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강-롬 10장 19-21(땅 끝의 현상)1312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0장 19절에서 21까지 입니다. 신약성경 253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0:19-21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지난시간에 본 18절 끝에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할 때 여기서 땅 끝까지의 그 땅 끝은 어느 동네를 두고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상당히 궁금했는데 오늘 본문에 보면 땅 끝이라 하는 것은 대한민국 사람들이 정해놓은 그 땅 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에 덮인 운명. 이스라엘 역사의 운명에서 모든 것이 덮여지고 그 이스라엘이 끝나는 그 지점이 바로 땅 끝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사는 땅이라 하는 것은 새롭게 해석되어야 하는데 이 땅은 그냥 땅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역사가 덮여서 같이 진행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역사의 입장에서 볼 때 땅 끝이에요. 모든 세상은 이스라엘의 운명과 같은 운명으로 묶여서 진행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그런가, 이스라엘이 최초로 구원에 대해서 보여주는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할 때 그 이스라엘나라 자체가 없었고 이스라엘은 애굽에 살던 소수민족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개입을 하니 드디어 이스라엘 나라가 생겼어요. 그 이스라엘 나라가 생겼을 때 그 나머지 모든 지구상의 민족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이젠 그 이스라엘의 운명이 그 모든 나머지 민족의 운명을 덮을 겁니다.
비커에 액체를 담아서 책상위에 죽 부으면 그 비커에 담긴 액체가 책상에 도료처럼 퍼지겠지요. 그냥 땅으로 남아 있으면 이 땅 끝이라는 것이 해석이 안돼요. 땅 끝에 살면서도 왜 사는지를 몰라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밀려옵니다. 쏟아진 이스라엘이 땅 끝에 덮여서 밀려와 버리면 비로소 왜 이 땅이 존재하는지를 알게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 운명과 더불어 같이 겹쳐질 때 ‘아, 땅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이런 것 때문에 땅을 만들어놓았구나.’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 말고 다른 민족들이 왜 이 땅에서 계속 살아야 되는지의 그 이유를 알게 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이 무엇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그 구원은 이스라엘 말고 다른 민족들이 독단적으로는 알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구원의 손길이 최초로 등장한 나라가 이스라엘이기에 이스라엘을 추적하고 이스라엘에 들어가서 그 나라에 속하라, 그러면 비로소 거기서 처음으로 진짜 구원이라는 것이 공개될 거예요. 그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 때는 무엇을 몰랐는가 하면, 어린양의 죽음이라는 사실이 자기를 구원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냥 살기 힘든 이 세상에서 하나님 덕분에 좋은데 가서 편하게 살면 그것이 구원인줄 알았지요. 그게 구원의 전부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의 차이점은 뭐냐? 다른 민족도 신을 섬겼습니다. BC3000년경에 이집트에서 고 왕국이 등장하고 신왕국은 BC1250년부터 시작되거든요. 수메르왕국도 BC1250경에 이미 독립된 국가로 있었고 여러 민족들이 국가로 있었고 그 민족들의 신도 다 내세가 있었어요. 오시리스 이시스라 해서 애굽민족들의 신앙에도 죽으면 좋은데 간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바로 왕들은 죽으면 다 미이라를 만들어서 이 땅에서 살았을 때의 종교제도를 그대로 무덤에 두게 되면 그것으로 하늘나라에서 산다는 겁니다.
중국도 마찬가지에요. 주나라, 진나라, 한나라 죽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진시 황 같은 경우에는 이 땅에서 살 동안은 자기를 위해서 제사를 지내다가 죽어서도 천국 가서 살겠다고 진흙으로 7천 5백 개나 되는 병사를 만들어서 생시와 똑같은 환경을 만들어 놓았어요. 그러나 그런 종교들은 지금 내가 살던 데서 또 살고 싶은 자기중심의 천국을 따로 생각한 겁니다. 지금 제가 중국이야기, 수메르 이야기, 이집트 이야기를 했지만 이야기하면서 가슴 아픈 것이 한국교회가 똑같아요. 전혀 성경 속에 들어오지를 않고 성경바깥에서 옛날 조상들이 바라보던 그 천국 가지고 그게 같은 줄 알고 기도하고 빌고 헌금하면 천당 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구원은 이스라엘 독점적이에요. 다른 민족들은 신을 만들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숨어 있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없는 나라에서 만듦으로 말미암아 최초로 하나님께서 제대로 구원을 어린양으로 하는 겁니다. 어린양이라 하는 것은 애굽에 있을 때 히브리인들은 상상도 못했고 생각도 못한 거예요. 애굽이 너무 고생스러워서 좀 편하게 살게 해달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엉뚱하게 애굽에서 편하게 살게 하지 않고 나오라는 거예요. 이미 살던 곳에 토지도 있고 자기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고 동창생도 있는데 거기서 나가서 어디서 산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바로 아브라함에게 본토와 친척이 있는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는 그 원리원칙을 그대로 적용시킨 거예요. 이스라엘을 떠나라고 하는데 갈 곳이 없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마치 부름을 받아놓고 갈 곳이 없는 것처럼. 여러분, 땅은 갈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이 말한 천국은 이 땅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 땅에서 떠나야 되는데 떠날 방법을 사람들은 몰라요. 그래서 방법이 없어요. 떠날 수도 없어요. 처음에 애굽에 살던 히브리인들은 어린양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관여해서 구원작업을 하고 난 뒤에 그들은 뭘 알았느냐, ‘어린양이 우리 대신 죽음으로서 진짜 구원이라는 것이 어린양 중심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나라에 들어가는구나.’ 그리고 어린양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우리 자신이 생각했던 구원관은 폐기처분 되어야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아야 되는 거예요.
내가 가고 싶은 나라에 내가 가는 것이 아니고 죽은 어린양이 왔던 그 나라에 가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보좌가 뭐냐, 어린양의 보좌에요. 며칠 전에 어떤 집사님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목사님, 큰일 났습니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 큰 일 날 것이 없는데 뭐가 큰 일일까?’ 아내가 신천지에 빠졌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던지. 신천지에 빠진 게 큰일이 난 겁니까? 그게 큰일 난 일이에요? 기존교회는 구원이 되고 신천지는 구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직도 어린양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구원받아야 돼요.
이 세상에는 큰일 날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이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큰 일이 아닌 이유는 이 세상 자체가 이미 큰 일 났어요. 지금 우리가 기존교회 다니는 그것도 큰 일이 아니고 장소 이동해서 신천지 교회 나가는 그것도 큰 일 아니에요. 어린양에 속하지 아니하면 모든 일이 큰 일 난 겁니다. 구원은 내가 살기 좋은 데 가는 것이 구원이 아니고 반드시 어린양을 경유를 해야 됩니다. 그것이 처음으로 이스라엘에 나타난 진짜 하나님의 증표에요. 어린양이 죽음으로써 더 이상 나에게 되돌아올 나의 자리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것, 나로부터 구원되어야 되고 이 땅으로부터 구원되어야 해요.
땅으로부터 구원될 재주가 없습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에요. 어린양으로 구원시켜 줬더니만 그 이스라엘이 동일한 이스라엘이라고 자부했던 겁니다. 다시 자기 자신을 바라봤지요. 구약 이스라엘을 보면 이스라엘은 절대로 동일한 모습이 아니에요. 늘 상 변해요. 제 어머니를 볼 때 마다 50대에는 저 얼굴이 아니었는데, 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본 모습이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안개 같은 겁니다. 안개가 무슨 본 모습이 있습니까? 중국 발 스모그가 무슨 모습이 있던가요?
인간은 자기 모습이 없어요. 오랜만에 동창생을 만났다. “야, 네 얼굴이 전의 그 얼굴이 아니네.” 하면 그쪽에서 뭐라고 합니까? “너도 만만치 않아.” 우리는 나의 본 모습을 내가 잡을 수가 없어요. 왜? 늘 바뀌니까. 내 본모습이 없는 이상은 나도 없어요. 사람은 ‘나는 ~이다.’ 할 때 그것이 본질이거든요. 그 본질이 없어지면 그 앞의 나라는 것도 사실은 의미 없는 호칭에 불과한 겁니다. 도대체 ‘나’라는 자체가 없어요. 그러면 내가 구원받는 것도 없어요. 이스라엘은 자기의 본 모습이 없는 겁니다. 그리고 몰라요.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렇게 이스라엘을 이끄시는가? 이스라엘 속에 감추어진 것이 있어요. 이스라엘로 하여금 날이면 날마다 달라지게 만드는 그 엔진 같은 것, 보일러 같은 숨어 있는 원동력이 있어요. 큰 기선을 보면 엔진부분이 밑에 숨어 있잖아요. 겉으로 드러난 이스라엘은 속에 숨어있는 엔진의 작동으로 결과적으로 표면화되는 것이고 사실은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의 천국이 정보가 들어 있습니다. 그 작동하는 천국의 원리와 원칙 때문에 이스라엘은 날이면 날마다 배반하고 날이면 날마다 거부하고 날이면 날마다 반항하고 그러다가 나중에 완전히 해체되고 날라가 버렸어요.
그 이스라엘, 지금 이스라엘은 가짜고요.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안 믿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는 것은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믿는다.’는 그 사실을 믿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개개인은 여호와를 안 믿어요. 하지만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믿는 나라’라는 그 사실을 믿어요. 신자들 아닙니다. 그 나라를 믿어요. 왜, 자기는 그 나라 국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밖에 안 믿는데 결국 믿어야 되는 자기 자신이 날마다 달라지는데 어떻게 합니까? 날마다 기억력 떨어지고 자기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내가 왜 이러지?’ 하는데. ‘내가 미쳤어. 내가 왜 이러지?’ 원래 그래요, 원래. 원래 그렇다니까요.
어떤 분은 자꾸 저에게 물어요. “성도의 삶은 어떤 삶입니까?” 백날 이야기해도 또 묻고 또 묻는 것이 “어떤 것이 성도의 삶입니까?” 하는데 성도의 삶은 세속에 푹 젖어 드시고 그 다음에 세속에 물들지 않는 거예요. 세속에서 살면서도 세속에 염색되지 않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성도의 삶이 이스라엘의 삶인데 이스라엘은 각오해야 됩니다. 나는 날마다 변하고 나중에 변하다가 변하다가 변할 것도 없으면 완전히 공중분해 된다고. 그러면서도 그들이 믿어야할 것은 뭐냐? 변하지 않는 천국이 정보, 원리와 원칙, 이스라엘로 하여금 점점 해체되어가면서도 해체되는 그 과정에서 삐어져 나오는 진짜 어린양의 실체인 십자가사건을 경험하는 그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 삶을 경험하는데 있어서 오늘 본문에 하나님이 제시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시기 나게 하는 거예요. 19절에 보면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 나게 하며.” 시기 나게 하는 것은 다른 민족이 아니고, 이것이 이사야 65장의 말씀인데 이 시기 나게 하는 말씀의 적용을 그 당시 이스라엘에게 한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구원이란 이스라엘이 독점해 있습니다. 다른 민족들은 구원을 몰라요. 어린양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린양에 의해서 구원을 시켜놓고 그 안에 하나님이 진짜 숨겨 놓은 어떤 비밀이 있어요.
이스라엘에 성막이 있고 나중에 성전이 되고 그 안에 지성소가 있는데 이 지성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게 암실이에요. 사진 현상하는 장소인 암실, 컴컴한 곳입니다. 그렇게 컴컴하게 만들어놓고 그 안 성소에 들어가면 촛대를 만들어 놓았어요. 컴컴하게 만들어놓고 촛대를 만들어서 조명시설을 해놓았습니다. 그리고 떡 상을 만들어놓고 그 상 위에 열두 개의 떡 덩이를 만들어 놓고 조명시설로 그 열 두 덩이의 떡을 비추고 있습니다. 열두 지파를 훈장처럼 달고 있는 제사장이 일 년에 한 차례씩 들어가서 피를 바르고 피를 뿌림으로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있습니다.
왜 컴컴한 암실을 만들어놓았는가? 지붕만 걷어버리면 대낮처럼 환한 태양이 있는데 왜 태양빛 속에 암실을 따로 만들었습니까? 그것은 이 땅은 날라 가버린다는 겁니다. 진정한 빛의 세계는 이 세상에서 어두움의 형식으로 갖고 있지만 그 어두움 속에 들어 있는 그 빛,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구원의 정보로 담겨 있는 거예요. 그 구원의 정보가 마지막 때에 공개되면서 바깥의 껍데기는 해체되고 날라 가 버리는 거예요. 3초 내지 5초안에 폭발해 버리면 그 안에 있는 진짜 정보는 드러나는 겁니다.
이것이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오늘날 성도의 삶이에요. 세상에 있어야 됩니다. 세상에 있으면서 시기 나야 돼요. 그들이 모르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이것은 그야말로 세상에서 뭔 수로도 생산할 수도 없고 모방할 수도 없는 엄청난 것을 갖고 있어요. 그 이스라엘 때문에 구약성경이 있는데 구약성경 27장 3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 대목은 아버지 이삭이 죽기 전에 먼저 에서를 불러놓고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동생한테 이야기하지 마라. 너한테만 이야기하는데 나에게 별미 바치면 하나님께 받은 축복을 다 너에게 줄게.” 그 이야기를 이삭의 부인이 엿듣고 자기가 좋아하는 둘째아들인 야곱에 일렀지요.
에서는 자기가 상속을 독점한다고 좋아하면서 사냥 나갔는데 그 틈새에 엄마 리브가하고 아들 야곱하고 공모해서 목소리 변조하고 짐승 털로 에서처럼 꾸민 뒤에 별미 따로 만들어서 이삭한테 바치지요. 그때 이삭이 눈이 완전히 갔어요. 귀도 어둡고 눈은 잘 보이지도 않으니 누가 누군지도 모릅니다. 더듬어서 파악하는 거예요. “누구냐?” “제가 바로 에서입니다.” “그래? 사냥한 고기는?” “벌써 잡아서 별미 만들었습니다.” “벌써 잡았나?” “하나님이 순조롭게 잡게 해주셨네요.” “그래? 이제 축복해 주마. 그런데 목소리가 조금 이상하다. 한번 만져보자. (털이 많은 것을 보니) 네가 에서 맞구나.” 그래서 축복을 다 해줬습니다.
다 축복해 주고 난 뒤에 에서가 상속받는 날이라고 좋아서 사냥한 고기가지고 “아버지, 제가 왔습니다.” 할 때 이삭이 진짜 에서가 등장한 것을 알았지요. “동생이 다 축복을 가져갔다.”는 겁니다. 그 때 36절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이 굉장히 중요한 말인데요. “에서가 가로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치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라고 나오고 그 다음에 굉장히 인상 깊은 중요한 구절이 나옵니다. “또 가로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이 대목입니다.
“아버지가 동생한테 다 주더라도 복 주신 분이 아버지니 동생한테 줄건 주고 또 따로 나에게 줄 수도 있는 문제가 아닙니까? 줄 수 있잖아요.” 하는 그 대목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고 있는 축복과 저주의 개념이 확연히 달라져요. 우리는 축복개념을 모르고 소유개념으로 보는 겁니다. 축복은 축복 주는 분이 있고 그 축복은 내가 받는다면 나는 축복을 소유하는 내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축복과 저주는 이게 소유개념이 아닙니다. 받아서 내가 간직하는 영역을 따로 만들 수 있어서 내 영역이 따로 있고 거기에 축복을 받고 채우고 받고 채우는 창고 같은 것이 축복에 용납이 안돼요.
이런 것은 이방민족들이 오해해서 그래요. 한국교회가 오해해서 그렇습니다. 축복은 간직할 수 있는 영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축복은 주인과 종, 종과 주인의 관계로 새롭게 정립되는 겁니다. 이제부터 동생인 네가 주인이 되고 형은 네가 종이 되는 그 관계를 축복이라 해요. 축복이라 하는 것은 네 것 빼앗아서 이쪽에 주는 거예요. 물리학에 보면 에너지 보존법칙이라고 있는데 에너지보전법칙은 형태는 달라져도 에너지총량은 변하지 않는다는 법칙입니다. 축복보존법칙이에요. 축복을 또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축복을 주려면 이것을 빼앗아서 줘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축복과 저주는 따로 따로 제 갈 가는 것이 아니고 축복과 저주는 서로 새로운 관계로 엮어지는 겁니다. “네가 받을 축복은 내가 가져가니까 미안하다.” 이쪽에서는 “내가 받을 축복을 빼앗아갔으니 나는 저주만 남았네?” 이런 관계로서 천국과 지옥을 하나님께서 구성해 놓은 겁니다. 세상 이방민족에서 축복은 뭐냐 하면 축복 따로 줘서 축복받은 인생 살고 저주 따로 줘서 저주받은 인생사는 식인데 이게 아니고 천국과 지옥은 영원히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있어서 이쪽에서는 그냥 하나님의 복을 다 받아 챙기고 이쪽은 복이 없는 상태, 저주의 상태를 그냥 유지해야 돼요.
왜 지옥에 간 사람이 빠져나오지를 못하는가 하면, 지옥에 간 사람이 한 10년 복역하고 나온다면 천국 간 사람도 한 10년 살고 나와야 되는 그 문제가 있어요.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은 지옥도 영원히 살아야 돼요. 일종의 시소게임인데요, 시소의 특징이 뭐냐면 절대로 혼자서는 탈수가 없다는 겁니다. 두 사람이 마주보면서 타야 돼요. 한쪽이 바닥을 치면 한쪽은 공중으로 떠야 돼요. 하나님께서는 천국을 만들기 위해서 저주받을 대상을 만들어야 돼요. 저주받을 대상을 만들기 위해서 저주받을 사람은 죄, 있는 축복도 빼앗아가도록 죄를 지어야 되고 그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예수를 보냈고 예수님은 저주받을 자에게 살해를 당해야 되고 당한 분이 승천을 함으로서 비로소 천국이 성립되는 겁니다.
부활승천 함으로써 주님이 가신 그곳이 바로 천국이에요. 천국은 우리가 기대하는 곳이 천국이 아니고 예수님 가 계신 곳이 천국이에요. 그래서 천국 가려면 이 땅에서 예수님 저주받을 때 그 저주를 함께 받고 그 받은 저주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부활될 때 그것이 바로 이 땅에서 천국 가는 겁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보고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세상이 너를 미워할 때 그것을 도리어 기뻐해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은 너희가 미워서가 아니라 나를 미워해서 그런 것이다.” 세상이 주님을 미워해 줘야 세상이 지옥이 되고 저주가 되는 겁니다.
무슨 잘못을 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지옥가야 하기에 잘못을 저질러야 되고 그 극단적인 잘못의 최 정점은 예수님을 살해해야 되고 싫어해야 되고 미워해야 돼요. 예수님을 미워하고 싫어하려면 그 전에 먼저 예수님께서 네 것, 네 가정, 네 재산, 네 통장, 네 부동산, 네 교회, 네 자존심, 네 체면, 이것을 계속해서 주님께서 공격을 해 줘야 돼요. 아내가 신천지 빠진 것이 큰일이 아닙니다. 아직도 내 가정에 죽치고 앉아서 이것을 사수하겠다는 여기서부터 내가 구원을 받아야 돼요. 주께서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마누라 신천지 보낸 겁니다.
소위 내 것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없다는 것, 없어요, 내 것이라는 것이. 나는 주님의 구원을 위해서 축복과 천국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하늘나라 정보를 담는 그릇에 불과하지 껍데기는 날마다 옅어지고 날라 가버려야 돼요. 세월 따라서 낙엽처럼 날라 가버려야 돼요. 하나님의 방법이 뭐냐 하면, 시기 나게 해서 구원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정말 우리를 극단적으로 몰아붙이는 방식입니다. 우리 인간의 자존심과 인격성을 완전히 몰아붙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전에 와우 아파트라고 멀쩡한 아파트인데 하루아침에 그래도 무너졌거든요. 만일 어느 새 아파트가 그대로 무너지게 되면 정말 재미있는 일이에요. 사람들은 신선하고 짜릿한 일이 있을 때 재미를 느껴요. 내가 살지는 않아도 남이 사는 아파트가 그대로 꼬꾸라지듯이 퍽 무너지면 참 신나고 재미지지요. 왜, 자기 아파트는 멀쩡하니까. 그런데 지나가는 비행기 소음에 의해서 자기 아파트 창틀에 균열이라도 생길라 치면 고소한다, 배상 물린다, 난리치지요. 더 놀라운 사실은 자기 집 창틀에 균열이 생기면 창틀에 금이 안간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시기가 나요. 미워죽겠죠. 내 창틀에 금이 갔는데 네 창틀에는 금이 안 갔느냐는 말이지요. 창틀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무너졌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왜, 내 집에 창틀에 균열이 갔잖아요.
제가 아는 친척이 있는데 결혼을 해놓고도 6년째 임신이 안돼요. 부부사이 좋은데도 임신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 판국에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는 장윤정이 임신해 버리니까 그게 시기가 나는 거예요. 6년째 임신이 안 되는데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임신을 했다니! 시기 나게 만드는 겁니다. 뭐가 시기가 나는가? 나는 구원 받으려고 그렇게도 애를 써도 구원이 안 되는데 아무 행한 것도 없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는 말입니다. 시기 나는 것을 빼버리면 구원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가 아버지의 돈을 미리 당겨서 충동적으로 허랑방탕 돈을 다 써버렸습니다. 기생하고 놀아나면서 다 탕진했지요. 돈 떨어지니 여자도 떨어지고 친구도 다 떨어졌어요. 오도 갈 데가 없어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가 더 맛있어 보일지경이에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 먹고 있는 자기신세가 기가 막히거든요. 차라리 이렇게 사니니 욕을 얻어먹더라도 아버지께 꿇어 엎드려서 빌고 아들대접 못 받아도 종으로 취직이라도 해서 빌어먹어야겠다 싶어서 갔더니 아버지가 아들이 오기 전부터 이미 아들 오면 잡으려고 소까지 잡아놓고 시내에 가서 가락지 만들어놓고 새로 양복 다 맞춰놓고 이제나 저제나 마을버스 들어오는 거기만 매일 쳐다보고 있었던 거예요.
어느 날 보니 아들이 버스에서 내리는데 행색이 말도 아니지요. 아들을 보자마자 그대로 달려가서 아들을 얼싸안을 때 아들이 “아버지,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저는 아들 아닙니다.” 하고 용서해달라고 빌 때 아버지가 아들을 일으켜서 반겼지요. 그거 천국입니까? 그거 천국 아닙니다. 천국은 지금부터에요. 요새 소고기가 얼마나 비쌉니까? 소 잡고 반지 맞춰놓은 것 끼워주고 맞춰놓은 양복 입혀서 동네방네 아들 다시 찾았다고 소문낼 때 천국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큰 아들이 시기를 시작하는 거예요.
“나는 아버지 모신다고 집 따로 마련해 놓고 요양사 붙여서 봉사하고 아침저녁으로 돌아보고 약 챙겨 드리고 농사도 도맡아서 다 짓고 온갖 수고를 다 했는데 아버지가 왜 저한테는 그렇게 안 해줍니까?” 정답을 미리 말씀드릴게요. “너는 어린양의 죽음을 모른다.” 모든 구원에는 반드시 십자가를 경유해야 돼요. 얼마나 못났으면 따로 어떤 분이 오셔야 되겠습니까? 그저 우리는 소유, 축복, 천국도 내 소유. 그런데 소유하는 본인 자체가 늘 옅어지고 날라 가고 안개처럼, 중국 발 스모그처럼 세월 따라 뭉개지고 부서지고 해체되는 그 와중인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일마다 때마다 나의 것, 나의 것, 나의 것을 사수하고 지키고, 하나님도 내 속에 들어오라는 거예요. 그게 말이 됩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 속에 들어갑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깨져야지요. 하나님에 의해서 깨지는 그것이 구원입니다. 깰 때 그냥 깨지는 것이 아니고 어린양의 십자가 피로 깨는 거예요. 너 같은 인간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식으로 깨시는 겁니다. 우리의 구원의 자리는 내 안의 예수가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에요. 십자가 안에서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 때 그것이 구원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분명히 나옵니다. 도대체 한국교회는 뭘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어요. 신천지가 이단인데 신천지가 이단인 이유가 하나밖에 없어요.
다른 교회보다 타락했다는 그런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이야기를 안 해요. “여러분, 이렇게 하시면 구원됩니다. 우리 단체에 오시면 구원됩니다.” 이게 바로 구원 못 받은 거예요. 그 안에서 자기는 여전히 잘난 존재로 살아 있어요. 그게 문제에요. 기존교회에서 신천지 가는 것도 문제지만 신천지에서 도로 기존교회 가는 것도 더 큰 문제에요. 둘 다 구원이 안 된 상태에요. “여러분, 축복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이것 자체가 마귀 말입니다. 축복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인이고 나는 그 똘마니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만 증거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날마다 늙어죽어 해체되어도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돼요. 인간은 얼마나 자기에게 끈질긴지. 울산의 황전도사님 손자 이름이 민준이죠. 지난번에 “왜 그래?” 하는 예화를 든 적이 있지요. 지난 금요일도 제가 차를 타고 오는 동안에 민준이 이야기를 해요. 황전도사님이 어린 손자한테 기도를 가르치는 거예요. 36개월 된 아이인데 그걸 감안하고 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민준아! 나는 죄인이다, 해라.” 36개월이 된 아이인데. “나는 죄인이다. 죄인인데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습니다, 라고 기도하는 거야.”
이렇게 시켰습니다. 그러니 애가 시키는 대로 따라서 해야지요. 애들을 할머니가 돌봐주는데 말 안 들으면 안 되잖아요. 알아서 자기 살 궁리 챙기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는데 몇 번을 반복해서 가르쳤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죄인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밥도 먹고 …….”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 이 밥 안 먹으면 축구 못해요. 농구도 못해요. 야구도 못해요. 밥 많이 먹고 축구도 하고 야구도 하고 농구도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맨 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담아서 기도를 하게 되는 거예요. 아, 지독한 자기중심주의, 36개월짜리! 지독한 자기중심주의!
이렇게 커서 어른이 되는 겁니다. 뇌신경학자들이 말하기를 인간의 뇌간 속에는 파충류뇌관과 같아서 아주 충동적인 것 있고 그 다음에는 위에 올라가면 먹고 마시는 생존욕구들이 있고 그 다음에 인간과 다른 동물과의 차이점으로 대뇌피질이 있는 전두엽이 발달하게 되면 이성과 양심이나 소망이 나타난다는 건데 그게 27세가 되어야 완성이 된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투표권도 27세가 되면 줘야 돼요. 그 전까지는 짐승이라, 사람이 아니고. 사람이 책임 있는 자아가 형성되려면 27세가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 전까지는 그냥 눈에 보이는 충동대로 사는 거예요.
오토바이타고 달리고, 드럼 치면 같이 치고, 도박에 푹 빠지고. 그런데 27살이 넘었는데도 왜 도박에 빠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양심이든 뭐든 인간은 그 밑바닥에 동물적인 속성이 깔렸는데 다만 그것이 포장되어 있는 겁니다. 크리스마스 때 먹는 케익 같아요. 쪼개보면 안에는 그냥 카스테라인데 그 위에 눈 덮인 것처럼 생크림으로 덮고 거기에 사슴썰매 장식해도 사실은 대부분이 그냥 카스테라에요. 그처럼 우리는 파충류, 도롱뇽, 건드리면 우왁, 하고 터지는 뇌에 불과한데 점잖을 떨면서 주여, 삼창을 불러가면서 “주여, 착한 일을 하겠습니다. 빛과 소금이 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자기 동물성을 감추는 위장술에 지나지 않아요.
이게 바로 에서입니다. 이게 바로 저주받을 사람들이에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그 역사와 과정을 반복시키십니다. 어떻게 반복시키는가? “제발 죄를 지어라. 제발 죄를 짓고…….” 그 죄를 짓는 이유의 모든 것이 나 좋으라고 죄를 지어요. 예를 들어서 사람이 간음을 한다는 것은 결혼을 우습게 보는 거지요. 사람이 땅을 생각한다는 것은 하늘을 우습게 보는 거예요. “그래, 우습게 봐라.” 인간은 자기 빼놓고는 다 우습게 봐요. 남의 아파트가 무너져도 아주 신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기 손톱 아프면 온 우주가 다 싫어요. 왜, 나를 힘들게 한다고.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을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의 재주는 없습니다. 여기 요한일서 2장 15, 16절을 제가 잊을 수가 없는데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사도요한이 이 말씀을 하는 것이 너무 무책임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민준이 보고 하는 말이 “너는 죄인이다. 예수님의 피로 …….” 무슨 뜻인지 몰라요.
축구, 야구 좋아하지 말 반복하지만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불가능성이에요. 사도요한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할 때 뭘 어떻게 하라고! 우리 몸 자체가 정욕이고 세상에서 만드는데 뭘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너무나 무책임한 말을 사도가 하는 거예요. 지킬 수도 없는 말을 사도가 하고 있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불가능성 때문에 그런 거예요.
우리는 아무리 좋은 소리 듣고 아무리 복음을 들어도 그 복음을 내 것이 되게 하는 역량은 우리한테는 소멸되어 있어요. 없는 겁니다. “그러면 결국 당신 말은 구원의 방법이 없다는 말이잖아.” 그래요, 없습니다. 실컷 설교해 놓고 구원되는 방법이 없어요. 구원되는 방법도 없는데 설교는 왜 하는가? 저는 사후적으로 소급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님의 나라가 신이 날 정도로 좋다면 그 사람은 당신이 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당신에게 진짜 손댔기에, 주께서 진짜 말씀대로 당신을 찾아왔기 때문에 당신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확인할 수가 있는 거예요.
구원 안 되는 존재가 구원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이걸 제가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제 소관도 아니고 여러분 소관도 아니고 누구소관도 아니고 주께서 찾아오시면 어떤 결과가 있는데 그 결과가 뭐냐, 이 세상의 어떤 좋은 것이 있더라도, 돈이 많고 누가 어떻게 잘 되었다 할지라도 하늘나라 어린양보다 더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느낄 때 그 사람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걸 소개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이야기가 어디 있느냐?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20절에 보면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21절에 보면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여기는 벌렸노라, 라고 되어 있지만 이사야 65장대로 하게 되면 더 적극적으로 나옵니다.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라고 되어 있어요. 이생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밖에 모르는 인간들을 하나님께서 찾아가서 불러내시는 이유는 아버지가 탕자를 위하여 이미 가락지 끼우고 새 옷 입히고 소 잡아서 잔치를 하는 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그들을 용서할 수 있는 근거를 예수님 쪽에서 마련했다는 그 정보를 그대로 담아내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그게 이스라엘이거든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은 안에 뭐가 들어 있다? 암실이 있다. 그 어두운 곳만이 이스라엘에게는 유일하게 밝은 곳이에요. 하나님이 피워놓은 등불이 유일하게 비추이는 곳입니다. 이 세상에서 오는 빛 말고 어두움 속에 주께서 밝히는 빛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구원받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뭔가 전달자, 어떤 전달자, 날마다 십자가 복음으로만 천국 간다는 그 복음을 전달하는 전달자로서 새롭게 이 땅에 만들어지고 태어난 겁니다. 그게 바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세상에서 사시기 바랍니다.
사시면서 바빠서 힘들겠지만 여건 되는대로 드라마란 드라마는 다 보시기 바랍니다. 오로라도보고 다 보시기 바랍니다. 보시면서 왜 세상 사람은 저기에 빠지는가, 왜 저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가, 기껏 인생사는 행복이 재벌 2세하고 결혼하는 저 정도인가, 옛날에는 우리도 그것이 그렇게도 시기 났었는데 지금은 어린양 때문에 십자가 때문에 거기서 벗어난 이것이 정말 더 좋아졌을 때 그들은 바로 우리의 지옥 갈 종이 되고 우리는 하늘나라 주인이 되는 겁니다. 주인과 종의 사이, 하나는 축복 받았고 하나는 저주받은 그런 관계에 놓였을 때, 주여, 이런 관계를 만드신 모든 것은 저에게 십자가만 앞장세워서 “이 세속적인 인간아!” 하고 날마다 책망하면서 다시 우리를 해체시켜 주시는, 나라는 것이 없음을 깨닫고 그저 주님의 것으로서 주님의 귀한 것 보관하라고 지금도 격려하라고 위로하시는, “내 것 말고 내가 준 것 있잖아. 그거 잘 지키란 말이다, 이 바보야.” “알겠습니다. 주여!” 이런 식으로 주께서 주신 것이 고귀한 것을 아는 그 사람이 바로 완성된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날마다 거울 보면 딴 얼굴 되어 있습니다. 왜 그리 늙어 가는지, 늙어서 어디로 가는지 때로는 초조하기도 하고 불안하지만 그렇게 늙어야 한다는 것, 그럴수록 주님께서 이런 허무한 우리를 구원해주신 주님께 더욱 감사하라고, 십자가에 먼저 죽으신 의미가 그것이라고 알려주시니 이 사랑의 길이와 넓이와 깊이를 날마다 더욱더 알려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