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61강-아름다운 발(롬10;14-15)이근호131124

아빠와 함께 2013. 11. 24. 14:49

아릅다운 발(로마서 10: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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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11-24 13:30 
아름다운 발

2013년 11월 24일                        본문 말씀: 로마서 10:14-15

(10: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구원되고 아니되고 는 예수님의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미 예수님은 구원이 지상에서 성립되는 장치를 확정지어놓으셨습니다. 그것은 곧 ‘보내심→듣게 됨→믿게 됨→부르짖게 됨’이라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로마서 10:13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최종 현상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주의 이름을 부르는’ 현상이 마치 개인적인 각오와 결심에서 비롯된 것처럼 여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인간들이 미리 이해하고 인식하는 공식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즉 ‘보내심→듣게 됨→믿게 됨→부르짖게 됨’으로 구원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인간은 실제로 이 순서대로 밟아서 구원에 이르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바로 이점을 하나님은 저지하시려고 하는 겁니다. 그 방식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어떻게요? 거꾸로 결과적인 사실을 놓고 되묻는 방식으로 다가오시는 겁니다. 즉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하루 스케줄은 시작부터 끝까지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서 진행되는 일들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런 자들에 대해서 “어찌 부르리요?”라고 묻는 식으로 말씀은 다가섭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대꾸합니다. “뭐? 무슨 말이야? 왜 자꾸 나와 상관없는 얘기를 귀찮게 하는거야? 너나 많이 불러. 난 안 부를거야”라는 식으로 나옵니다.

즉 온 종일 관심사가 이미 자기 일로 꽉 차 있는데 왜 거기에다 대고 ‘주의 이름’을 불렀니 아니 불렀니 라는 되지 않는 것으로 파고 들어오느냐는 겁니다. 하루 일과는 순전히 자신의 일로 차 있기에 자신이 주인공이 아닌 일들이 차고 들어오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법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싫으면 말구!” 즉 하나님만이 주인공이 되는 자폐적인 순환고리를 증거하기 위해 가담된 여부를 가름하는 기준으로서 복음을 사용하시겠다는 말입니다. 세상살이의 주인공이 예수님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자리잡은 자들까지를 구원할 용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질문 형식으로 다가오시는 겁니다.

특히 이 ‘폐쇄적 순환고리’에는 ‘이’라고 표현된 어떤 분이 자리잡고 계십니다. 믿음이나 부름이나 들음이나 보내심이나 모두 이 ‘이’라고 지칭되는 그분에 의해서 진행된 결과입니다. 이 속에서는 오직 예수님만이 주인공이 되십니다. 예수님 이외의 모든 피조물은 그분이 친히 진행시켜 얻어진 결과에 의해서 출몰합니다.

즉 이 폐쇄적 순환고리에서 두 개의 서로 다른 성질이 출몰합니다. 하나는 성도요 다른 하나는 지옥 갈 자들입니다. 성도가 성도되는 자신의 운명이나 팔자를 자신이 수고해서 얻는 결과가 아닙니다. 마치 왕이 왕의 자리에서 왕노릇하는 것은 본인이 왕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남들이 왕이라고 간주해주어서입니다.

어느날 자신이 왕이라고 자처하게 되면 그는 독재자가 되고 동시에 백성의 저항을 받고 본래의 자리로 끌어당기게 됩니다. 성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라는 위상은 본인이 만든 것이 아니라 타인되시는 예수님이 조성해주신 위상입니다. 오늘 본문에 따라 보냄을 받은 자에 의해서 말씀을 듣고 그 들은 말씀을 믿게 되고 그 믿음에서 나온 변화로 인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 것, 이 모든 것이 새로운 자리, 성도라는 자리를 부여받은 결과입니다.

이 와중에서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잃지 않겠다고 애쓴 사람들은 이 순환고리에서 다 튕겨져 나갑니다. 기어이 이들은 지옥가야만 하는 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로마서 14:23에 보면, “믿지 아니하는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지옥갈 죄라 개인적인 결단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생산된 자들입니다.

기어이 천국 가서는 아니될 자들을 예수님이 주인공이 된 폐쇄적 순환고리로 소환해서 돌려버리고서는 “너는 결국 너 자신의 주인공됨을 조금도 포기할 의사가 없음”을 확인하고 난 뒤에 그 순환소리에서 튕겨져 나가게 하십니다. 그 방식이 바로 오늘 본문 14에 나오는 물음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떻게 부르리요”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에 보면,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이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아름다움’ 이나 ‘좋은 소식’이라는 개념은 예수님이 주인공이 된 순환구조 안에서나 이해될 말입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자신이 주인공으로 된 사람들에게 있어 아름답다든지 ‘좋은 소식’이라는 따로 챙기게 마련입니다.

이를 근원적으로 따지고 보면 자신이 곧 아름답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지를 발산하기 위해서 외부의 아름다움를 취득코자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술작품이요 거룩한 신상들입니다.

서기 726년에 지금의 터키에 수도를 둔 동방 로마 황제 레오 3세는 성상숭배를 놓고서 단호한 결정을 내립니다. 모든 성상들을 교회에서 철거시키고 파괴하도록 명령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서방 교회, 요즈음으로 말하면 천주교 교황인 그레고리 3세는 반대 조치를 취합니다. 즉 성상숭배가 신앙정진에 도움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신앙의 시작은 성상파괴나 성상숭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둘은 모두 자기 자신을 아름답게 미화하는 태도에 불과합니다. 신앙의 시작은 오직 말씀 곧 복음입니다. 구약 시편 40:6-7에 보면,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 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말씀 안에 누군가가 들어와 계십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과거의 기억을 기반으로 하여 미래의 메시아를 고대하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 아직까지 자신들의 가치를 고수했던 시절의 언약이었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신약은 그렇지 않습니다. 미래가 과거를 잠식하는 식입니다.

인간이 그 어떤 행위를 하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해낼 수 있는 일로 인하여 성도의 운명은 결정되는 겁니다. 이것이 곧 말씀 속에 어떤 분이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에스겔 37장보면,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해골만 잔뜩 쌓여있는 골까지로 데려가서 묻습니다. “이 뼈들이 어떻게 살겠는가?”

답변은 이러합니다. “말씀으로 삽니다.” 따라서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 우리는 뼈들로 도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만 말씀 속에서 주의 이름를 불러야 합니다. 더 이상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요 자신이 만들 자리가 아닌 성도라는 고귀한 자리에서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에 의해서 세상 모든 것이 진행됨을 한시로 놓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0장 14절에서 15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53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0:14-15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성경을 펼쳐보면 특징이 있어요. 상당히 일방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일방적인가?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라고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어떤 반응을 나타나게 하느냐 하면, “안 믿으면 되지 뭐.” 그런 자세로 평소에 일관하는 우리를 향하여 너희가 믿지도 않는 자를 어떻게 부를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여기 11절에는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되어 있고 13절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되어 있거든요.



주의 이름을 불러야 되는데 믿지도 않는 자를 어떻게 부를 것인가, 라고 했을 때 우리들의 24시간 하루 일상은 뭐냐 하면 “안 부르면 되지. 누가 답답한가?” 안 부르고 안 불러도 얼마든지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는 식으로 살도록 형식 지워진 것이 우리의 삶이거든요. 구태여 예수를 안 불러도 구태여 예수를 믿지 않더라도 우리의 하루 스케줄에 아무 지장이 없도록 우리가 우리를 다지고 굳히면서 살아왔습니다. ‘아 오늘도 예수 안 부르면 직장에 안 나갈 거야.’라는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 안 믿고 안 부르니 답답하지. 그치?”라는 토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미쳤나? 미쳤어? 전혀 아쉽지가 않은데. 사도바울 당신은 지금 우리가 전혀 관심 없는데 혼자 관심 있는 것으로 우리를 약 올리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네.” 사도바울은 “너희가 믿고 싶어도 부르고 싶어도 안 불러주면 못 부르지롱.” 하면 우리는 “우리는 전혀 안 답답해.”라는 대치구조로 이어져 있습니다. 평소에 우리 인생이 그런 식으로 길들여져 온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것으로 채워지는 24시간이지 거기에 성경말씀을 집어넣어야 내가 제대로 돌아간다는 것은 우리 머리에서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폐쇄적순환구조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기에 나와 있는 14절,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라는 네 가지의 단어, 보내심, 들으심, 믿으심, 부르심, 이 네 가지는 마치 강강술래 하듯이, 하나의 원환을 이루는 겁니다. 하나의 서클을 이루는 거예요. 손에 손잡고 강강술래 하듯이. 이렇게 원을 이루어버리면 자진해서 아무도 그 동그라미 안으로 뛰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 쪽 순서 같으면 보내심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보내신 사람이 말씀을 전할 때 그것을 들었고 그것을 들으니까 ‘아, 믿어야 되겠다.’ 해서 믿었고 이제 믿었으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리라, 하고 보내심이 우선이고 들으심이 그 다음이고 그 다음이 믿으심이고 그 다음이 부르심이고 마지막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으로 순서가 되거든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 순서를 반대로 뒤집어버려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부르리요’ 그 다음에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라고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방향과 순서를 뒤쪽으로 거꾸로 소급해서 언급해 들어가는 겁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내가 믿었어. 내 입술로 주를 불렀단 말이야.”라는 것이 우리 구원의 근거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너는 주의 이름을 불렀어? 안 불렀지. 나는 불렀어.”라고 구원의 시작점을 내가 주의 이름을 불렀고 믿는 사람인 당사자인 내가 불러서 내가 구원받았다는 식을 철폐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그렇게 돼버리면 이 구원이라는 것이 주님의 순환구조가 아니고 나의 순환구조로서 모방이 되어버리면 이것은 가짜입니다. 이것이 종교거든요. 이것이 교회 와서 종교생활 하는 것이거든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라는 것에 대한 정답을 얻기 위해서 교회 오는 겁니다. 그 질문자체가 이미 해답의 근처도 안 갔는데. 해답 줘봐야 그것은 자기가 만든 강강술래, 자기 즐거움에, 자기매력에 스스로 빠져가는 식입니다. 폐쇄적이지요. 정신병 비슷하다고 볼 수 있어요. 우리가 고백하고 우리가 외치는 것을 제일 끝에 둠으로 말미암아 끝에 일어난 그 결과가 우리의 결심과 결단과 선택의 결정이 아니고 그 결정을 따라가게 되면 그 원천은 다른 분에 의해서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것을 알려주면서 “어찌 부르리요.”라고 되묻는 식으로 하는 것은 “가짜는 좀 가줘. 미치겠다. 가라.” 안 믿으면서 믿는척하지 말고 좀 가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의 입장에서는 간단히 말해서 세상 모든 일은 인간과 하나님이 협상해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은 주님의 일방적인 결정에 의해서 그냥 진척될 뿐이라는 겁니다. 만약에 사람과 예수님, 또는 사람과 하나님이 동의를 했으면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끊어낸다는 태도는 보이지 않아요. “다들 와 봐라. 너희들 구원받고 싶지.” “구원받고 싶습니다.” “그래? 내가 이야기해 줄게. 보내심이 있었고 보내신 사람이 말씀을 전하면 그걸 듣고 네가 믿고 그 다음에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이 되는 거야.”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잖아요.



이것은 뭐냐, 하나님의 일에 우리의 협조를 구하는 태도이죠. 그런 태도를 주님은 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끊어져 나갈 사람을 끊어내는 거예요. 14절에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주의 이름을 불렀는데 분명히 내 솜씨와 내 종교성은 아닐 거야. ‘누가 나로 하여금 주의 이름을 부르게 했지?’ 어, 믿어야 되는구나. 믿는 자만이 부를 수가 있구나. 그러면 내가 부른다고 해서 믿음이 되는 것이 아니고 믿는 자이기에 결국 필연적으로 불러야 되는구나. ‘그러면 믿는 자는 어떻게 믿게 되지?’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누가 나에게 복음을 들려주게 하는 분이 먼저 앞에 선재되어 있고 그 분이 먼저 계셔서 우리로 하여금 믿음이 있다면 내 믿음은 나의 솜씨나 자랑 질이 아니라 먼저 우리에게 들을만한 것들을 제공한 분의 솜씨고 그 분의 공로로 내 믿음을 그분의 것으로 돌려야 되겠구나.”라는 것을 알게 하는 거예요.



설명하는 제가 더 어렵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어렵게 했어요. 알기 쉽게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초반부터 아예 작심을 하고 “가짜들 끊어낼 거야. 얼씬거리기만 해봐.”라는 조로 나온다니까요. 천국에 사람이 없어서 영업사원처럼 하나라도 더 팔아보려고 하는 식이 아니라 “어딜 얼쩡거려. 나가!” 하는 식으로 잘라내는 겁니다.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 했지요. 만약에 옆집 사람들이 노아방주 탔으면 노아방주 뜨지도 않는다고요. 노아방주에 여덟 식구만 타야 되거든요. 그런데 옆집 사람이 전도 듣고 오면 노아방주 뜨지도 않고 엔진 꺼버립니다. 방주가 안 떠요.



그런데 “에이 씨, 안타.” 하고 가버리면 드디어 홍수가 일어나고 방주가 떠버립니다. 사람 하나 아쉬운 것이 아니에요. 한 사람이 아쉬운 것이 아니고 탈자만 타야 돼요. 그 작업은 우리 쪽에서 행하면 하나의 연출이 되니까 안 되고 직접 주님이 나서서 그렇게 해야 돼요. 14절에 다시 보면, 여러 번 봅니다만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 어떤 분, “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믿는다고 하는 우리, 부른다고 하는 우리, 들었다고 하는 우리, 나의 운명에 내가 주인공이 되었다고 우기는데 하나님은 거기에 어떤 분을 집어넣어 버려요.



그리고 우리하고 경쟁시킵니다. “부르게 된 것이 너의 솜씨인가? 너의 명철한 이성적 판단인가? 이것저것 다 따져보고 믿는 것이 죽어서 좋겠다 싶어서 네가 결정한 것인가?” 그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파스칼이라는 사람이 지은 <팡세>에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여러분에게 이익이 되는 줄 압니까? 믿지 않다가 나중에 천국 오면 나중에 황당하고 낭패지만 믿지 않다가 천국이 없어도 ‘에이 씨’ 하고 한 마디 하면 끝나면 그만이니 이왕 손해 보지 않는 것 믿읍시다.” 그렇게 나와요.



그게 뭐예요, 그게! 장난치는 거예요, 뭐예요? 예수님이 영업사원입니까? 암웨이에서 물건 팝니까? 다단계 하고 있습니까, 지금? 그런 자를 잘라내요. 14절을 또 봅시다. 보면 자꾸 나오네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듣지도 못한 이, 어떤 분이거든요. 전파하는 자, 전파하는 어떤 인물이 없이 어찌 들으리요. 그 다음에 15절에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보내심을 받은 자와 우리가 믿어야 할 분과 동일인물인 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는 겁니다.



강강술래, 보내심, 들으심, 믿으심, 부르심, 이 모든 것이 하나의 폐쇄적인 순환구조, 스스로 돌아가는 순환구조를 만들 때 “나도 여기에 기여했습니다.”하고 끼어들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끼어들지 말고 “이 순환구조는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하는 자세와 태도를 가지고 “내가 안 만들었지만 주님이 만드신 것에 제가 합류되고 말았습니다. 그저 빨려들고 말았습니다.” 마치 욕조에 물이 빠질 때 소용돌이치면서 빠져나가잖아요. “주님의 그 구조에 우리가 말려들었습니다.”라는 고백으로 믿으라는 말입니다.



“이 구조는 나에게 이익이 되기에 나한테 이익이 되라고 내가 머리 짜내서 만든 구조가 아니고 주님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주님으로 마감되는, 모든 것을 주께서 알아서 하시는 일에 우리가 말려든 겁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 것도 우리의 솜씨가 아니고 그렇게 하게 만든 나의 운명”이라는 거예요. 아주 더 간단하게 말해 이렇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남이 만든 운명을 내 운명이라고 가져오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복음입니다.



교회 열심히 나오고 십일조하고 봉사하고 스펙 쌓아서 천당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구원을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뜨개질이나 그렇게 하라고 하세요. 실컷 뜨개질해서 털스웨터 입잖아요. 그러나 우리는 뜨개질을 하면 안돼요. 다 찢을 거야. 남이 만든 그 위치와 위상과 그 신분을 내가 만들지도 않았는데 주께서 다 만들어놓고 그냥 입히는 거예요. 그렇게 입혀 놓고 “잘 맞나 보자.” 하는 거지요. 자식들의 고역가운데 하나가 그겁니다. 부모가 기호에 맞지도 않고 몸에 잘 맞지도 않는 그 옷을 ‘고맙습니다.’하고 입어야 되는 자식의 고역을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프로이트는 말하기를 “여자가 뜨개질을 하는 것이 일종의 우울증이다.”라고 하거든요. 얼마나 심심했으면 오로라공주 보면서 그걸 하고 있겠습니까? 자기가 만들어놓고 일방적으로 입히면서 잘 맞는다는 거예요. 맞기는 뭐가 맞아요. 털실로 짠 옷 입어서 잘 맞아본 적이 없습니다. 뭔가 부풀은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해요. 정치사회에서 왕의 자리란 본인이 왕이라고 우기는 것은 잘라내야 됩니다. 왕의 자리란 남들이 왕이라고 해 줄때만 왕이 되는 거예요. 왕의 고역이 그겁니다. 왕이기에 전혀 자기가 왕이라고 생각하면 안돼요. 자기가 왕이라고 생각한 그 순간 그 왕은 쫓겨납니다.



그게 힘들어요. 사람은 자기 말고 남을 왕이라고 만들어놓고 그걸 즐기고 있어요. 지금 대통령의 고약이 그겁니다. 남이 대통령을 시켜놓았는데 대통령 되니까 대통령 그만두라고 데모를 하니 어쩌라고? 굉장히 곤란해져 버린 거예요. 왕이라는 이름은 남이 불러준 거예요. 내가 불러준다면 그것은 미친놈이에요. 남들이 왕이라고 해 줄때만 왕의 자리에 있어야 됩니다. 교인들이 목사로 간주할 때만 설교를 해야 돼요. 그런데 어느새 갑자기 본인이 ‘나는 목사답다.’라는 순간 그 목사는 이단되어버립니다.



그 때는 교인들이 대략난감입니다. ‘저게 미쳤나? 갑자기 왜 저래.’ 이게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사울이라는 사람이 “나는 왕 하기 싫어요. 나는 그냥 목동 할래요.” 할 때는 왕 하다가 왕을 좀 해보면서 습관화 되니까 자기가 애초부터 왕 같은 인간이라고 착각을 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다윗을 왕 세워서 투입하니까 그 때부터 다윗을 잡아 죽이는 것이 왕의 하루 일과가 되어버렸어요. 왕이 아닌 것이 왕처럼 행세할 때 이미 그것은 왕이 아니에요. 성도의 위치를 다시 말씀 드릴게요.



성도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성도 만들어 준거예요. 그런데 성도가 어느 날 성도하지도 못할 인간이 성도 짓 한다고 나설 때 이미 그 사람은 강강술래 그 순환구조에서 튕겨져 나온 사람이에요. 그래서 한 번 성령의 은사를 맛보고 타락한 사람은 두 번 다시 그 순환구조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구원받지를 못하는 겁니다. 성령을 맛보고 타락한 사람이 두 번 다시 구원 못 받는 이유가 개인의 윤리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그 순환구조 자체에 들어갔다가 뛰어나왔기 때문에 두 번 다시 그 순환구조에 뛰어들 수가 없는 거예요.



저의 이 말이 뭐냐 하면 어떤 인간도 개인적으로 예수 이름 불러서 구원 받는 식의 성도라는 위치를 제공하는 형식이나 원리는 창세전부터 지금까지 없습니다. 애초부터 없는 거예요. 내가 알아서 천국 가겠다는 것은 인간들이 자기순환구조에서 지어낸 하나의 결과물이지 정작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성도 만든 적이 없습니다. 성도 되었으니 바르게 살자? 미쳤어요? 이제는 십자가로 성도되었으니 십자가는 잊어버리고 부활의 새 생명으로 하자? 돌았어요? 그것은 평소에 자기가 성도되고 싶다는 자기 야망에 의한 판타지에요. 허망한 것들이고 자기가 자기소설의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그 사람은 절대 주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어요. 왜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기 이름을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고 있는 자기를 계속 믿고 있어야 돼요. 그 믿고 있는 것이 언제까지 계속 가는지 봅시다. 치매 걸리기 전까지입니다. 치매 걸리면 예수고 뭐고 기억나지 않고 전혀 몰라요. 죄라는 것은 바로 그 순환구조의 주인공에 대해서 인정치 않는 것, 내가 주인공 되어야지 나 말고 또 다른 누가 내 운명을 결정하는 주인공이 된다는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그걸 로마서에는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거예요. 죄지어놓고 안 믿는 것이 죄가 아니고……, 오늘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어요. 죄를 지어놓고 안 믿는 죄를 더 추가하는 것이 아니고 죄가 없다고 치더라도 믿지 않게 함으로 계속해서 죄인 되게 만드시는 그것이 하나님의 순환구조입니다. 이것은 내가 만든 순환구조와 주님이 만든 순환구조의 비교와 경쟁이지 얼마나 우리가 나쁜 짓 하느냐의 그 경쟁과 비교가 아니에요. 옛날 언약, 구약은 항상 과거에서 미래로 지향합니다. 미래에 메시아가 올 것이다, 이렇게 미래를 지향해요.



미래를 지향할 때는 그 주인공이 나예요. “지금은 죄를 지었지만 언젠가는 이 죄를 용서하실 메시아가 오실 것이다. 그 때 이스라엘을 다윗의 나라로 회복하시고 왕 같은 제사장 나라 천국백성을 만들 것이다. 천국은 바로 우리가 가야할 나라다.”라고 이야기했거든요. 마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천국의 본 백성이라고 우겼던 자들이 바로 너희들이다.” 백부장 이야기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천국의 본 백성은 누구?” “우리!” “누구라고?” “유대인, 바리새인, 사두개인인 바로 우리”라고 우겼다는 말이지요.



이 사람들은 과거에서 미래로, 자꾸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고 미래를 지향하면서 주장한 거예요. 그러나 그들은 자기 자신이 어떻게 대비해야 되고 준비해야 된다는 이것이 신앙생활의 주요점이 된 겁니다. “주여,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하는 것이 주요점이 된 거예요. 그런데 새 언약에 의하면 새 언약은 현재에서 과거로, 뒤엣것이 앞에 것을 잠식하면서 잡아먹어요. 잡아먹게 되면 “너희들이 그렇게 멸망하고 죄를 지어야 될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되는 겁니다.



주인공이 달라져요. 과거에서는 주인공이 나입니다. 내가 어떻게 구원받을까, 하다가 신약에 와서 주인공은 구원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주인공이 누구냐? 예수님이 주인공이 되어서 이 주인공을 주인공답게 드러내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엘리야 예레미야 모세, 앞에 있는 인물들을 등장시킨 겁니다. 이것은 어렵지 않잖아요. 신약도 마찬가지에요. 신약도 구약에 있던 것을 한꺼번에 그대로 우리한테 반복시켜 버립니다. 우리의 일생을 통해서. 우리는 맨날 내가 주인공이 돼요. “하나님, 오늘도 교회 왔습니다. 저 구원 받은 사람 맞지요? 저 복주세요.”



자기 결정에 대해서 자기가 좋은 쪽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시 한 번 말씀에 들어가게 되면 “아, 내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잖아.” 우리는 결과물이거든요. 주인공이 한 그 일의 결과물에 불과한 겁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내가 믿게 된 것도, 내가 말씀을 듣게 된 것도, 이 모든 것이 결과물이 되는 거예요. 심지어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보내심을 받았다고 우기면 안돼요. 보내신 분을 소개함으로 말미암아 자동적으로 보냄을 받은 것조차도 보내신 그분의 하나의 지시에 따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엮어서, 그 강강술래의 순환구조에 엮어서 언급을 해줘야 돼요.



그 엮은 것을 빠뜨리면 그것은 믿는 사람 아니에요.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저 믿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믿는 것이 없다는 노골적인 태도가 되어버려요. 그래서 여기 보면 15절에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어떤 사람이 지금 참 바쁜데 “아름다운 좋은 소식(복음)이 있습니다.” 하면 “너나 믿으라.” 하지요. 왜? 나의 하루 24시간 일과 가운데서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 이것을 내 쪽에서 만들지도 않았고 그것을 허용하지도 않았어요.



내가 주인공 되어서 내가 원하는 대로 따라가는 스케줄을 내가 짰는데 거기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남이 원하는 것이 그 속에 끼어드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동물적인 본능으로 거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너나 아름답지 나한테는 전혀 아름답지 않”아요. 그것을 주께서 아시면서 그 이야기를 해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그것을 아시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이유는 뭐냐, “네가 만든 강강술래, 네가 만든 순환구조의 아름다움과 네 속에 끼어든 그 순환구조의 아름다움의 그 의미가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네가 평소에 생각하는 좋은 소식, 수능치고 난 뒤에 좋은 소식이라는 것이 뭐겠습니까? 높은 점수 나오는 게 아닙니까? 원서 내놓고 좋은 소식, 회사입사시험치고서 좋은 소식, 모든 소식의 원인제공은 본인이 해 놓고 본인의 뜻대로 되면 그것이 좋은 소식이잖아요. 김장철에 배추 싸게 사고 젓갈 좋은 것 사면 세상에 그것은 좋은 소식이고 기쁜 소식이라. 바로 그걸 꺾어버리는 거예요. “그건 기쁜 소식이 아니야. 그건 네가 만든 순환구조, 네가 중심이 된 폐쇄된 구조 안에서의 아름답고 기쁜 구조지만 전혀 네 스케줄에 끼어들지 않는 아름답고 기쁜 소식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말씀으로 이 싸움을 함으로 말미암아 너는 어디서 튕겨져 나온 존재일 뿐이지 그 주님의 일방적으로 만든 순환구조의 함유되고 포함된 결과물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 복음은 사람들보고 믿으라고 준 게 아니고 “오지 않을 사람은 오지 마. 내가 용납지 않을 거야.”라는 단호한 하나님의 의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싫으면 말고.” 이런 식입니다.



중세 AD 726년에 로마가 둘로 쪼개져요. 동과 서로 쪼개지는데 동쪽은 유럽 쪽이고 서쪽은 아시아 쪽 이렇게 둘로 쪼개집니다. 지금의 그리스 터키 지역을 아우르는 지역이 동로마였습니다. 그 동로마의 레오3세라는 황제가 어떤 선언을 했어요. 모든 성상숭배를 금한다는 선언입니다. 성상숭배라는 것은 예수 모습을 한 동상이나 그림이나 촛대 같은 것들을 다, 제단자체까지 다 쓸어버리고 한 거예요. 성경 출애굽기 보면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했는데 하나님을 섬긴다는 교회가 왜 우상을 섬기는가, 해서 레오 3세가 성상숭배금지령을 내린 거예요. 그래서 경찰들이 각 성당과 가정에서 우상을 다 부쉈습니다. 요새로 치면 명품모양새를 한 가짜들 부수는 것 같이 다 부순 겁니다.



그것을 레오 3세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본 거예요. 거기에 비해서 지금의 천주교죠, 로마 교황 그레고리 3세는 그걸 반대로 했어요. “그것은 전혀 우상숭배가 아니다. 이유가 뭐냐? 물질이 그렇게 추악하고 더러운 것이라면 하나님이 육신이 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더럽고 추한 물질을 취하면서까지 기어이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애쓴 것인데 사람을 하나라도 더 구하겠다는 이 좋은 목적이라면 그것이 어떤 방식이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 되지 절대로 하나님께 누를 끼치는 것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성상을 확대시켰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천주교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천주교는 성당 들어가기 전에 막 바쁘게 꽂아버리죠(성호를 긋는 것). 그리고 성당 다니는 사람들 안방에 보면 텔레비전 옆에 촛불 놓고 마리아상 놓고 그 앞에 성경 펼쳐놓고 묵주도 놓았죠. 그런 것들이 물질을 우상화하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의 신심을 자극시켜서 다시 한 번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기 위한 보조수단일뿐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뭐가 문제인가? 둘 다 문제입니다. 왜냐, 믿어야 할 것을 무엇을 믿었는가?



본문 15절에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고 했거든요. 사람들이 발이 젊을 때나 예쁘지 늙어도 예쁘겠습니까? 발이 아름답다는 거예요. 발이 아름다워지는 조건은 좋은 소식, 말씀을 전하는데 있습니다. 말씀을 전해서 말씀 자체의 능력 속에 어떤 분이 계셔요. 그분자체가 말씀을 휘감아 돌아서 수동적인 영향력을 줄때는 그 분이 자기만의 폐쇄적인 순환구조를 만들어서 그 속에 부름도 있고 믿음도 있고 다 발생하도록 그렇게 하거든요. 거기에 대해서 성도라는 그 주체의 자리, 성도라는 주체의 자리도 거기서 생산되고 있습니다. 말씀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상을 섬긴다는 것, 또는 반대로 성상을 부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상 부순다고 구원받습니까? 처음부터 섬기든 부수든 간에 그 사람들은 무엇을 아름답게 보는가? 자기 자신을 아름답게 간주하고 자기 자신의 행동을 아름다움에 포함시키려는 의도가 강렬해요. 아름다운 것은 복음이 아름다운 거예요. 복음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안에 누가 들어 있는가? 어떤 분이 계셔요. 시편 40편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미 구약부터도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어요.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이것은 요즘사람들이 들으면 기절초풍할 일이지요. 제사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이것에 대해서는 기겁하지 않는데 진짜 기겁할 것은 예물, 다른 말로 번역하면 현찰, “제사와 현찰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더 잘 이해되는 표현으로, “하나님은 제사와 현찰 5만 원짜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심방가면 심방예배, 추도예배, 결혼예배, 이런 예배를 원치 아니하신다는 거예요. 이단 아녜요? 그게 왜 필요치 않는가? 그 이유가 7절에 나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이리 오너라! 안동 권씨, 양반! 이리 오너라, 하는 말은 이리 오라는 말이 아니고 실은 누가 왔어요? 본인이 온 거예요.



내가 여기 왔다는 말을……, 양반도 참 웃기는 인간이라. 양반이 나쁜 것은 자기가 양반이면서도 양반 아닌 척을 한다는 그것이 더 나빠요. 양반이면서도 스스로 양반임을 부정하는 척을 하는 그것이 얼마나 얄미워요. 이리 오너라, 주께서 제사와 예물을 드리라고 한 그 기준이 뭐냐, 그게 율법이거든요. 제사는 이렇게, 예물은 이렇게, 그 매뉴얼이 나와요. 그 양식대로 율법이 왔다는 말이지요. 양식만 채우면 하나님이 기뻐한다고 그 당시에 생각한 거예요. 그 당시나 오늘날 우리나.



이 말씀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그 말씀을 지키면 되지 이게 바리새인이나 오늘날 한국교회 교인이나 똑같아요. 내가 여기 왔나이다, 하는 것이 충격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양식을 채워 넣는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볼펜 들고 사인하는 본인 자신인거예요. 예배당에 온 것이 예수님이 온 것이 아니고 본인이 온 거잖아요. 본인이 예배당에 왔으면 본인이 은혜 받고 본인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주님이 보냈다는 생각을 해야 되는데. 예배시간에 늦었다는 것은 주님께서 일부러 늦게 보내서 늦게 오신 거예요.



지금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지금 예배참석 못한 것은 주께서 참석 못하게 만들어서 못한 거예요. 김장한다고. 항상 성도의 특징은 어떤 행동을 하든지 여기 내가 한다는 것이 아니고 보내심을 받아서 하기에 그 성도의 자리가 아름답고 아름다고 아름다운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자기의 순환구조, 자기의 강강술래에서 따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명품 같은 것들, 세상적인 것들, 내가 아름다움이 되고 싶은 것을 자꾸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만들어내는 사람들보다 더 얄미운 사람들이 누구냐, 현대 예술가들입니다.



그들은 흉측하고 기괴하고 흉물스러운 것을 새로운 예술의 경지라고 드러냅니다. 쌀밥 먹고 싶은 것이 한국인 대다수의 소망이었다면 이제 부자가 되고 나서는 자기도 부자가 되었답시고 일부로 보리밥집 찾아가서 먹어요. 그래서 인간이 만든 아름다움은 그것이 진짜 아름답든 아니면 기괴하고 흉물스런 것이든 간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자기가 여기 있다는 자기과시의결과물로 본인이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자기의 운명, 자기의 팔자, 자기의 주체의 자리, 이것은 본인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이것은 전혀 주님의 아름다운 복음소식 앞에서 아름다움이 아니에요.



또 일부러 중들 마냥 머리 깎는다든지 또 예수 폼 좀 낸다고 허름하게 차림새 하는 것? 예수님이 머리 깎았습니까? 예수님께서 중 옷 입었습니까? 예수님께서 로만칼라 차림 했고 유니폼 입었습니까? 그냥 보통사람들 속에 섞였어요. 진짜 저분이 메시아인가 봐도 모를 정도로 보통사람들 속에 섞인 거예요. 중들이나 신부들처럼 튀면 안돼요. 어떤 사람은 일부러 고난 받는 종 티낸다고 허름하게 하는데……, 교회 올 때 슬리퍼 질질 끌고 들어와서 자기가 복음 안에서 자유인이라도 되는 양 자기 맘대로 행동하는데 그것은 스스로 고상하다고 여기는 레벨의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는 거예요.



그냥 사시라니까요? 유별나게 굴지 말고 그냥 살면 되는데. 그 모든 아름다움, 주님께서는 그것을 해골로 봅니다. 왜 해골로 보는가? 에스겔 3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어떤 장소에 데려갑니다. 그 장소에 가니 공동묘지, 그것도 옛날 공동묘지입니다. 이슬방울 하나도 없이 바짝 말라붙어서 먼지만 풀풀 날리는 해골더미 속에 갑니다. 주께서 묻습니다. “이것이 살겠느냐?” 인간의 시간형식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주님의 시간은 미래에서 과거를 잠식하고 덮쳐버리지요.



질문자체가 이해가 안 되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 뼈들이 살겠느냐?” 그 과정을 에스겔이 알 리가 없지요. 에스겔은 과거에서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시간밖에 없으니까, 기억된 것을 가지고 미래를 구상하니까, 비전과 꿈을 가지니까. 하나님께서는 “비전? 꿈? 꿈같은 소리 하고 있네.” 하고 다 무효화시켜버립니다. “이 뼈들이 살겠느냐?” 에스겔은 주님께서 하시는 소리를 듣고 짐작합니다. ‘아, 무슨 조치가 이미 내려졌구나.’ 결정된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주께서 나를 데려왔구나. “주께서 하실 겁니다. 말씀이 임하면.”



여기서 말씀이 나옵니다. 말씀이 임하매 해골이 결국은 사람이 되었어요. 결국 뭐냐 하면, 말씀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뭘 꾸며도 그냥 바짝 마른 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 죽음을 경유하게 하는 것,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폐쇄구조인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뼈의 가루로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손으로 터치하게 만들고 마음으로 터치하게 만드는 겁니다. 터치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래서 살아날 때 거기서 더 이상 ‘나를 위하여’가 없고 이제는 주를 위한 관심사, 주께서 하신 모든 것에 관심을 두는 그 자리, 새롭게 만든 주체의 자리, 나의 자리, 자아의 자리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어져 나온 주체의 자리가 성도의 자리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아름답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쁜 소식이에요. 나에서 내가 꺼져버렸다는 것, 나에서 나의 전등이 꺼져버렸다는 사실이 기쁜 소식이에요. 빛의 나라, 빛의 신부, 아름다운 하늘나라 신부, 그 모든 빛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고 외부에서 만든 거예요. 우리는 그냥 주께서 뜨개질 한 옷을 맞든 안 맞든 입었을 뿐인데 입는 순간 그 동안 구시렁구시렁 거리던 우리는 갑자기 해골이 되고 말았어요. 그런 소리 할 입장도 안 되고 자격도 없는 존재로 돌변하고 말았습니다. 완벽하고 철저한 주님의 순환구조, 모든 인간은 그 순환구조에 들어갔다가 나와야 돼요.



들어갔다가 “너는 안 맞아.” 하고 토해내치는 사람들은 지옥가고 그 순환구조에 갇혀서 계속 돌아갈 때 이미 천국은 개시되었습니다. 비로소 내가 스스로 조작해내는 그 아름다운 것, 멋진 것, “이것은 예수님의 아름다운 성상이고 아름다운 그림이고 이것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아름다운 성자의 모습이고…….” 이런 것들, 거울 보면서 스스로 ‘나는 성도가 맞다.’하는 모든 이미지들은 자기가 만든 환상(판타지)에 불과하고 아무 의미가 없어요.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그 그림이나 아름다움이 아니라 내 운명과 팔자는 내가 안 만들어도 된다는 데서 오는 환희와 고마운 마음.



주께서 우리를 성도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소급해서 우리로 하여금 고난 가운데, 스스로 자기에 대해 실망하는 사태를 유발시키는 겁니다. 교독문에서도 봤지만 우리가 고난 받기 전에는 몰랐는데 고난 받은 후에는 말씀이 내 이익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서 내가 여기 있게 된 것, 나보다 먼저 있다는 것, “내가 여기 왔나이다.” 하는 그 말씀 앞에 우리는 “주께서 먼저 있기에 그 다음에 우리가 여기 있게 되었습니다.” 하는 요한복음 1장, “말씀이 있기에 그 말씀 따라 제가 생명을 얻었습니다.”하는 그 고백, 그것이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을 기쁘게 하는 천국의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그냥 놔두면 나의 순환구조 안에서 자기도취에 빠진, 그래서 자기만 우상시하는 존재인데 주께서 기쁜 소식 전해서 보냄 받은 자 되게 하시고 말씀 전하는 자 되게 하시고 믿는 자 되게 하시고 부르시는 자 되게 하신 이 모든 공적이, 모든 근거가 오늘도 우리한테 없음을 믿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