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64강-7000명(롬11;1-5)이근호131215

아빠와 함께 2013. 12. 15. 17:11

7000 (로마서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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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12-15 13:36 
7000명

2013년 12월 15일                             본문 말씀: 로마서 11:1-5

(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11: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11:3)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11:4)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11:5)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엘리야는 엘리야 본인의 존재보다 ‘은혜의 존재’가 우선됨을 증거하기 위해 이 땅에 등장된 인물입니다. 만약 엘리야에게 은혜로 택함이 없었다면 그는 그저 일반적 인간들의 군상 속에서 보통 사람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이 말은 곧 엘리야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은혜로 택정함’을 입은 자와 그렇지 않는 자로 지층이 균열되어 버렸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더 나아가서 엘리야와 같이 은혜로 택함을 입지 아니하는 자는 있어도 없는 자도 살아도 ‘죽은 채’로 사는 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인간이란, 인간 존재가 우선이 아니라 은혜의 택정함이 우선이라는 말입니다. 곧 인간은 하나님께서 때마다 새롭게 조립하는 자로서만 인간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 조립의 근거는요? 조립의 근거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결코 인간이 지닌 자기 이름들이 아닙니다. 바로 이 사실에 입각해서 ‘죄’라는 것이 규정됩니다. 죄란, 선행되는 하나님의 이름이 없이 오로지 자기 이름으로부터 자기 이름을 긍정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모든 것이 죄가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란, 아담의 선악과 과실 갈취 행위를 죽음을 유발하는 죄로 규정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이 없는 인간의 삶이란, 자기 이름을 위해서 사는 그 자체를 죄가 아니라고 버티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자기 존재, 자기 이름 이외에 그 어떤 것이 선행되는 바가 삭제하려고 하는 겁니다.

성도에게는 통일된 이름만이 인정됩니다. 누가복음 10:20에 보면,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즉 성도의 명단이 있는 그 책은 모두 ‘주의 이름’으로만 통하는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는 바로 이 이름이 존재보다 선행됩니다.

해가 아침에 떠는 것도 자기의 신체를 아늑하고 따스하게 만들기 위함이라고 여기는 바로 그것이 죄입니다. 자기가 먼저 있고 그 사람의 태양이 있다는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따지고 보면 사람이 짜증내고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은 본인이 스스로 결정해서 나온 결과가 아닙니다.

그저 짜증 자체가 일어나는 그 현장에 본인이 있었고 그것을 추후적으로 “내가 짜증냈다”는  문법적으로 다듬어서 자기 우선성을 표현하게 됩니다. 이것은 문법적 습관에서 나온 착각입니다. ‘사랑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요, ‘믿는다’는 현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먼저 있고 내가 사랑하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몸에 발생된 미움이나 사랑이나 믿음의 능력에 본인이 휘말려 들어가고 다루어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 우연적으로 발생되는 모든 현상들은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우선성’이 극히 비-현실적 발상인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엘리야는 나만 남았다고 했습니다.

실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렇게 해야 맞습니다. “하나님 왜 저마저 바알에서 굴복당하지 않게 하십니까?”라고 말입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관심사는 ‘살고 보자’입니다. 이 바탕 정신이 모든 생각과 행동과 다양한 가치들을 생산하게 됩니다. 신이라는 개념은 대자연을 나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기 위해 중간에 도입되는 매개개념입니다.

이는 예수나, 십자가나 성경도 마찬가지로 이런 식으로 이해됩니다. 다 나를 위해서 그런 분이나 그런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합니다. 정의로움이나 선함 같은 것도 내가 우선 여기 있을 때나 의미 있다고 여겨질 뿐입니다. 이 앞에 마이크가 있어 제가 “마이크 여기 있네”라고 말을 하는 것도 일단 내가 여기 살아 있을 경우에나 외칠 소리이지 만약에 내가 죽는다는 그런 관계로 소멸되는 겁니다.

따라서 신이니 천국이니 하는 것은 실은 다 나의 투영체에 불과하고 이미지며 상상계 구성을 조립하기 위한 심리적 작업에 불과합니다. 차라리 “그 어떤 경우에도 나만이라도 최후까지 살고 싶다”라는 의식이 가장 정직한 고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나만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고 말입니다.

진실이란 늘 0지점에서 새롭게 창조되는 방식으로 출몰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의 오해는 자신마저 0로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7000=0입니다. 7000명이나 있다고 여유부릴 상황을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조되는 늘 반복되는 식으로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은혜’라 하나님의 창조행위의 방식으로 등장하면서 보이는 특이성입니다.

성도끼리는 동업자들이 아닙니다. 힘을 합치고 단결해서 전도 업무를 수행할 직원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보여주어야 될 것은 ‘은혜 받고 난 뒤의 솜씨’가 아니라 그냥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같은 은혜도 아니요 다른 은혜도 아닙니다. 그것은 은혜임을 평할 자리를 지워버려 나가기 때문입니다.

엘리야 시대에 남은 7000명이 있더라도 이들은 힘을 합해 조합을 결성하고 지하 활동을 전개한 게 아닙니다. 신앙 독립운동 한 게 아닙니다. 모두들 엘리야처럼 “나만 남았네”하고 살아가는 신세자들입니다. 그래야 그들이 단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위 단결을 호소하는 순간부터 은혜는 사라집니다.

이들 외에 모두는 인원수대로 단결을 시도해서 은혜의 증거가 사라지게 합니다. 즉 은혜를 남길 것인가 아니면 은혜의 결과물을 쥐고 그것을 계속 지켜가면서 살 것이냐를 놓고서 진정 ‘남은 자’이냐 아니냐가 판정됩니다. 따라서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는 늘 혼자이어야 합니다. 7000→0가 된다면 이는 0→7000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사태유발자입니다. 자신이 개입한 현장은 곧 하나님의 은혜와 죄와 만나는 현장으로 돌변합니다. 그 속에서 엘리야와 접촉된 인간들은 평소에 오로지 자기 이름을 위해서 매진하는 죄인됨을 발견되어야 합니다. 열왕기하 1: 9-10에서 엘리야를 체포하려 간 경찰들이 졸지에 50여명이 몰살납니다.

그들 각자 집안에 가족들이 있음을 감안해보면서 얼마나 사적으로 불행한 일입니까? 하지만 이를 통해서 인간은 오로지 자기에게만 최종 가치를 두고 사는 존재임이 폭로당해야 합니다.  열왕기상 17장의 사르밧 과부와의 이야기도 엘리야로 인하여 야기된 상황입니다. 17절에 보면, “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죽음에 엘리야가 관여되게 됩니다. 엘리야 뿐만 아니라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 언약 안에서 놓여 있던 다윗은 이유도 모르고 영문도 모르는채 사울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서도 이상스럽게 이방민족에게는 여지없이 승리를 일구어냅니다.  자기 나라 이스라엘에게는 밉상받으면서도 이방민족에게는 마치 왕처럼 지배권을 갖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결코 이스라엘의 하나님 아닌, 하나님 자신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직면해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 언약에 준해서  이스라엘 왕으로 지목받은 다윗은 , 기존의 이스라엘이 알고 있던 하나님(모세 율법에 의한 하나님)과 다윗 언약에 의해서 새롭게 생겨나야 하는  이스라엘 사이에 틈이 (층이) 일이난다는 사실을 대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 백성들로부터 배반받는 식으로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하는 하나님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 틈에서 다윗에 내뱉은 고백이 바로 시편 22편입니다.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신약에 와서도 이런 취지에서 성도는 다음과 같이 외쳐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왜 저를 구원하십니까? 구원 안 해주셔도 되는데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남마다 나를 위한 세계관이 거울 깨어지듯이 깨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4강-롬 11장 1-5(7000)1312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1장 1절에서 5까지 입니다. 신약성경 253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1:1-5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방금 읽은 본문에 엘리야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이 그냥 사람이기에 우리하고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 엘리야가 등장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본문 5절에 보면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라고 은혜가 병행해서 나옵니다. 엘리야라는 사람, 이 사람의 특징이 뭐냐? 은혜로 남게 된 사람, 은혜로 선택받은 그 사람이 엘리야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사람인데 보통 사람이 아니지요. 왜 그런가 하면 은혜로 택함을 입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 땅에 은혜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엘리야가 로마서 11장에 등장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본문을 보면서 엘리야만 보지 마시고 엘리야를 엘리야 되게 했던 그 은혜가 엘리야보다 더 우선권을 쥐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이런 소리를 해요. “세상 사람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습니다. 다 바알에게 복종했습니다.” 이 엘리야, 은혜를 입은 사람이 알려주는 소식이 뭐냐 하면, “이 세상은 주의 선지자와 주의 제단을 헐어버리는 기세, 힘, 그것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라고 우리에게 언급하고 있어요.

왜 그런데 신경을 쓰는 겁니까? “월급이 얼마가 올랐습니다. 내일 모레면 승진합니다. 누가 이번에 수능시험 잘 쳤습니다. 물가가 올랐습니다. 장성택이 총살당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우리가 하게 되면 전혀 막히는 것 없이 세상에 대해서 서로 소통이 되는 겁니다. ‘아, 그런데 관심이 있는 것을 보니까 당신은 인간, 그렇다면 나도 인간, 모두 인간, 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고 우리는 다 같은 인간.’ 사시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은혜로 말미암아 택함을 받은 엘리야라는 인간은 세상의 정치문제나 경제사회의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 아버지, 고부간에 갈등이 심합니다, 어떻게든 취직을 시켜주십시오, 돈 좀 벌게 해주세요.” 이런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여, 이 세상이 주의 선지자를죽였으며 주의 제단을 헐어버렸습니다.”라는 말이 은혜로 택함을 입은 사람의 입에서만 그것이 나올 이야기라는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런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과 의견을 교환할 수가 없습니다.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이 말은 더 나아가면 이 세상에 은혜를 입지 않으면 엘리야 같은 인간은 생산될 수가 없어요. 엘리야는 아예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 인간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고 엘리야를 내세움으로 말미암아 배후에 은혜가 아직도 작용하고 있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엘리야의 존재를 통해서 우리에게 언급을 해주려는 거예요. 엘리야 입장에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만 남았어요. 자기 빼놓고 사람이 아니에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나만 남았다는 이야기를 지금 엘리야가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들이나 교인들이 사람 수를 생각하고 교인수를 생각한다는 그것은 엉뚱한 것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기대를 걸고 있는 거예요. 없는 사람인데 왜 없는 사람을 있는 숫자에 집어넣습니까? 없으면 제로, 0이 되는 거예요. 엘리야가 하는 말이 “나만 남았습니다. 나 외에는 없습니다.” 나 외에는 없다는 것인데 이게 무슨 독선이고 이게 무슨 횡포입니까? 이게 무슨 망발입니까? 왜 사람이 없습니까? 시장에 가 보세요. 낮에도 바글바글 사람이 그렇게 많아요. 그런데 엘리야가 보기에는 사람이 없어요. 엘리야가 잘못이 있다면, 실수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와 같은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 그 자체가 실수고 잘못이에요.

분명히 주님의 은혜를 입어서 엘리야 같은 사람이 등장하잖아요. 그러면 사람이 은혜를 입었으면 나 같은 사람이 있어야 된다고 요구할 권리가 인간에게는 아예 삭제되어 있고 인간에게는 그런 권리가 없는 거예요. 본인 자신도 없는데서 은혜로 말미암아 발생되었는데, 어떻게 자기가 은혜를 입장이거나 주체자도 아닌데 왜 그런 욕심을 냅니까? 오히려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지요. “주님이여, 나만 남았네요. 즐거워라.” 그런데 엘리야의 실수가 뭐냐 하면, “나만 남았는데 좀 외롭습니다.” 그렇게 나오면 안 된다니까요. 그냥 외로워야 돼요.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니거든요. 예수님 제자들이 길 가다가 자랑 질을 했어요. “하나님, 하늘에서 귀신들이 떨어집디다.” 하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네가 귀신이 너한테 항복하는 것을 좋아하나? 그거 좋아하지 말고 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좋아하라.” 이렇게 했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명단에 없으면 있어도 무 존재가 됩니다. 존재하지 않은 것이 되는 거예요. 하늘나라 리스트에 이름이 없으면 지상에서 키가 몇이고 몸무게가 몇이고 해도 그것은 없는 존재입니다.

교회는 없는 거예요. 성도도 없는 겁니다. 엘리야는 “왜 나 같은 사람이 없습니까?” 하고 따지지 말고 본인 자신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어야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보시기에 정상적인 사람은 하나님 이름을 위하여 그때그때마다 조립되는 사람만이 정상적인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덩치가 있고 자기 이름이 있으니까 그 이름을 위해서 내가 어떻게 버텨보려고 하는 거예요. 그것은 버텨봐야 확산되는 것은 자기 이름이라니까요, 자기 이름. 자기 이름이 모아지면 그것이 자기가족이 되고 그것이 더 모아지면 자기국가가 되고 민족이 되는 거예요.

국가, 민족, 교회, 자기가정, 자기자식,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것, 그것은 무 존재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것을 사람으로 간주한 적이 없어요. “당신 교회 교인수가 몇 명입니까?” 정답은 이렇게 해야 돼요. “우리교회 교인 한 명도 없습니다.” 이게 정답이에요. 왜냐하면, 우리 교회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이 세상에 유일하게 있는 것은 주의 이름만 있을 뿐이에요. 주의 이름만 있을 뿐이고 나머지는 주의 이름 앞에서 아무도 없는 거예요.

제가 괴상한 소리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조금만 따져보면 생각할 수 있어요. 사람이 짜증이 날 때 있잖아요. 내가 짜증이 난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짜증이 났을 때 그 짜증난 자가 본인이지 내가 짜증나는 것은 아니에요. 이야기하나 마나 제가 이걸 이해 할 것 이라고는 생각 안합니다. 내가 짜증을 내는 것이 아니고 짜증이 나는데 그 순간에 보니까 그게 나라는 말이지요. 내가 짜증내고 싶어서 짜증낸 것이 아니고 짜증이 났는데 짜증을 누가 냈는지 보니 그것이 나였다는 그 말이지요.

사람이 내가 짜증내고 싶어서 짜증낸 것이 아니에요. 짜증이 나면 그저 당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누굴 사랑한다? 내가 누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그 순간에 보니 내가 사랑했구나, 그러니까 사랑하는데 이용당한 자가 누구인가? 내가 이 사랑을 위하여 잠깐 3초, 4초 동안 이용당한 거예요. 사랑했다고 돌아서면 미워하는데 그러면 사랑할 때는 내가 이용당해서 사랑했고 미워할 때는 미운 감정에 내가 놀아난 거예요. 내가 사랑하고 내가 미워할 수 있는 어떤 능력과 자질도 나한테는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믿어서 구원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께서 믿음이라는 것을 발생시키는데 거기에 아무 이유도 연고도 없이 끌려든 사람이 누구냐, 내가 끌려들어가서 왠지 그때부터 내가 믿어지게 되어버렸어요. 내가 믿는다 할 때 ‘나는’이 주어고 술어가 ‘믿는다.’라고 붙거든요. 그게 우리 인간들의 잘못된 문법적 습관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걸 바꿔야 돼요. 동사가 먼저고 거기에 이용당한 것이 명사나 대명사가 되어서 차후에 소급되어서 모든 것이 파악되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 애인을 사랑할 때 “사랑한다.” 하면 돼요. 그런데 “내가 사랑한다.”라고 ‘내가’를 집어넣어버리면 내가 알아서 사랑하고 싶지도 않지만 억지로 사랑해주니까 사랑받은 너는 나에게 반드시 사랑의 대가와 보답을 해야 된다고 우겨버리면 그것은 뭡니까? 상대방은 나의 종입니까? 나의 똘마니에요? 상대방이 나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겁니까? 사람이 사랑할 때가 있어요. 있지만 그것이 본인이 아니에요. 조금 전까지 사랑했던 내가 돌아서면 미워함에 놀아나는 것이 또 나기 때문에.

여러 번 이야기했잖아요. 나는 누군지를 몰라요. 왜? 내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육신이 있다니까요? 이런 이야기를 수백 번은 더 했어요.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육신이 있고 그 육신은 내가 감당을 못해요. 나의 있음과 나의 똑똑함과 명철함과 탁월함이 나의 감정하나 조절 못한다니까요? 아침에 믿었다고 오후 6시에 믿어집니까? 안 믿어지는데. 치매 걸리면 믿어집니까? “예수가 누구죠?” 이러고 있는데. 사람은 대자연이 있고 인간은 그 대자연의 일부로 있거든요. 그런데 인간들은 얼마나 억지를 부리는지 마치 이 대자연이 내 손안에 있는 것처럼 행세를 꼭 해야 될 이유가 뭡니까?

이것은 아주 수상해요. 이것은 진짜 인간이 막돼먹은 거예요. 태양이 아침에 뜹니다. 나한테 물어보고 떴습니까? 태양이 아침에 뜰 때 나한테 물어보지를 않은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태양아, 네가 있음으로서 내가 따뜻하다.” 태양이 같잖아서 “내가 너 따뜻하라고 뜬 줄 아나?” 태양 뜨는데 갑자기 너라는 존재가 왜 도입됩니까? 우리 몸이 선악과를 기억해요. 선악과 따먹으면 주제넘게 우리가 신으로 행세하고 싶은 겁니다. 하나님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우리가 있었어요.

이것은 유치원생도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썩어빠진 사고방식이 내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마땅히 있어야 되는 것처럼 하루하루 일상을 보냅니다. “하나님. 내가 이렇게 힘든데 하나님이 뭘 해줬습니까?” 이런 식으로, 따지는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왜 우리 집은 딸, 딸, 딸밖에 없고 아들은 없습니까? 새벽기도를 어떻게 해야 아들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걸 지금 누구보고 따지는 거예요? 자식이 제일 되바라질 경우가 어떤 경우냐 하면, “아버지, 왜 날 낳았습니까?”

아버지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낳아지는 것이 자식인데 뒤에 나온 자식이 아버지보고 그렇게 따져버리면 아예 그 자식 없애버릴까요? 아예 없애버려? 이것은 우리가 성경을 보는데 성경을 보면서도 비현실적이고 말도 안 되게 막장드라마도 그런 드라마가 없어요. 우리는 내가 잘 돼야 그것이 진리라고 알고 있고 그것을 정의라고 알고 있는 막장드라마 같은 인생,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그것이 바로 지옥갈 수밖에 없는 범죄”라고 하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구원해야 됩니까? 왜 하나님이 날 구원해요? 이것은 정말 막장 드라마에요. 이것은 터무니없는 망발이라니까요.

지옥을 보내든 천국을 보내든 자기 맘대로 하면 되지 왜 내가 꼭 구원받아야 됩니까? 정말 성질나서 설교도 못할 지경이에요. 왜 내가 천국 가야만 되는 겁니까? 지가 뭔데? 모든 것을 전부다 거꾸로 다 생각하니 성경을 백 날 봐도 성경 한 구절 한 구절이 다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아까 말한 대로 엘리야가 실수한 것은 있지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보내서 우리에게 엄청난 것을 알려줍니다. 그게 뭐냐, “나만 남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보세요. 오늘날 현대인들, 옛날도 마찬가지지만 인간들이 “나만 남았습니다.”라는 발언을 잘 안 해요.

인간들의 99.99퍼센트가 하는 일은 뭐냐, 사자성어식으로 하면 뭐냐, “살고 보자.”입니다. 종교? 기독교? 예수? 예수 믿으면 떡이 생깁니까, 돈이 생깁니까? 인간의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 나부터 살고보자는 거예요. 일단 배가 부를 때는 놀러 삼아 교회 와 줄 수는 있어요. 하지만 당장 배고픈데 미쳤다고 교회 다닙니까? 하나님을 미쳤다고 믿습니까? 신이라는 것은 어디에 개입되느냐 하면 대 자연을 내 손아귀에 쥘 수 없어서, 그게 안달이 나서, 자연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데 안 되니까 그 매개물로 도입되는 개념이 바로 신, 하나님, 예수라는 개념이에요.

절에 꼭 안가고 교회 안 나와도 항상 신을 잊을 수가 없어요. 저 모든 것을 어떻게 내 손에 쥘 수 있는가, 내가 좋아하는 쪽으로 관리가 될 수 있느냐? 아침에 추울 때 버스 타 보세요. 타게 되면 인간의 몸이 선악과를 기억해요. 선악과는 내가 무조건 신이 돼야 되거든요. 내가 버스타려고 아침에 정류장에 딱 가게 되면 그 때 팔공산 쪽에서 버스가 내려와야 돼요. 딱 보니까 직행 1번, 12번, 401번, 10번, 벌벌 떨고 서 있으면서 “자비로운 신이시여, 어찌 저에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뭘 어쩌라고? 진작 좀 나오지 왜?

우리는 한시도 그 알 수 없는 신에게, 그 신의 이름이 뭔지 몰라도 하여튼 알 수 없는 그 모든 신, 모든 탓을 할 수 있는 그 분에게 우리는 쉴 새 없이 짜증내고 불평을 했는데 그 불평과 짜증은 내가 내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나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는 무엇이 짜증을 냈고 우리는 그 짜증에 동원된 겁니다. 말려든 거예요. 지난 시간에 제가 했지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사랑한다, 이것은 세상에서 온 것이다.’ 이 이야기가 요한 일서에 나온다는 말이지요. ‘예수 믿는 사람은 이런 것을 안 좋아해야 해. 우리는 이런 것을 피할 거야.’ 라고 생각할 때 그렇게 생각하는 그 사람은 자기 주제파악도 안되는 인간이에요.

세상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그래, 바로 이거였어. 정작 내가 교회를 20년 다니고 목사 장로라고 우세를 해도 궁극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은 세상 부귀영화였어. 그래, 이거야.’ 그걸, 성경말씀을 절감해야 된다니까요. 아무리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동원해도 내 몸은 나부터 무조건 밥이나 먹고 살고 보자, 밥 빌어먹고 살고 보자, 이것이 기본입니다. 왜 교회 나왔다고 해서 그걸 아닌 척 하십니까? 왜 스스로 위선을 떨려고 해요?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일먼저 받은 시험이 뭐냐? 40일 동안 굶었던 예수님에게 찾아온 어떤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이 마귀인지 천사인지 아무도 알 수가 없어요. 마귀가 “나는 마귀다.”라고 표내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기능, 언어를 가지고 오는 거예요. 이렇게 속삭입니다. “배고프지?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잖아. 그만한 능력이 있잖아. 기도를 하려 해도 우선 네가 힘이 좀 나야 되니까 떡 먹고 기도하세요.” 마귀가 뿔 달려서 벌겋게 피 바르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다정스러운 친구처럼, 정말 오래된 친구처럼 찾아와서 하는 말이 “사람이 기도도 좋고 하나님도 좋고 예수도 좋고 다 좋지만 우선 네 몸부터 추슬러서 밥은 먹고 사는 그것이 기본”이라는 거지요. 밥도 못먹고 사는데 무슨 교회 나오를 나옵니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입장에서 무슨 교회에 나가고 무슨 예배를 드려요?

예배드릴 때 그 심정이 “하나님이여, 죽어도 좋습니다.” 그런 식으로 예배를 드릴까요? “오늘도 교회 나왔으니 이번 주에는 일거리라도 좀 주세요.”라고 나올 거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어떤 행동을 하든지, 조금만 움직거려도 결국은 어떻게 하면 주변의 사회상황과 대자연을 내가 좋은 쪽으로, 나한테 이익이 되는 쪽으로, 나에게 이윤이 되는 쪽으로, 나에게 힘이 모아지는 쪽으로, “하나님이 좀 도와주셔서 나도 힘 좀 모아봅시다. 그래서 안심 푹 놓고 노후 대책 좀 제대로 해 봅시다.라는 기대와 욕망과 바람 그 외에 뭐가 있습니까?”

뭐가 있어요? 사람이 다 똑같지. 살고보자, 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뭐라고 합니까? “주여, 나만 남았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게 은혜에요. 은혜라는 말은 우리가 나왔던 그 바탕, 기초로 찾아가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한 번 실험해 보세요. 거울을 볼 때 거울을 보면서 거울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어떤 게 있을까요? 거울을 보면서 거울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가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는 영국의 수학자가 지은 소설에 보면 나와요. 거울 속으로 들어가는 게 있어요. 토끼 굴에 들어갔다고 희한한 세계를 보는 것 처럼 거울 속에 있는 그 세계에는 어떤 인간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추이기 때문에. 이처럼 영적세계, 신비의 세계, 천국이니 하나님나라, 예수의 나라라 하는 것은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세계는 실제 천국도 아니고 예수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에요. 그것은 내 모습을 되비쳐 온 하나의 영상입니다. 내 모습을 되비쳐온 것뿐이에요. 내가 여기 있기에 천국이라는 것이 있는 거예요. 좀 괜찮은 소리 나올 때는 기억을 하세요. 하나님이라는 것은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조작해낼 수가 있는 겁니다. 매일같이 하나님을 조작하는데 나에게 유리한 하나님으로 나에게 다시 한 번 소유화시키고 싶은 거예요.

배트맨이라는 게 있지요. 그가 살고 있는 고담시가 있어요. 밤이 되면 박쥐형상의 조명이 옥상에서 공중으로 올라가요. 검은 하늘에 박쥐형상이 투영된다는 말은 원형이 이 지상에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되고 싶은 그것이 하나님이에요.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선악과의 확장이 하나님이에요. 선악과를 따먹으니까 선과 악이 있잖아요. 선과 악이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선 한쪽으로 가장 극단적인 분이 바로 하나님일거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그 하나님을 믿는 겁니다. 내가 되지 못하는 선을 하나님이 이미 갖고 계시기에 나도 하나님 잘 믿어서 시키는 대로 따라가게 되면 언젠가 나는 선한 사람이 되고 선한 사람에게는 심판과 저주가 있을 리가 없기에 죽어서도 좋은 나라에 갈 것이라는 생각을 현재 내가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게 배트맨처럼 어두운 하늘에 투영되는 거예요.

그것이 알고 싶다, 이제 알려 드릴게요. 교회니 종교라는 것은 전부 다 자기 이미지, 자기상상입니다. 그것뿐이에요.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하다 어떤 여인이 붙잡혀 왔어요. 붙잡혀 왔을 때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법을 어겼다고 짱돌 들고 여인을 죽이려고 몰려들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이 여자는 때려죽여야 합니다. 당신도 율법 존중한다면 우리도 존중하니까 우리 생각이 서로 똑같네. 그러니 당장 이 여자 죽입시다.” 했어요. 그 때 예수님께서 좀 있다 보니 그 짱돌 들고 둘러섰던 그 사람들이 다 가버렸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예수님이 뭘 했기에 당장이라도 돌로 그 여인을 쳐 죽이려는 기세로 둘러섰던 그 사람 다 어디 갔습니까? 물었지요. “여인아! 너를 돌로 치려던 자들은 다 어디 갔지?” “다 가버렸습니다.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율법을 잔뜩 안고 왔는데 그 율법이 다 어디 갔습니까? 주님께서 어떤 행동을 했느냐 하면, 앉아서 땅바닥에 글을 썼어요. 그 글이 무슨 내용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 글을 썼더니 돌 놓고 다 가버렸습니다. 그 글의 내용과 취지는 먼저 알려졌지요.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선악과 따먹었다고 선악과 따먹은 행세를 하는 인간들을 선악과 그 선가지고 이 여자를 칠수 있으면 쳐봐라,” 바로 우리가 생각했던 그 착함과 의로움, 교회, 거룩함, 경건함, 전부 다 선악과의 연장이고 가짜였고 조작된 것이고 선악과 따먹은 티를 팍팍 낸 것에 불과했습니다. 주께서 이야기합니다. 그런 식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 천국은 내가 용서하면 그것이 바로 천국이다. 선악과 따먹어서 자칭 매일같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나님처럼 안 되니까 씩씩거리면서 하나님 탓하고 짜증내는, 그것도 자기 뜻도 아니고 악마에 의해서 휘말리는 노리개가 되어 있는 우리 자신을 주께서는 일방적으로 은혜를 주셔서 일방적으로 택함을 받은 자에게는 그 모든 선악과 따먹은 죄를 일소에 붙이고 없는 것으로 용서가 되는 그런 방식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하기 위해서 우리는 철저하게 선악과의 후유증이 뭔가를 알아야 돼요. 따라서 거울 속에 있는 세계는, 거울 속에 있는 천국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거울을 깨면 돼요. 거울을 깨게 되면 그 거울을 깨는 동시에 내 이름도 깨집니다. 내 이름이 깨지면 “귀신이 너에게 굴복하는 것을 좋아하지 말고 너의 이름이 하늘나라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 다시 말해서 그 기록된 것이 뭐냐, 주의 이름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제자들은 이제 자기 이름을 포기하고 주의 이름의 등장함을 보여주는 증거물로 이 땅에서 살아야 될 자가 바로 엘리야 같은 사람입니다. 그게 엘리야에요.

자기 이름 없어요. 자기 이름 있으면 거기에 치장을 해요. 크리스마스트리처럼 꾸미게 되는 겁니다. 내 이름이 사라져 버렸어요. 내 이름이 사라져버렸으니까 전에 내 이름이 악마에 다루어지는 것처럼 이제는 예수님에 의해서 다루어질 뿐이에요. 짜증나요? 짜증내세요. 왜 짜증을 내게 하시는가? 주의 이름, 주의 십자가 고마운 줄 알라고 짜증내게 하시는 거예요. 짜증내도 행복합니다. 간음해도 천국가요. 세상에 이런 복이! 성당이나 교회는 가짜, 유사 성도를 찍어냅니다. 종교적인 형식, 틀,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 외우기,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기, 이런 식으로 하게 되면 “당신 천국 갑니다.” 해서 붕어빵 찍어내듯이 찍어내는데 천국에는 모창가수 필요 없습니다.

천국은 아무도 구원받지 않게 함으로써 아무도 없는 자들만이 거기 있어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있기 없기, 이것이 내가 있을 때만 있고 내가 없으면 없는 거예요. 어렵게 해 볼까요? 내가 죽으면 태양도 없어져요. 왜, 내가 있기 때문에 태양도 있는 거예요. 있다, 혹은 없다, 존재한다,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 모든 것은 나의 존재를 기반으로 해서 그 다음에 따지는 것이 존재에요. 책상이 있다, 마이크가 있다, 이것은 내가 있을 때나 하는 소리고 내가 사라지면 시체가 되는데 이 마이크가 있고 없고가 무슨 관계가 있어요?

천국에서는 주님이 주님으로 계심으로서 우리도 있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면류관도 반납하는 겁니다. 짜증날 때는 짜증을 내세요. 내면서 이 짜증을 통해서 나라는 인간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주님의 훼방이 될 뿐이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엘리야가 등장하는데 엘리야는 사태유발자입니다. 사태유발자를 다른 말로 하면 말썽꾸러기, 고상한 말로 사태유발자. 열왕기하 1장에 보면 엘리야를 체포하려고 경찰서 기동대 50명 왔는데 하늘에서 불 내려와서 1개 중대병력이 다 죽어버렸습니다.

사태유발자죠. 엘리야가 없으면 그 50명은 안 죽었습니다. 경찰기동대 50명 한 명 한 명이 다 집에 가면 가장이고 자식들도 있어요. 저는 성경 보면서 엘리야를 체포하려고 하다가 다 죽었다는 그 소리 듣고 그 죽은 경찰관과 가족들, 그 중에는 막 결혼한 신혼부부도 있었을 것인데 그 남편도 같이 죽은 거예요. 엘리야 체포하러 갔다가. 얼마나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까? 그 원인제공자가 누굽니까? 엘리야에요. 엘리야 멱살 쥐고 흔들어 볼까요? 당신 때문에 내 남편이 죽었다고. 그 죽은 50명 가운데 포함된 가족, 방금 결혼한 젊은 경찰관이 엘리야 때문에 죽었다고 멱살 한 번 쥐어 볼까요?

엘리야의 멱살을 쥘 수 있는 믿음 같으면 그 사람은 구원 받을 수 있는 믿음이에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요? 엘리야가 있는 것은 엘리야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있기에 하나님이 함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유일하게 엘리야가 은혜로 택함을 받았다는 그 메커니즘, 그 경과과정을 알고 있는 사람 같으면 모든 책임이 엘리야에게 있다고 따지고 들면 그 사람은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인데 보통 사람은 그렇게 안 들려요. 그때 갑자기 벼락 쳤다는 식으로 그것을 대자연의 탓으로 돌린다니까요. 그걸 일반인들, 보통사람들은 약속과 연관을 못시켜요. 성령 받은 사람만 연관이 돼요.

“우리 애가 시험 못 친 것은 다 주님께서 하신 일이다, 주께서 하신일은 다 십자가 보여주려고 하신 일이다. 공부 못해도 구원받고 용서 받는 거야. 간음한 여자도 구원받는데 성적 나쁘다고 지옥갈 일 있어?”라고 하나님의 약속과 연관될 수 있다는 이 논리적인 사고방식은 성령 받아야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기 이름밖에 몰라요. 나는 살았다는 거예요. 사실은 산채로 죽어 있어요. 자기는 인간이라고 우기는데 인간 아닙니다. 조금 있다가 흙으로 돌아갈 거예요. 사람 아닙니다. 주님 보기에는 사람 없어요. 은혜로 남은 자만이 사람이에요.

오늘 본문에 보면 엘리야가 “나만 남았습니다.” 하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했지요. 이 칠 천명이 남아 있다는 이 점을 굉장히 이해를 잘 하셔야 돼요. 이 논리가 하도 어려워서 주보 뒤에 적어 놓았어요. “엘리야의 오해는 자신마저 제로(0)로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칠천 명은 제로에요. 칠천 명은 한 명도 없는 거예요. 은혜 받고 난 뒤에 칠천 명이 아니고 그 칠천 명은 어떤 조합을 결성하고 활동을 개시하는 레지스탕스들이 아니에요. 이 칠천 명이 서로를 몰라요.

마치 엘리야가 “나만 남았나이다.” 하는 것처럼 7천명 전부가 다 “나만 남았나이다.” 하고 있단 말이지요. 이 사람들이 단결해서 숫자가 만만치 않으니 선교활동 합시다, 하는 순간 뭐가 날라 가는가? 은혜가 다 날라 가버려요. 계속해서 유사품만 조장해 낼 뿐입니다. 우리교회 등록하시면 구원받습니다, 이런 유사품, 이런 모창가수만 양산해 낼 뿐이에요. 바운스, 바운스 해가면서 노래하는 모창가수. 하나님이 은혜로 조립하는데 우리 쪽에서 그런 유사품을 만들어낼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이렇게 학습 받으시고 그 다음에 세례 받으시고 단계별로 목사에게 교육받으시면 구원 받는다, 이런 짓은 사기꾼들이 하는 짓이에요. 그렇게 해서 구원받은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믿지 말아야 할 이유는 내가 나를 믿지 말아야 할 이유와 같은 거예요. 내가 날 믿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여, 절 구원해주소서.” 하는 뻔뻔스런 짓을 해서는 안돼요. 하나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해서 따로 죄를 지으면 안돼요. 그냥 사는 그 자체가 죄라고 규정받아야 돼요.

사는 것이 왜 죄냐 하면, 나쁜 짓을 해서 죄가 아니라 그 모든 살아가는 것이 나의 존재를 기준으로 해서 살아가기에 그것이 죄가 되는 거예요. 정말 이 이야기가 너무 어려운데 마태복음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참새를 기르시잖아요. 참새를 기르시고 내일 아궁이에 들어가는 들풀을 길러주시지요. 그 참새의 종교가 뭐지요? 그 참새의 교파가 어떻게 됩니까?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동 측 괄호 열고 괄호 닫고, 그런 겁니까? 참새가 어느 교회에 등록했습니까? 들풀이 교단이 어디입니까? 그런 것이 필요 없지요.

왜 없는가? 주께서 친히 기르시나니, 친히 기르시는 그 앞에서 무슨 교파가 필요하고 무슨 교회 다니는 것이 필요합니까? 그저 친히 기르신 다는데. 친히 기르신다는 그것만 받아들이면 되는 거예요. 번개탄에 불붙일 때 번개탄이 믿고 있던 교파가 어디입니까? 없지요. 번개탄은 그냥 라이터불로 붙이면 번개탄은 타기 싫어도 그냥 타야 되는 거예요. 성령 받은 사람은 성령의 불이 붙어버리면 교파고 뭐고 필요 없어요. 그냥 주께서 그 나라 의를 위해서 쓰시면 그 뿐입니다.

엘리야는 사태유발자에요. 열왕기상 17장 17절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일 후에 그 집 주모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이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 집에 가서 그 과부와 아들을 먹여 살렸어요. 그런데 얼마 있다가 그 집 애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습니다. 이 아들이 왜 죽었을까요? 엘리야를 뭐라고 했습니까? 사태유발자지요. 엘리야가 안 찾아갔으면 그 애가 죽지도 않았어요. 엘리야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의 존재를 없애버리는, 엘리야를 무 존재로 만들고 엘리야의 자기 이름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그냥 다루어지는 존재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엘리야가 방문한 그 집의 멀쩡한 애가 죽어버린 거예요.

그 여인이 화가 잔뜩 났어요. “당신 때문에 우리 애가 죽게 되었다. 양식 떨어졌을 때 그냥 굶어죽게 놔두지 참기름 병에 기름 채워줄 때는 하나님이 나에게 유리한 하나님으로 알았더니 이제 와서 내 아들을 죽여 버리면 무슨 그따위 하나님이 다 있냐고요.” 이런 식이지요. 엘리야가 다시 살립니다. 이게 뭐예요? 병 주고 약주고. 차라리 죽이지를 말든지. 애를 죽이고 다시 살려내는 것은 거울을 깨야, 맨 날 내 얼굴을 비추는 그 거울이 깨져야, 맨 날 나 자랑하고 나를 위한다는 우리교회, 우리교회는 해당도 안 됩니다만, 항상 나를 예뻐해 주는 우리 목사님, 이것도 저에게 해당이 안 되네요, 항상 그런 것이 깨져야 돼요.

내 자식은 항상 내 옆에서 날 돌본다. 반찬도 해주고. 날 위해 기도해주고. 그것이 깨져야 돼요. 세상만사 돌아가는 것은 다 나 좋으라고 돌아간다. 그게 깨져야 돼요. 태양은 날 위해서 있다. 아닙니다. 애인과 헤어지고 난 뒤에 부르는 노래가 뭐냐, ‘난 애인과 헤어졌는데 태양은 왜 빛이 나고 파도는 왜 치는가? 나는 괴로운데 세상은 왜 웃고 있느냐?’ 그거 아닙니까? 그것이 깨져야 돼요. 그것이 깨져야 된다니까! 그게 있으면 예수를 믿게 돼요. 예수 믿으면 안돼요. 예수 믿으면 구원 못 받아요. 예수님이 찾아와야 되지 내가 예수 믿으면 안돼요.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어떤 기적 같은 것을 모방해서 유사품을 만들어서 자기도 그 기적을 동일화 하면 구원받는다고 자부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묻습니다. “당신 교회에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있습니까?” “우리교회 오시면 이빨이 금이빨로 되고 병 나아서 몸이 건강하게 되고 가정이 화목하고 …….” “그런 유사품 말고 직접 묻습니다. 11시가 되면 당신 교회에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피어오릅니까?” “아니오.” “성경 출애굽기 40장에 나오는데 왜 그게 없습니까?” 할 말이 없지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어야 구원받는 사람 아닙니까? 난 그렇게 알고 있는데요. 어떤 분이 중요한 질문 했어요. 다윗이 하나님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시편 22편에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왜 했습니까? 제가 답변하기를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이스라엘 자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동행한다는 표시였습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에 정착하고 난 뒤에는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했던 동행이 이제는 고난 받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함께 있는 증표로서 이스라엘 내부문제로 들어가요.

처음 출애굽 할 때는 이방민족이나 이스라엘이냐, 그것으로 구분하다가 이제는 새로운 언약이 들어오게 되면 그 언약에 맞추어서 이스라엘이라고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남은 자, 은혜로 남은 자가 있다는 거예요. 그 은혜로 남은 자에 접근하면 할수록 핍박받고 오해받고 고난 받는, “누가 봐도 저 사람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야.”라는 징표를 갖고 있는 그것, 그러면서도 “에이, 이러면 나도 하나님 안 믿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하나님이여, 저에게 어떤 연유로 이런 아픔이 옵니까?”라고 묻는다는 것, 그것은 영적인 메커니즘 속에 들어 있는 사람이에요.

오늘 세 번째 이야기하는데 다시 이야기합니다. 짜증이 난다. 그것은 여러분이 짜증을 내는 것이 아니고 짜증남에 여러분들이 그 순간 말려든 거예요. 한 3초쯤 지나면 짜증이 풀려요. ‘내가 고난 받는다.’ 여러분들이 고난 받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을 다루기 위해서 고난 받는 분이 옆에 있기 때문에 그 주님이 함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복음으로 고난 받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나만 남았다.”고 하는 거예요. 우리도 포함해서 모든 세상 사람들, 육신은 그저 ‘살고보자’는 겁니다.

교회고 뭐고 지금 돈 버는데 바빠요. 살고보자는 겁니다. 꼭 직장 다닌다는 그것만이 아니고 아는 사람 만나는 것도 나한테 돈이 들어올 수 있는 구석이 있기에 누군가를 만나는 거예요. 내 생존에 유리하다는 계산 때문에 누군가를 만나는 거예요. 살고보자, 이게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에요. 신을 믿는다, 예수 믿는다, 그것은 다 내가 조금이라도 더 오래살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입니다. 치사한 경건의 티를 내는, 그게 아주 치사한 짓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 우리를 몰아넣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몸이 죄를 기억하고 있는, 선악과 따먹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덩어리, 이 덩어리를 우리가 지니고 있으면서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이 안 됩니다.

우리는 맨 날 세상 좋아하는 간음한 여인입니다. 그때마다 우리에게 들려오는 소식이 있어야 돼요. “누가 너를 정죄하더냐?” “없나이다.” “그래? 그렇다면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왜요?” “그것은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용서했다는 그 은혜, 은혜의 택함이 이제부터 평생 동안 너를 장악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너는 평생 동안 죄를 짓게 될 것이고 그 모든 죄마저 ‘누가 너를 정죄하리오.’라는 음성과 함께 예수님께서 용서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 그것이 바로 은혜로 택함 받은 자의 집합, 곧 천국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기이한 일입니다. 같은 사람인줄 알았는데 은혜로 남은 자가 있다는 소식을 우리에게 전달해 왔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에 관심 없는데 성경은 우리가 관심 없어하는 그것을 지목하고 지적합니다.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우리가 그동안도 자연스럽게 죄 짓는 자로 살아가고 있었음을 깨닫고 그 죄가 십자가의 피의 만남으로 주께서 알아서 용서해주셨다는 사실까지 합류하면서 주의 증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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