은 거 무효입니다. 이제 물세례는 잊어주세요. 무효에요. 갑자기 성령세례를 받아버려요. 성령세례를 받는데 이방인이고 유대인이고 그런 건 따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령세례 받을 때 그 모양이 뭐냐 하면 ⓵번 비둘기 ⓶번 불 어느 쪽입니까? 불이지요. 그러면 이게 뭐냐, 성령 받은 자체를 뭐냐 하면 불 제단으로 사용한다. 이 말이에요. 불이 떨어지는 거예요. 위에서 불이 떨어지고 제단에 있는 나는 홀라당 다 타버리고. 이것은 뭐냐 하면 아까 처음에 한 것처럼 주체 갈아타기!

주체 갈아타기가 어려우면 이렇게 생각하세요. 우리가 주체가 아닌 이유가 언젠간 돌아갈 곳이 내가 아니잖아요. 내가 나한테 돌아가지 않아요. 나를 지으신 분에게, 나를 지으신 분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그래서 누구나 주체가 아닌 거예요. 그러니 쉽지요. 좋은 호텔 있어요. 주모, 국밥 하나 말아주소. 괜찮은 주막도 있어요. 하지만 본향은 본집은 아니잖아요. 본집은.

본집이 내 이름으로 등록된 집이 아니거든요. 누구 이름이냐, 주의 이름으로 등록된 집이기 때문에 내 이름은 임시방편이고 언젠간 내 이름을 버려야 됩니다. 내 이름을 버리면 나를 버리는 거예요. 내 주체를 내가 버리는 거예요. 인생은 나그네의 길이니까. 인생은 나그네니까. 들어갔다가 빠져나오고, 들어갔다가 빠져나오고, 들어갔다가 빠져나오고, 신천지 떠났다가 바빠. 어떻든 간에 가는 쪽은 나를 위한 것은 이미 성령세례를 인하여 나는 항상 불 속을 통과하는 것처럼 수시로 나 자체의 의미와 가치를 불살라 버리는 그러한 터널 속으로 우리는 통과중입니다.

아까 봤지요. 베드로야, 니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못하고 니가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사람의 일은 곧 나의 일은, 나의 일을 생각하면 주께서 그걸 무산시키고 그 다음의 일을 생각하면 없애버리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다음에 나온 문제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불 사른다. 그러면 그 불사르면 우리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냐, 그럼 우리는 필요 없네. 필요 없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가면. 가면 노릇하는 거예요. 우리가 가면놀이 해야 돼요. 이 말은 뭐냐, ‘은폐장치 없으면 진리도 없다.’ 은폐장치가 없으면 진리도 없어요. 가면이 진리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려줘요. 가면이. 우리는 가면이에요. 그런데 가면이 꼭 필요해요. 가면이 없으면 진리도 없는 거예요.

가면은 은폐장치 또는 가면. 특징은 뭐냐 하면 가짜라는 말이지요. 가짜, 엉터리, 헛된 것, 이런 것. 이걸 결합시키면 엉터리 가짜가 없으면 진리도 없잖아요. 진리가 진리로 등장하기 위해서 가짜인 우리를 성실하게 가면으로 은폐용으로 사용한다는 것. 이게 규칙 속에 포함돼 있습니다. 뭐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죄 있는 육신으로 왔잖아요. 이상하게 죄가 없는데 꼭 가는 길은 최고의 극악무도한 강도와 더불어 같이 십자가에 달리지요.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에 대해서 아버지의 형상인 줄을 모르고 그걸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줄 모르고 사람들은 예수님한테 다 속아 넘어간 거예요. 심지어 누구도 속아 넘어갔는가, 성령 받기 전에 제자들도 다 속아 넘어갔지요. 누가복음 끝에 보면 누가복음24장18절에 보면, 글로바라는 제자와 또 한 명의 제자가 예수님 옆에 딱 붙어서 같이 갔어요. 그런데 예수님인 줄 몰라요. 왜 모르는가, 제자들은 자기가 여기 살아있다는 것을 자기가 속일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나한테 속아 넘어가야 되는데 인간은 고집이 있어가지고 나는 나다! 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을 속이기 위해서 왔는데 우리는 한 고집을 하기 때문에 안 속으려고 해요. 자꾸 안 속으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환상이거든요. 그런데 인간의 안 속으려하는 자아는 누가 만들어줬는가, 내 살면서 살아왔던 주변 환경이 그렇게 만들어주는 거예요.

아까 올라오면서 꼬마들이 있었어요. 저는 집사님한테 물었어요. 이 꼬마들이 평소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겠느냐, 이 꼬마들은 자기가 눈에 보이는 거, 코앞에 있는 거 그게 다에요. 남자 애들은 내 구슬이 몇 개지. 나중에 그 애가 어른 되면 펀드 몇 개 였더라. 이렇게 되지만. 애들은 펀드까지 생각 못하고 구슬치기 잘 안하지만 학원 다닌다고. 여자애들은 내 인형 집에 잘 있을까. 내 언니가 가져가지는 안았을까. 그르니까 생각하는 폭이 좁아요. 폭이 좁다고요. 좁은데 공통점이 있어요. 인간은 자기 것만 챙긴다는 것. 이거 백프로 가짜입니다.

그래서 잘 사는 집 애들이 학교 가서 못사는 집 애들하고 이야기할 때 이야기 안 통하는 이유가 그 애들이 그냥 허름한 뒤떨어지는 빵을 하나 먹어도 그렇게 고마워하는 것 보고 ‘이상하다. 그거 주면 쓰레기통에 집어넣는데. 저걸 왜 고마워하지?’ 납득이 안돼요. 납득이. <건축학 개론>에 나오는 납득이.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자아가 환경에 따라서 이게 구성된다는 것. 아까 했지요. 나는 남이 구성해주는 거예요. 그게 가짜에요. 애들이 주의해야 될 것은 잘해주는 어른한테 따라가요. 유괴당해요. 왜? 그게 애들의 한계니까요. 종잡을 수 없어요. 내가 누군지 종잡을 수 없어요. 그래놓고 그게 가면인데. 그걸 지킨다고 그게 자기의 삶의 모티베이션, 삶의 동기가 되고 말았어요. 내 가정 내가 지키는 것이 나는 사는 이유다. 지진이 일어나야 되는데. 서울에 지진 9.8 일어나라.

촌에서 서울 살려고 서울사람 되려고 다 올라왔는데 지진이 일어나버리면 차라리 촌이 더 낫지요. 늘 불안을 안고 공포스럽고 그런데 오순절이라는 건 뭐냐 하면 오순절 성령세례는 뭐냐 하면 나는 작고 나를 덮친 것은 크고. 이거에요. 큰 것에 그러니까 로마서에 한 것처럼 하나님의 의를 바케스로 부었다고. 바케스라는 말은 안 나오지만 원뜻이 그래요.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착하게 살면 의가 되는 게 아니고, 내가 의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고, 의를 줘서 부어버렸어요. 그러니까 그 의가 차고 넘치는 거예요. 의가 나라는 인간을 통해서 늘 차고 넘치는 거예요. 만화에 보면 열심히 일하면 땀방울이 마구 튀어나오잖아요. 흘러내리는 거 아니고 땀방울이 튀어나와요. 하나님의 의가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걸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살아야 돼요. ‘아, 내가 그 규칙 자체구나!’ 오늘 제목은 ‘규칙 그 자체’ 내가 규칙을 지키는 게 아닙니다. 내가 규칙 그 자체에요. 왜? 나는 가면이니까. 내가 가짜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도대체 누가 알려주겠어요? 뭔가 덮쳐줘야 돼요. 주님의 영이 내 속속들이 스며든 주님의 영이 진짜입니다. 그게 진리에요.

진리는 가짜를 통해서만 이 땅에 흔적을 남깁니다. 가짜를 통해서만. 그래서 전에 설교를 했지만, 수련회에서도 했지만, 세례요한보고 “뭐야? 너? 뭔데 이런 짓을 해?” “나, 아니야.” 참 질문한 사람들 대단히 당황스러울 거예요. 왜냐하면 질문 할 때 나는 이 정도, 나는 이것인데, 너는 무엇이냐고 가운데 괄호를 집어넣고 묻는 거예요. 너는 한 달에 월급 얼마 받아? 이런 뜻이에요. 나는 이 정도 받거든, 이라는 것을 자기는 딱 감춰놓고, 니가 나보다 더 잘났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돈 얼마 받지? 월급 얼마 받지? 이렇게 하거든요.

그러면 우리 답변하는 것은 “돈? 나 돈 아니야. 월급? 나 월급 아니야.” 그런 니 누구야? “나는 주님을 증거 하는 가짜야.” “믿음 좋으네.” “나, 믿음 아니야.” “소망” “소망? 나 소망 아니야.” 바로 물세례와 성령세례는 물세례는 사람을 거기다 익사시켜요. 죽여 놓고 살려내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에. 그게 어제 수요설교였어요.

주님의 심판주요, 구원자요, 그 활동 기능을 자기 사람 안에서 그걸 순환시킨다 이 말입니다. 이게 뭐냐, 주기적이지요. 그래서 출발은 뭐 부터 한다? 나의 일부터 시작해요. 항상. 출발은. 해가지고 주께서 관여해서 이게 주의 일로 바뀝니다.

나의 일은 목적과 목표가 있기 때문에 늘 불안해요. 안되면 어떻게 하나, 깨지면 어떻게 하나, 망하면 어떻게 하나, 나 망하면 안 돼! 안 돼! 하다가 그런 나의 일을 들어가게 하고 주의 일을 만나서 망하던 좋든 죽든 살던 그 자체가 주의 일 됨에 감사가 나오도록 주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데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제단에 죽어 마땅한 제사장들이 자기 제사장을 살리기 위해서 제사 드리다가 선지자에게 혼줄 나는 그 대목을 보았습니다. 날마다 우리 주님 앞에 혼줄 나는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주의 백성인 것을 이제는 기쁘게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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