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없는 믿음
2013년 11월 17일 본문 말씀: 로마서 10:9-13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0: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구원’을 생각하는 것은 현 상황이 더 이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게 됩니다. 여기 말고 딴데 가서 살겠다는 의도로 구원을 염두에 두게 됩니다. 구약의 하나님께서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은 곧 출-애굽입니다. 애굽이라는 나라에서 빠져 나오게 된 사건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 신약시대에는 더 이상 애굽이라는 것을 상정할 수가 없는데 그것은 이 세상 자체가 곧 애굽이기 때문입니다. 애굽에 살면서 애굽 외의 세계를 따로 생각해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곳마저 애굽에서 지어낸 가상 도피처이기 때문입니다. 애굽을 벗어나봤자 기존의 애굽을 닮은 나라를 하나 더 만든 것 밖에 안됩니다.
따라서 구약의 출-애굽은 외부의 죽음(어린양의 죽음)과 장자의 소유권은 더 이상 전에 살던 그 집안으로 되돌아가지 않습니다. 이는 스스로 도 닦는다고 해서 애굽에서 벗어나지를 않는다는 말입니다. 도리어 인간이 구원을 시도하면 할수록 그 시도로 인해 ‘애굽 밖’의 세계는 오해의 산물이 될 뿐입니다.
평소에 익히 알던 그 세계의 범위만 계속 한정없이 커나가게 됩니다. 이런 마당에 ‘주의 이름’을 불러봤자 그것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멸망케 하신 그 주님이 아니십니다. 이미 주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습니다. 만약에 참으로 천국에 인원수 채우는 것이 하나님의 급선무였다면 구태여 이스라엘을 내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잘 다독거리고 잘 가르치거나 용납해서 이스라엘을 다 구원하시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시고 새로운 원칙을 제시해서 그들로 하여금 저항토록 하십니다. 로마서 2:28-29에 보면,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주장합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기로 선택된 집단이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이미 구원되었기에 자신들의 육신에 할례라는 표시를 했는데 이것도 하나님께서 지시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마음에 할례를 행해야 진짜 백성이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의 문제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에 할례 행하기’와 ‘주의 이름’과 관련성에 대해서는 그들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냥 ‘마음에 할례’ 행하면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더라도 구원이 되는 구조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이게 문제거리였습니다.
마태복음 26:56에 보면,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버리더라도 구원에 실패하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눈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그 집단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그 하나님과 자신들이 그동안 동행한 예수님과 연관이 있고 관련성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고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연결된 자는 없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여호와란 실은 안개 같은 인간 존재가 줄곧 뿌옇게 뿌려놓은 안개의 세상일 뿐입니다.
즉 그들은 여호와 세계란 환타지에 빠져 있었고 그 환타지는 곧 자신들이 뿜어내어놓은 것들이었습니다. 이 안개 속에서 예수님께서 참된 계시를 숨겨놓았습니다. 마태복음 11:25-2 7에 보면,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아버지와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알려주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나님에 대해서 모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누구든지 주를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구원에 실패하는지 그 이유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뭔가 ‘주의 이름 부르기’말고 더 준비물이 필요해서 구원에 탈락된 겁니까? 예수님께서 사도를 통해서 두 말하시는 겁니까?
바로 그 아유는, 사람들이 조성해놓은 뿌연 가상 세계에서는 십자가를 내가 알아서 그것으로 우리 자신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들이 유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작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알아채는’ 자만이 구원될 수 있다가 아니라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하여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자기 사람들을 이용하고 활용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즉 인간들은 자신이 안개에 불과한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영원히 버림받지 않는 존재로 인식합니다. 하지만 이미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 곁에서 인간을 추방시켰습니다. 이 원칙은 여전히 취소되지 않고 적용됩니다. 그 어떤 인간도 구원될 권리나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만 최종 아끼기는 존재이기에 결국 하나님을 이용하려다가 마음대로 안되면 최종 선택에서 자신을 선택하기 마련입니다. 민수기 32장에서, 요단강 동편에 도착한 갓과 르우벤과 므낫세 50% 사람들은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 목초지가 좋은 그 쪽에서 안주하고 싶어합니다. 곧 노선이탈입니다.
이는 평소에 광야에서 하나님과 동행해도 하나님에게 최종 마음을 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자기 가족과 자신들의 재산 보호에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이용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동행해온 것입니다. 마치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일으켜서 인간들편에서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 당연하게 본성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버리십니다. 그 틈 사이에서 참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간주하시는 분을 3일만에 살려내십니다.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셨다는 것은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만 구원이 주어진다는 약속을 분명히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겁니다. 성도는 ‘예수 안’에서 자신이 자신을 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자랑하지도 말고 낙심하지도 맙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보여줄 뿐입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불러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없게 만드는 그 말씀의 능력’이 성도를 구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인개 같은 세상에서 계속 부딪치는 가운데 십자가를 만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로마서 10:9-13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을 받으라는 것은 구약에서는 애굽에서 나오라는 이야기고 애굽에서 나오라는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애굽이라는 곳이 어떤 동네인줄을 알아야 거기서 살 것인지, 아니면 거기서 탈출할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애굽은 현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인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 것이냐 말것이냐를 선택할 처지에 있지 않습니다. 이 안에서 어떻게 잘 살것인가가 우리의 관심사지 이 세상을 어떻게 박차고 나갈 것인가, 이 세상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그것은 우리 능력을 벗어난 이야기입니다. 지리산에 들어간다고 해서 세상 벗어난 것도 아니고 절이나 기도원에 들어간다고 해도 거기도 또한 애굽이니까.
애굽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되어 있지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데 구원에 실패하는 사람은 왜 그리 많아요? 누구든지 구원받는다고 해놓고는 아무나 구원받는 것이 아닌 셈이 되어버렸다는 말이지요. 누구든지 구원받으라고 해놓았지만 처음에는 주의 이름을 불러요. 나중에 보면 지옥에 가있더라는 말이지요. 뭔가 주의 이름 부르는 것 말고 따로 준비할 것이 있었습니까?
요새 성당에서 누구나 초대한다고 해놓고는 막상 가보면 “영세 받아야 됩니다.” 하는데 이게 무슨 장난입니까? 누구든지 오라고 해놓고는 나중에 영세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하고. 오늘 13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 얻는다고 해 놓았는데 그러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되지 영세는 왜 받아야 되고 십일조는 왜 내야 되는 거예요? 원서 내면 다 합격시켜 준다고 해놓고는 취업보증금 받아먹는 다단계하고 똑같아요. 교회가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요. 교회는 무슨 조건이 붙어요.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고, 이런 것이 붙지만 성경을 보게 되면 조건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가 성경에서 붙이지 않는 조건을 갖다 붙이는 겁니까? 중간에 커미션 챙길 일이 있습니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는 이 작업에 있어서 누가 구원에 실패했는가, 왜 구원에 실패했는가를 통해서 이 점을 파악해야 되는 겁니다. 왜 실패했는가? 내가 만약에 구원을 받고자 할 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 구원이라 하는 것은 사실은 애굽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에 불과한 거예요.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모르는 상태에서 구원을 받겠다고 예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이미 구원자체가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불러봐야 그 예수님과 내가 구원받겠다는 그것하고 부속품이 안 맞아요. 하나님께서 구원을 받으라고 하는 것은, 9절에 보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을 해야 되는데 사람은 이미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는 주가 돼요. 주가 이미 따로 있는데 무슨 주를 찾아요? 내가 누구에게 예속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나는 내 자유로 사는데?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했으면 우리 생각에는 ‘참 천국도 어지간히 갈 사람도 없는 모양이다. 주님이 아쉬워서 바겐세일 들어가는 모양이다.’ 그렇게도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멸망시켜 놓고는 신약에 와서는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을 보니까 참 우리들 생각하고는 너무 다른 게……. 천국에 사람 하나가 아쉬울 것 같으면 구약의 그 실패한 그것도 용납을 해 줘야 돼요. 너희는 멸망한다고 하면서 천국의 본 자손이 아니라고 다 쫓아내놓고 너무 텅텅 비니까, 천국은 만들어놓았는데 하나님 혼자 있으려니 너무 심심하니까 ‘내가 너무 심했구나. 누구든지 부르자.’ 이런 식으로 나온 것일까요?
누구든지 예수 이름만 부르면 구원받기에 누구나 다 구원받는다고 나온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을 천국에 오지 못하게 저지하고 막으시는 취지가 전혀 살아나지를 않습니다. 사람이 아쉬웠다면 우리 선배들을 그렇게 혹독하게 내칠 리가 없어요.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을 그렇게 저주해놓고 신약에 와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받는다고 해놓고 막상 믿게 되면 “너도 이스라엘하고 똑같아.”라고 나중에 이스라엘을 제거하고 처단해 버리면 우리는 뭐가 돼버려요? 우리가 옛날 이스라엘 꼴이 되잖아요. 구원받고자 시도하다가 결국 실패로 끝나는 말이지요.
그래서 이 말씀을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가까이 있었던 제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태도 같은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요. 마태복음 26장 56절에 보면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 하니라.”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간 이유가 그들은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데 그 여호와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 구조에 추가적으로 예수를 믿어볼까 하다가 그 예수로 인하여 자기신상에 손해가 되니까 예수를 버리고 도망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제자들은 자기가 알고 있던 하나님세계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를 못한 겁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지를 못한 거예요. 마태복음 26장 56절을 읽어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면서 ‘나 지옥 갈 거야.’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왜? 이미 여호와 하나님을 잘 믿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아들 예수를 보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게 잘못이었어요. 그게 치명적인 오류였어요. 오늘날 한국교회처럼. 성경해석을 구약부터 신약까지 몇 독을 해도 이렇게 보게 되면 성경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발견되어야 옳은 해석인데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이라.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로 믿을 이유가 없어요. 덤인가요? 하나에 하나 더해주는 세일합니까? 시편보고 은혜 받았다고 해놓고 가만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빠져버렸어요. 모든 인간에게 나올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나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그게 틀렸다는 거예요. 하나님 믿으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은 곧잘 나오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지를 않아요. 예수님이 나오지 않는 이유가 구태여 예수님이 필요치 않아서 그래요. 그저 예수 믿는 것은 덤으로 하나 더 끼워 넣는 식으로 더 자세히 안다는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말입니다.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이것이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한 것이라는 말이거든요. 그래서 근본적으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는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제자들의 그 실패한 그 자리에 우리가 가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잘못은 뭐냐 하면, 예수님을 이용해서 구원을 받고자 시도한 것이 그들의 잘못이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해석해서 그 해석된 십자가가 나를 구원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제자들과 똑같이 실패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십자가를 이해하고 성경을 해석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해석되어지는 겁니다.
내가 십자가를 알아 챙겨서, 소유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십자가가 스스로 우리를 채용해서 우리를 다루고 갖고 노시는 거예요. 이러니까 너는 십자가 아니면 구원 못 받아, 라는 것을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소급적으로 이야기해 주는 겁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뭐든지 이용할 것을 다 이용해요. 누구든지 구원을 받으려고 들면서 “야, 참,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 보내셨구나.” 이것은 대학 선교단체 간사들이 다 이야기하고 있고 그들뿐만이 아니고 한국교회 전체가, 외국교회까지도 다 그거예요.
“누구든지 초청하고 누구든지 환영합니다.” 막상 들어가 보면 “영세 받으세요.” “영세 안 받으면요?” “영세 안 받으면 구원 못 받습니다.” 신부 지가 뭔데? 교회 가면 “6개월 뒤에 학습 받으시고 1년 뒤에 세례 받으세요.” “세례 안 받으면?” “세례 안 받으면 구원 못 받습니다.” 목사가, 당회장이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네가 뭔데? 결국 성당과 교회라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가 스스로 죽어서 좋은 나라 가려고 하는 그 욕심을 노리고 장사하는 동네에요. 우리가 도와줄 테니 우리한테 헌금내세요, 라면서 장사하는 동네입니다. ‘당신은 구원을 받고 싶어 하고 우리는 구원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공하게 되면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에게 충성봉사하시고 헌금도 내시고 다른 사람에게도 계속 봉사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자금줄 대 주시고 그러면 당신은 구원 받는다.’
이런 짓들 전부가 구원받지 못한 옛날 이스라엘의 그 행세의 되풀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로마서 2장 끝에 보면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천국을 채우기 위해서 자기백성 이스라엘을 택했다 그 말이지요. 택했을 때 그 때는 ‘누구든지’ 정도가 아닙니다. 아예 “너를 택하여 세웠나니 너는 내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백성이기에 티를 내는데 그 티가 뭐냐, 할례를 행하라고 했습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 입장에서 봤을 때 이미 우리는 합격 된 것이고 이제 합격된 그 표시만 내 육신에 하면 된다, 그렇게 편하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할례를 행한 겁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라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로마서 2장에서 그것이 문제라는 거예요. 사실은 사도바울 생각이 아니고 예수님 생각이지만. 그게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할례 받았습니다.’ 하는 이 일과 예수님이 오셔야 될 일이 연결이 안 되는 겁니다. “내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시키는 대로 할례 받았다. 뭐가 문젠데? 하라고 해서 했고 안식일 지키라고 해서 지켰다. 하늘나라 가기 위해서 뭘 더 준비해야 되는데? 할 것 다 했는데.”
그럴 때 예수님께서 “나를 믿으라.”고 했거든요. “왜 당신을 믿어야 되는데?” 그러면 주님께서 “너희 아비는 마귀고 날 때부터 죄를 지었다.”고 나오거든요. 요한복음 8장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하는 말이 “우리가 어릴 때부터 아브라함 자손이고 우리는 시키는 대로 따 했는데 할례도 했는데 뭐가 문제냐?” “할례를 마음에 해야지.” 마음에 무슨 수로 할례를 합니까? 그러면 마음에 할례를 하면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잖아요. 마음에 할례 행했으면 할례 행한 것 가지고 예수 믿는 것을 대체하면 된다는 그 말이지요.
지금 제가 문제를 복잡하게 끌어가는 것은 뭐냐 하면, 이미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다는 사실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데 그들을 하나님이 내쳤거든요. 내칠 때 그것을 남의 이야기로 보지 말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다 했고 여호와 믿었고 할례도 행했고 다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너희들은 지옥 갈 자”라고 해서 다 내쳤거든요. 내 칠 때 그들이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보자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오해가 오늘날 예수 믿고 구원받겠다는 우리의 오해와 동일한 선상에, 같은 찜질방에 같이 있는 거예요.
그들은 구원이란 개념을 몰랐어요. 구원이라는 개념은 내가 이 땅에서 고생스럽게 살지만 죽어서는 하나님 계시는 곳에 가겠다는 것을 구원으로 본 거예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는 말이 너희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너희들이 조작하고 지어낸 하나의 망상에 불과한 거예요. 교회 와서 하나님 믿고 거기에 덤으로 예수까지 믿어서 구원받겠다, 그것은 판타지고 망상에 불과한 거예요. 그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잘못한 것을 되풀이하는 것밖에 안돼요. 어제 아침인가, 서울의 아이파크 아파트를 헬기가 들이받았잖아요.
안개가 안 끼었다면 사고가 났겠습니까? 노련한 비행사인데 안개가 끼니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성경은 우리를 안개라고 합니다. 안개가 피워내는 것은 안개에요. 그러면 성당도 안개고 교회도 안개고 다 안개라는 말이지요. 안개이기에 그들은 부딪힐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교회 다녀서 천국 가는 줄 알았더니 가보니까 지옥이더라는 말이지요. 많이 당황했을 거예요. 성당 다녔더니 지옥 가더라는 말이지요. 많이 당황한 거예요. 이게 본인이 안개라는 사실을 모르고 본인이 성경을 해석하고 십자가도 알고 은혜도 알고 뭘 안다는 겁니다.
사람이 뭔가 구원을 시도하는 그 자체가 스스로 안개를 피워내는 거예요.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그것이 내 구원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보통 똑똑한 사람이 아니에요.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 만나기 전까지는 천하에 똑똑한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고 최고의 학문을 다 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을 만나 보니까 헛똑똑이에요. 자기가 몸부림 치고 노력한 이 모든 것들이 오히려 자기의 구원을 방해했고 하나님을 핍박하는 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마태복음 11장 25절에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안개밖에 없는 세계에서 뭔가 실체가 드러나는 거예요. 안개로 만든 세계, 애굽에서 실체가 드러나는데 26, 27절에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 하는 것은 “너희들이 알고 있는 아버지는 하나님이 아니고 나만이 진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고 나 빼놓고는 전부 다 하나님과 연결이 안 되어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들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나라라고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 그 구조는 전부 다 판타지고 망상에 불과한 거예요. 그 망상에다 예수님을 억지로 끼워 넣으니까 예수님은 튕겨 나올 수밖에 없고 서로 배척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야기한 것은 그거예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네가 아니고 바로 나라는 거예요.
“하나님, 저 구원받고 싶습니다.”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나는 너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어요. 예수님만 원해요. 예수님만 아들이고 다른 사람은 사람 아닙니다. 사람도 아닌 게 감히 구원을 받겠다고 한다면 이것은 어디에 어긋나느냐 하면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 생명나무에서 추방시켰잖아요. 추방시켰다는 그 사실을 하나님께서 철회한 것 밖에 안 되거든요. 추방시켜 놓았으면 이제 추방된 채로 흙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에요. 흙으로 돌아갈 주제에 감히 손들고 “저 구원받고 싶습니다,”라고 나설 때 하나님이 “구원받고 싶다고요? 내 구원해주지.” 이런 하나님 같으면 처음부터 하나님의 원칙과 스스로 위반돼요.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주받은 이 땅에서 예수님에 근거해서 새로운 인간 만들고 새로 만들어진 인간만 건져 올리는 거예요. 건져 내면서 하는 말이 “누구든지 주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에요.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이 아니고 누구든지 주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 그 주가 어떤 경로를 겪어야 돼요. 그냥 주가 아니고, 성경 속에 예수가 있다고 내 속에 예수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예수님은 우리를 끌고 와서 어떤 경로를 거치는데 그 경로가 뭐냐, 우리가 바닥을 쳐야 됩니다. 우리의 바닥을 쳐야 돼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나의 원천, 나의 원래 있었던 그 자리로 되돌아가야 돼요. 그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버려야 된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을 버린 자만이 구원 받습니다.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서는 구원 못 받습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뜻에 의해서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마태복음 26장 56절 말씀대로 예수를 버리고 그들은 도망했습니다. 걸음아 나 살려라, 예수가 중요하지 않고 내가 중요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정하면서 도망쳤습니다. 이와 같은 제자들의 행세는 민수기 32장에도 똑같이 나옵니다.
민수기 3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지나서 약속의 땅에 거의 도달했습니다. 요단강 동편까지 도착했어요. 가보니 너무 풀들이 잘 자랐어요. 갓과 르우벤 지파와 므낫세 지파 중 절반의 사람들이 모세를 보고 건의했습니다. “모세님, 저희는 약속의 땅에 안가겠습니다. 이곳 초지가 너무 좋으니 요단강 건너지 않고 여기 그만 머무르겠습니다.” 한 거예요. 그러면 그들이 여호와의 만나를 먹어가면서 물도 마셔가면서, 여호와의 인도함을 받고 말씀으로 이끌림을 받으면서 늘 머릿속에 생각한 것은 뭐냐, 내 가족과 재산과 가축은 어떤 식으로 이 땅에서 밥 먹고 살겠는가를 늘 생각한 겁니다.
그것을 늘 생각하면서 그것을 하나님께서 채워준다면 저는 고맙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사고방식이 계속해서 그의 바탕을 차지하면서 이끌고 온 거예요. 그게 요단강을 앞두고 완전히 들통이 난 겁니다. 옆길로 샌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라는 그 의미가 뭐냐 그 말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 아니! 십자가를 위해서? 아니! 나를 위해서! 십자가도 나를 위해서, 다 밥 빌어먹고 살기 위한 나를 위해서 그런 거예요. 그게 바로 나 스스로 안개기 때문에 안개에서 안개가 피어나서 판타지 같은 나만을 위한 세상으로 새롭게 조립하고 조성한 겁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스스로 애굽을 만들어낸 거예요. 그 안개에서 우리가 무슨 수로 헤쳐 나갑니까? 다 나 좋으라고 한 일인데, 나 좋으라고 한 일을 내가 스스로 포기한다? 이것은 미친 짓이고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예수 믿는 것도 나 좋으라고 믿는 것이지 예수 좋으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마음속에 갖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다가 불리하니까 예수를 버리고 도망 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제자들의 그러한 행동은 우리는 그러지 말자, 가 아닙니다. 반드시 그 코스로 들어가야 된다는 거예요. 그 코스로 들어가야 비로소 십자가가 보인다는 거예요.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알고 있던 십자가는 차안에 액세서리로 달린 그 십자가, 아무짝도 소용없는, 신자입네 하는 척하는 형상물인 우상에 지나지 않는 십자가에요. 내 쪽에서 하나님을 내쳐야 됩니다. 그런 과정이 있어야 돼요. 우리가 하나님을 내치게 되면 그 다음에 하나님은 우리를 버립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버림받아야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존재임을 알 때 그 틈바구니에서 마술사가 비둘기를 천속에서 뽑아 올리듯이 하나님은 준비된 예수 그리스도를 쏙 뽑아 올립니다.
이 진짜 하나님이 한 모든 일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 되게 하기 위해서 너희들을 보조로 다루어왔던 거예요. 그리스도를 뽑아내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세상만유의 주가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는 의도적으로 아담을 안개만 피워대는 흙이 되라고 생명나무에서 추방시킨 겁니다. 참된 인간이라 하는 것은 생명나무에서 새로 시작되어야 됩니다. 제가 토요일에 대전에서 강의마치고 오면서 KTX를 타는데 거기서 두 종류의 사람을 만나게 되었어요. 옆에 있는 나이 서른일곱정도 되어 보이는 아줌마가 있는데 늦게 결혼한 것 같아요.
애가 나이에 비해서 어린데 차 안에서 애가 떠드니까 조용히 하라고 달래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여자가 두 종류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자가 아이와 함께 있는 여자일 때는 그냥 어머니가 되지요. 그러나 혼자 있을 때는 그냥 여자에요. 아기와 함께 있는 어머니일 때 그 아기를 돌보고 달래고 어르고 먹을 것을 주면서 애쓰는 모습을 볼 때 그 여자로서의 옷차림이라든지 전혀 눈에 안 들어오고 애를 위해서 희생하는 모습만 들어와요. 여자는 아기가 있을 때 진정 여자구나. 옷차림과 관계없이 아기를 돌보는 그 모습이 그렇게도 거룩해 보이고 고상해보였다는 그 말입니다.
혼자 폼 내고 패션모델처럼 하고 있는 여자의 모습보다 그저 자기 한 몸 희생해서 없어지고 아이 돌볼 때 ‘여자는 아이만 있으면 늙지 않는구나. 그저 나이만 먹을 뿐 늙는 것은 아니고 영원히 여자구나. 돌볼 것이 있을 경우에는.’ 그것을 느꼈습니다. 동시에 뭘 느꼈느냐 하면, 하나의 성도는 괜히 폼 잡고 뽐낸다고 성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예수와 함께 있는 그 사람, 그 성도를 얼마나 귀한 존재로 보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혼자 있으면 이것은 흙이고 안개입니다. 이것은 지옥가도 마땅해요. 그런데 예수 안에 있을 때,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예수로부터 사랑을 받고 귀염을 받을 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통째로 우리를 본다는 거예요. 아까 장로님 기도하신대로 그 막달라 마리아 소문 안 좋던 그 여자, 혼자 있을 경우에는 맞아요.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여인의 온 정신은 뭐냐 하면, “예수님, 당신 때문에 내가 용서받고 구원받았어요.”라고 예수님의 발을 씻겨줄 때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이냐는 말입니다.
세상에 그것보다 더 귀한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홀로 있는 인간은 귀하지 않아요. 그러나 예수 안에서 인간은 귀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은혜를 받고 또 KTX안입니다. 그 뒤에 좌석 14AB에 앉아 있는 거기는 부부와 애 둘이 앉아서 계속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어요. 누나가 8세고 동생이 5세쯤 되었는데 버릇이 막 들까말까 한 경계선에 있는데 참 시끄러웠어요. 애가 “엄마, 화장실 가고 싶어.”라고 한 거예요. 누나가 있다가 “내가 데려다 줄게.” 그러다가 애가 “누나 입술은 분홍색이네?” 이렇게 했어요. 화장실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누나 입술이 분홍색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이미 논리에서 이탈되었어요.
그걸 보고 느낀 것은 뭐냐 하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면서 교회에서 목사가 “여러분, 세례 받으세요.” 이게 뭐냐는 말이지요. 주님만 이야기하고 십자가만 이야기하고, 우리는 바닥을 쳤다는 사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버림받은 사실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알려줘서 거기서 오직 마법의 비둘기처럼 쏙 튀어나오는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그 그리스도를 부르는 자는 구원 얻는다는 그것만 이야기해야 될 교회가 갑자기 “세례 받으세요.” 또는 “예배당 짓습니다.” 어쩌고저쩌고 다른 소리가 나온다는 것, “여러분, 믿음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준비된 대로 행하세요.”
이것은 제가 듣기에는 “누나 입술이 분홍색이네.” 이것처럼 화장실과 엉뚱한 노선인거예요. 그 엉뚱한 노선을 오늘날 성도라는 사람들마저 교회 문만 나오면 그때부터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자기자랑 하든지 아니면 낙심하든지. 자랑보다 더 나쁜 것이 낙심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실망감, 가족에 대한 배신감, 스트레스, 이게 “누나 입술은 분홍색이네.” 이것과 똑같은 소리에요. 그것은 다 쓸데없는 걱정들이에요. 우리가 피워낸 부연 안개 같은 것, 그 안개에서 안개를 만들고 그 안개에서 또 안개를 만들면 결국은 우리는 28층 아이파크 아파트에 충돌해 버립니다.
현실은 모르고 결국 자기 발에 자기가 충돌해서 자살하고 자기가 우울증 걸리고 자기가 괴로워하고. “나 이래서 못산다.” 하는데 “원래 너는 안 살아야 돼.” 우리는 안 살아도 되는 존재인데 새삼스럽게 “신이시여, 이래서는 못삽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살려고 생각하지 말고 십자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 이용해서 살려고 하지 말고 십자가가 어떤 십자가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안개 같은 세상을 마구 피워내는 것을 주께서 일부러 이용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KTX를 타고 급행 1번을 타고 와야 돼요. 급행 1번 타고 오는데 내 뒷자리에서 50부부가 부부싸움을 하는데 남자가 아내를 막 다그치면서 해요. “입 다물어.” 해요. 내용인즉 이겁니다. 15인승 차를 몰아서 한 달에 백만 원 번답니다. 그런데 자기가 아는 사람은 25인승으로 해서 170만원 번대요. 그런데 25인승 모는 자기 친구는 대형면허증도 없답니다. 하지만 15인승 모는 자기는 대형면허도 있으니까 이 면허를 빌려주면서 동업하면 될 것이고 한 거예요. 그럴 때 아내가 “당신은 그렇게 하면 불법이잖아. 그러지 마라.” 하니까 “내가 병신인가?” 하는 거예요. 제가 속으로 ‘시끄러워죽겠네. 너 병신이다, 그래.’
남자가 하는 말이 “내가 다 알아서 한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밥 안 굶긴다.” 50대 남자들이 늘 하는 소리가 이거잖아요. 밥 안 굶긴다고. 맨 날 하는 소리가 “내가 밥 안 굶긴다. 내가 다 알아서 할게.” 꼭 없는 것들이 허풍을 떨어요. “내가 바보인가?” 이런 식으로. “당신 그런 식으로 하면 그 사람한테 속아 넘어간다. 그 사람이 당신 이용하려고 하는데 그 사람은 그럼 바보인가?” “내가 등신인가, 그것도 모르게. 내가 다 안다.” 이러거든요. 가만 보니 우리 집안의 누구하고 어떻게 그리도 말씨도 똑같은지.
사람들이 24시간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 것은 자기한테 버림받아야 되는데 자꾸 마누라까지 윽박지르면서 “너는 나를 못 믿나?” 하거든요. 우리가 진짜 십자가, 바닥을 친 사람은요, 하나님한테 버림받기 이전에 내가 나를 버리세요. 내가 나한테 실망하시고 더 이상 나를 믿지 마세요. 내 믿음, 내 신앙도 믿지 마시고. 그러니까 자랑질보다 더 나쁜 짓이 뭐냐 하면 낙심하는 짓이에요. 자기한테 낙심하지 마세요. 낙심했다는 것은 뭔가 평소에 기댔다는 그 말 아닙니까? 우리가 자신에게 기댈 것이 뭐가 있어요? 우리는 하나님덕분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용할 뿐인데 우리가 독자적으로 뭘 하나 챙겼다고 우리자신이 우리한테 믿을 것이 있습니까?
사람이 예수를 안 믿게 되면, 누구든지 예수 이름을 안 믿게 되면 결국 자기 이름을 믿게 되어 있어요. 스스로 다짐을 해요. 스스로 격려하면서 “나는 나를 믿는다. 하면 된다. 하면 돼.” 뭐가 되는데요, 뭐가 될 건데? 신앙이라는 것은 결국 자기가 자기보고 장난질 치는 판타지 만들어내는 양상에 지나지 않는 그 모습에 불과한 겁니다. 사도들은 이야기합니다. 유대인, 같은 동료보고 이야기합니다. “육신에다가 할례 행하지 말고 네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식으로 할례를 행하는데요? 할례는 째는 것이고 후비는 것이고 캐내는 것입니다. 가장 우리 바닥에 남아 있는 그것까지 홀라당 캐고 잘라내는 거예요. 그 잘라내는 그 마지막 쓰레기가 뭐냐 하면 바로 ‘나’입니다. 나.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그냥 다른 분이 와 계십니다, 다른 분이. 나는 그냥 그릇, 접시만 제공했을 뿐이고 그 접시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수님만 좋아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만 좋아하니까, 예수님만 인간으로 보니까 예수 안에 있을 때, 그리고 그 예수님한테 사랑을 받고 심판을 면제당할 때, “너 지옥 안가도 돼.”라는 소리를 들을 때, 용서를 받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최종적으로 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기 때문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그 말씀이 내가 주의 말씀을 부르는 것을 이기기 때문에. 참 무진장 어려운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면 “치워라! 어디서 장난질이야! 심심하니까 한 번 불러보나? 치워라, 치워!” 하지만 진짜 주의 이름이, 주의 이름을 부르리라는 그 말씀이 내가 부르는 주의 이름을 행함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것을 꺾어버릴 때, 그것을 부끄러워할 때 우리는 주님으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내가 하는 모든 짓은 주님의 십자가를 가리는 짓밖에 안 된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아는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마음으로 믿는다고 하는 겁니다. 주님은 진짜 주님이고 나는 주고 아닙니다. 내 주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주님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 그것은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그 말씀 자체가 이미 우리를 장악하고 지배하고 지금 통제하고 관리하기에 그렇습니다. 끝으로 말씀드릴 것은 뭐냐 하면, 이 안개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가? 늘 부딪히게 합니다. 여기서 콱, 박고 저기서 탕, 받고. 회사 다니는 사람들이 회식하면서 노래방에 음식 차려놓고 술 마셔 가면서 노래 부를 때 그들은 지금 자기의 막장과 부딪힌 거예요.
고층 아파트와 부딪힌 거예요. 해답이 없어요. 해답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답을 얻는가? 해답을 찾는 그 자체가 자기 살고자 하는 짓이기에 그게 잘못이에요.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해답이 없게 만들고 헤매게 만들면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받는다, 이것은 똑똑한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애 같은 자에게만 나타나는데 네가 어린애가 아니라 어린애 되게 하시지요. “주여, 저 어린애같이 주님밖에 몰라요.”라고 말씀이 먼저 있고 그 말씀이 실효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가지고 어린애처럼 만드신 거예요.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고 사업 실패한 사람은 또 실패하고, 사람 믿고 의지하다가 또 낙심하고, 모든 것을 하면서 우리는 오직 어린애처럼 주님만 부르는 그런 사람으로 주께서 자기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철저하게 사용하실 때 그것이 바로 참된 마음의 할례,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있는 것이지 십자가를 우리가 알아서 꽂아놓고 그 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음껏 이용하시되 주의 이름만 늘 부를 수 있는, 오직 주 안에서만 사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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