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62강-믿음과 들음의 말씀(롬10;16-18)이근호131201

아빠와 함께 2013. 12. 1. 14:38

믿음과 들음과 말씀(로마서 10:16-18)

음성                동영상

 이근호 13-12-01 13:34 
믿음과 들음과 말씀

2013년 12월 1일                           본문 말씀: 로마서 10:16-18

(10: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0: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복음이 온 땅에 퍼졌다고 단언하는 사도의 주장에 대해서 언뜩 옹호하기 힘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지구 곳곳에 복음에 대해서 모르는 자들이 더 많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 역사 속에서 복음에 대해서 들어 본 적도 없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알 수 있는 사항이라고 여겨질 것입니다.

세종대왕이나 강감찬 장군에 복음을 들었다고 주장하기가 무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도는 이미 말씀이 땅 끝까지 퍼졌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여기에 우리가 모르는 어떤 원리가 숨어 있단 말입니까? 시편 19:1-4에 보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해와 달과 별은 서로 내통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복음과 말씀에 대해서 ‘소리없는 소리’, ‘언어 아닌 언어’를 통해서 전달되고 있었습니다.

인간만 배제된 것입니다. 그 배제된 결과가 바로 오늘 본문 16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따라서 인간이 주장하는 ‘믿음’이란 실은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관여 된 일에 대해서만 믿고 이해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에게 돌아올 이익이나 성과가 기대될 때, 거기에 대해서 “믿습니다.”고 외치고 나오게 됩니다.
만약에 완전히 자신의 행함이 배제된 사항이라면 인간은 믿을 수가 없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자신의 관여를 전제로 해서 해석하게 되니
이는 믿음이 아니라 행함의 일종입니다.


행함이란 필히 행함을 내놓은 주인공을 잊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믿음이란, 그 믿는 행위를 실시한 본인의 가치를 결국 부정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믿음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믿음이 아닙니다.
세상의 내막에 대해서 배제당한 존재인 인간이라는 이름에서 나온 엉터리 믿음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믿지 못하고 외면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을 듣고, 그 들려진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을 시도한 역사적 대표자들입니다. 바로 이들이 참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신 메시아를 거부했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 자체에서 이미 인간들이 배제 당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사실 인간들은 본인이 아는 것과 필요한 것들만 챙기듯이 믿으면 그만이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에스겔 37:3-4에 보면,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바짝 마른 뼈들이라도 하나님의 말씀만 들으면 힘줄이 생기면서 건장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말씀만 하면 그만일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게 하신 겁니까? 인간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에 말씀이 육신이 된 이유에 대해서 누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겁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 연유는 요한복음 1:18에 나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즉 하나님의 아들이 실제로 사람이 되셔야 되는 이유는, 순전히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만을 말씀의 실 내용으로 담기 위해서입니다.

즉 하나님 보시기에 이 세상에 제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 중심의 창조 취지에 부합되기 위해서 기존의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완전한 인간이 나타나게 하셨는데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이 사실을 내다보면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진행되어 왔습니다.

이러니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했던 그 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볼 리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내용은 그 누구도 알아 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해와 곡해와 착오가 예수님 주변에서 지속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일에서 자신들이 애시당초 배제된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인간보다 지혜로운 악마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요한계시록 12:1-2에 보면, “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악마에게 가장 골치 아픈 일은 여자의 후손, 곧 메시아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참 인간으로서 이 땅에서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완성시키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악마는 어떻게 하든지 이 흔적을 지워버려야 했습니다. 그 일의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 매달아 죽게 하는 일로 이어졌습니다.

일을 이렇게 하므로서 이 세상의 주인공을 여전히 기존의 인간들 손으로 돌려놓으려 했습니다. 이미 인간은 하나님과 아들 사이의 비밀에서 배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인정치 않겠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체적으로 ‘믿음’이라는 것을 유포하려 했습니다. 여기서 인간이 행위하는 믿음과 예수님만이 갖고 계시는 ‘아버지와의 비밀스런 뜻’의 성취로서의 믿음과 충돌이 야기됩니다.

전쟁입니다. 따라서 참된 하나님의 말씀은 온 세상을 영적 전쟁 상태로 휘몰아가게 합니다. 출애굽기 4장에 보면, 모세는 애굽에 영적 전쟁하려 하면서 기적을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다음과 같은 기적을 알려줍니다. 첫째 모든 인간은 이왕에 악마와 더불어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그로 인해 인간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는 대상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입니다.

모세로 하여금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고 하고 그 뱀을 잡은 손으로 모세 자신의 품에 넣어보니 하얗게 저주받은 문둥이 환자의 손이 되어 있었습니다. 모두 말씀에 위배된 저주스러운 결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아들로 세상에 등장시켜 그 아들 중심으로 새로운 현실로 전환시켰습니다.

이 사실을 모든 피조물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인간만 몰랐을 뿐입니다. 이제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의 믿음으로 세상을 보는 믿는 자들이 등장하게 됩닏가.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말씀에 준해서 발생된 믿음 위에서, 자신조차 말씀의 열매임을 인정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62강-롬 10장 16-18(믿음과 들음과 말씀)1312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0장 16절에서 18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53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0:16-18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오늘 본문 말씀만 놓고 보게 되면 사도바울이 뭔가 착각한다든지 사도바울이 뭔가 실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난다고 했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특히 우리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이 말은 그들이 다 들었다는 말이지요.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는데 이 대목에서 우리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세종대왕이 복음을 들었습니까? 이 순신장군은요? 을지문덕은? 바보온달과 평강공주는 복음을 들었어요?



분명히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난다.’면 어떤 사람이 믿으려면 전해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대체 선교사 몇 명을 동원해야 전 세대 전 지역이 다 들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이 세상 언어가 수만 가지인데 어떻게 다 번역해서 전했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은 뭔가 지금 온전하게 전도나 선교가 다 안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뭐라고 단언하느냐 하면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라고 단정을 해 버렸다 그 말이지요. 땅 끝에 누가 갔습니까? 간 사람이 없는데요. 아무도 안 갔는데?



알래스카까지, 아프리카 밀림 속까지 누가 갔습니까? 그래서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 말씀이라는 것이 선교사의 활동을 통해서 전하는 그 말씀, 그 말씀과 다른 형식을 이야기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뜻 전도해야 듣게 되고 들어야 믿음이 생기지, 라고 하는 우리 선입관에 수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 사람에게 뭔가 전하기 전까지는 저 사람은 아무 말씀도 들은 적이 없다고 단정하는데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가 전하지 않더라도 이미 그 사람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 있다고 하니까 어디서 뭔가 착오가 생겼는지, 세상에 대해서, 말씀에 대해서, 믿음과 이 모든 것에 대해서 뭔가 오해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감을 잡아야 돼요.



더욱이 성경 시편 19편에 보면 이정도가 아니라 더 놀라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하늘의 별이나 달이나 안드로메다성운, 이런 것들이 그냥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것들을 전파하고 있는 거예요. 별이 일종의 선교사?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께 온 것은 자기들이 연구해서 온 것이 아니고 별을 따라서 왔거든요. 별이 복음 전하는 선교사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별이 외계인도 아니고 무슨 말을 하겠어요? 그런데 2절에 보니까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이렇게 되어 있으니까 우리가 미처 캐치하지 못한 말을 자기들끼리 왔다갔다 소통이 된다는 그 말이에요. 하늘의 별하고 백합하고 서로 이야기하고 말이지요. 시라소니하고 킬리만자로의 표범하고 서로 이야기하고.



도대체 인간은 뭐가 소외된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인간은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겼는데 바보 멍청이 같은 것이 인간이고 벌써 인간 빼놓고 나머지는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을 다 알고 있는데 인간만 쏙 빼놓은 거예요. 이게 인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그게 만약에 침묵의 소리, 아무 들리는 소리도 없는데 소리가 있고 언어가 없는데 자기들끼리 통하는 언어가 있고 거기에 대해서 인간은 개입하거나 접근하지 못하면서 대체 인간이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알기는 뭘 압니까? 아무것도 모르면서.



결국 안다고 하면서도 자기가 죽는 이유도 모르면서 죽어가고 있잖아요. 한평생 살면서 여려가지 많은 일을 했고 큰일을 했다고 했지만 죽는 순간에는 자기가 했던 큰일을 자랑하기 보다는 ‘죽음아! 조금만 더 내가 살 수는 없을까? 잠시만 더 있다가 내일 죽으면 안 될까? 오늘만큼은 좀 살게 해다오.’라고 모든 자기가 했던 성과는 다 잊고 마지막 죽음이 왔을 때는 자식이고 부모고 목사고 장로고 다 가고 오직 뭔가 보이지 않는 무형체적인 것이지만 압박을 가하는 그 죽음과 대화할 수밖에 없는 소리 없는 소리.



죽음하고 무슨 대화를 합니까? 그럼에도 뭔가 말을 해야 된다는 것,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것인데?’ 알 수 없는 대상을 향하여 자신의 속에 담겨 있는 소리를 내 뱉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죽는 순간에 우리가 죽음과 대화한다면 평소에 아나운서가 뉴스를 전하는 그 순간에도 자신의 속에 담긴 소리는 죽음과 대화 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지요. 프로이트는 그것을 죽음의 충동이라고 하는데 모든 인간에게 죽음의 충동은 사라진 적이 없어요. 바쁘다 보니, 정신을 눈에 보이는 것에 팔다보니까 막상 죽는 순간이 왔을 때 ‘어? 내가 이건 대비를 안했는데?’ 대비해 봐야 보험밖에 더 있습니까? 만기되면 다시 재계약되는 그것.



‘나 이렇게 죽기 싫은데? 나 할 일 많아. 나 애들도 아직 시집장가 안 보냈는데 왜 이래?’ “아버지! 누구보고 이야기합니까?” “가만있어. 넌 빠져 있어.” 자기가 엄청난, 거대한 남아 있는 부분은 제켜놓아 버리고 소소하기 짝이 없는 것을 가지고 아등바등 네가 잘 났니, 내가 잘 났니, 네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그것과 싸우고 있었던 거예요. 진짜 실존의 문제, 진짜 중요한 문제는 그냥 뒤로 미루고 미룬 겁니다. 우리가 아는 그 소리, 인간끼리 통하는 영어, 중국어, 이런 것 말고 보이지 않는 소리와 관련된 믿음, 그 믿음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믿음은 아니에요.



성경에서 이렇게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말씀에서 난다고 할 때에 결국 앞에 있는 ‘들음’을 빼버리면 믿음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결과물로서 믿음이 생긴다는 겁니다. 믿음이 생긴다는 말을 할 때 그동안 교회에서나 혹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그 이야기를 우리가 들어 왔을 거예요. 그런데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그것이 세상에 숨어 있는 그 소리, 침묵의 소리를 미처 모르고 한 상태에서 자기의 살고 싶은 욕망에 입각해서 믿겠다면 로마서에 나오는 그 믿음은 아니에요.



그것은 행함의 일종이고 몸부림의 일종이지 믿음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믿을 이유가 없는데 믿어지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누가 구원 받기 위해서 믿는다고 하는데 구원받을 이유도 없는 겁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제가 지난 목요일에 가락교회에 갔어요. 공부 시작 전에 김중우 집사님이 평소 궁금했던 것을 기억해 놓았다가 저에게 물어요. 그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자기가 성경을 보는 중에 성경의 구조가 다음 중 네가지 중 하나같은데 그것을 잘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 네 가지가 뭐냐, 성경이 구원중심인가, 아니면 성경이 하나님 나라 중심인가, 아니면 성경이 언약중심인가, 성경전체가 예수님 중심인가? 이 넷 중에 어느 것이 정답인가? 그것이 궁금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걸 왜 궁금해 하십니까? 식품 회사 같으면 식품만 팔면 되지 그걸 왜 궁금해 하느냐는 말이지요. 그것도 평신도가. 그래서 성경전체가 뭐로 되어 있느냐, 앉자마자 그 이야기를 막 해요. 이 네 가지 중에 어느 겁니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정리한 것은 일단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라는 겁니다.



두 가지는 아니라는 거예요. 구원중심으로 성경 봐서는 안 되고 또 하나님나라 중심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나의 노림수와 관련되어 있기에 그렇다고 하는 겁니다. 성경이라는 것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내가 원하는 바를 채워주는 그런 미신, 우상숭배의 신이 아니라면 내가 지금 천국을 원하고 있고 구원을 원하고 있는 이상은 일단 그것은 엉터리라는 말입니다. 왜, 이것은 내가 기대하는 것을 신의 이름을 도용해서 내 구원욕구, 죽어서 좋은데 가려는 욕망을 채우려는 수작, 종교라는 것이 그런 수작일 공산이 굉장히 크거든요.



내 이기주의, 나만을 생각하는 것이 뭔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도 이게 바뀌어져야 되는데 만약에 성경이 날 구원하고 천국가게 한다면 내 이기주의는 그대로 살아 있잖아요. 살아 있으면 천국이나 세상이나, 세상이나 천국이나 똑같은 거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 두 개를 빼버리면 남는 게 뭐냐, 언약중심이고 나머지 하나는 예수님 중심인데 둘 중 어느 쪽입니까, 라고 물어요. 그래서 제가 바로 그 자리에서 답변을 하지 않았어요. 동영상 촬영도 있고 강의가 두 시간 있기에 강의시간으로 대치해서 그 이야기를 해줬어요.



보통 질문이 있더라도 강의시간에 듣다보면 해결이 다 돼버려요. 성경이 언약중심인가, 아니면 예수님 중심인가, 그 두 개를 놓고 따지는데 그것은 여러분들이 설교를 들어보시면 저절로 해결이 다 되어버립니다. 근본적으로 이 성경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믿음은 아니다. 그 이유가 뭐냐, 로마서 10장 16절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 대목입니다. 이 말은 이미 이스라엘백성들이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이미 하박국이나 구약성경에 다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여기에 대해서 익히 안다고 여겼던 그들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믿음이 왔을 때는 그것을 거부했다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인 유대인이나 오늘날 우리나 같은 인간이니까 똑같은 선입견을 갖고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했던 그 믿음과 주님의 말씀에 입각한 믿음이 절대로 일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감 잡을 수 있는 거예요. 순종치 아니했으니까. 그들이 “하나님 믿습니다. 하늘나라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예수는 모르지만 하여튼) 메시아가 오셔야 됩니다.” 하는 모든 것들, 그들이 이것은 정말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면서 간직했던 모든 것들이 막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믿음이라는 것이 찾아왔을 때는 단호하게 거부해버린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뭘 따라가야 되느냐 하면, 그들이 갖다 버렸던 그 실 내용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돼요. 그것을 어떻게 찾아내는가? 같이 찾아봐야 되겠지요? 에스겔 37장 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에스겔을 해골골짜기에 갔지요. 거기에는 뼈들만 잔뜩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들이 어떻게 살겠느냐.’ 할 때에 ‘주께서 아십니다.’ 했다고 했어요. 에스겔 37장 4절에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라고 했더니 그들이 나중에 사람이 되어서 큰 군대가 되었잖아요.



이 사실은 이미 유대인들도 다 알고 있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여기서 의문점을 가져야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말씀만 해도 사람이 사는데, 바짝 마른 뼈도 말씀만 하면 사는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게 보이지 않는 말씀을 찾아가는 비법입니다. 살고 싶어요. 죽기 싫습니다. 청춘은 자기가 죽음을 피할 수 있다고 보지만 나이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감을 잡아요. 죽음이 왔을 때 어쨌든 더 살고 싶은데 성경 에스겔 37장에 보니까 말씀만 하면 되더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말씀만 하시면 되는 것이지 왜 요한복음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느냐는 말이지요. 친히 사람이 되셔야 될 하등의 없는데 왜 오셔야 되느냐 하는 겁니다. “주여, 우리 뼈다귀입니다. 주여, 말씀만 하시면 힘줄 생기고 오십 견도 낫고 전부 다 낫고 생생하게 유치원생처럼 되는데 왜 말씀이 육신이 되어야 됩니까?” 그 말이지요. 말씀이 육신이 안 되고 그냥 말씀만 했으면 그들이 순종치 아니했다는 말이 성립이 안돼요. 오늘 본문 16절에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이렇게 되어 있는데 아무도 믿음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씀만 하오면 우리가 살겠다는 것을 안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다 믿고 있어요. 그런데 그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믿을 수가 없는 거예요. 왜, 사람이 될 이유가 없기에. 하늘에서 말씀만 하면 되지 구태여 사람이 될 필요가 없기에 그런 거예요. 사람은 자기 이익위주입니다. 죽는다? ‘하나님이 뭐하시나? 날 살려주면 되지. 말씀만 하면 산다? 말씀 믿겠습니다.’ 이거 흥정이 간단하게 끝나는 문제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구태여 말씀이 될 이유가 없잖아요. 사람이 될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요.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하나님의 그 보이지 않는 소리, 해와 달과 별들이 서로 소통하는 그 말씀, 그 말씀이 이제는 사람이 된다는 거예요. 말씀이라는 것, 소리가 사람이 된다는 것도 신기합니다. 소리라는 것은 음파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공기 속에 흐르는 에너지, 물리적으로 말해서 힘인데 그게 왜 사람이 됩니까? 그걸 따지는 것도 복잡하고요. 사람이 소리를 발한다는 것은 되는데 소리 자체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도 궁금할뿐더러 근본적으로 따져서 왜 그래야 되는 겁니까? 왜 우리를 화들짝 놀라게 하는 겁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원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없으면 그만이지 왜 꼭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있어야 됩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하나님의 창조자체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인간이 나타나지 않을 때 누가 좋은가 하면 바로 악마가 좋아하는 거예요. 영적 전쟁입니다. 제가 방금 아버지라는 말을 했습니다. 왜 말씀이 사람이 되느냐 하면, 우리에게 이익이나 도움 되라고 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이 땅에 오신 예수님, 그 두 분 사이의 업무고 작업이에요. 그게 해야 될 일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우리는 왜, 라는 질문 자체를 할 수 없는 입장으로 빠져버리는 거예요.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아버지사이는 어떤 인간도 그 내막을 모릅니다. 모르기에 그 두 분 사이에 할 일에 대해서 왜, 무엇 때문에, 라고 말할 수 있는 기회조차 우리에게는 허용되지를 않아요. 이게 허용되지 않는다는 말은 다시 말해서 우리는 무식하고 무지하다는 뜻이고 우리가 무식하고 무지한 상태에서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든지, 하늘나라가 온다든지, 행복이 어떻다든지, 언약이 어떻고 예수가 어떻고 하나님이 어떻고, 무슨 언급을 하든 그런 언급 자체가 정답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헛짓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전혀 하나님 앞에 통하지도 않는 짓거리를 교회 세워놓고 하고 있었던 거예요. 찬양하고 예배하고 전도하고, 전부 다 오해 속에서 이루어진 겁니다. 모든 일은 인간이 개입할 수가 없어요.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아버지사이에서 해결할 문제지 우리는 거기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성경에서 예수를 믿으라, 하니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우깁니다. 기존 교회의 신학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요. 믿음은 세 종류가 있다는 거예요. 지식으로 깨달아야 되고 감정으로 느껴야 되고 기도해야 되고 의지로서 전도하는 이 세 가지가 다 있어야 합당한 믿음이라는 거예요.



지식으로 안다고 까불지 말고 그 다음에 기도 많이 하고 그것으로 교만하지 말고 전도까지 할 때 그게 진짜 믿음이라는 거예요. 믿음이라는 그것은 믿음이라는 이름의 행함입니다. 인간들의 믿음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행동하는 것 가운데서 하나가 믿음이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초등학교 때 통지표 받아 봤지요. 거기 보면 국어과목에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 다 나눠져 있잖아요. 공부 좀 하는 애들은 수, 수, 수, 죽 나오지만 못하는 애들은 양, 가, 양, 가, 죽 나오지요. 우리가 하는 일은 설거지하기, 김장하기, 애들 빨래하기, 직장 나가서 거래하기, 그 칸막이중의 하나가 뭐냐면 교회가기, 예수 믿기, 그것이 포함되어 있어요.



이것은 인간의 행함의 세칙 중에서 한 개에요. 믿음이 아니고 행함이라니까요. 인간의 행함밖에는 없는 거기에다 믿음이 나타났으니까,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음이 나타났으니까 행함 중의 하나의 믿음은 결코 죄 많은 우리 육신에게서 나온 것이지 결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그 믿음은 아니에요. 근원적으로 말해서 이 세상은 행함만 있으면 되는 거예요. 행함만 있으면 되지 믿음이라는 것은 이 땅에 필요치 않은 겁니다. 믿음이라는 행함만 있으면 되지 믿음의 자리는 필요치 않다는 그 말이거든요.



내가 말을 하면서도 지금 이해가 되는지 걱정이 됩니다.

사람은 믿을 수가 없어요.
왜 믿을 수가 없느냐 하면, 사람을 믿게 되면 믿는 자신을 믿기에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니까요.
인간은 믿음이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된다니까요.
인간은 믿는 것도 내가 주체가 되어서 믿기에 그것은 나에게서 나온 행함이에요.
나의 행함의 일종이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 믿음은 구원받는 믿음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믿음이 아닙니다.


어떤 의사가 아프리카 남 수단에 가서 ‘울지 마 톤즈.’ 하는 식으로 선교했다 합시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 신부가 와서 복음을 안 전했다면 우리가 복음을 못 들을 뻔 했다고 하잖아요.
그것은 뭐냐, 그 사람이 복음을 전하면 우리의 여러 가지 행함 가운데서 듣는 행함을 동원하는 거예요.
듣는 행함을 동원하게 되면 그 다음에 듣는 것 중에서 내가 믿을 만한 것을 골라서 내가 믿겠다고 하면 그걸 믿음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그것은 듣는 것이나 믿는 것이나 전부다 나에게서 나온 행함에 속하는 거예요.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반드시 순종치 아니함이 겸비되어야 되고 병행되어야 돼요
.

이사야 53장 1절에 보면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는가, 여호와의 팔이 나타났을 경우에만 믿음이라는 것이 발생되는데
믿음이 발생되게 되면 반드시 “누가 믿었느뇨”가 필히 동반되게 되어 있어요.
아무도 믿지 말라고 여호와의 팔이 나타난 거예요.
결국 믿을 놈 없잖아, 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오는 거예요.
믿을 놈 없다는 말은 어떤 인간도 하나님 아들 아니라는 뜻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어떤 인간도 아버지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는 그런 뜻이에요.

별이 별에게 말하고 달이 별에게 말하고 해가 달에게 말하고 날이 날에게 전달하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그 말씀, 천지를 창조한 그 말씀에 대해서 그들이 아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쏙 빠져버렸어요. 따먹을 때는 맛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따먹고 난 뒤에는 진짜 알아야 될 것에서 완전히 배제된 거예요. 바보에요, 바보! 아무것도 모르고 말이지요. 치매 걸리면 드라마를 봐도 드라마 흐름을 봐야 되는데 드라마 보신 내용을 여쭤보면 “저 아가씨 반지 참하다.” 혹은 “저 옷이 참 예쁘다.” 그런 식으로 보면 드라마의 흐름을 완전히 놓친 게 되잖아요.

“나도 그 반지 끼고 싶다.” 그게 행함이라니까요, 그게. 예수님께서 구태여 말씀으로 우리를 살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이 육신된 것은 그 말씀이 육신 된 육신과 오늘날 우리와 한번 비교해 보라는 말이지요. 어떤 게 인간인지. 인간들은 자기가 인간 아니라 하면 기분 되게 나빠해요. 따라서 죽여 버린 거예요. 그걸 가지고 순종치 아니했다고 하는 거예요. 순종할 수가 없어요. 순종할 재주도 없고 능력도 없어요. 진짜 예수님과 비교해서 순종치 아니하면서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여, 말씀만 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그것도 히브리말로 “쉐마!” 해 가면서 그런 식으로 교회에서 전도사들 양육시키는 거예요. “쉐마, 이것 들으면 됩니다.” 그것 잘 들어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습니까?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가는데요? 아무리 교회가 날고뛰고 양육하고 훈련해도 바리새인보다 더 뛰어난 사람은 아직 등장한 적이 없어요, 너희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했습니다. 수능 만점 맞은 사람 앞에서 한 개, 두 개 틀린 사람이 비교가 되겠어요? 바리새인은 수능 만점짜리들이에요. 그들도 천국에 못 갔는데 이런 점수를 가지고 그들과 비교를 합니까? 나머지는 말할 것도 없지요. 요한계시록 12장에 악마가 어떤 식으로 세상을 보는가를 봐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보는 것 말고 악마가 보는 것.



우리가 세상 보는 시각에 대해서 어제 대전강의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딜타이라는 철학자를 이야기했거든요. 딜타이라는 철학자는 이겁니다. “형이상학이나 종교니 신학이니 다 때려치워라. 역사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우리 행함 따라서 나의 역사는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다.” 그전까지 역사라는 것은 신의 목적과 계획이 있어서 예정대로 진행된다고 믿었는데 그런 것은 다 걷어치우라는 거지요. 이제 역사란 내가 어떻게 행하는가에 따라서 나의 역사는 새롭게 건설된다고 주장한 겁니다. 얼마나 그 사람이 솔직한 거예요?



내가 만든 역사가 곧 나의 진리가 되는 거예요. 모든 것이 그래요. 남 탓 할 것이 아니고 내가 설치면 나의 역사가 되고 소주 먹고 이불 덮고 잠이나 자면 역사는 없는 것이고. 자기 역사를 스스로 개발하면 될 것을 가지고 왜 자꾸 남 탓을 하느냐는 말이지요. 딜타이가 그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이 기껏 보는 수준이고 마귀는 요한계시록 12장에 있는 대로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 그 여자가 아들을 낳”았다는 겁니다. 마귀가 보기에 인간들은 상종할 하등 가치도 없어요. 인간들은 이미 마귀의 꾐에 빠져서 자기가 부리는 대로 부려지기에, 로봇에 지나지 않기에 상대할 가치도 없고 정말 마귀가 벌벌 떠는 것은 본문대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태어난 아들, 그야말로 여자의 후손인 아들이 나타날 때에 마귀는 어떻게든 그 흔적을 지울까 하면서 공격을 개시한 것이 하늘나라라는 겁니다.



이것이 하늘나라고 그것이 번진 것이 땅의 운명으로 결정되었다는 겁니다. 땅의 나머지 모든 운명과 이 땅의 역사라 하는 것은 하늘에 의해서 이미 확정되어버렸다는 거지요. 그것은 바로 전쟁을 품은 아들의 등장, 전쟁을 품은 하나님의 자식의 등장입니다. 상당히 낯섭니다. 순종하고 싶어도 너무 낯설고 너무 기이한 내용이라서 어떻게 순종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으리요, 믿을 수가 없지요. 인간은 자기위주인데 자기 빼놓고 하는 이야기를 우리가 왜 믿어야 되지요? “네가 믿으면 구원 된다.” 하면 “제가 믿겠나이다.” 하고 설치겠는데 그게 아니고 네가 구원받는 것은 네가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다른데서 결정된다고 한다면, 우리 행함이 삽입되거나 영향을 줄 수 없는 입장이라면 우리는 완전히 배제된 상태이기에 그 자체가 우리를 기분 나쁘게 만들어버리지요.



기분 나쁜데 누가 믿습니까? 기분 나쁜 것을 믿을 위인이 없어요. 맘에 들어야 믿지 기분 나쁜데, “나가 있어!” 하는 식인데, 그 상황에서 “감사합니다.” 이럴 경우가 있겠어요? 그것은 세리나 창기 같은 경우에는 모르지만, 날 때부터 소경된 자 같은 경우라면 모르겠는데 그게 아니고 잘났고 뭐든지 할 수 있고 딜타이처럼 ‘내 역사는 내가 개발할 수 있고 내가 스스로 내 역사를 꾸며갈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입장에서 “너는 빠져있어.”라고 한다면 그걸 누가 믿겠어요? 그런데 인간만 못 믿지 해와 달과 별은 다 믿는 상황인데요?



로마서 8장에 보면 피조물이 탄식하면서 기대하는 것이 있어요.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시면 되겠습니다.” 이미 모든 피조물은 다 알고 있는데 인간만이 쏙 빠져서 자기밖에 몰라요. 왜, 이미 마귀에 속해 있기 때문에. 마귀가 그 복음을 못 듣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러면 그 말씀이 어떻게 인간이 되는가, 그 순서와 절차와 과정과 경로가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출애굽기 4장에 보면 나옵니다. 모세가 애굽에 가기 전에 “하나님, 이런 식으로는 못갑니다. 내가 이런 식으로 가면 완전히 바보취급 당합니다. ‘어디서 이런 미친놈이 왔나.’ 하는 취급을 받기에 기적을 보여주세요.” 라고 요구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고 “모세야, 지팡이를 던져라.” 했습니다.



던졌더니 지팡이가 뱀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깜짝 놀랐지요. 자기가 그동안 뱀을 쥐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도 못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말씀, 소리 없는 말씀에 입각해서 보니 자기는 그동안 뱀을 쥐고 있었던 거예요. 뱀 같으면 쥐고 있었겠습니까? 모르고 쥔 거예요. 이게 인간세상입니다. 뱀과 같이 타협하고 뱀에 굴복하고 뱀과 더불어 같이 사귀면서 뱀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음을 전혀 몰랐던 거예요. 그런데 말씀이 임하니까 “엄마야!” 하고 놀랐던 겁니다. 하나님이 “뱀을 다시 집어라.” 할 때에 말씀대로 집었더니 그 손에서 지팡이가 되었지요.



그 다음에 “네 손을 품속에 넣어라.” 뱀이라는 것은 외부의 사건이고 자기는 멀쩡한 인간인줄 알았더니 손을 품속에 넣었다가 빼보니 자기의 내부가 저주받은 문둥병이에요. 자신이 저주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이 이런 수준까지 다 경유해서 내려온다는 뜻입니다. “네가 손을 품에 집어넣어라.” 문둥병이 되었어요. “다시 집어넣었다가 빼 봐라.” 멀쩡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문둥병 같은 저주받은 인간을 멀쩡하게 만드는 작업에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하시는 거예요.



요한복음 1장 1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이 말을 할 때에 이 말의 의중에 뭐냐? “원래 하나님은 하늘에 살고 우리는 땅에 살기에 볼 필요도 없고 볼일도 없고 보고 싶지도 않습니다.”라는 것이 우리 일상의 삶이에요. 아침에 눈 뜨면 일기예보 통해서 오늘 날씨부터 먼저 듣지 하나님 보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도 아니에요.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할 때 원래 우리는 “우리는 하나님이 보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생각으로 24시간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우리 스케줄에 “오후 2시에 하나님 좀 보시고 가실게요.” 그런 것이 없어요.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이런 계획과 그 실행에 대해서는 우리와 협상하거나 협의 한 적이 없습니다. 결국 이 말은 우리는 하나님한테 당한 겁니다. 그냥 모른 체 넘어가도 될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심판자를 준비하시고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독생자,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인간의 모습으로 만들어서 이 땅에 내어보내겠다는 말은 이제는 우리 식으로 살 수 있는 세월은 끝났다는 말입니다. 심판이 너무 공포스러워요. 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못 믿는가? 너무 무서워서, 너무 공포스러워서 못 믿어요.



차라리 평소에 하던 대로 12월 초에 김장하고 3월에 장 담그고, 우리는 그냥 그렇게 살고 싶어요. 여러분은 김장 하는 것이 공포스럽습니까? 내년 6월에 월드컵이 있는데 12월 7일에 조 편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게 재미있어요. 4월달 되면 유원지에 가서 공던져요. 재미있지요. 우리는 우리가 평소 하던 짓 그대로 하고 싶어요. 독생하신 하나님이 궁금해서 미치는 사람은 없어요. 그걸 왜 궁금해 합니까? 그 이유는 하나, 우리가 협박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든 협박에 밀려서 행동해요. 돈 한 푼 버는 것도 돈 없이는 죽는다는 협박을 누가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 돈 없으면 사람 아니야. 너 돈 없으면 인간 취급 못 받고 개 취급당하는 거야. 네가 개 취급 받아도 좋아?” “아니야.” “그럼 네가 돈을 벌어야 돼.” 이 세상 모든 것이, 말 한 마디 뱉는 것도 뭔가 협박 같은 것이 있어요. 그걸 하이데거는 죽음의 협박이라고 하는데 죽음이라는 것, 죽음 충동을 늘 느끼면서도 아닌 척 하면서 매일같이 우리는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어린애들이 미끄럼틀 내려갈 때 신나지요. 내려온 미끄럼틀로 다시 기어 올라가 보세요.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올라가면 죽 내려가고 올라가면 다시 죽 내려가고, 하루하루의 삶이 그래요.



살만하다 싶으면 다시 걱정이 되면서 죽 내려가고 다시 이만하면 되었다 싶을 때 미끄러지면서 죽 내려가고. 아침에 교회 오니까 저쪽 난로가 켜지지를 않는 거예요. ‘난로가 안 켜지면 오늘 김장은 어떻게 하지? 이쪽 난로를 저쪽으로 옮길까? 애들이 이쪽으로 와서 빽빽 울면 설교에 방해가 될 것인데 어떻게 하지? 그러면 추운데 벌벌 떨면서 할까?’ 온갖 걱정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까 예배드린다고 구원받습니까? 우리가 예배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까? 이미 기쁨은 끝난 거예요.



주님이 기뻐하는 것에 동의하면 그것이 믿음입니다. 말씀 속에, 믿음이라는 현장 속에 우리가 이미 살고 있으면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알면 그만인 거예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누가복음 11장 9절에 나오는 말씀이거든요. 이렇게 해놓고 기껏 준다는 게 뭐냐 하면,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백합은 아는데 네가 모르는 것, 해는 아는데 네가 모르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알려주시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 그래서 그 분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독생자 주셔서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그분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 우리는 모릅니다.



성령이 오셔야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그동안 믿음이라는 우리의 행함의 자리가 완전히 폭파되고 그 자리에 성령이 주신 선물로의 믿음이 우리에게 자리 잡게 되면 그 믿음은 나의 믿음이 아니고 예수님의 믿음, 예수님이 가졌던 소망, 예수님이 가졌단 사랑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행함으로 가졌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대체해서 우리는 말씀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우리 믿음은 오직 주의 말씀 완성에서 왔습니다.” 믿음은 말씀에서 나온다는 그 말씀이 성취된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만 하나님 아버지를 안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어버리고 나도 안다고 우겼습니다. 따져보니 그것이 오히려 예수님을 핍박하게 했고 주님생각 없이 내 생각만 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예수님이 주신 자리라는 사실, 예수님을 증거 하라고 보내진 자리라는 사실을 저희들이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